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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2일 연중 12주간 화요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6.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6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12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좁은 문을 뚫고 들어가자.
우리가 흔히 화가 나서 욕할 때 개를 들먹이면 아주 심한 욕이 됩니다. 사실 개는 귀여운 애완동물이며, 많은 사람들이 사람보다도 오히려 개를 더 사랑하는 듯 한 요즘입니다. 그러나 개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천방지축입니다. 미국에서 만든 영화 “개 같은 내 인생”(My life as a dog.)이라는 영화는 개처럼 순수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삶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엉망진창으로 살았다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개들에게 거룩한 것을 주지 말라는 말씀은 거룩함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에 거룩함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체성사의 신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호기심이나 장난감으로 성체를 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왜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하느냐고 다그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아무도 거룩함의 본성 안에 우리 자신을 억지로 참여시킬 수 없는 것이고 돼지에게 진주를 주면 돼지는 먹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단단해서 무른 음식을 달라고 할 것이고 진주는 더러운 돼지 똥 속에 처박아 둘 것입니다.
진주조개는 진주를 키우고 자신에게 상처를 내며 들어온 날카로운 물건들을 감싸서 아픔을 치료한다고 합니다. 사실 그런 이물질이 조개의 몸에 들어오면 진주조개가 할 수 있는 두 가지의 선택이 있는데 하나는 ‘라카’라는 치료제를 서서히 몸에서 분비해서 상처를 치료하며 그 이물질을 감싼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라카’라는 분비물을 분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고통이 수반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라카’를 분비한 진주조개는 고통과 어려움을 모두 조개를 키우는데 정성을 다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속에 있는 것이 보배인줄 모르고 오직 상처와 고통을 이기려는 노력뿐입니다.
진주조개의 두 번째 선택은 자신의 몸에 들어온 날카로운 이물질을 치료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그 상처가 곪고, 썩어서 결국 진주조개도 죽게 된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을 썩게 하고 악취를 풍깁니다. 그냥 방치한다면 그렇게 된답니다. 진주조개의 선택을 두 가지이지만 하나는 생명을 보배롭게 키우는 방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을 죽이는 길입니다.
돼지는 진주의 그 가치를 모르고 개도 거룩함의 가치를 모릅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은 그 가치를 모르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소용없게 됩니다. 아무리 진실을 알아듣는다고 하여도 자신들에게 소용을 느끼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 형편없고,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개돼지만도 못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돼지가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 것이 우리를 두렵고 어렵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쉬운 길, 편한 길을 버리고 좁고 어려운 길일지라도 하느님의 길을 따라가도록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 길은 인생의 율법의 황금률(黃金律)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사실 남이 내게 바라는 것은 나와 엄청나게 다릅니다. 그것이 사랑인가 봅니다.
누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즐기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리고 누가 긴 터널과 같이 되어있는 길을 따라 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겠는가?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은 탈출을 위해서 아주 비좁은 탈출구를 뚫고 이어서 하수구의 더러운 물을 따라 1.5km나 간 다음에 자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가끔 천국은 우리가 힘든 길을 따라서 가는 길로 설명되고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고, 하느님의 집은 우리에게 가까이 와 있습니다. 다만 그 일을 하기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말입니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에서 ‘사람은 생득적으로 순선(純善)한 성품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육체를 지닌 존재이기에 정욕(情慾)이나 환경에 의하여 악행을 자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인간본성에 대하여 맹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물은 진실로 동쪽과 서쪽의 구분이 없지만, 위와 아래의 구분도 없겠는가? 사람의 본성이 선한 것은 물이 아래쪽으로 흐르는 것과 같다. 사람은 선하지 않음이 없고 물은 아래로 흐르지 않음이 없다. 이제 물을 쳐서 튀어 오르게 하면 이마보다 높이 넘어가게 할 수도 있고, 물을 역류시키면 산 위로도 올라가게 할 수 있지만,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는가? 외부의 힘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사람도 선하지 않은 짓을 하게 만들 수 있는데, 그 성질은 물의 경우처럼 외부의 힘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선한 길을 걷도록 하느님께서는 안배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어렵고 힘들더라도 하느님의 길을 가도록 안내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욕심과 기타 많은 사정으로 넓고 편안하고 좋은 길을 따라서 살고자 합니다. 욕심으로 그 모든 것을 전부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멸망으로 이끄는 길을 겁도 없이 안심하고 들어서는 것이며, 다른 사람도 그 길로 가자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유혹을 떨쳐버리고 오직 진리의 길로 좁고 비좁아도 언제나 겸손하게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나봅니다. 주님께서도 그 길을 원하고 계시니 우리도 정성을 다하여 그 길을 걸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와 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혈육이 아니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3,2.5-18
2 아브람은 가축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였다.
5 아브람과 함께 다니는 롯도 양과 소와 천막들을 가지고 있었다.
6 그래서 그 땅은 그들이 함께 살기에는 너무 좁았다. 그들의 재산이 너무 많아 함께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7 아브람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과 프리즈족이 살고 있었다.
8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한 혈육이 아니냐?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내 목자들과 너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9 온 땅이 네 앞에 펼쳐져 있지 않느냐? 내게서 갈라져 나가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10 롯이 눈을 들어 요르단의 온 들판을 바라보니, 초아르에 이르기까지 어디나 물이 넉넉하여
마치 주님의 동산과 같고 이집트 땅과 같았다. 그때는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다.
11 롯은 요르단의 온 들판을 제 몫으로 선택하고 동쪽으로 옮겨 갔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살고, 롯은 요르단 들판의 여러 성읍에서 살았다. 롯은 소돔까지 가서 천막을 쳤는데,
13 소돔 사람들은 악인들이었고, 주님께 큰 죄인들이었다.
14 롯이 아브람에게서 갈라져 나간 다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을, 또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아라.
15 네가 보는 땅을 모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
16 내가 너의 후손을 땅의 먼지처럼 많게 할 것이니,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자라야 네 후손도 셀 수 있을 것이다.
17 자, 일어나서 이 땅을 세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고 가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여라. 내가 그것을 너에게 주겠다.”
18 아브람은 천막을 거두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으로 가서 자리 잡고 살았다.
그는 거기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
축일 :6월 22일 성 토마스 모어 (Thomas More)
신분 :인본주의자, 법률가, 순교자
활동 연도 :1477-1535년
같은 이름 :도마, 토머스
법률학자이자 판사이던 요한 모어(Joannes More)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 모어는 12세 때에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이며 영국의 대법관인 요한 모턴의 조수로 생활했다. 나중에 그는 옥스퍼드와 런던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면서 문화와 신학 ·고전 문학 분야에 대한 관심을 넓혔고, 1501년 법조계에 진출했다. 1504년에 그는 영국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고, 카르투지오회 수도자가 되려는 꿈을 포기하고 1505년에 제인 콜트(Jane Colt)와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들의 집은 영국의 문예부흥 및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 이유는 당대의 석학들과 지성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였기 때문이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기지는 만인의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영국 인본주의자들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최고 석학이었다. 그는 시, 역사를 비롯하여 프로테스탄트를 반대하는 논문, 신심 서적과 기도문 등을 저술했고 고전 번역 작업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유토피아”(1515-1516년)는 이성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국가상을 묘사한 것으로 세계의 고전이 되었다. 또 “루터를 배격하는 헨리의 변명”(1523년)은 그가 가르쳤던 헨리 8세에 대한 강력한 옹호가 담긴 서적이다.
1510년 그는 런던의 사정 장관보(司政 長官補)로 임명되었고, 1511년에는 아내와 사별한 뒤에 과부이던 앨리스 미들턴(Alice Middleton)과 재혼하였다. 헨리가 그의 형 아서(Arthur)의 사망으로 왕으로 등극하면서부터 그는 프랑스와 플랑드르(Flandre)의 외교사절로 활약했고, 1517년에는 추밀원에 진출했으며, 1521년에는 기사작위를 받았다. 또한 그는 1523년에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529년에는 월시(Walsh) 추기경 후임으로 평신도로서는 처음으로 대법관직에 올랐다. 성 토마스 모어는 이때 왕의 이혼에 대하여 강력한 어조로 반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법관에 기용된 것이었다.
그 후 그는 헨리 8세 왕의 이혼 문제에 침묵을 지킴으로써 왕의 혼란을 가중시킴과 아울러 분노케 하다가, 헨리 8세가 카타리나(Catharina of Aragun) 왕비와의 이혼 허가를 교황청에 제출하는 서류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을 때 국왕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또 교회를 반격하는 일련의 서류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한 후 성 토마스 모어는 대법관직을 사임하고, 1532년에 첼시(Chelsea)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또한 그는 헨리 8세가 카타리나의 시녀였던 앤 불린(Anne Boleyn)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에게 후계 지위를 양도한다는 소위 왕위 계승 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왕에게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534년에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고, 15개월 동안 옥중 생활을 하는 중에도 영국 교회에 대한 왕의 수장령에 서명할 것을 요청하는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에게 침묵권을 행사하며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 일로부터 꼭 5일 째 되는 날인 1535년 7월 6일, 마침내 그는 참수형을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국왕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으나 먼저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1850년 영국 가톨릭 교계제도가 재확립된 이후 시복시성이 추진되면서 1886년 12월 29일 로체스터(Rochester)의 성 요한 피셔(Joannes Fisher) 주교와 다른 52명의 순교자들과 함께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그리고 순교 400년이 되는 1935년 5월 19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성 요한 피셔 주교와 함께 시성되었다. 그의 축일은 7월 9일로 정해졌다가 1970년 이후 성 요한 피셔 주교의 순교일인 6월 22일에 그와 함께 기념하게 되었다. 법률가의 수호자로서 공경을 받던 그는 2000년 10월 3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정치인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오늘 축일을 맞는 토마스 모어 형제들에게 축복과 은총이 가득히 내려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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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세르지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