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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2년생 시대를 잘못태여난 "조광조" 그가 500년후에 태여 났더라면..
그는 "요순시대"를 꿈꾼 이상주의자로"중종"의배신으로 37세 젊은나이
전남화순에서 사약을받고 죽다.
1965년 영화화된 "정동대감"은 "조광조"의 일생을 그린 영화다 ![](https://t1.daumcdn.net/daumtop_deco/icon/deco.hanmail.net/contents/emoticon/etc_02.gif)
김진규,김지미,김혜정,기라성같은 주연배우들... 영을 넘고 강을 건너 남도 천리를 헤어져 그린 그 님 찾아 가는데 철없이 따라 오는 어린 손이 차갑구나 자장 자장 잘 자거라 아가야 잠들어라 이슬 내려 젖은 길이 멀기만 하다
사랑 찾아 님을 찾아 운명의 길을 천리라도 만리라도 찾아 가련다 등에 업힌 어린 자식 칭얼 칭얼 우는데 자장자장 잘 자거라 아가야 잠들어라 눈물에 젖은 길이 멀기만 하다
정동대감은 조선중종때 개혁을 주도 했던 "趙光祖"가 반대세력에게
"기묘사화"를 당하여 전남 화순군 능주면으로 유배되었다,"사사"되었다.
조광조의 젊은 아내가 유배지로 남편을 찾아서 몰래 떠나는 정황을 노래로
표현 한것이며 "이미자"의구성진 가락으로 더욱 애절함을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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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
사화(士禍)는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화를 입는 일을 가리키며, 한국사에서는 특히 조선 중기에 사림 세력이 화를 당한 연산군 때부터 명종 즉위년까지 발생한 4차례의 옥사를 말한다.
실패한 개혁주의자,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 한양 조씨. 성종 13년에 한성에서 태어난 그는 17세 때 어천찰방(지금의 역장)으로 부임하는 아버지 조원강을 따라갔다가 그곳에서 무오사화로 평안도 희천에서 유배 중이던 사림파 성리학자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을 만나 수학한다. 그리고 중종 5년에 장원으로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공부한다. 중종 10년(1515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왕의 두툼한 신임을 얻게 되었으며 4년 만에 고속 승진을 하여 중종 13년(1518년) 약관 37살의 나이에 대사헌이 된다. 그는 사림파의 영수로서 현량과를 설치하여 신진 사림들을 정계에 진출시킨다. 이때부터 그는 훈구파 소위 보수 세력을 몰아내는 급진적인 개혁을 하여 정국공신 103명중에 4분의3에 해당하는 78명에 대하여 훈작을 삭탈(위훈삭제)한다. 이에 훈구파의 반격이 일어나고 중종도 조광조에게서 마음이 떠나 1519년(중종14년) 38세의 젊은 나이에 기묘사화로 죽게 된다.
나는 ‘실패한 개혁주의자, 조광조’ 란 단어를 되새기면서 적려(적려란 유배된 곳이란 뜻임)유허비가 있는 건물 정문을 들어선다. 그리고 곧바로 ‘추모비각’이라고 써진 쪽문으로 들어간다. 거기에는 적려유허 비각이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진 작은 비각에는 3미터정도 되는 비석이 목책으로 둘려 쌓여 있다. 자세히 보니 비석은 거북이가 받치고 있고 그 위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비신의 앞면은 ‘ 정암조선생적(靜菴趙先生謫) 려유허추모비(廬遺墟追慕卑)’란 총 12자의 해서체 글씨가 세로 두 줄로 6자씩 써져 있다. 그리고 그 글씨 위에는 용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며 엉켜서 조각되어 있다. 비석 뒷면의 비신에는 맨 위에 ‘정암조선생 추모비’라는 전서체 글씨가 가로로 적혀 있고 세로로는 ‘정암 조선생적려추모비기’라고 시작되는 정암 선생의 추모내역이 한문으로 적혀 있다. 이 뒷면 글씨의 맨 상단에는 한 마리의 용이 구름을 타고 오르는 모습을 하고 있다.
한편 비각 뒤쪽의 뜰에는 최근에 화순군에서 세운 것으로 보이는 ‘ 정암 조광조 적려 유허 추모비 번역문’ 간판이 있다. 이 번역문을 읽으면서 ‘ 기묘년 11월에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밀의하여 주초위왕이 왕이 된다는 무근지설을 조작하여 변을 일으켜 변고가 일어나 이곳 능주에 유배되니’ 란 글이 눈에 들어온다.
‘주초위왕이 왕이 된다.’는 이야기는 고등학교때 국사 시간에 배운 기억이 난다. 중종 임금 때 궁중에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씨가 새겨진 나뭇잎이 발견되었다. 한 궁녀가 해괴하다고 여겨서 벌레 먹은 이 나뭇잎을 왕비에게 바쳤는데 해석하여 보니 주(走)와 초(肖)를 합하면 조(趙)자가 되니 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는 설이 흘러나왔다. 이것이 단초가 되어 바로 기묘사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중종도 임금 자리를 넘보려 한다는 도참설에는 기분이 안 좋았으리라.
애우당(愛優堂)
이윽고 나는 추모비각을 나와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 건물 안에는 ‘애우당(愛優堂)’이란 현판이 붙은 강당이 있다. 애우당(愛優堂). 최인호의 소설 유림 책에서 읽은 바 있는 조광조의 절명시중에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같이 하였다’는 문장에서 ‘애(愛)’를 따오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다’는 문장에서 ‘우(優)’를 빌려와 붙여졌다고 하는 ‘근심걱정을 사랑’하는 강당. 나는 이곳에서 애우당 현판이 나오도록 사진을 찍고서 방명록에 사인을 한 다음 마루에 올라서 강당을 한 바퀴 둘러본다. 강당 안 벽 천장에는 현판이 여러 개 붙어 있다. 맨 먼저 보이는 것이 ‘역모무고공술(逆謀誣告供述)’이라고 써진 현판이다. 이 현판에는 조광조의 최후의 진술이 한문으로 먼저 적혀 있고 그 다음에 이곳의 관리인겸 역사해설가 오정섭 선생이 정리한 해문이 적혀져 있다.
‘선비로 태어나 이 세상에 살면서 믿는 것은 오직 임금의 마음뿐 입니다.
국가의 병통이 모두 사사로이 이익을 추구하는 이원(利源)에 있다고 망령 되어 생각하였기 때문에 나라의 맥을 새롭게 하여 무궁하도록 하고자 했을 따름이지 다른 뜻은 전혀 없었습니다.
士生斯世 所恃者
君心而己 妄料國家病痛
在於利源 故慾新國脈
於無窮而己 頓無他意 ‘
중종 14년(1519년) 11월 9일 조광조에 의해 위훈삭탈을 당한 남곤, 심정, 홍경주등 훈구세력은 11월 15일 야밤에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으로 몰래 들어가 중종 왕에게 역모시급이라는 무고를 한다. 그리고 조광조는 한밤중에 영문도 모르고 의금부에 끌려가서 문초를 받게 된다. 그날 밤에 그는 만취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 한다. 그리고 문초를 받으면서 진술서에 서명을 안 하였다 한다. 아마 조광조는 날이 밝아 중종임금을 뵙게 되면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으리라. 그런데 조광조가 진술서에 서명을 거부하였다는 사실을 보고 받은 중종은 크게 노하여 조광조를 참형시키라고 한다. 조광조가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역린은 문자 그대로 용의 목에 난 비늘이다. 이 말은 중국의 한비자 책에서 나온 것으로서 거기에는 ‘용이란 동물은 길들이면 사람이 탈 수 있을 정도로 순하다. 그러나 목 아래 거꾸로 난 1척 정도의 비늘을 잘못 건드리면 바로 물려죽는다. 이와 같이 군주의 역린에 닿지 않도록 설득하는 것이 최상의 설득이다.(人主之逆麟則幾矣)’ (한비자 설난편 - ‘중국 3천년의 인간력(청년정신 발간)’ 책에서) 라는 글이 적혀 있다.
현판에 써진 ‘역모무고공술’은 이렇듯 중종의 역린을 건드린 조광조가 11월16일 참형을 앞두고 중종 임금에게 말한 최후의 진술이다. 다행히도 조광조는 당시 영의정 정광필의 읍소에 의해 참형만은 면하고 능성현( 지금의 능주)으로 유배를 떠난다. 이로서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위훈삭제이후 6일 만에 막을 내리는 것이다.
역사는 아이러니한 것인가. 피비린내 나는 기묘사화의 출발은 바로 11.15 밤 신무문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이 신무문이 바로 19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 서거이후 신군부에 의한 12.12 사태가 비롯된 현장이었으니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인가.
한편 이 공술문 현판 왼쪽에는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 현판이 걸려 있다.
‘ 누가 활 맞은 새와 같다고 가련히 여기는가.
내 마음은 말 잃은 마부 같다고 쓴 웃음을 짓네.
벗이 된 원숭이와 학이 돌아가라 재잘거려도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
독 안에 들어 있어 빠져 나오기 어려운 줄을 어찌 누가 알리오.
誰憐身似傷弓鳥
自笑心同失馬翁
猿鶴定嗔吾不返
豈知難出覆盆中 ‘
조광조가 능성에서 유배 중에 지은 이 7언4구 한시는 자신의 처지를 활 맞은 한 마리 새로 비유하고 있다. 이 시에서도 조광조는 중종 임금이 다시 그를 부를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독 안에 들어 있어 빠져 나오기 어려움을 알아채고 체념과 자조가 더 깊다. (이 한시는 조광조를 끝까지 곁에서 지킨 지란지교인 학포 양팽손(1488-1545 )에게 전하여졌다 한다.)
그런데 두개의 현판을 둘러본 다음에 애우당 벽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최인호의 소설 유림에서 읽은 조광조의 절명시(絶命詩) 현판은 보이지 않는다. 마침 내가 전화 연락을 하여 오신 관리인 겸 역사 해설가 오정섭 선생에게 물었더니 절명시가 써진 현판은 다시 만들려고 최근에 철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조광조가 11월17일 한양을 떠나 귀양지 능성현(지금의 능주)에 도착한 날은 11월26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유배 온 지 한 달도 채 안된 12월20일에 사약을 받는다. 그리고 사약을 마시기 전에 다음과 같은 5언 절명시를 쓴다.
‘ 愛君如愛夫
憂國如優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
내 일편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 ‘
정몽주...길재...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사림파(士林派).. 보수세력인 훈구파와의 대립은 불가피하였다. 위기에 몰린 훈구파는 나무에 꿀을 발라, 벌레로 하여금 갉아 먹게 한 후, "주초위왕 (走肖委王)" 의 글씨만 남기게 하고...중종에게 趙씨 姓을 가진 사람이 王이 된다고 모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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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의 득세가 마음에 걸린 中宗은 조광조를 화순으로 유배를 보내고 한달 만에 사약을 내린다. 이율곡도 극찬한 최고의 성리학자... 후일 宣祖에 의하여 영의정으로 추서된다.
최인호의 소설 "유림"은 조광조의 일대기이다. 젊은 나이에 개혁을 추구하다 마침내는 실패하고 유배를 당한다. 그는 死後 영의정으로 추증되지만, 개혁과 反 개혁의 갈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집 근처 용인에 있어 들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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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blog/2072CA1849E049D4B6)
연산군이 페위되고 왕위에 오른 中宗은 개혁정치를 시도하며 젊은 조광조를 등용한다. 그에 부응하여 조광조는 강력한 王道政治를 펼치는데...그를 위하여는 부패와 비리를 청산하는 작업이 필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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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山君을 내?고 왕위에 오른 中宗은 혼란을 수습하고 ,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면서 성균관을 重修하는 등 官學을 중심으로 한 진흥책을 추진하였지만 기대만큼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에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 사림세력들은 의리명분을 바탕으로 한 민심 수습과 내적 인격도야를 추구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학문 풍토를 추구하면서 도학(道學)정치에 기초한, 교학 진흥책을 제시하였다. 그 진흥책 중 하나가 바로 문묘종사(文廟從祠)운동이었다.
이는 사림파의 학문적 우위성과 정치 입장을 강화해 주는 한편 향촌민의 교화라는 명분을 가지는 것으로서 書院 발생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이후 宣祖때에 이르러 士林派가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書院은 본격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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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짧은생애...37년 (1482 ~ 1392).. 그의 급진적인 개혁정치가 끝내 실패로 돌아 간 것처럼
묘 앞의 소나무도 꺾여 있다. 조광조가 失敗한 이유는.... 첫째 너무 급진적이었고, 반대파의 저항을 극복하기에는 세력이 너무 약하였다. 그리고 개혁을 위하여 중용한 임금 中宗이 그의 세력이 커짐에 오히려 위기를 느껴, 조광조를 멀리하고 사약을 내린다. 中宗의 그릇이 작다.
예나 지금이나 개혁은 매우 어렵다. 기득권 세력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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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당한 조광조는 사약을 받기 전,,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애군여애부 (愛君如愛父)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우국여우가 (憂國如憂家)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으니
백일임하토 (白日臨下土) 하늘이 이 땅을 굽어 보시니
소소조단충 (昭昭照丹衷) 내 일편단심 충성을 밝게 밝게 비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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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길 가 , 내 車가 보인다.
심곡서원 ...... 개보수 공사 중... 조광조의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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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은 후, 임금 宣祖에 의하여 영의정으로 추서되고 그의 묘 인근에 사당을 지어 그의 영혼을 달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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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어느 날... 다시 찾은 조광조의 묘...
잔디의 푸르름은 사라졌지만, 단풍이 너무 고와, 길 건너 아파트 엘리베이터 게단에서 최대한 당겨 촬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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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中宗)과 조광조의 위험한 동거(同居)............
연산군을 왕위에서 내?는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하여 왕에 오른 中宗은, 자신을 王에 오르게 한
공신(功臣)들에 의하여 견제를 받으며, 끊임없이 시달리게 된다. 그 공신들은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 사건 이후, 세습적으로 권력을 향유하던 소위 훈구파(勳舊派)들 이었다. 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전격적으로 신진 사림파 조광조를 등용한다. 중종은 조광조를 이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다.
반면, 성리학적 이념으로 이상국가(理想國家)를 꿈꾸어 왔던 조광조는 이를 계기로 자신의 개혁정치를 추진한다. 서로를 필요로 하였지만, 각자가 지향하는 목표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中宗과 조광조는 우선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야 했지만, 한편으로는 서로가 견제하고 갈등하는 위치에 놓일 수 밖에 없는 관계이었다. 일단 王權이 불안정하였던 中宗은 조광조를 기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함으로써, 정치적 이익을 얻는다. 性理學의 원칙에 충실한 조광조의 등장에 훈구파는 위축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광조의 이상론(理想論)은 왕권의 견제를 통하여 실현될 수 있었다. 조광조의 입장에서 中宗도 연산군이나 세조같은 극단의 길을 걷는 王이 될수도 있다는 염려가 있어서, 조광조는 끊임없이 王의 도덕정치를 강조하는데... 군주 독재의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고 개혁세력이 정치를 주도해야 한다는 믿음을 굳혀가게 된다. 여기서 두 사람은 갈등의 불씨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511841749E04B96EF)
왕권을 강화하려는 중종에게 훈구파가 위축되는 대신, 그 자리에 조광조를 필두로 하는 사림파가 자리를 잡는다. 이로 인하여 中宗은 사림파에게 위협을 느끼게 된다.
조선 건국 초기..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정도전과 이방원이 피를 부르는 권력싸움을 전개한 것이나, 세조의 왕위 찬탈사건과 사육신 사건은 모두 王權과 신권(臣權) 간의 권력투쟁이었다.
조광조는 王에게 충성하여 마땅하지만, 그 王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대 조선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성리학 이념이라고 판단했다. 이른바 성리학의 確信犯이었던 셈이다. 수양대군이나 연산군은 모두 성리학 이념...그 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조광조는 中宗도 얼마든지 그 전철을 따를 수 있다고 보았고, 中宗이 자신만의 정치적 역량을 갖춰 독재 군주가 되기 전에 성리학 이념이라는 견제장치로 중종을 압박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서 그는 서두른다. 그의 개혁은 그래서 급진적으로 추진되고 만다.
결국 中宗은 세력이 너무 커져버린 사림파를 제거하려 마음먹고, 여기에 훈구파가 도와 준다.
조광조는 드디어 전남 화순으로 귀양가서 , 사약을 받고 죽는다. 기묘사화이다.
이 비극은 왕권에 대한 견제장치로 성리학의 이념을 무기로 하여 등장한 신권(臣權)의 도전에서
조광조가 패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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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 이르러서도 조광조는 "개혁의 화신(化神)"으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그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화태 (禍胎)"로 불리었다. 즉, 말썽만 일으키는 불씨라는...그가 움직이면 재앙만 일어 난다는... 의미이다. 역사의 평가는 그 입장에 따라 이렇게 판이하다. 언제나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먼 훗날 역사가 평가한다.
유랑아제-펴뮤늬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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