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세재는 영동의 추풍령 단양의 죽령과 더불어 반도의 남북을 잇는 3대 고개중 하나이다
새재는 새도 날아 넘기 힘든 고개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조령이라 한것은 우리말 새재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뜻을따라 그리한 것으로 보인다.
사이 재나 새로 난 재 보다는 날아다니는 새 즉 조령으로 번역된 새재가 걸맞기도 하거니와 현지의 느낌이나 정취에도 그게 어울린다
근대에와서 새재 옆으로 신작로가 따로 나면서 고
갯마루를 이화령이라 하였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일한 자동차 길이었다
뜰이 넓어 높은 느낌은 덜 하지만 조망이 탁트여
험준한 산새가 한 눈에 들어온다
시원한 산 바람이 땀을 식히고 속 좁은 폐부를 씻어낸다 썩은 공기를 마시고 뱉고 다시 마시면서
헉헉대던 저 도시에서 내 삶이 차라리 측은해 지는
순간이다
골짜기를 감아 돌면서면 금방 예사롭지 않은 풍경이 꿈속의 전설처럼 펼쳐지면서 가끔식 픽업 전기차를 빼면 등산로 라기보다는 참 나무랄 데 없는 산책로이다
나 홀로 걸어도 어린시절로 돌아가거나 두고 온 벗을 얘기 하노라면 도시의 일상은 벌써 옛 추억처럼 멀어져간다
아니면 갖가지 풀과 나무의 이름을 궁금해 하고
능선의 흐름을 살피면서 계곡의 소리를 들어도
길벗이 된다
(과거 급제 소원을 빌던 돌탑)
길은 원래 세 갈래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걷는 이 대로가 말하자면 선비 관리 양민들이 걷던 길이다 옆으로 비켜나면 좀더 가파른 등성이를 가로질러 가는 단축으로 또는 숨은 길이있다
(조령원터 : 고려와 조선조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공익시설)
지금은 족적마저 잃어버린 길로 승려나 신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이들이 이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의 이화령 쪽 길은 주로 상인들이
이용하는 통로 였다니 신분이 공간을 다르게
점유했기로 길까지 그렇게 했을까? 결국에는 모두가 같은 길을 가는것을...
(맨발로 걸어야 생각과 느낌이 신선해진다)
흙으로 포장된 길은 걷기에 편하다 이길은 평지나 다름없어 오히려 편하다 노폭도 적당히 넓어 마치
산속의 신작로를 걷는 기분이다
(길옆에 물들이 졸졸 흐를 수 있도록 물길이 조성되어 있다)
구비마다 우뚝우뚝 때로는 무더기로 그리고 더러는
울창한 숲속에 홀로 서있는 아름드리 장송과 꿈쩍않고 버티고 있는 검은바위 흰바위들의 사연을
헤아려 가노라면 시간이 절로간다
(교귀정 : 신.구 감사가 업무를 인수인계 하던곳)
산은 여전히 짙푸르다 살갖과 피부까지 파래지는
느낌이라고 할까?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 다는
문경 아리랑은 새재에 자생하는 물박달 나무의
가락이다 낙엽송 참나무 오리나무 너도밤나무
물론 억새도 빠지지 않는다
(현감 구명규 선정비와 상주목사 이익저 불망비가
깍아지른 절벽 암벽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 장군(신립)은 왜 이 천혜의 요새를 버리고
충주로 물러났을까? 무엇이 장군으로 하여금 배수의 진을 치지 않을 수 없게끔 압박 하였을까?
기우는 나라들 붙잡고자 몸부림치는 장병의 가슴속에 어떠한 통한이 있었을까?
달관한 이가 작렬한 최후의 무아지경 이라면 그것은 어떤 것일까?
현감 구명규 청덕 선정비
(조곡폭포)
한발 비껴서면 바위틈에 부서져 내리는 계곡물이
시원하다 계곡을 따라 오르면 길가에 조곡폭포가
정숙지 못한 모습으로 흘러내린다
이참에 조곡관 까지 거의 다 왔는데 욕심을 내보지만 여기까지 왕복 2시간인데 복귀 시간도
길어지고 핸드폰 배터리 마저 방전되어 도와주질 않는다
(주막 : 주막 집에 옜 풍취가 남아있다 )
생각 같아서는 주막에 들러 동동주 한사발로 목을
축이는 것도 빼 놓을수 없는 즐거움이다 도토리 묵이면 족하지만 그러나 토속명주 호산춘은 저녁
자리를 위해 아껴두는게 났다
(용추폭포 : 시인과 묵객이 즐겨찾던 명소이다)
얼큰해서 숲길을 나서면 새소리 물소리가 더 잘들린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에 흐르는 구름을 바라볼 수 있으면 당신은 이미 신선이다
(2관문 직전 휴게실)
관문은 지난날 서울로가는 지방사람들 외인들에
대한 검문소였다 말하자면 통제와 폐쇄의 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개방의 문 환영의 문 이여야 한다
(산불됴심 표지석:한글창제 이후 우리나라 유일한
한글 표지석 조선 후기에 새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산 중턱에 난길이 이화령 옜길에 난 도로이고 아래는 이화령 터널로 이어지는 국도
3호선이다
백두대간 이화령
조곡폭포 앞에서 한컷
첫댓글 추억에 남는사진 감사 !
고생했어 갑장 !
고맙고 !
댓글 감사요 ~
글도 멋도 항상 멋집니다
"전설 따라 삼천리" 집필가 했으면 딱입니다만..ㅎ
댓글 감사요 ~ㅋ
구독자되어서 많이 기다린후 즐감 행감 하고갑니다~
기다리지 마세용~ㅋ 댓글 감사요 ~
역사속으로 빠져드네요
즐거운 시간함께해서 반가웠어요.
형과 함께 라이딩해서 즐거웠습니다 ~^^
댓글 감사합니다 ~
어쩜 멋있게 글을 쓰시내요.
즐감 하고 갑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
역사공부 잘했습니다~^^ 합투때뵙겠습니다 잘보고 갑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 회장님
합투때 뵙겠습니다 ~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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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감사요~ 아우님
역사공부 잘했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점점 선수가 되가요 형님 ㅎㅎ 사진도 멋지구요
댓글 감사요 ~아우님 ~^^
멋진 풍경에 역사 공부까지~
벌거벗은 한국사 쌤으로 나가셔야될듯~
댓글 감사합니다 ~과찬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