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1/14 세계 당뇨병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이순신 장군 동상과 거북선 (공중전화 카드)
2010 - 이순신 장군 동상 42년만에 광화문 떠나 42년만에 대대적인 수리를 하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14일 광화문을 떠나 경기도 이천의 공장으로 향했다. 동상은 40일간 수리를 받게 될 예정이다. 오전 9시쯤 보호틀과 동상을 연결하는 작업이 막바지에 달했고 모든 준비 작업이끝난 오전 10시쯤 200t 규모의 크레인이 동상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동상은 위아래 방향의 고정을 위한 보강 작업을 마친 뒤 20∼30㎞ 가량의 저속으로 운행하는 차량에 실려 이천으로 향했다. 디지털뉴스팀 /경향신문 2010-11-14 11:27:1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1141127121&code=940100
2010 - 23살 페텔, F1 최연소 챔피언에 19라운드 우승…알론소 제쳐 페텔 시대가 왔다. 레드불팀의 제바스티안 페텔(23·독일·사진)은 14일(한국시각) 아랍에미리트연합 아부다비에서 열린 2010 포뮬러원(F1) 그랑프리 최종 19라운드에서 루이스 해밀턴(영국·맥라렌)을 10.1초 차로 제치고 1위로 통과했다. 올 시즌 5번째 우승한 페텔은 종합점수 256점으로 챔피언이 됐다. 23살133일 만의 왕좌여서 사상 최연소 기록도 세웠다. 예선 1위로 출발대의 가장 앞인 폴 포지션을 차지한 페텔은 5.554㎞ 서킷을 55바퀴 도는 305.355㎞ 주행 장정에서 단 한번도 추월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1시간39분36초837로 골인했다. 2주 전 전남 영암에서 열린 시즌 17라운드 코리안 그랑프리에선 비 때문에 중도 포기해 점수를 따지 못했지만, 이날 완벽한 기량으로 막판 뒤집기에 성공했다. 2007년 20살로 그랑프리에 데뷔해 최연소로 포인트를 따냈고, 2008년 이탈리아대회에서 예선 1위 최연소 기록을 세웠던 페텔은 이번 우승으로 명실상부한 F1의 간판으로 떴다. 18라운드까지 선두였던 페르난도 알론소(스페인·페라리)는 이날 7위에 그치면서 총점 252점으로 2위에 만족해야 했다. 마크 웨버(호주·레드불)가 3위, 해밀턴이 4위로 마감했다. 한편 복귀한 ‘F1 황제’ 미하엘 슈마허(독일·메르세데스)는 이날 출발 뒤 첫번째 코너에서 반바퀴 돌며 미끄러졌고, 따라오던 비탄토니오 리우치(이탈리아·포스인디아)의 차가 슈마허 머신을 타고 넘는 사고로 경기를 접으며 9위(72점)로 시즌을 끝냈다. 김창금 기자 kimck@hani.co.kr /한겨레 2010-11-15 오후 08:39:49 http://www.hani.co.kr/arti/sports/sports_general/448819.html
2007 - 호세 카레라스 특별 내한콘서트 지휘 : 데이비드 히메네스 (David Giménez) * 스페인 바르셀로나 태생 사반세기 동안 플라시도 도밍고,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함께 ‘세기의 테너’ ‘세계 제 3대 테너’로 불리우며 정상의 자리를 지켜왔던 금세기 최고의 리릭 테너 호세 카레라스가 2007년 11월 14일(수) 오후 8시 예술의전당에서 KBS교향악단과 함께 내한 콘서트를 갖습니다. 지난 2005년 체육관이나 운동장 공연이 아닌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공연으로 한국 관중에게 수준 높은 클래식 공연을 선보인 호세 카레라스는 희끗희끗 눈에 띄는 백발만큼 더욱 깊어진 음악성과 여전히 윤기있는 목소리로 청중들을 사로잡은 바 있습니다. 또한 이듬해 크리스마스에 다시 내한하여 ‘20세기 가장 아름다운 미성(美聲)’이라는 찬사에 걸맞는 감미롭고 로맨틱한 선율을 뽐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번 내한 공연에서는 KBS교향악단이 반주를 맡아 수준 높은 연주를 들려줄 예정이며, 지휘는 호세 카레라스의 전속 지휘자이자 그의 조카이기도 한 성악 전문 지휘자 데이비드 히메네스가 함께합니다. 또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인 소프라노 박미혜가 특별출연하여 호세 카레라스와 멋진 듀엣을 선보입니다. /KMS http://www.kms-partner.com/bbs/board.php?bo_table=pr_perf&wr_id= 140&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B8%DE%C1%B6
HSBC은행 특별 초청, 세계적인 테너 호세 카레라스 내한 공연 행사 개최 HSBC 은행은 플라시도 도밍고, 고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함께 세계 3대 테너로 손꼽히며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음색으로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려온 테너 호세 카레라스의 특별 초청 콘서트를 개최하였습니다. http://www.hsbc.co.kr/1/2/about-kr/brand-home/culture
- Greece 2005 Diabetes - World Day of Diabetes
2007 - 제1회 유엔 세계 당뇨병의 날 : 당뇨병 퇴치 국가정책 개발 촉구 유엔이 공인한 제1회 세계 당뇨병의 날을 맞이해 국제 당뇨병 연맹(IDF)은 각국 정부에 대해 당뇨병의 예방,관리,치료를 위해 국가차원의 정책을 개발하고 전세계 독지가들은 확대되는 당뇨병의 만연에 대처하기 위한 국제 당뇨병 기금의 필요성을 검토해 줄 것을 촉구했다. 국제 당뇨병연맹 회장인 마틴 실링크 박사는 세계 당뇨병의 날 기자회견에서 당뇨병의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정책변화와 기금확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실링크 박사는 “당뇨병은 지금 세계인의 건강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세계가 이제까지 겪었던 가장 파멸적인 유행병의 하나다.그러나 당뇨병 자금 지원은 다른 질병들과 비교할 때 부끄러울 정도로 미흡하다.”고 말했다. 11월14일은 기존의 세계 당뇨병의 날을 유엔이 공인한 후 처음 맞이하는 기념일이다. 작년말 유엔 총회는 결의안 61/225호를 채택했다.이 결의안은 11월14일을 올해부터 유엔이 공식적으로 지키는 세계 기념일로 규정하고 당뇨병을 에이즈에 이어 정식 유엔의 날로 지정하는 두 번째 질병으로 공인했다. 세계 당뇨병의 날 결의안은 당뇨병을 “가족,국가 그리고 세계에 대한 위협”이라고 묘사했다.비전염성 질병이 에이즈,결핵,말라리아 같은 전염병 처럼 세계에 대해 심각한 위협을 가하는 것으로 간주된 것은 당뇨병이 처음이다.IDF와 세계보건기구(WHO) 통계는 현재 세계 당뇨병 인구가 2억4천56백만명이 넘는 것으로 시사한다. 중대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을 경우 이 수치는 2025년 까지 3억8천만명에 도달한다.(i) 제1회 유엔 공인 세계 당뇨병의 날을 맞이하여 13일 뉴욕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IDF 차기 회장 선임자인 장 클로드 모아냐 박사는 당뇨병의 유행을 조장했던 당뇨병의 고조되는 위협에 대한 무관심의 이유를 설명하면서”당뇨병은 오랜 세월 동안 ‘심각하지 않은 것’ ‘별것 아닌 설탕’ 또는 ‘노인과 부자병’ 등으로 방치했다. 증대되는 당뇨병의 위협은 오래도록 대부분 무시됐고 세대를 이어가면서 결정적인 조치를 하지 않았다.당뇨병은 레이더에 탐지되지 않은채 숨어들어 세계 보건의 파멸적 상황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모아냐 박사에 따르면 이제는 당뇨병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조치를 취해야 할 적절한 때다.그는 ” 세계 당뇨병의 날 결의안을 계기로 얻어진 정치적 힘과 강력한 당뇨병 공동체의 조정된 주장,손쉽게 구할 수 있는 약제의 이용은 각국 정부가 당뇨병과 그 합병증의 예방정책을 시행할 수 있는 기회를 조성했다.”고 말했다. 당뇨병은 세계 성인 인구의 6%가 걸려있다.그것은 실명,심장병,뇌졸중,신부전,사지절단의 주요인이다.매년 380만명 이상이 당뇨병으로 사망, 당뇨병을 에이즈와 말라리아를 합친 것 보다 더 큰 세계적 살인자로 만들고 있다. 10초당 1명이 당뇨병 관련 요인으로 사망한다.같은 10초에 2명이 당뇨병에 걸린다. 당뇨병은 비용이 많이드는 질병으로 개인,가족,보건의료 시스템에 광범위하게 부담을 가중시킨다.그것은 경제성장을 은밀하게 해치는 위협이 되고 있는데 특히 현재 당뇨병의 부담을 대부분 떠안고 있는 개발도상국에서 그렇다. 현재 당뇨병의 예방과 치료에 투입되는 지출은 연간 2,320억 달러로 추정된다.이 가운데 80% 이상이 선진국에서 투입되고 있다.그러나 당뇨병 환자의 절대 다수(전체의 70%)는 개발도상국에서 발견되고 있다. 당뇨병 유행의 규모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이 병은 독지가들의 큰 자금 지원을 받지 못했다.예를 들어 보건 부문에 대한 해외개발원조(ODA)는 2002년 29억 달러에 달했다. 이 자금 29억 달러의 대부분이 전염병,특히 에이즈 지원에 지출됐다.전체 자금에서 당뇨병을 포함한 비전염성 만성병에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0.1%에 불과했다. 유엔의 결의안 채택으로 정치적 힘을 얻었지만 당뇨병의 만연에 의미있게 대처하려면 대규모 재정자원이 필요하다. 이 필요를 인식하고 있는 국제당뇨병협회는 기존의 국제 보건재정 메커니즘의 분석과 다양한 관계 당사자들과의 상담을 기초로 당뇨병에 대한 국제 금융제도 창설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기자회견을 마무리하면서 실링크 박사는 “당뇨병의 예방과 치료를 위한 국가적 계획의 전면적 실시는 모든 사람의 정당한 권리다.지금은 당뇨병을 안고 살아가는 2억4천6백만명에게 큰 변화를 주고 당뇨병 자체의 효과적인 예방전략을 도입해야할 시기다.”고 말했다. 편집자 주: 1991년 IDF와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해 처음 소개된 세계 당뇨병의 날은 그후 세계 당뇨병 대표 단체들에 의해 기념일로 지켜졌다. 11월14일을 선택한 것은 그날이 찰스 베스트와 함께 인슐린을 발견한 프레데릭 밴팅의 탄생 기념일이기 때문이다. 유엔 결의안 61/225호는 11월 14일을 2007년 부터 유엔이 공인하는 당뇨병의 날로 인정했다. 캠페인과 조명 기념물들의 전체 리스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http://www.worlddiabetesday.org을 조회하면 된다. (뉴욕 11월13일 AsiaNet=연합뉴스) Date: Wednesday, November 14, 2007 00:01
- Philip Roth, Milan Kundera
2006 - 쿤데라 소설 22년만에 고국 체코서 지각 출간 ‘참을 수 없는 존재…’ 베스트셀러 돼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처음 나온 지 22년 만에 작가의 고향 체코에서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영국 신문 <더 타임스>가 14일 보도했다. 프랑스어로 초판을 낸 이 책은 지난달 체코어로 출간됐으며, 한달남짓 만에 매진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1968년 체코의 자유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줄리엣 비노시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과거 공산주의 시절 체코 당국은 이 책을 반체제 소설로 낙인찍어 출간을 금지했다. 쿤데라의 대리인은 “체코어 원본 원고를 일부 잃어 작가가 프랑스판을 체코어로 다시 번역하고 일부 내용을 고치고 보태는 바람에 체코판의 발행이 늦어졌다”고 말했다. 쿤데라는 소련군이 ‘프라하의 봄’을 진압한 뒤 75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79년에 체코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81년 프랑스 시민권자가 된 그는 체코어판 후기에서 “한 편의 소설로서, 그리고 한 편의 소설 이상은 아닌 것으로 읽어달라”고 독자들에게 당부했다. 연합뉴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한겨레 2006-11-15 오전 12:28:15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71898.html
독일 출신의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사진)가 나치를 피해 가족과 함께 숨어살던 시절 위안을 주었던 밤나무가 잘리게 됐다. 암스테르담시 의회는 14일 “내부가 썩고 죽어가는 뿌리와 껍질이 재생되지 않는 등 나무의 건강상태가 급속히 악화됐다”며 “접붙이기를 한 묘목이 이 밤나무를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프랑크 일가가 2년 이상 숨어산 운하 옆 창고 뒤에 있는 이 밤나무는 진균류와 나방의 공격으로 고통을 당해왔는데 전문가들은 이 나무의 수령을 150-17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네는 밖에서 볼 수 없도록 가리지 않은 유일한 창문인 다락방에서 이 밤나무를 동경의 눈길로 바라보곤 했다. (암스테르담/연합) /한겨레 2006-11-15 오후 09:43:35
1993 - 한국의 고고학자, 미술사학자 김원룡(金元龍) 사망 김원룡 [金元龍, 1922.8.24~1993.11.14] 한국고고학의 개척자 김원룡 박사 별세 고고학자이며 미술사학자인 삼불 김원룡 서울대 명예교수(71)가 1993년 11월 14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김원룡 박사는 한국 고고학계의 거목이었다. 1961년 그가 서울대에 고고인류학 강의를 개설하기 전까지 한국사 연구는 책상 앞에 앉아 옛 문헌을 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로 인해 학문적인 구색을 갖춘 한국 고고학이 등장한 것이다. 옛 무덤을 발굴해서 역사의 올바른 모습을 복원하는 그의 평생의 일은 1947년 개성 근처 법당방 고려고분 발굴부터 시작되어 석촌동 백제고분발굴(1975년 · 1984년), 전곡리 구석기 유적발굴(1980∼83년) 등으로 이어지면서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중 가장 걸작인 것은 1971년 공주 송산리의 무령왕릉 발굴이다. 당시 국립박물관장이던 그는 처음에는 도굴분인 줄 알고 쉽게 시작한 이 발굴에서 무령왕릉과 왕비의 지석과 금관 등 국보급유물 1천여점을 찾아낸 것이다. 이로인해 땅속에서 1천5백년을 묻혀있던 백제문화는 찬란한 위용을 드러내면서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과시했다. 김 박사는 1945년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1959년 미뉴욕대학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서울대교수, 국립박물관장, 고고학연구회장, 문화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고고학개설` `한국고고학연구` `한국미술사` `한국고미술의 이해` 등 58권의 저서와 2백50편의 연구논문을 남겼다. /조선
1991 - 제1회 '세계 당뇨병의 날' 세계 당뇨병의 날은 1991년 전 세계적 당뇨병 발병률의 확대에 대한 고민에 해결하기 위해 소개되었다. 그때부터 매년 대중적으로 성장하여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3500만명 - 당뇨병 환자이거나 당뇨병환자가 아닌 어린이와 성인, 건강관리 전문가들, 정책결정자들과 미디어 - 의 모임이 되었다. 세계 당뇨병의 날 행사는 1921년 10월 인슐린을 발견한 낸 프레드릭 밴팅의 생일을 기념해 매년 11월 14일에 열린다. http://www.dangnyo.or.kr/books/books_04.php?cat_mode=1&cat_no=197&p_cat_no=274
1987 - 제13대 대통령 선거일 결정
1980 - 언론기관 통폐합 결정 오늘의 역사 (11월 14일) [1980년]언론기관 통폐합 결정 1980년 11월 14일 한국신문협회와 방송협회는 신군부의 압력에 못이겨 임시총회를 열고, 신문-방송-통신의 통폐합과 방송의 공영체제화, 유일한 대형통신사 신설 등을 내용으로 하는 언론 통폐합을 결의했다. 이 결의문은 “신문과 방송, 통신을 자율적으로 개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나 사실은 통폐합 대상 발행인과 경영인을 보안사로 끌고가 통폐합에 이의가 없다는 각서에 강제로 도장을 찍게 한 전두환 정권의 강압의 결과였다. 각서에 따라 28개 신문, 29개 방송, 7개 통신 등 전국 64개 매체가 14개 신문, 3개 방송, 1개 통신 등 18개 매체로 통합되고 172종의 정기간행물이 폐간됐다. 언론통폐합 조치는 11월 25일까지 해당사별로 절차를 마무리하고 12월 1일부터 개편체제에 들어갔다. 흡수통합 대상이 된 언론기관은 종합일간지 1개, 경제지 2개, 통신 6개, 방송 6개(중앙3 지방3), 지방지 4개 등 19개사(社)였다. 언론통페합의 구체적인 내용은 신아일보를 경향신문에, 서울경제는 한국일보에, 내외경제신문은 코리아헤럴드에, 지방지는 1도1지 원칙하에 흡수 통합하고 합동통신과 동양통신은 합병, 연합통신으로 발족하며, 동아방송과 TBC는 KBS에 통합한다는 것 등이다. 또한 지방주재 특파원 제도를 폐지하여 신문이 발행되는 지역 밖의 뉴스는 정부지배하의 통신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도록 제도화하는 한편 KBS와 KBS가 주식의 70%를 소유한 준(準)관영 MBC로 2원화함으로써 방송매체를 완전히 장악했다. 1980년의 언론통폐합은 한국 언론계를 뒤바꾼 일대 사건으로, 이때 단행된 언론인 해직 조치로 1,238명의 언론인이 강제해직돼 지금도 그 상처를 남기고 있다. 2010년 1월 7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에서 언론기관 통페합과 관련하여 "국가는 공권력을 이용해 강압적으로 언론 자유를 침해한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필요가 있다"며 "피해자 명예 회복과 피해자 구제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정부에 권고했다. 그러나 진실화해위의 권고는 강제력이 없기 때문에 통폐합 이전으로 원상복귀시킬 수는 없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list.jsp?hm=1114&cmd=0
가나(Ghana)는 남·북한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데, 남한과는 1977년 11월 14일, 북한과는 1964년 12월 수교하였다. 1977년 이후 1987년 문화협정, 1990년 경제·기술 및 무역협정, 1992년 투자보장협정, 1993년 의료협력협정을 체결하였다. 한국은 1991년 5월 정원식 문교부장관, 1995년 2월 대통령특사 등이 가나를, 가나는 1999년 6월 이후 재무성 장관 가와메 페프라 이외 관광장관, 감사원장 등 다수가 매년 한국을 방문하였다. 2000년 기준 대한(對韓) 수입 5390만 달러, 대한 수출 360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자동차, 보일러, 기계류, 전기기기 등이고, 수출품은 코코아, 목제품 등이다. 한국은 1978년부터 2001년까지 272만 달러어치의 무상원조하였으며 다수의 태권도 사범과 의료단원, 및 국제협력의사를 파견하여 도왔다. 2003년 2월 기준 한국 교민 250명, 체류자 100여 명 등이다. /naver
한국은 1972년 10월 9일 스리랑카에 통상대표부를 개설한 후, 1977년 11월 14일 외교관계 수립과 함께 통상대표부를 대사관으로 승격하였다. 1984년 5월 대통령 주니우스 자야와르데네(Junius Jayawardene)의 방한 이후 양국의 우호관계가 증진되었으며, 특히 1987년 3월 13일 주한 스리랑카대사관 개설 이후 경제협력 관계가 증대되고 있다. 1996년 8월에는 대통령 찬드리카 쿠마라퉁가(Chandrika Kumaratunga)가 방한하였다. 스리랑카는 비동맹주의에 입각한 중립노선을 표방하며 남북한 문제에 대하여 중립주의적인 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나, 1992년 한국의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가입시 공동제안국으로서 UN 산하기구와 각종 국제기구에서 한국에 대해 협조적이며, 양국은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
- Green March of the People
1975 - 스페인령 사하라를 모로코와 모리타니아가 분할키로 합의 (마드리드 협정) 마드리드 협정(Madrid Accords, Madrid Agreement, Madrid Pact)은 서사하라에 대한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종식하기 위해 스페인, 모로코, 모리타니간에 마드리드에서 이루어진 협정이다. 이 협정은 1975년 11월 14일에 채결되었으며 11월 18일 스페인 의회를 통과했다. 이 협정의 결과 서사하라는 모로코와 모리타니가 분할 점령하게 되었다. /위키백과
서사하라의 역사 에스파냐는 1882∼1886년에 이 지역을 모로코로부터 빼앗아 북부의 사기아엘암라와 남부의 리오데오로의 2개 식민지로 나누어 카나리아제도에 관할청을 두고 통치하였다. 1912년 에스파냐는 프랑스와 함께 모로코를 분할한 뒤 1934~1958년 이프니·남(南)모로코 보호령을 이 두 식민지에 합쳐서 에스파냐령 서아프리카라고 총칭하였으나, 1958년 남모로코 보호령이 모로코에 병합되자 두 식민지는 에스파냐령 사하라라는 하나의 행정단위가 되었다. 1975년 에스파냐·모로코·모리타니 간의 마드리드 협정에 의해 1976년 북부는 모로코에, 남부는 모리타니에 분할 귀속되었다. 1979년 11월 UN총회는 서사하라로부터의 모로코군의 철수와 폴리사리오와의 평화교섭을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하였고, 모로코의 하산왕(王)은 1981년 6월 OAU(아프리카 통일기구)수뇌회의에서 리비아의 조정을 받아들여 주민투표 실시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모로코군의 비행기가 소련제 미사일에 의해 격추됨으로써 사태가 악화되었다. 이 분쟁은 프랑스가 모로코·모리타니를 적극 후원하고 있는 반면 알제리가 후원하는 폴리사리오에 대하여는 북한 등 공산국가가 무기를 지원하고 있고, 세네갈·에스파냐 등도 직·간접으로 개입하고 있어 국제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전주와 부산을 잇는 호남-남해고속도로가 1973년 11월 14일 개통됐다. 착공 2년 만에 준공되어 이날 개통된 358km의 이 고속도로는 경인, 경부, 호남(대전-전주), 영동(서울-원주) 고속도로에 이어 건설된 우리나라 다섯번째의 고속도로였다. 이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전국을 잇는 1000km의 순환고속도로가 형성되어 전국이 1일 생활권으로 단축됐다. 개통식은 이날 오전 박정희 대통령 내외를 비롯, 3부요인과 관계인사 그리고 현지주민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광주 공설운동장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이에 앞서 박 대통령은 전주 인터체인지에서 호남고속도로의 개통을 기념하는 테이프를 끊고 시승했으며, 남해고속도로의 개통을 기념하는 테이프 끊기 의식이 구포의 제2낙동대교에서 거행됐다. 호남-남해고속도로공사는 전주-순천을 잇는 호남고속도로 181km와 부산-순천을 연결하는 남해고속도로가 각각 완공되어 순천에서 이어지는 것인데 공사에는 내자 2백13억2천2백만원, 외자 4천3백만달러 등 모두 3백78억7천5백만원이 투입되어 완공된 것이었다. /조선
- Alexander Dubček
1968 - 체코 공산당 중앙위원회
아이슬란드 남쪽 바다 한 가운데서 화산 폭발 5개월 동안 폭발한 화산 때문에 오늘날 168m의 화산섬 '서트지(Surtsey)'가 만들어졌다. [세계약사] [1963/11/14] /한국컴퓨터선교회(KCM) http://kcm.kr/search.php?kword=%BE%C6%C0%CC%BD%BD%B6%F5%B5%E5
1954 - 이승만 대통령 불교계 정화 담화, 비구·대처승간의 싸움 시작 비구-대처승간의 싸움 시작 이대통령 불교계 정화 담화로 1954년은 전후(戰後) 사회도 차츰 안정을 되찾은 가운데 '행운의 편지'가 난무하고 또 '자유부인' '4사 5입' '국물'이란 말들이 유행했으며, 노래로는 한정무(韓正茂)의 '꿈에 본 내 고향'이 크게 히트했다. 이해 5월, 이승만 대통령은 불교계의 정화를 위해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나고 독신승만이 절을 지키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아닌게 아니라 당시 불교계는 일부 승려들의 볼썽사나운 일들이 더러 있다는 여론이 있었다. 그후 다시 이 대통령은 11월초, "왜색 승려와 왜식 승려는 절에서 떠나 속인이 되고, 사찰은 애국 애족하는 독신 승려만으로써 지키되 그 수가 부족하면 신도나 속인이 절을 지키고 있으라"고 재차 담화를 발표했다. 이리하여 비구승 측은 태고사를 조계사로 하고 아울러 대처승제의 폐지를 선언했다. 이렇게 되자, 11월 14일 마침내는 문교부의 중재도 아랑곳없이 비구·대처승간의 싸움이 폭발하고 말았다. 당시 비구승은 겨우 5백 명에 불과했지만 대처승은 무려 7천 명이 넘는 숫자였다. 이때부터 신성하고 자비의 전당이 되어야할 불당이 피투성이 싸움터로 변했다. 1955년 문교·내무부에서는 ①종권은 비구승 ②종헌의 단일화 ③비구·대처승의 생활보장 ④대처승의 계속 사찰에서의 정진 ⑤대처승을 교화승이라 한다는 등의 조정안을 냈으나 양측에 의해 거부당했다. [이치백의 一日一史] /전북일보 2005-11-13 오후 8:37:45 http://www.jjan.kr/local/others/default.asp?st=2&newsid= 2005111320374500&dt=20051114
1954년 2월 25일 나기브 이집트 대통령 겸 수상이 가말 아부달 나세르 부통령의 압력으로 사임하고 나세르가 수상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나기브는 군사정부의 몇몇 위원들이 나세르를 반대해 27일 대통령에 복직했다. 이후 양파의 권력투쟁은 계속됐고 결국 11월 14일 나기브 대통령은 해임됐다. 육군장교의 암살과 정부의 전복을 꾀하는 이슬람교도동지회의 음모에 나기브가 관계됐다는 것이 해임이유였다. 수상 나세르가 주도하는 혁명의회는 각의를 열어 나기브 대통령을 대통령직에서 해임하고 이후부터는 나세르 수상이 전권을 잡게 됐다고 발표했다. 나기브는 나세르에게 밀려났을 뿐 아니라 체포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했다. 1954년 10월 수에즈 운하 철수에 관한 영국과의 협상으로 많은 신임을 받고 있던 나세르는 수상 겸 혁명군사회의의장이 되어 이집트의 정권을 장악했다. 이렇게 나기브와 나세르의 권력투쟁은 나세르의 승리로 끝이 났다. 1956년 6월에는 영국군을 몰아낸 가운데 치러진 이집트 최초의 국민투표에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조선
1954 - 러시아의 생리학자 이반 라젠코프(Razenkov, Ivan) 사망 라젠코프 [Razenkov, Ivan Petrovich, 1888.11.26~1954.11.14] 소련 생리학자. 심비르스크 지방의 카디코프카 출생. I.P. 파블로프의 제자로서 1914년 카잔대학을 졸업하고, 1931년부터 모스크바에 있는 여러 고등교육기관의 교수를 지냈다. 1934년 연방실험의학연구소 모스크바 지부장이 되었고, 뒤에 이 연구소의 과학부 부장대리 및 인간생리학과 과장이 되었다. 1940년 러시아공화국명예과학자, 1944∼1954년 소련의학아카데미 산하 생리학연구소에서 일했는데 1944∼1949년 이 연구소의 소장을 지냈으며, 1948∼1950년에는 소련의학아카데미의 부원장을 지냈다. 주요 연구분야는 고급신경활동에 관한 생리학 및 소화에 관한 생리학·병리학이 있다. 또 소화샘과 신진대사 과정간의 관계도 연구하였다. /파란 사전
찰스 [Charles of Wales, Prince , 1948.11.14~ ] 정식 이름은 Charles Philip Arthur George, Prince of Wales and earl of Chester, Duke of Cornwall, Duke of Rothesay, Earl of Carrick and Baron of Renfrew, Lord of the Isles and Great Steward of Scotland. 영국의 왕세자.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의 맏아들이다. 버킹엄 궁에서 가정교사에게 초등교육을 받았으며 1956년 런던에 있는 힐 하우스에 입학했다. 1957~62년 햄프셔 주 헤들리에 있는 '침 스쿨'에 다녔으며, 1962~67년 스코틀랜드의 머리 해안에 있는 엄격한 '고든스타운 스쿨'(아버지 필립 공도 다녔음)에서 대학진학 예비교육을 받았다. 1966년 1~9월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에 있는 '질롱 그래머 스쿨'의 오지에 있는 분교 '팀버톱'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기도 했다. 1967년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해 1971년 영국 왕위 계승자로서는 최초로 학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1학기 동안 애버리스트위스에 있는 웨일스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다니면서 웨일스어를 배워 1969년 7월 1일 카나번 성에서 웨일스 공으로 임명되는 것에 대비했다. 그뒤 영국 공군사관학교(그는 우수한 비행사가 되었음)와 다트머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에 다녔으며, 1971~76년 해군소속으로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근무했다. 1981년 7월 29일 스펜서 백작 8세의 딸 레이디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 다이애나)와 결혼했다. 그들의 첫째 아들 윌리엄 왕자(1982. 6. 21 태어남)는 태어나자마자 왕위계승 서열 제2위가 되었다. /브리태니커
1943년 11월 14일 일리노이주 오크파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제임스 리처드 캔탈루포(James Richard Cantalupo)이다. 일리노이대학교 시카고캠퍼스에서 건축학을 공부하였고 몇 년 뒤 전공을 바꾸어 동대학 섐페인캠퍼스에서 회계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8년 동안 아서 영(Arthur Young)사에서 공인회계사로 일하였다.
- HMS 'Ark Royal' 1938
1941 - 독일 U보트, 영국 항공모함 HMS 아크로열 격침 [역사 속의 인물] 영국을 떨게 한 U보트 함장 구겐베르거 2차대전에서 U보트는 영국의 숨통을 거의 끊어 놓을 뻔했다. 그 두려움이 얼마나 컸으면 처칠이 회고록에서 “2차대전 중 나를 가장 두렵게 한 것은 U보트였다”고 할 정도였다. 1941년 오늘 그 두려움은 공황으로 발전했다. 전날 U보트의 어뢰 공격을 받은 항공모함 HMS아크로열이 모항 지브롤터로 돌아가던 중 침몰한 것이다. HMS아크로열은 전문 항공모함으로 설계, 건조된 영국 최초의 항공모함으로, 히틀러의 야심작 비스마르크호 격침 때 결정적인 공을 세운 영국 해군의 자존심이었다. U보트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이 작전을 지휘한 함장이 프리드리히 구겐베르거(1915~1988)다. 그의 전과는 말 그대로 혁혁했다. 전장에 누볐던 3년8개월 동안 HMS아크로열(2만2천600t)을 포함, 연합군 선박 6만6848t을 격침시켰고 6천3t에 손상을 입혔다. 1943년 7월 브라질 해안에서 미군 항공기의 공격을 받고 부하 6명과 함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미국 내 포로수용소에서 탈출과 수감을 되풀이하다 1946년 최종 석방됐다. 잠시 건축가로 일하다 미국 뉴포트의 해군대학을 졸업하고 신생 서독해군에 입대, 4년간 NATO에서 참모로 근무한 뒤 1972년 제대했다. 1988년 산책나갔다가 실종된 뒤 2년 후 사체로 발견됐다. 사인은 미상. 정경훈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1년 11월 14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5039&yy=2011
- Jordan, 1/2 Dinars (1959, Banknote)
후세인 1세 [Hussein (ibn Talal), 1935.11.14~1999.2.7] 요르단의 왕. 트란스요르단 암만 출생. 영국 빅토리아 칼리지와 샌드퍼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성지(聖地) 메카의 샤리프에서 예언자 마호메트로 이어지는 하심가(家)의 적손(嫡孫)이다. 16세 때에 조부 압둘라가 동(東)예루살렘의 알 아크사 모스크(사원)에서 암살되었을 때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며, 그 후에도 10여 차례 암살의 위기를 넘겼다. 1952년 정신이상이 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회로부터 국왕으로 지명되었다. 이집트의 7월혁명(1952), 이라크의 7월혁명(1958) 등 아랍세계 급진파의 대두와 왕당파(王黨派)가 퇴조하는 중에서 1958년 아랍연방을 수립하였다가 그 해로 해소되었고, 대외적으로는 친구미(親歐美) 노선을 취하면서 요르단 왕제(王制)를 유지해왔다. 1967년 제2차 중동전쟁에서는 동(東)예루살렘과 요르단강(江) 서안을 상실하였고, 1970년에는 군사정권을 수립, 팔레스티나 게릴라와 대립, 왕위(王位)의 존속을 거는 내전(內戰)을 겪었고, 1978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화해가 성립되었다. 1980년 이란-이라크전쟁에서는 이라크를 지지하였다. 팔레스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요르단-팔레스티나 연방을 구상하였다. 1983년 9월 한국을 공식방문하여 대통령 전두환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naver
역도산 [力道山, 1924.11.14~1963.12.15] 역도산(力道山, 1924년 11월 14일 ~ 1963년 12월 15일)은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일본 프로레슬링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본명은 김신락(金信洛)이다. 1924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났다. 나가사키 현 오무라 시의 부농에게 양자로 들어가 모모타 미쓰히로(百田光浩, ももた みつひろ)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스모 선수가 되면서 역도산(리키도잔)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50년 스모를 중단하고, 1951년부터 프로레슬링을 시작했다. 안토니오 이노키, 김일, 자이언트 바바 등의 여러 프로레슬링 선수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1963년 12월 8일, 폭력단 스미요시일가(住吉一家)와의 말다툼이 원인이 되어 칼로 배를 찔렸다. 이 상처가 화농성 복막염의 원인이 되어 12월 15일 사망하였다. /위키백과
1922 - BBC 첫 라디오 방송 1920년 11월 미국에서 처음 시작된 라디오 정시방송이 영국에 상륙한 것은 1922년이었다. 그해 2월에 마르코니사(社)가 첫 방송을 시작했으나 10월에 영국의 무선통신기 제조회사들이 설립한 영국방송회사(British Broadcasting Company)에 통합되면서 사라졌다. 영국방송회사가 처음 방송을 내보낸 것은 11월 14일이었다.
1917 - 한국의 대통령 박정희(朴正熙) 출생 박정희 [朴正熙, 1917.11.14~1979.10.26]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을 지낸 정치가이다. 경상북도 선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대구사범학교(지금의 대구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사생활을 하다가, 만주의 신경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8·15해방 이전까지 관동군 중위로 복무했다. 해방 후 귀국해 국군 창설에 참여했고,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대위로 임관했다. 1949년에는 여수·순천 10·19사건을 계기로 군내 공산주의자와의 관련 혐의를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소령으로 복귀했다. 1953년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1961년 소揚막?재직하던 중 5·16군사정변을 주도했다. 2년 7개월 동안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서 전면적인 사회개혁과 국토 및 경제개발계획 등 조국근대화 정책을 펼쳐 국민적 호응을 얻었다. 1963년 예편한 뒤 민주공화당에 입당해 제5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경제발전에 필요한 외자확보를 위해 한일협정에 조인했고 베트남 전쟁 파병을 단행했으며, 수출주도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는 등 찬반이 엇갈리는 과감한 정책들을 추진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으로 재선되었으나, 1969년의 3선개헌, 1972년의 10월유신 등을 통해 장기집권을 도모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잃어갔고, 1979년에 측근에 의해 암살당했다. 5·16군사정변 이후 18년간에 걸친 집권으로 절대빈곤의 극복이라는 중요한 업적을 달성했으나, 상대적 빈부격차의 심화, 장기집권에 따른 정치적 부작용 등 부정적인 영향도 그에 못지 않게 컸던 것으로 평가된다. /브리태니커
"우리의 후손들이 오늘에 사는 우리의 세대가 그들을 위하여 무엇을 했고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조국 근대화의 신앙을 가지고 일하고 또 일했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게 하자."
- 박정희, 1967년 연두기자회견에서
1908 - 쿠바의 초대 대통령 에스트라다 팔마(Estrada Palma, Tomas) 사망 에스트라다 팔마 [Estrada Palma, Tomás, 1835.7.9~1908.11.4] 쿠바 정치인, 초대 대통령. 그란마(Granma)주의 주도인 바야모(Bayamo)에서 태어났다. 스페인과의 독립전쟁 때 참전했으며 포로로 잡힌 후 추방당했고 뉴욕으로 가서 쿠바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며 쿠바혁명당(Cuban Revolutionary Party)을 창당한 호세 마르티(José Martí)와 함께 일했다. 1895년 호세 마르티가 스페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쿠바혁명당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린드그렌 [Lindgren, Astrid, 1907.11.14~2002.1.28] 스웨덴의 동화작가. 1945년 주인공 삐삐를 중심으로 한 3권의 책 중 첫번째 작품인 〈말괄량이 삐삐 Pippi Långstrump〉를 발표하여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말과 원숭이를 데리고 혼자 사는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은 이상한 옷차림의 소녀로, 많은 재산과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일상생활에서 필요로 하고 순응해야 하는 여러 가지 일들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서 모든 아이들이 꿈꾸는 자유와 힘의 화신이다. 〈뢰네비르가의 에밀 Emil in Lönneberga〉(1963)도 마찬가지로 인기를 모은 주인공이 나오며, 1970년 속편이 출판되었다. 에밀은 전환기 무렵 린드그렌의 고향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자유분방한 아이이다. 그밖의 유명한 등장인물로는,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발표한 3권의 소설 속에 나오는 불레르뵌의 아이들과 상상의 세계 속에 사는 한 외로운 아이의 이야기를 시적으로 묘사한 작품 〈닐스 카를손피슬링 Nils Karlsson-Pyssling〉(1949)에 나오는 한 소년을 들 수 있다. 〈미오, 민 미오 Mio, min Mio〉(1954)·〈용감한 형제 Bröderna Lejonhjärta〉(1973)에서는 민담의 세계를 묘사해 역시 성공을 거두었다. 1971년 스웨덴 한림원으로부터 금상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 1st North Atlantic crossing, 50th Anniv., Costes and Bellonte
1892 - 프랑스의 비행사 디외돈네 코스테(Costes, Dieudonne) 출생 코스테 [Costes, Dieudonne, 1892.11.14(4)~1973.5.18] Dieudonne Costes (14 November 1892 - 18 May 1973) was a French aviator, known of long distance and record breaking flights, a fighter ace of World War I. Costes was born in Septfonds, Tarn-et-Garonne. He received a pilot diploma (brevet) on 26 September 1912. During the World War I he served in the French Air Service, in MF55 and MF85 Farman squadrons, then in N506, N507 and N531 fighter Nieuport squadrons, on the Balkan front. He scored there 8 victories (6 confirm!!!!!ed), the first in April 1917, the rest in January-September 1918. He ended the war as a 2nd Lieutenant. After the war he flew in a civilian aviation, starting with Latecoere in 1920, flying with mail on Tolouse-Casablanca route, then flying on Bordeaux-Paris route in 1921 and on Paris-London route in Air Union airlines in 1923. From 1925 he became a test pilot in Breguet works. Then he started to perform long-distance and record breaking flights with Breguet 19 aircraft. On 26 September 1926 he flew 4100 km from Paris to Assuan, with Ren? de Vitrolles, attempting at breaking a world's distance record. He broke the world's record of 5396 km distance on 28 October 1926, flying from Paris to Jask in Iran with J. Rignot, as a part of 19,625 km Paris-India-Paris flight. Between 10 October 1927 and 14 April 1928 Costes and Joseph le Brix flew 57,410 km around the world, in Breguet 19GR named Nungesser-Coli, from Paris through Argentina, Brazil, USA, Japan, Inda and Greece. On 14 October they flew non-stop across South Atlantic between Saint-Louis, Senegal and Natal, Brazil, as the first aircraft (they only traveled across Pacific Ocean from San Francisco to Tokio by ship). On 13 July 1929 Costes and Maurice Bellonte made an attempt at crossing the North Atlantic westbound, from Villacoublay near Paris to New York, flying Breguet 19 Super Bidon, named "?" (Point d'Interrogation - Question mark). They returned however after 17 hours due to weather. On 27-29 September 1929 they set the world's distance record 7905 km from Paris to Qiqihar, China. In 15-17 December 1928 Costes, with Paul Codos, set the world's record of distance in a closed circuit 8029 km. In 1-2 September 1930, Costes with Maurice Bellonte, flew Breguet 19 Super Bidon "?" from Paris to New York, as the first aircraft in more difficult westbound direction, between North American and European mainlands. They covered 6200 km in 37 hours 18 minutes (some sources claim 5850 km). During the World War II he was an instructor in pilot's school in Versailles, as a colonel lieutenant. He died on 18 May 1973 in Paris. He was awarded, among others, with Legion of Honour, Croix de Guerre with 7 palms and a gold star, and Medaille Militaire. He also received the FAI Gold Medal in 1929. http://en.wikipedia.org/wiki/Dieudonne_Costes
오늘의 항공역사(10월 15일) 1927년 - Dieudonne Costes 가 2,100 마일을 18시간에 걸쳐 비행해 남대서양을 최초로 논스톱 횡단 /항공여행정보
밴팅 [Banting, Frederick Grant, 1891.11.14~1941.2.21] 캐나다의 생화학자, 내과의사. 1891년 11월 14일 앨리스턴에서 출생하였다. 1916년 토론토대학교를 졸업하고, 1917~1919년 군의관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그 후 정형외과학을 수학하여 온타리오주(州) 런던에서 개업했으나, 1년도 안 되어 그만두었다. 1920년부터 1921년까지 서부(西部) 온타리오대학교의 비상근(非常勤) 강사가 되었으며, 그 무렵부터 특히 당뇨병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으며 1921년 토론토대학의 생리학 교수 J.J.매클라우드의 연구소에서 베스트, 매클라우드와 함께 당뇨병 치료약 인슐린을 발견하였다. 1923년 의학연구교수가 되었으며, 또 매클라우드와 공동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1930년 밴팅 연구소를 창립하였으며, 1934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1941년 비행기사고로 사망했다. /naver
1889 - 여기자 넬리 블라이 세계일주 출발 [어제의 오늘]1889년 여기자 넬리 블라이 세계일주 ㆍ소설 속 주인공의 여행 ‘따라하기’ 임소정기자 /경향신문 2009-11-13 17:57:5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1131757545
네루 [Nehru, Pandit Jawaharlal, 1889.11.14~1964.5.27] [책갈피 속의 오늘]1889년 인도 지도자 네루 출생 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던 1919년 봄, 인도의 잘리안왈라 공원에선 비폭력 시위대를 향한 무차별 학살이 벌어졌다. 영국군의 갑작스러운 총격에 산책 나온 주민들은 우물로 뛰어들었고 인파에 휩쓸려 압사한 사람도 수두룩했다. 4000여 명이 희생된 비극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위대한 지도자 한 사람을 낳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상류층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투사의 길로 들어선 청년이 있었다. 전형적인 ‘친영 엘리트’로 성장할 수 있었던 네루는 ‘잘리안왈라 사건’을 보며 영국식 정의에 대한 신뢰를 접고 간디가 주도하는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네루는 “억압받는 계층과 자신을 동일시한 위인”이라며 간디를 존경했다. 점진적이고 평화적 투쟁을 추구하는 간디와 달리 네루는 혁명적 사회개혁을 주장하며 종종 의견이 충돌했지만 서로의 장점을 포용하며 인도 독립을 함께 이끌었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20071114/8511451/1
타하 후세인 [Tāha Husain, 1889.11.14~1973.10.28] 이집트의 작가. 이집트 문학에서 모더니즘 운동의 대표적 인물이다. 아랍어로 장편·단편 소설, 비평, 사회적·정치적 수필 등을 썼다. 국외에서는 자서전 〈알 아이암 al-Ayyam〉(2부작, 1929~32)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서양에서 갈채를 받은 최초의 현대 아랍 문학 작품으로, 영어판으로는 〈한 이집트인의 어린시절 An Egyptian Childhood〉(1932)과 〈세월의 흐름 The Stream of Days〉(1943)으로 나왔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2세 때 질병으로 실명했다. 1902년 카이로의 일류 정통 고등 이슬람교 교육원인 알아자르 신학교에 보내지지만 곧 현저하게 보수적인 학교당국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1908년 새로 개교한 카이로의 일반 대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그 대학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소르본대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서양문화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이집트로 돌아와 카이로대학교의 아랍 문학 교수가 되었으며, 재직하는 동안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을 격분시킨 대담한 견해로 종종 논쟁을 일으켰다. 〈이슬람 이전의 시에 대해 Fi sh-Shi' al-Jahili〉(1926)에서는 현대적 비평방법을 적용하여 격렬한 논쟁에 빠져들었다. 이 책에서 그는 이슬람 이전의 시로 간주되는 많은 시들이 여러 가지 이유에서 후대의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꾸며진 것이며 그 이유 중 하나는 〈코란〉 신화를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그는 배교자로 낙인찍혔다. 또다른 저서 〈이집트 문화의 미래 Mustaqbal al-thaqāfah fῑ Miṣr〉(1938)에서는 이집트가 그리스·이탈리아·프랑스를 포함하는 더 넓은 지중해 문화권에 속한다는 믿음을 피력함으로써 현대 유럽 문화의 동화를 주창했다. 군주제가 무너지기 전 와프드당에 의해 구성된 마지막 정부에서 교육장관으로 재직하면서(1950~52) 국가 교육을 널리 확대했고 수업료를 폐지했다. 후기 작품에서는 가난한 자의 역경과 적극적인 정부 개혁에 대해 점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78세 되던 해인 1967년 회고록 〈무드하키라트 Mudhakkirat〉를 발표했다. /브리태니커
1879 - 프랑스의 곤충학자 외젠 자모(Jamot, Eugene) 출생 자모 [Jamot, Eugene, 1879.11.14~1937.4.24] Eugène Jamot (1879 – 1937) was a French entomologist who played a major role in the prevention of sleeping sickness in Cameroun. http://en.wikipedia.org/wiki/Eugene_Jamot
- Elena Alistar, Iulia Hasdeu, Marie Curie
1869 - 루마니아의 시인 이울리아 하스데우(Hasdeu, Iulia) 출생 하스데우 [Hasdeu, Iulia, 1869.11.14~1888.9.29] Iulia Hasdeu Iulia Haşdeu (Romanian pronunciation: [ˈjuli.a haʃˈdew]; 14 November 1869, Bucharest – 29 September 1888, Bucharest) was a Romanian poet, the daughter of writer and philologist Bogdan Petriceicu Hasdeu. Despite dying young of tuberculosis at the age of 18, Iulia made many significant achievements. She wrote poems and prose, taught herself foreign languages and studied piano and canto. She was the first Romanian woman to study at La Sorbonne University in Paris. In her honour, her father built the controversial Iulia Hasdeu Castle in Câmpina, Romania. http://en.wikipedia.org/wiki/Iulia_Hasdeu
1863 - 미국의 화학자 레오 베이클랜드(Baekeland, Leo) 출생 베이클랜드 [Baekeland, Leo Hendrik, 1863.11.14~1944.2.23] 미국의 공업화학자. 최초의 열경화성 플라스틱(가열했을 때 연화되지 않는 플라스틱)인 베이클라이트를 발명하여 근대 플라스틱 산업의 기초를 닦는 데 이바지했다. 21세에 겐트대학교에서 우수한(maxima cum laude) 성적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1889년까지 그곳에서 가르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사진필림회사에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의 회사를 세우고 그의 발명품이며 인공조명 아래에서 현상되는 인화지인 벨록스(Velox)를 만들었다. 벨록스는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최초의 인화지였다. 1899년 회사와 인화지에 대한 특허를 미국의 발명가 조지 이스트먼에게 100만 달러에 팔았다(→ 이스트먼코닥사). 1905년부터 셸락(shellac)을 대신할 합성물질에 대해 연구하다가 포름알데히드와 페놀을 고온·고압에서 축합시켜 만든 베이클라이트를 발견했다. 이전에도 이 물질에 대한 보고가 있었지만, 열경화성 플라스틱으로 만드는 방법을 발견한 것은 처음이었다. 발명에 대해 많은 상을 받았고, 1924년에는 미국 화학학회 회장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한국판의 번역 초판은 1954년 로버트 딕슨의 축약본이 가장 오래되었고, 1959년 최초의 완역본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현대어와는 상당히 다른 표현도 많아 난해하다. 스무드하게 읽고 싶다면 신판을 보는 것이 좋다. /위키백과
1840 - 프랑스의 화가 클로드 모네(Monet, Claude) 출생 모네 [Monet, Claude, 1840.11.14~1926.12.5] 프랑스의 화가 클로드 모네 출생 모네는 전통적인 색조를 버리고 시각적 인상을 재현하려고 노력했던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이다. 물에 비치는 햇빛의 작용과 잔물결 위로 반사되는 색채를 그리면서 햇빛과 그림자의 복잡하고 생생한 효과를 재생시키고자 했다. 식료품 잡화상의 아들로 태어나 5세 때 생트아드레스로 이사한 모네는 어린시절 바다와 변화무쌍한 노르망디의 날씨를 직접 체험했다. 바로 여기에서 자연에 대한 참신한 통찰력이 생겨나게 되었다. 빛에 따라, 또는 자신의 관심이 변함에 따라 같은 주제를 연작으로 제작하는 방법을 개발해 <노적가리 Haystacks>(1891)·<루앙 대성당 Rouen Cathedral>(1894)을 그렸다. 파리 근교의 집에 수련이 가득한 연못을 만들었던 그는 <수련 Nympheas> 연작을 탄생시켰고, 1925년경 파리의 튈르리 공원에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의 거대한 벽화 연작을 그렸다. 인상주의의 창시자로서 자연탐구를 그림에 반영했던 그는 인상주의가 해체된 후에도 같은 방법을 유지했다. 말년에 시력이 많이 약해졌지만 1926년 죽을 때까지 계속 그림을 그렸다. /브리태니커
"나는 지극히 자유로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아주 어릴 때조차 나를 규칙에 얽매이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클로드 모네, <자서전>에서 [오늘 속으로] 모네 1840년 오늘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가 파리에서 태어났다. 1926년 몰(歿). 뒷날 '인상파'라고 불리게 될 일군의 화가들과 일찍부터 교유가 있었던 모네는 70년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터지자 런던으로 피신해 터너, 콘스터블 등 영국 풍경화파의 작품들에 접했고, 그 명쾌한 색채표현에 반했다. 그는 72년에 귀국해 센 강변의 밝은 풍경을 그리며 인상파양식을 개척했다. sec&sid1=106&oid=038&aid=0000033796
1831 -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Hegel, Georg) 사망 헤겔 [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1770.8.27~1831.11.14] 헤겔 사망 칸트 철학을 계승한 독일 관념론의 대성자 헤겔이 1831년 11월 14일 콜레라로 사망했다. 1770년 슈투트가르트 출생으로 빙겐대학 신학과를 졸업, 가정교사와 대학강사를 거쳐 셸링사상에 동조하다가 1807년에 최초의 주저 '정신현상학'을 내놓으면서 독자적 입장을 굳혔다.
[책갈피 속의 오늘]1831년 철학자 헤겔 사망 근대 철학사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남긴 사상가이면서 동시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자.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서 환영과 비난을 동시에 받았던 사람. - Colombia, 10000 Pesos (2007, Banknote) 1817 - 콜롬비아의 독립운동가 살라바리에타(Salavarrieta, Policarpa) 처형 살라바리에타 [Salavarrieta, Policarpa, c.1795~1817.11.14] [역사 속의 인물] 콜롬비아 여성 독립운동가 살라바리에타 1967년 오늘, 콜롬비아 의회가 폴리카르파 살라바리에타의 사망 150주년을 기념해 ‘콜롬비아 여인의 날’을 선포했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살라바리에타가 콜롬비아 여인의 표상이며 그녀와 그녀의 삶을 존경하고 기리기 위함이었다. 살라바리에타에 대한 기록은 불확실해서 1795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어렸을 때 양친이 모두 사망하는 바람에 형제 자매들과 함께 친척들 집으로 뿔뿔이 흩어져 어렵게 자랐다. 당시 콜롬비아에는 독립운동의 기운이 강했으나 스페인 왕정주의자들의 기세도 만만찮았다. 그녀가 언제부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영향력 강한 스페인 왕정주의자의 집에서 침모 겸 가사 도우미로 일하며 중요한 정보들을 빼냈다. 그곳에서 논의되는 왕당파 군대들의 이동 계획, 왕정주의자들의 명단 등을 독립혁명군 측에 넘겼다. 그녀가 캐낸 정보는 독립혁명군에 큰 도움이 될 정도로 중요하고 알찼다. 왕당파들은 그녀를 전혀 의심하지 않다가 정보가 자꾸 새나가자 그녀를 주목했고 다른 일당과 함께 체포했다. 1817년 오늘, 22세의 나이로 처형대 앞에 선 살라바리에타는 “죽음에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 용기가 남아 있다. 내 모습을 기억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숨졌다. 김지석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3.11.14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6373&yy=2013
욀렌슐레게르 [Oehlenschläger, Adam Gottlob, 1779.11.14~1850.1.20] 베스테르브로 출생. 덴마크에 낭만주의를 수입하여 북유럽적 성격의 낭만파를 수립한 문인이다. 처음에 배우를 지망하였으나, 코펜하겐대학에서는 법과에서 배웠으며, 고대 북유럽 문학을 탐독, 때마침 독일에서 돌아온 젊은 교수 슈테펜스로부터 낭만주의의 문학 및 철학강의에 매료되었다. 그는 덴마크의 문화생활을 회춘시키기 위해서는 낭만주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확신 속에 상징시 《황금뿔 Guldhornene》(1802)을 썼다. 1805∼1809년 관비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로 여행하여 G.W.괴테와 E.T.A.호프만과 친교를 맺었다. 귀국한 후에 1810년 코펜하겐대학의 미학 교수가 되었다. 그 동안 북유럽의 신화와 전설에서 취재한 많은 시와, 《천일야화》에서 취재한 시극 《알라딘 Aladdin》(1805), 독일어로 쓴 예술가의 비극 《코레지오 Correggio》(1811) 등을 속속 발표하여 ‘북유럽의 시왕(詩王)’이라 불렸다. 그는 비극만도 26편이라는 다산작가이고, 작품은 서정시를 비롯하여 서사시 ·비극 ·가극 ·동화극 등의 여러 장르에 걸쳐 있으며, 처음에는 독일 낭만파의 영향이 짙었으나 점차로 고대 북유럽의 강건성을 흠모하게 되었다. 자유분방하고 화려한 필치로 낭만주의에서 고전주의로 접근하였다. /naver
스폰티니 [Spontini, Gaspare Luigi Pacifico, 1774.11.14~1851.1.24] 이탈리아의 작곡가·지휘자. 초기 오페라들, 특히 그의 대표작 〈베스타의 여인 La vestale〉(1807)은 나폴레옹 시대의 정신을 보여주며, 크리스토프 글루크와 리하르트 바그너를 연결해주는 과도기적 작품에 해당된다. 1793년 나폴리의 피에타 음악원에 입학하여 첫 오페라 〈여인의 고집 Li puntigli delle donne〉이 1796년 로마에서 공연되기 전까지 니콜라 살라와 자코모 트리토에게 배웠다. 이 작품이 성공을 거두자 로마에서 계속 희가극을 썼으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우스운 영웅주의 L'eroismo ridicolo〉(1798)를 들 수 있다. 이어 파리로 진출해서 〈밀턴 Milton〉(1804)으로 자리를 확고히 했다. 프랑스 작곡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는 오페라 작품 〈베스타의 여인〉을 써서 전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1810년 이탈리아 오페라단의 지휘자가 되었지만 2년 후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사직하고 1814년에 루이 18세의 궁정 작곡가가 되었다. 1819년 오페라 〈올림피아 Olimpie〉가 실패한 후 파리를 떠났고, 1820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부름을 받고 베를린 궁정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1840년 6월 왕이 죽은 직후까지 이 자리를 유지했으나, 정치적 입장 때문에 사직하고 베를린을 떠났다. 중요한 오페라로는 〈가짜 철학자들 La finta filosofa〉(1799)·〈위장비행 La fuga in Maschera〉(1800)·〈올림피아〉(1819)·〈누르마할 Nurmahal〉(1822)·〈호헨슈타우펜의 아그네스 Agnes von Hohenstaufen〉(1829)를 들 수 있다. /브리태니커
풀턴 [Robert Fulton, 1765.11.14~1815.2 .24] 미국의 기술자. 펜실베이니아주(州) 리틀 브리튼 출생. 3살 때 아버지를 잃고 독학으로 그림을 배우다가 기계학과 수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1786년 런던으로 건너가 1793년경까지 벤자민 웨스트의 제자로 그림을 공부하다가 브리지워터 공작, 스터냅 백작 등을 알게 되어, 운하와 선박을 개량하는 문제에 대한 의논에 응하였다. 특히, 《운하항행의 개선에 대하여 Treatise on the Improvement of Canal Navigation》(1793)를 저술, 그 계획을 데이강(江)에 실현시켰다. 그 후 이 계획을 파리~디에프 간 운하에 적용하기 위하여 1797∼1806년까지 프랑스에 체재하였는데, 그 동안에 잠수정(潛水艇)·수뢰정(水雷艇)의 실험을 하였다. 그리고 기선항행에 관심을 가진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 리빙스턴의 원조을 받으며, 1803년 센강에서 기선의 실험을 시도하였다. 1806년 귀국하여 이듬해 8월 외륜기선(外輪汽船) 클러먼트호(號)를 진수시켜, 허드슨강의 뉴욕~올버니 간을 정기항행시켰다. 이 배의 기관은 버밍엄의 볼튼와트 상회 제품이었다. 최초 기선 발명자는 아니었지만, 세계 최초의 기선에 의한 정기항로를 개설하여 상업적으로 성공한 선구자이다. 뉴욕주(州)는 기선항행 독점권을 주어 그의 사업을 보호하였다. /naver
라이프니츠 [Leibniz, Gottfried Wilhelm, 1646.7.1~1716.11.14] [오늘의 경제소사/ 11월 14일] <1550>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 같은(as like as Leibniz)'. 활용 빈도가 낮지만 특급천재라는 의미를 지닌 관용구다. 잘 쓰이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Gottfried Leibniz)와 필적할 만한 인물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말년에 인간 개체의 본질을 설명한 '모나드(Monard)론'을 남긴 그는 최근 재조명 받고 있다. 이진법 개념을 주역에서 따올 만큼 동양의 학문을 높이 평가했던 라이프니츠야말로 동서양의 조화와 융합을 위한 연결고리라는 것이다. 권홍우편집위원 /서울경제 2009/11/13 17:44:14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11/e2009111317441497490.htm
힐데브란트 [Hildebrandt, Johann Lucas von, 1668.11.14~1745.11.16] 오스트리아의 바로크 건축가, 군사공학자. 그의 작품은 18세기의 중부 및 남동부 유럽 건축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가 교구 교회와 예배당, 별장, 정원 누각, 궁전 및 저택으로 개발했던 건물들의 유형은 많이 모방되었으며, 그의 건축 원리는 합스부르크 제국 전역과 다른 곳에까지 퍼져나갔다. 부모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독일인이며 그는 로마에서 건축·도시계획·군사공학을 공부했다. 그는 축성 공학자로 오스트리아 제국군대에 입대했고, 사보이의 외젠 공 밑에서 피에몬테에서 벌어진 3차례의 전쟁에 참가했으며(1695~96), 이후 빈으로 가서 민간건축으로 전환했다. 1700년에 궁정기술자로 임명되었고 외젠 공을 비롯해 빈, 잘츠부르크, 남부 독일 등의 오스트리아 귀족들에게 건축가로 고용되었다. 그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바로크 건축가 요한 피셔 폰 에를라흐가 죽은 뒤에는 지도적인 궁정 건축가가 되었다. 그의 건축양식의 주요요소는 루이 14세시대 프랑스 건축과 이탈리아의 후기 바로크 양식, 특히 이탈리아 건축가인 구아리노 구아리니의 물결 모양 벽에서 비롯된 것이다. 힐데브란트는 건물 표면을 그림같은 효과로 명료하게 분절하고 새로운 장식 모티프를 도입하는 등 건축적 장식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많은 작품 중 가장 훌륭한 것으로는 사보이의 외젠 공의 여름 저택인 빈의 벨베데레 궁전(1700~23), 빈 북서쪽 괼러스도르프 근처의 쇤보른 궁전(1710~17), 잘츠부르크의 미라벨 궁전(1721~27)과 독일 뷔르츠부르크에 있는 주교관(1729~37)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윌리엄 3세 [William III, 1650.11.14~1702.3.19] 영국의 왕. 네덜란드 빌렘 2세와 영국 찰스 1세의 딸 메리의 아들이다. 태어나기 1주일 전에 아버지가 죽어, 실권이 반대파인 공화파 J.위트에게 넘어가 고난의 성장기를 보냈다. 1672년 프랑스 루이 14세에 의한 네덜란드 침략이 시작되자, 국민의 기대에 따라 육해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하고, 또 각 주도 위트파를 물리치고 그를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1263 - 러시아의 대공 알렉산드르 넵스키(Aleksandr Nevsky) 사망 알렉산드르 넵스키 [Aleksandr Nevsky, 1220?~1263.11.14] 몽골(킵차크 한국) 지배 시대의 러시아대공. 본명 Alexandr Yaroslavich. 블라디미르 출생. 블라디미르대공인 야로슬라프 1세의 아들. 북서 러시아를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한 러시아의 국민적 영웅이다. 1240년 노브고로트 영토에 쳐들어온 스웨덴의 대군을 적은 병력으로 네바강(江) 강변에서 섬멸하였다. 넵스키(네바강의 뜻)라는 이름은 이 싸움에서 얻었다고 한다. 그 뒤 그의 세력을 두려워한 귀족과의 분쟁 때문에 노브고로트를 일단 떠났으나, 리보니아의 독일 기사단(騎士團)의 침입을 걱정한 시민의 요청으로 1241년 봄에 노브고로트로 되돌아갔다. 이어 군비를 갖추고 점령된 땅을 탈환하였고, 다시 기사단장이 거느린 대군과 결전하여 1242년의 페이푸스호(湖)상의 ‘빙상(氷上)의 전투’에서 대승함으로써 러시아를 가톨릭화(化)하려는 로마 교황의 야망을 봉쇄하였다. 그는 유능한 정치가였으며 당시 강력한 몽골의 지배에는 저항하지 않았으므로 신뢰를 받아, 1252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블라디미르대공에 취임하였다. 그뒤 러시아의 제공(諸公)과 킵차크 한국과의 충돌을 조정하였고, 노브고로트 민중의 반(反)몽골반란(1259) 때도 그 진압에 협력하였다. 복동부 러시아 주민이 한국(汗國)의 세리(稅吏)와 분쟁을 일으켰을 때, 한국에 가던 도중에 죽었다. 그의 국토방위의 공적은 러시아의 민요로도 불리며, 러시아 교회는 그를 성자(聖者)로 제향하였다. 한편, 표트르 l세는 네바 강변의 싸움터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의 유골을 그곳으로 옮겼으며, 제정(帝政) 정부는 그의 훈장을 제정하였다. 1942년의 소비에트 정부도 제정정부의 전례에 따랐다. /naver
유스티니아누스 1세 [Justinianus I, 483~565.11.14]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사망 '유스티니아누스 대법전'을 편찬했고 성소피아 대성당을 완성시킨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재위 527~565)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565년 11월 14일 사망했다. 그는 전임 황제들이 잃어버렸던 영토를 회복하고 지중해 및 서양 세계 전역에 걸쳐 제국의 통치권을 확립하고자 영토팽창 정책을 중시한 황제였다. 그는 20년(533-~554) 동안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에스파니아 남부, 그리고 시칠리아, 코르시카 등을 비잔티움에 복속시켰다. 동시에 그는 일련의 내정 개혁을 단행했으나 폐습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폭발, 532년에는 니카 폭동으로 자칫 제위를 잃을 뻔한 긴박한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치세 초기에 이미 시작된 로마법의 재편찬이었다. 흔히 '유스티니아누스 대법전'으로 알려진 이 법전는 로마법에 규정된 사회생활의 기본 규칙들이 그리스드교 윤리에 따라 재구성되었다. 그것은 그후 수백년동안 비잔티움 뿐만 아니라 서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시민법 역할을 했다. 니카 폭동으로 손상된 성소피아 대성당을 복구한 것도 그의 치적중 하나이다. 5년10개월 만에 완성된 성당은 지금까지도 비잔티움 세계의 가장 큰 자랑거리로 인정받고 있는 건축물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완성된 대성당의 위용을 처음 접하고 나서 "솔로몬, 나는 그대를 능가했소"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