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에 얼굴을 내민 풀잎같이 싱그러운 사람이 나에게 몇 명 있다.
내 마음속에 몇 명 그런 싱그러운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 중 한 명이 "김선영"이라는 학생이다.
지금은 중년이 되었겠지만, 내 마음속에는 30년전 단발머리의 학생으로 살아 있다.
오류여중을 나와 배화여고를 졸업한 학생으로 남아 있다.
그녀는 오류여중을 다니고, 나는 당산중을 다닐 적에,
시외버스 안에서 그녀와 처음 마주쳤을 때, 그런 현상이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줄 몰랐다.
가슴이 두근두근 쿵쿵 뛰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줄 몰랐다.
그리고, 며칠이 흐른뒤 그녀가 내 학교의 후배의 동갑내기 4촌 누나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단발머리에 동그스럼한 얼굴. 그리고, 그 눈썹과 그 눈과 그 눈빛.
나는 하나의 하늘이 열리는 것같은 착각에 빠져버렸다.
후배와의 대화 속에 머리 모양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그 때 짧은 단발머리가 좋아보이더라고 했다.
아, 그런데 그 다음날 나의 하늘은 목덜미가 파르스름하게 뵈이는 아주 짧은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내 후배를 통해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지금도 그 모습이 선연하다. 이것이 내 삶중에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단상중의 하나다.
우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았다.
아,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한 연상의 소녀을 사귀었다.
나랑 학년은 같았지만 그녀가 나보다 한 살 위였다, 나는 7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였기에.
그 연상의 소녀는 우리 어머니 친구분의 동생이었다.
나의 하늘과 연상의 연인이 오버랩된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의 하늘은 이상이었고, 연상의 소녀는 현실이었다.
연상의 소녀 張順玉이 다닌 학교는 인천에 있었는데, 교복색깔이 자주 색이었다.
그리고 머리 모양은 양쪽으로 땋아내린 쌍갈래 머리였다.
그녀의 뒷머리 모양이 예뻤었다.
어느 하루는 내가 그녀의 집에 놀러갔었다. 물론 그녀의 방에 단 둘이 있었다.
목수이신 그녀의 아버님이 손수 만드신 책장과 책상 앞에서, 나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녀는 내 등 뒤에 서 있었다.
조금은 어색한 時間이었다. 그 때, 그녀의 오른손이 내 오른 쪽 어깨 위에 얹어졌다.
나는 놀랐으나 놀라지 않은 체하였고, 그녀도 막상 내 어깨에 손을 올려 놓았으나, 부자연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것이 그녀와 나의 첫 접촉이었고, 마지막이었다.
덕수궁에서 데이트도 했지만 손목 한 번 잡지 않았었다.
그녀는 이내 내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그녀의 학교 교지에 실린 그녀의 詩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시제목이 아마 "꽃길"이었던 것 같다. 꽃길을 삶에 비유한 詩로 기억된다.
그리고, 나를 위해 준비한 빠알간 사과 한 알을 내 놓았다. 그 때까지 그렇게 빠알간 사과를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결국 그 빠알간 사과를 먹지 못했다. 그냥 우리집으로 가지고 와서, 내 책상 위에다 놓고 몇날 며칠을 두고 보았는지 모른다.
그 빠알간 사과도 나의 몇 안되는 아름다운 단상중의 하나다.
장순옥이는 나에게 노천명의 詩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와 "후회없는 삶의 하루하루가 되길 빌겠어"라는 글을 전한 쌍갈래 머리 소녀로 내 마음속에 살고 있다.
우리 어머니가 광명시장에서 순옥이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내 안부를 묻더란다. 그리고, 내 혼인날에 꼭 참석한다고 하더란다. 그 이야기를 우리 어머니에게 전해들은 것이 벌써 10여년 전의 일이다.
김선영은 나보다 한 학년 아래였다.
그러니까 이미숙의 일년 후배네.
2년간 같이 학교생활을 하면서, 나의 하늘이랑 미숙이가 배화여고 교정에서 마주친 적이 한 번쯤은 있었으리라.
이제, 나는 나의 하늘을 본 미숙이의 눈을 예뻐해야 겠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녀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후배네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후배의 방 한 쪽에 내가 이전에 본 적이 없는, 대학노트만한 흑백사진이 걸려 있었다.
사진 속에는 옛날 분들이 쓰시던 옛 대패가 명암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가 사진기로 찍어서, 직접 현상인화한 것이라고 후배가 일러주었다.
그 옛 대패의 사진도 나의 단상.
그 前에 내가 그 시절에는 흔하지 않았던 던힐 담배갑 속에, 만능기판으로는 부피가 커지기 때문에 아크릴판에 직접 구멍을 내어 패턴을 짜서 리플렉스 방식으로 만든 라디오를 후배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겉 보기에는 담배갑이고 담배갑의 뚜껑을 열면 라디오인 것이다.
그 라디오를 나의 하늘이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잘 만들었다"고 하더란다.
나도 그 대패 사진을 보고 후배에게 "멋있다"고 했다.
이것이 나와 나의 하늘과의 첫 간접대화였다.
두 번째 간접대화는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있었다.
인생의 2막이 시작되는 시절이었다.
후배와 같이 예비군 훈련을 마친 뒤, 술잔을 기울이고 나서 후배에게 말했다.
"의섭아, 나 말이다. 너네 누나 짝사랑했었다."
"짝사랑이 아냐, 페어 러브야. 선영이 누나도 형을 좋아 했어.
언제인가 한 번은 형의 소식을 묻더라고."
후배의 대답에 나는 술이 확 깼다. 그리고,가슴이 찡했다.
나의 하늘 김선영을 생각하면, 나는 옳지 않는 일들을 감히 할 수가 없다.
서로가 짝사랑이었지만, 나를 짝사랑한 소녀를 실망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 가슴속 깊은 곳의 순수의 시대에 사는 몇 안되는 사람이기에 그 얼굴을 떠올리며 감히 그릇된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를 위해 백화점에서 이 옷, 저 옷을 만지작거리며 내 옷을 고르던 손 또한 최근의 아름다운 단상이다.
그 손들을 실망시킬 수가 없는데, 나는 지금 삐딱이가 되어버렸다. 그 손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비가 내리던 며칠전, 나는 삐딱한 마음에 온종일 우울해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 김선영의 미소짓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 순간 만큼은 나는 행복속에 있었다.
아름다운 단상이 어느 순간에 천한 단상으로 변한 적이 있다.
분명 아름다운 단상이었으나, 세월은 그 단상을 여지없이 추하게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세월은 순수 그대로인데 우리가 변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우리는 말없는 세월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인가, 내가 이 삶을 마감할 때, 몇 안되는 아름다운 단상이 떠오를 것이다.
단말머리 소녀, 나를 위해 새벽녘에 짚불을 놓아 주신 아버님, 빠알간 사과, 그리고 그 손들...
이런 단상을 떠올리며, 나는 행복한 마감을 할 것이다.
첫댓글 ㅎㅎㅎ 선영이 마니마니 봤겠지.... 담부턴 상처리 눈만 봐야겠네.....
선영인 좋겠다..날 기억해 주는사람이 있을까?^^있다면 지금이라도 찾아내..키스라도 해줄텐데..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