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것이 약이 될 때가 있습니다.
또 너무 알면 병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글 쓰는 ‘분’들에게는 ‘골치 아픈’ 영역입니다.
이왕지사 아픈 늪에 빠진 거, 마냥 허우적거려 보는 것도
행복 아닐까요?
제2회
화자와 어조
개성론과 몰개성론
제목이 ‘개성론과 몰개성론’으로 되어 있어 말이 어렵지 사실은 화자와 시인이 동일인입니다. 시인의 개성이 그대로 화자로 투사되는 것은 개성론이고, 시인과 화자가 다른 것을 몰개성론이라 한다고 간단하게 생각하십시오.
그러나 모든 시가 시인과 화자가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의 시인이 남성의 화자를 내세운다던지, 남성의 시인이 여성의 화자를 내세운다던지, 어린아이를 내세우는 경우 등 시인과 화자를 동일하게 볼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시인의 몰개성론이라고 합니다. 해방 이후 점차 시인의 자의식이 강화되면서 화자를 시인과 는 다른 인물로 재구성하고 있는 작품이 상당히 창작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면모는 우선 여성 화자를 차용하고 있는 1920년대 중반의 김소월과 한용운의 대다수 작품에서 부터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노력 이후 점차 시에 현대성이 강화되면서, 다시 말해 시를 시인과 무관한 자율적 예술 체계로 이해하려는 형식주의적이고 몰개성적인 인식이 보편화하면서 많은 시인들이 의식적으로 자신의 삶과 시를 분리시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고정희 시인의 <지리산의 봄3-연하천 가는 길>을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고정희(高靜熙, 1948년 ~ 1991년[1])는 전남 해남에서 출생하였고,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였다. 《현대시학》에 〈연가〉가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목요시’동인으로 활동했다. 1983년 《초혼제》로 ‘대한민국문학상’을 탔다. 1991년 지리산 등반 도중 실족 사고로 작고했다.)
형님,
진나라의 충신 개자추가 있었다지요
일평생 연좌서명이나 하고 상소문만 올리다가
끝내는 역적으로 몰리고 말았다지요
모름지기 따스한 밥을 거부하고
등을 보이며,
다만 외로운 등을 보이며
갈대아우르를 떠나는 아부라함처럼
여벌 신발이나 전대도 없이
천둥벌거숭이 되어 떠났다지요
형님,
이상도 하여이다
진나라 개자추가 뜯어먹던 산나물이
연하천 가는 길에 가득 돋았습니다
곰취나물 개취나물 떡취나물 참 취나물
파랗게 새파랗게 숲길을 덮고
그가 달빛 밟으며 뿌린 피눈물
가도가도 끝없는 진달래꽃으로 피었습니다
이 시의 화자는 남성입니다. 그러므로 여성인 고정희 시인과는 동일한 인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시인은 한식의 고사에 나오는 진나라의 충신 개자추를 작품 안에 끌어들이면서 이 시의 분위기나 어조에 알맞은 남성 화자를 차용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 시인과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화자는 별개의 인물임을 우리는 설명 없이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작품이 시인의 몰개성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몰개성의 시론에서 되도록 시인과 화자를 분리하여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은 시 쓰는 과정에 객관성과 미적 거리를 획득하기 위해서입니다.
김영랑님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여러분이 너무 잘 아시는 시이니 읽는 것을 생략하겠습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여성 화자를 선택함으로써 영성의 모란과 봄과의 같은 성격을 포착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숨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에 나타난 화자 역시 시인의 개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안에서 어떠한 역할이나 개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창조된 인물입니다.
이처럼 화자를 시인과 별 개의 것으로 여기는 몰개성론의 중요한 근거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적 시인은 작품 "밖"에 있고 화자는 작품의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품 속에 존재하는 화자의 인격적 요소는 허구적인 요소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작품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화자의 기능을 살펴보겠습니다.
1)시인의 자아와 세계를 확대시켜 줍니다.
화자(퍼스나)는 시인이 쓴 가면입니다. 따라서 그 가면 뒤에 숨어있는 시인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인은 화자를 통해 다양한 인물로 확대 변용될 수 있으며, 그의 경험과 실제적 자아 세계를 폭넓게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노천명의 <남사당> 전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같이 머리를 따아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나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람프 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이 십분 굴욕되다.
산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 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씨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네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이 시는 남사당패 한 사나이가 화자로 등장하고 있지요. 따라서 노천명 시인과 화자는 별 개의 인물이며, 어떠한 유사점도 찾기 힘듭니다. 그러나 시인이 이 작품을 쓰고, 또 남사당 패의 유랑적이 삶과 거기에서 오는 한이나 슬픔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를 쓰면 이렇듯 다양한 경험을 할 수도 있고 실제적 자아의 폭을 넓힐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2)시의 화자는 소설의 서술자처럼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김준태의 <호남선>을 읽어보겠습니다.
(김준태 시인은 전남 해남 출생으로 조선대 독어교육과 졸업, 1969 <시인>에 시 <참깨를 털면서> 외 4편이 추천되어 등단. 1986 전남 문학상 수상, <목요시> 동인이다.)
기차는 가고 똥개만 남아 운다
기차는 가고 식은 팥죽만 남아 식는다
기차는 가고 시커멓게 고개를 넘는
깜부기, 깜부기의 대갈통만 남아 벗겨진다
기차는 가는데 빈 지게꾼만 어슬렁거리고
기차는 가는데 잘 배운 놈들은 떠나가는데
못 배운 누이들만 남아 샘물을 긷는데
기차는 가고 아아 기차는 영영 사라져버리고
생솔가지 저녁 연기만 허물어진 굴뚝을 뚫고 오르고
술에 취한 홀애비만 육이오의 과부를 어루만지고
농약을 마시고 죽은 머슴이 홀로 죽는다
인정 많은 형님들만 곰보딱지처럼 남아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의 무덤을 지키며
거머리 우글거린 논바닥에 꼿꼿이 서 있다.
이 시에서는 화자가 우리에게 척박하고 절망스러운 삶의 상황을 소상히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입신출세를 위해 모두다 기차를 타고 도시로 도시로 가버리고, 남은 자들은 버림
받은 것들의 절망적 삶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객관적 보도보다 실감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3)화자는 작품 안에서 일관된 모습과 목소리로 작품에 통일성을 부여합니다.
김영석의 <썩지 않는 슬픔>을 읽겠습니다.
(김영석 시인은 1945 전북 부안군 동진면 본덕리에서 출생, 1969년 경희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방화' 당선. 육군 보병 입대. 197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단식' 당선. 1981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 문학평론 '도덕의식의 사물화' 당선. 1994년 배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9년 시집 『나는 거기에 없었다』로 제4회 시와시학상 수상)
멍들거나
피흘리는 아픔은
이내 삭은 거름이 되어
단단한 삶의 옹이를 만들지만
슬픔은 결코 썩지 않는다.
옛 고향집 뒤란
살구나무 밑에
썩지 않고 묻혀 있던
돌아가신 어머니의 흰 고무신처럼
그것은
어두운 마음 어느 구석에
초승달로 걸려
오래 오래 흐린 빛을 뿌린다.
여기에 나오는 '슬픔'은 다만 추상적인 관념일 뿐이지만 화자에겐 변질되어 없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 결코 썩거나 없어질 수 없는 물질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즉 슬픔을 구체
적으로 육화시켜놓았습니다. 서로 아무 연관이 없는 사물을 같은 의미로 슬픔 안에 수용함으로 유기적인 결합과 통일감을 형성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4)화자는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 속내를 솔직하게 고백함으로써 시의 진실성을 확인시켜줍니다.
나태주님의 <보리베기>를 읽어보겠습니다.
(나태주 시인은 공주사범학교 졸업, 1945 충남 서천 출생, 1971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어 등단, 1979 제3회 흙의 문학상 수상)
어머니, 서두르시지요
따가운 햇살 퍼지기 전
이슬 마르기 전
보리를 베어야지요
종일 낫질을 해보았댔자
손바닥만 부르틀 뿐
반품삯도 나오지 않는 보리베기
빳빳하게 서서 사람을 노려보는군요
엇슥엇슥 보리를 베다보면 보리꺼럭들은
팔이며 모가지며 얼굴을
아프게 찌르는군요
어머니, 저는 보리밭에 익은 보리들처럼
빳빳하게 서서 세상을 노려볼 수 없는 것이 슬퍼요
밑동째 잘리면서도 사람을 찌르는 보리꺼럭들처럼
세상을 아프게 찌를 수 없는 것이 답답해요
어머니, 드디어
땀방울은 흘러 눈에 들면
쓰린 소금이 되는군요.
화자는 어머니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하지만 사실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마음 속의 서러움과 답답함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그의 진실 어린 목소리에 아마 쉽게 공감할 것입니다.
5)화자는 작품 안에서 배경을 묘사하는 역할을 합니다.
조정권님의 <산정묘지.1>의 일부를 보겠습니다.
(조정권(趙鼎權, 1949년~ )은 서울 출생이며, 1970년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녹원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하였으며, 시집 《비를 바라보는 일곱가지 마음의 형태》,《시편》 등을 출간했다.)
가을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山頂(산정)은
얼음을 그대로 뒤덮어쓴 채
빛을 만들고 있다
화자는 겨울산을 오르면서 바라본 얼어붙은 폭포와 계곡 바위 등을 묘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겨울과 아침이라는 시간적 배경도 함께 제시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화자는 자신을 비롯하여 시 속의 청자나 등장하는 인물,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노동자 시인 백무산님의 <에밀레 종소리> 중에서 일부를 들어 보겠습니다. 오늘 예로 든 시들은 모두 좀 어둡군요. 아무래도 어지러운 시절의 시들 같습니다.
(백무산 시인은 노동운동가로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1984년 《민중시》1집에 〈지옥선〉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88년 첫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1990년 두번째 시집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1996년 세 번째 시집 《인간의 시간》을 간행했다.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문국현 지지를 선언했다. 1989년 제1회 이산문학상, 1997년 제12회 만해문학상, 2007년 제6회 아름다운 작가상, 사단법인 한국작가회의 산하 젊은작가포럼)
용광로에서 일을 하고부터
에밀레 종소리를 듣는다
쇳물을 마주하고 다리가 후들거리며
독가스에 폐가 폐품이 되면서
우리가 만든 쇠들이 실려가서
가는 곳마다 에밀레 종소리가 되어 돌아온다
쇠들은 실려가서
또 많은 벗들의 피를 묻힌다
벗들의 살을 자르고 어디론가 실려가서 우리를 속인다
윤전기가 되어 일당 4.000원을 비웃고
라디오가 되어 한 주에 80시간을 비웃고
TV가 되어 연중무휴를 비웃는다
근육을 태워 만든 쇠들은 또 실려가서
저들의 자가용이 되고 트로피가
고층건물이 되고 비행기가 되고
총칼이 되어 우리 귓전에
에밀레 종소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제1연에선 화자 자신의 정보를 독자들에게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이라든지, 작업에 대한 내용, 그 일에 대한 그의 생각 등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2연 3연에서는 쇠가 어떤 일을 하는 사물인지 주관적, 객관적 관점에서 그 것의 쓰임에 대한 정보를 하고 있으며 아울러 근로자들이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도 객관적인 정보를 알려주고 있음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쉽고, 또 쉬운 것 같으면서도 아리송한 것이 오늘 배운 화자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배우신 것이 이론의 거의라 생각됩니다.
제3회에서 ‘화자와 어조’의 설명을 ‘시인은 마음의 조련사’로 간추려 설명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