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인터넷으로 주문하기에는 도저히 '기다릴 수 없는 마음'으로 서점으로 (거의 달려)가서 책을 샀다. 며칠 전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할 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발견하고 '어랏, 박민규 작가의 신작이 나왔네.'하고 생각했으면서도 당시에는 클릭에까지 손이 미치지 않았다가(주문한 책들이 다소 많았나?) 다음 날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서점에서 국내소설들이 놓여있는 자리를 쓰윽 훑어보았다. 몇 권의 팩션 장르 소설들을 지나... 꽤나 차려 입고 꾸민 듯한 작가의 사진이 눈에 띄는 노란색 표지의 책 한 권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빨간색 입술이 도드라져 보이는 젊은 작가의 사진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결코 예쁘다고 말할 수 없으며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난장이를 전면에 내세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놓여있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2down.cyworld.co.kr%2Fdownload%3Ffid%3D642222b9f64d1b165ba7231e176a22fb%26name%3Dvelazquez_las_meninas_guarneri.jpg)
벨라스케스의 대표작 <라스 메니나스(Las Meninas)>(우리 말로는 '시녀들')는 유명한 작품이니만큼 그림 속 주인공을 두고 마르가리타 공주냐, 그림의 왼쪽에 자리한 화가 자신이냐, 아니다 거울에 비친 공주의 부모 펠리페 4세 국왕부부가 진짜 주인공이다 등 평론가들의 의견이 분분하기도 하였지만 명백히 한번도... 권력도 미모도 재능도 없는, 이 난장이 여인이 주인공으로 지목된 적은 없었다.
그리고...책의 홍보용 띠에 새겨진 한마디의 말. "그래도 날 사랑해 줄 건가요?"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150cm남짓한 단신이었다... 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벨라스케스가 그린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를 보고서 힌트를 얻어 작곡된 곡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반 정도 읽었을 즈음 치킨 한 마리를 시켜 먹었다. '켄터키 치킨'이 너무 자주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살아오면서 지나친 무수한 골목 어느 곳에는 아직도 BEER 대신 BEAR, HOF 대신 HOPE라는 네온 사인을 켜고 손님을 기다리는 허름한 호프 집이 있을 것도... 같았다.
이 년 전쯤이었다. 김연수 작가의 <청춘의 문장들>을 읽다가 작가가 고르고 골랐을 문장들과 문장들이 퍼올린 내면의 풍경에 반해서 가슴이 벅찼던 1호선, 지상을 지나는 역과 역 사이에서 엉뚱하게도 이런 질문이 떠올랐었던 것은. 이만큼 훔치고 싶은 내면을 가지고 싶은 사람이 뒤돌아보고 싶지 않을 만큼 아니, 단 일 초도 쳐다보고 싶지 않을만큼 못생긴 사람이라면... 그래도 나는 (작가로서가 아니라)이 사람에게 반했을까... ?
누구나 한 번쯤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속수무책으로 그리고 우매할 정도로 아름다움을 쫓는 사람들을 보며. 누구나 한 번쯤은 아니, 몇 번이고 남들의 기준이나 평균에 의해서 자신의 존재가 무척 초라하다고 부끄럽다고 느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이니까.(308쪽) 누군가는 시스템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눈물로 지새웠을 밤이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 이런 소설을 써보리라 계획한 적이 있었다. 굉장히 이상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남자 주인공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세태에 반하여, 특히 사회에 만연한 '외모 지상주의'에 반하여 자신이 몸소 '추녀'와 사랑을 해 보이겠다는 결심을 하고 치밀하게 못생긴 여자에게 접근하는 내용의 소설을. 어쩌면 꽤나 나도 '외모 지상주의'에 대해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여신이라고 불리우는 김태희 등과는 거리가 먼 여자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해보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종의 반감 혹은 억하심정으로 무장된 논리로는 제대로 된 소설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라는... 그런 생각을 뒤늦게서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세상은 '그들의 상상력'이 덧입혀진 나와는 별개인 세상이었을테니까. 요컨대 '나만의 상상력'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는 것만큼 간단하면서도 힘든 일은 없는 것 같다... 는 생각을 한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사랑이 별거냐, 는 생각을 했었다. 말하자면 뒤죽박죽 연애였다. 사랑을 해도 변하는 게 없었고 아니, 오히려 더욱 진창을 뒹구는 느낌이었으니까. 돌아와 생각해보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여기 와서 이 글을 읽고 뜨악해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네,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사랑과 비슷한 가짜인 그 무엇이었을 것 같은 그 변변찮은 '생활' 속을 버티면서 지나와 지금에 와 비로소 깨닫는 것 몇 밖에는 없다. 그 몇...마저도 비로소 나란 존재를 온전히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는 '삶'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김연수 작가의 열망이나 온기, 그리고 박민규 작가가 이야기하는 '사랑'이라는 상상력... 이런 온건하고 '사람다운' 긍정의 힘들을 왜 과거에는 몰랐나 싶다. 그러한 것들이 없다면 인생이란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작가의 작품 중 감히 최고, 가 아닐까 한다. 만이천팔백원이라는 책값에 기여를 했을 것이라고 보이는 소설 BGM이 담겨있는 CD는 아직 들어보지 않았다. 마지막 작가의 말까지 읽고 책장을 덮은 다음 홀린듯이 모니터 앞에 앉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박민규 작가의 작품은 여태까지 빼놓지 않고 읽은 편인데 은유와 입담도 그렇거니와 그의 작품 저변에 있는 어떤 '향수' 때문이었다. 특히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같은 작품들. 내가 느낀 '향수'를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말을 빌러 표현하고 싶다.
"우리 러시아인에게 향수는 서구인들이 쓰고 있는 의미와 조금 다르다. 가볍게 미소를 짓게 하는 그런 정서가 아니다. 현재 여기 없거나 다시 생기기를 희망하는 그런 감정이기보다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깊은 동정심(수직적인 동정심이 아니라 수평적인 동정심)이 향수다. 그 고통을 함께 느낄 때 우리는 타인과 감정적으로 연결된다. 그것이 향수다."
아... 소설 속의 문장을 훔쳐 말하는데... 한 권의 소설이 사람은 사람답고 달은 달답고 고양이는 고양이다운 여름 밤을 오롯이 내게 선사해주고 있다.
*dog's ear는 부러 적지 않는다. 그러기엔 놓치고 싶지 않은 문장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줄거리도 되도록 언급하지 않았다. 당신에게도 이 책이 온전한 감동으로 다가가길 바라며.
덧붙이기 1) 물론 베짱 양도 '오타의 여왕'이라지만 책을 읽다 오타가 눈에 띄어 적어본다.
225쪽 여덟번째 줄 : 그럼에도 불구하도->그럼에도 불구하고
덧붙이기 2) 이 책과 더불어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이라든가 토마스 만의 <키 작은 프리데만 씨>를 읽어보아도 좋을 것이다.
-제가 최근에 읽은 책 리뷰인데 재밌어서 회원 님들도 한번 읽어보라고 리뷰 올려요. :)
첫댓글 공짜로 이런 리뷰를 읽을 수 있어 또 한번 즐거웠네요~ 읽는 내내 눈이 아파서 대충 스키밍만 했는데 내실있는 내용에 음미할 게 많네요. 러시아 영화감독 에이센쉬쩨인인가 그리고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에 대한 향수는 아주 오래전일이라 가물가물한데 다시 상기되네요. 평론이나 리뷰하는 거 저에게는 정말 능력밖인데 부럽당~ 나오코님 글 보면 이십대 저의 내적 독백 어린 전철을 다시 타는 것 같아요. 롤러 코스터를 타는 흥분을 살짜 느낍니다.
뭔내용이길래...^^;
쉽게 이야기하면 뭐...잘생긴 남자가 정말 못생긴 여자와 연애하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심리를 잘 묘사해놓아서 그리고 주제의식이 있어서 재밌게 읽었답니다.
아~~~ 길다.. -,.- 공대생의 한계... ㅠ.ㅜ
ㅋ ㅋ 다 안 읽으셔도 되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ㅎㅎ 까짓것 유혹당해버리세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