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은 며칠째 틀어박혀 나오지 않던....경덕이 있었던 그 방에 들어가 앉았다.
이렇게 앉아서 TV만 보고 있었는데...성균은 리모콘을 누르다 잘못눌러 비디오 재생보튼을 눌렀고 화면을 가득 채우는건...
오렌지빛 카페안에서....경덕과 세진의 키스장면 이었다...
아주 감미롭고 부드럽게......보는 사람마저도 사랑이 전해질 만큼....아름다운.....
성균의 표정이 굳어지고 PCS를 켰다.
"...애들....철수하라고해."
계속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 성균의 눈빛이 더욱 매서워진다.
세진이는 많이 아파요......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지쳐버렸어요....
너무너무 힘들어요.... 그런 세진이를 경덕이형이 안아줬어요....
비록 세진이의 모든것을 가져간 형이지만....세진이는 형이 안아준 후에야 웃을수 있어요...
세진이를 안은 경덕이형의 가여운 흐느낌과 조심스런 떨림이 내게 전해져와요...
세진이가 즐겨듣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원처럼 맑은 울음... 그리고 이어지는 부드러운 키스가...
오렌지빛 카페에서보다 더 아름답고 향긋하게 느껴져요... 그러자 세진이가 아팠던,
그동안 울었던 슬픔들이 모두다 사그라들어요....
세진이는 이제 아프지 않아요..... 울지도 않을거에요.... 경덕이형이 귓가에 속삭여요...
사랑한다고....너무나도 사랑하고 있다고.... 나두 형의 마음을 알고있어요.... 나역시 같은마음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말하지 못했어요.... 아직....세진이는 아직 두려운가봐요.... 가족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올라요.....
그래서 차마 말하지 못했어요... 그치만.....말할수있는날...올거에요.....난 믿어요.....
세진이는 이제 행복할거에요..... 아프지 않아요.....경덕이형이....내곁에 있어준다고....
다신 기다리게 하지 않겠다고......약속했으니까..... 잔뜩 찌푸린 하늘이 우릴 질투하는지....
곧 울것같아요.... 세진이는 이제 울지 않을건데...... 근데....하늘이 울어버리면...
세진이도 울어버릴것만 같아요..... 하늘은....우릴.....축복하지 않는가봐요..... 이상하죠.....
난 경덕이형을 사랑하는데.......마음이.....너무 아파서....눈물이 날만큼....
경덕이형을 사랑하는데.... 형도 나를 사랑하는데....... 하늘이 울어버릴......아픈일이.....
일어날것만 같아요..... 내게.....경덕이형을 사랑한다는 고백....할수있는날....
그런 기회...주어지겠죠.... 세진이는...믿고있어요....... 형이 나를 사랑하는만큼....
나도 형을사랑하니까......
도균은 흐믓하게 윗층 창가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바라보다 돌아선다.
한정희......
나....네 흉내한번 내봤다.... 이런짓따위...안하려고 했는데.....어쩔수가 없었어....
행복하다고 말하며 돌아서는 네 모습이...또 떠오른다.... 나두 그래.... 행복하구......쓸쓸해........
하지만 다행이야....... 정말....다행이야....이제....세진이의 웃는모습....볼수있을거야.......
내가....또 네가......사랑하는 세진이의 맑은 웃음을......이젠 볼수 있을거야.....
도균은 끝을 알수없을만큼 깊은 표정을 지으며 돌아선다... 하늘이...세상을 먹어삼킬듯 뭔가에 분노하듯 새카맣게 변해버렸다.
"어....누구야..."
낮은 음성의 성균의 목소리가 차안에 울려퍼졌다.
잠시후 성균의 톤이 높아지고 인상을 구긴다.
"뭐? 앤디를.....그 자식이 데려갔단 말야? 왜 이제야 보고하는거야!!! 기다려...내가 갈때까지....
그자식....만만하게 봤다가 괜히 서투른짓하면 앤디가 다칠거야..."
성균은 PCS플립을 닫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공터가 지나간다.... 예전부터 늘 싸움이 있었던 비산고 근처 공터.....
성균은 그곳에서 시선을 돌린다.
경덕은 조금은 가뿐한 마음으로 그곳을 나섰다.
이제....끝이라고 생각해..... 아니...끝은 아니지만....거의 끝을 향해 치닫고 있다고.....
우리의 힘든 시간들 말야......
경덕이 그곳을 떠나자마자 한 무리들이 오피스텔로 들어가 세진을 끌고 나갔다.
큰길로 나온 경덕은 PCS 소리에 전화를 받았고 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리는...소름끼치는 목소리가 그의 신경을 자극시켰다.
[잘 있었겠지 정필교....아니,노경덕....]
경덕은 그자리에 멈춰섰다.
"....정....명구...."
[기억하는군 그래..... 전에 싸웠던 공터 기억나지? 거기로 오라구...지금.....]
"내가 왜 가야하지?"
[도망치진 않겠지......비산고 짱 노경덕.......너에게...용건이 있어...... 기다리겠다....]
경덕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자신도 모르게 공터쪽으로 가고있었다.
혼자가면 상대도 안됄게 뻔해..... 근데....꼭...가야할것같은.......느낌이 들어.........
공터에 도착하자 의자에 거만하게 앉은 명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앉아."
"용건만 말해."
"후후.....성질이 급하시군. 용건이라...... 갑자기 그녀석이 보고싶어지더라구. 그래서 불러냈어. ×세진라는 녀석 말이야..."
경덕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에게로 향했다.
"세진이...어딨어...."
"아아. 그렇게 흥분하지 말라구... 연락 올때까지 기다려. 안그럼.......다쳐........그녀석 말야...."
계속 울려대는 핸디소리에 성균은 신경질적으로 플립을 열었다.
"누구얏!!!"
그리고 잠시후 성균의 표정이 굳어진다.
"뭐라구? 경덕이를 정명구가 불러냈다구? 차돌려!!!'
성균이 운전을 하던 기사에게 소리쳤고 그가 타고있던 자가용은 유턴을해 왔던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앤디는......앤디한테는.......믿을만한 녀석이..... 그래.....박충재........아니.....권도균이라고 있어.......
지금쯤 [Tears..]에 있을거다.... 그 녀석에게 정중히 부탁해줘.... 그녀석이라면......믿을만 하니까........"
성균의 시선이 창밖에 머문다.
세진은 어느 수영장에 끌려와 있었다.
영민의 못마땅한 시선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5m다이빙 풀장 앞에서.... 영민이 싸늘하게 말했다.
"물이 있는 상태에서 들어갈래.... 아님 나중에 물을 가득 채워줄까....? 선택권을 주는거야...."
파랗게 질린 세진의 얼굴빛을 보며 영민은 피식 웃었다.
"이렇게 된것도 다 정필교 덕이야. 아....노경덕 말이야... 인복은 있군. 그딴 자식 만나서 이런데까지 끌려오구..."
영민이 빈정거리며 PCS를 켰다...
PCS소리가 나자 경덕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고 명구는 전화를 받았다.
"...영민이구나....도착 했다구...? 그래...선택을 하지 않더란 말이지.... 그럼 그냥 니 맘대로 해.... 아....잠깐만 기다려..."
명구가 경덕을 바라보았고 경덕은 그의 움직임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세진이한테 손대면.....죽여버릴거야...."
이를 악물며 참고 있는 경덕을 보며 명구는 웃음지었다.
"내가....똑같은 실수를 할것같아? 걱정마....이번엔....×세진 살려두지 않을테니까."
경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위에 있던 그의 하수인들이 경덕을 저지시키곤 다시 자리에 앉게했다.
명구가 다시 PCS를 귀에 대었다.
"좋은 생각이 났어.... ×세진한테....노경덕을 거부하면....살려주겠다고해....지금 죽고 싶진 않겠지?
노경덕에 대한말......나쁜거라면 뭐든 좋다구...."
영민은 세진의 가까이로 가서 말했다.
"노경덕을 욕하면 살수있어..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꼭 들어가야 하고.... 그렇게 하면....살려줄수도 있어...."
영민이 PCS를 귀에 대주었다.
얼어버린 세진의 표정과 겁에 질린눈... 추위에 달달 떨리는 어깨.... 세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말했다.
명구는 소리를 키운다음 경덕의 귀 가까이에 PCS를 대준다.
경덕의 표정이 점점......굳어진다..... 세진아....괜...찮아...? 말...해...... 나......듣고 있을께..........
괜찮아......... 잠시후...세진의 울먹임을 참아내는 소리가 들려온다.
[...경덕형은....날.....속였어...... 정희도 많이 맞았고.......나도 한달동안 병원에 입원해야했어......
그리고.....우리집을.....내 행복을.......모두 깨뜨렸어.........]
세진의 울먹임이 점점 작아지고 경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괜찮아......
그렇게 잠깐동안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던 세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랬는데.....그랬는데....난.....경덕이형을 사랑해.......형없이는 안돼......]
경덕의 눈동자가 커졌고 애처롭게 들려오는 세진의 목소리가 경덕을 더 참을수 없게 한다.
[미안해 형..... 어차피......난......죽어.....이제....더이상.....내 감정....속이고 싶지않아....
다행이야.......형에게...고백...할수 있게돼서....세진이는.........슬프지 않아.....사랑해........
사랑해..........세진이는 형을.........']
더이상 들리지 않는 세진의 목소리......
명구 역시 의외인듯 플립을 닫았다.
"이 자식이 다 망쳐놨군..."
"세진이 어딨어..."
경덕이 울분을 참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고 명구는 신이난듯 웃었다.
"노경덕 상처 받는꼴좀 보려그랬더니.... 오히려 행복하게 해줬잖아? 하지만...한가지가 더 있지.....
×세진 저렇게 되도록 사주한게 누군지 알아? 노회장.....그리고 김성균이야....."
경덕이 일어서려 했으나 꼼짝할수가 없었다.
도대체......언제까지 나를 쥐고 흔들 작정인지... 김성균.......너까지.....
"다들 너한테 미친 사람들이지. 노경덕 정신 차리게....×세진을 밟아준거라구....
널 손봐주라는 말은 없었지만.....넌 내 복수를 당해줘야지......안그래?"
명구의 야릇한 웃음이 음산하게 울려퍼졌다.
다시 울려대는 핸디소리....
"또 뭐야!!"
공터로 가는 골목....그곳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세진......]
"×세진이 뭐 어쨌다는거야!!"
성균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수화기 건너편에선 말을 잇지 못했다.
[.......×세진가.......앤디리의 사촌형이라고.......하더군요.........]
성균은 커다래진 눈을 들어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확실......한건가....?"
[....예......]
그리고 그제서야 성균은 서두르기 시작했다.
"젠장!! 정명구가 경덕일 불러냈으면 ×세진는 김영민이 데리고 있을거야... 말려야해......
김영민 핸디 번호........번호....."
성균은 뭔가에 맞은양 다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명구는 경덕을 빈정대고 있었다.
"그 녀석이...그렇게 나올줄은 몰랐어...... 어차피 살려둘 생각도 없었지만..... 죽음이 앞에있는데 사랑고백이라니....."
경덕의 머리가.....정신이 아득해져 온다..... 세진이를 찾아야 하는데......지금.....
그때.....자동차 몇대가 도착하고 몇몇 사람들과 성균이 차에서 내렸다.
다짜고짜 명구에게 달려드는 성균.... 어떠한 소리도 없이......그의 분노로.....명구를 눌러버린다.
그런상태가 끝이나고.... 경덕이 성균의 앞에 섰다.
"세진이.....어딨어........"
참고..또 참고...계속 참아서....경덕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성균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주소가 적힌 쪽지를 내밀었고 경덕받아들자마자 그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개자식!!!"
경덕은 무작정 뛰었다.
그리 멀지 않은곳.... 제발 늦지 않았기를...... 경덕은 수영장안으로 뛰어 들어가 여기저기 살폈지만 거기엔....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된거지.... 세진아....어딨어......
주위를 둘러보던 경덕은 뭔가....물소리에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고 그곳에는.........
세진의 시신이 떠올랐다....
경덕은 몸을 움직일수가 없었다..
눈물이 가득 고여서....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겨우겨우 걸음을 떼고 세진의 시신을 끌어당겨 건져내 부둥켜 안았다...
차갑다.... 이 추운 겨울날...... 뼈속 깊이까지 추위가 느껴질만큼......
그리고 경덕의 머릿속에 세진의 예쁜 미소가 떠오른다.......
[난 나중에 죽으면 절대,절대루 물에 빠져 죽고싶진 않을것 같어.]
그말이 경덕의 목을 더 메어오게 한다.
물을 무서워 하는데..... ...얼마나 두렵고....차가웠니...... 자꾸만.....저 얼음장같이 찬 물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갔을......
네가 생각나..... 넌....죽음이 앞에 있었는데........왜 그랬어...... 죽음을 미리 예감이나 한듯 애달프고 간절하게......
사랑한다고........ 나도.......널.....사랑해........사랑해 세진아....
경덕은 새하얗게 식어버린 세진을 안아올려 그곳을 빠져나갔다.
눈앞이 흐리다.... 누가 뿌연 안개를 흩어놓은 것처럼.... 또는 누군가 비를 뿌리고 있는것처럼.....
경덕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멈추질 않는다.
쉬지 않고 흘러....세진의 볼에 떨어진다....
하늘도....잠시 울먹이더니......이내 울어버린다....
세진의 죽음을 슬퍼하듯.....하늘도 자지러질것 처럼 울어버리고 말았다....
밖으로 나갔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세진이가 추워할것 같은데..... 이런....누가 구두를 신겨놨지?
영민이 자식인가? 급하게 끌려 나오느라 그랬구나......세진이는.....구두를 싫어하는데........
울 세진이는......아이스크림도 늘 흘리고 먹구..... 아참....겨울이라 아이스크림은 감기걸리겠다.....
베르사체 썬글라스.....갖고싶어 했는데..... 가져서.....행복한지.......물어보는걸 잊었네.......
경덕의 머릿속엔 온통 기억들........세진에 대한 기억들 뿐이다..... 정말....이젠 어디로 가야하지....?
알수가....없어.........
경덕은 모은 자료들과 자신이 쓴 서류들을 팩스에 넣었다.
그리곤...힘겹게 웃음지었다.... 이제....끝났어...... 일주일이나 걸려버렸네.......
난 빨리 한다고 했는데..... ...오래 기다렸지....?
기다리는거.....많이 싫어하잖아........ 또 기다리게 해버렸어.........미안해........
하지만......
이제 금방이야....... 나 곧 너한테 갈께.......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너의말.......
다시한번 듣고싶어...... 나두....니가 없으면 안 돼....... 사랑....하니까..........
그 크기는 나도 잘 몰라....... 나 조차도 가늠할수 없을만큼...그렇게 민우 너를..많이 사랑해
나....받아주는거지....? 이젠 아프게 안할께.............사랑해........
경덕은 자신이 탄 오토바이와 함께 강물속으로 깊이......아주 깊이....빠져들었다.....
온몸에 스며드는 차가운 물을 느끼며....떠오르는 기억하나.... 이제는 지워져 가는.......아련한 기억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