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운 기름도시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Dubai)
아랍에미리트에서 가장 인구가 많으며 영토는 2번째로 크다. 직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이며 페르시아 만에 약 72km 정도 접해 있다. 수도인 두바이 시(市)는 아랍에미리트를 통틀어 가장 큰 도시로 두바이 토후국 북동부의 작은 만에 자리잡고 있다. 90%가 훨씬 넘는 주민이 수도인 두바이와 여기서 가까운 주택 지구에 살고 있다. 남쪽과 서쪽으로는 아부다비, 동쪽과 동북쪽으로는 샤르자 같은 토후국들에 에워싸여 있다. 두바이 본토에서 최소한 40km 이상 떨어져 있는 와디하타의 하자라인도 두바이 토후국에 속한다.
두바이 시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때는 1799년부터로 알려져 있다. 그 때 미성년이었던 두바이의 셰이크(수장)는 영국이 제안한 일반 평화 조약을 받아들여 협정을 맺었지만(1820), 표면적으로는 계속 아부다비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1833년 바니야스 족 계통의 씨족으로, 주로 진주를 채취하며 살던 알부팔라사 족이 아부다비를 떠나 두바이로 옮겨와서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이 도시를 차지했다. 그때부터 두바이는 강력한 국가가 되었으나 한편으로 옛 지배자들과 자주 불화를 겪게 되었다. 카와심 족 해적이 두바이를 손에 넣으려 했으나, 두바이의 지배자는 이웃한 수장국들끼리 서로 싸움을 붙여 계속 독립을 유지했다. 1835년 원래 트루셜스테이츠에 속했던 나머지 토후국들과 함께 영국과 해상 휴전 협정을 맺었으며 1853년 영구 해상 휴전 협정을 맺게 되었다. 1892년 맺은 단독 협정에 따라 영국의 통제를 받았으나 영국이 페르시아 만을 떠나자(1971), 두바이는 아랍에미리트를 세우는 데 주요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다른 이웃 지역과 달리 두바이의 수장들은 옛날부터 무역과 상업을 권장해왔기 때문에 20세기 초 두바이 시는 중요한 항구로 자리잡게 되었다. 많은 외국 상인(주로 인도인)이 두바이 시에 살게 되었으며 1930년대 쯤에는 진주 수출로도 이름을 떨쳤다. 최근에는 만 건너편에 있는 쌍둥이 도시로, 상업 중심지이기도 한 다이라와 함께 서구 공산품이 들어오는 주요 항구로 큰 몫을 하고 있다. 두바이는 아랍에미리트 대부분의 은행과 보험회사들이 본사를 두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66년 걸프 루피 화(貨)가 평가 절하되자, 새로이 '카타르/두바이 리얄'을 만들어 이제는 독립국이 된 카타르와 통화 단위를 통일했다가, 1973년 나머지 토후국들과 함께 전국 통화인 '디르함'을 채택해서 쓰기 시작했다. 금(金)의 거래가 자유롭기 때문에 금 수입을 제한하는 인도에 금괴를 밀수출하는 일이 흔히 있다. 여러 토후국들이 영국 보호령(~1971)으로 남아 있던 1954년, 영국은 트루셜스테이츠 전체를 관할하던 정치 기구를 샤르자 시(市)에서 두바이 시로 옮겼다. 1961~71년까지 아부다비 지역만을 관할하는 기관이 따로 있었다.
1966년 파트(파테 또는 파타) 연안 유전이 두바이 시 바로 동쪽으로 약 120km 떨어진 페르시아 만에서 발견되었다. 두바이가 이미 유전 채유권을 내준 수역에 있던 이 유전에는 1970년대 들어 50만 배럴씩 석유를 저장할 수 있는 20층짜리 해저 탱크 3개가 설치되었다. 거꾸로 세워놓은 샴페인 잔 모양을 하고 있는 이 탱크들은 두바이의 '세 피라미드'라고 불린다. 석유 매장량(15억 배럴)은 이웃한 아부다비에 비하면 1/10도 되지 않지만, 석유 자원과 무역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두바이는 아주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알루미늄 제련소와 부수 천연 가스 분류소가 1970년대 후반 두바이 시 가까이에 생겼다. 이 도시는 전기 시설, 현대식 호텔, 통신소, 병원, 국제공항을 갖추는 등 완전히 현대식으로 변했다. 1972년 새로운 심해 항구인 라시드 항(토후 이름을 따서 지었음)이 생겼으며, 1979년에는 초대형 유조선용 건선거(乾船渠)가 완공되었다. 두바이 시는 라스알하이마 시와 아부다비 시까지 포장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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