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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걸을 거리는 어제 걸은 거리와 비슷하다. 얼핏 들어보니 로스 아르코스보다는 조금 더 걸어서 산솔(Sansol)이나 토레스 델 리오(Torres del Rio)까지 가려는 사람이 꽤 많다고 한다. 이유는 다음날 일정 때문이다. 다음날 우리가 갈 곳은 로그로뇨(Logrono)라는 대도시다. 대개의 사람들이 대도시인 팜플로나에 들렀던 것처럼 로그로뇨도 꼭 들렀다가 간다고 한다. 로스 아르코스에서 묵어가면 로그로뇨까지 27.8km 정도를 걸어야 한다. 첫날을 제외하고는 20km를 조금 넘는 거리를 걸었던 사람들에게 30km에 달하는 거리는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차라리 오늘 5~6km를 더 걸으면 내일 그만큼의 거리를 단축할 수 있고, 그만큼 도시를 더 즐길 수도 있다. 나도 살짝 고민을 했었지만, 일단은 지도책에 나와있는 만큼만 가기로 했다. '어떻게든 가지지 않겠나'하는 생각을 했던 거 같다.
오늘은 에스테야를 벗어나 조금 가면 와인 수도꼭지(Fuente de Vino)가 있다. 카미노에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책이나 블로그를 통해서 많이 봤을 거다. 수도꼭지를 틀면 와인이 나오는 곳이라니. 진짜 환상적이다. 그래서 오늘은 물통에 물을 채우지 않았다. 이전에는 다음날 먹을 과일, 빵과 함께 생수를 한통씩 사서 나눠 가졌다. 나는 보통 생장에서 산 물통에 옮겨담고 빈 생수통은 버렸는데, 오늘은 특별히 생수통을 배낭 옆 주머니에 넣고, 물통은 깨끗하게 씻어서 빈 상태로 챙겼다. 와인을 반 정도 채워서 걸으면서 마실 생각이었다.
<아예기(Ayegui), Photo by 미순>
에스테야를 벗어나면 바로 있는 마을
아주 작은 마을이다.
여기저기서 카미노와 관련된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준비를 마치고 오늘도 출발을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빵 냄새가 난다. 다음에는 카페에서 빵과 커피를 사 먹어 봐야겠다. 슈퍼마켓에서 빵과 햄 종류를 사고, 생수를 사는 것이 카페에서 사 먹는 것보다 훨씬 싸지만 여기까지 왔으니까 다양한 것을 경험해 보고, 맛 볼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차가운 공기를 마시면서 걷는데 에스테야가 생각했던 것보다 크다. 이런 줄 알았으면 어제 구경을 좀 더 했어야 했나 싶다. 에스테야를 조금 벗어나니 전원주택 단지 같은 곳이 나온다. 지도 상으로는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와인 수도꼭지가 나온다. 우리 세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신나서 걸어간다. 주변에 사람도 거의 없다.
<와인 수도꼭지(Fuente del Vino), Photo by 미순>
드디어 도착했다. 아니, 도착한 것 같다.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달라서 긴가민가하다가 담장 안쪽을 보니 카미노를 상징하는 기호와 수도꼭지가 있다. 보는 사람 기준에서 오른쪽은 물(AGUA), 왼쪽은 와인(VINO)라고 써져 있다. '당연히 와인이지!'하고 수도꼭지를 돌리는데 아무 것도 나오질 않는다. 너무 이른 시간에 가거나, 너무 늦게 가면 와인을 채워두는 탱크가 비어 있을 수 있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전자인가 보다. 어쩐지 아쉬워 수도꼭지 부분을 만져보니 와인이 조금이지만 나오긴 한다. 손가락으로 받아서 맛을 보는데 무슨 맛인지는 잘 모르겠다. 물은 잘 나온다.
"물이 무슨 소용이야!"
물이 들으면 서운할 망언을 쏟아냈다. 실망해서 머뭇머뭇 떠나지 못하다가 '그냥 가자'라는 누군가의 말에 길을 떠난다. 뒤를 돌아보지만 그런다고 비어있는 탱크에서 와인이 나올리는 없다. 아쉽지만 직접 봤다는 것에 의의를 가지고 출발한다. '뒤에 오는 사람들도 와인 수도꼭지에 오면 못 마시는 건 똑같아!'라는 나쁜(?) 마음을 가지고 간다. 기대가 컸는데 실망을 하니 힘도 빠지고, 배도 고프다. 적당히 앉을 만한 곳이 나오면 쉬면서 음식을 먹자는 말을 하면서 걸어간다.
<Photo by 미순>
갈림길이 나왔다. 오늘 구간에는 갈림길이 있다. 하나는 기본 루트고, 하나는 산으로 올라가야 되는 등산 루트다. 걷는 사람이 가고 싶은 길을 선택하면 된다. 등산 루트의 좋은 점은 경치가 좋다는 것과 기본 루트보다 거리가 조금(500m정도) 짧다는 거다. 어제 지도를 보여주면서 두 사람에게 물어봤을 때 대답은 당연히 기본 루트였다. 힘들어 보이긴 했지만 어쩐지 아쉬워서 내일 갈림길에 가면 다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곳에 오니 그냥 기본 루트로 가는 게 좋을 듯 하다. 경치도 이쪽이 더 좋을 것이 틀림없다. 슬슬 다시 출발하려는데 엘리자가 어느새 우리를 따라 잡았다. 우리를 보고 다정하게 인사를 해주는 엘리자. 큰 눈으로 윙크를 하면서 인사를 한다. 그리고 일행과 다시 출발하는데 속도가 굉장하다. 엘리자는 그냥 마을에서 만나야겠다.
오솔길을 걷다가 길 옆에 해가 잘 비치는 작은 공터가 있어서 자리를 잡고 앉는다. 아직 해가 비치지 않은 곳은 땅이 촉촉하게 젖어 있는데, 햇빛이 드는 곳은 흙이 말라있다. 앉아서 어제 산 빵과 젤리 같은 것을 먹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라는 인사를 하며 지나간다. 그렇게 휴식 겸 식사시간을 가지고 있는데 저 멀리서 낯익은 사람이 걸어온다. 피터 할아버지다. 주비리를 마지막으로 그동안 못봐서 아쉬웠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난다. 여전히 걸걸한 목소리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주시는 모습을 보며 우리도 같이 웃는다. 무릎이 아파서 걷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괜찮을까 걱정이 된다. 자기는 무릎 상태를 보고 어디까지 갈지 정하겠다고 하면서 과일 맛있게 먹으라는 인사를 남기고 먼저 떠난다.
<피터 할아버지와 함께>
피터 할아버지의 걸걸한 목소리와 사람 좋은 웃음은 정말 매력적이다.
<Photo by 미순>
생각해보면 생장에서부터 이 날까지 온전히 맑기만한 날이 없었다.
항상 구름이 많고 흐렸다.
시에스타 전에는 쌀쌀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스페인은 태양의 나라라며!'라고 했다.
우리는 조금 더 지나서 알게 된다.
스페인은 태양의 나라라는 것을.
걷다보니 등이 너무 아프다. 피레네를 넘었던 첫날 어깨가 엄청 아팠지만, 그 이후로 이렇게 아픈 것은 처음이다. 등이 아픈가 싶더니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허리까지 아프다. 아픔을 참고 걷는데 자꾸 속도가 느려진다. 걷다보니 통증 때문에 자꾸 짜증이 난다. 조금 전에 쉬었는데 또 쉬려니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다. 참고 걷다가 도저히 못참겠다. 결국 배낭을 벗어 바닥에 내팽개친다. 그리고 두 사람한테 '지금 배낭 때문에 등, 허리가 너무 아파서 솔직히 조금 짜증이 난다. 미안한데 배낭 정리 좀 다시 하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그러라고 하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사실 짜증 낼 일도 아니고, 그냥 말하고 멈춰서 배낭 정리를 했어도 되는데 왜 그랬나싶어 미안한 마음이 든다. 배낭을 열어 천천히 정리를 하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처음보는 의기소침한 모습 때문인지 두 사람은 괜찮다고 하면서 위로도 해주고, 이런저런 얘기도 나눈다. 혼자서 카미노에 왔다면 많이 외로웠을 거다. 항상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건 참 고맙고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혼자 온 친구들이 더 대단해보였고, 더 마음이 쓰였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을 지나면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할 때까지 마을이 없다. 남은 거리는 12km정도다.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픈 것은 그럭저럭 견딜만 하지만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면 난감하다. 마을에서 마을 사이의 거리가 짧으면 참고 갈 수 있지만 오늘처럼 12km를 가는 동안 마을이 없다면 정말 힘들다. 숲이나 으슥한 곳이 있으면 안보이는 곳으로 가서 해결이 가능하지만 얄궂게도 오늘은 허리만큼도 올라오지 않은 풀만 잔뜩 있는 길이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사람도 엄청나게 많다. 거의 줄을 서서 간다. 미애는 그냥 쉬지 않고 걸어서 조금이라도 빨리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하는 게 낫겠단다.
<Photo by 미순>
그렇게 걸어가다가 길가에 노천카페가 보인다. 나는 노천카페에서 보카디요(Bocadillo)를 사서 금방 따라가겠다고 하면서 두 사람을 먼저 보낸다. 화장실도 가고 싶지만 배도 고팠기 때문이다. 혼자 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렸다가 돈을 내고 두 사람을 쫓아간다. 미애와 미순이는 멀리서 봐도 딱 티가 난다. 주황색 모자 때문이기도 하고, 걸음걸이를 봐도 다른 사람과 구분이 된다. 꽤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시야에 들어오니 안심이 된다. 부지런히 걸어서 서서히 거리를 좁혀간다.
지도를 꺼내보니 아까 그 노천카페에서 로스 아르코스까지의 거리는 6.1km다. 엄청 멀진 않지만, 그렇게 가깝지도 않은 거리다. 같은 6km라도 어떤 길이냐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진다. 문제는 계속 같은 길이 반복 되는 것 같다는 거다. 이런 길은 정말 힘들다. 카미노 여행기를 보면 메세타가 계속 비슷한 길이 반복되면서 힘들다고 하던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나 싶다. 어제도 그랬는데 오늘도 힘들다. '퍼지는' 듯한 느낌이다. 마을이 나올 법도 한데 나오질 않는다. 앞에 코너가 보인다. 저 코너를 돌았는데도 로스 아르코스가 나오지 않는다면 너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미애에게 말했다.
"저기를 돌았는데 마을이 안나오면 난 그 자리에 앉아서 울어 버릴 거야. 그러고 한번 쉬었다가자"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코너를 돌았는데 마을이 보인다. 로스 아르코스가 틀림없다. 로스 아르코스여야 한다. 그렇게 오늘의 목적지인 로스 아르코스(Los Arcos)에 도착했다. 지도에 따르면 우리가 오늘 갈 공립 알베르게 ISAAC SANTIAGO는 마을의 중앙을 지나 거의 마을 끝까지 가야 한다. 이미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그저 빨리 들어가고 싶은 마음 뿐이다. 다행히 마을이 큰 편은 아니다. 골목 길을 지나니 성당이 보이는데 굉장히 크다. 성당 앞에는 광장이 있고, 카페가 있다. 알베르게에 갔다가 정리하고 나와서 맥주 한잔 하자고 한다. 알베르게가 꽉 차 있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기만을 바란다.
<성당, 광장, 카페>
어느 마을을 가더라도 이 세 가지는 반드시 있다.
<산타 마리아 성당과 카스티야 문. 이곳은 로스 아르코스, Photo by 미순>
마을 중심부를 지나 강을 건너가니 알베르게가 보인다.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서 혹시나 했는데 오스피탈레로가 자리는 충분하다며 안심시킨다. 이곳에서는 2명의 오스피탈레로가 접수를 받고 있는데 둘 다 제법 연세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이전의 알베르게보다 대화가 길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길래 저렇게 길어지는지 모르겠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앉자마자 하는 말이
"Can you speak English?"
다. 뭔가 많이 물어보려나 싶어 순간 긴장했다. 조금 할 수 있다고 하니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는데 별로 어려운 말도 아니다. 알베르게로 들어갈 때는 입구에 있는 신발장에 꼭 등산화를 벗어두고, 지팡이는 따로 모아두는 바구니에 꽂아두라는 것과 주방이 있지만 전자렌지 같은 것은 없다는 말 정도였다. 간단한 얘기를 더 나누고 난 뒤 우리를 안내해주겠다고 한다. 주방을 보여주며 냄비와 식기가 어디있는지 알려준 뒤 2층으로 올라간다. 방은 4개 정도가 있는데 방문은 따로 없다. 이곳도 푸엔테 라 레이나처럼 노인이 많다. 우리가 안내 받은 곳은 침대가 4개 있는 작은 방이다. 횡재했다. 친절하게 설명해줘서 고맙다고 인사한 뒤 짐을 푼다. 미애가 남은 침대는 우리가 아는 사람이 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는 순간 모르는 사람이 들어왔다. 우리는 모두 멋쩍게 웃었고, 두 사람은 먼저 씻으러 갔다.
지도를 보니 생장에서 출발해서 메세타 전에 있는 대도시 부르고스(Burgos)까지 절반 정도 왔다. 지금까지 걸은 거리보다 조금 더 걸으면 부르고스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어찌보면 많이 온 것 같지만, 전체 일정을 놓고보면 아직 20%도 못 걸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한참 남았다. 배낭 정리를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두 사람이 왔다. 나도 씻으러 갔는데 이곳은 가림막이 없다. 가림막이 없는 곳에서 씻는 것은 어쩐지 쑥스럽다. 따뜻한 물은 콸콸 나와서 몸의 피로가 풀리는 것 같다.
씻고 나와서 쉬고 있는데 마누엘이 도착했다. 우리와 반대편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마누엘에게 인사를 하러 가는데 피터 할아버지도 누워 계신다. 말을 걸고 싶었지만 주무시고 계셨기 때문에 나중에 마주치면 말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누엘에게 가서 인사를 하니 반가워한다. 하지만 반가운 것도 잠시, 언어의 장벽에 가로막힌 우리는 어색한 웃음만 주고 받다가 이따가 보자는 말을 하고 돌아선다.
하루 이틀만 빨래를 안하면 빨랫감은 금방 쌓인다. 오늘은 빨래를 모아서 세탁기를 돌리기로 했다. 마누엘이 알베르게 뒤로 돌아가면 세탁기가 있다고 알려준다.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세탁기만 돌려서 야외에 널어두기로 한다. 세탁기를 돌리고 한국에 있는 부모님께 영상통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참 울리고 난 뒤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내쪽에서 영상이 보이질 않는다. 부모님은 내가 보인다고 하는데 나는 보이질 않으니 조금 답답하다. 어쨌든 오래간만에 문자가 아닌 목소리로 대화를 하니 좋다.
그러는 사이 한국인 일행이 왔다. 어제 밥을 먹으면서 '내일 우리는 로스 아르코스까지 갈 것이고, 알베르게는 공립으로 갈 겁니다'라고 말은 했었는데 진짜 만나게 되니 반갑다. 오늘 만나면 수제비를 해 먹기로 했다. 아버님이 얼큰한 국물에 수제비를 드시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밀가루 반죽을 하고 양파나 파 같은 것을 넣어서 모양은 내겠지만 얼큰한 국물이 될까요' 하고 여쭤보니 비장의 무기가 있다고 하신다. 그 비장의 무기는 대형 라면스프다. 형대네는 출국하기 전에 이것저것 필요할 것 같은 것들을 사왔는데 그 중 하나가 라면스프였다. 미소와도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개인시간을 가진 뒤에 시에스타가 끝나면 마을에 가서 이것저것 재료를 사기로 한다. 카미노에서의 모든 일정은 시에스타 이후에 하는 것이 좋다.
지금 온 사람들이 각자 배정받은 방과 침대로 들어간 사이 우리 세 사람은 알베르게 마당에 있는 의자에 앉아 한가롭게 시간을 보낸다. 일기를 쓰고, 지도책을 꺼내 내일 갈 거리와 쉬어갈 만한 마을을 확인한다. 그때 제임스가 나타난다. 반가워하며 인사를 나누는데 맥주를 한캔 내민다. 알베르게에 자판기가 있었다. 거기에서 뽑아 온 것이다. 주는 맥주는 감사하게 받아서 마시면 된다. 고맙다고 하면서 오늘 걸으면서 먹지 못했던 오렌지와 아까 노천카페에서 샀던 보카디오를 탁자에 올렸다. 그렇게 제임스와 같이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놀고 있는데 미소가 나온다. 샤워장이 꽉 차서 잠시 나왔단다. 이리오라고 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눈다. 미소는 영어도 제법해서 제임스와도 말이 잘 통한다. 여유롭고 평화로운 시간이다. 참 좋다.
어느덧 시에스타가 끝나고 일행들이 하나둘씩 나온다. 다 같이 마을로 가서 밀가루와 필요한 채소를 샀다. 우리는 내일 걸으면서 먹을 간식과 빵도 샀다. 역시 바게떼는 싸다. 3명이 넉넉하게 나눠 먹을 수 있는데 1유로라니. 하지만 딱딱한 부분을 열심히 씹어 먹으면 입천장이 까진다는 단점이 있다. 미순이와 나는 입에서 피맛이 가시질 않는다며 다음에는 부드러운 빵을 사자고 요구했다. 미애는 가격을 보고 고민해본 뒤 결정하겠다고 답했다.
재료를 다 산 뒤 성당에 들어가 본다. 입구에서부터 오래된 느낌을 풍기는 성당은 실내에 들어가보면 그 화려함과 웅장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산타 마리아 성당 입구>
굉장히 오래된 느낌을 팍팍 풍긴다. 성당 도장이 있어서 크레덴시알을 가져가면 찍을 수 있다.
로스 아르코스를 그냥 통과하는 순례자들도 성당에 잠시 들러 도장을 찍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성 야고보>
이 사람이 산티아고, 야고보, 제임스다.
시신을 덮고 있었다는 조개와 함께, 지팡이와 조롱박이 상징이다.
성당 구경을 마친 뒤 알베르게로 돌아와 수제비를 만든다. 오늘은 저녁준비를 조금 일찍 시작했는데, 저녁에 있을 미사에 참석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미사 시간이 조금 빨라서 저녁을 일찍 먹기로 했다. 오늘도 각자 역할 분담을 했다. 채소를 다듬고, 밀가루반죽을 그럴 듯 하게 만들고, 라면 스프를 넣고 물을 끓이고,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제임스는 어제 초대를 거절한 것이 미안했기 때문인지 , 우리와 같이 밥을 먹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식사초대에 흔쾌히 응했다. 마누엘은 같이 저녁을 먹자는 말에 조용히 나가 와인을 사왔다. 우리는 제발 괜찮으니 앞으로는 그냥 와서 먹거나 아니면 와인값도 나누자고 했지만, 마누엘은 그때마다 아주 단호하게
"No."
라고 했다.
<오늘은 수제비 파티, Photo by 미순>
마누엘은 또 와인을 사왔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제법 그럴듯한 수제비가 완성되었다. 큰 냄비와 작은 냄비에 나눠서 끓인 수제비를 각자 덜어서 먹었다. 수제비 반죽이 아주 잘 되었다. 그리고 라면 스프는 진리의 맛이다. 다들 감탄하면서 먹는다. 그때 아버님이 어제에 이어 다시 비장의 무기를 꺼내셨다. 고추장이다. 다들 신나서 먹다가 보니 제임스가 굉장히 잘 먹는다. 맵지 않냐고 하니 맛있단다. 심지어 고추장까지 넣어 먹는다. 마누엘은 잘 못먹는다. 자기는 너무 맵다고 하면서 계속 숨을 내쉰다.
신나게 먹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미사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슬슬 설거지와 뒷정리를 한다. 남은 국물을 버리려는데 브라질 아주머니가 관심을 보이면서 한 번 먹어봐도 되냐고 물어본다. 그러시라고 하니 숟가락으로 살짝 떠 먹고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것을 먹은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을 마신다. 너무 맵다면서 눈물까지 글썽거린다. 주변에 있던 아주머니의 동료들은 배를 잡으며 웃는다. 한국사람들이 맵게 먹긴 하나보다.
정리를 다 하고 성당으로 간다. 제임스는 따로 종교는 없다고 한다. 딱히 갈 마음은 없어보였는데 의외로 따라 나선다. 그러면서 장난스럽게 성호를 긋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우리는 모두 웃음이 터졌는데 딱 한 사람이 정색을 하면서 지나쳐 간다. 마누엘이다. 마누엘과 제임스는 여러 차례 같이 식사를 했는데 크게 친해지지 않았다. 마누엘은 제임스의 장난스러운 태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듯 했는데, 그런 마누엘의 분위기 때문인지 제임스도 굳이 마누엘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성당에 도착해서 보니 이미 미사는 시작되었고, 자리도 거의 꽉 찼다. 서둘러 제일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보니 카미노에 와서 첫 미사 참석이다. 카미노에서는 가는 마을마다 크든 작든 성당이 있고, 그 성당을 중심으로 광장이 있으며 광장 주변에는 카페가 있다.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맥주나 커피를 마시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광장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은 자연스럽고, 그 곳에서 기타나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과거에 성당/종교는 사람들에게 삶이고 생활이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들어와 있는 이 성당은 곧 마을의 상징이었고, 사람들의 내적/외적인 삶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곳이 곧 문화다.
미사는 역시나 스페인어로 진행되었다. 그래도 순서는 대충 알 것 같았다. 군 복무 시절 종교행사를 가면 천주교에 가곤 했었다. 조용한 분위기도 좋았고, 노래도 좋았다. 여러 번 가다보니 미사 순서도 대충 알게 되었다.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멋진 곳에서, 모두가 깨어있는(!), 엄숙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뭉클함을 느낀다. 뭔가 힘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이다. 기분만 그렇다. 미사가 끝나고 난 뒤 신부님이 순례자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한다. 따로 줄을 서거나 하진 않았고 그냥 우르르 몰려가서 서 있으니 순례자를 위한 기도를 따로 해준다. 역시 스페인어였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잘 몰라서 그냥 멀뚱히 서 있는데 아는 단어가 나왔다. 암포야. '물집 잡히지 않게 해달라는 말인가?' 웃음이 나온다. 그 많은 말 중에 '암포야'를 알아들은 게 재미있었고, '물집도 순례자의 상징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 모든 순서가 끝나고 알베르게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마르코스가 웃으면서 인사를 한다. 오늘은 길에서도 알베르게에서도 못 봐서 다음 마을로 넘어갔나 했는데 여기 있었다. 오늘 어땠냐고 인사를 나누고 난 뒤 마르코스가 아쉬운 얼굴로 말한다.
"나는 오늘이 마지막이야. 휴가가 얼마 남지 않았거든. 그래서 이제 돌아가야 돼."
생각지도 못한 말에 깜짝 놀랐다. 나도 모르게 모든 사람들이 산티아고까지 간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 같지 않은데 말이다. 친해진 사람이 이제 떠난다고 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아쉬움에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마르코스도 아쉬워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다 이내 웃으며 말한다.
"내년 휴가 때는 로스 아르코스부터 시작할 거야. 나는 한번에 산티아고까지는 걸을 수 없어. 대신 몇 년이 걸릴지는 몰라도 꼭 산티아고까지 갈 거야."
그러고는 나, 미애, 미순이를 안아주면서 무사히 산티아고까지 갈 수 있길 바란다며 행운을 빌어준다. 나도 마르코스가 반드시 산티아고까지 갈 수 있길 바란다고 인사를 건낸다. 마르코스를 알고 지낸 기간은 3~4일 정도밖에 안된다. 하지만 이후에도 우리는 마르코스를 그리워했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아마도 마르코스의 유쾌한 웃음과 따뜻한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침낭 속으로 들어가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본다. 걸을 때 조금 힘들긴 하지만 피레네를 넘어올 때와 비교하면 견딜만 하다.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친해졌다. 하루하루가 즐거워지고, 내일 가는 곳은 어떨지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그래. 이 맛에 카미노 걷나보다.'
<산타 마리아 성당(로스 아르코스), 알베르게 도장>
어제에 이어 오늘도 힘들었다.
내일은 잘 걸을 수 있으려나. 그래도 내일이 기다려진다.
오늘 걸은 거리 21.5km
작성자 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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