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그것은 기나긴 슬픔의 광시곡이었다. 밤하늘의 별마저도 그 빛을 잃고 검게 물들이는 그것은 광시곡이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가는 광풍이었다. 차갑게 메마른 대지조차도 붉게 물들이려 하는.
그것은 모든 이들에게 슬픔을 주고 떠나버리는 슬픈 노래였다. 나는 그것에 지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전쟁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었고, 나는 아직도 전장에 서있었다.
왕의 군사들은 오지 않았고, 나도 또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노인이 내게 일러주었던 것들 중에 한가지만을 만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11월. 나는 어제 도시를 떠났다.
실도르 시가 마주 보이는 곳에 위치한 엘롯 시를 말이다.
커다란 한 차례의 전투 이후 줄곧 그곳에서 머물었던 나는 지금 슬픔을 삼키고 있다.
내가 서 있었던 전장이 눈 앞에서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그것을 그저 스치고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헬라드 영지의 대지 위에서 차갑게 차갑게 죽어갔던 병사들. 그들은 나의 전우였고, 부하였었다.
나는 지금 슬픔을 삼키고 있다. 내게서 떠나버린 전장을 머릿속으로 다시 그려내며.
그러나, 한번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았고, 내게서 떠나가버린 전장은 다시 내 앞에 놓여지지 않았다.
나는 자리를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그러나, 내가 지금 갈 곳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아직 전장에 서 있었지만, 나는 전장에서 싸울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 주저앉아 있었다.
나는 엘롯 시에서 사흘 떨어진 거리의 평원 위에 동료도 없이 홀로 주저앉아 있었다.
나는 쉽사리 자리를 털고 일어설 수가 없었다. 지독한 고통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주저앉은 채로 나는 내 근처의 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숙여진 고개의 시야로 기가 죽은 풀들이 보였다.
그들은 녹색의 싱싱함을 잃고 갈색의.. 죽음. 갈색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차분히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풀들에게 힘빠진 웃음으로 안부를 전했다.
날이 저물어 갔지만 나는 여전히 주저앉은 채로 누울 자리를 찾지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새벽별이 떠오를 무렵 들판에 드러눕고 있었다.
꿈 속에서 나는 그들을 볼 수가 있었다. 전장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화살을 상대방에게 쏘아보내는 궁수들이 있었다.
그곳에는 적에게 치명타를 입히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병사들이 있었다.
또 그곳에는 적을 피해 멀리 우회하는 아군 기병들이 있었다.
그리고 모든 전장들이 지나가고 난 후의 전장에는 나 홀로였다.
고통 속에 죽음을 맞이한 이들을 뒤로 하고 있었다. 나는 홀로 서 있었다.
망연자실. 꿈 속에서 나는 힘을 잃은 나의 그림자를 볼 수가 있었다.
바람과도 같이 나를 지나쳐간 적들은 나를 보지 못한 듯도 했다.
나는 어느새 꿈 속에서 비웃음 비슷한 것을 허공에 흘리고 있었다.
꿈 속에서 날이 저물었다.
꿈 속에서 나는 볼 수가 있었다. 나의 머릿속으로 그려낸 것들을.
나의 머릿속으로 그려낸 사실. 거기에는 헬라드 영주가 기사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높고 든든한 성벽으로 지켜지는, 마법의 힘을 키우고 있는 실도르 시에서.
나의 머릿속으로 그려낸 사실에서 기사들은 도끼와 쪼개진 화살이 그려진 문장을 자랑스레 가슴팍에 그려놓았다.
그들은 헬라드 영주 옆으로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헬라드 영지의 충성스런 기사들을 쫓아낸 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승리의 기운이라는 것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감에 가득한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수염을 기른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커다란 뿔잔에 하나 가득 술을 받아 마시는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잔치를 즐기고 있는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기사들이었다.
적국의 왕에게 충성을 바치고 힘을 얻는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기사들이었다.
꿈에서 깨어나 내가 일어난 것은 해가 뜨기 전의 들판에서였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차가운 이슬을 머금은 들판에는 인적이 없었다. 전쟁에 주민들은 집 밖에 나오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혹은 나의 의지대로 이렇게 밖에 나와 있었다.
나는 몸이 으스스 떨려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이렇게 떨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꿈에서 추위가 아니었다면 깰 수 없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깨어났을 때부터 나는 떨고 있었다. 혹시 모를 일이다.
나는 나의 추위에 떨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순전히 죽음으로부터의 공포에 압도되어 떨고 있었던 것인지도 말이다.
나의 자존심이 그 사실을 감추고 추위에 떨고 있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 것은 아닐까.
나는 나의 생각에 사로잡혀 한참을 그대로 앉아있었다.
머릿속에 가득한 기억. 생각. 악몽과도 같은 지나간 일들에 대해 나는 무력하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뇌리로 스치는 것은 오로지 죽음. 내 곁에서 벼락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적을 베어넘기던 울덴 경.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비명. 화살에 맞고, 도끼에 찍히고, 창검에 찔려 비명 속에 혹은 고통으로 가득찬 침묵 속에 죽어간.
병사들. 기사들. 나의 전우들. 나의 기억들. 나는 나의 고통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나의 공포에 사로잡혀 압도되어 있었다. 나는 그렇게 천천히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붕괴되어져 가는 나를 보고 있었던 나는 나의 공포를 이겨내야만 했다.
그것이 나의 산 자로서의 역할. 임무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이겨내야 했다.
나는 나의 땅을 짚은 두 손을 땅에서 떼었다. 나는 나의 두 손을 무릎으로 그리고 허공으로 옮겼다.
허공에는 내가 잡고 일어설 수 있을만한 어떠한 것도 나를 위해 존재해 주지 않았다.
나는 허공을 붙잡고 일어설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나의 붕괴와 나의 공포를 이겨내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살아남아야만 했다.
죽은 자들의 염원을 뒤로 하고 나는 그들의 몫만큼이나 충실한 삶을 영위해야만 했다.
나는 그것이 어쩌면 나 대신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들에게 사과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렇게 느끼고 있었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초원 위에 일어서 멀리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평선 끝에는 겨울의 파란 구름이 넓게 펼쳐지고 있었다.
또한 그곳에는 갈색으로 변한 풀들의 초록을 기다리는 몸짓이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나의 주변에 대하여 미소를 지어주었다. 나는 크게 웃어주었다.
차가운 바람이 내게 힘을 더해주고 있었다. 나는 지금은 별을 보고 있었다.
나의 눈은 밝은 하늘의 별을 보고 있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일어서 있었다.
나는 나의 정해진 길을 걷기를. 그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첫댓글 역시나 우리 멋쟁이 나이츠님!
아하하.. 부끄럽게... 여하튼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