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나들이 겸 남한산성에 오르다
남한산성에 오르기로 결심한 건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초가을이었다. 여름처럼 후덥지근한 날씨에 남한산성을 찾으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말 그대로 산에 지은 성이라 산성이라 남한산성을 더운 날씨에 보려면 땀 흘릴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남한산성을 보러 간 건, 당시 지방에서 살던 터라 서울에 올라오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성남에 살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평일에도 갈 수 있는데 당시엔 왜 그렇게 고생을 했을까 웃음이 나온다.
남한산성에 오르려면 산성역으로 가는 것이 편하다. 산성역에서 버스를 타면 남한산성 내 산성리라는 마을까지 곧장 연결된다. 산성역은 경기도 성남시이며, 산성리는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다. 남한산성이 감싸고 있는 산줄기가 성남과 광주의 경계가 되지만, 같은 경기도라 그런지 성남시와 광주시가 남한산성을 두고 싸우는 일은 보지 못 했다.
남한산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음에도 주변 지역이 서울과 가까워 개발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서울의 마지막 개발 지역이라고 위례를 개발한 것도 어이가 없지만 옆동네 하남도 남한산성의 계곡을 따라 개발 계획을 확정 지었다. 이제 남한산성에서 옛 도성 한양을 바라보며 인조가 무릎 꿇었을 평원을 추측해 보는 재미는 더 이상 즐길 수 없다. 위례의 높은 건물이 시야를 가로막아 엄청난 수의 청나라 군이 산성 아래를 포위해 인조의 항복을 기다리는 장면을 상상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야기 28 -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극동아시아 여러 지역의 영향을 바탕으로 다양한 군사 방어 기술을 종합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조선왕조의 비상시 임시 수도로서, 한국의 독립성 및 한국 역사상 다양한 종교·철학이 조화롭게 공존해온 가치를 상징하는 유산이다.
동 유산은 본성(한봉성과 봉함성을 포함)과 신남성 (동서 돈대)으로 구성된 연속 유산으로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동아시아 국가들 간 축성술과 도시 계획이 상호 교류한 증거이다. 또한 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 단계와 무기 체계의 변화상을 잘 보여주며 지금까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살아있는 유산으로서 가치를 보유한다.
남한산성은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지형적으로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한 곳이다. 남한산성은 둘레 12km에 이르며 중심 도시가 입지 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분지이기 때문에 백성과 함께 왕조가 대피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였다.
남한산성은 7세기 초에 처음 만들어져 여러 차례 재건되었으며, 특히 17세기 청의 공격에 대비해 크게 중건된 바 있다. 남한산성은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수용하면서 서양식 무기 도입에 따른 성곽 축조 기술의 변화를 종합한 군사 방어기술의 개념을 집대성하고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1592~1598)과 연이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청과의 전쟁(1627-1637)등을 겪으며 일본의 아주치-모모야마 시대, 중국의 명나라, 청나라 시대와 광범위하게 상호 교류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새로운 화포와 무기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고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산성을 지속적으로 증·개축을 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남한산성은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동아시아 국가들 간 축성술과 도시 계획술을 종합적으로 구현하게 되었다.
남한산성 둘레길
남한산성에서 반드시 해야 할 것은 둘레길을 따라 걷는 것이다. 둘레길을 걸으려면 버스를 타고 산성리에 도착해 임시 궁궐로 사용되었던 남한산성 행궁부터 보는 것이 좋다. 남한산성이 천혜의 요새가 될 수 있었던 걸 더 잘 느끼고 싶다면 산성역에서 등산을 해보는 것도 괜찮다. 산성역과 가까운 곳에 남한산성 유원지가 있으며 이곳에서 임도를 따라가면 인조가 대피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남문을 만난다.
한양도성과 마찬가지로 남한산성 또한 남문인 지하문이 정문이다. 인조는 이 문을 통해 들어와 47일 동안 항거를 하다 못 버티고 항복을 결정했다. 1637년 1월 30일에 인조는 청 태종을 욕보인 죄인이기 때문에 정문인 남문으로 나오지 못하고 서문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 날 인조가 세 번 머리를 박은 삼전도의 굴욕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잘 쓰여 있다.
인조는 예전에 한낱 오랑캐로 여겨졌던 여진족인 나라인 청나라를 무시하고 조선의 힘을 맹신하였다. 대국이라고 섬기던 명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였음에도 조선이 청나라를 물리칠 수 있다고 보았던 걸까. 청나라의 침략에 대한 대응도 한심해 강화도로 가지도 못 하고 굴욕지책으로 한겨울의 추위가 더 강한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인조와 조선의 신하들이 하찮은 명분을 내세운 덕분에 수만 명의 조선인들은 인질과 노예로 청나라로 끌려갔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남한산성의 축성기술과 아름다움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성의 아름다움만 놓고 보면 수원 화성은커녕 낙안읍성보다 못하며 성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온통 아파트로 도배된 강남 일대의 신도시들밖에 없다. 그나마 광주 쪽을 바라보면 숲으로 우거진 풍경이 나와 병자호란 당시의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다.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 왜 지정되었을까라고 유일하게 생각한 곳이 바로 남한산성이지만, 둘레길 자체는 정말 아름답다. 남문에서 시작해 30분 정도 능선을 따라 걸으면 서쪽에 위치한 한양과 강남의 들판을 볼 수 있는 수어장대가 나온다. 보물로 지정된 수어장대는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아름답다. 추운 겨울에 조선의 병사들은 수어장대에서 엄청난 규모의 군사를 보며 더욱더 떨고 있었을 것이다.
수어장대를 벗어나 북쪽으로 오르면 인조의 굴욕이 시작되는 서문인 우익문이 나온다. 남문에 비해 규모도 작아 가히 굴욕을 느낄 만한 문이라고 생각되었다. 원래는 수어장대에서 서문으로 이르는 길이 경치가 아주 좋지만 하필이면 내가 간 날은 날씨가 맑음에도 연무가 끼여 서울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남한산성에 다음에 꼭 와서 서울 경치를 감상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차 타고 20분이면 도착하는 지금은 갈 생각조차 잘 들지 않는다.
서문에서 동쪽 능선을 따라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북문인 전승문이 나온다. 전승문에서 계속해서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남한산의 주봉인 벌봉이 나오지만 이곳에서 발길을 남쪽으로 돌려 궁궐이 있는 산성리로 향했다.
예전에는 문화재를 보존해야 한다는 인식이 적은 데다, 남한산성 안에 이미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미관을 해치는 건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남한산성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고 난 후 세계유산센터도 생기고, 마을에 한옥들도 많이 생긴 건 긍정적인 효과라 볼 수 있다. 이제는 남한산성뿐 아니라 산성리의 이쁜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며 쉬어가고자 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수어장대와 함께 남한산성에서 반드시 봐야 할 곳은 남한산성 행궁이다. 행궁(行宮)이란 왕이 도성을 떠나 행행(行幸)할 때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전란 시, 능행 시, 휴양 등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수원 행궁, 강화 행궁, 전주 행궁, 의주 행궁, 양주 행궁, 온양행궁 등 10여 개 이상의 행궁이 있었다. 그중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인조 3년(1625) 남한산성 수축과 함께 건립되었다. 남한산성 행궁의 건립 연도는 『중정남한지(重訂南漢誌)』,『인조실록』등에 나타나는데,『중정남한지』에는 1624년 9월 착공하여 1625년 4월에 건립된 것으로, 『인조실록』에는 1625년 6월 23일에 행궁을 짓도록 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약 10년 후인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7일간 항전하게 된다. 이후 숙종․영조․정조․철종․고종이 여주에 있던 효종릉(寧陵)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남한산성 행궁은 종묘(좌전)와 사직(우실)을 두고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일반적인 행궁에 머물지 않고 유사시 임시수도의 중요한 역할을 하던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남한산성은 수어장대와 달리 보물이 아닌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는 행궁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없어졌기 때문이다. 행궁은 1998년에 발굴 조사를 시작한 뒤, 2008년에야 그 조사를 마쳤다. 행궁이 재건된 건 20세기 초에 일본이 파괴한 후 100년이 지난 2012년이었다. 일본은 당시 민비를 살해하자 분노한 의병들이 남한산성에 집결해 공격한 것을 안 뒤, 남한산성의 무기고와 화약고와 함께 행궁 또한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복원된 유적이지만 주춧돌이 잘 남아있어 원래의 모습과 크게 차이가 없다고 한다. 내행전, 외행전, 좌승당, 재덕당 등의 중심건물과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를 둘러보면 궁궐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했을 것이라 짐작이 된다. 화성의 행궁과 마찬가지로 건물의 웅장함보다는 실용성에 더 초점을 맞춘 궁궐이라 할 수 있다.
원래 계획은 남한산성 둘레길을 한 바퀴 도는 것이었지만, 연무 때문에 경치도 그다지 좋지 않아 곧장 내려가기로 했다. 원래 왔던 방향 대신 342번 국도를 따라 광주시 남한산성면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이게 크나큰 실수였다. 다시 서울로 가려면 한참이 걸렸고 덕분에 오후에 가기로 했던 곳은 한 곳도 가지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