전통공예가, 조선 장인의 삶과 역할
전통시대의 공예가, 장인(匠人) 장인의 명칭은 다양하다. 공장(工匠), 장인(匠人), 장공인(匠工人), 성녕바치, 장인바치, 쟁이 등이 그것이다. 이만영(李晩永)이 1798년(정조 22)에 엮은 『재물보(才物譜)』에의하면 ‘공(工)’은 마음을 공교하게 하고 손을 수고롭게 하여 기물을 만드는 사람이며, ‘장(匠)’은 백공(百工)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장인은 최고의 솜씨를 지니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조선시대 장인의 신분은 어떠했을까? 장인은 양인(良人) 공천(公賤) 사천(私賤)이었다가 점차 양인 중심으로 바뀌었다. 장인은 출신의 양천을 막론하고 가장 우수한 공장들은 벼슬로서 잡직체아가 됨으로써 관청에 소속되었으며 관료체제로 편제되었다. 특히 조선은 장인들에 대한 법적 제도를 마련하였다. 성종 때 제정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되어 있고, 이후 영조 때의 『속대전(續大典)』, 정조 때의 『대전통편(大典通編)』, 고종 때의 『대전회통(大典會通)』까지 이어져 한말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조선의 법적 제도적 토대 위에 광복 이후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전통 장인에 대한 보호는 무형문화재로 법적 제도화되었고, 2015년 이후에는 무형문화유산법으로 분법화되면서 무형문화재의 전승과 진흥을 위해 유네스코의 체제로 확장 정비되는 추세다.
조선의 국가무형문화재, 경공장(京工匠) 근대기 이전 전통공예가는 조선시대 장인이었다. 이들은관청에 소속된 관장(官匠)과 개인적으로 작업하는 사장(私匠)으로 나뉘었다. 관장은 다시 서울의 관아에 소속된 경공장(京工匠)과 지방의 군현에 소속된 외공장(外工匠)으로구별하였다. 지금과 비교하면 경공장은 국가무형문화재,외공장은 지방무형문화재에 해당된다. 조선시대 서울과 지방의 장인들은 국가나 왕실과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제작 공급해야 했기 때문인지 그들의 명단(匠籍)은 경공장은 본조와 본사에, 외공장은 본도와 본읍에 등록하여 철저하게 관리하였다. 이 또한 오늘날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는 문화재청에서, 시·도무형문화재는각 시·도에서 관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경공장들은 국가에 필요한 물품을 제작하기 위해 3교대로 징발되었고, 의무 복무를 마치면 자유로이 개인적인영업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다만 개인 영업에 대해서는 국가에 장세(匠稅)를 따로 물어야 하였다. 조선시대 서울의장인은 공조나 상의원 등 29개 관사에 총 129종 ,2833명이소속되어 국역(國役)을 졌다. 공조에 신원이 등록된 공장들은 1년의 일정 기간 관청에 나와서 일하는 의무가 부과되었다. 궁궐의 건축가와 왕릉 석물의 조각가 건축이나 조각 등 규모가 큰 조형물의 경우 현재의 국토교통부에 해당되는 공조와 그 산하의 선공감(船工監)에 소속되었다. 특히 우리의 전통 궁궐이나 사찰은 목조로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짓는 일이며, 이에는 많은 장인이 동원되어협업으로 제작하곤 하였다. 이때 개별 목조건물은 목수의역할이지만 그것을 설계하고 완공 전체를 책임지는 이는목수도변수 혹은 대목장으로서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와 더불어 건물은 초석을 쌓는 석수, 미장일을 하는 이장(泥匠), 기와를 덮는 개와장이나 번와장,창호를 만들어 세우는 소목장 등이 그들이다. 한편 조선을 다스린 국왕과 왕후의 영원한 보처인 조선 왕릉 40기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왕릉에는 정자각 등 건물이 있으나 조성 당시의 원형을가진 것은 석물조각이다. 이러한 석물을 조각한 장인, 석수(石匠)가 이것을 주관하였다. 예컨대 18세기 영조 대에 활약한 최천약(崔天若)과 함께 활동한 석수 장인들이 있다.최천약은 영조의 후원을 받아 1713년 어보, 의약용 침구동인(鍼灸銅人) 및 천문기기도 제작하였다. 그와 함께 활동한 석수 김천석(金千碩)이나 박필심(朴弼心) 등은 1732년인조 장릉을 현재의 파주로 천봉할 때부터 이후 온릉이나의소세손묘, 정성왕후 홍릉, 인원왕후 명릉 등을 조성하는데 기여하였다. 정조 때에는 별간역 정우태(丁遇泰)가 새로운 양식을주도하였다. 이 때문에 정조가 주도한 사도세자의 현륭원(현재의 융릉) 조각은 인조 장릉의 것을 모방하여 8각 장명등을 조성하였다. 복식과 관모를 제작하는 상의원 장인 왕실공예품은 상의원, 제용감(濟用監), 내수사(內需司), 내자시(內資寺), 내섬시(內贍寺) 등에 소속된 능라장, 침선장, 방직장, 염색장, 매듭장, 다회장, 금장, 은장, 금박장, 두면장, 흑립장, 양태장, 총모자장, 망건장, 나전장 등의 장인이 담당하였다. 이곳 장인들은 왕이나 왕비가 입을 복식이나 관모, 그 밖에 왕실에서 사용할 정교한 각종 공예품을제작하였다.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에서 선비들은 의관 정제를목숨처럼 중시하였다. 그 결과 조선에서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갓을 비롯한 각종 관모를 애호하였고, 각종 모자를 제작하는 다종다양한 장인들이 존재하였다. 조선 초기 『경국대전』에는 상의원에 초립장(6명) 유립장(2명) 사모장(4명) 양태장(2명) 망건장(4명) 모자장(2명)이,공조에 초립장(29명) 사모장(30명) 망건장(31명) 모자장(6명) 등 7종 116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 의궤에서 이러한 장인들의 이름이 확인되어 더 이상 조선의 장인은 익명의 예술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군기시의 무기 장인과 교서관의 인쇄 장인 무기 제작 장인의 경우 현재의 국방부 소속인 군기시(軍器寺)에 소속되었다. 활을 만드는 궁장(弓匠), 화살을 만드는시장(矢匠), 갑옷과 투구를 만드는 갑주장(甲冑匠) 등의 장인은 국가를 수호할 각종 무기와 병장기 등을 제작하였다.무엇보다도 조선의 활은 물소뿔과 쇠심줄 등 각종 재료를사용하여 제작하는 각궁(角弓)으로서 세계 최고의 강궁(强弓)으로 유명하다. 한편 조선의 종이와 인쇄술은 세계적 수준의 장인에의해 만들어졌다. 잘 알려진 대로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통해 한지는 천년 세월을 견딘다 하여 지천년(紙千年)의 상징이 되고 있다. 이러한 종이는 지장 80명이 속한 조지서(造紙署)에서 조공용이나 국가용을 제작하였다. 조선에서는 현재의 문화체육관광부에 해당되는 교서관(校書館)에 여러 장인을 소속시켜 계미자와 갑인자 등활자를 제작하여 책을 발간하였다. 이를 위해 나무에 글씨를 새기는 각자장, 금속으로 글자를 만드는 활자장, 활자를고르게 펴는 균자장, 책으로 엮는 장책장, 책판에 대고 펴내는 인출장, 족제비털 등으로 붓을 만드는 필공, 송진을태워 얻은 그을음으로 먹을 만든 먹장 등 다종다양한 장인이 활동하였다. 이들 장인들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조선왕실의궤』 등 많은 서책을 간행하였으며,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각종 그릇을 만드는 여러 장인 조선 왕실의 그릇을 만드는 장인은 여러 관청에 소속되어있었다. 왕실의 제기나 겨울 그릇은 금색을 띠는 유기였다.유기장은 구리 78%와 주석 22%를 합금하여 두드려(鍛造)제작하는 함경도 납청의 방짜기술과 본기로 주물을 뜨는(鑄造) 경기도 안성의 주조기술로 구분되었다. 조선은 백자의 나라라 불린다. 백자를 만들기 위해 조선 왕실의 음식을 담당한 사옹원(司饔院)의 분원에는 사기장 380명을 소속시켜 왕실에 진상할 백자를 만들었다. 옹기장이 흙을 구워 만든 옹기는 살아 숨 쉬는 그릇으로 유명하다. 지방에서 나고 자라는 특산 재료를 사용하여 생활에필요한 물품을 제작하는 장인들이 외공장이다. 외공장은27종에 총 인원은 대략 3,450명이었다. 이들은 나고 자라는 지방에 뿌리를 두고 활동하는 대장장이나 옹기장처럼전업적인 수공업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농사를 짓다가 필요할 때마다 작업을 하였다. 나무를 깎아 제기를 만드는 목기장이 그러하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발견되는 짚풀을 사용하여 자리를 짜는 석장(席匠)이나 발을 짜는 염장(簾匠)등도 마찬가지였다. 장인에 대한 국가의 관리와 관심이 필요하다 조선의 장인(匠人). 그들은 신분이 높지 않았고 많이 배우지도 못했다. 그들은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서 집단적으로협업했기 때문에 그들을 ‘익명의 예술가’라 부르곤 했다.하지만 조선 후기 국가적 건물이나 기념비적 왕릉 석물 등에 참여한 장인은 왕실의 행사 전말을 기록한 『조선왕실의궤』 속에서 그들이 누구였는지,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어떻게 활동하였는지를 찾을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앞으로 이러한 의궤 속 장인의 삶과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장인에 대한 국가의 관리와 관심은 21세기 국가무형문화재 장인에 대한 국가의 역할을 파악하는 일이자 그들을영원히 기억하는 방법이 될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 글. 장경희. 한서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