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 정현종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 정현종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전문
존재론의 관점에서 주역』을 읽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할 문장이 있다. 도()와 신(神)을 구분하는 대목이다. "한번 음(陰)하고 한번 양(陽)하는 것을 일컬어 도(道)라한다. 음과 양으로 헤아리지 못함을 일컬어 신(神)이라 한다. "" 현대철학에서 그런 신적인 사태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건(évènement/event)을 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좀 더 정확히 사건이란 무엇인가?
모든 일에는 규칙적인 측면이 있는가 하면 불규칙적인 측면이 있다.
사물은 헤아릴수록 헤아리기 어려운 구석을 드러낸다. 모든 사태에는 '도'의 측면과 '신'의 측면이 함께 있기 마련이다. 경험적 사실은 많은 경우 도를 따르므로 어떤 체계 안으로 분류, 저장할 수 있다. 반면 '신'을 따를 때는 체계 밖에 머문다. 보통 사건이라 부르는 것은 그런 일탈적인 현상을 가리킨다. 통념적인 의미의 사건은 규칙적인 질서의 틈을 비집고 분출하는 카오스의 침입을 가리킨다. 이 경우 사건은 사고와 동의어가 된다.
그러나 '신'은 어떤 환원 불가능한 불규칙성만을 뜻하지 않는다. 현대철학의 중요한 개념인 사건도 어떤 신적인 것으로 사고와는 완전히 다른 것을 말한다. 철학적 의미의 사건은 질서에서 무질서가 열리는 사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무질서에서 질서가 열리는 사태다. 이 점에서 사
*「주역」 계사전 상권 5장: “一陰一陽之謂道, 陰陽不測之謂神.”
건은 창발 (emergence)에 가까운 개념이다. 가령 물리적인 과정에서는 그 결과로 물리적 속성만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난데없이 물리적이지 않은 속성, 가령 심리적인 속성이 발생했다고 해보자. 또는 무기물들의 자유로운 이합집산에서 어느 날 우연히 세포 같은 유기체가 생겨난 것이라 해보자.
창발은 이와 같이 새로운 차원의 속성이 발생하는 사태를 가리키는 용어다. 『주역』의 저자는 이런 창발적인 상승의 사건을 표현하고자 '신'이란 글자를 끌어들였을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신적인 것이란 창발의 운동을 일으키는 어떤 것이다. 현대철학에서 사건은 우연으로 가득한 물질의 세계에서 물질 초과적인 속성, 형이상학적 요소가 창발하는 사태를 가리킨다. 그것은 기존의 '도'가 새로운 차원을 획득하기 위해 통과해가야 하는 신적인 계기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오늘날 사건 이론을 대변하는 철학자는 들뢰즈다.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적 여정 전체가 초지일관 사건의 문제와 씨름해왔음을 강조하곤 했다. 특히 사건의 문제가 전면적으로 부각되는 가장 중요한 저작은 들뢰즈의 초기작 '의미의 논리』(1969)다. 이 책에서 들뢰즈는 무의미한 잡음의 세계에서 의미로 충만한 언어의 질서가 펼쳐지는 과정을 설명한다. 의
미 없는 소리가 갑자기 의미 있는 소리로 바뀌는 전환, 그것이 여기서 들리즈가 말하는 사건이다.
이때 의미 (sens)는 언어를 가능케 하되 언어에 의해 지시될 수 없는
*G. Deleuze, Logique du sens (Paris: Minuit, 1969).
어떤 것이다. 언어는 사물들을 지시하고 화자의 내면을 현시하며 어떤 개념을 함축한다. 의미는 이런 대상 지시, 주체 현시, 개념 함축을 가능케 하되 그 자체는 이런 차원을 벗어나 있다. 사건은 언어의 질서를 정초하되 그 질서에서는 포착하기 어려운 의미가 성립하는 운동이다. 이런 사건의 철학은 필연과 우연의 대립 구도 위에서가 아니라 깊이와 표면의
대립 구도 위에서 펼쳐진다. 들뢰즈 철학에서 사건은 사물의 혼란스런 깊이에서 의미 (sens)라는 표면적 층위가 성립하는 사태를 말한다.
이때 표면은 가죽과 같다. 들뢰즈의 사건 이론은 언어의 가죽에 대한 이야기다. 말이 몸을 가리기 위해 뒤집어쓰고 있는 가죽, 그것이 사건을 통해 발생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의미는 어떤 보호막이다. 의미는 무엇보다 존재의 심층에서 분출하는 카오스를 방어하기 위해 말이 뒤집어 쓰고 있는 보호막이다. 그러므로 이제 사건은 카오스-심층의 출몰이 아니라 그 카오스-심층을 봉합하는 의미표피의 발생이 된다.
의미의 논리에서 기본이 되는 깊이와 표면의 대립은 스토아 전통에서 온다. 이런 대립적 구도를 설정해야 했던 최초의 문제는 플라톤적 의미의 이데아나 본질의 위상에 있다. 이데아, 본질, 혹은 형이상학적 실재 일반이 형이하학적 세계에 대해 갖는 관계는 무엇인가? 플라톤 전통에서 형이상학적인 것은 형이하학적인 것의 저편, 아득한 높이에 있다. 플라톤
주의는 높이의 철학이다. 높이의 철학에서 형이상학적 실재는 언제나 형이하학적 세계보다 먼저 있어야 하는 어떤 원형, 모델, 이상이다. 형이하학적 실재는 그런 이상적 높이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
반면 스토아 전통에서 먼저 있는 것은 물체의 세계다. 형이상학적 실재, 특히 의미는 이 형이하학적 세계의 깊이에서 발생하는 "어떤 표면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물체의 가장자리에서 파생되는 어떤 물체적인 존재, 어떤 "열외 존재(extra-étre)"에 불과하다. 이런 관점에서 스토아 철학은 본질을 영원한 실재로 절대화한 플라톤주의를 비판한다. 스토아 철학은 최초의 반플라톤주의였다. 의미의 논리는 이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물체의 이합집산 과정에서 부수적인 효과로서 발생함을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저작의 가장 중요한 논
점은 오히려 그렇게 우연하게 생겨난 것이 다시 물체의 깊이로 함몰하지 않고 오래 지속한다는 데 있다.
형이상학적인 것이 어떤 표면효과나 열외 - 존재라는 것은 그것이 잠정인 어떤 것임을 말하지 않는다. 의미는 마치 넘실대는 바다의 표면에서.생기는 거품처럼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덧없는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단순히 지속하는 것을 넘어 어떤 독자적인 자기전개의 능력을 획득하고.급기야 다른 것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원인이 된다. 들뢰즈의 사건 이론은 이런 전도의 설명이고, 그 설명의 출발점에 있는 것이 의미이다.
여기서 의미는 물리적 과정의 파생물이지만 동시에 어떤 원천이다. 의미는 언어의 세계와 그것이 대변하는 관념적 질서를 낳는다는 점에서 원천의 지위에 오른다. 의미는 자신을 낳은 물리적 이합집산의 논리에 해방되어 관념적인 차원을 열고 거기에 어떤 방향, 단위, 위계, 가치 등을 부여한다. 어떤 분절된 언어적 질서, 로고스의 질서가 조직되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제2의 원천이자 원인이기 위해서 의미는 자신의 발생 원천인 물체들과는 구별되는 다른 존재론적 삶, 다른 존재론적 시간을 열어젖힌다. 형이하학적 물체가 존재하는 시간이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이라면, 의미가 열어놓는 시간은 아이온(Aion)의 시간이다. 이 새로운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은 예전과 다른 논리에 따라 구성, 조직된다.
들뢰즈가 말하는 사건은 언어 이전의 세계와 언어 이후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 그 둘의 혼잡을 막아주는 어떤 보호막이 태어나는 사태다.
그리고 그 경계선이나 보호막에 해당하는 것이 의미다. 의미라는 형이상학적 존재가 물체의 표면효과라면, 의미는 그 효과들이 다시 이전의 형이하학적 질서로 낙오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표면 자체에 해당한다. 존재의 심층에서 포효하는 카오스를 가로막고 있는 이 표면은 어떤 초월론적 장(champ transcendental)과 같다. 그것은 경험적 차원에 있는 언어의 실질적 가능 조건이자 발생 조건이라는 뜻에서 어떤 초월론적 장이다.
들뢰즈의 사건 이론은 칸트의 초월론에 대한 보완이다. 17세기 유럽대륙의 합리론자들이 지식의 원천으로 본유관념을 거론할 때, 영국 경험론자들은 본유적으로 보이는 관념들도 실상 경험을 통해 발생함을 증명하려 했다. 들뢰즈는 칸트가 선험적이라 부르던 지식의 요소들이 경험적 차원에서 발생한 어떤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들뢰즈의 사건 이론과 그가 내세우는 초월론적 경험론은 칸트의 초월론적 관념론에 대한 도전이다.
위대한 주석자 빌헬름은 주역뿐만 아니라 노자의 도덕경』에 등장하는 도(道)를 불어의 SENS에 해당하는-SINN으로 옮겼다. 그가 이렇게 옮긴 것은 '도'가 서로 대립하는 두 힘(음양, 강약, 이어짐과 끊어짐 등등)을 끊임없는 유희의 운동 속에 보존하되 그 자체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보이지 않고 전적으로 비-물체적인 어떤 방향을 뜻하기 때문"이다.
*R. Wilhelm, I Ging. Das Buch der Bandlungen, 1/2권, (Düsseldorf. E. Diederich, 1924),
이런 번역과 주석을 따를 때 들뢰즈의 사건 이론 속에 핵심적인 역할을 띄고 등장하는 의미는 동아시아 존재론의 핵이라 할 도(道)와 유사한 어떤 것처럼 보인다. 들뢰즈의 사건은 도가 일어나는 사태, 도의 차원이 개방되는 신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신적인 사건을 장면화하는 시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아마 정현종의 시집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집은 사건들로 가득하여 아무거나 끄집어내도 좋을 테지만, 그래도 고르자면 위에서 인용한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가 제법 적격일 것이다. 이 시에서 사건은 '풍경'의 탄생에 있다. 사건은 "사람이/풍경으로 피어날 때 일
어난다. 그렇다면 풍경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 무한한 교감의 장면이 된다는 것일 게다. 정현종의 초기 대표작 「교감은 자연 속에 일어
나는 만물조응(物照應)을 노래하는 바, 그의 좋은 작품들은 대부분 만물교감의 사건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밤이 자기의 심정처럼
켜고 있는 가등(街燈)
붉고 따뜻한 가등의 정감을
흐르게 하는 안개
젖은 안개의 혀와
가등의 하염없는 혀가
서로의 가장 작은 소리 까지도
빨아들이고 있는
눈물겨운 욕정의 친화
- 교감 전문
정현종의 시에서는 빛과 공기, 소리와 향기, 형태와 색깔이 서로 조응하고 교감하면서 세상에 없는 광채를 빚어낸다. 별과 신체, 바람과 나무,파도와 꽃, 안개와 가로등이 서로를 함축하고 응축하면서 자연에 없는 밝음을, 이제까지 기대할 수 없었던 정념이 피어나게 만든다. 그런 만물교감의 사태, 그것이 정현종이 말하는 '사물의 꿈'이다. 사람은 그런 사물
의 꿈에 동참할 때, 한 없이 사물화되어 만물조응의 일부가 될 때 드디어.풍경이 된다. 그리고 정현종에 따르면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행복한 때는 없다."
『주역』의 언어를 빌리자면 그것은 모든 사물이 서로를 바라본다는 “만물개상견(萬物相見)의 사건이다. 이 문장을 쓴 저자에 따르면 세상은 이때처럼 밝을 수가 없다. 화엄종의 언어로 옮기자면 그것은 터럭이나 먼지 하나에서조차 우주 전체가 드러난다는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가 출현하는 사건이다. 정현종이 사건의 시인이라면, 그의 사건은 그
런 화엄적인 사건에 가깝다. 다만 그 거창한 해탈의 사건을 '풍경'이니 '섬'이니 하는 단순한 말 속에 기입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섬」전문
정현종의 섬은 만인조응(萬人照應)이나 만인개상견(萬人皆相見)의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일 것이다. 정현의 시는 그런 이상적인 장소로 다가서려는 무한한 이행의 여정이다.
김상환
1995년부터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프랑스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해체론 시대의 철학 (1996),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
(1999),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 김수영론』(2000),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2002), 『철학과 인문적 상상력」(2012)이 있으며 편서로는
라캉의 재탄생』(공편, 2002), 역서로는 이폴리트의 헤겔의 정신현상학 11(공역, 1986),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2004) 등이 있다.
*모든시 2020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