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1/15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https://t1.daumcdn.net/cfile/blog/1817110C4A8826BB54)
2010 - 세계보건기구(WHO) 연령별 운동 지침 발표 성인, 일주일에 300분 이상 유산소운동 큰 효과 WHO 연령별 운동 지침 발표 세계보건기구(WHO)가 건강 생활을 위한 연령대별 운동 지침을 새로 발표했다. ‘코메디닷컴’에 따르면 WHO는 15일 연령대별로 얼마나 많이, 오래, 그리고 어떤 세기로 운동해야 하는지 가이드라인이 담긴 ‘건강을 위한 세계 운동 권장 지침(Global recommendations on physical activity for health)’을 내놓았다. WHO의 지침은 나이를 기준으로 5~17세, 18~64세, 그리고 65세 이상 등 세 그룹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다음은 ‘코메디닷컴’이 보도한 WHO의 지침이다. ■ 5~17세, 매일 60분 이상 운동해야 어린이나 청소년들은 가족과 학교, 기타 공동체 속에서 놀이나 시합, 운동경기, 체육수업 등을 하거나 집안일을 도우면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 좋다. 운동은 아이들의 심폐기능을 향상 시키고 뼈와 근육을 강화시킨다. 심장혈관과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하는 효과도 있다. △적어도 매일 60분 이상 중간 정도~격렬한 정도로 운동 하는 것이 좋다. △60분 이상 운동해도 몸에 이로움을 더해 준다. △매일 유산소운동 외에도 뼈와 근육을 강화하는 것을 포함, 격렬한 운동을 적어도 주 3회 이상 한다. ■ 18~64세, 일주일에 300분 이상 유산소운동 하면 큰 효과 △18~64세의 성인은 여가 시간을 이용한 운동, 걷기나 사이클처럼 이동하면서 할 수 있는 운동, 직장일, 집안일, 게임, 스포츠 등을 매일 하는 것이 좋다 △매일 꾸준히 운동 하면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심폐기능이 향상되고 뼈와 근육이 강화된다. 또 비전염성질병과 우울증을 줄일 수 있다. △일주일에 적어도 150분 이상 중간 정도의 강도로 유산소운동을 한다. 아니면 75분 이상 격렬한 강도로 유산소운동을 하며 두 가지 강도를 반씩 섞어서 할 수도 있다. △유산소 운동은 한 번 시작하면 멈추지 말고 10분 이상 지속한다. △운동량을 늘리고 싶다면 중간 강도의 유산소운동을 일주일에 300분 하거나 격렬한 강도로 일주일에 150분, 혹은 두가지 강도의 운동을 반씩 섞어서 한다. △근육강화운동은 일주일에 이틀 혹은 그 이상 한다. ■ 65세 이상, 균형감각-근육 강화 운동 별도로 해야 65세 이상 노인은 64세 이하 성인처럼 여가시간과 이동시간을 활용한 운동이나 집안일, 게임과 스포츠 등을 매일 하는 것이 좋다. 노인은 운동을 통해 심폐능력, 근육, 뼈 등의 건강기능을 강화시킬 수 있다. 비전염성질병, 우울증, 인지력 하락도 방지한다. △일주일에 적어도 150분 중간강도의, 또는 75분가량 격렬한 강도의 유산소 운동을 한다. 아니면 두가지 강도의 운동을 똑같이 섞어서 한다. △유산소 운동은 한 번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10분 이상 지속한다. △운동량을 늘리고 싶으면 중간강도의 유산소운동을 일주일에 300분하거나 격렬한 운동을 150분, 혹은 두가지를 같은 양으로 나누어 함께 하는 것이 좋다. △움직이기 힘든 노인들은 균형감각을 강화하고 낙상을 방지하기 위한 유산소운동을 일주일에 3일 이상 한다. △근육 강화를 위해서 일주일에 2일 이상 운동한다. △권장량 만큼 운동할 수 없으면 자기 컨디션에 맞게 한다. e뉴스팀 /한겨레 2010-11-17 오후 02:17:24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449168.html ![](https://t1.daumcdn.net/cfile/blog/135F0B364CE0E96938)
- 김연아 선수 (KB Gift C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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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 김연아, 쇼트프로그램 역대 최고점 1위 '피겨퀸' 김연아(19.고려대)가 쇼트프로그램 역대 여자 싱글 최고점을 경신하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 시니어 그랑프리 시리즈 7개 대회 연속 우승과 네 시즌 연속 그랑프리 파이널 진출에 한걸음 다가섰다. 김연아는 15일(이하 한국시간) 오전 미국 뉴욕주 레이크플래시드 '1980 링크'에서 치러진 2009-2010 ISU 피겨 시니어 그랑프리 5차 대회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기술점수(TES) 44.00점과 예술점수(PCS) 32.28점을 합쳐 76.28점으로 1위를 차지했다. 김연아는 자신이 지난 3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세웠던 역대 최고점(76.12점)을 7개월 만에 무려 0.16점이나 끌어올리는 신기록으로 선두에 올라 2위 레이철 플랫(미국.58.80점)과 점수 차를 무려 17.48점으로 벌리면서 사실상 우승을 확정했다. '피겨퀸'의 강심장을 또 한 번 확인한 무대였다. 경기 직전 최종 리허설에서 트리플 플립의 성공률이 갑자기 떨어지면서 걱정을 자아냈지만 역시 김연아는 실전에 강했다. '사실상 적수가 없다'라는 평가 속에서도 자만하지 않고 연습에 열중했던 김연아는 잠깐의 슬럼프를 이겨내고 최고점 경신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12명의 출전선수 가운데 마지막 순서로 나선 김연아는 숨죽인 관중 앞에서 검은색 의상의 본드걸로 변신, 한 손을 높이 치켜든 자세로 잔잔한 플루트 선율 속에 2분 50초의 연기를 시작했다. 첫 번째 과제인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 점프를 완벽하게 뛰며 기본점 10점에 가산점 2.20점을 챙긴 김연아는 긴장 속에 두 번째 과제인 트리플 플립을 뛰어 얼음 위를 세차게 질주했다. 관중 모두 숨을 죽인 가운데 김연아는 스리턴(몸을 180도 회전하는 동작) 이후 정확한 안쪽 에지(스케이트 날)를 사용해 세 바퀴를 돌고 안전하게 착지했다. 심판들은 기본점 5.5점인 점프에 1.8점의 가산점을 보태 7.3점을 줬다. 두 차례 점프를 완벽하게 완성한 김연아의 다음 목표는 신기록 달성. 김연아는 레이백 스핀(허리를 뒤로 젖혀 회전하는 동작)을 레벨 4로 처리하고 나서 스파이럴 시퀀스까지 가볍게 레벨 4 행진을 이어갔다. 더블 악셀(기본점 3.5점)까지 가산점 1.6점을 챙긴 김연아는 플라잉 싯스핀(레벨4)에 이어 경쾌한 스텝 연기를 펼쳤지만 아쉽게 레벨 3를 얻어 내심 기대했던 레벨 4 획득에 실패했다. 마지막 체인지 풋 콤비네이션 스핀을 레벨3로 마무리한 김연아는 연기가 끝나고 나서 두 손을 움켜쥐고 '클린 연기'를 자축하며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관중 역시 피겨퀸의 완벽한 연기에 기립박수를 보냈고, 키스앤크라이존에서 점수를 기다리던 김연아는 모니터 화면을 통해 76.28점이라는 숫자가 뜨자 브라이언 오서 코치와 얼싸안으며 새로운 최고점 달성의 기쁨을 나눴다. 한편 쇼트프로그램에서 역대 최고점을 경신한 김연아는 여세를 몰아 16일 새벽 프리스케이팅을 통해 여자 싱글 사상 최초 총점 220점 돌파에 도전한다. [연합뉴스] /KBS 뉴스 2009.11.15 (10:36) http://news.kbs.co.kr/article/moresports/200911/20091115/1885744.html
2007 - 대검찰청 ‘이준 열사 흉상·검사 임명식 재현 동판’ 제막식 ‘조선 최초 항명 검사 1호’ 아시나요? “조선을 일본에 팔아먹은 을사5적을 처단하려다 체포된 사람들을 사면자 명단에 넣어야 한다.” 이준 검사는 1906년 이근택 등 을사5적을 처단하려다 체포돼 복역 중이던 기산도(1878∼1928) 선생 등의 사면을 주장한다. 상관들의 반발에 부딪힌 이 검사는 결국 기소·파면되고 만다. 사실상 첫 ‘항명 검사’라는 ‘명예’를 안게 된 이는 우리에게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특사로 활동하다 순국한 것으로 알려진 이준(1859~1907) 열사다. 그는 1896년 현재의 사법연수원에 해당하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법률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가 배출한 우리나라 ‘1호 검사’이기도 하다. 여섯달 동안의 교육을 마치고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임명됐지만 1주일 뒤 아관파천으로 인해 일본 망명길에 오른다. 1897년 와세다대 법과에 들어간 이준 열사는 귀국 뒤 10여년만에 평리원 검사로 임명되지만 ‘항명 파동’으로 결국 파면됐다. 대검찰청은 15일 오후 5시 서울 서초동 대검 본관 4층 자료실에서 정상명 검찰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1호 검사’인 이준 열사 순국 100돌을 맞아 ‘이준 열사 흉상 및 검사 임명장 재현 동판’ 제막식을 가졌다. 이준 열사의 흉상과 동판은 부산대 법대 문준영 교수 등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쳐 재현됐다. 대검은 지난 2006년 이준 열사를 ‘자랑스런 검찰인’으로 선정해 관련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준 열사의 검사 임명장 재현 동판은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 기념관’에도 전달될 예정이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한겨레 2007-11-15 오후 07:06:42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5038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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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내정자 미국 뉴욕 입성
뉴욕의 반기문 “바쁘다 바빠” 어제 유엔본부 입성…“대북특사 내년 제3국인으로” 한국이 낳은 ‘세계 최고 외교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내정자가 15일(현지시각) 오전 유엔본부가 있는 미국 뉴욕에 입성했다. 반 내정자는 도착 당일인 이날 오후부터 ‘바쁘다, 바빠’를 외쳐댔다. 그는 도착 이후 점심도 거른 채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지난 1일부터 활동을 벌여온 인수팀과 비서실 등의 보고를 받은 것으로 첫 인수 준비 업무를 시작했다. 앞으로는 매일 오전 각 사무차장들의 업무보고를 받고, 오후에는 내년도 77그룹 의장국인 파키스탄 등 주요국 대사와 유엔관련 인사들을 차례차례 만나 의견을 구하는 일정을 세워놨다.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리고 있는 기후변화회의에 참석 중인 코피 아난 사무총장은 돌아오는 대로 만날 예정이다. 이어 12월 초엔 사무총장에 내정된 뒤 아직 유일하게 방문하지 않은 안보리상임이사국인 영국을 방문한다. 그는 다음달 14일 유엔총회장에서 코피 아난 총장의 퇴임사에 이어 취임선서를 하며, 내년 정초부터 5년 임기의 활동에 들어간다. 반 내정자는 이날 “내년 초 임기가 시작할 때까지 100일계획, 1년계획, 5년 계획으로 나눠 의제를 설정하고, 내년 2월 말로 임기가 끝나는 사무차장직 등의 인선작업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사무총장 공관이 개·보수 공사가 끝나는 내년 9월까지 숙소로 사용할 유엔본부 인근의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에 여장을 푼 뒤 〈한겨레〉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그는 대북특사 문제와 관련해 “인수위 활동 기간 동안 검토해서 북한 문제에 경험이 많고 명망있는 제3국인으로 내년쯤 결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 5년이나 10년 뒤 총장에서 물러날 때까지 “완전히 신망받는 유엔을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힌 뒤, “스스로 먼저 모범을 보일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는 내년 업무를 시작하면 최우선적으로 레바논 수단 등의 지역분쟁 해결과 사무국 개혁작업에 중점을 둘 것이라 덧붙였다. 뉴욕/류재훈 특파원 hoonie@hani.co.kr /한겨레 2006-11-16 오후 08:25:03 http://www.hani.co.kr/arti/politics/diplomacy/1723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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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 한국에 온 ‘날아다니는 호텔’, 시험비행 에어버스380 인천공항 도착 위용 드러낸 ‘하늘의 호텔’ A380 세계 최대 규모 항공기인 에어버스사의 A380기가 15일 오후 2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국내에 첫 선을 보였다. 이날 취재진은 공항 계류장에 대기하고 있는 A380의 내부 모습을 직접 둘러볼 수 있었다. 취재진이 버스를 타고 공항 계류장에 도착한 순간 거대한 A380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A380은 항공기 두 대를 포개놓은 듯 객실 유리창이 2층으로 나란히 늘어선 뚱뚱한 모습이었다. 특히 날개 끝이 매끈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고 날개 끝에 달린 커다란 부착물인 '윙 팁(Wing Tip)'이 인상적이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A380은 동체가 워낙 커서 비행 중 공기 저항으로 소용돌이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비행기와 달리 날개가 유선형으로 만들어졌고 큰 윙팁이 달렸다"고 설명했다. 스텝카의 계단을 올라 전방 출입문을 통해 기체 내부로 들어선 순간 큼지막한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기체 앞 일부분만 2층으로 돼 있는 다른 대형 여객기와 달리 A380은 기체 전체가 2층 구조로 돼 있었다. A380은 기체의 조종석 뒷부분과 꼬리 부분에 계단이 설치돼 있어서 승객들이 1층과 2층을 오갈 수 있도록 설계돼 있었다. 좌석은 가로로 퍼스트 클래스는 4석씩, 비즈니스석은 6석씩, 이코노미석은 7좌석씩 배치돼 있었다. 무엇보다 큰 동체 크기 만큼이나 좌우 공간이 탁 트여 있고 좌석 하나의 크기도 일반 대형 여객기보다 조금씩 커 한결 쾌적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에어버스측은 "좌석 배치나 내부 인테리어 등은 고객사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바꿀 수 있기 때문에 현재 모습이 A380의 최종적인 모습은 아니다"라고 말해다. 기체 내부는 아직 상용화되지 않아 기체 내부의 공기 흐름과 온도, 습도, 소음 등을 측정하는 장비들이 설치돼 있었고 여기저기 전선들이 깔려 있었다. 또한 이코노미석 일부에는 모형 승객인 '더미(Dummy)'가 설치돼 A380 내부의 환경 변화가 승객에 미치는 영향 등을 점검하고 있었다. 바버라 클라트 에어버스 부사장은 "현재 A380은 시범비행 중이기 때문에 항공기기내 환경 측정을 위해 여러 기자재를 실어 완벽한 모습이 아니다"라며 "내부 배치는 고객사의 의향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객실을 둘러본 후 취재진은 A380의 조종석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조종석도 다른 항공기에 비해 공간이 넓었고 최첨단 조종 장치가 빼곡이 설치돼 있었다. 특히 조종석 내부에서 모니터를 통해 항공기의 전체 모습과 랜딩기어 밑부분 등조종사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부분도 점검할 수 있도록 돼 있었다. A380을 조종한 아만드 재콥 기장은 "A380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비행 성능을자랑하는 꿈의 항공기"라며 "A380은 넓은 공간과 함께 최첨단 장치를 통해 어떤 여객기보다 안전하게 장거리를 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영종도=연합뉴스) /동아닷컴 2006-11-1516:45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611150431 ![](https://t1.daumcdn.net/cfile/blog/1548CC234CEF107827)
2002 - 춘사 탄생 100주년 맞아 <아리랑> 자료 전시 아리랑협회와 시공테크는 춘사 나운규의 탄생 100주년 기념일(22일)을 맞아 15∼25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아리랑명품관 갤러리에서 ‘민족영화 1호’로 꼽히는 <아리랑>의 관련자료 전시회를 개최한다. 나운규 원작 영화소설 <아리랑>(박문서관 간) 원본을 비롯해 나운규가 영화의 시대정신을 역설한 발언을 담은 <조선영화> 창간호(1936년 11월호), 윤봉춘 감독의 ‘나운규 일대기’가 실린 「영화연극」 창간호(39년 4월호), <아리랑> 3편의 평과 스틸 사진을 수록한 「호남평론」 37년 3월호, 나운규 관련 글을 기록해 놓은 운봉춘 감독의 스크랩북, 영화평론가 노만의 글로 추정되는 원고 ‘나운규 일생’, 북한의 조선문학동맹출판사가 펴낸 「라운규와 그의 예술」(62년) 등이 공개된다. 이와 함께 포스터, 선전 전단, 신문 광고, 사진, 리메이크 <아리랑> 대본, <아리랑> 관련 육성 테이프, <아리랑> 이 상영됐던 당시 단성사 건물의 벽돌 등도 선보인다. 전시기간에 수시로 ‘아리랑은 어떻게 하여 민족의 노래가 되었는가’란 주제의 특별강연이 마련될 예정이다. ☎(02)763-5014 (서울=연합뉴스) /씨네21 2002.11.11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1001001&article_id=14823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49/16_cafe_2007_11_15_12_09_473bb858e7126)
2002 - 지리산 야생 반달가슴곰 발견
지리산 야생 반달가슴곰이 비스듬히 뻗은 나무아래에서 산죽이 우거진 곳으로 다가서고 있다. 지리산 야생 반달곰이 발견됐다. 그동안 추측만 무성했던 야생 반달가슴곰의 실체가 카메라에 포착됐다. 지리산에서 수는 적으나 반달가슴곰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공식 확인된 것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지리산 일대에서 5개월간 야생 반달가슴곰의 서식실태를 추적한 끝에 지난달 말 무인카메라로 그 실체를 촬영하는데 성공했다고 15일 밝혔다. 무인카메라에 잡힌 야생 반달가슴곰은 머리부위의 골격형태나 털의 상태로 미뤄 6~7년 이상된 성수(어른 개체)로 추정된다. 공단측은 지난해 9월 지리산에 방사한 반달가슴곰이 현재 1년8개월의 어린 곰인데다 당시 몸에 부착한 전파발신기에서 신호음이 발신되고 있어 이번에 발견된 반달가슴곰은 야생곰이 확실하다고 밝혔다. 공단은 카메라에 포착된 실체와 함께 그동안 각종 배설물과 서식흔적을 종합한 결과 지리산국립공원에는 적은 수이지만 반달가슴곰이 꾸준히 개체수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공단은 본격적인 야생 반달가슴곰 조사를 위해 모두 24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지리산 반달가슴곰 관리팀(팀장 한상훈 박사)을 지난 5월 발족했으며, 이 관리팀은 야생 반달가슴곰의 것으로 추정되는 배설물 및 서식흔적 등이 발견된 20개 지점에 무인카메라를 설치해 5개월간의 추적 끝에 지난달 말 촬영에 성공했다. 관리팀은 이번에 촬영된 반달가슴곰의 야생서식행태 등을 파악하기 위해 촬영된 장소를 중심으로 털, 배설물 등 각종 서식흔적을 조사·수집, 정밀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관계자는 “안정적인 야생 반달가슴곰의 서식지 확보를 위해 지리산 일대 출입통제 및 밀렵 감시체제를 더욱 강화할 계획”이라며 “무엇보다 반달가슴곰 종 복원사업을 통해 근친교배에 의한 자연적인 도태를 예방하고 개체수를 유지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밝혔다. 한편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지난해 9월 반달가슴곰 복원 프로젝트로 생후 6개월된 ‘장군이’ ‘반돌이’ ‘반순이’ ‘막내’ 등 모두 4마리의 반달가슴곰을 지리산에 방사했으나 사람을 유독 따랐던 막내는 지난해 10월 회수됐고 반순이는 지난 6월 숨진 채 발견됐다. [이민용기자 / 국제신문] /지리산 소식 2002-11-16 http://www.ofof.net/zboard/zboard.php?id=news_01&page=9&sn1=&divpage= 1&sn=off&ss=on&sc=on&select_arrange=reg_date&desc=desc&no=81 ![](https://t1.daumcdn.net/cfile/blog/2015123F50A3B4ED2A)
2002 - 중국, 장쩌민 공식 퇴진-후진타오 시대 개막
후진타오(胡錦濤, 1942~ ) 중국 국가부주석이 11월 15일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돼 중국 4세대 최고 지도자로 공식 취임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날 제16기 1중전회(중앙위 1차 전체회의)에서 당의 최고 실권자인 중앙위원회 총서기에 후 부주석을 선출하고, 최고 권력기관인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정원을 종전의 7명에서 9명으로 늘려 60세 전후의 개혁적인 인사들을 대거 발탁, 더욱 젊어지고 개방적인 지도부를 출범시켰다. 장쩌민(江澤民, 1926~ ) 국가주석은 이번에 총서기 자리를 내놓았고 군부 실권을 장악하는 당 중앙군사위 주석직은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당분간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보였다. 기존의 정치국 상무위원 7명 가운데 후 부주석만 유임됐을 뿐 장쩌민 국가주석과 주룽지 총리, 리펑 전인대 상무위원장 등 이른바 제3세대 지도부 나머지 6명은 모두 빠져 정계 일선에서 퇴진하고, 후 부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제4세대 지도부에게 길을 터줬다. 한편 중국 공산당은 2100여명의 당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11월 8일부터 14일까지 열린 16차 당대회(전당대회)에서 300여명의 16기 중앙위원(후보위원 포함)을 선출하고 폐막했다. 16기 중앙위는 대폭적인 물갈이와 중앙위원 중 20% 이상이 50세 이하일 정도로 젊어진 것이 특징이다. /조선 [어제의 오늘]2002년 후진타오 당총서기 선출 ㆍ中 4세대 지도부 출범 1992년 중국공산당 제14차 전국대표대회(14전대)를 앞두고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은 이렇게 말한다. “내 보기에는 후진타오(胡錦濤)가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마오쩌둥(毛澤東)에 이어 제2세대를 대표하는 덩의 말은 후계구도에 대한 강력한 암시였다. 14전대는 장쩌민(江澤民)의 제3세대 세대교체를 확정했지만, 정작 세상을 놀라게 한 스타는 최연소 상무위원에 오른 무명의 후진타오였다. 1942년생 말띠로 변방의 성장 출신인 후진타오의 깜짝 등장을 두고 중국 언론은 ‘설산에서 뛰어나온 검은 말’이라고 했다. 그 검은 말은 5년 뒤 15전대에서 권력서열 5위로 치달으며 차세대 황태자로 꼽혔다. 그로부터 다시 5년 뒤. 기라성같은 2인자들이 좌절했던 ‘일인지하(一人之下)’ 천장을 뚫고 후진타오는 16전대에서 당 총서기에 선출된다. 2002년 오늘 제4세대 후진타오의 중국이 공식 출범한 것이다. “돼지는 살 찌는 것을 겁내고, 사람은 이름 날리는 것을 겁낸다”는 중국 속담의 뜻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 후진타오라고 한다. 그는 신중하고, 나서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탁월한 재주를 지닌 듯하다. 16전대를 앞두고 2002년 4월 후가 미국 방문에 나섰을 때 한 언론은 ‘Who's Hu?’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중국 인민들도 그의 육성과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인명록(Who's Who)을 빗대 후가 베일에 가린 인물임을 부각한 것이다.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와 짝을 이룬 후 국가주석의 조용한 통치는 천방지축의 검은 말이 아님을 입증했다. 지난해 17전대에서 제5세대의 후계구도도 틀을 잡았고, 베이징 올림픽을 통해 승천을 준비하는 용의 기상도 보여줬다. ‘조화사회(和諧社會)’를 중국의 정책 비전으로 내세웠다. 대내적으로는 경제성장보다 사회의 조화를 우선하고, 대외적으로는 책임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조화사회의 앞길에 커다란 장애물이 등장했다. 글로벌 경제위기다. 후 주석뿐 아니라 그를 점지한 덩의 안목까지 시험대에 올랐다. 유병선 논설위원 /경향신문 2008-11-14 18:15:1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1141815235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13%2Fblog%2F2008%2F04%2F29%2F00%2F41%2F4815f01b72d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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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 마라톤의 영웅 손기정(孫基禎) 사망
손기정 [孫基禎, 1912.8.29~2002.11.15] '마라톤 영웅'손기정씨 별세 일제 치하인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제패하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세계 만방에 떨쳤던 `마라톤 영웅' 손기정 옹이 15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0세. 손 옹은 노환인 폐렴 증세가 악화돼 갑자기 의식을 잃은 채 13일 서울 일원동삼성서울병원에 실려왔지만 끝내 정신을 회복하지 못하고 15일 오전 0시40분께 별세했다. 임종을 지켜본 아들 정인(59)씨는 "그동안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닥치고 보니 마음이 착잡하다"라며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중환자실의 위유미 당직 레지던트는 "자정을 넘어가면서 산소포화도가 점점 떨어지다가 심전도의 변화가 없어 사망을 확인했었다"면서 "편안한 상태에서 가셨다"고 전했다. 지난 몇 년간 노환에 따른 신부전증과 폐렴으로 고생해 온 손 옹은 지난 9월부터는 병원에 있는 날이 더 많을 정도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믿기지 않을만큼 건강했던 손 옹은 지난 98년 다리에 동맥경화 증세를 보이면서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생명과도 같은 다리에 이상이 생기면서 2000년부터는 치매 증세가 찾아왔고 신부전증을 비롯한 각종 합병증에 기력이 눈에 띄게 떨어진 지난해부터는 일체의 외부접촉을 끊고 집에서 누워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러는 와중에도 정신이 또렷할 때면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이봉주와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황영조 등 후배들의 근황을 물어올 정도로 마라톤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았다. 191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구멍가게와 행상을 하던 부모의 3남1녀중 막내로 태어난 손 옹은 한국마라톤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산 증인이었다. 암울했던 시절 베를린마라톤에서 우승하며 핍박받던 민족에 커다란 긍지와 용기를 안겨줬고 이는 20세기 한국 스포츠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는 기미가요가 울리는 시상대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단 채 고개를 숙일수 밖에 없었으며 금메달은 영광보다 큰 상처로 가슴속에 박혔다. 손 옹은 선수 생활을 그만둔 뒤에는 지도자로 나서 보스턴마라톤을 제패한 서윤복과 함기용을 키워내며 한국이 마라톤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또한 1960년대부터는 대한육상연맹 회장과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 등을 맡으며 행정가로 한국 체육 발전을 위해 이바지해 왔다. 그리고 가슴 속 깊이 응어리졌던 `태극마크의 한'도 무려 56년이 지난 92년, 공교롭게도 같은날 같은시에 열린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면서 풀렸다. 당시 팔십 노구를 이끌고 직접 바르셀로나를 찾았던 손 옹은 태극마크를 단 황영조가 1위로 결승선을 넘자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그대로 주저 앉았었다. 하지만 쌓인 한이 풀려서인지 손 옹은 이후 눈에 띄게 늙어갔고 결국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했다. 손 옹은 국민훈장 모란장(70년)을 수상했으며,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이라는 자서전을 남겼다. 유족으로는 아들 정인씨와 딸 문영(61)씨가 있다. 장례는 대한올림픽위원회(KOC)장으로 치러지며, 장례날짜는 유족과 협의해 추후결정될 예정이다. 이정진 기자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2.11.15(금) 01:01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2/11/005000000200211150101001.html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49/8_cafe_2007_11_15_12_26_473bbc5a8eef0)
1989 - 올림픽대교 개통
국내 최대의 사장교인 올림픽대교가 착공한지 4년여 만인 1989년 11월 15일 개통했다. 올림픽대교는 성동구 구의동과 송파구 풍납동을 연결하는 한강의 16번째 도로교량으로 국내 최대, 최장 사장교이면서 콘크리트공법에 의한 첫 사장교라는 기록을 갖게 됐다. 남북단 인터체인지는 진입 램프가 각각 5개와 4개이며 연장 1천7백70m이다. 교량 본체는 폭 30m로 중앙분리대를 갖추고 있으며 차선은 6차선이다. 올림픽대교는 유원건설이 시공을 맡아 1985년 10월 착공했으며 보상비 1백91억원, 공사비 4백96억원 등 총 사업비 6백87억원이 투입됐다. 올림픽대교는 교각이 없는 사장교 구간이 3백m로, 사장교 중심에 높이 88m의 주탑을 세우고 이 주탑에 제24회 서울올림픽을 상징하는 24쌍의 케이블을 늘어뜨려 교량상판을 교각으로 받치는 대신 케이블로 붙들어 매고 있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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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수립 공식 천명 1988년 11월 15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PLO)의 지도자 야시르 아라파트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수립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1948년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인 이스라엘이 수립되었다. 원래 국제연합(UN)의 결의안에 따르면, 이 지역에는 아랍인 국가와 유대인 국가가 각각 수립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 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서 이스라엘은 UN의 분할안보다 훨씬 더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고,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인들 중 상당수는 고향을 떠나 주변 아랍 국가들에서 난민생활을 해야 했다. 1964년 PLO가 결성되었고, 1969년 아라파트가 PLO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PLO는 주변 아랍 국가들에 근거지를 두고 군사조직을 육성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988년 11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수립 선언은 실질적인 국가 수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과의 공존을 암시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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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 소련 우주왕복선 부란 발사
[이 주일의 역사] 소련 우주왕복선 부란 발사 우주왕복선은 미국만이 운용하고 있다. 미국은 1981년 4월 12일 컬럼비아호를 처음 발사한 이래 챌린저, 디스커버리, 애틀랜티스, 엔데버 등 후속 기종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우주로 쏘아올렸다. 컬럼비아와 챌린저가 비행 중 폭발 사고를 당하는 불상사를 겪기도 했으나, 남은 우주왕복선은 여전히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우주왕복선을 개발한 나라는 미국만이 아니다. 냉전시대 미국과 우주개발 경쟁을 벌였던 소련(현 러시아)에서도 우주왕복선을 만든 적이 있었다. 소련은 1976년 우주왕복선 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1980년 1호기인 '부란(Buran)'의 제작에 돌입했다. 러시아어로 '눈보라'라는 뜻을 가진 부란은 8년간의 개발 끝에 1988년 완성되었다. 공교롭게도 부란의 외형은 미국 우주왕복선과 매우 비슷했다. 그해 11월 15일 부란은 우주로 날아올랐다. 우주비행사는 타지 않고 무선 자동조종으로 지구 궤도를 2바퀴 선회한 뒤 귀환했다. 3시간25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성공적인 비행이었다. 그러나 이 첫 비행이 부란의 마지막 비행이 되었다. 소련이 붕괴되고 경제난을 겪던 러시아가 1993년 우주왕복선 개발 계획을 전면 중단했기 때문이다. 이후 부란은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 보관되어 오다 지난 2002년 격납고 붕괴로 파손되고 말았다 한동안 침체기에 빠졌던 러시아는 최근 고도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차세대 우주왕복선 '클리퍼'를 개발하는 우주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미국도 새 우주선 '오로라'를 개발해 화성에 인간을 착륙시킬 계획을 세웠다. 중국 또한 우주왕복선을 만들 계획이라 한다. 새로운 첨단 우주선 개발 경쟁이 다시 불붙고 있다. 정광용기자 kyjeong@ /부산일보 2007. 11.12. 10:19 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7/1112 /047020071112.10301019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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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 동요 작곡가 윤극영(尹克榮) 사망
윤극영 [尹克榮, 1903.9.6~1988.11.15] [오늘속으로] 동요작가 윤극영 1988년 오늘 동요 작가 윤극영이 작고했다. 향년 86세. 우리들 마음의 가장 밑자리에 있는 노래들은 동요일 것이다. 고전미를 내뿜는 가곡은 물론이고, 백만 단위로 CD가 팔려나가는 대중 가요조차도 동요만한 보편적 호소력을 지니지 못한다. '수선화'나 '그리운 금강산'은 좋은 가곡들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그 노래들을 끝까지 불러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자와 조용필과 서태지는 좋은 가수들이겠지만, 그들의 노래들이 지닌정서적 소구력(訴求力)은 세대의 벽을 쉽게 뛰어넘지 못한다. 그러나 예컨대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으로 시작하는 '반달'이나,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으로 시작하는 '따오기'는 어떨까?세대와 상관없이 한국인들은 어린 시절에 이 노래들을 배운다. 그래서 이 노래들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갈무리돼 있다가 수시로 튀어나와 정서의 줄을 퉁긴다. 거의 80년 전에 만들어진 노래들인데도 말이다. 이 '불멸의 동요들'을 만든 사람이 윤극영이다. 윤극영은 경성 법학 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의 도쿄 음악학교와 도요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1923년에는 소파 방정환과 함께 색동회를조직하고, 그 이듬해에는 동요 보급 단체인 다리아회를 조직해서 어린이문화 운동과 동요 보급에 힘썼다. 현대 동요 백년의 역사에 기록된 이름들 가운데 오직 하나만을 꼽으라고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윤극영을 떠올릴 것이다. 20년대 노래들인 '반달'이나 '따오기'에는 나라 잃은 겨레의 아픔과 슬픔이 담겨 있다. 그러나 윤극영의 동요들이 모두 그늘진 것은 아니다. '까치까치 설날은'이나 '고드름'같은 노래들에는 밝고 맑은 동심이 녹아 있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0-11-14 19:3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10&oid=038&aid=0000034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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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 터키계 키프로스 독립 선포
1959년 키프로스 독립, 영국 군사기지 주둔, 영국·그리스·터키 보장조약 체결, 그리스·터키 양국군 주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독립협정이 체결되어 1960년 8월 16일 키프로스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그러나 그리스계·터키계 주민의 반목은 계속되어 1963~1964년 두 주민간에 무력충돌로 내란이 일어나 1964년 국제연합 평화유지군(UNFICYP)이 파견되었다. 1974년 쿠데타로 친그리스정부가 수립되자 터키군은 터키계 주민보호를 이유로 침입하여 북부를 점령하고 이듬해 <키프로스연방 터키계주민공화국>을 발족시켰다. 이에 대하여 1983년 국제연합 총회에서 터키군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자 터키계는 11월 <북키프로스-터키공화국>으로 분리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현재 키프로스섬에는 사실상 2개국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북키프로스는 국제적 승인을 얻지 못하고 있으며 터키만이 이를 승인하고 있다. /yah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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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마거릿 미드(Mead, Margaret) 사망
미드 [Mead, Margaret, 1901.12.16~1978.11.15] 미국의 인류학자. 과학적 연구활동과 독특한 개성으로 높은 명성을 얻었다. 주로 오세아니아의 원시 종족들에 관한 연구, 특히 심리상태와 문화의 여러 양상들, 성 행동에 대한 문화적 조절, 본성, 문화변동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또 여성의 권익과 육아·성도덕·핵확산·인종관계·약물남용·인구조절·환경오염 및 세계의 기아문제 같은 광범위한 주제에도 적극 개입해 활동했다. 1923년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프란츠 보아스와 일생의 친구가 된 루스 베니딕트와 함께 연구하면서 그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1929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5년 사모아에서 현지조사를 하는 동안 23권에 달하는 저서들 가운데 최초의 저서인 〈사모아의 성년 Coming of Age in Samoa〉(1928, 개정판 1968)을 위한 자료를 수집했다.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였던 이 책은 통계자료보다도 관찰법에 의존한 본보기로서 특색 있다. 이 책 속에는 20세기 후반 몇몇 인류학자들에 의해 의문이 제기되었던 문화결정론에 대한 그녀의 신념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녀는 뉴욕 시 미국자연사박물관의 관장보조(1926~42), 부관장(1942~64), 인종부문 부장(1964~69), 명예관장(1969~78)을 지냈다. 72세에 과학발전협회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학문에 대한 공적을 특별히 인정받게 되었다. 사후인 1979년 미국 대통령이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자유훈장이 주어졌다. 주요 저서로는 〈마누스족 생태연구 Growing Up in New Guinea〉(1930)·〈세 부족 사회의 성과 기질 Sex and Temperament in Three Primitive Societies〉(1935)·〈발리인의 특성 Balinese Character:A Photographic Analysis〉(1942, 당시의 남편 그레고리 베이트슨 공저)·〈문화적 진화의 연속성 Continuities in Cultural Evolution〉(1964)·〈인종에 대하여 A Rap on Race〉(1971, 제임스 볼드윈 공저)·〈남성과 여성 Male and Female〉(1949)·〈인류학 Anthropology:A Human Science〉(1964)·〈문화와 참여 Culture and Commitment〉(1970), 루스 베니딕트에 대한 전기, 그녀 자신의 젊은날에 대한 기록인 〈검은 나무딸기의 겨울 Blackberry Winter〉(1972) 등이 있다. 〈현장에서 보낸 편지 Letters from the Field〉(1977)는 사모아 조사여행 때 그녀가 썼던 편지들의 일부를 실은 책이다. /브리태니커 ![](https://t1.daumcdn.net/cfile/blog/16039C3450402C7B13)
- 음성 꽃동네 (공중전화카드) 1976 - 오웅진 신부, 꽃동네 설립 ('사랑의 집' 준공) 1976년 11월 15일 오웅진 신부가 단돈 1천3백원으로 충북 용담산 기슭에 방 다섯칸 부엌 다섯칸짜리 시멘트 블록집 `사랑의 집`을 짓고 무극천 다리밑에 살던 18명의 걸인을 데려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꽃동네의 시작인 셈이다. 1980년 9월 19일 청주교구 사제총회는 꽃동네 설립을 가결했고 1981년 예수부활대축일을 기해 전국에 꽃동네 회원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초라했던 꽃동네가 지금은 20여만평의 부지에 부랑인, 정신병자, 노인, 결핵환자, 알콜중독자, 심신장애자를 위한 사랑의 종합시설을 갖춘 전문요양원으로 성장했다. 게다가 가평과 거창에 제2꽃동네와 제3꽃동네를 만들고 사랑의 연수원까지 준공했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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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 프랑스의 영화배우 장 가뱅(Gabin, Jean) 사망
가뱅 [Gabin, Jean, 1904.5.17~1976.11.15] 프랑스의 영화배우. 본명 알렉시스 몽코르제(Jean-Alexis Moncorge). 파리 출생. 폴리베르제르, 물랭루즈의 무대에 섰다가 유성영화(有聲映畵) 초기인 1930년 영화계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호탕한 남성역으로 인기를 얻다가 《땅 끝까지 가다》(1936) 《망향》(1937) 《위대한 환상》(1937) 《안개낀 항구》(1938) 《수인(獸人)》(1938) 등에서 적역(適役)을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자유 프랑스 해군에 들어갔고, 전후에는 소박한 늙은 갱역으로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 《현금에 손대지 마라》(1953) 《지하실의 멜로디》(1962) 등이 대표작이고, 《밤은 나의 것》(1951)으로 베네치아국제영화제 최우수 남우상을 받았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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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 중국, 유엔 가입 1971년 오늘!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에 정식으로 가입한다. 유엔이 대만의 축출과 중국의 가입을 결정한뒤 20일만의 일이다. 이로써 중국은 1949년 공산정부를 수립한 뒤 22년 만에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등장했다. 중국대표단 단장인 교관화는 유엔총회의 연설을 통해서 미국과 소련 중심의 국제 질서를 비판했다. /YTN
(참고: 1971년 10월 25일 제26차 유엔총회에서 자유중국의 축출과 중공의 가입을 결의.) ![](https://t1.daumcdn.net/cfile/blog/1602B6414EC1D82F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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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 미국 워싱턴 25만명 반전시위
[책갈피 속의 오늘]1969년 美워싱턴 25만명 반전시위 “대통령과 부통령을 끌어내리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린 전쟁을 끝내고 평화의 시대를 열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1969년 11월 15일 미국 워싱턴은 이른 아침부터 인산인해를 이뤘다. 경찰은 25만 명이 모였다고 했다. 항공사진을 보니 30만 명이 넘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여기에는 작곡가이자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부인인 코레타 스콧 킹 여사도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평범한 시민과 학생이 있었다. 참가자 가운데 유일한 공화당 의원이었던 찰스 구델이 말문을 열었다. “미군이 철수하면 베트남에서 대량 학살이 일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 6년 반 동안 베트남에서 이뤄진 일이 대량 학살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입니까.” 시위대는 백악관과 공화당을 향해 베트남에서 미군을 즉각 철수하라고 주장했다.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은 단계적 철수 계획을 내놓은 상태였다. 참석자들은 ‘전쟁 중단’이라는 피켓을 들고 워싱턴 중심가인 펜실베이니아 애버뉴를 가득 메웠다. ‘닉슨,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행진이오. 다음에는 발포(發砲)할 것이오’라는 피켓도 보였다. 백악관과 국방부 청사인 펜타곤 앞에는 무장 병력이 배치됐다. 육군과 해병대 병력도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충돌은 없었다. 당시 이 반전 시위를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한 뉴욕타임스는 ‘평화 집회’ 라고 썼다. 미군은 이로부터 4년 뒤에야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사망자 5만6000명이라는 비극적인 결말과 함께. 최근 미국 시민은 새로운 형태의 반전 시위를 했다. 유권자들은 지난주 치러진 미국의 중간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을 다수당으로 만들어 줬다. 공화당의 이라크 정책에 등을 돌렸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즉각 로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을 경질했다. “로마 시민은 시저를 전쟁터로 보냈습니다. 프랑스 시민 역시 나폴레옹을 전쟁터로 움직였죠.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우린 이런 (역사의) 경험에서 배워야 합니다.” 1969년 시위에 참가했던 유진 매카시 민주당 의원이 군중을 향해 외친 말이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동아닷컴 2006-11-15 03:00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611150106 ![](https://t1.daumcdn.net/cfile/blog/19439F414E5266F317)
1942 - 아르헨티나 출신의 피아니스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Barenboim, Daniel) 출생 바렌보임 [Barenboim, Daniel, 1942.11.15~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생.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1950년 독일로 옮겨 잘츠부르크에서 E.피셔에게 피아노를, I.마르케비치에게 지휘법을 사사한 후 다시 이탈리아로 가서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음악원에서 수학하였다. 1957년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L.스토코프스키 지휘로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을 가지고 데뷔, 절찬을 받고 그로부터 미국 ·유럽을 중심으로 연주활동을 하였으며, 1975~1989년 파리관현악단 음악감독을 맡는 등 지휘자로서도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뛰어난 음악성으로 현대 음악계의 지도적 인물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1984년 파리관현악단과 함께 내한, 지휘하였다.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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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 필리핀 연방공화국 성립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뒤 필리핀 제도는 미국에 할양되었으나 필리핀 내 독립운동은 1906년까지 수그러들지 않았다. 미국은 처음부터 필리핀의 자치와 궁극적 독립을 위해 필리핀 국민을 훈련시킨다는 명목으로 미국의 패권주의를 합리화했다. 1935년 정치적·경제적 독립을 꾀하기 위해 필리핀 연방이 수립되었지만 이러한 노력은 제2차 세계대전과 뒤이은 일본의 침략과 점령 때문에 지연되었다. 필리핀은 1944~45년 미군에 의해 해방을 맞이한 후, 1946년 7월 4일 미국 정부를 본뜬 정부를 세우고 필리핀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초대 대통령으로는 마누엘 로하스가 선출되었다. (필리핀-역사) /브리태니커 ![](https://t1.daumcdn.net/cfile/blog/176549444EC1DB040C)
1932 - 미국의 가수 클라이드 맥파터(McPhatter, Clyde) 출생 맥파터 [McPhatter, Clyde, 1932.11.15~1972.6.13] 클라이드 맥파터 본명 : Clyde McPhatter 직업 : 가수 출생일 : 1932년 11월 15일 사망일 : 1972년 6월 13일 소속 : 드리프터즈 데뷔 : 드리프터즈 1집 앨범 Rockin’ and Driftin’ (1958) Clyde McPhatter (November 15, 1932 – June 13, 1972) was an American R&B singer, perhaps the most widely imitated R&B singer of the 1950s and 1960s, making him a key figure in the shaping of Doo-wop and R&B. Life and career http://en.wikipedia.org/wiki/Clyde_McPha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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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 미국의 소설가 찰스 체스넛(Chesnutt, Charles W.) 사망 체스넛 [Chesnutt, Charles Waddell, 1858.6.20~1932.11.15] 미국의 소설가. 최초의 주목할 만한 흑인작가이다. 남북전쟁 전에 고향 노스캐롤라이나를 떠나 노예에서 해방된 흑인의 자손이다. 전쟁이 끝난 뒤 부모는 노스캐롤라이나로 되돌아갔다. 25세에 결혼했고 이미 학교 교장으로 성공한 위치에 있었으나, 남부에서 흑인에 대한 대우에 깊이 실망하여 가족과 함께 클리블랜드로 이주했다. 개업 변호사가 되어 법률 속기 회사를 차리는 동안 서기 겸 속기사로 일했다. '부당한 계급 풍조'의 척결을 앞당기는 작품을 쓰는 작가가 되겠다는 어렸을 때의 꿈을 이루기 위해 틈틈이 글을 썼다. 1885~1905년에 50편이 넘는 이야기, 단편소설, 수필과 함께 2권의 단편집, 반노예제 지도자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자서전, 3권의 장편소설을 출판했다. 흑인 작품으로는 최초로 〈애틀랜틱 먼슬리 The Atlantic Monthly〉(1887. 8)지에 실린 〈구퍼드 포도 덩굴 The Goophered Grapevine〉은 토머스 넬슨 페이지의 대농원 학교를 교묘하게 논박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 속에 담긴 풍자를 눈치채지 못했다. 〈구퍼드 포도 덩굴〉과 노스캐롤라이나 흑인들의 삶에 관한 꾸밈없는 이야기들이 〈여자 마법사 The Conjure Woman〉(1899)에 담겨 있다. 〈그의 젊은 시절의 부인과 유색인종차별에 관한 그밖의 이야기들 The Wife of His Youth and Other Stories of the Color Line〉(1899)에서는 조지 W. 케이블과 유사한 방식으로 흑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인종들에서도 나타나는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을 비난한다. 〈대령의 꿈 The Colonel's Dream〉(1905)은 자유를 얻은 노예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다루고 있다. 심리적 사실주의자로서 사회적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 노스캐롤라이나 사람들의 친숙한 정경들을 소재로 삼았다. 그의 작품은 1930년대까지 등장한 흑인작가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나며 윌리엄 포크너, 리처드 라이트, 제임스 볼드윈 등의 여러 후기 작가들보다 흑인의 인간적 측면, 흑인과 백인을 떠나 동시대 인간의 인간에 대한 비인간성이라는 주제를 앞서 다루었다. /브리태니커 ![](https://t1.daumcdn.net/cfile/cafe/1624A0154CE12A022D)
- '묘법' 1993 (공중전화 카드) 1931 - 한국의 서양화가 박서보(朴栖甫) 출생 박서보 [朴栖甫, 1931.11.15~] 서양화가. 추상계열의 서양화를 그렸다. 1954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1956년 동방문화회관화랑에서의 4인전을 시작으로 화단에 나왔다. 한국 전위미술운동의 출발을 알리는 한국현대미술가협회전의 핵심 멤버로 앙포르멜 미학을 널리 알리는 데 선두주자로 활약했다. 〈원형질〉 연작으로 대변하는 1950년 대말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는 서구 및 일본 앙포르멜을 모방한 뜨거운 추상미술의 전개에 관심을 보였다. 이 시기의 작품은 강한 내면성을 추구하며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의 아카데미즘에 대한 강한 반발을 드러내고 있다.1970년대에는 한국미술의 국제화라는 슬로건 아래 한국미술협회를 중심으로 추상미술 운동을 전개했다. 1960년대 말부터 시도했던 〈묘법〉 연작을 1970년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발표해 한국 '단색회화'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1980년대 들어와서 선묘(線描) 대신에 한지의 물질적 특성과 질감을 살리는 데 관심을 갖고 수성물감에 젖은 한지를 굵은 연필심으로 긋는 행위를 반복했다.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박서보 회화 40년전'을 가졌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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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발라드(Ballard, James) 출생 발라드 [Ballard, James Graham, 1930.11.15~2009.4.19] 제임스 G. 발라드 (James Graham Ballard) 20세기 영국 작가 중 가장 논쟁적인 작가로 알려진 J.G. 발라드는 1930년에 부친이 사업차 머물던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진주만 공격 이후에 가족과 함께 민간인 포로수용소에 머물다가 1946년에 영국으로 송환됐다.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2년간 의학을 공부했으며, 대학 중퇴 후 영국 공군에 입대해 캐나다로 건너갔다. 포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자전적 소설 《태양의 제국》으로 <가디언 상>을 수상했으며, 이 작품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대표작으로는 1962년에 발표한 《물에 잠긴 세계The Drowned World》를 비롯, 《크리스털 세계The Crystal World》, 《잔혹 전시회The Atrocity Exhibition》,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에 의해 영화로 제작된 《크래시Crash》, 《하이라이즈High-Rise》, 《무한한 꿈의 회사The Unlimited Dream Company》, <태양의 제국>의 후속작인 《여인들의 친절The Kindness of Women》, 《코카인의 밤Cocaine Nights》, 《수퍼-칸Super-Cannes》, 《밀레니엄 피플Millenium People》이 있으며, 최근작으로는 《나라가 임하시오며The Kingdom Comes》가 있다. 수많은 작품을 통해 공상과학소설 장르의 시점을 바깥 우주에서 내적 우주로 전환시킨 뉴웨이브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발라드는 2006년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으며, 투병 생활 끝에 2009년 타계했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3924322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51/10_cafe_2007_11_15_12_28_473bbcd5f0d6e) - Commemorating Peace after World War I
1920 - 국제연맹, 제네바서 제1차 총회 [역사속의 오늘] 국제연맹 첫 총회 개최 2차대전 이후 국제평화기구인 국제연합(UN)은 1차대전 이후 만든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실패를 교훈 삼아 강대국의 적극 가입, 군사적 제재력 확보 등을 통해 그 실효를 거둘 수 있었다. 국제연맹 창설은 미국의 토머스 윌슨 대통령이 1918년 1월 ‘평화를 위한 14개 조항’에서 제창하면서 표면화됐다. 이후 미국·영국·프랑스 등 1차대전 승전국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됐고,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파리평화회의)에서 연맹의 창설이 명시됐다. 1920년 11월 15일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연맹 첫 총회가 열렸다. 참석한 41개 회원국 중에는 패전국 독일과 전쟁 막바지에 발을 뺀 러시아는 포함되지 않았다. 주창자인 월슨의 미국도 없었다. 공화당 의원을 중심으로 반대 의견이 팽배해 베르사유조약을 부결해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강대국의 지위를 얻어가고 있던 미국이 빠지고, 다른 강대국들은 서로 협조하기를 원치 않았기에 국제연맹은 파시즘이 대두한 1930년대 들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2차대전의 발발을 막지 못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매일신문 2006년 11월 14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0710&yy=2006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49/12_cafe_2007_11_15_12_28_473bbce777390)
1919 - 스위스의 화학자 알프레트 베르너(Werner, Alfred) 사망
베르너 [Werner, Alfred, 1866.12.12~1919.11.15] 스위스의 화학자. 프랑스의 뮐루즈 출생. 1889년 취리히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하였으며, 1895년 이후 취리히대학 교수로 있었다. 1890년 취리히폴리테크니크의 교사인 A.한치와 함께 질소화합물의 분자구조를 연구하여, 이것이 입체적임을 밝힘으로써 탄소원자가 입체적 분자를 만든다고 한 J.H.반트호프의 입체화학을 확장시켰으며, 이를 근거로 하여 원자가론(原子價論)의 연구에 노력하였다. 1891년에 원자에는 일정수의 결합선(結合線)이 일정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 그것이 다른 원자의 결합선(結合線)과 결부된다는 종전의 생각을 비판하여, 원자로부터는 인력이 일률적으로 미치고 있다는 새로운 이론을 제출하였다. 사실 그 당시에는 종전의 원자가론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무기화합물(착염 ·복염)이 많이 발견되어 화학자들은 곤경에 빠져 있었다. 베르너는 26세 때 새로운 착상을 하여 배위설의 핵심을 만들어 놓았다. 그때까지의 원자가[主原子價] 이외에 부원자가를 생각하여, 이것으로 배위설을 형성한 다음, 각종 착염 분자의 입체적인 구조를 차례로 밝혀 나갔다. 또한 무기화합물의 이성질체, 특히 광학이성질체의 연구에도 몰두하였다. 한편 베르너는 제자들과 함께 170편 이상의 논문을 쓴 노력가였으며, 제자의 교육에도 열성적이어서, 그의 문하에는 뛰어난 화학자와 교육자가 배출되었다. 1892년에 제출한 배위설(配位說)에 대한 업적으로 1913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베르너의 교과서 《무기화학에 있어서의 새 사상》(1905)과 《입체화학 강의》(1904)는 오늘날에도 학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naver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11%2Fblog%2F2008%2F05%2F26%2F18%2F24%2F483a81bfa2742)
1918 - 여운형, 상해에서 미국 대통령 특사와 회견
[1918년 독립운동 역사] 1월 17일, 고등고시 및 보통고시령 공포. 18일, 총독부, 《조선어사전》 편찬, 간행(1910~). 11월 15일, 신한청년당원 여운형,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사 크레인과 회견. 20일, 미주 교포단체들, 윌슨 미국대통령에게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진정서 제출. 30일, 여운형, 파리강회회의와 미국대통령에게 보낼 한국독립 요청서를 크레인에게 전달 12월 5일 영친왕과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미사코와 혼인을 발표. http://kr.ks.yahoo.com/service/ques_reply/ques_view.html?dnum=AAH&qnum=4734725&start=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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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land, 500000 Zlotych (Banknote)
1916 - 폴란드의 소설가 헨리크 솅키에비치(Sienkiewicz, Henryk) 사망
셍키에비치 [Sienkiewicz, Henryk Adam Alexander Pius, 1846.5.5~1916.11.15]
필명은 Litwos. 폴란드의 소설가. 높은 인기를 누렸고 190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바르샤바대학교에서 문학·역사·철학을 공부했으나 1871년 중퇴했다. 이미 1869년부터 실증주의의 영향이 보이는 비평을 출판하기 시작했는데, 실증주의는 당시 폴란드 등지에서 유행한 철학사조로 특히 과학이 이룬 성과를 강조했다. 1872년 첫 장편소설인 〈헛되이 Na marne〉를, 1875년 첫 단편소설인 〈늙은 하인 Stary sługa〉을 발표했다. 〈가제타 폴스카 Gazeta polska〉의 특파원 자격으로 미국을 여행했고(1876~78),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거쳐 폴란드에 돌아온 뒤 많은 단편소설을 출판해 성공을 거두었다. 이중에는 〈음악가 얀코 Janko Muzykant〉(1879)·〈등대지기 Latarnik〉(1882)·〈정복자 바르테크 Bartek Zwyciezca〉(1882) 등이 있다. 1882~87년 일간지 〈수오보 Słowo〉의 공동편집자로 일했다. 1900년에는 작가생활 30주년 기념으로 폴란드 국민들로부터 키엘체 근처 오블레고레크의 조그만 땅을 받아 1914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제1차 세계대전중 폴란드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폴란드의 전쟁희생자들을 위해 구제활동을 폈다. 1883년에는 위대한 3부작 역사소설을 〈수오보 Słowo〉지에 싣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불과 칼로써 Ogniem i mieczem〉(1884)·〈대홍수 Potop〉(1886)·〈판 보우오디요프스키 Pan Wołodyjowski〉(1887~88)로 구성되어 있다. 17세기 후반을 배경으로 쓴 이 3부작은 서사시적인 간결명료함을 갖춘 생동감 있는 문체를 통해 폴란드인의 영웅적 자질을 강조하면서 코사크·타타르·스웨덴·투르크인에 대한 폴란드인의 투쟁을 그렸다. 이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제1부인 〈불과 칼로써〉이며, 보그단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자포로지예 카자크의 반란을 저지하려는 폴란드인의 노력을 그렸다. 그밖의 장편소설로는 네로 황제 치하의 로마를 배경으로 쓴 역사소설 〈쿠오바디스? Quo Vadis?〉(1896)가 있다. 이 책은 널리 번역되어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그의 주요작품들은 과장이 많고 역사적 정확성이 부족하다는 비평을 받았지만, 서술 능력이 뛰어나며 인물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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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 선통제로 즉위
푸이 [溥儀, 1906.2.7~1967.10.17] 중국 청나라 마지막 황제. 광서제(光緖帝)의 동생 순친왕(醇親王) 재풍(載灃)의 아들. 1908년 3세로 아이신줴뤄가[愛新覺羅家]의 제12대 황제가 되어 선통제(宣統帝)라 하였으나,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1912년에 퇴위하였다. 1924년 펑위샹[馮玉祥]에게 쫓겨 베이징[北京]을 빠져나와 일본 공사관(公使館)에 피하였으며, 나중에 톈진[天津]의 일본 조계(租界)에 한거(閑居)하였다. 만주사변(滿洲事變) 때 일본군에 의해 몰래 끌려나와 1932년 만주국을 집정(執政), 1934년 왕이 되었다. 1935년과 1940년에 일본을 방문하였으며, 1945년에 만주국이 붕괴됨으로써 퇴위하였다.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하바로프스크에 억류되었으며,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 때 증인으로 출두하였다. 1950년 공산정권하의 중국에 송환되어 수감되었다가, 1959년 특사로 풀려나와 식물원 정원사로 일했다. 1964년 인민정치협상회의(人民政治協商會議) 전국위원(全國委員)이 되었으며, 저서 《나의 전반생(前半生)》을 출판하였다. 1967년 10월 16일 사망 후 베이징 시내의 팔보산(八寶山) 공동묘지의 인민납골당에 유해가 안치되었다가, 1980년 5월 팔보산 혁명공묘(革命公墓)로 옮겨졌고, 1995년 1월 26일 베이징 남서쪽 허베이성[河北省] 이현[易縣]에 있는 청나라 황릉(皇陵)으로 이장되었다. 이로써 사망한 지 28년 만에 청나라 황제로 복권되었다. 한편, 그의 저서 《나의 전반생》이 감독 B.베르톨루치의《마지막 황제》로 영화화되어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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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 청나라 말기의 권력자 서태후(西太后) 사망
서태후[西太后, Xi Taihou, 1835.11.29~1908.11.15] 서태후(西太后) 사망 중국 청나라 말기의 ‘서태후(西太后)’는 이름이 아니다. 1861년 함풍제가 병사하고 후궁에서 태후에 오른 서태후가 서쪽에, 정실이 동쪽에 기거하다보니 편의상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을 뿐이다. 17세에 궁녀로 입궁한 그녀가 귀인과 빈을 거쳐 태후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황제 생전에 총애를 받아서가 아니었다. 함풍제를 이을 유일한 아들이 그의 핏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과감한 결단력에 간교한 계책까지 갖춘 야심가였고 남성을 능가하는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5세의 어린 아들이 동치제로 즉위하면서 그녀의 47년 절대권력도 함께 시작됐다. 정실 동태후가 있었지만 그녀는 본시 성격이 온순해 서태후의 적수가 되질 못했다. 동치제가 생모인 자신보다 양모인 동태후를 더 따르자 그녀는 아들을 미워했고 아들은 결국 나이 스물을 못넘기고 1874년에 죽었다. 그녀는 4세밖에 안된 자신의 여동생의 아들을 광서제로 옹립하고 수렴청정를 이어갔다. 1881년 동태후마저 의문의 죽음을 맞자 이제 권력은 사실상 그녀의 독차지가 됐다. 사치했던 그녀는 쌀 5000kg에 상당하는 비용을 하루 식사비로 썼으며 옷만해도 3000상자가 넘어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옷을 갈아 입었다. 1898년 청년이 된 광서제가 개혁주의자들의 무술변법에 힘을 실어주며 일대 개혁을 추진하려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서태후는 수구파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변법을 103일 만에 진압하고 광서제를 무력화시켰다. 결국 광서제는 10년간 유폐된 채 지내다가 1908년에 죽음을 맞았다. 다음날인 11월15일 서태후는 이제 2세밖에 안된 광서제 동생의 아들 푸이(溥儀)를 선통제로 세우고는 자신도 곧 73세로 눈을 감았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권력을 움켜쥐려했던 여인이었다. /조선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48/14_cafe_2007_11_15_13_02_473bc4dc04eba)
1907 - 독일군 장교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Stauffenberg, Claus von) 출생
슈타우펜베르크 [Stauffenberg, Claus, Graf von, 1907.11.15~1944.7.20] [역사 속의 인물] 히틀러 암살 기도 슈타우펜베르크 1907년 오늘, 프로이센 귀족 가문에서 출생한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 유능하고 리더십이 뛰어난 장교로 평가받았다. 한때 아돌프 히틀러를 존경했던 그는 1933년 나치 정권이 들어선 후 유대인 탄압이 자행되자 도덕적 정의감으로 심적인 갈등을 겪게 된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그는 유대인 학살이 극에 달하는 것을 보고 군부 내에서 싹트고 있는 '반나치 반히틀러' 세력에 가담, 히틀러 암살 계획에 적극 나서게 된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가 주관하는 전시 최고회의에 참가하게 된 그는 시한폭탄이 들어 있는 서류 가방을 회의장에 두고 빠져나왔다. 잠시 후 폭발이 일어났지만 한 장교가 서류 가방 위치를 옮겨놓는 바람에 히틀러는 암살을 모면했다. 체포된 그는 거사 이틀 후 '위대한 독일이여 영원하라'는 외침을 남기고 37세의 나이로 총살형을 당했다. 현재 독일 국민들은 도시의 거리명에 그의 이름을 제일 많이 붙일 정도로 그를 존경하고 있다. 악성 베토벤의 이름을 딴 도로명은 두 번째로 많다. 2008년에는 그를 소재로 한 영화 '작전명 발키리'가 개봉됐으며 톰 크루즈가 그의 역을 맡았다. 김지석/논설위원 /매일신문 2011년 11월 15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5495&yy=2011 1905 - 이토 히로부미, 고종에게 을사늑약 조인 강요 고종에게 을사늑약 조인 강요 이등박문 "늦으면 곤란" 협박 1905년 을사늑약 때 특사로 내한한 이등박문(伊藤博文)은 11월 15일 2차로 고종황제를 알현, 좌우를 물리치고 4시간 이상을 함부로 공갈하면서 조인을 강요했다. △이등 : 이 안은 일본이 여러모로 생각한 것입니다. 폐하의 생각은 자유겠으나 우리는 이미 결정한바 있으니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지 아실 것입니다. 더 곤란하고 불리 하기 전에 결정하십시오. △고종 : 우리는 국가의 중대사에는 조종(祖宗)과 유현(儒賢)에까지 자문하고 인민의 여론까지 채방하여 시행하는 관례가 있어 짐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 △이등 : 그런 말은 기괴천만의 말이오. 입헌국가가 아닌데 인민의 의사운운은 인민을 선동하여 반항하려는 것으로 생각하오. 귀국의 인민은 유치하고 외교에 어두우니 세계 대세를 알 도리가 없습니다. △고종 : 이 조약을 윤허하면 망국과 같은 것이 되는데 짐은 종사에 순응할지언정 어찌 윤허할 수 있겠는가. △이등 : 이 안은 천연할 수 없습니다. 조속한 결정과 타결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그 뜻을 어서 칙명으로 내려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외무당국이 칙명을 받지 못했다는 것 같은 잘못이 일어나지 않도록 약속을 하셔야 합니다. 실로 용서할 수 없는 이등박문의 불칙한 협박이다. 그러나 이 늑약은 이틀후인 17일에 강제로 조인되고 말았다. [이치백의 一日一史] /전북일보 2005-11-14 오후 8:49:15 http://www.jjan.kr/local/others/default.asp?st=2&newsid= 2005111420491500&dt=20051115 ![](https://t1.daumcdn.net/cfile/blog/1261DB464EC1EB5D0C)
1902 - 인도의 무신론자 고라(Gora) 출생 고라 [Gora][Goparaju Ramachandra Rao, 1902.11.15~1975] Goparaju Ramachandra Rao (aka Gora) (November 15, 1902-1975) was an Indian atheist leader. Early days Gora was born into a high caste Hindu family in India. He wrote in his autobiography, We Become Atheists, that he grew up "conventionally orthodox and superstitious." He pursued a botany degree, eventually earning his Master's in botany at Presidency College in Madras. He married Saraswathi in 1922 when she was only 10. Life and work Gora devoted his life to propagating atheism. In 1940, he and his wife Saraswathi Gora co-founded the Atheist Centre, in a small village in the Krishna district. On the eve of Independence in 1947, they moved the center to Vijayawada. Throughout the 1940s he workedin the Indian independence movement, and after Gandhi's assassination retained his links with leaders of the Gandhian movement, especially Vinoba Bhave. Gora wrote many books, such as Atheism Questions and Answers, An Atheist Around the World, An Atheist with Gandhi, The Need of Atheism, and Positive Atheism. From 1949 on, he wrote a column on atheism, and began publishing The Atheist, a monthly, in 1969. Gora's atheism dictated his campaign to abolish the caste system with its "untouchables," and the idea of "karma" or divine fate. Gora died in 1975. The Atheist Center, which continued under the guidance of Saraswathi, provides counseling, promotes intercaste and casteless marriages, works to abolish child marriages, provides aid to prostitutes, unwed mothers and vulnerable women, debunks superstitious beliefs by holding firewalking demonstrations and debunking other "miracles," educates against belief in witchcraft and sorcery, promotes sexual education and family planning and many other reforms. Postage Stamp In 2002 the postal department of Government of India released a postage stamp of 5 rupee denomination commomerating Gora's birth centenary. http://en.wikipedia.org/wiki/Goparaju_Ramachandra_Rao
- 자료 : 한국테마클럽 (cantona) 1891 - 독일의 육군 원수 에르빈 롬멜(Rommel, Erwin) 출생 롬멜 [Rommel, Erwin Johannes Eugen, 1891.11.15~1944.10.14] 1910년 육군에 입대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는 소위로서 참전하였다(1914~1918). 전후 나치스운동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에 히틀러의 호감을 사 경비대장이 되었으며(1938), 나치스의 국방군을 지휘하여 빈·프라하·바르샤바 등지를 침공(1939)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의 빌미를 삼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기갑사단장으로 프랑스 전선에서 활약, 1941년 북부 아프리카로 전전(轉戰), 교묘한 작전으로 영국군을 괴롭혀 '사막의 여우(the Desert Fox)'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1942년 원수로 승진했으나, 10월 알 알라메인을 침범, B.L.몽고메리가 지휘하는 영국군에 패하였고, 결국 북아프리카에서 철퇴, 그 뒤는 서부전선의 지휘를 맡았다. 1944년 독일 방위군 총사령관으로 작전지휘 중 부상, 병원에서 요양중에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참여,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자살하였다고 한다.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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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 - 브라질, 공화국 수립
[역사 속의 인물] 브라질 초대 대통령 폰세카 전 세계에 축구의 나라로 각인된 브라질. 1500년 포르투갈의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상륙했을 때에는 남미 대륙 일부가 아니라 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베라크루즈(진정한 십자가) 섬’이라고 이름 붙였다. 포르투갈은 이곳을 식민지로 삼았고 마누엘 1세 때 성 십자가의 땅이라는 의미에서 ‘산타크루즈’로 개명했으나 유럽에서는 ‘브라질’이라는 이름을 더 선호했다. 이 이름은 브라질 나무에서 유래했다. 붉은색 염료로 쓰이는 이 나무가 유럽에 대거 수출되면서 유럽인들은 산타크루즈보다는 ‘브라질 땅’으로 즐겨 불렀고 16세기에 브라질로 국호가 정해졌다. 포르투갈로부터 1822년 독립한 브라질은 황제 체제로 유지되다가 1889년 오늘 군부를 장악한 폰세카에 의해 제정이 폐지되고 공화정 체제의 합중국으로 출범했다. 폰세카는 브라질 합중국의 신헌법을 제정하는 국민의회의 수반이 되었다가 1891년 2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무력을 동원, 의회에 압력을 가한 끝에 브라질 초대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부통령을 중심으로 한 문민세력의 끈질긴 저항에 못 이겨 불과 9개월 만에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최정암 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4.11.15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8273&yy=2014#axzz3JIhjU5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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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 - 미국의 화가 조지아 오키프(O'Keeffe, Georgia) 출생
오키프 [O'Keeffe, Georgia, 1887.11.15~1986.3.6] 미국의 화가. 위스콘신 주 선프레리 근처 농장에서 태어나 1904년 시카고 미술학교, 1907년 뉴욕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공부했으며 상업미술 활동을 했다. 1912~1916년에 텍사스 등의 학교와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1916년 사진작가인 앨프레드 스티글리츠가 그녀의 소묘를 보고 작품성을 인정하여 화랑 ‘291’에서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이들은 1924년 결혼하였고 스티글리츠는 그녀의 작업을 항상 격려해 주었다. 스티글리츠는 그녀를 모델로 수백 점의 연작 인물사진을 찍었다. 그후 그녀는 뉴욕과 뉴멕시코에서 살다가 1946년 스티글리츠가 죽자 뉴멕시코 사막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렸다. 작품의 주제는 주로 두개골, 짐승의 뼈, 꽃, 식물의 기관, 조개껍데기, 산 등의 자연을 확대시킨 것이다. 윤곽선이 율동적이며 자연에 대한 탐미적 경향을 보인다. 선명한 색으로 그리되 엷은 톤의 물감으로 원근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대상에 강약을 부여했다. 그녀의 그림은 생물형태적 형상에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부여하여 신비스럽고 때로는 상징적이기도 하다. 오키프는 서유럽계의 모더니즘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추상환상주의의 이미지를 개발하여 20세기 미국 미술계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했다. 후기 작품은 주로 뉴멕시코의 맑은 하늘과 사막 풍경을 그렸고 1970년에 휘트니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개최하였다. 대표작으로 《검은 붓꽃 Black Iris》(1926), 《암소의 두개골, 적, 백, 청 Cow's Skull, Red, White and Blue》(1931) 등이 있다. 자서전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fe》가 1976년 발간되었다. /naver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48/7_cafe_2007_11_15_13_04_473bc53285305)
1887 - 미국의 시인 마리안 무어(Moore, Marianne) 출생
무어 [Moore, Marianne Craig, 1887.11.15~1972.2.5] 미국의 시인. 물체의 세부에 대한 면밀하고 정확한 관찰로부터 도덕적이고 지적인 통찰을 끌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잘 다듬어진 재능을 가진 시인으로서 긴 생애 동안 동료시인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시인이며 비평가인 T. S. 엘리엇은 오랫동안 읽히는 시를 쓴 당대에 보기 드문 시인이라고 했다. 1909년 브린모어(펜실베이니아)대학 생물학과를 졸업했고, 그뒤 상업에 관한 공부를 해 펜실베이니아 주 칼라일에 있는 미국 인디언 학교에서 가르쳤다. 1921~25년 뉴욕 공립도서관에서 일했다. 대표적인 신예시인으로 이미 유명하게 된 1925년에는 영향력 있는 문예지 〈다이얼 The Dial〉의 편집실무자가 되어 1929년 이 잡지가 종간될 때까지 일했다. 1921년 처음으로 펴낸 〈시집 Poems〉은 런던의 에고이스트 출판사에서 나왔다. 무어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출판한 〈관찰 Observations〉(1924)로 다이얼상(Dial Award)을 받았다. 이들 초기 시집에서는 이미 그녀의 간결한 문체가 엿보이며, 이미지들을 짜맞추어 놀랍고도 논리적으로 당연한 결론에 이르도록 하는 창조력이 드러난다. 이 두 시집에는 〈스팀 롤러에게 To a Steam Roller〉·〈물고기 The Fish〉·〈내가 그림을 살 때 When I Buy Pictures〉·〈피터 Peter〉·〈헤라클레스의 노동 The Labors of Hercules〉·〈시 Poetry〉 등 대표적 시 여러 편이 실려 있다. 〈시〉에서 무어는, 시인은 상상의 정원을 보여주되 거기에는 진짜 두꺼비가 들어 있어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1919년부터는 뉴욕의 브루클린에 살면서 시와 비평에 몰두해 미국과 영국의 많은 평론지에 글을 싣고 여러 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시전집 Collected Poems〉은 1951년에 나왔다. 그밖에 〈라 퐁텐의 우화 The Fables of La Fontaine〉(1954)를 번역했고, 논평서 〈편애 Predilections〉(1955)·〈특질과 기교 Idiosyncrasy and Technique:Two Lectures〉(1958)를 썼다. 그녀에 관한 비평적 연구로는 로런스 스테플턴이 쓴 〈매리앤 무어 Marianne Moore〉(1978)가 있다. /브리태니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50/16_cafe_2007_11_15_13_04_473bc541b2266)
1876 - 프랑스의 시인 안나 드 노아유(Noailles, Anna de) 출생
노아유 [Noailles, Anna-Elisabeth Mathieu de, 1876.11.15~1933.4.30] 정식 이름은 Anna-Élisabeth de Noailles, princesse Brancovan, comtesse Mathieu. 프랑스의 시인. 제1차 세계대전 이전 프랑스 문단의 대표적 문인이었다. 아버지가 루마니아의 왕자이고, 외할아버지는 터키의 파샤이다. 프랑스인 백작과 혼인하기 훨씬 이전부터 프랑스에서 생활하면서 프랑스어로 작품을 썼다. 노아유와 우정을 나눈 문인들 가운데는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와 콜레트, 시인 폴 발레리와 장 콕토가 있다. 당대의 문인들치고 그녀의 문학 살롱에서 그녀가 보여준 능란한 화술에 매료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시집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마음 Le Coeur innombrable〉(1901)·〈광채 Les Éblouissements〉(1907)·〈고통이라는 명예 L'Honneur de souffrir〉(1927) 등이 있는데, 모두 자연에 대한 감각적인 애정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노아유의 서정주의 시풍은 19세기 낭만주의 시인 알프레드 드 비니, 알퐁스 드 라마르틴의 주제와 맥이 닿아 있다. 후기 작품에는 쇠락해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육신에 대한 불안감이 짙게 배어 있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벨기에 왕립 프랑스어 문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51/14_cafe_2007_11_15_13_06_473bc5b9bb6eb)
1874 - 덴마크의 생리학자 아우구스트 크로그(Krogh, August) 출생
크로그 [Krogh, (Schack) August (Steenberg), 1874.11.15~1949.9.13] 덴마크의 생리학자. 가느다란 모세혈관의 운동 조절 메커니즘을 발견한 공로로 1920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다. 그는 조직이 혈액을 요구하는 정도에 따라 모세혈관이 수축되거나 확장된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예를 들면 활동적인 근육은 덜 활동적인 근육보다 확장된 모세혈관을 더 많이 갖고 있다. 조직으로의 산소 공급을 조절하는 순환 메커니즘에 관한 연구는 그가 기본적인 관심을 가지고, 부인인 마리와 공동으로 연구하던 주제인 호흡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크로그는 코펜하겐대학교에서 동물학을 연구했고 그곳에서 1916년 동물생리학 교수가 되었다. 1906년 그는 〈폐에서의 가스 교환 메커니즘 Mechanism of Gas Exchange in Lungs〉에 기술한 연구논문으로 빈 과학 아카데미로부터 상을 받았다. 그외의 저서로 〈동물과 인간의 호흡 The Respiratory Exchange of Animals and Man〉(1916)·〈모세혈관의 해부와 생리 The Anatomy and Physiology of Capillaries〉(1922)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49/1_cafe_2007_11_15_13_06_473bc5cb0b5fa)
1871 - 오스트리아 식물학자 체르마크 폰 자이제네크(Tschermak von Seysenegg, Erich) 출생 체르마크 폰 자이제네크 [Tschermak von Seysenegg, Erich, 1871.11.15~1962.10.11] 오스트리아의 식물학자. 완두 실험에 관한 멘델의 고전적 논문을 발견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작센 프라이베르크 근처 로트포어베르크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빈에서의 학업을 중단했다. 1896년 할레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몇 군데의 품종개량소에서 일했고, 1901년 빈에 있는 농업 아카데미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실질적으로 그곳에서 교수 생활의 대부분을 보냈다. 1898년 봄에 겐트 식물원에서 완두 품종개량 실험을 시작했다. 다음해 빈 근처 에슬링겐의 임피리얼재단(Imperial Family's Foundation)에 근무하면서, 자신의 정원에서 완두에 대한 실험을 계속했다. 그는 실험결과를 저술할 때 멘델의 작업을 참조했으며, 빈대학교 도서관에서 그에게 보낸 멘델의 논문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멘델의 완두 실험이 자신의 실험과 일치하며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실험보다 잘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같은 해인 1900년에 멘델의 발견을 발표했으며, H. 드 프리스와 C. E. 코렌스도 멘델의 논문을 발견하여 발표했다. 뛰어난 식물 유전학자인 체르마크는 멘델의 유전법칙을 한나카긴(Hanna-Kargyn)보리, 밀과 호밀의 잡종들, 속성재배할 수 있고 질병에 강한 귀리 잡종 같은 새로운 식물의 개발에 적용했다. /브리태니커
1864 - 남북전쟁 : 셔먼 대서양 진격 개시, 총력전의 시작 <오늘의역사> [11월 15일] 1864년, 셔먼 대서양 진격 개시. 총력전의 시작 1864년 11월 15일, 남북전쟁 중 애틀랜타를 점령한 북군 미시시피 군관구 사령관 윌리엄 테쿰세 셔먼 소장은 6만 2천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애틀랜타를 떠나 조지아 주를 유린하며 대서양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보통 "셔먼의 대서양 진격" 또는 "바다로 진격"(Sherman's March to the Sea)이라고 불리는 이 전역은 남군이 아니라 남부동맹 후방을 파괴하여 남부동맹의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를 파괴할 목적으로 수행된 것이다. 이미 자원 및 인력이 고갈되면서 전쟁에서 밀리고 있던 남부동맹은 셔먼의 이번 작전으로 완전히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했고, 결국 1865년 4월에 북버지니아군 사령관 로버트 리가 애포매톡스에서 그랜트에게 항복하면서 전쟁은 끝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부터 전쟁은 최전선의 군대 간에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국의 후방에 위치한 산업 시설, 도로 및 교량, 철도망, 통신망 등을 파괴하여 상대방의 전쟁 수행 능력을 소멸시키는 전략을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커벤트리 폭격이나 함부르크 폭격,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처럼 민간인들까지 목표로 한 무차별 공습을 단행하는 것도 적국의 전쟁 수행 의지를 떨어뜨리는 목적으로 수행된 것이다. 셔먼이 1864년 ~ 1865년 초까지 조지아 주와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리니아 주를 휩쓴 이 작전은 현대전의 전략을 서양인들에게 19세기 중반에 제시한 것이다. 동양에서는 사실 유목민족 계열이 한반도 침략 시에 이러한 전략을 구사한 바 있지만 (몽골군이 강화도를 포기하고, 대신에 고려 각지를 돌며 약탈하고 유린하면서 고려 조정의 환도를 요구한 것), 현대화된 군사 전략으로 정립된 것은 셔먼의 이 원정이다. 셔먼이 예하 부대에 내린 Special Field Order 120(1864년 11월 9일)에는 다음과 같이 명령이 포함되어 있다. IV. 각 부대는 행군 도중 자유롭게 약탈하라 V. 각 군단 지휘관들에게 창고, 집, 면화 등을 자유롭게 파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VI. 기병대 및 포병대는 말, 당나귀, 그리고 마차를 자유롭게 무제한으로 약탈해도 좋다. 셔먼은 북부 후방으로부터 병참 지원은 포기하고 병사들에게 20일치 식량을 준비시켰을 뿐이다.120호 명령서를 통해 셔먼은 나머지 필요한 식량 및 물건은 모두 진격 도중에 약탈(현지조달)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병사들은 명령서에서 허용한 범위보다 더 많이 약탈하고 더 많이 파괴했다. 셔먼은 부하들의 파괴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부하들의 증오심은 내가 목적했던 반란군의 격파, 남부 국민들의 오만을 겸손으로 바꾸는 일, 그리고 그들의 공포심을 자극하여 우리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셔먼은 본 작전의 의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지금 적군과 싸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시민들과도 전쟁을 하고 있다. ...(중략)... 그들 모두에게 전쟁의 쓰디슨 맛을 보게 해야 한다. ...(중략)... 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 남부인들의 전쟁 역량도 아울러 파괴해야 한다. 공장, 철도, 농장 나아가 그들의 저항의까지도 분쇄해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 결국 셔먼은 현대전의 기본 개념을 분명히 정립했으며, 또한 실천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남부는 그런 셔먼에 대항할 수단을 갖지 못했다. 애틀랜타 방위와 애틀랜타에서 쫓겨 달아났던 남군의 후드에 대한 대책은 펩 토머스에게 6만의 병력을 주어 남기는 것으로 대책을 마무리했다. 후드 정도는 토마스가 처리하면 될 인물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12월에 펩 토마스는 친구이자 상관인 셔먼의 신뢰에 대하여 후드군을 전멸시켜서 보답했다. 셔먼은 6만 2천의 병력을 4개 군단으로 편성하고, 1개 기병사단으로 2개 군단씩 편성된 좌우익 부대를 지원하도록 했다. 셔먼에 대한 호위는 노예주인 앨라배마 주 출신이면서도 연방주의자들로서 북군에 가담한 1 앨라배머 기병연대(1st Alabama Cavalry Regiment)가 맡았다. 셔먼의 목표는 조지아 주를 가로질러 조지아 주 동남부 해안가이자 서배너 강 하구에 위치한 서배너(Savannah) 라는 항구도시였다. 이곳을 점령하면 바다는 이미 북군 해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현지조달에 의존할 필요가 없을 뿐더러 미시시피 강을 경계로 동서로 조각난 남부가 이제는 조지아 주를 중심으로 다시 남북으로 분단되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리고 서배너 강을 건너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로서, 셔먼은 거기서 다시 북상하여 피터스버그에서 리를 붙잡고 있는 그랜트와 합류할 계획까지 세웠다. 행군 거리는 총 480km였다. 애틀랜타를 점령하며 사기가 드높았던 잘 무장된 북군 62,000명을 상대할 남군의 전력은 형편없었다. 애틀랜타에서 셔면에게 쫓겨 달아난 후드는 4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오히려 북쪽 테네시 주로 침공했다. 셔먼을 맞아 싸울 부대라고는 조지아 주 민병대 3000여명과 클래이튼 카운티(Clayton County)의 러브조이(Lovejoy)에 배치된 13,000여명, 휠러 휘하 기병대 10,000여명이 전부였다. 그나마 민병대는 대부분 어린 소년과 노인들로 구성되었다. 서배너를 목표로 진격하는 셔먼 휘하 4개 군단은 진격로 상에 위치한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약탈하거나 불태워버렸다. 북군 진격로 주변은 완전히 황폐화되었다. 셔먼은 부하들에게 "최소 10일 분의 식량을 현지 조달"하도록 하고, "민가에 불법침입해서는 안된다"고 명령했지만, 실제 병사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뭐든지 약탈했다. 이를 막아야 할 남군은 곳곳에서 저항했으나 서면군의 진격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11월 22일 조지아 주 민병대와 전투가 벌어졌지만, 북군은 큰 피해없이 민병대를 물리쳤고, 이후 이따끔 휠러 기병대가 공격해왔으나 역시 셔먼군의 진격을 막지는 못했다. 12월 21일, 셔먼군은 드디어 서배너를 점령했다. 이로써 셔먼은 목표했던 점령지를 장악했지만, 단순히 항구도시 하나를 점령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셔먼군의 진격을 보면서 남부인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깨달았다. 셔먼군이 마음껏 남부동맹 후방 한복판에서 남부를 약탈하고 파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막을 남군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남부동맹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는 2월 6일 의회연설에서 결코 굴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서배너에 주둔하고 있던 셔먼은 데이비스의 발언을 듣고 이번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유린하기로 결정했다. 1865년 2월 21일, 셔먼군은 사우스캐롤라이나로 진격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조지아 주보다 더 심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가 남북전쟁을 직접 일으킨 당사자였기 때문이다.(주:남북전쟁이 시작된 섬터 요새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 항 앞바다에 위치한 요새로, 섬터요새를 포격한 부대도 사우스캐롤라이나 군이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도 조지아에서처럼 셔먼을 저지할 남군이 없었다. 셔먼을 저지해야 할 남군 사령관 조셉 존스턴(Joseph Jonstern) 장군은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고작 2만여명의 병력에 불과했다. 존스턴은 3월 19일에 북군 좌익을 공격했지만 증강된 북군에 패하여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셔먼은 남군을 무시하고 북쪽으로 계속 진군했다. 셔먼군의 진격에 위협받은 로버트 리(Robert Lee)는 결국 몇 달째 식량도 떨어진 채 버텨오던 피터스버그에서 4월 초 철수해야 했다. 그랜트는 지체없이 리의 북버지니아군을 공격했고, 애포매톡스까지 쫓겨갔다가 그랜트에게 항복했다. 김종현 (sepp@ntmnews.co.kr) 기자 /엔티엠뉴스 2009년11월14일 21시50분 http://www.ntmnews.co.kr/detail.php?number=1971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50/13_cafe_2007_11_15_13_06_473bc5dc602f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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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 - 독일의 극작가, 소설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Hauptmann, Gerhart) 출생
하우프트만 [Hauptmann, Gerhart, 1862.11.15~1946.6.6] [오늘속으로(11월15일)] 하우프트만 1862년 11월15일 독일 극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이 슐레지엔의 오버잘츠브룬에서 태어났다. 1946년 몰(沒). 소설가를 겸했던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처럼, 그의 형 카를 하우프트만도 극작가 겸 소설가였다. 이 형제는둘 다 예나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한 뒤 자연주의를 문학적 출발점으로삼았다. 지적으로는 형이 더 뛰어났으나, 문학적 재능은 동생 쪽이 훨씬더 컸다. 그 점에서 하우프트만 형제는 소설가 하인리히 만, 토마스 만 형제와 닮은 데가 있었다. 동생 만이 1929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듯, 동생 하우프트만도 1912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형들은, 독일 문학사에 제 나름대로 이름을 새기기는 했으나, 동생들 만한 명성을 얻지 못했다.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초기 희곡 ‘쓸쓸한 사람들’(1890)에서 아내와 멀어지며 젊은 여대생에 이끌리는 주인공 요하네스 포켈라트의 모델이 형 카를이다.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은 독일 연극사에서 자연주의의 완성자이자 그 초극자로 평가된다. 그가 자연주의에서 상징주의로 넘어가는 단계에 놓인 작품이 ‘한넬레의 승천’(1893)이다. 폭력을 일삼는 알코올중독자 의붓아버지에 대한 공포로 자살로 치닫는 한넬레 마테른이라는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이 작품은 내용적으로는 초기 작품들의 자연주의적 주제를 잇고 있으나 몽환적 수법을 급진적으로 채용한 그 형식은 상징주의적이라 할 만하다.이 작품의 앞에는 직조공들의 비참한 삶과 폭동을 그려 사회주의자들을 열광하게 한 ‘직조공들’(1892) 같은 자연주의적 문제극들이 있고, 그 뒤에는 주종(鑄鍾)의 명인이 숲속에서 겪는 동화적 사건들을 그린 ‘가라앉은종’(1896) 따위의 낭만적 상징극들이 있다. 하우프트만의 본령이 어느 쪽에 있든, 그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극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고종석 /한국일보 2003-11-14 16:3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3&oid=038&aid=0000207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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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rtugal, 1000 Escudos (1967, Banknote) (출처 - 카페 화여자) 1853 - 포르투갈의 여왕 마리아 2세(Maria II) 사망 마리아 2세 [Maria II, 1819.4.4~1853.11.15]
포르투갈의 여왕(1834~53 재위). 아버지는 브라질의 페드루 1세이자 포르투갈의 페드루 4세로, 부왕(父王)에게서 두 나라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포르투갈 왕위는 조건부로 받은 것이었다(1826). 그는 동생 미겔이 자신이 만든 헌법헌장을 받아들이고 실시할 것이라 믿고 딸 마리아와 결혼시키려고 계획했으나 미겔은 권력을 잡은 후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했다. 페드루는 브라질 제국 왕위에서 물러난(1831) 뒤에야 비로소 유럽으로 향할 수 있었고 아조레스 제도의 테르세이라 섬을 점령하고, 마리아의 이름으로 본토를 정복할 원정대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1834년 페드루는 포르투를 손에 넣고 리스본을 점령했으며 미겔은 망명했다. 페드루가 1834년 9월에 죽은 뒤 마리아가 14세의 나이에 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녀는 결혼한 직후에 남편과 사별했으나 작센코부르크고타의 페르디난트와 재혼했고 11명의 자녀를 두었다. 마리아는 부왕의 헌장을 왕위의 보증서로 여겨 헌장의 옹호자인 살다냐 공작에게 의존했다. 이때문에 여왕이 왕위에 있는 동안에는 헌장에 따른 입헌군주국의 원칙을 지지하는 온건·보수파와, 더욱 민주주의적인 그전의 헌법을 부활시키고자 노력했던 민주·급진파 사이의 싸움이 계속 벌어졌다. 이러한 갈등은 마침내 살다냐 공작이 '재건'(Regeneration)이라는 개혁운동의 지도자로서 추가법령(1852)을 발표해 헌장을 수정함으로써 끝났다. 이렇게 수정된 헌법은 1910년까지 포르투갈 헌법으로 존속했다. 마리아는 자기가 정성을 다해 교육시킨 맏아들 페드루 5세에게 왕위를 넘겨주었고, 출산중에 죽었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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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 - 멕시코의 소설가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Fernández de Lizardi, José Joaquín) 출생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 [Fernández de Lizardi, José Joaquín, 1776.11.15~1827.6.21] 멕시코의 소설가, 편집자, 팜플렛 저자. 멕시코 독립 운동에서 활약한 주요문인이었다. 주로 독학으로 공부한 페르난데스 데 리사르디는 '멕시코 사상가'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는데, 이는 그가 창간한 급진적인 신문 〈펜사도르 멕시카노 El pensador mexicano〉(1812)에서 차용한 이름이었다. 군주제와 교황권을 모두 경멸했기 때문에 투옥·파문을 당했다. 스페인계 중앙 아메리카 최초의 악한소설 〈욕심쟁이 앵무새 El periquillo sarniento〉(1816)는 19세기초 멕시코 사회를 다채로운 이야기를 통해 묘사하고 있으며,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과 루소의 교육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키호티타 양과 그녀의 사촌 La Quijotita y su prima〉(1819)·〈슬픈 밤과 행복한 낮들 Las noches tristes y días alegres〉(1823) 등도 썼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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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zech, 200 Korun (Banknote) 1670 - 모라비아(체코)의 교육자 코메니우스(Comenius, Johann Amos) 사망 코메니우스 [Comenius, Johann Amos, 1592.3.28~1670.11.15] 모라비아(Moravia, 체코)의 교육자.
헤르보른대학교와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등에서 공부한 다음 고국으로 돌아가, 형제교단(Unitas fratrum)이 설립한 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30년전쟁(1618~1648)으로 합스브루크 왕가의 지배하에 들어가자 합스부르그의 왕인 페르디난드 2세의 체포를 피하여 망명, 1625년 이후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였으며, 영국·스웨덴·폴란드 등 여러 신교 국가에 초청되어 평화를 위한 교육의 구상에 의거한 학교개혁을 실천하는 한편 유럽의 평화실현구상을 발표하였다. 30년전쟁 초기에는 절망적인 현실부정사상을 지니고 당시의 정치·학문·종교를 모두 부정하였으나, 원리적으로 인간과 사회를 다시 새롭게 포착하여 청소년교육과 민중계몽의 방법을 범지(汎知:pansophia)로서 체계화하였다. 그는 저서 《대교수학(大敎授學) Didactica magna》(1657)에서, 교육을 인간 생산의 위치에 놓고 고유한 생산방법을 전개하였다. 당시 유럽에서 그의 이름은 저서 《열려진 언어의 문 Janua linguarum reserata》(1631)과, 범지의 구상에 근거한 유아용 교과서인 《가감계도표시 Orbis sensualium Pictus》(1658)로 유명하였다. 유아교육에서 성인교육까지 이르는 일관된 교육구상, 단선적 학제안, 남녀공학의 원리 그리고 아카데미의 구상 등은 그 후의 교육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교육방법에서의 직관주의와 언어의 결합, 교육내용에서의 실학주의, 전체 민중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제도, 그리고 교사의 전문성 등에 관한 선진적인 구상은 현재의 교육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57년에 UNESCO가 중심이 되어 그의 사상을 널리 보급시켰으며, 그의 조국에서는 대표적 저작인 《교육학총저작집 Opera didactica omnia》(1657)의 출판 300년을 기념하여, 이 책의 사진판을 공간하였다. /naver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file/pds51/11_cafe_2007_11_15_13_08_473bc61e9818f)
1630 -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Kepler, Johannes) 사망
케플러 [Kepler, Johannes, 1571.12.27~1630.11.15]
독일 천문학자 케플러 사망 1630년 11월 15일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59세의 나이로 길에서 급사했다. 그는 1571년 독일 출생으로 4세 때에 천연두를 앓는 등 육체적인 병약함과 경제적인 빈곤 속에서 자랐다. 17세에 아버지가 죽고난 이듬해 튀빙겐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고 1591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신학에 싫증을 느끼고, M.메스트린 교수로부터 소개받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감동되어 천문학으로 전향했다. 천문학사에서 케플러라는 이름은 행성 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3법칙`으로 유명하다. `케플러의 3법칙`은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타원운동을 한다든지 움직이는 속도는 면적과 비례한다든지 하는 하늘의 법도를 정확히 밝혀 낸 것이다. 제1법칙은 행성은 태양을 하나의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그리며 공전한다는 것이다. 제2법칙은 행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동경(動徑)은 같은 시간에 같은 넓이를 휩쓸며 지난다는 것. 즉, 행성의 속도와 그 동경이 그리는 넓이의 곱은 항상 일정하다는 것이다. 제3법칙은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공전궤도의 긴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이다. 이로써 케플러는 그때까지의 천문학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지금도 이 `케플러의 3법칙`은 그대로 쓰이고 있다. /조선
[오늘속으로(11월15일)] 케플러
1630년 11월15일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슐레지엔의 한길에서급사했다. 향년 59세. 천문학사에서 케플러라는 이름은 행성 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3법칙으로불멸의 자리를얻었다. 제1법칙은 행성은 태양을 하나의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그리며 공전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타원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케플러 이전에는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행성의 궤도가 원이라고 믿고 있었다. 제2법칙은 행성과 태양을 잇는 선이 단위 시간에 휩쓸며 지나가는 면적은 늘 같다는것이다. 다시 말해서 행성이 태양에 가까이 접근해 있을 때 그 공전 속도는 행성이 태양에서 멀리 떨어져있을 때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이것을 동일면적의법칙이라고 부른다. 제3법칙은 행성의 공전주기를 제곱한 값은 공전 궤도의 긴 반지름을 세제곱한 수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조화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제1법칙과 제2법칙은 주로 화성을 관측한 자료에 기초해 확립한 것으로 1609년에 발표됐고, 제3법칙은 10년 뒤에 발표됐다. 케플러가 이 법칙을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덴마크 출신의 스승 티코 브라헤가 평생 동안 행성을 관측해 남겨놓은 자료 덕이다. 브라헤는 천동설을 신봉한 거의 마지막 천문학자였는데, 그가 행성의 움직임을 측정하기시작한 것도 천동설을 옹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젊은 시절부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믿고 있던케플러는 스승의 자료를 이용해서 천동설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탐욕스럽고 질투심 많았던 브라헤는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조수로 고용한케플러가 자신보다 더 재능 있는 천문학자라는 것을 알게 되자, 중요한 관측 자료들을 다루지 못하도록 했다. 케플러는 브라헤가 죽은 뒤에야 유족을 설득해서스승의 자료를 넘겨받을수 있었다. 고종석편집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1-11-14 20:4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4&oid=038&aid=0000111244
1533 -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 잉카제국 침공
[어제의 오늘]1533년 스페인 정복자 피사로, 잉카제국 침공 ㆍ페루인들에겐 ‘무자비한 살인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유럽의 시선은 남아메리카로 향했다. 전설 속 ‘황금의 땅’을 찾기 위해서였다. 첫 ‘잭팟’을 터트린 것은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였다. 코르테스는 1519년 중앙아메리카 유카탄반도, 지금의 멕시코에 상륙했다. 아즈테카제국의 수도 테노크티틀란은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황금과 비취로 장식된 궁전은 1년 만에 스페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아즈테카인들은 살아있는 사람의 심장을 제물로 바칠 만큼 담대했지만, 말과 총으로 무장한 스페인 군대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코르테스의 ‘대성공’은 스페인령 파나마에 머물고 있던 ‘정복자’들을 자극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남쪽 저 멀리 황금으로 가득한 ‘비루’라는 땅이 ‘피루’ 강변에 있다는 소문을 피사로는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가 지금은 ‘페루’로 불리는 잉카제국에 발을 디딘 것은 1532년, 세 번째 원정에서였다. 그해 11월15일 피사로는 잉카제국의 황제 아타우알파를 만났다. 스페인군이 건넨 성경을 아타우알파가 바닥에 던지자 전투가 시작됐다. 피사로는 보병 106명과 기병 62명으로 8만명의 잉카 군대를 무찔렀다. 포로로 잡힌 아타우알파는 피사로의 요구대로 방 하나를 금으로, 방 둘을 은으로 채워 보석금으로 건넸지만 몇 달 뒤 사형됐다. 기독교로 개종하면 화형 대신 교수형으로 바꿔주겠다는 제안에, 아타우알파는 세례를 받으며 목이 졸려 죽어갔다. 잉카인들은 시신을 불태우면 영혼도 사라진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꼭 1년 뒤인 이듬해 11월15일 피사로는 잉카제국 수도 쿠스코를 침공했다. 피사로는 쿠스코의 화려함과 번영에 거듭 감탄했지만, 몇 년 뒤 교통이 편리한 해안도시 리마로 수도를 옮겼다. 그는 1541년 리마의 개인 궁전에서 저녁 식사 중 살해됐다. 황금 배분에 불만을 품은 동료들의 소행이었다. 1977년 리마 대성당 보수 공사 중 ‘피사로의 유골’이라고 서명된 금속제 상자가 발견됐다. 상자에 담긴 인간의 두개골에서는 여러 차례 칼날에 긁힌 자국이 발견됐다. 얼굴의 형체도 초상화 속 피사로와 흡사했다. 피사로는 코르테스와 함께 위대한 ‘정복자’로 스페인 역사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페루인들은 그를 ‘무자비한 살인자’로 기억한다. 리마 한가운데 있던 피사로의 기마상은 2003년 주민들의 요구로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로 옮겨졌다. 최명애 기자 glaukus@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11-14 19:3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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