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잔타* 가는 길 / 안영희
첼로화 자귀꽃 부겐베리아
그리고 이슬 젖히는 저 이름 모를 꽃들
창 아래서 함께 했음 잠을 깬 다음에야 알고
감동한 하룻밤을 두고, 우리 실은 자동차 홀로
아우랑가바드의 첫 아침을 가를 때,
올리브 숲에서 솟는 인디아의 태양은
차마 마주 할 수 없는 자홍의 만조滿朝
지워지고 있는 서사시 읽고 가라 읽고 가라, 안타까이
시인의 이름을 부르는 이슬람 묘지의 부식하고 있는 빗돌들 흙방
문턱에 목 걸치고 염소젖을 짜는 어미
물끄러미 내다보는 먹포도 빛 눈동자
땋은 머리도 단아한 흑발의 소녀들
밀밭 첫 초록 사열하며 책을 안고 가는
아아, 시작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던가요
기원전 2500년 늙은 땅이 이슬 털며
저리 부신 또 하나 후생後生으로 태어나고 있는
이 아침 세상으로
나를 마중하고 계신가요 당신?
* 아잔타는 길이600미터에 30개나 되는 불교 동굴사원으로,
그 벽화와 조각상들은 세계 불교미술의 원류라고 함
힐던새는 집을 짓지 않는다 / 주용일
마음속의 힐던새 운다
날 때부터 집짓는 법을 모르는
그러면서 날마다 밤이 되면
내일은 집을 지어야지
내일은 집을 지어야지 운다
그 마음속 새는 내가 키웠다
몇 번의 실패한 사랑과
먹이 찾기로 부러진 어깻죽지와
숱한 어둠과의 면벽 속에서
집 지을 줄 모르고
하늘 날 줄 모르는
그 새는 내 집시의 피를 먹고 자랐다
울음은 그 새의 언어임으로
밤마다 핏빛 선율 울음 물고
내일은 집을 지어야지
집을 지어야지
히말라야시다 가지에서 힐던새 운다
* 힐던새
인도 히말라야 지방 전설상의 새 寒苦鳥라고도 함
불경에 중생이 게을러 도를 구하지 않음을 비유
- 주용일 시집 <문자들의 다비식은 따뜻하다>
내심 / 이병률
지하도 걷다가 어느 화원 앞이었다
화원이라는 말이 오랜만이어서 걸음이 느슨해지고
잘생긴 나무 화분 있어 멈추었다
희박해지는 공기 탓이었나
금방이라도 모든 죄를 고백할 듯 창백하구나, 사람들
그 나무 이름이 벵갈고무나무였지
그때 한 검은 사내가 나무 앞에 우뚝 선다
나는 조금 떨어져 서 있었기에
그에게 충분한 자리를 내줄 수 있었다
터번만 두르지 않았을 뿐
누가 봐도 그는 인도에서 가져온 오래된 침묵을
사용하고 있다
그가 넓은 나무 이파리를 만지고 만지더니
가던 길을 간다
그러고는 몇 번이고 뒤돌아본다
그도 나무도
와도 너무 와버렸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그 나무의 이름은 벵갈고무나무랬지
이번엔 나무가 사내 쪽으로 몸을 튼다
나무는 황금의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그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내의 몸에서 풍겼던 냄새 뭉치로 나무는 잠시 축축하다
햇빛이 드는 것처럼 지하도는 잠시 정신이 든다
나는 내심 벵갈의 어디에 있다
지하도 걷다가
화원 앞이었다가
내심 나는 화분에 심겨 있다
- 이병률 시집 <눈사람 여관> 2013
타지마할의 달 / 권대웅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이 있어.
갠지스 강물에서 반짝이는 햇빛과
보리수나무 위로 펄럭이던 노을
한 점 한 점 떼어와 빚은
흰빛 위에 둥근 달 한 송이.
빨강과 노랑 눈부신 물방울 같았다가
사막에 오아시스 같았다가
비가 오면
페르시아꽃처럼 투명하게 푸르러져
과거 현재 미래 모두를 피는 꽃.
행복한 눈물이었어.
이십이년 동안 한 여인에게 바쳐진
영혼의 서사시였어.
사랑을 잃은 당신에게 헌화하기 위해
오체투지로 이생을 건너오다가
무릎이 닳아 가벼워진 구름궁전이었어.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이 있으니…
22년 동안
한 여인에게 바쳐진
영혼의 서사시
사랑을 잃은
당신에게 헌화하기 위해
오체투지로
이생을 건너오다가
무릎이 닳아
가벼워진 구름궁전
‘타지마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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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왕국 가야와 아유타국의 미스테리
삼국유사에서는 아유타국을 인도의 고대왕국이라고 밝히고
있고 아유타는 인도 이름으로는 아요디아(Ayodhya)이다.
아유타국은 주위가 5천여 리, 나라의 왕도는 20여 리의
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곡식과 과일이 풍성하고 풀과
꽃들이 우거져 무성하였다. 그리고 기후가 화창하고
사람들의 풍습이 착하고 온순해 학예에 부지런했다고
한다. 이 나라의 영향력이 한때는 인도 전역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일대까지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먼 곳에서 가락국까지 올 수 있었을까?
서기 1세기 무렵에 바다는 그렇게 두렵기만한 존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 대륙의 연안을 따라 바닷길로 이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허황옥이 인도를 출발하던
음력 5월에는 인도와 한반도를 잇는 해로는 바람과 해류가
북으로 올라가는 기간이다. 즉 그 바람은 계절풍이고
해류는 리만해류이다. 그래서 어떤 큰 이상기류를 가진
태풍만 만나지 않는다면 배가 무사히 항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허왕후가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무작정
가락국에 와서 곧바로 왕후가 될 수 있었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아무런 사전교섭 없이 바로 왕후가 됐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뭔가 그 전부터 이 두 나라
간에 수많은 교섭이나 왕래가 있었기에 두 왕실의
합의에 의해 결혼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김수로왕이 죽고 난 후 가락국과
아유타국과의 교류가 갑자기 끊기게 된 점이다.
가락 태조왕릉 중수비에 있는 이수는 우리나라 그 어느
비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문양을 수놓고 있는데,
태양빛 같기도 한 것이 중앙에 있고 그 주위에는 이상한
형체의 동물같은 것들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인도 아요디아의 태양왕조를 상징하는 붉은 바탕에
흰색의 깃발에 그려진 문양과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수로왕릉 납릉 정문에 있는 신어상인데, 이 상은 인도
아요디아의 관공서와 성문 그리고 저택 등에 조각된 것과
똑같은 모양이다. 이러한 일련의 흔적들은 황하문명권의
일부로만 인식되어 오던 우리의 역사가 실제로는 인도의
문명까지 흡수하면서 발전해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