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천 서쪽에 앉은 서계서원, 거만·허영 없이 오직 평화와 고요가…
대구시 북구 서변동에 자리한 서계서원 전경. 서계서원은 정조 5년인 1781년에 건립됐으며, 동화천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계서원이라 불렀다. |
서계서원의 정자인 환성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환성정은 조선 후기 면암 최익현 등 수많은 우국지사가 방문한 장소로 유명하며, 1902년과 1971년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서계서원 입구 도로변에 효열각, 창렬각, 정려각이 자리하고 있다. 이 비각들은 인천이씨 집안의 효부와 열부를 기리고 있다. |
뒤돌아보지 않고 눈을 감으면 먼 데서 흐르는 자동차 바퀴의 마찰음과 도시의 소음이 물결처럼 느껴진다. 감각을 속이는 일은 쉽다. 담요와 같은 고요가 있다면…. 서계(西溪)에 서원이 있다. 자신에 대해 소리 높여 말하지 않고 다만 여기 ‘천의 서쪽’에 있음만을 표명한다. 물고기 뼈 모양으로 정성들여 쌓은 두툼한 담장에 둘러싸인 침착한 고요가 서계의 먼 물소리를 불러온다.
연산군 폭정 피해서 온 인천이씨
무태 서변동 안마을·연경동 정착
정조 5년 1781년 건립 서계서원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에 훼철
현재의 건물은 1992년 5월 복원
유림이 건물 덮어 禍모면 說도
스스로 깨어있는지 묻는 환성정
이억상이 1902년 현위치에 중수
#1. 천의 서쪽, 서계서원
동화천 서쪽 망일봉(望日峯) 아래 서계서원(西溪書院)이 있다. 담장 앞에 커다란 사적비가 서 있고 솟을대문에는 향의문(向義門) 현판이 걸려 있다. 의로 향하는 문이다. 안으로 들자 서계서원 편액이 걸린 강당과 마주한다. 조선말의 명필인 윤용구(尹用求)가 쓴 것이라 한다. 강당의 왼쪽 앞에는 누마루를 가진 정자 환성정(喚惺亭)이 자리하고 앞뜰의 오른쪽에는 커다란 배롱나무 한 그루가 부드럽고 윤이 나는 앙상한 줄기로 서 있다. 강당 뒤쪽에는 사당이 위치한다. 사당에는 조선 태종조에 대제학을 지낸 공도공(恭度公) 오천(烏川) 이문화(李文和)와 그의 8세손 태암공(苔巖公) 이주(李)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서원으로서는 소박한 규모다. 거만도 허영도 없이 오직 평화와 고요의 덕목으로 침묵하는 집이다.
무태 서변동 안마을과 연경동 대부분은 인천이씨(仁川李氏) 집성촌이다. 인천이씨가 대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5대조 퇴은(退隱) 이말흥(李末興)이 연산군의 폭정에 창녕현감을 그만두고 파동에 정착하면서였다. 1556년 대구 파동에서 태어난 이주는 15세 때 무태로 이거했다. 무태의 인천이씨는 태암 이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번성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문화를 중시조로 한다.
서계서원은 정조 5년인 1781년에 건립되었다. 지역 선비들은 이문화를 배향하기 위해 서원을 세우면서 동화천의 서(西)쪽에 있다고 하여 서계(西溪)서원이라 불렀다. 이주가 추가 배향된 것은 1801년이다. 이주는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도학(道學)과 문장으로 세상의 존경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낙재 서사원, 모당 손처눌, 곽재겸, 채몽연, 박충후, 이종문 등과 뜻을 모아 팔공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낙재 서사원과 모당 손처눌에 이어 의병장으로 활약한 그는 많은 전공을 세우며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과 체찰사(體察使) 이덕형(李德馨)에게 크게 인정을 받았다.
전란이 끝난 후 이주는 능참봉(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무태로 돌아왔다. 대구 향교를 달성으로 이건할 때 상량문을 지었으며 연경서원을 복원하는 등 지역의 교육을 일으키고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이주는 1604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모당 손처눌은 제문(祭文)에서 ‘하늘이 그 재주를 후하게 주었으면서 그 수명을 박하게 하였으며, 그 문재(文才)를 넉넉히 주었으면서 그 의식(衣食)을 가난하게 하였습니까’라며 애통해했다. 태암 이주는 모습이 그림과 같았고 말이 쇳소리처럼 명쾌하고 분명했으나 몹시 가난했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서계서원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러나 무태의 인천이씨 집안에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자 무태의 유림들은 살아있는 소나무를 베어다가 서원 전체를 덮어버렸다고 한다. 군졸들이 이곳에 몰려왔을 때 서원은 없고 송림만이 무성했으며, 동네 사람들은 모두 서원은 불타 없어진 지 오래라 했다. 군졸들은 그냥 돌아갔고 그렇게 서원은 살아남았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서계서원은 1992년 5월에 복원한 것이다.
#2. 늘 깨어 있는 집, 환성정
서계서원의 정자 환성정에는 수많은 편액이 걸려 있다. 경의재(敬義齋), 체인재(體仁齋), 서계리사(西溪里社), 금수랑(琴水廊), 희리당(希理堂), 화수정(花樹亭) 등. 그것은 정자 자신과 서계서원의 모든 시간을 아울러 전하는 이름들이다.
지학(志學)의 소년 이주가 무태로 이거한 이듬해 아버지 소재(疏齋) 이문성(李文星)이 세상을 떠났다. 이문성은 서변동 대곡에 묻혔으며 지금 그곳에는 그의 재실 심수재(心輸齋)가 자리한다. 이주는 약관(弱冠)이 지나 아버지의 묘 아래에 서실을 짓고 대곡정사라 했다. 후에는 육휴당(六休堂)이라 고치고 자신의 별호로 삼았다. 그리고 1582년 27세가 되었을 때 그는 동화천변에 띠집 정자를 지었다. 그것이 환성정의 시초다.
환성이란, 늘 깨어 있겠다는 의미다. 그는 환성정 기문(記文)을 직접 썼는데, 거기에 옛날 서암사 승려의 이야기가 나온다. 승려는 날마다 스스로에게 ‘주인은 깨어 있는가(惺惺否)’ 묻고는, ‘깨어 있다(惺惺)’라고 대답했다. 이주는 이러한 끊임없는 자문자답이 항상 마음을 깨어있게 하는 방법(常惺惺法)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기문에는 고려 왕건에 연원하는 무태의 의미가 기술되어 있고 육휴당은 공부하는 장수(藏修)의 장소, 환성정은 휴식하는 유식(遊息)의 장소라는 내용도 있다.
29세 때는 어머니의 명으로 과거에 응시했다. 그는 두 번의 향시(鄕試)와 동당시(東堂試)에 연이어 장원을 차지하면서 3장원(三壯元)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어 복시(覆試)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간 그는 과거장에서 ‘대학’을 외던 중 문득 한 글자에 의심이 생겨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때 장막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대구 출신의 고관이 손톱으로 가죽신에 글자를 새겨 그에게 보여준다. 이주는 일어서서 시험장 밖으로 나가버렸고 이후 단 한 번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환성정은 임진왜란 중에 불탔다. 전후 1년 뒤에 환성정을 복원하고 강학도 재개했다. 그러나 이주의 타계 후 환성정은 사라졌다. 대구읍지에 의하면 이후 사당을 세우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조정에서 금하여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17·18세기 영·정조 대는 정자보다 서원을 중심으로 학문이 발달했던 시기였고 이때 대구지역의 많은 정자들이 서원으로 변경되기도 했었다.
환성정은 1902년 이주의 9세손인 수헌(守軒) 이억상(李億祥)이 지금의 자리에 중수했다. 서계서원이 훼철되고 난 33년 후로 남아있던 건물을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정자는 6칸이었고 동쪽에 건 편액이 경의재, 서쪽은 체인재였다. 1971년에는 11세손 회연(晦淵) 이순희(李淳熙)가 다시 중수했다. 지금 환성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북측의 ‘ㄱ’ 자 평면의 온돌방과 남측의 ‘ㄴ’ 자 평면의 누마루가 맞물려 구성되어 있으며 누마루는 둥근 기둥을 세우고 계자난간을 두른 모습이다. 누마루에 걸린 환성정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다. 화수정은 강학당, 금수랑은 동재, 희리당은 서재의 현판이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환성정은 연재 송병선, 심석재, 송변순 형제와 면암 최익현 등 많은 우국지사들이 방문하여 교유하고 강학함으로써 대구지역 최고의 정자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3. 강물은 도도히 쉬지 않고 흐르고
서계서원 초입의 길가에 ‘효열각’ ‘창렬각’ ‘정려각’이 서있다. 철종, 순조, 정조 때의 인천이씨 집안의 효부와 열부들을 기리는 비각이다. 서계서원 주변으로는 많은 기와지붕이 윤슬처럼 흩어져 있다. 금서재, 백운정, 일신정, 채국정, 정관정 등. 오천 이문화에 뿌리를 둔 태암 이주의 후손들이 이어 남긴 집들, 이어 살고 있는 집들이다. 그들은 도드라지게 드러나지 않고 서계서원 아래를 평화스러운 고요로 흐른다.
이주가 환성정에서 지은 ‘금호범주(琴湖泛舟)’라는 노래가 있다. ‘강물은 도도히 쉬지 않고 흐르고(江水滔滔逝不休)/ 물가에 가득한 거문고 소리 고깃배 노래 소리에 화답하네(滿汀琴韻和漁謳)/ 끝까지 도달하는 데 어찌 옮기는 힘이 필요하겠는가(到頭焉用推移力)/ 강 가운데 저절로 떠다니는 배가 가장 사랑스럽네(最愛中流自在舟).’
환성정에 오르면 서계의 담장 너머 사방에 기와지붕들이 보인다. 그것은 마치 쉼 없이 흘러온, 저절로 떠다니는 배와 같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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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도시 대구 .5] 동화천 따라 펼쳐진 무태 인천이씨의 자취<하>오천 이문화와 태암 이주의 후예, 그리고 그들의 오래된 집
가지처럼 뻗은 길 따라 불쑥 나타나는 고택들…인천이씨 긍지가 느껴진다
일신정은 인천이씨 31세손 수헌 이억상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이다. 이억상은 일신정을 지어 공부하며 후진 양성에 주력했다. |
대구시 북구 서변동에 자리한 백운정은 조선말기 유학자 백운 이화상이 강학하던 곳이다. 이화상은 당대 영남의 대표적 작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서정이 짙은 시 98수가 전해진다. |
채국정은 인천이씨 32세손인 긍재 이병운의 강학소였다. 이병훈은 1872년 대구 향교를 이전할 때 상량문을 지은 인물이다. |
서계서원 뒤편에 자리한 금서재는 인천이씨 30세손인 금서재 이석규의 재실이다. 영리하고 비범했던 이석규는 문장력까지 탁월해 도내에 명성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
서계서원에서 조금 떨어진 망일봉 자락 아래 일신정과 채국정으로 가는 길. 후손들의 관리 덕분인지 정자 주변은 잘 정돈된 느낌이 든다. |
길을 따라 하나씩 고개를 내미는 집들이 있다. 무태 서계서원으로부터 가지처럼 뻗어 이어지는 길 이곳저곳에서 불쑥. 오천 이문화와 태암 이주로부터 이어져 온 후예들의 집이다. 과거와 현재가 혼합되어 있는 21세기의 표층위에서 그들은 범용하고도 정돈된 긍지로 자리한다. 이어간다거나 지킨다는 것의 무게를 생각하면 새삼스럽게 놀랍다. 오래된 고집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이미 의지다.
서계서원 뒤편 위치한 금서재
비범한 문장가 이석규의 재실
망일봉 자락 뒤뜰삼은 일신정
수헌 이억상 후진양성하던 곳
붓글씨로 명성을 떨친 이병선
서변동 조산엔 그를 기린 만송정
동화천 건너 동변동에도
선비정신 담긴 영사재·원장루
#1. 백운정과 금서재
서계서원의 뒤편에 금서재(琴西齋)가 있다. 인천이씨 30세손인 금서재 이석규(李錫奎)의 재실이다. 금서란 ‘금호강의 서쪽’이라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1816년에 태어난 그는 효와 우애가 깊었고 영리하고 비범했으며 문장이 탁월해 도내에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그는 대원군의 서원철폐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고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이 흑산도로 유배가게 되자 방면을 청원하였으며 을사년 늑약에 앞서 반대의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는 1892년 늑약의 치욕을 겪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재실은 사림들이 계를 만들고 후손들이 힘을 모아 지었다.
서계서원 위에는 흰 구름을 뜻하는 백운정(白雲亭)이 있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올린 네 칸 아담한 건물로 연꽃 조각으로 장식한 공포와 보머리의 봉황이 화려한 정자다. 백운정은 조선말기의 유학자 백운 이화상(李華祥)이 강학하던 곳이다. 그는 인천이씨 31세손으로 1842년 무태에서 태어나 20대 초반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기호학파 학자이자 시인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천성이 따뜻하고 어질며 순수하고 총명했다고 한다. 당대 영남의 대표적 작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서정이 짙은 시 98수가 전해진다. 그는 백운정에서 74세까지 장수했다고 한다.
#2. 일신정과 채국정 그리고 정관정
서계서원에서 조금 떨어진 남쪽에 망일봉 자락을 뒤뜰 삼은 일신정(日新亭)과 채국정(採菊亭)이 있다. 일신정은 인천이씨 31세손 수헌(守軒) 이억상(李億祥)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이다. 그는 1835년 무태에서 태어나 일찍 일신정을 지어 공부하며 후진들을 양성했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과 면암 최익현 등이 즐겨 찾아와 기문(記文)을 짓기도 하였고 일신정 운(韻)을 띄워 시로써 화답하며 즐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1905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서변동 도곡지 아래에는 후손들이 지은 재실 척첨재(陟瞻齋)가 지금도 단정하게 관리되고 있다.
일신정 아래 채국정은 인천이씨 32세손인 긍재(兢齋) 이병운(李柄運)의 강학소였다. 그는 1858년 무태에서 태어나 연재 송병선과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865년에는 우암(尤庵) 송시열의 시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복판(復板) 인쇄할 때 국내 유림회(儒林會)에서 추천 임명하여 우두머리로 활약했고 1872년 대구 향교를 이전할 때는 상량문을 지었다. 환성정의 주인 태암공(苔巖) 이주(李)가 1599년 대구 향교를 달성으로 이건할 때 상량문을 지었는데 300여 년이 지나 태암의 후손이 대를 이어 상량문을 지었으니 인천이씨 집안으로서는 감격스러운 일이다. 그는 만년에 채국정을 지어 은거했다. 향리의 유림들이 힘을 모아 보인계(輔仁契)를 만들어 강학하였으며 그가 1937년 79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는 사림회의 예법으로 장례를 치렀다.
서계서원 남쪽, 현재 무태어린이집 옆에는 정관정(靜觀亭)이 있다. 인천이씨 32세손 묵재(默齋) 이병철(李柄喆)의 재실로 그의 학문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72년에 건립했다. 이병철 역시 묵재와 심석재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대구향교 및 근동의 선비들과 활발하게 학문적으로 교유했다. 특히 그는 일신정의 수헌 이억상과 더불어 무태 인천이씨 문중의 성리학적 학풍을, 우암 송시열을 학파 시조로 하는 노론 기호학파로 계승하게 한 인물로 평가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탁와(琢窩) 정기연(鄭璣淵), 택와(擇窩) 우하철(禹夏轍), 중재(重齋) 윤봉주(尹奉周) 등과 함께 스승인 연재와 심석재를 모시고 상경해 조약의 부당성과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단을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스승 연재가 자결하고 연이어 심석재가 순절하자 이병철은 울분을 토하며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켰다.
#3. 만송정과 회연정사
서변동에 조산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그곳에는 인천이씨 32세손 창주(蒼洲) 이병선(李柄選)의 정자인 만송정(晩松亭)이 자리한다. 몸가짐과 행동이 단아했다는 그는 어려서부터 효우가 깊었고 특히 붓글씨가 뛰어나 나라안팎에 이름을 떨쳤다고 전해진다. 만송정은 그의 자손이 선대의 뜻을 이어 묘아래 지었는데 ‘만송개취간송만취(晩松蓋取澗松晩翠)’의 뜻이라 한다. ‘노송은 대개 그 상을 취하는데 깊은 골 시냇가의 소나무는 늦도록 푸르다’ 정도로 풀이하면 될까. 깊은 뜻을 헤아릴 수는 없으나 다만 물빛처럼, 솔빛처럼 푸르렀던 선대에 대한 영모의 이름이 아닐까 싶다.
도곡지가 있는 서변동 도곡마을은 외부에서는 마을이 있는지도 모를 만큼 입구가 좁은데 안으로 들면 나지막한 산으로 오목하게 둘러싸인 하늘 넓은 아늑한 땅이다. 그곳에 인천이씨 33세손인 회연(晦淵) 이순희(李淳熙)의 정자 회연정사가 자리한다. 언론인이자 정치인으로 영남일보 제3대 사장을 지낸 그는 총명하고 의리 있는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회연정사는 그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사회 정치적 세계 저편에 마련했던 고요하고 평온한 공간이었다.
4. 영사재와 원장루
동화천 건너 동변동에도 인천이씨의 정자가 자리한다. 서계서원의 맞은편 동화천변에는 영사재(永思齋)가 있다. 인천이씨 25세손인 천하(川下) 이영환(李英煥)의 재실이다. 흙돌담에 둘러싸인 정면 3칸, 측면 1칸 반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1935년에 후손들이 건립했다. 그는 집안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분수를 지키며 학문에 힘쓴 인물이라고 한다. 영사재의 입구 협문인 삼성문 양쪽으로 작은 화단이 가꾸어져 있고 키 큰 소나무 두 그루가 천하의 집을 지키듯 서있다.
동변동 금호강변의 화담 아래에는 원장루(遠長樓)가 있다. 인천이씨 33세손 확재(確齋) 이창희(李昌熙) 정자다. 그는 1898년 무태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채국정의 주인인 긍재 이병운이다. 아버지를 비롯해 지재(止齋) 송철헌(宋哲憲), 후암(后庵) 송회헌(宋會憲), 후담(後潭) 채헌식(蔡憲植) 선생 등 원근의 여러 학자에게 학문을 배운 그는 천성이 강철과 같이 굳고 밝았다고 한다. 또한 평생 명리를 좇지 않고 자신과 집안을 바르게 하는데 힘썼으며 다른 사람의 단·장점이나 옳고그름을 말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원장루는 그가 만년에 지은 정자로 탁족을 즐기며 벗들과 함께 음풍농월로 소요한 곳이라 한다. 1969년 세상을 떠난 그는 원장루 뒷산에 묻혔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다. 그러나 무척이나 오래전인 듯 느껴지는 과거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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