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과회통님의 글을 기본으로 정리했습니다.
http://cafe.naver.com/antikimnamsoo.cafe
• 간단히 정리한 김남수
김남수(본명, 김용남 다른 이름으로 금목남수 김목용남)는 일제강점기에 징병을 피하고저 면사무소 후생담당을 하며 청년들 강제징용과 위안부 모집원으로 일한 친일행적으로 침사 면허증을 획득
(구사 면허는 없이 침사 면허만 있으나 이 침사 면허조차 확실하지 않음)
조선시대 일제 해방 후
의사(한의사) - 침사 구사 - 한의사
한의사는 의생으로 전락
침사 구사가 생긴 배경
• 일제 강점기에 민족문화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민족의학말살 시도
․ 한의학과 한의사지위를 격하시키고자 침사, 구사 제도 탄생
- 일본에서 건너온 새로운 직종인 침사, 구사
- 강점기 초중기 일본인들에게만 자격이 주어짐
(이는 환자가 일본인 침사 구사에게만 치료받게 하려는 정책)
- 후반에 경찰서장의 추천을 받은 친일파 251명에게 침사, 구사 자격증 주어짐
(해방 후 중국, 북한 등에서는 친일파로 모두 처단함)
․ 침사, 구사제도 자격요건
- 학식이나 의술경력에 대한 조항 없음
(단지 소행불량 여부, 형벌여부, 업무상 부정여부, 기술 등을 고려하여 경찰관서에서 면허를 주었는데 친일성향이 아니면 획득하기 어려움) )
다시 말해 침사 구사는 일제 강점기 치욕적인 잔재로 친일 김남수(김용남)는 대한민국에 사죄하고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함
• 일제 강점기 격하된 의생들의 생활
․ 일제의 민족탄압정책에 따라 대한제국의사들은 의생으로 격하되어 주로 시골, 지방에서 첩약과 침뜸으로 서민들을 돌봄(그 수가 격감했음에도 6000여명에 달함)
• 해방 후 한의사제도 부활
일제치하 잔재를 없애고저 침사 구사제도 폐지, 한의사제도 부활
(중국, 북한에서는 친일파인 침사 구사 전부 숙청)
돌팔이와 침사 구사의 빈번한 의료사고(사망)로 한의사제도의 필요성 인식
다시 부활한 한의사제도는 빼앗긴 주권을 되찾은 것입니다.
민족의학이 일제탄압에도 꿋꿋이 버티며 지켜온 것입니다.
침사 구사제도는 벌써 없어져야 했을 치욕적인 일제치하 잔재인 것입니다.
친일매국노에게 국민건강을 맡기실 겁니까?
독도를 일본에 바치겠습니까?
• 세계의 침사, 구사제도와 한국의 한의사제도
․ 대한민국의 한의사제도를 다른 나라의 모든 침사, 구사가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6년의 체계적인 교육과정이 확립된 나라는 대한민국 뿐입니다.)
․ 이웃 일본 침사, 구사들 사이에서는 대한민국 한의사의 침술이 과히 세계 최고라고 할 정도입니다.
(현재 일본 침사, 구사의 입지는 좁아지며 치료면에서의 역할도 작아지고 있습니다.)
친일 매국노 김남수는 스스로 역사의 반역자로 심판대에 올라서려 하고 있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오를 접어두고서라도 대한민국과 국민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침시술만으로 봉사활동을 하면서 생애를 마쳐야 할 것입니다.
친일 김남수(김용남)의 대한민국 반역, 사기행각
70년간 오로지 침 뜸 시술을 했다?
일제 치하 면사무소 후생담당으로 청년징용과 위안부착출의 친일 행적으로 침사자격을 받아 특혜를 누리고 해방 후 용주골에서 불법으로 약국운영하며 엄청난 부를 축적, 고위직과 국회의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지금도 역사를 모르고 정신을 못차리는 일부 국회의원(김춘진의원-치과의사출신- 등),
기자, 피디, 정부 고위직들이 친일 김용남을 옹호하고 있다.
스스로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며 내세우는 화상침이 과연 정말 최초인가?
화상치료에 대한 한방시술은 수천년 전부터 해오던 시술이다. 진피층이 파괴가 안 된 상태의 침시술 효과로 한의사라면 누구라도 화상치료를 침으로 할 수 있다. 현재 주름이나 흉터시술에 많이 응용되고 있다.
한의사는 침구술을 하지 않는다?
친일 김용남은 본인의 아버지가 한의사(이 역시 확인할 수 없음)이며 아버지에게 한의학을 배우고 침구술을 배웠다고 주장하면서 한의사는 침놓을 줄도 모르고 한약으로 돈만 밝힌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떠벌리고 있다.
무극보양뜸을 본인이 창안했다?
수십 년의 경험으로 본인이 창안했다고 사기치고 있다. 무극보양뜸은 친일 김남수가 개발한 것이 아니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값싸게 자국보건관리를 위해 국민뜸 혹은 보건뜸, 건강뜸을 보급하였다. 족삼리, 곡지, 견정 등의 혈자리에 직구하는 방법으로 친일 김남수가 2000년대 오면서 이름만 무극보양뜸으로 바꿔 마치 본인이 창안한 것처럼 사기치고 있는 것이다. 친일 김남수 책에서도 90년대 말까지는 보건뜸이라고 칭하고 있다. 친일의 끈을 차마 잘라버릴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뜸사랑 봉사? 탈세 의혹?
하루 50명씩 1회 침시술로 5만원을 전액 현금으로 받고 있으며 교육생, 제자라는 명목 하에 돌팔이 양성교육으로 수백만원의 교육비를 받고 있다. 그러나 수익에 대한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는다. 수개월의 교육을 마친 후 뜸사랑 봉사를 내걸고 일반인 상대로 무자비한 실습을 하고 있다. 김남수 제자라 떠벌리며 전국에 자격도 없는 수많은 돌팔이들이 침 뜸 시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봉사라도 한의사가 아닌 무자격 돌팔이가 침 뜸 시술을 하는 것은 의료법 위반으로 중죄에 속한다.
이 뜸사랑 회원인 무자격 돌팔이의 계속되는 의료사고가 속출하고 있으며 심지어 성추행 사건까지 드러나고 있는 아주 심각한 현실이다.
침사 구사제도는 벌써 없어져야 했을 치욕적인 일제치하 잔재입니다.
친일 매국노 김남수는 스스로 역사의 반역자로 심판대에 올라서려 하고 있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오를 접어두고서라도 대한민국과 국민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침시술만으로 봉사활동을 하면서 생애를 마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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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김남수(김용남)의 실체
• 김남수 생애
無極保養뜸을 통해 본 灸堂 김남수의 의학사상
뜸사랑 침뜸의학 교수 전상희
1. 열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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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과 생애
제1기-고향 그리고 가족
선생은 한일합방이 5년 정도 지난 1915년 5월 12일 전라남도 광산군 안청리에서 부친 김해김씨 문경공파(文敬公派) 7세손인 김서중(金瑞中)과 모친 최임곡(崔林谷)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나셨다. 태어나서 얼마 후 이웃 마을인 장성군 남면 평산리로 옮겨가 성장기를 보냈다. 문경공파의 족보에는 용남(鎔南)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와 있고 남수(南洙)는 자(字)이다.
1942년 27세에 18세의 장수(長水) 황씨(黃氏) 가문의 수만(壽萬)과 결혼하여 1남3녀를 낳았다. 당시에는 만혼(晩婚)을 하신 선생의 부인에 대한 애틋한 정은 각별하셔서 지금까지도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신다.
선생의 형님이신 기수(己洙)공은 선생의 부친을 닮아서 체구가 비교적 크셨다고 하는데 유독 선생만이 작은 체구였다. 어릴 때 식성도 까다로와 고기를 먹으면 두드러기가 나곤 하여 21세까지 고기라고는 오로지 마른 명태 한가지만 먹었다고 하며, 선생의 기억으로는 두드러기가 심해서 그것을 고치려고 두드러기에 용하다는 샘물에 목욕을 하곤 했다고 한다. 이러한 까다로운 식성에 대한 어린 시절의 경험은 훗날 무극보양뜸의 정립기준이 되어 평소에 입버릇처럼 말하는 잘먹고 숨을 잘 쉬는 것이 건강의 기준이라는 말은 그의 치료론의 기본이 된다.
성장기를 보낸 장성은 유학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곳으로 선생의 부친이신 서중공 역시 학문에 밝았고 경제관념 보다는 유학의 핵심사상인 「인(仁)」과 「교육(敎育)」을 통한 「올바른 사람」「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이 난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늘 강조하셨다고 한다.
선생의 집에는 가족들 외에 늘 10여명의 손님들이 식사를 함께 할 정도로 붐볐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한 것으로 짐작되며 선생과 기수공은 부친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평생의 일이 되는 침뜸술도 함께 익혔다. 가형이신 기수공은 침뜸의술에 빠른 진전을 보여 광주에서 택시를 타고 치료받으러 갈 때 "「비아침집」가자"고 하면 누구나 "예" 할 정도로 일찍부터 인근에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돈 먼저 밝히면 올바른 사람이 못된다」는 이러한 가풍은 훗날 「약값은 있어도 침값은 없다」라는 봉사철학을 형성하는 배경이 된다.
유교의 기본적인 관념이 그러하듯이 선생도 가업을 잇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였고 따라서 선생에게 침뜸의 공부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 자연스러운 계승은 침뜸의술을 "생업(生業)"으로서의 가치보다는 "공생(共生)"이라는 가치를 중시하여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또는 함께 나누는 건강의술인 무극보양뜸을 창안하고 보급하는 배경이 된다. 공생에 대한 선생의 실천은 1984년 경북 성주군 대가면으로 봉사를 가면서부터 시작되며 이후 침뜸의료봉사는 생업과 봉사를 반반으로 생활화하는 것으로 정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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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자신의 지난 체험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씀을 하지만 해방 이전까지의 행적에 대한 언급은 좀처럼 없다. 그것은 자신이 일제시대에 공직을 맡아서 일했다는 수치심 때문이다. 선생은 징용을 피해 면사무소의 후생담당으로 일했다고 하는데 침쟁이 소리가 듣기 싫어서 약을 공부했고 가장 종류가 많았던 4,000여 가지나 되는 위장약을 모두 암기했다고 한다. 일제시대의 공직을 맡았다는 것은 선생에게 평생의 콤플렉스로 작용하여 많은 동시대 사람들이나 해방 이 후 사람들이 일본의 장점을 공식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말할 때에도 선생은 최소한의 언급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본말에 능통한 선생이 절대로 일본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선생의 태도는 침뜸에 관한 경우에만은 예외이다. 일본인이 침술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호침(毫鍼)의 자침에 사용하는 「관(管)」을 개발하여 자침을 용이하게 하였다는 점과 침뜸의사를 민간에서 선발하여 지방자치단체에서 인정하였다는 점이다. 또 다른 것이 있다면 다행히도 일제 때 조선총독부에서 자신에게 침뜸의사 면허를 얻게 하였다는 점이다. 선생은 자신을 비롯한 침뜸의사들이 일제 때 면허를 얻어서 침뜸의 맥을 잇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해방에 대한 선생의 인식은 분명하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해방의 기쁨을 누리는 것만큼은 자신도 기뻤으나 실제로는 많은 걱정을 하였고 그 걱정이 해방 이후 정치적 혼란과 남북전쟁으로 이어지면서 현실화되자 선생의 실망은 커져 갔다.
해방 이후 선생은 당분간 형제가 한 집에서 살았는데 가형인 기수공이 정미소 사업에 실패를 하고 재산을 탕진하자 처가로 가서 많은 신세를 졌다고 한다. 처가에 의탁하고 살던 선생은 한 때 4개 면에 담배농사를 짓도록 하여 농가소득을 높이는 일을 하였다.
제2기-침뜸의 수련기
사람들은 대부분 중년이 되면 새로운 삶을 사는 것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려한다. 그러나 개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벌어진 남북전쟁은 40여세를 바라보는 선생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여 그때까지 고향을 떠난 적이 없는 선생을 세상 밖으로 나가게 한다.
휴전협정을 앞두고 마지막 격전이 벌어지는 동부전선 양구에 주둔한 노무사단(KSC)에 자원입대하여 21연대 의무대에 배속된 선생은 전사자들의 시신을 씻겨서 화장을 하는 일을 한다. 자원입대는 전쟁 막바지에 징집이 강화되자 어차피 전쟁터에 갈 바에야 의무병으로 참여하자는 결심에서였다고 한다. 전쟁물자를 지고 전투지역으로 갔다가 시신을 메고 돌아오는 일을 하면서 선생은 수많은 죽음을 확인하고 평화에 대한 열망을 하게 된다.
의무병으로서 전투에 참여한 것은 침뜸의사인 선생에게는 다른 침뜸의사들이 갖지 못한 소중한 경험이 된다. 휴전협정을 앞두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많은 사상자가 생기고 부상자를 치료하고 사망자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임상을 경험하고 무엇보다 해부학적 경험을 쌓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선생은 그 때 살아있다는 것이 죄송스럽고 민망하다고 느끼시면서 그 미안한 감정을 평생을 두고 그들의 가족일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한다.
죽음을 보면서 선생은 인간의 업(業)을 생각하고 침뜸에 관한 책 외에 평생을 퉁하여 가장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 「인간수업(人間修業)」이라는 일본책에 나오는 삶을 그대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한다. "인간으로서의 업(業)을 닦는다"라는 의미의 이 책은 백만장자의 아들로서 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일본의 청년이 인간수업을 하기 위하여 밑바닥 삶을 모두 경험하면서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 이야기가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선생은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에서 약국을 경영하다가 우연히 고향 광산군 비아면에서 파출소장을 하던 지인(知人)을 만나서 그의 소개로 미군부대 식당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판문점에서 창고를 짓는 일에 목수라고 속이고 참여를 하기도 한다. 기와지붕을 올리는 일을 끝내고 보니 구멍이 숭숭나서 창피를 당하기도 하셨다지만 그 무렵 선생은 인간수업의 내용을 충실히 실행하고자 하여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보자고 결심하고 닥치는 대로 이일 저일에 손을 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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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기 침뜸 살리기 국민운동과 교육 그리고 봉사의 시기
5.16은 선생의 인생을 운동가로 몰고 가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다.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선생의 증오는 그들이 민중들에게서 침뜸을 앗아갔다는 인식 때문인데 그들이 서양적 사고를 가지고 침뜸을 비과학적인 미신과 같이 취급하여 무시하고 꺾어 버렸다는 것이다.
침뜸이 국가의 공식적인 의료체계에서 밀려나고 우리 의학에서도 한약에 밀려나자 선생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무려 40여년 동안 침뜸 살리기를 위한 활동에 전념한다.
선생의 침뜸 살리기 운동은 입법운동과 시민운동의 두 가지 측면에서 펼쳐진다. 입법활동을 통한 침뜸 전문인 양성제도의 부활은 정책입안자들의 인식부족과 일부 서양의사 및 한의사에 의한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여러 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난관에 부딪치자 선생은 직접적인 공격과 우회전략을 동시에 전개한다.
입법활동을 위한 선생의 노력은 상당한 기간 동안 대한침구사협회 입법추진위원장을 맡으면서 다른 침뜸의사들과 협력하여 펼쳐졌다. 이 기간 동안 선생의 설득 대상은 주로 정부와 입법기관 또는 유력인사들이었다. 선생의 노력은 국회에 침뜸무료봉사실을 개설하고 3차례의 교육을 실시하는 업적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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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김남수가 총독부의 관리로 일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지역은 광산군과 장성군입니다. 그중 가장 유력한곳은 광산군 비아면이고 현재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동일 것입니다.
6.25때 소실이 안되었다면 동사무소 기록물 보관소 혹은 광산구 기록물 보관소에 김남수의 후생담당 행적이 남아 있을 겁니다.
김남수 혹 금목남수로, 김용남 혹 김목용남으로 자료가 있을 것입니다.
김남수 친일행적을 추적해서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야 합니다. 한의사인 여러분들이 탄압받고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일제에 의해 권한을 박탈당하였고 해방 후 아직까지 복원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김남수를 처단하고 역사를 복원하지 못하면 일제가 의도했던 대로 한의사 자체가 소멸될 것입니다.
한약업사가 남아있는 이유도 일제가 대한제국의사(한의사)를 소멸시키기 위해 더 이상 배출을 안하고 침사, 구사, 한약업사로 나누어 배출했기 때문입니다.
해방 후 대한제국의사는 한의사로 부활했지만 권한은 전혀 부활이 안됬습니다. 대한제국의사가 가졌던 수술, 의료기기사용권, 심지어 양약사용권도 박탈당했습니다.
또한 무극보양뜸은 김남수가 개발한 것이 아닙니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값싸게 국민보건관리를 위해 국민뜸 혹은 건강뜸을 보급한 적이 있습니다.
족삼리 곡지 견정 등을 직구하는 방법인데 김남수가 2000년대 오면서 이름만 무극보양뜸으로 바꾼 것입니다. 김남수 책에서도 90년대 말까지는 보건뜸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아래 참조-
무극보양뜸이란 용어는 2000년 이후에 보이고 90년대 이전의 김남수의 저서에서는 국민뜸, 보건뜸이란 이름으로 소개됩니다. 국민이란 황국신민의 줄인 말이고 무극보양뜸의 원래 이름인 보건구는 일본에서 군국주의 시대에 일본군부에서 일반사병의 체력과 식욕, 수면증진을 위해 탄생한 뜸법입니다.
반미립대의 직접뜸을 사지, 흉복부, 배부에 시술하는 방법입니다.
일본야후에서 보건구를 치시면 무극보양뜸의 방식과 거의 같은 시술법이 설명되어 나옵니다.
解读日本历史上的“国民三里灸运动”
1.2 时代背景
熟悉历史的人都知道,20 世纪20~30 年代正是日本军国主义思潮最泛滥的时代,明治末年,走上资本主义道路的日本帝国,不断加速侵略战争,掠夺国外的领土和资源。日本历史学者藤原彰就曾明确指出“以军事目的为出发点,靠战争而繁荣起来,从殖民地谋取利益的这种军事侵略性质,是日本资本主义的最大特色。”近邻朝鲜和中国成为日本首先掠夺的目标。明治27 年(1894 年) , 日本发动了侵朝战争,随后又对中国开战,即历史上的“甲午战争”,1895 年通过战争从清政府手中割走台湾,明治37~38 年(1904~1905 年) ,为重新分割中国东北和朝鲜,日本又对沙皇俄国发动了“日俄战争”。连年征战,长期穷兵黩武,使日本不堪重负。战争需要有足够的体格合格的兵源。但据《(国民日常)健康法大观》记载,当时的海军军医总监高木兼宽男爵曾经批评说:“今国民陷于偏重智力、忘却体力养成之重要。征兵结果,体力年年下降,此即明证。”因此,在进入20 世纪以后,日本政府出于战争的需要,希望国民提高体质,为了满足战争需要,在民间开展了多种强身健体活动。
其他的灸疗运动
在足三里灸运动之后,
第2 次世界大战时期,结核病占被遣返回国的日本士兵罹患疾病谱中的第1 位,超过50 %。代田文志曾在昭和15 年(1940年)《东邦医学》第7 卷第7 期发表“结核の予防并びに治疗としての针灸术”,认为在阵地灸足三里、曲池和风门等穴位,得结核病的士兵较少,即使得病也可很快治愈 。他提出可于战斗间隙开展灸疗,用来使士兵恢复体力,抵御疟疾、毒虫侵袭等。从昭和18 年(1943 年) 起,日本军部在军队广泛推行施灸,对东部第37 部队的796 名一般士兵进行施灸,与非施灸士兵比较体力、食欲、睡眠等各项指标。同时也对72 名将校、下级军官进行施灸,分组应用足三里、身柱、风门、曲池等15个经穴,共观察了28 种穴位组合的施灸效果。还对东部第36部队的校、下级军官约180 名进行施灸。按照当时的军队纪律,收集详细的资料进行分析,但作为军事机密,没有公开,只在一部分人中进行传阅。 灸疗法作为当时采用的主流医疗保健手段,具有重要的国策地位,这与当时日本的统治阶层尤其是近卫首相的大力支持分不开的。同时这一运动为保障日本侵华士兵及其他相关人员的健康做出了很大贡献,取得了相当的效果,因而得到当局的推崇,客观上为日本军国主义充当了帮凶。
• 김남수의 거짓말
90년대 아버지에 대한 글...
자랑스런 아버지
침구사 김남수 씨는 어릴 적, 시골에서 한의원을 경영하며 뚜렷한 소명 의식을 갖고 일하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의 집은 항상 환자들로 북적거렸는데 먹고살기가 넉넉하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그들 대부분은 아주 급하거나 상처가 심한 경우에야 한의원을 찾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아버지는 무료로 진료해 주거나 약값을 수확기에 나눠 갚도록 여유를 주곤 하셨습니다. 어린 남수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때론 답답해 보였습니다.
하루는 온종일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점심도 거르신 아버지께서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저녁 진지를 들고 계실 때였습니다. 몇 숟가락 들지 않았는데 갑자기 밖에서 응급환자가 실려 왔다며 다급하게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얼른 수저를 내려놓고 달려나가시는 아버지를 뒤따라 남수 씨도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한의원으로 나갔습니다. 진료를 끝내신 아버지는 배앓이 환자에게 약을 지어 주면서 형편이 어려운 것 같다며 돈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집에 가서 몸조리를 잘하라는 말씀만 덧붙이셨습니다. 그는 속으로 식사도 못하시고 진료하면서 치료비도 제대로 받지 않는 아버지에게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다음날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리러 안방에 들어간 그는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이담에 나는 아버지처럼 남에게 좋은 일도 하면서 돈도 많이 벌 거예요.”
그러자 아버지는 큰 소리로 허허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의술은 인술이라고도 하지 않느냐. 내가 한 푼 적게 벌더라도 절박한 처지에 있던 사람이 내 치료를 받고 낫는다면 얼마나 보람있는 일이겠느냐. 태어날 때부터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다 하는데 의료인이야말로 그런 사람이 아니겠느냐?”
우리는 봉사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그것의 신선함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은 숨어서, 이 사회의 윤활유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며 그들은 그 일에서 스스로 보람을 찾고 있답니다. ‘나의 것’을 남에게 덜어주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이 채워진답니다. 내가 남에게 베풀 것은 없는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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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늘 하던 말
........ 의원이신 아버지에게 침구와 한학을 배웠다, 용주골에서 약국도 경영했다.
2000년대 초
......... 그냥 부친에게 한학과 침구술을 전수받았다.
현재
....... 침구사인 아버지에게 침구술을 전수받았다.
주)
김남수 아버지 세대엔 조선인 침사가 아직 없었습니다.
본인은 한의사인 아버지에게 한학과 침구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의사는 침구를 배우지 않는다는 헛소리를 하고 다닙니다. 다시 말해 한의사인 그의 아버지도 침구를 몰랐다는 것인지......
그럼 김남수 자신도 침구를 아직 안배웠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내뱉는 말마다 전부 거짓이니.........
• 다시 정리한 김남수의 실체
김남수씨는
일제시대 광주에서 보건소 후생과(징용, 위안부송출담당부서)에 근무하면서
일제의 조선민중 수탈에 앞장섰던 자이며
해방후 미군부대를 거쳐
용주골에서 무면허로 약국을 경영하였으며
군사정권시절
장성들과 밀착되어 있었고
문민정권이후
상업적인 목적으로
국회와 언론을 이용해
막대한 부를 축척하고 있는 자입니다.
국회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법을 만드는 곳입니다.
어찌 일제를 위해 부역한 대가로 취득한
침사자격증으로
대한민국 국회에서
무면허자의 뜸 실습을 하게끔 허락하는 지요.
(일본에서도 구사자격증이 없는 사람이 뜸을 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김남수씨에 의해
수많은 무면허 범법자들이 양성되고 있습니다.
김남수씨의 상업적인 이득 때문에
평생을 전과자로 살아야 하며
대한민국의 법체계를 원망하는
선의의 피해자가 생긴다면
국회의 책임도 적지 않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일본의 침사, 구사가 일년에 6천명이 배출되지만
그 질적 저하로 인해
국민건강에 기여도는 떨어지고
오히려 값비싼 의료비가 필요하기에(5천엔-국회자료)
풍속업체 소프트삽의 한테마로 전락하고 있는 중입니다.
침뜸의 효과는
침구학의 종주국인
우리민족의 한의학이 우수하기 때문입니다.
일본 의사학의 첫 페이지에
일본의 의학은 한국의 한의학에서 유래됐다고 되어 있습니다.
일본은 명치유신이후
제국주의적인 군진의학을 강조하기 위하여
한의학을 폐지하였고
침술, 구술, 안마술, 접골술 영업자로 쪼개어 명맥만 유지시켰습니다.
이에 반해
대한제국에서는
한의사가 능동적으로 서양의학을 받아들여
1878년 우두법을 받아들이고(지석영 : 한의사)
1900년 관립의학교를 통해 35명의 서양의학도 겸비한 의사(현재의 한의사)를 배출합니다.
1900년도 관립의학교의 부속병원인 내부병원(대방의3인, 외과의2인, 소아의1인, 침의1인)은 한의사와 양의사의 구별없이 양방과 한방을 모두 치료하는 시스템이었다.
1900년 1월 17일 관보에
대한제국이 반포한 의사규칙은 1조에
“의사는 의학을 慣熟하야 천지운기와 맥후진찰과 내외경과 대소방과 약품온량과 침구보사를 통하야 對症投劑한자를 云하니라”
대한제국의 의사규칙은 의료인의 면허제도를 처음으로 규정하였는데
1조에 보다시피 양의사 한의사 구별도 없었고
의사는 침과 약을 동시에 실시하는 직종이었습니다.
다만 통감부설치이후 1907년 대한의원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한의사들이 축출되고
일본인의사로 교체되었으며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의학교 교장인 한의사 지석영 선생마저 사임하면서
한의사들의 입지는 줄어들고
1913년 의생규칙에 의해 조선의사 6천여명이 의생으로 이름이 바뀌고 이마저 1922년 개정규칙에 의해 한지의생으로 전락하였고 1940년 강습소를 마지막으로 배출을 중단시켜 이들이 사망하면 자연스레 한의학의 역사는 소멸하게끔 유도한 것입니다.
반면
1914년 조선에 없던 새로운 직종인 일본의 침술, 구술영업자의 조선내 영업을 허용하게 됩니다.(1944년 침술, 구술영업자는 침사, 구사로 변경, )
초기 침사, 구사는 일본인들이었고
해방전에 이르러서야
일본인 밑에서 교육받거나
일제의 앞잡이(조선인을 징용, 위안부송출 등)로 공을 세운 소수의 침사, 구사가 배출되었는데 251명에 불과하였고
이들이 현재까지 생존하는 침사, 구사들입니다.(현재 41명)
*대한침구사협회에 문의하셔서
조선인중 최초의 침사, 구사는 누구이며 몇 년도에 배출됐는 지와 몇 명이나 배출됐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1945년 일제의 패망 후
침략을 받았던
중국, 대만, 북한은
일본에 의해 생겨난 침사, 구사를 폐지시켰고
중의사, 고려의사를 만들어
전통의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일제의 의료법을 계승한 관계로
침사, 구사의 권리가 그대로 남게 되었고
1962년에 와서야 침사, 구사제도는 폐지되었지만
너무 늦게 폐지된 관계로 오늘날의 혼란이 발생한 것입니다.
1966년 시각장애인에 의한
침사제도 부활이 요구되었으나
양의사, 약사, 한의사 심지어는 서울시침구사협회의 반대로
입법이 저지되었고 더 이상의 혼란은 없었습니다.
1980년대에 이르러
이병국씨는 언론과의 친분을 앞세워
침코리아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온라인 강의와
서적판매를 통한
막대한 학원수입을 올리고 있었고
이에 김남수씨는
국회의원과의 친분을 앞세워
80년대 국회에 봉사실을 개설하였고
뜸사랑을 조직하여
1년에 250여 만원의 회비를 받고
강의 및 무면허 실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장대로 한다면 10여 만명을 배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수백억의 부당이득을 취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무자격자의 실습을 위하여
전국에 무면허 봉사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온갖 성추행과 의료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국회에서 김남수씨의 봉사실을 지속적으로 운영하거나
전국에 뜸사랑 봉사라는 이름을 내걸고 무자비한 돌팔이 실습이 자행된다면
다음과 같은 피해가 생깁니다.
1. 인체에 대해 지식이 부족한 무면허자의 한방의료시술로 인해 국회내 국민들의 건강권을 훼손시킬 수 있습니다.
2. 권력기관인 국회에서의 무면허의료실습행위를 선전하는 뜸사랑의 상업적인 학원운영에 의해 가난한 서민들의 금전적 손실이 우려됩니다.
3. 한국의 자주적인 의료 근대화를 폄하하고 군진의학의 확립(식민지 경찰의사의 폭압성), 한의학의 단계적 폐지(민중의 의료소외가 심각해짐), 일본인 침사, 구사제도의 도입(일본왕의 시혜)이 한국의 의료근대화를 앞당겼다는 일본극우파의 논리에 동조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4. 해방 후 1946년 인민들의 건강권 확보를 위해 무면허 의료(침사, 구사 등)에 엄격했던 북한과 상이한 무면허인력(의사와 고려의사 이원화)의 조장으로 통일후 의료제도의 혼란을 초래하는데 국회가 앞장설수 있습니다.
5. 중국과의 FTA를 앞두고 중국 의료시장개방요구에 악용당할 여지가 있습니다. 현재 뜸사랑의 많은 회원들이 중국의 중의대졸업 혹은 국제침구사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는 관계로 권력기관인 국회에서 이들을 인정한다면 협상에서 불리한 사태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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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김남수의 생애에 대해서는 뜸사랑단체회원의 글을 인용하였고 치과의사인 기창덕씨의 , 과학철학사 신동원씨의 저서, 홍순원의 조선보건사를 참고했습니다.
덧붙여 말씀드리면
근대의학사를 최초로 정리한 사람이 1950년경 미카사키에인데 미개한 조선민중을 일제가 병원도 세워주고 의사도 배출하여 근대화시켰다는 관점에서 정리하였고,
의사인 김두종씨는 일제의 개화론은 동의하지 않았고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의료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관점으로 의학사를 다루었다면
기창덕씨는 조선정부와 개화파들의 자주적인 근대화 노력에 의한 근대의료의 발전이 있지만 조선민중의 우매함이 근대화를 늦추었다는 관점으로,
신동원 씨는 개화파와 조선정부의 자주적인 의료근대화를 일제식민지정책이 오히려 방해만 놓았다는 관점, 북한의 홍순원씨는 주체사상에 입각해 의료근대화 노력을 설명하였습니다.
요 몇일 국가전자도서관에 들어가 관보를 뒤지면서 의사규칙, 의생규칙, 안마술, 침술, 구술 등의 자료를 훑어보면서 느낀 점은 의학사를 전공하는 젊은 원장님이 한의사인 우리의 관점에서 조선근대의학사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우열, 김남일 교수님의 논문이 일부 있지만 근대의학사를 한의사의 입장에서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국사책에 나오던 개화파의 지석영, 유홍기 등이 한의사였고 어느 시대 이상으로 한의사들이 능동적으로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민중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었습니다.
당시의 유의였던 정약용이나 최한기 등을 포함한다면 19세기 조선근대사를 주름잡았던 주역이 우리 한의사입니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씨도 한의사, 당시 천한 직업이었던 한의사를 생업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조예가 깊고 민중에게 봉사했던 수많은 비직업 한의사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정조임금도 의서를 썼습니다. 민중에 봉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학문이 의학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으로 미뤄 짐작합니다.
한의사들에 의한 이런 근대화의 노력들이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한의학은 극도의 탄압을 받게 됩니다.
일본과 명치유신시대 자국 한방의들은 의사로서 지위를 유지하면서 서서히 고사된 반면에 조선의
한의사들은 경술국치이후 의생으로 전락하고 그마저도 일본에서 건너온 침사, 구사들에 의해 대체되기 시작합니다.
조선근대사에서 한의사의 존재는 유홍기 등 개화파의 역사이며 김형직 등 독립운동의 화신이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반민특위를 주도한 분이 조헌형 선생이고 기득권층보다는 민중에 봉사한 계층이었습니다.
일제이후 대한민국정부도 한의사인 편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민중의 사랑을 안고 현재는 스스로 우뚝 설수 있었습니다. 한의사가 민중에게 버림받을 짓을 한 적 없지만 여기저기서 두들겨 맞는 세태에서 깊은 고민을 해 보았습니다.
이상 주체적으로 한국의 근대개화와 일제시절 독립운동, 해방 후 일제청산에 앞장 섯던 우리 한의사들이 21세기에 와서도 통일도 앞당기고 우리의 자식들인 양의사의 재통합과 함께 세계무대를 석권할날을 기다리면서...
그에 앞서 누군가가 한국의 자주적 근대사이자 한의학사를 정리해줬을 하는 바램에서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 정말 침사인가?
김남수(1915.5.16)
1983.7.25 대법원사건 82누523(83.6.28)의 판결결과 재교부
이 당시 많은 침구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나이가 어려서 탈락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부 받은 사람들은 정말로 침사였을까? 무슨 증거자료를 제출했는지 조사를 해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증거가 있더라도 위조한 것은 아닐까?
현재 전국에 41명의 침사, 구사가 있습니다.
- 누군가 조사했으면 합니다. 일제시대 251명의 침사 구사 명단
해방 후 한시적으로 침사 구사에게 한의사면허를 주기위한 시험을 치룬 적이 있습니다.
침사가 아니거나 수준미달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 김남수의 의문점
1. 김남수가 침사인가, 아니면 무면허 돌팔이인가?
이병국이 침구학원 시절에 대한 정보 등에 대해 아시는 분 제보바랍니다.
동대문구에서 침사면허를 재발급한 사실을 담당자에게 확인했습니다.
진위여부는 경찰을 대동해야 알려주겠다 합니다.
총독부 관보를 확인해 본 결과
침사 구사 합격자 명단은 관보에 실리지 않아서 확인할 수 없었고
대한 침구사 협회에 자료가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쪽 관보나 전 일본침구안마사협회에 문의를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개원의로서 한계가 있었습니다.
협회와 일본 쪽의 교류가 있다면 자료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2. 스스로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며 내세우는 화상침이 과연 정말 최초 발견인가?
화상침은 침술의 소염진통생기 효과로 인한 것이고
진피층이 파괴가 안 된 상태에서 어느 정도 효과가 있습니다.
근래 한의사들은 이미 진피층을 자극해 주름이나 흉터에 많이 응용을 하고 있습니다
고전참조)
○ 湯火傷眼腫痛 不可用冷藥 點之 以五行湯方見上 天行赤目 溫洗 地黃膏方見上 被物撞打 付之(入門).
取生地黃汁一鐘 皂角數片火傷灸熱淬 地黃汁內 再灸又淬 以汁盡爲度 晒爲末傅之 卽縮(入門).
治肝藏鬱火傷血 乳房結核. 凡肝膽不和之證 皆治之.
【淸肝解鬱湯】治肝藏鬱火傷血 乳房結核.凡肝膽不和之證,皆治之.
治湯火傷瘡
○ 湯火傷 及熱油傷, 白蜜塗之. 竹中白膜 貼之,日三 痛立 止卽愈(本草).
○ 此虫 又名,八角虫 隱於壁間以尿射 人遍身生瘡如湯火傷, 烏鷄翎燒灰 雞子淸調塗之(綱目).
.
3. 뜸사랑의 탈세의혹입니다.
당연히 탈세하겠지요. 그러나 공익적으로 썼다고 주장하겠지요.
4. 그 자의 최고 아킬레스건인 일제 앞잡이 친일 경력입니다.
일제시대 면사무소는 단순한 행정조직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산하의 식민지 착취지배기관이었습니다. 면사무소의 후생담당의 주요업무가 정신대 공출, 징용자 차출이었으니 김남수야말로 악질친일파 개쓰레기였습니다.
5. 아버지가 한의사인가?
김남수의 아버지가 김서중으로 김해김씨 문경공파 7세손입니다.
-. 침술을 김남수에게 가르치고 큰형도 비아뜸집을 경영한 것으로 보아
광주시 광산구 비아동에 기반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 한약처방을 한 것으로 보아 의생이 의심되어 의생 중에서 김서중을 찾다가 못찾았습니다. 5천명까지는 훓어 보았는데 나중에는 3년마다 면허가 갱신되는 관계로 도저히 찾을 수 없더군요.
-. 김서중이 정식의생이라면 김남수는 더 할말이 없겠지요. 저는 한의사에게 침술 배워놓고
한의사는 침놓을 줄 모른다. 이렇게 주장할 수 없겠지요. 자서전에 김남수가 약국경영한 내용도 있습니다.
• 사라져 가는 전통의학을 살려야 한다?
․ 19세기 의사 면허 도입을 촉구한 기사들- 돌팔이를 허용하면 안 되는 이유
1. 못된 의원이란 것은 민간에 큰 화라.
조선사람이 의원 까닭에 죽는 사람이 일년에 몇천명이니 의원이 없었다면 이사람들이 이렇게 죽을리가 없는데 무식한 의원에 학문 없는 약과 침 까닭에 불쌍한 인생이 목숨을 많이 잃었으니 어찌 불쌍하지 않으리오.
외국서는 사람이 의원이 되려면 적어도 일곱 해를 날마다 학교와 병원에서 병을 논으로 보고 다스리는 법을 공부한 후에 대학교 교관 앞에서 시험을 지낸 후 다시 의원 노릇을 하려면 그 동리 판윤 앞에 가사 상등의원들을 청하여 다시 시험하여 그 사람이 내치, 외치와 부인병들과 아이 병들과 해산하는데 관계되는 학문과 화학과 약물학과 약 만드는 법을
다 시험을 지낸 후라야 판윤이 인가장을 하여 주어 비로소 민간에 나아가 의원 노릇을 하는 법이라.... 정부에서는 백성을 위하여 ...
<독립신문 >1896.12.1.
2. 우리나라에 졸업 못한 의원이 많은 까닭에 횡사하는 폐단이 허다하니 급히 의학을 설시하여 의술을 교육하되 졸업한 후에도 그 의술을 수시로 시험하여 효험이 있는 연후에 행술케 하는 장정을 마련하는 것이 위생에 요긴한 일
<매일신문>1898. 10. 5.
3. 의학교를 광설하여 이러한 폐가 없게 하라
<뎨국신문> 1899. 3. 16.
․ 한의사 면허제도의 도입배경
1. 위생계몽운동가들은
<독립신문>
1896년 11월 21일자 ‘침으로 인한 사망’ 강조기사
1896. 12월 1일자 ‘자격없는 의원의 의료활동 금지 촉구' 기사
1899년 11월 29일 ‘침의 살인’ 기사
<매일신문>
1898년 10월 5일자 ‘무자격의료인에 의한 고철경이라는 이의 사망’ 기사
1899년 1월 17일자 ‘한약방 하는 사람에 의한 환자 사망’ 기사
<뎨국신문>
1899년 3월 16일자 '의학교를 광설하여 이러한 폐가 없게 하라' 기사
2. 이에 정부는 대한제국내 민간의료의 자격을 규정하는 의사규칙을 반포한다.
<관보> 1900년 1월 17일 ‘의사는 의학을 관숙하여 천지운기와 맥후진찰과 내외경과 대소방과 약품온량과 침구보사를 통달하여 대증투제하는자(제 1조)’
3. 한의사 면허를 도입한 대한제국 정부의 논리는 다음의 훈칙에 잘 드러나 있다
<제국신문> 1900년 2월 9일 ‘ 의술을 배우는 자는 천지 기후와 위생에 익지 못하고 함부로 방문을 시험하고 약파는 자는 약 재료의 진가와 약 짓는데 정추를 알지 못하고 함부로 지어주니 그해가 어찌 끝이 있으리오. 진실로 그 폐단의 근원을 막고자 하면 규칙으로 범한을 정함만 같지 못한지라’
․ 일본의 침사 구사 현황
면허제도(免許制度)
의사면허(醫師免許) 소지자(所持者) 및 침구사(鍼灸師) 면허자(免許者)만이 침구(鍼灸)치료를 행(行)할 수 있다.
침사면허(針師免許) 구사면허(灸師免許)의 성격은 이른바 신분면허이면서 업무를 독점하는 것이다.
자료: 쇼화(昭和)22년 12월20일교부. 법률217.법제1조
「의사 以外者로서 안마, 마사지 또는 지압, 침과뜸을 業으로 쓰는 者는 각각 안마 마사지 지압사 면허 , 침구면허를 취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 면허등록자수(免許登錄者數) 및 취업자수(就業者數)
국가시험합격자는 厚生勞動大臣의 免許申請을 해서 교부(交付)받는다.
2004년 현재, 등록자수는 침사(鍼師) 123,740명, 구사(灸師) 122,612명이다.
단, 이 數는 都道府縣知事管轄時代에 중복되거나 死亡에의한 삭제가 제대로 되지 않았으므로 實在者數는 아니다. 후생노동성(厚生勞動省)의 조사에 의하면 就業者數는 72,000여명이다. 그렇지만 이 숫자도 반드시 실제 수와는 차이가 있다고 본다. 대강 4万人 정도로 예상된다.
-사회보장(社會保障)定策과 鍼灸治療
鍼灸治療는 대부분 의료보험이 아닌 自由診療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다.
1回의 施術料金은 地域差와 개인의차는 있지만 대개 2,500엔부터 6,000엔 정도이다. 의료보험제도상(醫療保險制度上)에는 요양비(療養費)라는 분류에 있어서 지급해 주고 있는데, 연간 100억엔 정도이다.
-근무자가 자기가 담당하는 1일 평균 환자 수는 16.1人이며, 제1회(18.6人)보다 감소하고 있다. 開業과 근무(勤務)에서 취급하는 환자 수는 감소(減少)하는 경향(傾向)이다. 그러나 의료기관의 취직증가와 그 업무내용까지는 확실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이것이 하나의 흐름이라고 보고 있다.
주)
일본에서 침사 구사는 1910년 <명치44년> 8월 내부성령 제11호에 의해 처음 실시 되었습니다.
1. 졸업생수에 비해 침사 구사 수가 적은 이유는 침사, 구사 시험에 모두 응시하지 않는 것으로 사료된다.
2. 1억 3천만이 넘는 인구를 고려하면 한국의 한의사수 2만에 비해 일본의 침사 구사 취업자 수 4만은 상대적으로 적은 수이고
3. 치료비는 3만원에서 8만원으로 고가의 치료비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4. 3년제 침사 구사의 진료비를 고려해 볼 때 한국의 6년제 한의사의 침구수가는 심하게 저평가 되 있음을 알 수 있다.
첫댓글 넓리 넓리 퍼날르삼. 네이버, 다음, 구글 검색할때 먼저뜰 수 있게
네 형 몰랐던 사실을 알았네요 그냥 맘씨좋은 할아버진줄 알고 좋아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