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암살 - 방해 행진◈
◈[ 김일성의 박정희-전두환 암살 공작 ]◈
● 박정희 암살 공작
1968년 1월 23일, 김신조 부대 31명(2014년 미국이 33명으로 확인되 청와대로 침투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려 했다. 1970년 6월 25일, 포괴공작원 3명이 현충원 행사에 참석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노려 현충원 지붕에 폭발물을 설치하다가 조작 실수로 폭발하여 공작원 1명이 사망하고 나머지 2명이 도주했다. 1974년에는 8.15 행사가 열리는 장충동 국립극장에 한민통 소속의 저격범 문재광을 보내 대통령을 저격하려다 육 여사를 살해했다. 1979년에는 측근 중앙정보부장이 박대통령을 시해했다. 특수 살인부대를 보냈고, 현충원 폭파를 통해 살해하려 했고, 문세광이라는 저격범을 보내 보았지만 모두가 실패하자 마지막으로 박정희 최측근인 김재규를 포섭해 살해했다는 생각이 든다.
● 필리핀에서의 전두환 암살 공작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한 지 4개월 만인 1981년 7월, 전두환은 아세안 5개국 순방 일정으로 필리핀을 방문했다. 필리핀의 '푸에르토 아줄'이라는 휴양지에서 마르코스 대통령과 회담을 할 때 전두환을 암살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사전에 비밀이 누설되었다. 최홍희, 그는 우리나라 장군으로 예편하고 말레이시아 주재 대사를 역임한 후 캐나다로 이주한 뒤 세계 태권도연맹을 만들어 북한을 오갔던 간첩이었다. 그의 아들 최중하는 반한 활동에 전념했다. 이 부자는 북한으로부터 공작금을 받고 전두환 암살 계획서에 서명까지 했다.
그런데 이들의 음모가 캐나다 경찰에 발각되었다. 최홍희는 즉각 실형을 살았고 아들 최중화는 도피했다가 붙잡혀 6년의 실형을 살았다. 이런 최중화가 노무현 시대인 2007년에 서울로 입국했다. 같은 케이스로 북한 간첩 송두율이 노무현의 하해와 같은 배려로 2006년 입국했다. 2006년에는 노무현이 한민통의 수괴 곽동의도 불러들여 김대중을 만나게 해주었다. 이처럼 재외 반한 인물들은 노무현 시절에 영웅대접을 받으면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줄줄이 귀국했었다.
● 아프리카 가봉에서의 전두환 암살 공작
두 번째 암살 시도는 이듬해인 1982년 8월, 아프리카 4개국 순방길에 나섰을 때 가봉에서 있었다. 북한 대남공작부의 전설 김중린이 최정예 공작원 4명에게 전두환을 암살한 후, 체포되면 북한의 소행임을 감추기 위해 자폭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 공작조는 곧바로 가봉으로 입국하지 않고, 가봉으로부터 직선거리 800여km, 도로거리 4,000km나 떨어져 있는 콩고를 거쳐 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부상을 입었다.
가봉에는 또 다른 점이 침투해 있었다. 그 간첩은 전두환을 환영하는 행사에서 가봉 군악대가 보유한 애국가 악보를 북한의 국가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으로 바꿔치는 공작을 했다. 우리 측이 가봉에 이의를 제기하자 가봉 대통령이 너무나 당황하면서 백배 사과를 했다. 그리고 가봉 대통령은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호의를 베풀고 북한을 비난했다고 한다.
◈[ 아웅산 암살 공작 ]◈
마지막 암살 기도는 그 이듬해인 1983년에 버마(미얀마) 아웅산 묘소에서 있었다. 1980년까지의 남북한 외교전은 북한이 우세한 위치에 있었다. 유엔(UN)에서의 의사결정은 표의 대결이었는데, 국제 여론이 북한 편이라는 것은 안보 및 경제에 불리한 여건이었다. 당시 유엔에서의 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집약돼있는 숫자 많은 비동맹권이 장악하고 있었다. 전두환은 북한이 선점한 외교기반을 만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81년에는 아세안 5개국, 1982년에는 아프리카 4개국, 1983년에는 서남아 국가들(버마, 인도, 스리랑카, 호주, 뉴질랜드, 부루나이)을 방문하거나 방문하려 했다. 이들 국가들은 천연자원이 많은 국가들이기도 했다.
그 첫 방문국이 버마였다. 버마는 북한에 많이 경도돼 있었다. 1886년 영국령이 되어 있다가 태평양 전쟁에 휘말려 일본에 편입됐다. 1945년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자 다시 영국령으로 환원됐다. 이 과정에 1915년에 출생한 아웅산의 독립투쟁이 이어졌다. 아웅산은 영국으로 건너가 독립을 쟁취해냈다. 그리고 동지들과 함께 회의를 하다가 무장괴한 4명에 의해 집단 사살됐다. 아웅산 묘소는 영웅 아웅산 장군 그리고 그와 함께 독립투쟁을 함께 했던 동지 9명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다. 아웅산의 딸이 아웅산 수치다. 버마를 방문하는 국빈은 반드시 아웅산 묘역을 방문하여 경의를 표해야 한다.
● 하늘이 도운 목숨
1983년 10월 8일, 랑군의 영빈관에 여장을 푼 전두환은 10월 9일 오전 10시경 아웅산 묘소 행사에 가기 위해 그를 안내할 버마의 외무장관 ‘홀랭'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외무장관은 약속시간에서 5분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외교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결례요 이변이었다. 헐레벌떡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외무장관이 나타나더니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사정 이야기를 했다. 오다가 차가 고장이 나서 택시를 잡아타고 왔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든 외무장관의 차는 벤츠 정도의 새차로보급된다. 그 성능 좋은 고급차가 고장이 났다는 것도 기이한 이변이었다.
행사장은 영빈관에서 4.5km, 차로 가면 불과 수분의 거리였다. 그런데 전두환을 태운 차가 빠른 속도로 달리더니 행사장을 불과 1.5km 남겨두고 갑자기 U턴을 했다. 큰 사고가 발생했다는 신호였다. 그 사정은 이러했다. 공식 비공식 수행원들과 기자단으로 구성된 일행들이 대통령보다 먼저 아웅산 묘지에 도착해 있었다. 이계철 주 버마 대사가 먼저 행사장으로 갔다. 이계철 대사의 차량은 검은 벤츠, 휘날리는 태극기가 달려있었다. 이계철 대사의 얼굴도 대머리여서 멀리에서 보면 전두환으로 오인될 수 있었다.
북한 공작원들은 행사장에서 1km 떨어진 극장 앞, 군중 속에 묻혀 있었다. 그 앞을 태극기 휘날리며 새까만 선팅을 하고 달리는 벤츠 차량에 전두환이 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대사는 도착하자마자 일행을 2줄로 세웠다. 앞줄은 장관급, 뒷줄은 차관급. 아프리카 가봉'에서 애국가 악보를 북괴에 소매치기당한 경험을 상기한 이계철 대사가 연습을 위해 애국가를 연주시켰다. 태극기를 단 검은 벤츠 차량이 도착하고 2-3분이 흐른 뒤 아웅산 묘소에서 군악대의 진혼곡이 울려 퍼지자, 폭파법은 행사가 시작되었다고 판단했다. 스위치를 눌렀다. 10시 28분 폭탄은 세 개, 첫 번째 폭탄은 불쏘시계, 두 번째 폭탄은 폭발력을 확대하는 고폭탄, 세 번째 폭탄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행사장에 불을 지르는 소이탄이었다.
전두환은 나머지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버마 당국에 "북한의 소행이니 빨리 퇴로를 차단하라."고 주문했다. 그 결과 버마 경찰은 10월 10일 밤 10시 30분경, 랑군강 하류를 수영하는 한 명을 잡았다. 체포하려 하자 그는 수류탄을 빼들고 저항하다가 수류탄이 폭발하여 부상을 당한 채 체포됐다. 진 모 소좌(소령)였다. 11일 아침에는 소형보트를 타고 도주하던 2명을 체포하여 파출소로 연행했다. 총기 등이 숨겨진 가방을 수색하려 하자 그 중 한 명이 총을 꺼내 사격하면서 저항하다가 사살됐다. 신기철 상위였다. 이 틈을 타, 남은 한 명이 달아났다. 강민철 상위였다. 10월 12일, 경찰은 그가 숨어 있는 곳을 발견하고 포위했다. 그러자 그는 수류탄 안전핀을 뽑고 저항하다가 수류탄이 저절로 터지는 바람에 오른팔을 잃었다. 신기철과 강민철은 1980년 광주에 왔던 '광수'이기도 하다.
→[강민철 상위(대위), 신기철 상위(대위)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진 모 소령은 1985년 사형이 집행했다. 북한이 범인이라는 확증을 잡기 위해서는 강민철의 마음을 돌려 자백하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 버마 수사당국이 공을 들였다. 강민철에 여성 간호사를 배치해서 정성스럽게 돌봐주도록 했다. 난생처음 여성으로부터 따뜻한 보살핌을 받자 강민철의 마음이 흔들렸다. 이에 더해 그가 마음을 바꾼 또 다른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북한은 그들을 보낼 때 랑군항에 동건호가 대기하고 있을 터이니 그 배로 복귀하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동건호는 거기에 없었다. 이에 더해 공작원에게 북이 제공한 수류탄은 상대방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작원을 죽이기 위한 것이었다. 안전핀을 뽑은후 상대방을 향해 던져야 폭발되는 수류탄이 아니라 안전핀을 뽑는 바로 그 순간 폭발하도록 제조된 폭탄이었다. 공작원을 북으로 데려오는 작전이 아니라 보안을 위해 현장에서 제거하려는 작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민철은 바로 여기에서 그의 조국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1984년 1월, 버마 당국은 이와 관련하여 20여 명의 버마 하급관리와 버마 민간인을 체포했다. 세관 관리, 출입국 관리, 나룻배 사공, 묘소 관리자들이었다. 평소 묘소 관리자들은 돈을 받고 묘소에서 연인들이 데이트를 즐길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고, 심지어는 창녀들에게도 묘소를 매춘 장소로 이용하도록 눈감아 주었다고 한다. 북한 공작원들은 이 점을이용하여 묘소 관리자들에게 돈을 듬뿍 주고 여자들을 데리고 들어가 폭발물을 설치했다고 한다.
● 우리 측 부상자들에 대한 조치
전두환은 이것이 북괴의 소행이라는 점을 확신하고부터 이후의 모든여정을 취소했다. 또 다른 테러를 자행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신속히 버마를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부상자들을 그대로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부상자들은 이기백 합참의장을 포함해 모두 버마 육군 병원에 수용돼 있었다. 가건물에다 의료 장비는 6.25 당시의 우리 수준이었다. 부상자들은 모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어서 누가 누구인지 식별이 되지 않았다. 소독용 알코올이 없어서 물로 소독을 했다. 에어컨이 없어서 전두환이 묵었던 호텔 에어컨을 떼어다 설치해 주었다. 이는 이순자 여사의 아이디어였다.
이대로 방치하면 생명을 잃을 판이었다. 전두환은 즉시 본국에 있는 총리에 지시하여 보사부 장관으로 하여금 약과 의사와 간호사를 긴급 수송해 오라고 했다. 부상자들을 태워 본국으로 후송하는 동안 기내에서치료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버마 대통령에게는 한국에서 오는 의료용 비행기의 이착륙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 공휴일이었지만 버마도 적극 협력했다. 환자들을 태운 의료진은 비행기에서 사용될 물자만 빼고 나머지 물자들을 열악한 버마 병원에 기증하고 왔다. 북괴는 아웅산 묘지에서 우리 측 장관을 포함한 공직자 17명을 살해했고, 15명에 재 중상을 입혔다. 버마 공무원 4명을 살해했고, 32명에 증상을 입혔다. 하지만 정주영을 포함한 기업 총수들은 그 자리에 없었기에 다행히도 무사했다.
이 사건에 이어 북한은 1987년 11월 KAL858기를 공중에서 폭파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두 개의 사건으로 인해 미국은 1988년 1월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해 경제 외교적으로 엄청난 압박을 주었다. 모든 것을 자백한 강민철은 한국으로 오고 싶어 했다. 2000년, 버마 당국이 그의 간절한 뜻을 당시 김대중 정부에 전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이를 매몰차게 거절했다. 결국 북괴의 소모품 강민철은 2008년 5월, 랑군 감옥에서 병이 들어 이미 해골이 된 상태에서 사망했다.
◈[ 북한 구호품 수령 ]◈
아웅산 폭파사건을 저지른 지 1년 만인 1984년 8월 31일부터 9월 4일까지 서울, 경기도에는 1904년 이래 가장 많은 폭우가 내려 47명의 사망 및 실종자를 냈고, 수많은 가옥이 절단 났다. 이 집중 호우의 실태가 전 세계로 방송되면서 국제적십자연맹이 원조를 제의해왔다. 이에 전두환은 우리의 힘으로 넉넉히 복구할 수 있다는 말로 정중히 사양했다.
주말인 9월 8일, 북한이 돌연 방송을 통에 북한적십자 중앙회장 명의로 수재민에게 구호물자를 지원하겠다는 재의를 해왔다. 국제사회를 의식한 재스처였다. 쌀 5만 섬, 포목 50만 미터, 시멘트 10만 톤, 의약품 등으로 북한 실정에는 너무나 과도한 물량이었다. 이 제안에 대해서는 비단 정부 관련자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까지도 진정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들을 했다. 북한은 우리가 마치 국제 적십자 연맹의 제안을 사양했듯이 북한에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계산 하에 했을 것이다. 안기부장 노신영은 이 제안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상세한 보고를 했다.
전두환은 안기부장이 가져온 보고서 중, 북의 제안을 거부해야 한다는 이유들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제의를 받아들이면 북한이 우리보다 잘 산다는 이미지를 국제사회에 보이게 된다는 이유가 있었다. 국민의 자존심이 상처를 입는다는 이유도 있었다. 아웅산 테러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코너에 몰린 북한의 입지를 개선시켜 줄 수 있다는 이유도 있었다. 우리 국민의 대북 경각심이 해이해질 수 있다는 이유도 있었다.
이를 읽고 난 전두환은 그 반대로 북한의 제의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얻게 될 이득을 생각해보았다. 남북 간 교류의 물꼬가 트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북한의 위장전술 버릇에 쐐기를 박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허풍을 떨지 못하게 버릇을 고쳐줄 기회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거부할 것으로 믿고 허풍을 떨었는데 막상 달라고 하면 북한이 얼마나 허둥대겠는가 하는 상상도 했다. 우리가 북한보다 더 잘 산다는 것은 이미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북한의 폼 잡는 선전은 효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전두환은 노신영 안기부장에게 북괴의 제의를 수락하는 것을 천체로 인수 절차, 홍보, 보안 등에 대해 대책을 구체적으로 연구해오라고 지시했다. 대한적십자 총재 유청순은 9월 14일 북괴 측에 수재물자를 감사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역사를 정중하게 전달했다.
● 구호물자는 북한 주민의 고혈
육로로는 9월 29일 판문점을 통해, 해상으로는 9월 30일 인천부두를 통해 인도되기 시작했다. 이는 북한 인민들의 고혈을 짜내는 아픔이었지만 전두환은 이에 대해 눈을 감기로 했다. 북한은 방송을 통해 온 북조선 인민들이 남조선의 헐벗는 인민들을 위해 모두 나서서 일하고 있다며 선전을 했다. 그들은 선전이라고 했지만 우리들이 보기에는 북한이 얼마나 가난한가에 대한 실상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수재물자를 나르는 대형 수송선이 북한에는 두 척밖에 없었다. 그 중 13,500톤급 대동강호가 시멘트를 싣고 오다가 침몰했다. 쑥색으로 새로 도색한 5톤 트럭들에서는 새로 칠한 페인트 냄새가 진동했다. 타이어는 일제 상표가 붙은 새것들이었다. 땀을 흘리며 무거운 물자를 하역하는 북한 일꾼들이 새 옷을 입고 넥타이를 했다. 배에 올라가 보니 돼지머리를 매달아 놓았다. 고기를 먹고 자는 주민이라는 표시였다. 잘때도 넥타이를 풀지 않았다. 처음 매 본 것이기 때문에 한번 풀면 다시 맬 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남조선 주민들이 헐벗고 못 먹는 줄 알고 사과, 배, 사이다. 빵이 든 봉지를 나누어주었지만 품질이 나빠 식용이 불가능했다. 그들이 입은 옷과 신발은 6.25직후의 수준이었고, 군량미는 굴속에서 썩은 듯 냄새가 났다.
● 도시락이 게눈처럼 사라져
우리 측 인부들이 도시락을 주문해 갔다. 나누어 주었더니 받지 않으려 했다. 우리 측 적십자 간부가 "여기까지 와서 수고를 하시는데 아무리 그래도 점심 한 끼는 대접할 수 있지 않느냐." 했더니 그제야 받았다. 서로 눈치를 보다가 높은 사람이 먹으니까 도시락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높은 사람이 와서 더 있으면 더 달라했다.
우리 측 적십자는 북한 하역자와 간부들에게 1,600개의 선물세트를 준비해 대한적십자사라고 새겨진 대형 여행 가방에 넣어 주었다. 밍크담요, 카세트, 라디오, 전자손목시계, 양복지, 양장지, 한복 옷감, 내의, 셔츠 양말, 조미료, 화장품, 스타킹, 브래지어, 운동화 등 17종의 선물들이었다. 우리는 이 1,600개의 대형 가방을 3개의 컨테이너 박스에 싣고 갔지만 북한은 34대의 트럭에 이를 옮겨 실은 후 북으로 갔다. 전두환은 북으로부터 쌀을 받았지만 그 이후의 대통령들은 통치행위라는 명분으로 북에 한없이 쌀과 비료를 퍼주었다. 1995년부터 2010년까지 총 9차례에 걸쳐 265만5000t의 쌀을 북괴에 퍼주었다. 김영삼이 15만t, 김대중이 70만t, 노무현이 180만t, 이명박이 5,000t이었다.
● 금강산댐과 평화의 댐
전두환 정권 北수공 대비해 만든 것
전두환은 간데 없고 DJ만 나부끼는 '평화의 댐'
김대중으로 도배된 평화의 댐
● 88올림픽 방해공작 금강산댐
1980년, 북한은 1986년에 열리는 아시안게임을 훼방 놓으려 노력했지만 여건을 인정받지 못해 탈락해 자존심이 상해있었다. 그런데 그 아시안게임은 서울에서 1986년 9월 20일부터 10월 6일까지 성대하게 치러졌고, 국제사회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았다. 중국이 금메달 94개, 한국이 93게, 북한은 명함도 없었다. 그리고 이어서 88년에는 세계 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릴 참이었다. 김일성의 눈이 뒤집히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일성은 어떻게 하든 88올림픽에 대해 훼방을 놓아야만 했다. 88올림픽은 남한과 북한의 위상을 천지 차이로 갈라놓을 것이 뻔해보였다. 이에 김일성은 1986년 4월 8일,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200억 톤의 저수량을 갖는 금강산발전소 건설 계획을 확정했다고 발표했다. 한국에서 가장 큰 소양강댐의 저수량이 29억 톤인데 그 7배에 가까운 200억 톤 규모의 댐을 짓겠다는 것은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 것이니 세계 각국은 알아서 88올림픽에 참가할 생각을 말라는 무서운 엄포였다. 당시의 시뮬레이션 결과로는 63빌딩의 3분의 2가 물에 잠긴다는 결론을 냈다. 북한에 많이도 속아온 전두환은 발 빠르게 대응했다. 금강산댐이 건설되고,이를 제어할 방법이 없으면 우리는 불안 속에서 살다가 북한의 노예가될 수 있었다.
● 댐에 대한 기초 상식
금강산댐은 북에 있고, 평화의 댐은 남에 있다. 휴전선으로부터 북한강을 따라 북으로 26km 지점에 금강산댐(북한 호칭은 '임남댐')이 있고, 휴전선으로부터 남으로 10km 지점에 평화의 댐이 있다. 두 댐은 북한강을 따라 36km 떨어져 마주보고 있다. 금강산댐은 남한을 수공으로 멸망시키려는 음모의 무기로 1986년 4월부터 건설되기 시작했고, 평화의 댐은 이를 방어하기 위한 댐으로 1986년 10월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서부전선에 북괴가 건설한 황강댐은 수공을 위한 댐이고, 그 하류에 우리가 건설한 군남댐은 수공을 방어하기 위한 댐인 것과 같은 성격의 댐들이다. 북한이 건설한 댐은 수공 댐, 남한이 건설한 댐은 방어 댐인 것이다.
● 전두원이 건설한 평화의 댐
이 평화의 댐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민주화운동이 하늘을 찌를 때 전두환 정권이 건설현 댐이다. 1986년 10월 30일, 이규호 건설부 장관이 중대한 발표가 있다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북한이 비밀리에 금강산댐을 짓고 있는데 그 댐을 무너뜨리면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MBC 등 언론들이 일제히 나서서 '금강산댐 건설 음모'라는 특집방송을 했다. 금강산댐의 물 200억 톤이 쏟아지면 서울은 12~16시간 내에 물바다가 되고, 국회의사당은 꼭지만 남고, 63빌딩은 3분의 2가 수장될 것이라는 모의 동영상까지 제작하여 모든 안방을 경악시켰다.
86년 12월, 모든 방송과 뉴스매체들은 국민성금을 독려했다. 달동네 아이가 생활비의 20%를 털어서 성금을 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도 소개됐다. 정부는 이 성금으로 평화의댐을 1986년 10월에 착공하여 15개월 후인 1988년 5월에 1단계 공사를 마쳤다. 1단계 공사는 댐 높이 80m, 저수량 5억 9천만 톤을 수용할 수 있는 댐이었고, 나머지 공사는 금강산댐 공사를 지켜보면서 대응하기로 했다. 공사비는 639억 원. 이것으로 88년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김일성의 수공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금강산댐은 북한이 먼저 쌓기 시작했지만, 우리가 평화의 댐을 건설하자 공사 진도가 점점 느려졌다. 그리고 1987년 5월, 금강산댐 공사가 돌연 중단됐다. 전두환이 발 빠르게 대응 댐을 건설하자 수공에 대한 희망을 접은 것이다. 김일성과의 한판 승부에서 전두환이 압승한 것이다.
● 김영삼과 이회창에 의해 사기극으로 몰린 평화의 댐
1993년 김영삼 시대가 열렸다. 김영삼은 당선되자마자 하나회 숙청이라는 쇼부터 벌였다. 국민들은 하나회가 집단이기주의를 추구하는 군내 사조직인 줄로만 알고 박수를 쳤다. 선동으로 살아온 김영삼은 이에 더해 5-6공을 다시 청산하자고 선동했다. 울궈먹기를 시도한 것이다. 그는 [ 12.12, 평화의 댐, 차세대 전투기 사업 ]을 3대 의혹 사건으로 지정하고, 이를 파헤치겠다고 큰소리쳤다. 12.12에 대해서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공동으로 타킷이 됐고, 평화의 댐에 대해서는 전두환이, 차세대 전투기 사업에 대해서는 노태우가 타깃이 되었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추진한 사업은 모두가 사기라는 인민재판식 여론부터 확산시켰다. 3개의 의혹 중 여기에서는 평화의 댐만 다루기로 한다. 사기의 댐, 저주의 댐으로 내몰린 평화의 댐이 동네북이 되었다. 야당, 민주화 세력, 언론이 삼위일체가 되어 인민재판에 나섰다. 대쪽 이미지가 붙어 있던 이회창이 감사원장 자격으로 나섰다. 명색만 대쪽이었지 그는 분석능력이 전무한 반면 공명심이 강해 이론에 편승하기도 하고 아부하기도 하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
● 이회창의 경거망동
1998년 9월 4일, 이회창 감사원장이 3개월에 걸친 감사 결과를 내놓았다. 한마디로 존재하지도 않은 위협을 여론 호도용으로 만들어 낸 사기극이라는 취지였다. 9월 1일, 조선일보는 감사원 감사 결과를 미리 내보냈다. '수공(水攻)과장, 정권안보 이용'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감사원의 발표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었다. 이 감사원장의 발표는 불구경 좋아하는 운동권과 야당에 불을 질러주었다. 이때부터 국민들은 평화의댐을 '정권안보용' '국면전환용' '사기극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런 사기극을 벌인 전두환은 몹쓸 사람으로 짓밟히게 되었다. 이회창의 발표는 국회 청문회를 촉발시켰다.
● 이회창이 촉발시킨 국회 청문회
1993년 9월, 국회 청문회가 열렸다. 청문회에 불려 나온 증인들은 모두가 다 죄인이 됐다. 인권은 국회의원들에만 있고, 증인들에는 없었다.건설부 장관, 통일부 장관 등이 주눅 든 모습으로 불려나가 증언을 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북괴의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결정한 정당한 조치였다고 항변했다. 북한이 금강산댐을 쌓다가 중지한 것은 우리가 평화의 댐으로 대비를 했기 때문에 더 쌓아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라고 항변했다.
이는 맞는 말이었다. 이렇게 정당하고 논리적인 답변들이, 야당으로부터는 많은 야유와 증오에 찬 눈길을 받은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대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93년 9월 8일, 국회건설위원회는 영등포 구치소 회의실에서 청문회를 열었다. 86년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장세동이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듭된 질문에도 그는 한결같이이렇게 답했다, “건설된 평화의 댐은 적의 기도를 말살했다.” 평화의 댐은 순전히 전두환이 건설했기 때문에 사기극이 된 것이다. 전두환이 한 것이면 모든 것이 사기로 몰렸던 마녀사냥 시절, 이회창은 여론에 영합하면서 대쪽 이미지를 팔아 한때 인기를 누렸다.
● 정권과 시류에 아부했던 조선일보
시류에 영합하기를 잘하는 존재는 이회창만이 아니었다. 조선일보는1993년 6월 17일, 감사원장의 감사 결정을 "시의적절한 일"이라 극찬하면서 과거에 평화의 댐 건설을 앞장서 홍보했던 뭇 언론들을 대신하여 반성한다는 사설을 썼다. 하지만 이 조선일보는 평화의 댐을 위한 국민성금을 모금할 때에는 가장 앞에 나섰었다. 1993년 6월 17일의 조선일보 사설은 '정권안 보용 댐' '독재정권유지를 위한 전시용 댐' '국민을 기만한 사기극' '우스개 된 평화의 댐'이라는 키워드로 장식돼 있었다.
● 2002년 김대중 말기, 전두환 공격했던 언론들 전두환에 아부
2002년 5월 7일, 평화의 댐을 사기극으로 폄하했던 조선일보가 전혀 뜻밖의 기사를 실었다. '15년 동안 천덕꾸러기로 여겨왔던 평화의 댐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동아는 2002년 7월호에서 ‘금강산댐은 제2의 노동미사일이고, 또 하나의 핵무기다. 고의든 부실공사 때문이든 터지면 전시체제로 돌입할 수밖에 없다'. 뜻밖의 기사들에 여러 신문들이 가세했다. '평화의 댐 존재가치 다시 부각', 언론들이 사양길에 접어든 김대중에 등을 돌린 것이다.
2002년 인공위성 사진에 의하면 26억 톤 이상을 저수하는 금강산댐에 커다란 함몰 부분이 생겼다고 했다. 위험하게 보이는 이 댐을 북한은 7월부터 증축하기 시작했다. 김대중이 불안을 느꼈다. 2002년 8월 30일, 남북경협추진위가 열렸다. 여기에서 양측은 금강산댐의 안전문제를 공동조사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북한은 20일 만에 그 약속을 깼다.
● 금강산댐 함몰로 겁이 난 김대중, 부랴부랴 평화의 댐 증축
김대중은 부랴부랴 기존의 80m 높이의 댐을 125m로 높이는 공사를 시작했다. 2002년 9월에 착공하여 2004년 12월까지 총 공사비 1,950억 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그리고 실제는 2005년 5월에 26억 3천만 톤의 저수량을 갖는 한국 제3위의 댐으로 증축됐다. 이는 금강산댐보다 1천만톤이 더 많은 저수량이다. 소양강댐의 저수량이 29억 톤, 충주댐이 27.5억 톤이다. 26.3억톤의 저수량을 갖는 평화의 댐은 현재 홍수조절 기능이 아주 훌륭한 것으로 입증돼 있다.
● 2011년 7월 7일자 최보식 칼럼
'평화의 댐 사기극과 진실'
'평화의 댐에는 '김대중' 사진만 있고 '전두환'은 없다.
''북쪽 눈치를 보면서 몰래몰래 쌓았다, 정말 희극과도 같았다"
. .'평화'에 초점을 맞춰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의 동판 사진과 핸드프린팅이 전시돼 있다. . . 댐 주위를 둘러봐도 찾을 수 없는 것은 전두환 前 대통령의 흔적이다. 공사 연혁도 없었다. 이 댐이 어떻게 시작됐고,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고,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그런 안내문도 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평화의 댐에 '김대중'은 있는데, '전두환'은 없다는게 묘했다. . . 화천군에서 나고 자라서 그 지역의 공무원이 된 정갑철 군수나 김세훈 관광청책국장은 직접 격은 사실을 말했다.
"1999년 여름 700~800mm의 댑곡우가 쏱아졌다. 화천댐은 넘치기 직전이었다. 그때 평화의 댐이 막아주지 않았다면 화천댐은 무너졌고 연쇄적으로 북한강 수계(水系)의 다른 댐들도 무너졌을 것이다. '서울 물바다'가 현실이 될 뻔했다. 1996년 홍수 때도 그랬다. 평화의 댐은 꼭 필소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두환 前 대통령이 워낙 욕을 먹으니까 입을 다물었다."
2002년 초 공사를 재개한 금강산댐에서 초당 206t씩 흙탕물이 쏟아져내렸다. 19일에 걸쳐 3억5000만t의 물폭탄이 터진 것이다. 선두에서 막고 있던 평화의 댐은 무너질 뻔했다. 방류 중단과 공동조사를 요구했으나 북한은 응하지 않았다. '햇볕정책'의 김대중 정부 시절 일이었다.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는 평화의 댐을 보강하고 더 높이기로 결정했다. . . 좌파 정권도 평화의 댐 존재 이유를 알았다. 다만 5공의 산물이기 때문에 숨기고 싶었다. 댐을 더 높이는 역할은 정말 맡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수공(水攻)이 될 수 있음을 알았기에 다른 선택은 없었다.
. .실제 댐 높이를 125m로 더 올린 것은 노무현 정부 때다. 국내 댐 중에서 가장 높은 소양강댐을 추월했다. 5공 사업비보다 증축할 때의 사업비가 훨씬 많았다. 거대한 역사(役事)였으나, 북쪽 눈치를 보면서 몰래래 쌓았다. 정말 희극과도 같았다..
이상은 이 지역 공무원들의 말이다. 댐 완공식에는 국무총리가 참석하는 걸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무장관조차 내려오지 않았다. 수자원공사 사장과 원주국토관리소장만 참석했다. 이런 연유로 아무런 기록도 하지 않았다. 기록이 없으면 '숨겨진 사실'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진상은 더욱 아득해질 것이다.
. . 생전에 김대중·노무현 前 대통령은 여기에 와본 적이 없었다. 전두환 前 대통령은 2009년 처음으로 평화의 댐을 구경했다. 그의 흔적은 없었지만, "내가 잘못 만든 댐이 아니구먼." 했다고 한다. 당초 금강산댐규모를 200억t으로 과장 혹은 판단 미스를 한 것을 빼면 말이다.
● 2015년의 오마이뉴스: 전두환은 애국자
아래는 2015년 3월 25일자 오마이뉴스 기사다. '평화의 댐에 대한 진실 혹은 의혹-평화의 댐 그리고 금강산댐, 그 진실을 해부한다.'는 제목의 기사였다.
'금강산댐의 실체, 국민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유'
'한겨울, 비도 내리지 않았는데 웬 홍수?'
2002년 1월, 北 한강 상류 이북 지역에서 갑자기 엄청난 흙탕물이 밀려 내려왔다. 초당 206톤. 19일 간 3억5천만 톤 규모였다. 북한지역에 장마 예고도 없었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던 한겨울에 엄청난 수량이 평화의 댐으로 밀어닥친 것이다. 80m 높이의 평화의 댐이 범람 위기에 놓인 상황, 노무현 정부는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한 조사를 착수했다. 그러나 딱히 '이것 때문이다.'라는 뚜렷한 발표를 하지 않았다. 언론도 침묵했다. 다수의 국민들이 모르는 이유다.
'대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금강산댐 때문이란 결론이 났다. '존재하지도 않다던 금강산댐은 뭐고, 붕괴는 또 뭐란 말인가'. 일부 국민들의 의구심이 일자, 정부에선 "금강산댐은 1999년에 착공을 했고,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일부가 붕괴되는 문제가 발생했다.”고 밝혔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것에 대해 보도한 언론은 거의 없었다.
"남한처럼 장비가 현대화되어 있지 않은 북한에서 금강산댐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인력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곡괭이와 삽을 가지고 그 거대한 댐을 막았다면 큰 문제다." 일부 학자들이 금강산댐 위험론을 제기했지만, 큰 이슈는 되지 못했다. 정부는 2003년 평화의 댐 2단계 공사를 착수해 2005년 10월에 준공했다. 높이 125m, 길이 601m, 담수 용량은 무려 26억3천만 톤에 이른다. 20억4천만 톤의 담수량이 늘어난 규묘다. 공사비만 2천489억이 투입됐다.
◈[ 금강산댐, 위협이 될 수 있다 ]◈
2005년 10월, 평화의 댐 2단계 공사 준공식이 열리던 날, 초청을 받아 참석했었다던 화천군 화천읍 김 아무개 이장은 "그렇게 큰 공사 준공식이 열리면, 장관이나 차관급 정도는 참석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당시 정부의 고위 관료가 참석하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정치권에서 평화의 댐에 대해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없다던 금강산댐의 실체가 드러나면 난처하지 않았겠냐"는 김 이장의 말에서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한다..
2009년 9월, 북한에선 사전 예고도 없이 군사분계선으로부터 42.3km에 위치한 황강댐 물을 임진강 하류로 무단 방류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시설물 파괴 등 수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그렇다면 평화의 댐은 안전한가? 일부 의식 있는 사람들의 관심은 평화의 댐으로 모아졌다.
금강산댐 저수 용량 26억2천만 톤 평화의 댐은 26억3천만 톤이다. 평화의 댐은 발전용이 아니다. 그렇다고 농업을 위한 저수 기능도 하지 못한다. 계곡을 가로질러 막아 놓은 커다란 콘크리트 구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125m 높이의 댐에 물이 차는 일은 없다. 평화의 댐에 서서 좌측을 보면 커다란 원형 수로 네 개가 보인다. 물이 차기 전에 단계적으로 방류되는 구조다. "금강산댐 규모가 26억2천만 톤이란 것은 정확한 데이터냐? 그리고 물이 내려오는 속도는 감안했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가정이다. 2012년 11월 30일, 정부에서는 630일이란 공사기간을 정해 평화의 댐 3단계 공사에 착수했다. 다수의 언론은 '혈세 낭비'라는 기사를 쏟아냈다. 논리정연하게 금강산댐 부실이나 붕괴우려 또는 평화의 댐의 대응 한계에 대해 말하는 언론은 없었다. 그냥 세금 낭비로만 몰아갔다.
◈[ KAL858 공중 폭파 ]◈
● 세기의 살인마 김일성
이 나라는 지금 '주사파' 운동권들이 장악하고 있다. 주사파라는 인간들은 김일성을 神으로 모시는 정신병자들이다. 김일성은 과연 신적인 존재인가? 이 부분에서 독자들은 김일성이 사람의 목숨을 얼마나 가볍게 생각하는 요마악귀인가를 실감할 필요가 있다. 김일성은 6.25를 일으켜 동족들은 물론 전쟁에 참가한 연합군들의 생명을 도륙했다. 히틀러이후 우리는 유고에서 인종을 청소했던 밀로세비치, 미국의 초고층 무역센터 빌딩을 가루로 날렸던 오사마 빈 라덴, 목숨을 파리처럼 여겼던 이라크의 후세인 그리고 리비아의 카다피 등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김일성에 비하면 왜소한 악한들이다. 김일성은 6.25전쟁을 시발점으로 하여 인간 살육을 일삼다 죽었다. 아래는 6.25가 낸 피해다.
한국군은 전사자 227,800명에 부상자 717,100명, 미군은 전사자 33,747명에 부상자 92,134명, 프랑스군은 전사자 2,888명에 부상자 818명, 터키군은 전사자 717명에 부상자 2,246명, 영국은 전사자 710명에 부상자 2,278명 그리고 호주, 캐나다, 태국, 네덜란드, 콜럼비아, 에치오피아, 필리핀, 벨기에, 뉴질랜드, 남아공, 룩셈부르크가 각 수백 명 단위의 희생을 치렀다. 한국 국민 23만 명이 사망했고, 29만이 실종되었다. 인민군이 52만 명, 중공군이 90만 명, 북한 주민 2백만 명이 사망했거나 실종됐다. 실종은 시체조차 찾지 못한 경우를 말한다. 김일성 한 사람으로 인해 모두 500만 이상이 희생된 것이다.
이후 김일성은 무장공비 침투, 미루나무 도끼만행, 암살, 폭파, 무장폭동, 민중봉기, 지하당 조직과 간첩단 조직을 통해 수많은 목숨을 소모품으로 증발시켰다. 북한의 목숨이든 남한의 목숨이든 가리지 않았다.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은 바로 이런 김일성을 神으로 모시는 것이다.
● 눈 뒤집힌 김일성
88올림픽은 국제사회에서 북한이 완패당하는 원년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김일성은 전두환 암살하기와 올림픽 방해하기에 '다 걸기'를 했다. 1986년에는 금강산댐을 축성하여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어 수장시키려는 공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공사 사실을 전 세계에 알려 서울올림픽에 참가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심리전을 폈다. 이에 전두환이 매우 빠른 속도로 평화의 댐을 건설하자, 김일성은 민항기를 공중에서 폭파시킬 궁리를 했다. 1987년 11월 29일, 김현희를 도구로 하여 중동에서 땀 흘리며 달러를 벌고, 직사광선에 검게 타고 사나운 모래바람 맞아 거칠어진 몸으로 오랫동안 헤어져있던 가족들을 만난다는 부푼 가슴을 안고 귀국하는 중동 근로자들을 태운 KAL858 여객기를 공중에서 폭파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1988년에 서울로 가는 세계의 모든 여객기를 폭파시킬 것이니 세계 각국은 서울올림픽에 가지 말라는 공갈작전이었다. 하지만 연속된 김일성의 공작은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저지하지 못했다. 서울올림픽은 경제적으로 그리고 국위선양 차원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대한민국이 국제적 위상을 단번에 선진국 수준으로 제고시키는 동시에 남북한 격차를 천지 차이로 벌려 놓는 엄청난 쾌거였다.
이에 눈이 뒤집힌 김일성은 서울올림픽으로 인한 남한의 국제적 위상을 물타기하려고 1989년 7월 1일에서 7월 8일까지 대대적인 평양축전을 열었다.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으로 일컬어지는 이 축전에는 177개 국가, 22,000명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고, 당시로서는 역대 축전 가운데 가장 많은 나라가 참가한 축전이었다. 그리고 김일성은 이 행사가 서울 올림픽보다 규모가 큰 행사였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여기에 골수 주사파 임종석이 남한에서 김일성 장군을 외치며 적극적인 홍보전을 벌였고, 평양축전을 국제적으로 극화하기 위해 21세의 여성 임수경을 북으로 보냈다. “백두에 피 뿌려진 진달래 가슴 안고 통일의 화신 되어 총진군하자." 임종석의 선동 문구였다. 하지만, 세계에서 88서울올림픽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평양청년 축전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 올렸지만 평양축전이 북한의 위상을 높이 올렸다는 평가는 없다.
● 김현희 체포 과정
노태우가 출마하는 제13대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 열을 올리고 있던 1987년 11월 29일, 안기부장 안무혁이 갑자기 전두환에 긴급보고가 있다고 알려왔다. 북괴가 또 일을 저질렀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중동에서 근로자들을 태우고 오던 KAL기가 공중에서 폭파당한 것 같다는 실로 충격적인 보고였다. 김일성은 올림픽을 공동 주최하자는 요구를 귀찮게 해왔다.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테러도 불사하겠다고 협박도 했다. 협박 그대로 KAL기가 레이더망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버마 상공이었다. 보고를 받은 전두환은 북한의 소행이 분명하니 거기에 초점을 맞춰 범인을 추적하라고 지시했다. 추적 과정은 실로 007 못지않게 스릴 있고 복잡하다. 그래서 먼저 조사 결론부터 정리한 다음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국제기관들이 공동으로 전개한 불꽃 튀는 그물망 작전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던 테러리스트 김현희가 바레인 공항에서 극적으로 붙잡혔다. 중동지역 바다 한가운데 일엽편주처럼 떠 있는 작은 왕국 '바레인'은 인구 170만 명, 면적 778 평방킬로, 서울 면적 605 평방킬로보다 조금 넓은 나라다. 북한의 공작을 받았는지 처음과는 달리 한국 정부의 간여를 쌀쌀맞게 배격했다. 바레인 당국과 치열한 외교 협박전을 벌인 후 드디어 12월 15일 오전 4시 김현희의 신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드디어 오후 2시, 김현희는 안기부 수사관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김포공항에 내렸다.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서울에 온 김현희는 일본말만 하고, 일본인인척 하면서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측 여성 수사관의 인간적인 접근에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김현희가 고백한 사실들은 국제 수사관들과 다국적의 공항 직원들 그리고 대한항공 직원들이 공조하여 추적했던 객관적 사실과 정확히 일치했다.
● 김현희는 누구인가
김현희는 1962년 1월 29일 북한에서 출생하여 노동당해외정보수사부 2과 소속의 공작원이 되었다. 1977년 9월 김일성 종합대학에 입학하여 예과 1년을 수료했다. 이때 나이 16세. 1978년 9월 곧바로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에 입학한 후 1980년 3월에 중앙당 조사부 공작원으로 소환되어 가명 김옥희를 부여받았다. 18세였다. 그해 4월부터 1987년까지 6년 8개월 동안 군사훈련, 간첩교육, 해외실습을 받았다. 25세였다. 1987년 10월 7일, 김현희는 공작 파트너 김승일과 함께 평양 룡성 43호 초대소에 불려가 대외정보조사부 '리 부장’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번에 동무들이 수행해야 할 임무는 남조선 비행기를 제끼는 것이다. 남조선 비행기 폭파 목적은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남조선 괴뢰의 두개의 조선 책동과 준동을 막고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 임무는 중요하고 어려우며 특히 비밀이 담보돼야 한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완전한 임무수행을 위한 준비사업을 철저히 하라. 이번 임무수행 과정에는 완전한 일본사람으로 위장해야 한다. 김현희는 일본인 여자로 위장할 수 있도록 일본어 학습에 열중하고 임무수행 중에는 일본인 부잣집 딸처럼 행동하라."
공작 목표는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를 떠나 아부다비를 거쳐 서울로 가는 KAL858기를 폭파하는 것이었다. KAL858 항로가 이라크-UAE-서울이었던 것이다. 김현희에게 일본어를 전담해서 가르친 사람은 일본인 '다구치 야에코'(田口 八重子)로 알려져 있다. 다구치 야에코는 일본에서 1955년 8월 10일 태어나 1987년 실종되어 북으로 납치돼 갔다. 김일성은 다구치 야에코에게 '자기의 은혜를 입은 여성'이라는 뜻으로 라은혜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김현희의 존재를 부인한 북괴는 일본으로부터 끊임없이 추궁을 받으면서도 김현희는 물론 '다구치 야에코' 납치 사실도 부인해왔다. 이런 상태에서 2002년 9월 27일,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과 회담을 했다. 고이즈미는 단도직입적으로 김정일에게 북한이 다구치 야에코'를 납치한 사실을 인정하라고 압박했다. 이에 고이즈미도 놀랄 정도로 김정일은 납치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사과도 했고 재발 방지도 약속했다. 그만큼 당시의 북한은 일본의 도움이 필요했다.
다구치 야에코가 북한에 납치됐다는 사실을 김정일이 일본 수상 고이즈미에게 직접 확인해준 데다 김현희의 증언이 이와 일치하는 이상 적색 세력들이 끊임없이 제기하는 '안기부 음모론'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안기부 음모론이란 김현희의 KAL858기 폭파가 안기부의 자작극이라는 좌익들의 주장이다. 안기부의 음모라면 김현희는 한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었어야 했다. 김현희와 이웃에 살았던 사람도 한국에 있어야 했고, 친척도, 초-중고-대학 동창들도 있어야 했다. 그런데 김현회의 얼굴이 그토록 언론에 도배되었는데도 그녀를 안다는 사람이 한국에는 한 사람도 없다. 김현희가 한국인이었다면 그녀는 다구치 야에코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어야 했다. 그런데 김현희는 '다구치 야에코'가 그의 일본어 선생이었다고 자백했다. 미국과 일본은 각기 수사팀을 파견해 김현희를 조사했고, 독자적 결론에 따라 북괴를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게 되었다.
● 김현희의 공작 과정
공작조는 김승일 조장, 조원, 김현희, 안내조 2명이었다. 이들은 평양을 출발하여 복귀할 때까지 인솔하기로 돼 있었다. 이 둘은 폭발 무기인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사용법을 훈련받았다. AM/FM 겸용인 파나소닉 모델 RF-882, 폭파 시간을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도록 돼 있었지만, 기본으로는 설치 후 9시간 후에 자동 폭파하도록 시간이 장입돼 있었다.
신분 노출 위험이 있을 때에는 말보로 담배갑에 설치돼 있는 독약 '앰플'을 씹어 먹도록 훈련돼 있었다. 1987년 11월 10일, 김승일과 김현희는 부장으로부터 마지막 지령을 받았다.
"이번 임무는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친필 비준이 나있는 것으로 KAL858기를 폭파하는 것이다. 김현희의 임무는 김승일 동무의 딸로 행세하면서 항공료, 호텔료를 제외한 생활비 소모를 담당하고, 김승일 동무가 라디오를 작동하지 못할 상황이 발생하면, 대신 작동시키는 일이다. . 최악의 경우에는 소지하고 있는 앰플을 깨물어 비밀을 고수함으로써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권위와 위신을 백방으로 보장하라."
김승일-김현희 등 일행은 1987년 11월 12일, 오전 8:30분경, 북한 항공기로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모스크바에서 다시 소련 비행기를 타고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가서 5박 6일 체류했다. 이후 자동차로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갔다. 비엔나로 넘어가던 도중 승용차 안에서 북한 관용여권을 반납하고, 일본인 명의로 된 일본 여권을 받았다. 비엔나에서 또 5박6일 머물렀다. 11월 23일, 오스트리아 항공기를 타고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 도착해서 또다시 5박 6일 머물렀다. 그 사이인 11월 27일, 위장한 두 부녀는 그들이 머물던 호텔에서 안내 조장을 만나 비닐 쇼핑백에 들어 있는 KAL858기를 폭발시킬 무기, 트랜지스터 라디오 그리고 액체 폭약이 들어 있는 700cc 병을 인수했다. 안내 조장은 중국산 약주상표가 붙어 있는 주방에서 아주를 쏟아버리고 그 안에 액체 폭발액을 채운 것이다.
11월 28일, 오전 11시, 일행은 쇼핑백을 들고 호텔을 나와 유고의 베오그라드 공항에서 이라크 바그다드로 가기 위해 이라크 항공기를 타려던 참이었다. 출국 마지막 검색대에 섰다. 유고슬라비아 여승무원이 소지품 검사를 했다. 여승무원은 트랜지스터에서 4개의 배터리를 빼앗았다가 바그다드에 내려서 되돌려 받도록 해주었다. 이라크 항공기를타고 바그다드에 내렸다. 유고에서 비행기를 탄 김현희가 이라크에서 KAL858기를 타려면 통과여객 대합실(transit room)을 거쳐야 했다. 쇼핑백을 들고 대합실로 가는 도중, 보안검색대에서 또 배터리가 적발됐다. 검색원은 여지없이 배터리를 수거했다. 이 배터리가 없으면 폭파임무 수행은 불가능했다. 통사정을 했지만 바그다드 보안 검색원은 들은체도 않고 배터리를 빼앗아 쓰레기통에 던졌다. 김현희는 검색대를 통과해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김승일에게 이 사실을 보고한 후 잽싸게쓰레기통을 뒤져 배터리를 꺼내 김승일에게 건넸다.
김승일 역시 잽싸게 배터리를 라디오에 끼운 후 소리가 나게 해서 검색원에 들려주면서 "이것 봐라, 이 배터리는 순수하게 라디오를 작동시키기 위한 것이다. 다른 데서는 이렇게까지 안 하는데 왜 유고에서만 유난하게 구느냐." 큰소리로 항의했다. 노인네가 큰소리로 억울한 척하면서 항의하니까 검색 원은 눈감아 주었다.
아슬아슬하게 배터리를 되찾은 김현희는 통과여객실에 대기하다가 KAL858기 출발 20분 전인 밤 11시 5분 경, 9시간 후에 폭발하도록 시간을 장입해 선반 위에 얹어놓았다. KAL858기는 UAE의 아부다비 공항에서 착륙했다가 다시 서울로 향했다. 김현희 공작조는 도주하기 위해 UAE의 아부다비에서 내렸고, KAL858기는 아부다비에 착륙했다가 김현희 조를 내려놓고 서울로 직행하기 위해 이륙했다. 그리고 한국시간11월 29일 오후 2시 5분, 버마 근처인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폭발되었다.
이후 아부다비에서 내린 김현희 팀은 로마로 튀려다 아부다비 공항 직원에 의해 강제로 가고 싶지 않았던 중동의 작은 섬나라 바레인에 내리게 됐다. 북한 초대소가 짠 시나리오의 작은 실수가 빚어낸 저들의 낭패였다. 김현희 조는 2일 후 바레인 공항에서 로마행 항공권을 가지고 출국 수속을 마친 상태에서 바레인 주재 일본 대사관 직원과 바레인 경찰에 의해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 김현희 추격과정
정부는 공작조 두 사람이 바레인으로 간 사실까지는 확인했다. 이들은 여기에서 로마로 가려 했다. 이들이 로마로 가지 못한 것은 UAE 아부다비 공항의 특이한 수속 관행 때문이었다. 아부다비 공항은 비행기를 갈아타는 승객의 탑승 수속을 대신해 준다고 한다. 테러리스트 김현희 조는 두 개의 항공권을 가지고 있었다. 한 개는 아부다비를 거쳐 바레인으로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부다비에서 로마로 가는 항공표였다. 김승일-김현희가 계획한 여정은 아부다비-암만-로마 경로로 탈출하는 것이었다. UAE- 요르단- 이태리 노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예기하지 못했던 장애물이 나타났다. UAE의 아부다비에서 요르단으로 가기 위해 통과여객실로 가는 도중 공항 안내원이 항공권과 여권을 보자고 한 것이다.
뜻밖의 요구에 이 둘은 매우 당황했다. 아부다비-암만-로마행으로 되어있는 티켓을 보여주면 출발점이 아부다비이기 때문에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마련된 '통과여객실'로 올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 둘은 다시 통과여객실을 나가 처음부터 아부다비 규정에 따라 탑승 절차를 밟아야만 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비엔나 베오그라드-바그다드-아부다비-바레인을 통과하는 항공 티켓과 일본 여권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김현희 조는 공항 안내원이 티켓과 여권을 확인한 후 곧바로 돌려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UAE 안내원은 자신이 직접 탑승 수속을 하겠다고 고집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직접 탑승 수속을 하겠으니 티켓과 여권을 돌려달라고 반복 요청했지만, 공항 안내원이 해주는 대로 예정에도 없던 바레인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로 로마행 비행기를 타려다 만원이라 그 다음날로 예약했다.
다음날인 12월 1일 새벽 6:30분, 긴장한 김승일은 호텔 객실에서 김현희에게 말보로 담배값을 건네주었다. 둘이는 바삐 호텔을 나와 택시를 타고 30분 만에 바레인 공항에 도착해 로마행 비행기의 탑승 수속을 마쳤다. 타기만 하면 이들은 영웅이 되는 것이었다.
공항에서 한숨 돌리고 난 후 비행기를 타려고 출국 검색대를 통과하려는 순간 대기하고 있던 일본 대사관 직원이 여권과 출국신고서를 보자고 했다. 요구에 응한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대합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돌아온 대사관 직원은 김현희가 소지한 여권은 '하치야 마우미' 명의의 여권인데 이는 위조여권인 것으로 판명되었으니 두 사람은 곧장 일본으로 가야한다고 했다. 이후 이 둘은 바레인 경찰관 5명의 감시 하에 들어갔다. 로마 비행기는 이미 떠났다. 12월 1일, 오전 9시였다.
김승일이가 비장한 어조로 김현희에 말했다. “우리의 정체가 들통났다. 끌려가면 고생하다 죽는다. 여기서 자살하자. 나는 살만큼 살았지만 네가 안 됐구나 미안하다." 이에 김현희는 5명의 경찰을 향해 보란듯이 김승일이 건네주는 '말보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피웠다. 최후의 순간에 독약 앰풀을 꺼내 물어도 의심받지 않으려는 사전 포석이었다. 이때 경찰관이 가방을 달라고 했다. 김현희는 가방에서 말보로 담배갑과 가스라이터를 챙긴 후 가방을 경찰에 내주었다.
경찰은 김현희가 꺼내든 담배갑도 내놓으라 했다. 김현희는 앰플 표시가 돼 있는 담배 개비를 재빨리 꺼냈다. 경찰은 그 담배 개비를 빼앗았다. 다급해진 김현희는 경찰관 손에서 그 담배 개비를 낚아채 깨물었다. 그리고 기절해버렸다. 경찰관은 손가락을 입에 넣어 담배를 긁어냈다. 이런 승강이가 벌어지는 동안 옆에 있던 김승일은 여유 있게 앰플을 씹어 삼켰다. 그리고 곧장 죽었다.
● 바레인과의 외교 전쟁
전두환은 무슨 수를 쓰든지 김현희를 한국으로 데려오라고 명했다. 안기부 대공수사 부서에는 앰플 전문가가 있었다. 한 모 과장이었다. 30년 동안 북한간첩들을 조사해온 최고 전문가였다. 그는 자살용 독약 변천사를 정리하고 김현희가 사용했을 앰플을 챙겨 가지고 바레인으로 날아갔다. 12월 3일이었다. 그런데 북한은 외교적으로 중동 일대를 관장하고 있었다. 바레인이 태도를 급격히 바꾸었다. 한국으로부터 오는 사람을 일체 만나지 않겠다고 버틴 것이다. 한 모 과장은 미국 대사관을 통해 바레인 측 수사책임자 '핸더슨'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정해융 주 바레인 한국대사는 바레인이 고용한 영국인 핸더슨 수사 책임자를 만나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설득했다. 결국 한 모 과장은 합리적인 해더슨이라는 수사 책임자를 만났고, 설득에 성공했다. 하지만 바레인은 북한의 압력을 받아서인지 차일피일 미루었다. 서울에서 급파된 박수길 외무부 차관보가 마지막 카드를 꺼내 바레인을 협박했다.
"김현희는 여객기를 공중에서 폭발시킨 법죄자다. 국제적 폭발력이 엄청난 존재인것이다. 바레인은 그 엄청난 국제적 폭발력을 견디기 어렵다. 바레인 당국이 재판을 하게 되면 그 과정이 걸 것이다. 그 사이에 북한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김현희를 납치하거나 죽이려 할 것이다. 며칠 내로 북한이 김현희의 숙소를 폭파하러 올 것이라는 첩보도 있다. 북한은 테러리스트를 고용해 중동지역에 파견돼 있는 당신네 대사를 납치해 김현희와 맞바꾸자고 협상할 수도 있다. 한순간이라도 빨리 손을 털어야 당신의 나라가 안전할 수 있다. 왜 망설이는가?"
협박한 지 정확히 12시간 후, 아랍에미리트 공화국 외무장관 '칼리프'로터 연락이 왔다. "데려가시오" 외교의 충력전이요 위기관리의 FM에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464일 만인 1989년 3월 7일, 서울에서 김현희에 대한 1심 재판이 열렸다. 그 후 47일 만인 4월 25일, 1심은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90년 3월 27일, 대법원은 사형을 확정했다. 그 후 보름만인 1990년 4월 12일, 노태우는 그를 특별 사면시켰다.
◈[ 가짜 김현희 조작 ]◈
사건 발생 이후 재판이 시작되기까지 460여 일, 북한은 남한의 추종자들의 입을 통해 별의별 의혹들을 확산시켜 우리 사회를 어지럽혔다. 사건 발생 6일 만인 1987년 12월 5일, 조선중앙통신사는 사고는 북한과무관한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사고의 원인이 기상악화나 기계 고장일수 있다는 주장도 했다. 조총련과 종북자들은 소설도 쓰고 TV 특집들을 제작해 여론 몰이를 했다. 20~40 가지의 의혹들을 나열했지만 모두가 북한이 제기한 의혹들에 덧칠을 한 것들이었다. 이 모든 의혹들이 사회일각에 선동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진실이 담긴 블랙박스를 수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 정부는 각기 고도로 훈련된 조사관들을 보내 독자적으로 조사를 했다. 그리고 KAL858기는 북괴가 폭발시켰다는 조사 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미국 정부는 1988년 1월 21일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규정하고 북한인들에 대한 입국비자 발급을 극도로 제한하고, 무역, 투자, 원조, 차관, 금융거래 등에서 엄중한 제재를 가했다. 이어서 동년 1월 26일에는 일본이 제재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UN 차원의 규탄으로 이어져 북한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종북주의자들은 이것을 참을 수 없어 했다.
◈[ 2012년, 김현희가 폭로한 노무현 횡포 ]◈
2012년 6월 김현희는 노무현 시점에 그에게 가해왔던 국가 차원의 범죄행위들을 폭로했다. 국정원, 경찰청, 방송 3사, 좌파매체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인권위 심지어 국정원까지 합심해서 자신을 가짜로 몰아겼고 김현희를 해외로 추방하려는 집요한 만행들을 정부 차원에서 감행했다고 했다. 1급 비밀로 지켜왔던 김현희의 거주지를 TV 화면을 통히 널리 보도하는 등의 불법행위들을 감행했다. 그리고 KAL858기 참사는 당시 한국 정부가 조작한 것이라는 결론을 만들어 한국 정부를 범죄집단으로 매도하는 반면 북한 정권에는 깨끗한 면죄부를 선물하려는 일련의 반역행위들을 카르텔 형태로 저질러왔다고 폭로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나를 해외로 이민 보내 못 들어오게 한 뒤 가짜 범인이라서 도망갔다고 몰아가려 했다. 내가 이민을거부하니까 국정원이 1급 보안 사항인 나의 주거지를 방송에 노출했고 그래서 5년 동안 피신 생활을 해야 했다.”
남편 정모씨는 월간조선(2009년 2월호) 인터뷰에서도 2003년 여름 잘아는 국정원 간부가 오더니 내부가 시끄러운데 이민을 가줄 수 없느냐는 권고가 아닌 경고를 했다. 당시 국정원장은 민변 초대 회장 출신의 고영구씨, 2차장 (국내 담당)은 한국일보 기자 출신인 박정삼씨 였다.
국정원만이 김씨를 압박한 것이 아니다. 김씨는 2008년 10월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에게 보낸 편지에서 "담당 경찰간부로부터 2년 정도 타지역에 거주해 줄 것을 요구받았다."고 했다. 이 역시 상부의 지시 없이는 있기 힘든 일이다. 당시 경찰 총수는 최기문 경찰청장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김씨를 껄끄럽게 여긴 이유는 김씨가 활동할수록 북한의 소행이 반복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김현희 씨는 노 정권의 일부세력이 '김현희 가짜 만들기'에 나선 이유에 대해 "김정일에게 면죄부를주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오충일 위원장은 “KAL기 사건을 조사하는 핵심은 김정일이가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혀내는 것이다.”라고 말한 사실이 있다고 했다. 북한은 KAL기 폭파사건으로 미국 정부의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라 오랜 제재를 당하고 있었고,노무현 정부는 미국 측에 북한의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를 요구하고 있었다.
2003년 11월 3일 천주교 인권위원회와 정의구현사제단 신부 115명은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폭파범이라고 발표한 김현희는 가짜이고 KAL기가 폭파됐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며 전면 재조사를 요구했다.
보름 뒤인 11월 18일 MBC 'PD수첩'은 천주교 신부들의 기자회견문을 인용하면서 "김현희가 북한에 있을 때 찍었다는 사진이 그가 북한 사람이라는 유일한 증거로 제시됐지만 확인 결과 그 사진은 가짜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같은 프로에 KAL기 진상규명대책위원회 소속 심재환 변호사를 등장시켜 "김현희는 가짜다. 이건 어디서 데려왔는지 모르지만 절대로 북한 공작원이 아니라고 우리는 단정한다."고 했다. 심 변호사는 통합 진보당 이정희 前 대표의 남편이고 이석기 진보당 의원이 연루된 '민혁당 사건' 변호를 맡았었다. MBC에 이어 11월 29일엔 SBS '그것이 알고싶다' 프로가, 이듬해 5월엔 KBS '일요 스페셜'이 2부작으로 PD수첩과 같은 내용을 다뤘다.
2003.11.18. 방송을 통해 김현희의 아파트 전모를 영상으로 공개한 자들은 MBC 사장 이긍희, PD수첩 PD 최진용 등이다. PD수첩은 '16년간의 의혹, KAL기 폭파범 김현희의 진실'이란 프로그램에서 김 씨가 사는 아파트 전경, 불이 켜진 김 씨 집 창문, 김 씨 집의 현관문을 두드리는 장면 등을 방송했다.
◈[ 기자들 피해 임시거처로 전전 ]◈
김현희 부부는 붉은 세력의 표적이 되어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늘 임시거처였다. 그러던 중 2021년 2월, 김현희의 유일한 보호자 정 모 씨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97년 12월, 김현희와 결혼한 지 23년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붉은 세력의 끝없는 괴롭힘 때문에 김현희 부부는 어엿한 집에서 살아보지 못했다. 《월간조선》 2009년 6월호 <김현희 씨의 12년 만의 서울 나들이> 제하의 인터뷰에는 아래 내용이 있다.
"부엌이고 화장실이고 하도 좁아서 혼자 외에는 못 들어갑니다. 약을 놔도 생쥐하고 바퀴벌레가 3개월 지나면 또 생겨요. 쥐가 집에도 막 들어와요. 그게 참 영리하데요. 사람 있으면 못 나가고 있다가, 문 열면 확나가는 쥐가 많거든요. 바퀴벌레도 요즘 바퀴는 (집게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이만해요. 서양 바퀴인지. 지난 3월에 부산 가기 전날에도 새벽에 자다가 일어나서 이불 위로 지나가는 큼지막한 바퀴벌레를 잡다가 잠을 설쳤어요. 그런데 그런 곳에서 사는 저를 그날은 국가원수 경호하듯이 그러니까, 그것도 참 어색하데요."
1962년생인 김현희는 지금 60세다. 한국에 온 이후 35년 동안 김일성 종교집단에 시달려 왔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그녀는 35년 동안 임시거처의 인생을 이어온 것이다. 자유가 보장되는 이 사회에서 그녀는 국민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에 종북자들이 설치한, 곰팡내 진동하는 10평 가두리장에 갇혀 생쥐와 바퀴벌레로부터 또 다른 고통을 당하면서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