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지역일간지에 한 병원 의무원장님의 인터뷰가 실려있는 것을 충청북도에서 최초로 소아환자응급실 도입하고 민간병원 중 최초 의료기관인증을 받은 청주성모병원의 의무원장님의 인터뷰였습니다. 환자들 사이에 ‘진료 잘하는 병원’으로 정평이 나 있는 병원이라고 합니다. 원장님의 취임소감으로 “‘가고 싶고 치료받고 싶은’ 가치 있는 병원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었는데 그의 포부대로 충청북도에서는 제일 가고 싶은 병원중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원장님은 “내원 환자가 안정감을 갖고 진료를 잘 받고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신뢰받는 의료서비스를 제공, 지역사회의 중심병원으로 우뚝 서는 게 바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인터뷰중 감동적인 내용중 하나는 의사가 되려고 결심하게된 계기였습니다. 이 원장님은 “어머니가 천식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의사의 꿈을 꾸게 됐고 그래서 전공도 감염내과(알레르기 호흡기 내과 포함)를 선택했다”고 인터뷰에서 고백했습니다.
원장님의 인터뷰에서 병원에 대한 자랑도 나왔습니다. “청주성모병원이 복건복지부로부터 의료기관인증을 받았고, 산재의료보험 의료기관 평가에서도 최우수병원으로 선정된데 이어 위암 적정성 평가 1등급, 응급의료기관 평가 지역응급의료센터 부문 9년 연속 A등급을 받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이미 의료 질적 서비스 면에선 인정을 받았다”며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우수 의료진 확보와 지속적인 첨단장비 도입, 지속적인 시설투자로 신속한 진료와 정확한 진단 등 환자에 대한 서비스 만족도를 높여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설교 전에 병원하나 광고하고 시작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아는 병원도 아니고 그냥 이런 저런 병에 대한 치료기사들을 검색하다가 하나 발견한 병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병원원장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치료를 위해 노력하는가? 얼마나 환자위주로 환자의 아픔을 해결하려고 애를 쓰는 지 진심이 비록 기사 한 단이지만 정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진정한 치료의 역사를 행하시는 것을 보면서 진정한 치료를 위해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증거하실 때에 세 가지 사역을 하셨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Teaching)교사로, 전파하시는 (Preaching) 선교사로, 병들고 약한 자를 고치시는 (Healing) 의사가 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사역은 모두 회복에 있습니다. 지식적인 회복, 영적 회복, 육적 회복... 우리 주님을 통해 우리가 온전한 인간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을 통해 치료받고 회복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문제이든, 육적인 문제이든, 깨닫지 못하고 무지해서 생긴 문제이든 우리는 우리 주님을 통해 치료의 역사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런 우리들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병을 치료받고 우리 주위의 아직 병들어 있는 사람들을 우리 주님앞에 인도하며 우리 주님을 통해 치료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첫째로, 안타까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4장 38절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사역을 하시고 시몬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들어가보니 시몬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어떤 원인으로 열이 나는 병인 줄은 알 수 없으나 성경에는 열병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 당시에는 어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증세로는 계속적인 고열이 지속될 모두 열병이라고 표현을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이 열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람들이 보여준 첫 번째 단계는 바로 ‘그를 위하여’라는 단어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병들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는 사실입니다.
서로 정반대의 두 사람이 결혼하여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부드러운 긍휼’(Tender Mercies)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술에 빠져 살아가는 맥이라는 남자 주인공과 베트남 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유복자를 낳아 기르는 젊은 미망인이 재혼하여 가정을 꾸려나가는 내용입니다. 재혼한 아내는 조용하였고 상냥하며 오래 참고 부드러운 긍휼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며 하나님께서 남편을 변화시켜 주실 것을 기대하며 참으며 살아가는 여인입니다. 영화의 스토리는 남자 주인공인 맥이 우울증의 발작과 함께 밖으로 나가 술병을 산 다음, 소형 트럭을 몰고 가는 데서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는 그날 밤 늦게 집에 돌아와, 자신을 격려하기 위해 아내가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아내에게 다가와서 말합니다. “나는 술을 샀지만 쏟아 버렸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소!” 그리고 거기서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여 부드러운 긍휼로 남편을 주님께 인도한 한 여인의 단순한 스토리의 영화입니다. 끝에서 맥은 그의 어린 의붓아들과 함께 세례를 받습니다. 부드러운 긍휼, 정의는 긍휼로 조절되고, 긍휼은 부드러움으로 싸여 있다고 영화는 설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긍휼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영화 속의 아내처럼, 우리는 우리의 요구를 줄이고 우리의 동정심을 늘려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너무도 자주 우리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그분의 부드러운 긍휼은 너무도 아름답게 그분의 주권과 그분의 공의와 그분의 거룩과 균형을 이룹니다. 우리의 허물에 대해 우리를 심판할 모든 이유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그분의 긍휼을 베푸십니다. 용서로 충만한 긍휼은 사랑으로 싸여 있습니다. 환경에 대해 고민하고 염려하며 어떻게 이 어려운 환경을 이겨낼까 아픈 사람들은 얼마나 아플까? 이 힘든 환경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0절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긍휼 없는 죄는 긍휼 없는 형벌을 받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긍휼 때문에 살면서 긍휼을 베풀지 못하고 삽니다. 차머스라는 분이 쓴 「정오의 강풍」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대강 이런 얘기입니다. 건축 기사인 피어홈은 도처에 많은 다리와 터널을 건설했습니다. 이 때문에 큰 명성을 얻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는 질병과 실패로 부인과 어린 딸을 데리고 낙향하여 삽니다. 피어홈의 이웃에 한 몰인정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이 노인은 매우 사나운 개를 기르고 있어 피어홈은 늘 위협을 느꼈습니다. 피어홈은 개가 너무 사납다고 여러 번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오히려 번번이 피어홈은 모욕만 당했습니다.
그러던 중 불행은 갑자기 닥쳐왔습니다. 그 개가 피어홈의 어린 딸을 물어 죽인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일제히 개 주인인 이 노인을 비난했습니다. 파종기가 되었지만 그 노인에게 한 톨의 곡식 종자를 주거나 팔지 않았습니다. 그 노인은 맨 밭을 간 후에 씨를 달라고 애걸하였지만 그 노인이 거리에 나오면 사람들은 냉소하였습니다. 그런 노인의 모습을 본 피어홈은 다음날 아침 일찍 광에서 자신이 쓸 씨앗 반 되를 가지고 나와서 열심히 노인의 밭에 씨를 뿌려 주었습니다. 얼마쯤 지나자 노인의 밭은 파릇파릇한 반면 피어홈의 밭은 그 일부가 아직도 빈 땅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긍휼은 원수의 밭에 좋은 씨를 뿌리도록 요구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비록 우리 자신의 밭 일부가 맨 땅으로 남겨집니다.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베푼 후에 내가 손해보는 일입니다.
시편 102편 13절입니다.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
1948년 여수, 순천사건시 좌익 학생들에 의해 손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은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동인과 동신은 예수를 버리고 전향하라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며 주님을 증거하다가 결국 총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이 순교하여 하늘의 영광을 차지하게 된 것을 감사하며 오히려 아들을 죽인 자가 멸망을 면치 못할 것을 안타까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국군에 붙잡혀 사형 직전에 있는 범인 안재선을 구 당국에 설득하여 데려다가 기르기로 했습니다.
“네 과거의 죄는 기억 안 할테니 하나님 앞에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를 믿어 훌륭한 일꾼이 되어다오. 내 죽은 두 아들이 할 일을 네가 대신해야 한다”
재선은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릴 뿐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두 아들을 죽인 자라할지라도 오히려 그가 멸망을 면치 못할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랑과 긍휼을 베풀므로 그가 변화되어지고 생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중보기도를 올리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용서의 사랑과 긍휼을 베풀므로 이 마지막 때 험한 세상에서도 따뜻한 주의 사랑이 꽃피워 많은 사람이 생명과 위로를 얻게 하시길 바랍니다.
유다서 1장 2절입니다.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치유사역의 기적은 긍휼의 마음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려면 우리가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몸에 생긴 병에 대해서도 아파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치유를 위해서도 그 아픔을 이해하고 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진정한 긍휼함으로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둘째는, 치유를 받은 자는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누가복음 4장 39절입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우리는 베드로의 장모가 언제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최소한 진정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변화를 위한 한 걸음을 내디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 하나님의 놀라운 치유의 역사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의사들도 고치기 불가능한 병을 주셨다가 그 병을 치유하시며 놀라운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따르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장모도 정말 큰 병을 얻고 죽을 위기속에서 예수님께서 등장하셔서 치유하여 주시고 그 일을 계기로 이제 예수님을 수종들고 예수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옛날 감리교 신학교를 졸업하신 유능한 목사님께서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의 친척중에 불신자인데 나라의 형편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을 지닌 사람이 있었습니다. 똑똑한 친척이 목사되는 것은 아깝다고 생각하여 이 목사님에게 출세시켜줄테니 자신을 따라 정치계에서 일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얼마동안 사회생활하다보니 믿음도 다 팔아먹고 중병에 걸렸습니다. 어떤 약을 써보고 어떤 의사를 찾아봐도 해결책이 없고 시름시름 계속 앓고 있는데 이제는 도무지 가망이 없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습니다. 홀로 계신 어머니 권사님께서 이제 병에 걸려 누워 죽을 날을 기다리는 자식을 보며 안타까워 밤잠도 자지 않고 날마다 밤새 울었습니다. 이 목사님께서는 어차피 죽을 바에는 늙은 어머니 앞에서 죽을 수는 없겠다 싶어 몸이 퉁퉁불어 드럼통같아진 몸을 이끌고 산에 올라가서 죽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산에 올라가서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나 싶어 한참을 울다가 하나님께 기도나 하고 죽자 싶어 지난 날 목사안수까지 받고 주님위해 살겠다고 하다가 하나님의 사명을 버리고 요나같이 살아온 자신을 원망하며 하나님께 편안하게 깨끗하게 죽여달라고 기도하며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그렇게 기도하는데 방언이 터지고 몸이 가뿐해지는 것을 느끼고 황홀한 기분을 경험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온 몸이 깨끗하여 졌습니다. 아픈 것이 다 사라졌습니다. 건강한 몸이 되어 산을 내려와 하나님이 맡기신 목회를 다시 시작하고 놀라운 경험을 간증하며 귀한 목회사명 잘 감당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고 감격하여 하나님앞에 돌아와 하나님이 주신 치유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건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잘 믿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7,18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예수님 당시에 열 명의 나병환자가 있어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며 치유의 놀라운 역사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을 경험한 사람중 10분의 1 즉 한 명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며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기적을 경험해도 예수님을 안 따르면 그것은 저주입니다. 병을 치유받아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그것은 멸망의 길입니다. 어쩌면 요즘 이 시대 왜 기적이 잘 안 일어나느냐 기적을 경험해도 그것으로 예수님께 영광올리기보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기적을 일으켜줘도 그것을 기적으로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기적을 보여줄 수도 없고 기적에 대한 간증도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하에 보면 이방장군 나아만이 등장합니다. 나아만장군은 그 당시 이스라엘과는 적대국이었던 수리아의 장군이었습니다. 이 장군은 갑작스럽게 발병한 나병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습니다. 왕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군대장관이 나병에 걸렸으니 나라로도 큰 위기이고 개인적으로도 큰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집에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온 여자 노예 한 명이 나아만의 부인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가면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는데, 그 선지자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문둥병이 나을 수 있을 겁니다.”
물 속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남편이 저녁이 되어서 들어오자 그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왕에게 그 얘기를 하고, 왕이 써준 친서를 받아든 채 이스라엘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이스라엘왕에게 이르러 자기의 왕이 써준 편지를 꺼내자 이스라엘 왕은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는 나라의 왕이 갑자기 편지를 보내며 그 편지를 가져온 사람의 나병을 고치라고 하니 정말 큰 일이었습니다. 그 때 한 신하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왕이시여! 그 사람을 엘리사한테 보내시지요.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는 선지자인지라 능히 그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만장군은 엘리사에게 가면서 엘리사가 자신을 극진히 대접하며 공손하게 치료하여 금방 낫게해줄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엘리사가 사는 곳에 도착했음에도 엘리사는 보이지 않고 하인 한 명이 나와 하는 말이 “나아만 장군님, 우리 선생님께서 당신의 병은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을 하면 낫는다고 전하라고 하십니다”라고 말하고는 그냥 다시 집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그러니 나아만이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정말 화가 있을대로 나서 그냥 돌아가서 자신을 이렇게 대접한 이스라엘과 전쟁이라도 하려고 돌아가려는데 한 부하가 이렇게 말합니다. “장군님, 병을 낫기 위해 더 큰 일도 시켰으면 했지 않았겠습니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담궜다가 빼는 것이 뭐가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밑져야 본전인데 한 번 해보시지요?”
그래서 나아만은 요단강으로 가서 물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합니다. 첫 번째 했는데 별 반응이 없습니다. 두 번째도 별 반응이 없습니다. 그렇게 세 번, 네 번 해도 똑같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까지 투덜대며 이렇게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라고 생각하며 계속합니다. 일곱 번째 들어갔다 나왔더니 정말 피부가 어린 아이의 피부같이 생기있게 변했습니다. 나병이 완전히 나은 것입니다. 이렇게 되고 나니 나아만 장군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열왕기하 5장 17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나아만이 이르되 그러면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놀라운 치유의 역사를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회복을 경험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다면 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명을 다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저희 가정에도 놀라운 기적의 치유를 많이 경험했습니다. 심장병이 치유되어 지고 각종 지병이 사라지고 큰 아픔의 병마가 떨쳐나가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 이렇게 시골사역, 막막한 선교지에 헌신하며 사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직 병이 있고 아픔이 있으신 분은 더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치유의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고쳐주시면 주님을 위해 이 한 몸 헌신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이런 각오로 기도할 때 놀라운 치유를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치유의 역사를 나타내실 때 마지막으로 사탄 마귀는 예수님앞에 어떤 방해도 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4장 41절입니다.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오늘 본문을 보며 느끼게 되는 것은 사탄마귀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 온 천지만물을 다스리시고 모든 병마를 떨쳐 버리도록 하시는 것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입니다.
존 라일의 글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마귀를 결코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종종 마귀에 대하여 한가로이 농담을 할 수 있는데 사실상 그것은 하나의 큰 죄악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죄수란 평소에 검사와 교수대를 우습게 여기던 사람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옥과 마귀에 대해서 경솔하게 말하는 사람은 그의 마음속이 참으로 악한 상태에 놓여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탄보다 더 강하신 분이 있음을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죄인들의 친구,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마귀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그는 십자가 위에서 개가를 부르시는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정복당할 수밖에 없었다. 마귀도 강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저보다 더 강하시기 때문에 그의 손아귀로부터 포로들을 빼앗아 그들을 묶고 있는 쇠고랑을 풀어주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탄마귀가 참 무서운 존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누구편에 서있고 어느 군대에 속해 있냐에 따라 관점이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영적전쟁은 우리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마귀를 이기는 것은 필연인데 우리가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싸우려 나서기만 하면 우리 주님께서 싸워서 이겨주시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사탄 마귀는 우리 앞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자꾸 귀신을 두려워하고 염려하니 계속 우리를 이기는 존재인 것처럼 우리에게 자꾸 찾아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람이 되면 우리에게는 영적 보호막이 생겨 어떤 사탄의 공격도 우리를 뚫지 못하게 됩니다. 그 보호막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호막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해서 우리가 영적인 능력이 생겨서 사탄이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보호막이 되어주시기 때문에 사탄마귀가 어떤 공격을 해와도 쓰러지지 않고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사탄마귀가 나타나고 영적인 유혹이 찾아와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사탄마귀를 내어쫓고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번 한 주간도 마귀를 없애버리시는 우리 주님 예수님의 권능을 의지하며 어떤 영적 전쟁에서도 승리하시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예수님께서 치료하시는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병든 자신 혹은 병들어 있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병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치료하여 주신다면 내가 주님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하여합니다. 또한 어떤 병마도 예수님의 이름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 예수님께서 고치시면 우리가 병마도 이겨내고 우리 예수님께서 나에게 가장 복된 삶을 계획해놓으셨고 승리하는 인생이 되도록 하셨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어느 누구나 영적 질병, 육적 질병등 나약한 부분이 존재합니다. 이 모든 것을 온전케 만드시며 새로운 인생으로 만들어주시는 분은 바로 우리 주님,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살아간다면 영적인 문제, 육적인 문제, 환경적인 문제, 물질적인 문제, 관계의 문제... 모든 아픔으로부터 우리 주님께서 해결해주시고 은혜의 인생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삶의 주인이라고 고백하시면서 참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