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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17〉 고려 최고의 명장 김방경에게 軍人의 길을 묻다
“국가 수호가 최선인가, 개인적 의리를 지키는 게 우선인가?”
글·사진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 일본 본토 정벌에 나선 한민족 유일의 인물
⊙ 어려서부터 강직하고 옳지 못한 일에 나선 적 없어
⊙ 고려 왕실 지키려 옛 전우인 삼별초 토벌에 나서
⊙ 고려 출신 희대의 간신 홍다구에게 당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아
⊙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도 탐낸 명장
⊙ 조갑제 “몽골제국(帝國)의 압제를 피해 가면서 고려 왕실과 고려 백성들을 보호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고뇌하면서 묵묵히 걸어갔던 한 거인(巨人)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었다”
⊙ 역사에 희귀한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인물로 화려한 고려문화 꽃피웠다
⊙ 진주성 싸움 김시민 목사·백범 김구 선생이 그 후손
전라남도 진도의 벽파진은 지금은 배가 오가지 않는 항구지만 삼별초의 난부터 임진왜란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항구였다. 그 영화가 이 한적한 항구에 다시 올 것이다.
인간은 평화(平和)를 원하지만 세상엔 전쟁(戰爭)이 끊이지 않는다. 세상은 분명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거늘 평화와 전쟁은 빙하기와 간빙기(間氷期)처럼 순환하고 만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욕망 때문일 것이다.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순간, 군인(軍人)들의 시대가 시작된다.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1907~ 1991)라는 일본 소설가가 있다. 역사소설의 대가(大家)다. 주요 작품으로 《돈황》 《칭기즈칸》 《누란》 등이 있으며 산악소설 《빙벽(氷壁)》도 유명하다. 그가 쓴 소설 《풍도(風濤)》가 있다. 국내에는 《검푸른 해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됐지만 지금은 절판됐다.
‘풍도’는 말 그대로 ‘바람’과 ‘파도’라는 뜻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뜻밖에도 고려시대 장수 김방경(金方慶·1212~1300)이다. 김방경은 한민족 역사상 유일하게 일본 본토 정벌에 나선 장군이다. 조선 초 이종무(李從茂·1360~1425) 장군이 있지만 그는 대마도를 정벌했을 뿐이다.
김방경 장군이 일본 본토 정벌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곳이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 합포항이다. 여기서 고려와 몽골 연합군은 고려 기술자 3만5000여 명을 동원해 전함 900척을 만들었다. 합포에 그 흔적이 몇 군데 남아 있다. 당시 군인들이 마셨다는 우물과 ‘몽고간장’이다.
마산 합포가 지역구인 자유한국당 이주영 의원에 따르면 몽골군이 주둔하면서 간장을 빚는 법이 전해져 1905년 지금의 몽고식품의 전신(前身)인 몽고간장이 창업했다. 몽고식품은 100년 기업으로 유명한데 지난해 전(前) 회장이 운전기사에게 ‘갑질’을 해 명성에 먹칠을 했다.
합포에서 출발한 여몽(麗蒙)연합군은 고려 충렬왕 원년인 1274년 4만 군사를 이끌고 일본으로 향했다. 4만 원정군은 몽골군과 한족 군대 2만5000명, 고려군 8000명과 키잡이-뱃사공 등의 지원병력으로 구성돼 있었다. 당시 고려군의 총사령관이 바로 김방경 장군이었다.
여몽연합군은 합포항을 출발해 대마도에 상륙한 뒤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고 섬을 점령했다. 대마도에서 9일을 보낸 뒤 여몽연합군은 일본 규슈 연안의 이키(壹岐)섬에 상륙했다. 이키섬을 점령한 5일 뒤에 여몽연합군은 규슈 하카타(博多)에 상륙했다. 하카타는 지금의 후쿠오카다.
대마도와 이키섬의 영주들은 여몽연합군과 맞서 싸우다 전멸했다. 당시 일본 가마쿠라 막부(幕府)는 대군을 보냈지만 여몽연합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일본 사무라이들은 1대1 싸움에는 능했지만 지금의 미국보다 더 강력했던 세계 최강국 몽골이 대포까지 가져와 쏘아댔기 때문이다.
《고려사(高麗史)》는 김방경 장군이 당시 전쟁을 지휘하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 왜군이 몰려와서 장검(長劒)이 좌우에서 번득였으나 김방경은 심어놓은 나무마냥 물러서지 않았다. 김방경은 효시, 즉 전투 신호용 화살 하나를 뽑아 쏘고 소리를 높여 외치니 왜군들이 놀라서 기가 죽어 달아났다. 왜군이 대패(大敗)하고 엎드려진 시체가 삼을 베어 눕힌 듯이 많았다.
여몽연합군은 가마쿠라 막부군을 도륙낸 뒤 밤에 하카타만에 정박시켜 둔 함선에 돌아가서 쉬었는데 갑자기 태풍이 불어와 함선들이 대부분 침몰하고 말았다. 배에 타고 있던 여몽연합군의 피해도 심했다. 기록에 따르면 배가 부서져 바다에서 익사(溺死)한 원정군의 수가 1만3500명이었다고 한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보다 열세인 해·공군력을 만회하기 위해 사용한 전법을 가미카제(新風)라고 한다. 이 가미카제, 즉 일본을 지켜주기 위해 신(神)이 일으킨 바람의 원조가 바로 여몽연합군을 격퇴시킨 1274년 유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김방경은 왜 몽골군과 일본 정벌에 나선 것일까.
김방경 장군의 초상화다.
김방경 장군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할아버지(김민성·金敏成)가 양육했다. 성품이 강직했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땅바닥에 뒹굴면서 울었다. 그때마다 소나 말이 그를 피해 지나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김방경 장군은 1229년(고종 16년), 집안을 배경으로 한 음서로 관직에 들어갔다. 16세에 산원 겸 식목녹사(式目錄事)를 겸했으며 여러 번 승진을 거듭해 감찰어사에 올랐다. 그때 그는 우창(右倉)을 감검(監檢)했는데 당시의 권력자인 재상의 청탁도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때 재상과 김방경이 나눈 대화가 전해진다.
“김 어사, 지금 어사들의 행동이 옛날 어사들의 자세보다 못한 것 같소.”
“저도 옛 어사들과 똑같이 행동할 수 있으나 저는 오로지 나라의 재정을 비축하고 감사할 뿐 다른 이들의 비위를 맞추어줄 수는 없습니다.”
김방경 장군은 1248년 서북면 병마판관이 됐다. 불행하게도 그가 서북면 병마판관이 됐을 때 몽골의 침입이 시작됐다.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김방경 장군은 위도(葦島)로 들어가 제방을 쌓고 저항했다. 그가 쌓은 제방은 해조(海潮)의 피해를 막았을 뿐 아니라 간척 효과도 겸했다고 한다.
김방경 장군은 1263년(원종 4년) 지어사대사(知御史大使)가 됐고 그해 전라남도 진도(珍島)에 침략한 왜구를 물리쳐 상장군이 됐지만 반대 세력의 미움을 사 남경유수(南京留守)로 좌천되기도 했다. 하지만 인망이 두터워 곧 서북면 병마사로 복직됐고 후에는 형부상서, 추밀원부사로 승진했다.
김방경 장군의 운명을 뒤흔든 것은 그가 처음 서북면 병마사로 나갈 때 침략했던 몽골이었다. 당시 고려 왕조는 강화도(江華島)로 천도해 대몽항쟁을 벌이고 있던 중 원나라와 개경 환도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러던 중인 1268년(원종 9년) 임연(林衍)이 난(亂)을 일으켰다.
임연을 제거하라는 명을 받은 김준(金俊)이 오히려 임연에게 제거되고 원종은 임연에 의해 폐위됐다. 임연은 안경공 창(安慶公 淐)을 왕으로 즉위시키면서 반원(反元)의 입장을 굳혀 개경으로의 환도를 거부하고 강화도에서 계속 정권을 쥐려 했다.
이에 몽골 수도에 있던 세자가 황제에게 임연을 토벌해 줄 것을 청했다. 황제는 몽가독(蒙哥篤)에게 군사 2000명을 주며 토벌을 명했다. 이때 세자가 김방경에게 몽가독을 도우라고 했으나 김방경은 몽골군이 대동강을 건너면 백성들이 놀라는 것은 물론 혼란을 틈탄 변란(變亂)을 염려했다.
실제로 북계(北界)의 반민(叛民)인 최탄(崔坦) 등은 몽가독에게 ‘사냥을 핑계로 대동강을 건너 왕경(王京·개경)을 엄습하여 왕족을 사로잡고 옥백(玉帛)을 얻자’고 유혹했고 몽가독은 이 말을 따르려 했다. 김방경은 이런 사실을 세자에게 알리고 몽골군의 진격을 중단시켰다.
전남 진도의 남도석성은 삼별초가 항거했던 곳이다.
임연이 등창으로 급사하자 원종은 개경 환도를 단행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세력은 삼별초를 중심으로 대몽항쟁을 계속했다. 이것이 1270년 6월 일어난 삼별초의 난이다. 지도자는 배중손(裵仲孫) 등이었다. 삼별초는 승화후 온(承化後 溫)을 왕으로 추대해 고려와 별도의 조정을 만들었다.
이에 조정은 김방경을 추토사(追討使)로 임명한 뒤 참지정사 신사전(申思佺)과 함께 삼별초 공격을 명했다. 어제의 전우(戰友)가 오늘은 적(敵)이 된 셈이었지만 김방경은 조정의 보전을 위해 삼별초를 토벌할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다. 당시 삼별초는 강화도를 떠나 진도에 머물고 있었다.
김방경은 삼별초에 함락되기 직전이었던 전주와 나주를 방어하고 진도의 대안(對岸)에서 토벌에 진력하다가 무고로 개경에 압송되기도 했지만 곧 석방돼 다시 삼별초의 토벌에 나섰다. 당시 전투에서 원나라의 원수 아해(阿海)의 후퇴를 막는가 하면 고려군 단독으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1271년 새로 원나라의 원수로 임명된 흔도(忻都)와 더불어 진도를 공격해 삼별초를 토벌한 공으로 김방경은 수태위 중서시랑 평장사(守太尉 中書侍郞 平章事)가 됐다. 김통정(金通精) 등이 삼별초 잔류 세력을 이끌고 제주로 가자 1273년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 원나라의 장수 흔도, 고려 출신의 간신 홍다구(洪茶丘)와 함께 삼별초를 멸망시켰다.
이 공로로 김방경은 시중(侍中)이 됐는데 그해 가을 원나라로 가 그의 명성을 전해 들은 원나라 세조(世祖)에게 환대를 받았다. 다시 이야기를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풍도》의 한 대목으로 되돌려본다. 소설에는 고려 주둔 몽골군 사령관 흔도가 김방경에게 불평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 황제께서는 나로 하여금 몽골군을 관할하게 하고 그대로 하여금 고려군을 관할하도록 했는데 그대는 매양 일만 있으면 고려왕에게 미루고 고려왕은 그대에게 밀어버리니 과연 누가 고려군의 일을 맡아야 할 것인가.”
이에 김방경이 답했다.
“출정 시에는 군대를 장군이 관할하는 것이고 평화시에는 국왕의 관할을 받는 것이니 본래 법이 그렇지 않은가.”
이 말이 끝나자 흔도는 새를 한 마리 잡아서 갖고 놀다가 김방경이 보는 앞에서 죽여 버린 뒤 물었다.
“이렇게 한 데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오?”
김방경이 답했다.
“농부들이 힘써 농사를 지어놓으면 이것들이 와락 달려들어 곡물을 다 쪼아 먹어 버리니 장군께서 그 새를 죽인 것은 잘한 일입니다.”
흔도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내가 여기에 와서 보니 고려 사람들은 모두 글을 아는 것이 중국의 한족(漢族)과 똑같다. 속으로 몽골 사람들이 살육을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을 미워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몽골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그런 살육할 권리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죄가 되지도 않고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고려 사람들이 우리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유다.”
흔도의 말 속에는 ‘글 좀 안다고 해서 까불지 마라. 군사력이 바로 정의(正義)다’라는 ‘뼈(骨)’가 담겨 있다. 김방경이라고 왜 욱하는 마음이 없었을까마는 그로서는 그런 꾀라도 쓰지 않으면 조정과 고려 백성을 모조리 사나운 몽골 군대의 처분에 다 내어놓아야 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강화도의 강화산성이다. 여기에도 우리 역사가 중첩돼 있다.
개인적인 신념과 국가를 수호해야 하는 최고위급 군인의 입장은 다르다. 1273년 여몽연합군 1만명이 160척의 함선을 동원해 김통정의 삼별초 잔류군을 치기 위해 추자도를 거쳐 제주도 함덕포구에 상륙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김방경은 여몽연합군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그의 칼에 의해 한민족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4대 전투-신라 삼국통일·고려 대몽항쟁·조선 임진왜란·대한민국 6·25-의 빛나는 역사 가운데 하나가 허물어졌으니 김방경은 신라시대 김유신처럼 “외세를 끌어들여 한민족의 자존심을 허물어뜨렸다”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조갑제 전 《월간조선》 사장은 자신이 운영하는 ‘조갑제 닷컴’에 이렇게 쓰고 있다.
“저는 조선조 문종 때 김종서, 정인지가 편찬한 《고려사》를 읽으면서 왜 일본인 이노우에 야스시가 김방경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하는 오랜 의문을 풀 수가 있었습니다. 김방경의 생애는 이순신의 생애처럼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바가 있었습니다. 몽골제국(帝國)의 압제를 피해 가면서 고려 왕실과 고려 백성들을 보호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고뇌하면서 묵묵히 걸어갔던 한 거인(巨人)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노우에 야스시는 아마도 《고려사》를 읽고서 김방경의 생애에 감동되어 《풍도》를 써야겠다는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원나라 세조가 일본 정벌을 결심한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원 세조는 일본에 항복을 권하기 위해 모두 6차례나 고려와 원의 사신을 일본에 파견했다. 세조는 남송(南宋)을 공략하기 전에 해상으로 연결된 남송과 일본의 통교관계를 끊어 남송을 고립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에 일본이 거부하자 원나라가 합포에 만든 것이 바로 정동행성(征東行城)이었던 것이다. 1차 일본 정벌이 실패한 뒤에도 원나라는 계속해 일본 정벌을 시도했다. 그래서 제주도에 목마장(牧馬場)을 두고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이라는 기구까지 고려에 설치했다.
전쟁을 준비하는 한편 원나라는 일본에 두 차례나 사신을 보내 국서(國書)를 전했으나 사신들이 모두 살해되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원나라는 남송을 멸망시킨 후인 1281년(충렬왕 7년) 2차 일본 정벌을 단행했다. 그간 일본 원정에 소극적이던 고려는 이때부터는 적극적으로 원정 계획에 참여했다.
진도의 삼별초 근거지였던 용장산성터다.
충렬왕이 일본 원정에 적극 협력한 것은 고려에 파견되어 있던 원나라 세력 홍다구 등을 축출하고 자신의 측근 세력을 육성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또 왜구 침략을 근절시키려는 뜻도 있었다. 2차 여몽연합군은 모두 4만명(원 3만·고려 1만명)으로 함선 900척이 동원됐다.
몽골은 또한 중국 양자강 이남 강남(江南)에서 차출한 강남군을 추가했는데 그 총 병력이 10만에 함선이 3500척이나 됐다. 이 2차 정벌 때 김방경의 직책이 관령고려국도원수(管領高麗國都元帥)에 도원수(都元帥)였다. 김방경은 다시 합포를 출발해 이키를 거쳐 하카타로 향했다.
묘하게도 여몽연합군은 이번에도 전투에선 승리했지만 태풍과 전염병으로 큰 손해를 입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여몽연합군과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2차례 전쟁은 삼국에 모두 영향을 끼쳤다. 가마쿠라 막부는 국력을 낭비해 쇠퇴하고 결국 일본에서는 남북조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고려 역시 두 차례 전비(戰費)를 지출하느라 국고가 텅텅 비게 돼 몽골의 7차례에 걸친 침략에도 버틸 수 있었던 체력이 고갈되고 말았다. 더욱이 일본 정벌을 위해 설치됐던 정동행성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남아 고려의 정치에 간섭하는 기관이 되고 말았다.
남도석성은 세월호 침몰사고가 일어났던 곳과 지척에 있다.
전쟁은 김방경에게도 상처를 남겼다. 특히 고려인으로서 몽골에 귀화한 홍다구는 김방경을 모함한 뒤 세조(쿠빌라이)에게 간청해 스스로 신문관이 돼 고려로 와 직접 김방경을 조사했는데 하필이면 계절이 겨울이었다. 홍다구는 늙은 김방경을 발가벗기곤 쇠사슬로 목을 죄고 때렸다.
보다 못한 충렬왕이 “이 문제는 이미 무고한 것으로 판정이 난 것인데 왜 또 조사를 하는가”라고 만류했으나 홍다구는 황제의 명령이라면서 고문을 계속해 김방경은 하루에도 몇 번씩 기절했다. 그래도 김방경이 거짓 자백을 거부하자 당황한 홍다구는 충렬왕의 측근들에게 넌지시 권하는 것이었다.
“만약 김방경이 자백하면 그 한 사람에게만 벌을 줄 것이요. 그것도 귀양 보내는 정도로 가볍게 하겠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충렬왕은 김방경에게 “고문을 계속 받으면 장군이 결국 죽을 것이오. 일단 거짓 자백이라도 하여 우선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소”라고 권했지만 김방경은 거절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일개 병사의 몸으로 출세하여 직위가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니 저의 간과 골이 땅바닥에서 구르게 된다고 해도 나라의 은혜를 다 갚지 못하거늘 어찌 일신(一身)을 아끼어 근거 없는 죄명을 둘러쓰고 국가를 배반하겠습니까.”
김방경은 또 홍다구를 향해 “나를 죽이려거든 죽여라. 나는 부당한 일을 가지고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고 소리쳤다고 한다. 아무런 자백을 받아내지 못한 홍다구는 김방경이 갑옷을 집에 감추어두었다는 엉뚱한 트집을 잡아서 그를 대청도로 귀양 보내는 것으로 일을 끝냈다.
홍다구의 트집은 원나라 세조에게도 전해진 모양이다. 김방경을 좋아했던 세조는 “김방경이 숨겨놓았다는 갑옷이 몇 개나 되더냐”고 고려 측에 물었다. 고려 왕실에서 마흔여섯 벌이라고 답하니 웃으며 “반역을 도모한 사람이 마흔여섯 벌의 갑옷으로 무엇을 한단 말인가”라고 했다고 한다.
세조는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자신이 직접 김방경을 조사하겠다며 충렬왕이 연경으로 올 때 김방경을 대동하라고 했다. 세조는 김방경을 조사한 뒤 그를 복직시켰지만 김방경은 사표를 내고 말았다. 그런 김방경은 다시 2차 일본 원정군의 고려군 사령관이라는 악역(惡役)을 맡게 됐다.
‘선(先)안동’이라 불린 김방경 장군 가문에 이어 ‘후(後)안동’ 집안을 대표하는 이가 청음 김상헌 선생이다. 사진은 청음의 종택이다.
만일 여몽연합군이 이때 일본을 정벌했더라면 임진왜란-정유재란도 없었을 것이고 일제의 조선 강제 병탄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몽연합군은 다시 일본의 군사력이 아닌 태풍에 지고 말았다. 당시 상황을 《고려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8월에 폭풍을 만나서 모두 물에 빠져 죽고 그 시체들이 썰물과 밀물을 따라 포구에 밀려들어 포구가 시체로 가득 찼으므로 시체를 밟아야 걸어 다닐 수가 있을 지경이었다. 마침내 회군(回軍)했다.
15만 원정군 중 살아 돌아간 사람은 약 3만이었다고 하니 엄청난 대패를 당한 것이다. 김방경은 나이 일흔둘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김방경이 고향인 안동으로 성묘를 가는데 왕이 김방경의 아들에게 수행하도록 명령했다. 일행이 안동에 도착하니 김방경의 친구들이 며칠 묵고 가라고 붙들었다. 김방경은 아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지금 가을 곡식이 다 익어 베어들일 때가 되었다. 백성들의 힘이 부족해 다른 일을 할 짬이 없는데 어찌 오래 머물러 있어 그들을 번거롭게 만들겠느냐. 너는 이 길로 곧 돌아가도록 해라.”
김방경은 여든아홉에 세상을 떴다.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장수(長壽)였는데 《고려사》는 이렇게 평하고 있다.
충직하고 진실하고도 후하였으며 도량이 아주 넓어서 사소한 일에 구애됨이 없었고 엄격하고도 굳세었으며 항상 말이 적었다. 아들, 조카에 대해서도 반드시 예의에 맞게 언동을 취하였으며 일을 처리해 나가는 데 조금도 착오가 없었다. 자기 몸을 잘 거두고 근면하고 절약하는 기풍(氣風)을 견지하였으며 대낮에는 드러눕는 일이 없었고 늙었으되 머리칼이 검은 채로 남아 있었고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능히 견디었으며 병환이라곤 없었다. 또 옛 친구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누가 죽었다 하면 꼭 문상하러 갔으며 일평생 임금의 잘못을 남에게 말하지 않았고 현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된 뒤에도 나랏일을 집안일 근심하듯 하였다.
그는 죽은 뒤에 안동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했으나 그 당시 정권을 잡았던 사람들이 이것을 싫어하여 예식(禮式)대로 장사지내는 것을 반대했다. 그 후에 왕이 이것을 후회했다.
진주성 대첩의 주인공인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동상이 진주성 입구에 서 있다.
조선에서 만든 고려 왕 사당(祠堂)에 16명의 고려 신하가 배향돼 있다. 태조 왕건의 건국 공신 배현경, 홍유, 복지겸, 신숭겸, 유금필을 시작으로 성종의 서희, 현종의 강감찬, 예종의 윤관, 인종의 김부식, 고종의 조충과 김취려, 공민왕 때의 안우, 김득배, 이방실, 정몽주 그리고 김방경이다.
기라성 같은 이들의 선정 기준은 ‘고려 건국과 왕실 및 백성을 국난에서 구하고 충의를 인정받은 신하들’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김방경에겐 삼별초의 난을 진압했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김방경은 빼어난 문관이기도 했다. 한 김방경 연구서를 인용해 본다.
‘김방경은 문무겸전 출장입상, 명재상이자 명장, 난세의 영웅, 항쟁과 굴종 사이를 오간 고려의 버팀목, 고려를 구한 거시적 안목의 실리주의자, 일본과 대적 우리 민족의 명예를 드높인 5대 인물, 고려의 안동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신라 중심이었던 고대 역사를 이규보의 《동명왕편》,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 등 고구려 및 단군조선까지 확대하였고, 쿠빌라이가 티베트 승려를 통해 만든 파스파 문자는 조선 세종의 한글 창제에 영향을 주었으며 현존 최고의 문화재로 평가되는 팔만대장경,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상정고금예문, 의학서 《향약집성방》, 몽산덕이의 《육조단경》, 간화선을 이은 지눌과 혜심의 조계종 법맥은 물론 진돗개, 안동소주, 하회탈, 별신굿놀이, 차전놀이 등은 세계 대제국 몽골과의 교류 속에 전래되어 꽃을 피워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김방경 시대 때 고려 중기 100년 무신 정권과 몽골의 말발굽 아래 모든 것이 파괴된 황무지에 세계국가 대원제국의 국제도시 대도(大都)로부터 전해온 새로운 문명과 고려의 민족적 자주성이 융합하여 꽃을 피운 한국 최초, 최고(最古)로 여겨지는 창조물들이 잉태되어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진주성 촉석루는 한국의 3대 누각 가운데 하나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사장 역시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난세(亂世)에 태어난 이 두 거인(巨人-이순신 장군과 김방경)은 조정이나 신하나 백성들에 대하여 섭섭한 생각이 있더라도 그런 것들을 사소하게 넘기고 오히려 국가라는 대의(大義)를 위하여 전 생애를 투척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한국인이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그런 충성은 백성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가슴 가득히 깔려 있었기 때문이며 그런 점에서 충무공과 김방경은 위대한 휴머니스트였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이 두 분의 생애에서 위인들을 괴롭히고 거목(巨木)을 찍어 내리려고 하는 추악한 소인배들의 모습도 함께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우리 민족의 피 속에 흐르고 있는 빛과 그림자일 것입니다….’
김방경 장군의 후손 중에는 걸출한 인물도 많다. 때문에 김 장군의 후손들은 선(先) 안동 김씨라 불리는데 조선시대의 간신 김자점이 유일한 흠이라고 할 수 있다. 김방경 장군의 후손 중에는 임진왜란 때 3대 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성 싸움을 이끈 충무공 김시민(金時敏) 목사와 백범 김구 선생이 있다.
김방경 장군의 스토리를 읽다 보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한민족이 자랑할 만한 네 명의 장군, 즉 김유신-김방경-이순신-박정희는 두 가지 운명으로 나뉜다. 김유신-김방경처럼 국가를 지켰지만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비판을 받는 쪽과 이순신-박정희처럼 국가를 살리고도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 쪽, 혹은 김유신-박정희처럼 나라 경영에 성공한 쪽과 김방경-이순신처럼 평생을 고생만 한 군인 두 가지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한민족에게 영웅이 희귀한 이유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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