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1/06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3 - 지구 온실가스, 사상 최대치…세계기상기구 연보 지구의 온실가스 농도가 사상 최고치로 올랐다. 최근 1년간 늘어난 이산화탄소는 지난 10년간 평균 증가율을 웃돈다. 지난해 이산화탄소 농도는 산업화 이전인 1750년보다 141%나 짙어졌다. 같은 기간 또 다른 온실가스인 메탄가스와 이산화질소는 160%, 20%씩 늘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1062219201&code=970100 2009 - 국내 최초 쇄빙연구선 ‘아라온’ 인도명명식 개최 두꺼운 얼음을 부수며 남극과 북극을 누비게 될 우리나라 최초의 쇄빙연구선 아라온호가 드디어 닻을 올렸다. 출처: 국토해양부 (서울=뉴스와이어) /뉴스와이어 2009년 11월 06일 http://www.newswire.co.kr/newsRead.php?no=438828
2009 - 법원, 박정희·장지연 유족의 게재 및 배포금지 가처분신청 기각 법원, 박지만 가처분 신청 기각 민족문제연구소가 8일 공개하기로 한 <친일인명사전>에 대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위암 장지연 선생의 후손 등이 법원에 낸 게재·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이 모두 기각됐다. 서울북부지법 민사13부(재판장 서창원)는 박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가 친일인명사전에 아버지의 이름을 싣는 것과 이 사전의 배포를 금지해 달라고 낸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고 6일 밝혔다. 재판부는 “친일인명사전의 수록은 학문적 의견 개진 또는 표명에 가까운 것으로 이런 견해가 학문적 의견을 표명할 자유의 한계를 넘어선 것으로 단정 짓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한겨레 2009-11-06 오후 08:07:58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86348.html
1999 - 오스트레일리아 공화제 국민투표 부결 <오늘의 역사> [11월 6일] 1999년, 오스트레일리아 공화제 국민투표 부결 1999년 11월 6일, 오스트레일리아는 국제(國制)를 입헌군주정에서 공화제로 바꾸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국민투표 내용은 헌법 전문을 개정하는 것과 국가원수를 영국 국왕에서 간선제 대통령으로 바꾸는 2가지 안건에 대해 각기 찬성과 반대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투표 결과, 공화제 찬성 45%, 반대 55%로 공화제 전환은 부결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독립국이면서도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이며 형식상 오스트레일리아 총리의 추천을 받은 총독이 영국 왕을 대신하여 오스트레일리아를 통치하는 체제를 취하고 있다. 물론 실제 정치 권력은 오스트레일리아 총리에게 있다. 이러한 체제는 영연방(British Commonwealth) 소속 국가들의 정치 자율성을 보장한 1942년 웨스트민스터 헌장(Statute of Westminster Adoption Act 1942)에 따라 만들어진 체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공화제 운동은 이미 20세기 초 영국으로부터 독립할때부터 있었지만, 1999년 국민투표는 1991년에 결성된 오스트레일리아 공화주의자 운동(Australian Republican Movement, ARM)이라는 단체의 노력으로 실시될 수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양대 정당 중 노동당은 ARM의 공화제 이념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반면, 양대 정당 중 하나인 보수 성향 자유당(The Liberal Party of Australia)은 공화제 전환에 반대했다. 1995년,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폴 키팅(Paul Keating)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장래가 유럽보다는 아시아 지역과 결부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영국과 유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이제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일원으로서 정체성을 재확립할 필요를 역설했다. 이를 위해서 오스트레일리아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제에서 공화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시기를 키팅은 오스트레일리아 성립 100주년이자, 시드니 올림픽이 개최되는 2000년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1998년 초 국민회의(People's Convention)에서 공화제 도입을 결정하고, 1999년에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 국민투표는 냉전 종식 전 남태평양에서 미국과 영국과 동맹국으로서 공산주의 확산 저지에 적극 참가했던 오스트레일리아가 시선을 주변 지역으로 돌리면서 생긴 변화를 반영한다. 동티모르에 대한 다국적군 파병에 앞장섰던 일이나, 심지어 축구 조차 오세아니아 축구협회에서 아시아 축구 협회로 바꾼 것도 이러한 오스트레일리아의 변화를 반영한 것들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헌법은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서는 국민투표를 거쳐야 하며, 국민투표에서는 6개 주 중에서 4개 주 이상에서 과반수를 획득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1999년 투표에서 공화제 찬성파는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준주(Australian Capital Territory)에서만 63.27%를 달성했을 뿐 나머지 5개 주에서는 모두 50% 미만을 득표했다. 1997년 11월에 있었던 여론조사에서는 공화제 도입 찬성이 52%, 반대가 33%, 미결정이 15%로서 공화제 전환이 유력시되기도 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2007년 1월의 여론조사(Newspoll 조사)에서는 45% 대 36%(19%는 무응답)로 다시 공화국 전환 찬성파에게 유리해졌으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공화제 운동은 역사가 깊기 때문에 앞으로 다시 논의가 불붙을 수도 있다. 김종현 (sepp@ntmnews.co.kr) 기자 /엔티엠뉴스 2009년11월05일 17시09분 http://www.ntmnews.co.kr/detail.php?number=1886
서울시는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를 치루게 될 상암지구 월드컵 주경기장 명칭을 `서울 월드컵 경기장`으로 확정짓고 1998년 11월 6일 김대중 대통령과 고건 서울시장 등 관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을 가졌다. 2001년 12월쯤을 완공으로 한 주경기장은 보조경기장을 합쳐 4만6천7백평에 건물면적 1만7천7백70평 규모로 연면적이 3만8천3백70평에 달한다. 주경기장은 지상6층, 지하1층, 최고높이 48.3m 규모의 직사각형모양으로 건설되며, 이 안에 길이 1백5m, 폭 68m의 천연잔디구장이 들어서게 된다. 경기장의 외양은 우리민족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21세기의 희망을 담을 수 있는 `전통소반`과 `팔각 모반`을 두겹 겹쳐놓은 상태로 형상화된다. 또한 경기장의 전체 이미지를 마포나루에 드나들던 황포돛배가 모여있는 모습으로 표현하며 경기장 지붕은 우리나라의 이미지와 문화를 띄운다는 의미로 전통 방패연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조선
1997 - 독도 접안시설 울릉도서 준공식 독도 방위와 물자수송을 위한 독도 접안시설 공사가 착공 1년11개월 만에 끝나 6일 준공됐다. 그러나 준공식은 장소와 규모를 둘러싼 외무부와 해양부 사이의 의견대립으로, 독도가 아닌 울릉도 독도박물관 앞에서 열려 아쉬움을 남겼다. 이날 조정제 해양수산부 장관은 외무부의 반대에도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포항까지 내려왔다가 청와대의 긴급 불참 지시로 발길을 돌리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이날 오후 열린 준공식은 조 장관 대신 장승우 해양부 차관과, 김태식 국회 농림 해양수산위원장, 시공업체 대표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히 치러졌다. 독도 접안시설은 지난 95년 12월 독도를 방위하고 물자수송의 불편을 덜기 위한 목적으로 착공됐으며, 500t급 배를 댈 수 있도록 길이 80m의 물량장과 진입통로 100m, 간이 접안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이날 준공식과 관련해 주무부처인 해양수산부 관계자들은 준공식을 독도에서 치르지 못한데다 준공식 참석을 위해 포항까지 내려갔던 장관이 귀경하자 “독도가 우리땅 맞느냐”면서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이에 대해 외무부 쪽은 “독도 접안시설 준공식이 대대적으로 보도될 경우 독도가 우리 땅임을 대외적으로 시위하는 효과가 있으나, 국제사회에는 오히려 독도가 영토분쟁지역이라는 사실만 재확인시켜주는 꼴이 된다”고. /한겨레 1997년 11월7일
1979 - 계엄사,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전모 발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가 1979년 11월 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수사전모를 발표했다.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은 "이 사건은 주범인 前중앙본부장 김재규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대통령이 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허욕으로 빚은 내란목적의 살인사건이며 군부 또는 여타 조직의 관련이나 외세의 조종이 개입된 사실은 전연 없었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사건현장에는 박대통령,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김계원 외에 만찬석을 도와준 여인 2명이 함께 있었고 김재규는 만찬도중 박대통령과 차 경호실장을 총으로 쏘아 살해했다는 것이다. 평소 이권개입이 많다는 대통령의 경고와 정국수습책의 거듭된 실패로 해임설이 돌자 불안한 상태에 놓인 김재규는 박 대통령이 軍후배이며 연하인 車실장만을 편애한다고 생각, 박대통령을 제거하면 자신이 차기 대통령으로 가장 적임자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또 부마사태를 대통령제거의 계기로 역이용, 거사 후 계엄군을 장악하면 사후수습이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살해계획을 구상했다는 것이다. 김재규는 1980년 1월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5월 24일 교수형을 당했다. /조선
서부 사하라 정복행진 한때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의 모로코!
[오늘의 경제소사/11월6일] 사하라 대행진 1975년 11월6일 오전9시, 모로코 남부 도시 파르타야. 35만명의 민간인들이 국경을 넘었다. 목적지는 스페인령 사하라. 모로코 국기와 코란을 든 행렬은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다. ‘식민통치자 물러나라’ ‘조상의 땅을 되찾자’. 비무장 민간인들이 열사의 땅으로 들어간 이유는 식민지 처리방식에 대한 불만. 사하라의 장래를 주민투표로 결정한다는 국제사법재판소의 결의가 자칫 분리독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국경에 지뢰 2만개를 살포한 스페인의 경고에도 아랑곳없이 행렬은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차량 1만여대를 포함한 행렬의 길이만 120㎞. 스페인은 결국 손을 들었다. 대행진 8일째인 11월14일 사하라 식민지를 모로코와 인접국 모리타니에 넘긴다는 마드리드협약을 맺었다. ‘녹색행진(Green March)’으로 불린 행렬도 각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문제는 새로운 분쟁이 잉태됐다는 점.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린 탓이다. 미국은 친서방적인 모로코를 지지, 사하라의 대부분을 몰아줬지만 스페인은 분리독립을 원하는 사하라해방전선(SADRㆍ사하라아랍민주공화국)을 뒤에서 지원했다. 지하자원채굴권을 보장 받기 위해서다. 스페인군이 이듬해 초 철수한 뒤 모로코와 SADR는 주민투표에 수 차례 합의하고도 투표 대상 선정에 관한 이견으로 지금껏 동족 간 대립을 계속하고 있다. 제2의 동티모르 사태로 비화할 가능성까지 점쳐진다. 첨예한 갈등에 깔린 것은 자원. 비료의 원료이자 우라늄을 추출할 수 있는 인(燐)광석 세계 매장량의 70%가 사막에 깔려 있다. 철광석도 풍부하고 석유부존 가능성도 높다. 각국 정상이 잇따라 사하라사막 인접국을 방문하고 미군이 아프리카 사령부 창설을 추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돈과 자원.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7/11/05 17:33
리처드 닉슨(Richard Mihous Nixon)이 미국의 제37대 대통령으로 1968년 11월 6일 당선됐다. 1946년 캘리포니아에서 연방의회 하원의원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정계에 입문하였고 하원의원 시절에는 비미활동위원회에서 알자 히스 등의 대소협력을 고발하여 반공주의자로 이름을 떨쳤다. 1952년 D.D.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56년에 재선되었다. 1960년 대통령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 민주당 후보 J.F.케네디에게 패하였으나 1968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H.험프리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재임기간동안 미국-중국 관계개선을 위하여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외교적 성과를 올렸으며 1969년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하여 발표한 `닉슨독트린`은 유명하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말미암아 1974년 8월 대통령 임기중에 사임한 대통령이 되었다. /조선
1968 - 한국의 통일운동가, 사회운동가 임수경(林秀卿) 출생 임수경 [林秀卿, 1968.11.6~ ] 임수경(林秀卿 1966년 11월 6일 ~ )은 대한민국 평화, 통일, 사회운동가, 방송인. 언론인이다. 1989년 대한민국 정부의 허락없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평양축전)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자격으로 참가한 후 휴전선을 통해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통일운동가로, 한국 전쟁으로 한반도 군사 분계선이 가로막힌 후 공개적으로 휴전선을 걸어서 넘은 최초의 민간인으로 기록되었으며, “통일의 꽃”으로 불렸다.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사건 /위키백과
아이젠하워 재선 1956년 11월 6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재선(再選)에 성공했다. 상대는 4년전 선거 때와 똑같은 민주당의 애들라이 스티븐슨이었고 결과 역시 일방적인 승리였다. 스티븐슨은 풍부한 행정력과 세련된 언변까지 갖춘 뛰어난 정치가였지만 국민들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 아이젠하워를 선택했다. 다행히도 군인출신의 그에 유리하게 1952년 선거때는 한국전쟁 중이었고, 1956년 때는 수에즈운하를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될 때였다. 1952년, 아이젠하워가 37년간의 군인생활을 접고 정치가의 길로 들어섰을 때 공화당ㆍ민주당 양당 모두 그를 향해 손짓했으나 그는 공화당을 선택했고 민주당 집권 20년에 종지부를 찍었다. 당선후에는 ‘한국전을 종식시키겠다’는 선거공약에 따라 한국을 방문했다. 1948년 대통령 선거때 맥아더가 후보로 나섰으면 그 역시 떠밀려 출마할 뻔한 일이 있었다. 맥아더와 아이젠하워가 평소 ‘장군님’ ‘사랑하는 아이크’로 부르는 사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맥아더와 사이가 안좋은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를 견제하기 위해 아이젠하워를 대항마로 내세우려 했기 때문이다. /조선
1952 - 미국, 첫 수소폭탄 실험 미국은 1952년 오늘 사상 처음으로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1936 - 루마니아의 영화감독 에밀 로티야누(Loteanu, Emil) 출생 로티야누 [Loteanu, Emil, 1936.11.6~2003.4.18] Emil Loteanu (November 6, 1936 – April 18, 2003) was a Romanian film director born in Clocuşna, Moldova which was then a part of Greater Romania. He moved to Moscow in his early life. Biography Loteanu was born in Clocuşna, and after the death of his father and losing contact with his mother, who had moved to Romania, lived his early life on the streets, sleeping in warehouses and hostels. He studied at the Mkhat studio school and graduated from VGIK in 1962. He made his directorial debut with Bolshaya gora in 1960 at the Moldova Film Studio, and continued to make films there until 1975, when he joined Mosfilm. With films such as Tabor ukhodit v nebo (aka Queen of the Gypsies, 1975) and Moy laskovyy i nezhnyy zver (aka A Hunting Accident, (1977), Loteanu began to attract international attention. Loteanu died on April 18, 2003, in Moscow, at the age of 66. Filmography
[책갈피 속의 오늘]1922년 안창남 日비행대회 우승 “떳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4&oid=020&aid=0000213119
- Mexico, 500 Pesos (Banknote)
1911년 11월 6일 멕시코의 혁명가 마데로(Francisco Madero)가 '민주주의의 사도'로서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대통령에 취임했다. 마데로는 멕시코의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에 대한 투쟁에서 승리한 혁명가였다. 디아스가 언론에서 발표한 은퇴 약속을 어기고 1910년 선거에 재출마하려 하자 멕시코 정계는 끓어올랐다. 이에 마데로는 재선반대당을 결성해 대통령 후보로 등록했다. '실질적인 참정권-재선불가'를 구호로 내세운 그는 반란을 선동하고 당국을 모욕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보석으로 풀려난 후 마데로는 텍사스로 가서 혁명군을 결집하고 자신이 멕시코의 합법적인 대통령임을 선포했다. 혁명군이 1911년 5월 10일 시우다드후아레스를 점령하자, 디아스는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1911년 10월의 대통령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대통령이 된 마데로는 중도적인 개혁노선을 폈으나 보수파와 혁명파로부터 동시에 반발을 샀다. 1913년 심복인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장군의 배신으로 체포되었으며, 감옥으로 이송되는 도중 호송병에게 암살당했다. 마데로의 죽음은 군부독재에 대항한 끊임없는 투쟁에서 혁명적 단결의 상징이 되었고 민주주의 세력들은 그의 순국으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1901년 제2차 헤이-폰스포트조약에 의해 미국이 단독으로 운하를 건설하고 운하지대를 요새화할 수 있는 권리를 영국에 인정받았다. 당시 중앙아메리카지협에서 운하건설 후보지로 예상된 곳은 니카라과와 파나마였다. 미국은 파나마 루트를 취하기로 결정하고 콜롬비아 정부와 교섭, 1903년 1월 미국 정부가 파나마지협에 운하를 건설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것을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그 비준을 둘러싸고 미국의 T. 루스벨트 정부가 나타낸 협박적 자세가 콜롬비아 의회의 반발을 초래함으로써 결국 의회는 조약비준을 거부하였다. 한편 콜롬비아로부터 분리 경향이 강화되어 있었던 파나마 지방 주민들은 콜롬비아 의회가 조약비준을 거부한 것에 실망하고 독립운동을 진행하였다. 그 해 11월 3일 그들은 미국 정부의 지원을 기대하면서 콜롬비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단행하였다. 이 독립은 미국에서 파견한 군함의 도움을 받아 성공하여 미국 정부는 11월 6일 파나마공화국을 승인하였다. 미국은 곧 파나마 특명전권대사인 프랑스인 P. 뷔노바리야와 운하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yahoo
1893 - 러시아의 작곡가 표트르 차이코프스키(Tchaikovsky, Pyotr) 사망 챠이코프스키 [Tchaikovsky, Pyotr Il'ich, 1840.5.7~1893.11.6]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사망 러시아가 배출해 낸 최고의 작곡가 페테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가 1893년 11월 6일 콜레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향년 53세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총결산이라 할 수 있는 ‘비창’ 교향곡을 자신의 지휘로 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하고 1주일 후였다.
무질 [Musil, Robert, 1880.11.6~1942.4.15] [오늘의 책<11월 6일>] 세 여인 로베르트 무질 / 문학과지성사 1880년 11월 6일 오스트리아 소설가 로베르트 무질이 태어났다. 1942년 몰. 무질은 세계문학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한국에서는 너무 낯선 작가다. 국내에 나와 있는 그의 작품은 데뷔작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1906)과 작품집 <세 여인>(1924) 두 권에 불과하고 몇몇 단편이 번역돼 있는 정도. 하지만 그의 대작 <특성 없는 남자>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반열의, 독일어권 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꼽힌다. 오스트리아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무질은 군사학교에 입학했다가 공대로 옮겨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다시 베를린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특이한 이력을 가졌다. "말할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고 역사라는 일람표 속에 갈겨 쓴 낙서처럼 인간집단 속으로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존재, 한여름에 흩날리는 눈송이와도 같은 존재, 그 존재는 현실인가 꿈인가, 좋은가 나쁜가, 귀중한가 무가치한가?"라고 무질은 <세 여인>에 수록된 '통카'에서 묻고 있다. 3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세 여인>에서 무질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외피로,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 즉 현대인의 자아 찾기를 그린다. <교양>을 쓴 독일 작가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를 "억지로 읽지 ?邦만?절대로 읽을 수 없는 소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조이스나 프루스트와 마찬가지로 무질은 이 작품을 통해 '하나의 완전한 문화의 우주를 목록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무질은 그만큼 독특하고 사색적이다. 그는 이 소설에서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1년 동안 '삶으로부터의 휴가'를 떠나는 주인공을 시켜, 세계의 모든 이념들을 시험하고 있다. <특성 없는 남자>는 새롭게 한국어 번역이 진행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하종오 기자 joha@hk.co.kr /한국일보 2007/11/05 17:52:18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11/h2007110517521984210.htm
1866 - 조선시대 악화(惡貨) ‘당백전’ 발행 [어제의 오늘]1866년 조선시대 악화(惡貨) ‘당백전’ 발행 ㆍ왜곡된 통화정책에 민생 황폐화 조선말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한다.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는 대공사였지만 세도정치와 정쟁으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선 ‘특별한 상징’이 필요했다. 거기에 서구 열강의 개방 요구를 쇄국정책으로 맞서며 국방 강화에도 많은 예산이 필요했다. 하지만 만성적인 재정난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국고만으로 국가를 유지하기란 벅찬 상황이었다. 관료와 백성들을 대상으로 원납전(願納錢)이란 강제 기부금을 거두고 부동산세의 일종인 결두전(結頭錢)을 신설하기도 했으나 막대한 경비를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대원군은 국가 재정위기 타개를 위한 비상대책으로 당시 통용되던 상평통보 1문(文)보다 100배의 명목가치를 지니는 말 그대로 ‘1당 100의 화폐’ 당백전(當百錢)을 만들어 낸다. 정진호 기자 hotmail@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11-05 21:55:5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11052155525&code=100100&s_code=ap005
1861 - 캐나다 태생의 미국 농구 창시자 제임스 네이스미스(Naismith, James) 출생 네이스미스 [Naismith, James A., 1861.11.6~1939.11.28] 네이스미스는 인기 스포츠인 농구를 창시한 캐나다 태생 미국의 체육교육 지도자이다. 스프링필드대학교 체육학과 전임강사로 재직 중이던 1891년 가을, 네이스미스는 당시 체육학과 학장인 루더 핼시 굴릭 2세로부터 학교에서 겨울에 실시할 재미있고 안전한 실내경기를 고안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새로운 경기 개발에 착수했다. 그는 미식축구, 필드 하키, 그밖에 여러 가지 야외경기의 특징들을 참조하고 이론적으로 선수들 사이의 신체접촉을 없애는 방법을 연구한 끝에 농구를 창안했다. 이 신생 스포츠는 1892년까지 아직 정식 명칭이 없었다. 한 학생으로부터 '네이스미스볼'이라고 하자는 제안이 있었으나 겸허한 네이스미스는 복숭아 바구니를 사용한 스포츠이므로 '바스켓볼'(농구)이라고 이름 붙이기로 결정했다. 그후 그는 1898년 로렌스에 있는 캔자스대학교 체육학과 주임교수가 되었으며 1908년까지 그곳에서 농구를 지도했다. 그는 농구를 고안했을 뿐 아니라 미식축구 선수들을 위한 보호 헬멧을 만들어내기도 했으며, 1898년에는 콜로라도 주 덴버에 있는 그로스의과대학(콜로라도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1959년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에 네이스미스 기념 농구의 전당이 세워졌다. /브리태니커
"내게 농구는 수련이며 선의의 경쟁이다. 이기는 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
- 제임스 A. 네이스미스
1860 - 링컨 미국 제16대 대통령 당선 [역사속의 오늘] 링컨, 미 대통령 당선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는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860년 11월6일, 미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당선됐다. 그는 최남부에서 거의 득표하지 못했고 일반투표에서도 40%가 못 되는 표를 얻었지만 표가 분산되었기 때문에 선거인단 투표에서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 당시 공화당은 단일후보였지만 민주당은 분열되었고, 대선후보가 4명이나 됐다. 1809년 2월 12일 켄터키에서 출생한 그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연속된 실패속에서 신념을 갖고 포기하지 않는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주의원과 하원의원만 지냈고 상원의원은 한번도 하지 못한 인물이며 대통령 후보에도 낙선했다. 하지만 1860년 5월 18일 링컨은 시카고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3차에 걸친 투표 끝에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것.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남부 주들이 노예제도에 대해 이견을 보이며 연방을 탈퇴, ‘남부연합’ 정부를 결성했다. 결국 링컨은 연방정부의 분열을 막기 위해 남북전쟁을 선언했다. 이 전쟁에서 그는 ‘노예해방’을 선언했고 이것이 승리의 계기가 됐다. 그는 재선 후 1865년 4월 15일 연극을 보던 중 암살됐다. 정보관리부 이재근 /매일신문 2008년 11월 06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0666&yy=2008
1854 - 미국의 작곡가, 취주악 지휘자 존 필립 수자(Sousa, John Philip) 출생 수자 [Sousa, John Philip, 1854.11.6~1932.3.6] 미국의 취주악 지휘자이자 작곡가. 워싱턴 출생. 《워싱턴 포스트 마치:Washington Post March》(1889) 《성조기여 영원하여라:The Stars and Stripes Forever》(97) 등의 행진곡으로 이름을 떨쳐 ‘행진곡의 왕’으로 일컫는다. 아버지는 에스파냐 출신의 포르투갈인이다. 소년시절부터 극장에서 바이올린 연주와 지휘자로서 활약하다 25세 때 대통령의 의전악대인 해병군악대 악장이 되었다. 1892년 악장직을 사임하고 자기의 악단인 수자취주악단을 조직하여 미국 각지뿐만 아니라 유럽에도 5회나 연주여행을 하여 호평을 받았다. 자기의 악단을 위하여 고안한 수자폰(최저음의 대형 금관악기)으로도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현역으로 복귀, 해군군악대 훈련소장이 되고, 군악소령에까지 진급하였다. 100여 곡에 달하는 행진곡 외에도 오페레타 ·무곡 ·가곡 등의 작품이 있다. /네이버
1833 - 노르웨이의 소설가 요나스 리(Lie, Jonas) 출생 리 [Lie, Jonas Lauritz Idemil, 1833.11.6~1908.7.5] 노를란 지방의 아이카 출생. 처음에는 해군사관을 지망하였으나 근시(近視)로 인해 단념하고, 대학 입시를 위해 예비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H.입센(1828~1906)과 B.비에른손(1832~1910)을 알게 되면서부터 문학으로 전향하였다. 고향인 노를란 지방을 소재로 한 처녀작 《환시자(幻視者):Den fremsynte》(1870)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후 여러 편의 명작을 발표하여 노르웨이 소설계의 대표자가 되었다. 《3개 돛대의 미래호:Tremasteren Fremtiden》(1872) 《수로 안내인과 그의 처:Lodsen og hans Hustru》(1874) 《전진(前進)!:G pa!》(1882) 등의 해양소설로 명성을 얻었고, 이어 《생의 노예:Livsslaven》(1883)를 시작으로 지방도시의 가정생활을 묘사한 작품 《길례의 가족:Familien paa Gilje》(1883) 《사령관의 딸들:Kommandørens Døtre》(1886) 등에서는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동정이 차분하고 간소한 필치의 배경에 흐르고 있어, 근대소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고전(古典)으로 되어 있다. 그 밖에도 신비적 ·염세적 색채가 짙은 만년의 단편집 《나쁜 힘》(1890) 《트로르》(1891) 《니오베》(1893) 등이 있다. 그는 입센, 비에른손 등과 함께 노르웨이 문학의 전성기를 구축한 대표자의 한 사람이다. /naver
1825 - 프랑스의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Garnier, Charles) 출생 가르니에 [Garnier, (Jean-Louis-)Charles, 1825.11.6~1898.8.3] 프랑스의 건축가.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파리오페라극장 설계자로서 유명하다. 1842년 국립미술학교에서 배운 뒤 1848년 로마대상을 받고 5년간 로마에 유학하였다. 그 동안 이탈리아 ·그리스 및 터키 등지를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1854년 귀국하였다. 베네치아의 르네상스양식(르네상스미술)을 바탕으로 한 화려한 바로크풍 건축의 대표적 작가이며, 대표작으로는 파리오페라극장(1875), 몬테 카를로 오페라극장과 카지노(1878)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아파이어신전(神殿)의 연구 보고 (A Travers les Arts)》(1869) 《Étude sur le Théêtre》(1871)와 논문 《Le Nouvel Opéra de Paris》(1874) 등이 있다. /네이버
- Belgium, 200 Francs (Banknote) 1814 -벨기에 태생의 프랑스 색소폰 발명자 아돌프 삭스(Sax, Adolphe) 출생 삭스 [Sax, (Antoine Joseph) Adolphe, 1814.11.6~1894.2.4] [오늘속으로(11월6일)] 삭스 1814년 11월6일 벨기에의 악기 제조인 아돌프 삭스가 태어났다. 1894년몰(歿).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4&oid=038&aid=0000108317
1787 - 세르비아의 언어학자, 민속문학자 부크 카라드지치(Karadzic, Vuk) 출생 카라드지치 [Karadzic, Vuk Stefanovic, 1787.11.6~1864.2.6] 세르비아의 언어학자, 민속문학 연구의 아버지. 세르비아어의 어법에 맞추어 키릴 문자를 개혁함으로써 가장 간단하고 가장 과학적·논리적인 철자법 체계를 만들었다 (→ 세르보크로아티아어). 고향 마을 근처에 있는 오래된 트로노샤 수도원에서 읽기와 쓰기를 배웠고, 1804년에 세르비아인들이 투르크인에 대항하여 처음 일으킨 반란 초기에 그의 구역의 반란군 지휘관에게 고용되어 편지를 쓰고 읽는 일을 맡았다. 그는 제1차 혁명(1804~13) 때 주로 여러 마을 사령관(군사지도자)의 필경사 노릇을 하면서 국가에 봉사했고, 때로는 학교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혁명이 실패하자 그는 세르비아를 떠났지만, 카라게오르게를 비롯한 지도자들을 따라 러시아로 가는 대신 오스트리아 빈으로 갔다. 이곳에서 슬라브학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여기에 용기를 얻어 세르비아어로 된 시와 민요를 수집하고 세르비아어 문법책과 가능하면 세르비아어 사전까지 쓰기로 결심했다. 카라드지치는 세르비아어가 30개의 독특한 소리를 갖고 있으며, 그 가운데 6개 소리를 표기할 수 있는 자모가 키릴 문자에 없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는 이 소리를 표기하기 위해 새로운 자모를 도입하는 한편, 세르비아어에는 전혀 쓸모가 없는 18개 자모를 버렸다. 교회와 작가들은 그의 개혁안에 강력히 반대했지만, 정부는 1859년 마침내 카라드지치가 개정한 문자를 사용한 책의 출판을 허락했다. 1818년 걸작 〈세르비아어 사전 Srpski rječnik〉을 처음 출판했다. 세르비아어를 게르만어와 라틴어로 바꾸어 펴낸 이 사전에는 2만 6,270개의 낱말이 수록되어 있고, 민담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많이 실려 있다. 어휘를 4만 6,270개로 늘린 재판(1852)은 오늘날까지도 권위 있는 저서로 남아 있으며, 1934년 증쇄되었다. 그는 민속문학을 수집하기 위해 세르비아·보스니아·크로아티아 등지를 비롯하여 여러 지역들을 자주 여행했다. 그 결과는 4권의 〈세르비아 민속 시가집 Srpske narodne pjesme〉(1823~33)에 나타나 있다. 그밖의 저서로는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모음집(1821), 세르비아 속담집(1837), 세르비아어로 번역한 〈신약성서〉(1847)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1771 - 독일의 석판(石版) 인쇄술 발명가 알로이스 제네펠더(Senefelder, Aloys) 출생 제네펠더 [Senefelder, (Johann Nepomuk Franz) Alois, 1771.11.6~1834.2.26] 체코 프라하 출생. 왕립극장 배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극작(劇作)에 종사하는 동안, 자작(自作)의 구도(構圖)를 조각시키는 비용이 달려, 복사(複寫)의 발명에 뜻을 두었다. 1796년경 오늘날에도 요긴한 석판인쇄의 원리를 발명하였다. 그것은 목판(木版)이나 볼록판(凸版)과 같이 부조(浮彫)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제판(製版)하는 방법과는 달리 화학적 방법을 이용하는 컬러 평판(平版)인쇄였다. 1806년부터 뮌헨의 왕립인쇄국에서 지도(地圖)의 인쇄를 지도하고, 그 뒤에도 착색(着色) 석판인쇄술의 개량에 힘썼다. 만년에 바이에른왕으로부터 연금(年金)을 하사받았다. /naver
1766 - 이탈리아 태생의 프랑스 역사가, 정치가 보타(Botta, Carlo) 출생 보타 [Botta, Carlo Giuseppe Guglielmo, 1766.11.6~1837.8.10] 이탈리아 태생 프랑스의 역사가이며 나폴레옹을 지지한 정치가. 1786년 토리노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했고 청년시절에 프랑스 혁명 이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794년 프랑스 첩자라는 혐의로 체포당한 뒤 이듬해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갔으며 1796~98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과 코르푸 원정에 군의관으로 참가했다. 1799년 코르푸 역사책을 냈고 같은 해 피에몬테의 프랑스-이탈리아 연합정부에 들어갔다. 나중에는 나폴레옹을 몰락시키는 데 이바지하기도 했지만, 나폴레옹을 열렬히 지지했던 그는 1808년 프랑스 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815년 프랑스 시민권을 얻었고 이어 낭시 아카데미와 루앙 아카데미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주요저서로는 그 시대 많은 문서와 라파예트가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미국의 관점에서 쓴 미국혁명사가 있다. 이 책의 영어본 〈미국 독립전쟁사 History of the War of the Independence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1820~21)가 필라델피아에서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1755 - 폴란드의 계몽주의 정치평론가 스타니스와프 스타시츠(Staszic, Stanislaw) 출생 스타시츠 [Staszic, Stanislaw(-Wawrzyniec), 1755.11.6~1826.1.20] 폴란드의 으뜸가는 계몽주의 정치평론가.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라이프치히·괴팅겐·파리에서 공부했고 같은 시대에 살았던 대부분의 폴란드인들보다 훨씬 더 유럽인다운 시야를 갖고 있었다. 교사가 된 뒤, 사회와 정치 문제에 대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지질학자로서 광물을 탐사하고 동로바 지구의 탄광과 올쿠슈 지역의 광산을 재건했다. 또한 농업에도 관심을 갖고 농작물 재배술 개량을 주장했으며, 1824년에는 자신의 소유지를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주고 협동농장을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저서인 〈폴란드를 위한 경고 Przestrogi dla Polski〉(1790)에서 젠트리 계층의 사회경제적 약탈 행위를 가차 없이 묘사하며 민주개혁을 주장했다. 그밖의 저서로는 철학적 장시 〈인간의 조건 Ród ludzki〉(1819~20)과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폴란드어로 번역한 작품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1661 -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2세(Carlos II) 출생 카를로스 2세 [Carlos II, 1661.11.6~1700.11.1] 에스파냐 합스부르크가(家) 최후의 왕(재위 1665∼1700). 펠리페 4세의 아들. 마드리드 출생. 광인왕 카를로스라고도 한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불구였으나 4세 때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모후 마리아 데 아우스트리아가 10년간 섭정하였다. 이 기간 중 네덜란드전쟁이 일어났고, 프랑스왕 루이 14세의 침략을 받았으며, 궁정 내의 음모로 고통을 받는 등 국내외적으로 다난하였다. 1675년 비로소 카를로스의 친정이 시작되고 이복형인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를 중용하였다. 친정시대(親政時代)에도 루이 14세의 침략정책으로 어려움이 많았으나, 1697년 라이스바이크조약을 맺음으로써 일단락되었다. 2번이나 결혼하였으나 후사가 없어, 프랑스 부르봉왕가의 후계자(펠리페 5세)를 지명하였는데, 이 때부터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 에스파냐계승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naver
1632 - 스웨덴의 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Gustav II Adolf) 전사 구스타프 2세 아돌프 [Gustav II Adolf, 1594.12.9~1632.11.6] [역사속의 인물] 북방의 사자 구스타브 아돌프 王 17세기 중반 스웨덴은 보잘 것 없는 북유럽 변방의 동토(凍土)였다. 속령 핀란드까지 합쳐도 인구가 130만명을 넘지 않았으며 변변한 산업도 없었다. 그런 조국을 북유럽의 강대국으로 만든 인물이 구스타브 아돌프 왕이다. 재위 20년동안 조세 사법 교육 등의 개혁과 함께 부국강병책을 추진, '북방의 사자'로 불렸다. 군사적 재능도 뛰어나 보병과 기병, 포병, 군수를 한데 통합하는 새로운 전술을 마련해 '근대전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단호함과 용맹을 겸비한 그는 왕보다는 야전 지휘관이 더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부하가 군법을 위반한 장교를 어떻게 처리할지 묻자 "교수대가 없는가 아니면 목재가 부족한가?"라고 되물은 것은 우명한 일화다. 전투에서는 항상 선두에 서서 싸웠다. 30년 전쟁의 주요 전투였던 뤼첸 전투에서 1632년 오늘 37세의 이른 나이로 전사했다. 서둘러 적진으로 돌진하다 호위병들과 떨어져 혼자 적진 깊숙히 와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뒷날 나폴레옹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한니발, 알렉산더 대왕과 함께 그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의 반열에 올리고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정경훈 논설위원 /매일신문 2009년 11월 06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8071&yy=2009
1494 - 오스만제국의 제10대 술탄 쉴레이만 1세(Süleyman I) 출생 쉴레이만 1세 [Süleyman I (Süleyman the Magnificent), 1494.11.6~1566.9.5/6] 쉴레이만 1세(오스만 터키어: سليمان, 터키어: I. Süleyman, 1494년 11월 6일 - 1566년 9월 5일)는 오스만 제국의 제10대 술탄이다(재위 1520년 - 1566년). 군사전략가로서의 능력이 뛰어났던 그는 46년이라는 긴 치세 동안 세 대륙을 가로지르며 13차례의 대외원정을 실행에 옮겨 수많은 군사적 업적을 쌓음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서구인들은 그를 ‘장려한 쉴레이만(the Magnificent)’이라는 별명으로 불렀으며, 한국에서는 흔히 ‘쉴레이만 대제’로 번역된다. 터키에서는 법전을 편찬하여 제국의 제도를 정비한 업적을 높이 사 ‘입법자(Kanuni; 아랍어: القانونى al‐Qānūnī)’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다. 그의 이름 쉴레이만은 유대교와 기독교와 더불어 이슬람교에서도 경전으로 추앙받는 구약성서에 기록된 고대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의 터키어식 발음이다. 당시 이스탄불에 주둔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한 대사는 쉴레이만에 대해 ‘도리에 어긋나는 모든 것들을 맹렬히 공격하고 무너뜨린 인물’이라며 그를 평했다. 그는 또한 쉴레이만을 작렬하게 내리치는 천둥과 번개의 모습에 비유하기도 했다. 생애 /위키백과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