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āraṇīyakathā 기억할 만하고 기억해야 할 이야기들
비구는 출가한 곳과 사성제를 깨달은 곳 그리고 해탈한 곳은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불교의 깨달음은 사성제로 모이고 그 목적은 해탈로 귀결되지 싶다.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여러 법들이 경문에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sati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본 글에서 한글 번역은 주로 [초기불전연구원]을 참고하였다. 의견이 다른 부분만 부기하겠다.
'sammodanīyaṃ kathaṃ sāraṇīyaṃ vītisāretvā ekamantaṃ nisīdi.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한 뒤 한 곁에 앉았다.'
'imāni kho, bhikkhave, tīṇi bhikkhussa yāvajīvaṃ sāraṇīyāni bhavantī”ti.
비구들이여, 비구도 이러한 세 가지 장소를 목숨이 붙어있는 한 기억할 것이다.'
'chayime, bhikkhave, dhammā sāraṇīyā …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법을 기억해야 하나니 … '
'dasayime, bhikkhave, dhammā sāraṇīyā piyakaraṇā garukaraṇā saṅgahāya
avivādāya sāmaggiyā ekībhāvāya saṃvattanti.
비구들이여, 열 가지 법을 기억해야 하나니, 이것은 호감을 주고, 공경을 불러오고,
도움을 주고, 분쟁을 없애고, 화합하고, 하나가 되게 한다.'
최근 남방에서 재 전래된 불교에 의해 북방에서는 주목받지 못하던 sati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고
관심이 지대하여 한 동안 sati에 대한 번역 문제가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현재 sati라는 단어에 대해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마음챙김'으로,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새김'으로, 그 외 '마음지킴' 등의 번역이 있다.
영역에서는 mindfulness로 한역에서는 念(/憶念)으로 번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혹은 '알아차림'으로, 때로는 '위빳사나'라는 의미로 설명하기까지 한다.
불교가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 해탈(열반)을 위한 가르침이라면
그 전제가 되는 중요한 법수는 知見(알고 봄)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sati도 이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경문에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는 '기억'이라는 의미를 배제하면
경문의 번역이나 이해가 왜곡될 수밖에 없다.
물론 반야지혜의 知見(알고 봄)을 위한 예비단계로서 sati의 역할이 있다.
'yā cāvuso visākha, sammāvācā yo ca sammākammanto yo ca sammāājīvo
ime dhammā sīlakkhandhe saṅgahitā.
yo ca sammāvāyāmo yā ca sammāsati yo ca sammāsamādhi
ime dhammā samādhikkhandhe saṅgahitā.
yā ca sammādiṭṭhi yo ca sammāsaṅkappo, ime dhammā paññākkhandhe saṅgahitā”ti.
도반 위사카여,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의 이 세 가지 법은 계의 무더기[戒蘊]에 포함됩니다.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의 이 [세 가지] 법은 삼매의 무더기[定蘊]에 포함됩니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의 이 [두 가지] 법은 통찰지의 무더기[慧蘊]에 포함됩니다.”
“yā kho, āvuso visākha, cittassa ekaggatā ayaṃ samādhi;
cattāro satipaṭṭhānā samādhinimittā; cattāro sammappadhānā samādhiparikkhārā.
yā tesaṃyeva dhammānaṃ āsevanā bhāvanā bahulīkammaṃ, ayaṃ ettha samādhibhāvanā”ti.
“도반 위사카여,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心一境性]이 삼매입니다.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 삼매의 표상입니다.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이 삼매의 필수품입니다.
여기서 이런 법을 받들어 행하고 닦고 많이 짓는 것이 삼매를 닦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실참수행인 4념처(정념, 8정도의 7번째 지분)는
계-정-혜 3학에서 삼매의 무더기에 속한다고 한다.
흔히들 삼매를 특정대상에 대한 집중으로 설명하지만
바른 삼매(正定, 색계 선)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오히려 4념처(正念)에는 특정 대상에 대한 집중이라고 읽을 수 있는 내용이 있다.
하여튼 知(앎)를 위한 공부가 念수행이라고 생각한다.
'sammāsatissa sammāsamādhi pahoti, sammāsamādhissa sammāñāṇaṃ pahoti
바른 마음챙김으로부터 바른 삼매가 생겨납니다. 바른 삼매로부터 바른 지혜가 생겨납니다.'
'‘atthi kāyo’ti vā panassa sati paccupaṭṭhitā hoti
yāvadeva ñāṇamattāya paṭissatimattāya
anissito ca viharati, na ca kiñci loke upādiyati.
혹은 그는 '몸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imesañca panāhaṃ, āvuso, catunnaṃ satipaṭṭhānānaṃ bhāvitattā bahulīkatattā
hīnaṃ dhammaṃ hīnato abbhaññāsiṃ, majjhimaṃ dhammaṃ majjhimato abbhaññāsiṃ,
paṇītaṃ dhammaṃ paṇītato abbhaññāsin”ti.
도반들이여, 그리고 나는 이러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고 많이 [공부]지었기 때문에
저열한 법은 저열하다고 최상의 지혜로 알았습니다.
중간의 법은 중간이라고 최상의 지혜로 알았습니다.
수승한 법은 수승하다고 최상의 지혜로 알았습니다.' <*abbhaññāsiṃ: 自內證>
'idha, bho, bhikkhu
ajjhattaṃ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존자들이여, 여기 비구는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뭅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뭅니다.
ajjhattaṃ kāye kāyānupassī viharanto tattha sammā samādhiyati, sammā vippasīdati.
그는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여 머물면서 바르게 삼매에 들고 고요하게 됩니다.
so tattha sammā samāhito sammā vippasanno
bahiddhā parakāye ñāṇadassanaṃ abhinibbatteti.
그는 거기서 바르게 삼매에 들고 고요하게 되어
밖으로 남의 몸에 대해서 지와 견을 가지게 됩니다.'
para- : 다른 사람의 신수심법에 대한 知見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他로(para-to) 알고 보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른바 '강 건너 불구경'이다.)
' … 초선에 들어 머문다.
so yadeva tattha hoti rūpagataṃ vedanāgataṃ saññāgataṃ saṅkhāragataṃ viññāṇagataṃ,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물질이건 느낌이건 인식이건 심리현상들이건 알음알이건,
te dhamme aniccato dukkhato rogato gaṇḍato sallato aghato ābādhato
parato palokato suññato anattato samanupassati.
그 모든 법들을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색계에는 나타나는 色(rūpagata)이 무색계에서는 당연히 나타나지 않는다.
초선부터 무소유처까지는 出定하지 않고서 지켜본다.
(위 경문과 함께 본 글에 일부 인용된 M111도 참고하라. -아래 참고)
물론 바른 삼매인 色界 禪 이전(正定 이전의 正念 상태)의,
욕계 상태에서 욕계의 법들(六六法)을 알고 보려면
바른 삼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안정된 상태(욕계 삼매라 칭하든 법의 삼매라고 칭하든),
아주 안정된 상태가 아니더라도 이른바 근접삼매 내지 잠시 잠깐 안정된 상태(찰나 삼매)에서
'지나간 과거의 법에 대한 기억'에 의해서 六六法을 알고 볼 수 있지 싶다.
(pubbe vā paṭiladdhapubbaṃ atītaṃ niruddhaṃ vipariṇataṃ samanussarato -아래 참고)
이러한 수행을 '苦을 통한 도딱음(paṭipadā dukkhā)'이라고 하고
'바른 삼매 상태에서의 도닦음(paṭipadā sukhā)'과 대비된다.(A4:161 등)
六六에 대해서는 M148과, 六六(/36법에 대해 一切)法이라고 표현한 雜阿含 卷13(304)를 참고하라.
이런 일련의 흐름을 欲界 愛支 緣起라고 칭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大念處經(D 22)의 苦集<緣起>과 苦滅에, 즉 갈애(愛)와 관련하여<愛支>
六六에 이어서 나타나는 총 60가지 일련의 법들도 六六法이라고 칭할 수 있다면, 혹은
A7:85에는 60법 외에 5蘊이 추가되어 총 65법이 나열되어 있다. 또한
S25:9 내지 S25:10에는 6尋-6伺대신 6界-5蘊, 총 59법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S25, S26, S27에는 이런 법들과 관련하여 예류자 혹은 불환자라는 표현이 나타나므로
이런 일련의 법들은 <欲界>와 관련된 법들이고
6內外로부터 생겨나는 (이런 6계열의 <識觸受-想思-愛-尋伺/(6)界(5)蘊> 일련의) 법들은
M28에 의하면 5蘊(界)으로 귀결된다고 한다. 이런 법들에 대한 愛-取의 결과가 有 즉 名色이다.
…識-名色-識… 이 상황이 이른바 '互緣 緣起'이고 <欲界 愛支 緣起> 이후 단계이다.
M28에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씀에 의해 欲界 愛支 <緣起>라고 칭하는 것이다.
'‘y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
yo dhammaṃ passati s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īti.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라고'
緣起란 苦集(聖諦란 愛)이다. 달리 표현하면 '육육法을 보는 자는 갈愛를 본다.'
다시 한 번 '대념처경'을 참조하기를 권한다.
욕계 상태(正定 이전의 正念 상태)에서 욕계의 법들(六六法)에 대한
念을 남방 상좌부에서는 '알아차림' 혹은 '위빳사나'라고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남방에서 '출정하고서 위빳사나 한다.'라는 표현이 연결되기는 하지만
실은 찰나 삼매이므로 '출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바른 말이지 싶다.
혹자의 표현에 의하면 '前 刹那에 대한 기억이 사띠'라는 의견과도 상통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sati는 '기억'이지 '알아차림' 혹은 '위빳사나'인 것은 아니다.
sati라는 단어는 sarati(/sumarati, √smṛ)의 여성 명사이고
과거완료형인 sata(/sarita)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단어와 결합된 접두사에 의해서 anussati, patissati(/paṭissati)로,
그리고 동사 혹은 명사 등의 변화태가 경문에 나타난다.
sati의 의미는 漢譯과 같이 우리말 '기억'과 용례가 거의 같다는 것을 먼저 밝히고
그 이유와 용례를 이어가겠다.
sati라는 단어는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라는 37보리분법에 중복적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그 각각의 쓰임에 대해서는 생략한다. 다만 사정근(四正勤)의
'…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은 지속하게 하고 사라지지 않게 하고 …'에 해당하는
'uppannānaṃ kusalānaṃ dhammānaṃ ṭhitiyā asammosāya'에 나타나는
sammosa는 '혼란'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잊어버린다(忘却)'라는 mussati(to forget)에서 유래된 단어로도 읽을 수 있다.
아래 용례에서 [sati sammussati. satiyā sammosā]를 참조하라.
[ … sati na sammussati. satiyā asammosā … sati sammussati. satiyā sammosā
satisammosā muṭṭhassatīnaṃ
muṭṭhassatiṃ asampajānaṃ - muṭṭhassati asampajāno - upaṭṭhitassati sampajāno
sato sampajāno – sampajāno patissato
muṭṭhassatissa asampajānassa – upaṭṭhitassatissa sampajānassa
muṭṭhassatino asampajānā – upaṭṭhitassatino sampajānā
muṭṭhassatī asampajānā – upaṭṭhitassatī sampajānā
sati ca sampajaññañca – muṭṭhassaccañca asampajaññañca(<muṭṭhassati+ṇya)]
'tassa mayhaṃ, bhante, tasmiṃ samaye
mussateva bhagavantaṃ ārabbha sati,
mussati dhammaṃ ārabbha sati,
mussati saṅghaṃ ārabbha sati.
세존이시여, 그러면 그때
세존에 대한 저의 마음챙김은 흐리멍덩하게 되고
법에 대한 저의 마음챙김은 흐리멍덩하게 되고
승가에 대한 저의 마음챙김은 흐리멍덩하게 됩니다.'
'ettāvatā kho, āvuso sāriputta, bhikkhu assutañceva dhammaṃ suṇāti,
sutā cassa dhammā na sammosaṃ gacchanti,
ye cassa dhammā pubbe cetasā samphuṭṭhapubbā te ca samudācaranti, aviññātañca vijānātī”ti.
도반 사리뿟따여, 이렇게 비구가 배우지 못한 법을 배우고, 배운 법을 잊어버리지 않고,
전에 마음에 와 닿은 법들이 마음에 남아있고(*to be current), 모르던 것을 알게 됩니다.'
'seyyathāpi, bhikkhave, purisassa ucchaṅge nānākhajjakāni ākiṇṇāni —
tilā taṇḍulā modakā badarā. so tamhā āsanā vuṭṭhahanto satisammosā pakireyya .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사람의 허리에 달린 주머니에 깨와 쌀과 사탕과 건포도 등
여러 가지 먹을 것을 넣어두고는 그 자리에서 일어날 때
마음챙김을 놓아버려 쏟아버리는 것과 같다.
“ucchaṅgapañño puriso, seyyo etena vuccati.
abhikkhaṇampi ce hoti, gantā bhikkhūna santike.
“ādiṃ kathāya majjhañca, pariyosānañca tādiso.
nisinno āsane tasmiṃ, uggahetvāna byañjanaṃ.
vuṭṭhito nappajānāti, gahitaṃ hissa mussati.
통찰지가 허리에 달린 주머니와 같은 사람 그는 이 사람보다는 나아서
자주 비구 곁에 가서 자리에 앉아서는 법문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이해지만
일어설 때 뜻과 문장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배운 것을 잊어버린다.'
'rūpaṃ disvā sati muṭṭhā, piyaṃ nimittaṃ manasi karoto.
sārattacitto vedeti, tañca ajjhosa tiṭṭhati.
형색을 보고 마음챙김을 놓아버리고
아름다운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는
애욕에 물든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거기에 묶여 있습니다.
…
“na so rajjati dhammesu, dhammaṃ ñatvā paṭissato.
virattacitto vedeti, tañca nājjhosa tiṭṭhati.
“yathāssa jānato dhammaṃ, sevato cāpi vedanaṃ.
khīyati nopacīyati, evaṃ so caratī sato.
evaṃ apacinato dukkhaṃ, santike nibbānamuccatī”ti.
마음챙기면서 법을 알고 그것에 물들지 않는 자는
애욕에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거기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그는 법을 알고 아울러 느낌도 감수하지만
[괴로움은] 소멸하고 쌓이지 않나니 그는 이처럼 마음챙기며 유행합니다.
이처럼 괴로움을 쌓지 않는 자에게 열반은 가깝다고 말하나이다.'
그러면 asammosa는 sammosa의 부정으로 sati의 이중부정 즉 동의어가 된다.
sati의 부정어로는 asati와 sammosa가 나타나고 다음과 같은 정형구가 있다.
'āraddhaṃ kho pana me, bhikkhave, vīriyaṃ ahosi asallīnaṃ, upaṭṭhitā sati asammuṭṭhā,
passaddho kāyo asāraddho, samāhitaṃ cittaṃ ekaggaṃ.
비구들이여, 내게는 불굴의 정진이 생겼고, 마음챙김이 확립되어 잊어버림이 없었고,
몸이 경안하여 교란하지 않았고, 마음이 집중되어 일념이 되었다.'
정진은 시작되어 물러남이 없고(āraddha=asallīna),
기억은 확립되어 잊어버리지 않고(upaṭṭhitā=asammuṭṭhā),
몸은 경안하여 흔들림이 없고(passaddho=asāraddho), 마음은 삼매에 들어 안정되었다.
앞의 세 부분은 부정어를 사용하여 동의어로 나타난다.
특히 (upaṭṭhitā=asammuṭṭhā)의 upaṭṭhita는 sati의 동의어로 흔히 '확립'이라고 번역한다.
upaṭṭhita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언급하겠다.
이와 같은 정형구는 경문의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정형구와 다른 표현도 경문에 나타난다.
'āraddhaṃ kho pana me, aggivessana, vīriyaṃ hoti asallīnaṃ,
upaṭṭhitā sati asammuṭṭhā,
sāraddho ca pana me kāyo hoti appaṭippassaddho
teneva dukkhappadhānena padhānābhitunnassa sato.
악기웻사나여, 비록 내게는 불굴의 정진이 생겼고 나태하지 않았고
마음챙김이 확립되어 잊어버림이 없었지만
고통스러운 용맹정진으로 인해 나의 몸이 극도로 긴장되었고 안정되지 않았다.'
앞부분은 공통되나 '몸은 경안하여 흔들림이 없고(passaddho kāyo asāraddho)' 대신에
'몸이 극도로 긴장되었고 안정되지 않았다 sāraddho kāyo appaṭippassaddho'로 나타난다.
위 경문은 세존께서 보살시절 그 당시 무색계 선정의 최고봉이라고 알려진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를 수행하셨지만 원하시는 성과를 얻지 못하고
그 당시 많이 수행하든, 나중에는 세존께서 극단(삿된 수행)이라고 말씀하신
몸(身)을 괴롭히는 苦行을 하시든 상황에 대한 말씀에 나타나는 내용으로
'정진'과 '기억'이 작동함(upaṭṭhitā sati asammuṭṭhā)에도
몸은 '경안'하지 못하여 '삼매'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 내용이다.
같은 경문에 현겁의 최대 사건일 수도 있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타난다.
'tassa mayhaṃ, aggivessana, etadahosi —
‘abhijānāmi kho panāhaṃ pitu sakkassa kammante sītāya jambucchāyāya nisinno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itā.
siyā nu kho eso maggo bodhāyā’ti?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삭까족의 농경제 의식을 거행하실 때 나는 시원한 잠부 나무 그늘에 앉아서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물렀던 적이 있었는데,
혹시 그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 되지 않을까?'
tassa mayhaṃ, aggivessana, satānusāri viññāṇaṃ ahosi —
‘eseva maggo bodhāyā’ti.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그 기억을 따라서 이런 알음알이가 [즉시에] 일어났다.
'이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다.'”'
위 내용에서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abhijānāmi 머물렀던 '적'이 있었는데'와 'satānusāri viññāṇaṃ '기억'을 따라서 이런 알음알이'에서
'적'이라고 번역된 abhijānāmi(/abhijānāti)는 自証(/自內證, abhiññā)으로 한역하고
[초불]에서는 '최상의 지혜'라고 번역되는 단어로서 6신통에서도 나타나지만
abhijānāmi(/abhijānāti)의 용례에서 '기억한다.'라고 번역되면 적절한 경우가 무수히 나타나고
[초불]에서도 '기억한다.'라고 번역된 경우가 있으며 [밀린다팡하]에서는 아예
sati의 한 종류로서 '직접 경험하게 알게 된 것'에 의한 기억의 의미로
이와 반대되는 간접적인 정보에 대한 '기억'과 대비되게 설명한다.
경문에 나타나는 후자의 대표적인 표현은 'saraṃ buddhāna sāsanaṃ 부처님들의 교법을 기억'이다.
'buddho janindatthi manussaloke,
kāmābhibhū sakyamunīti ñāyati.
tasseva te puttā satiyā vihīnā,
coditā mayā te satimajjhalatthuṃ.
부처님은 인간의 세상에서 지배자입니다.
그분은 감각적 욕망을 다스리는 사꺄무니라고 알려졌습니다.
이들은 그분의 아들들인데 마음챙김을 놓아버렸습니다.
저의 질책을 받은 그들은
마음챙김을 다시 가지게 되었습니다. …
tesaṃ, bhante, gopakena devaputtena paṭicoditānaṃ
dve devā diṭṭheva dhamme satiṃ paṭilabhiṃsu kāyaṃ brahmapurohitaṃ,
eko pana devo kāme ajjhāvasi.
세존이시여, 그들은 신의 아들 고빠까의 질책을 받은 뒤 두 명의 신은
그때 그 자리에서 바로 마음챙김을 닦아서 범보천의 신의 몸을 받았으며
한 명은 계속 감각적 욕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
tesaṃ duve vīriyamārabhiṃsu,
anussaraṃ gotamasāsanāni.
“idheva cittāni virājayitvā,
kāmesu ādīnavamaddasaṃsu.
그들 가운데 두 명은 정진을 시작하여
고따마의 교법을 계속해서 생각하였다.
바로 여기서 마음을 티끌이 없게 한 뒤
감각적 욕망들에서 위험을 보았다.' <*이것이 六六法이다.>
'satānusāri viññāṇaṃ 기억을 따라서 이런 알음알이'와 비슷한 표현이 한 군데 나타난다.
'atītaṃ kho, cunda, addhānaṃ ārabbha tathāgatassa satānusāri ñāṇaṃ hoti;
so yāvatakaṃ ākaṅkhati tāvatakaṃ anussarati.
과거에 대하여 여래에게 기억에 따른 앎이 있다. 그는 원하는 만큼 무엇이든 기억한다.'
여기서도 satānusāri와 anussarati에서의 anu-s-sati와 sati를 특별하게 구별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구분하지 않고 쓰는 경우는 자주 나타난다.
그리고 '기억'과 '앎(知)'의 연관성은 상보적임을 경문에서 자주 접할 수 있다.
abhijānāti(abhiññā)는 어떤 곳에서는 sati의 동의어로 쓰일 수 있다.
'“abhijānāmahaṃ, aggivessana, gimhānaṃ pacchime māse pacchābhattaṃ piṇḍapātapaṭikkanto
catugguṇaṃ saṅghāṭiṃ paññapetvā dakkhiṇena passena sato sampajāno niddaṃ okkamitā”ti.
악기웻사나여, 나는 여름의 마지막 달에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서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서 깔고 오른쪽 옆구리로 누워
마음챙기고 잘 알아차리면서[正念·正知] 잠을 잤던 것을 기억한다.
atthi kho, brahme, ābhassarā nāma kāyo yato tvaṃ cuto idhūpapanno.
tassa te aticiranivāsena sā sati pamuṭṭhā, tena taṃ tvaṃ na jānāsi na passasi;
tamahaṃ jānāmi passāmi.
evampi kho ahaṃ, brahme, neva te samasamo abhiññāya, kuto nīceyyaṃ?
atha kho ahameva tayā bhiyyo.
범천이여, 광음천의 신이라고 불리는 몸이 있으니 그대는 그곳에서 떨어져 이곳에 태어났다.
그대가 여기 너무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기억을 잊어버려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알고 본다.
범천이여, 이와 같이 신통지에 관한 한 나는 그대와 동등하지 않는데
어떻게 내가 그대보다 열등하겠는가? 오히려 내가 그대보다 더 수승하다.
“ito kho so, vaccha, ekanavuto kappo yamahaṃ anussarāmi,
nābhijānāmi kañci ājīvakaṃ saggūpagaṃ aññatra ekena; sopāsi kammavādī kiriyavādī”ti.
왓차여, 내가 지금부터 구십한 겁을 회상해 보더라도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지와까로서 몸이 무너진 뒤에 천상에 태어난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업의 교설을 따르고 [도덕적] 행위의 교설을 따르는 자였다.
'“ito so, gāmaṇi, ekanavutikappe yamahaṃ anussarāmi,
nābhijānāmi kiñci kulaṃ pakkabhikkhānuppadānamattena upahatapubbaṃ.
촌장이여, 내가 지난 91겁을 기억해 보건데 전에 어떤 가문도
단지 요리된 탁발음식을 공양한 것만으로 파멸된 가문을 나는 알지 못한다.'
논에서는 sati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새김은 그것에 의해서 기억하는 까닭에, 스스로 기억하는 까닭에,
그것이 기억하는 것 자체이기 때문에 새김이다.
그것은 부유하지 않음을 특징으로 삼고,
잊지 않음을 기능으로 삼고,
수호를 현상으로 삼거나 경계에 직면한 것을 현상으로 삼고,
견고한 지각을 토대로 삼거나 몸 등의 새김의 토대로 삼는다.
또한 기둥처럼 대상에 견고하게 확립되어 있고,
문지기처럼 시각의 문 등을 수호한다고 보아야 한다. [성전협회]
Saranti tāya, sayaṃ vā sarati, saraṇamattameva vā esā ti sati.
Sā apilāpana lakkhaṇā, asammoharasā,
ārakkhapaccupaṭṭhānā, visayabhimukhabhāva paccupaṭṭhānā vā,
thirasaññāpadaṭṭhānā, kāyādisatipaṭṭhāpadaṭṭhānā vā,
ārammaṇe daḷhapatiṭṭhitattā pana esikā viya cakkhudvārādirakkhaṇato dovāriko viya ca daṭṭhabbā.
"이것 때문에 기억(Saranti), 혹은 이것은 그 스스로 기억하고,
혹은 단지 기억하기 때문에 마음챙김이라 한다.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apilāpana)을 특징으로 한다.
잊지 않는 것(asammosa)을 역할로 한다.
보호하는 것(ārakkha)으로 나타난다.
혹은 대상과 직면함(visayabhimukhabhāva)으로 나타난다.
강한 인식(thirasaññā)이 가까운 원인이다.
혹은 몸 등에 대해서 마음챙김을 확립함[念處, satipaṭṭhā]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기둥처럼 대상에 든든하게 서 있기 때문에(patiṭṭhitattā),
혹은 눈 등의 문을 지키기 때문에(rakkhaṇato) 문지기처럼 보아야 한다." [초불]'
경문에 의해서도 sati의 의미가 드러남에도 굳이 남방 상좌부의 부동의 준거라고 하는
청정도론의 설명을 가져온 이유는
'기억하는 것 자체이기 때문에 새김', '단지 기억하기 때문에 마음챙김'에서도 알 수 있고
문맥상으로도 '기억'이라는 것이 명확하다. 결론적으로 청정도론에서도 기억의 의미로 설명한다.
그럼에도 굳이 '부유하지 않음' 내지 '깊이 들어가는 것(apilāpana)'으로
번역한 것에 대한 의견이다.
apilāpana는 본 글의 자료가 되는 4부 니까야에는 나타나지 않는 단어이다. 굳이 찾으면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법을 잘 배운다. 그것은 경(經), … 문답[方等]이다.
그는 이러한 법들을 귀로 들은 뒤 외워서 친숙하게 하고 마음으로 숙고하고
견해로 완전히 꿰뚫는다.
so muṭṭhassati kālaṃ kurumāno aññataraṃ devanikāyaṃ upapajjati.
tassa tattha sukhino dhammapadā plavanti.
dandho, bhikkhave, satuppādo; atha so satto khippaṃyeva visesagāmī hoti.
sotānugatānaṃ, bhikkhave, dhammānaṃ, vacasā paricitānaṃ, manasānupekkhitānaṃ,
diṭṭhiyā suppaṭividdhānaṃ ayaṃ paṭhamo ānisaṃso pāṭikaṅkho.
그는 마음챙김을 놓아버리고 죽어서 어떤 신의 무리에 태어난다.
거기서 행복한 그에게 법문의 구절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비구들이여, 그에게 마음챙김이 일어나는 것은 느리다.
그러나 그 중생은 재빨리 특별함으로 인도된다.'
이어지는 경문(A4:191)의 내용도 모두 읽어 보길 권한다. 여기서는
'dhammapadā plavanti 법문의 구절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가 전승에 따라
'dhammapadāpilapanti.' 혹은 'dhammapadā pilapanti' 혹은
'dhammapadāni palavanti'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논서의 apilāpana가
본 경문의 'api-lapanti(to recite, 列擧(羅列) 혹은 반복하다. lap:중얼거리다)'라는 의미라면
혹은 '떠오른다. plavanti(/pilapanti)'라는 의미라고 하더라도
본문의 muṭṭhassati 혹은 satuppādo와 연관시켜보면
'기억이 나서 법구를 암송한다.' 혹은 '법구가 떠오른다.'라는 의미로 연결된다.
(*apilāpana : [nt.] non-floating. [fr. api + lap] counting up, repetition)
여기서도 muṭṭhassati는 sati(/satuppādo)와 상대가 되는 의미이다.
'tattha satisambojjhaṅge tāva saraṇaṭṭhena sati.
sā panesā upaṭṭhānalakkhaṇā, apilāpanalakkhaṇā vā.
기억한다는 뜻(saraṇaṭṭha)에서 마음챙김(sati)이다. 특징은 확립함이다. 혹은 반복함이다.[초불]'
'vuttampi hetaṃ
“yathā, mahārāja, rañño bhaṇḍāgāriko rañño sāpateyyaṃ apilāpeti,
ettakaṃ, mahārāja, hiraññaṃ, ettakaṃ suvaṇṇaṃ, ettakaṃ sāpateyyanti,
“마치 왕의 창고지기가 '이만큼의 금이 있고, 이만큼의 은이 있고, 이만큼의 재물이 있다.'라고
왕의 재물을 반복(*해서 생각 - 기억)하듯이,
evameva kho, mahārāja, sati uppajjamānā
kusalākusalasāvajjānavajjahīnapaṇītakaṇhasukkasappaṭibhāge dhamme apilāpeti.
그와 같이 마음챙김이 있을 때(*uppajjamāna <uppajjati)
유익함과 해로움, 비난받아 마땅함과 비난받을 일이 없음, 저열함과 수승함, 흑백으로 상반되는
여러 법을 반복해서 생각(*나열/열거)한다.
ime cattāro satipaṭṭhānā”ti (mi. pa. 2.1.13) vitthāro.
이것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다.”(Minl.37)라고,'
'aratiṃ pajahāsi sato, bhavāsi sataṃ taṃ sārayāmase.
따분함 없애고 그대는 마음챙기시오.
참된 사람들 삶의 방식 내가 상기시켜 주리다.'
satuppādo(<sati uppajjati)라는 표현이 경문이 많이 나타난다.
'na me, bhikkhave, tesu bhikkhūsu anusāsanī karaṇīyā ahosi;
satuppādakaraṇīyameva me, bhikkhave, tesu bhikkhūsu ahosi.
나는 그 비구들에게 더 이상 교계를 할 필요가 없었다.
비구들이여, 나는 다만 그 비구들에게 마음챙김을 일으키도록 했다.'
같은 의미의 uppādeti 혹은 udapādi가 나타나는 경문이다.
'gilānake upasaṅkamitvā satiṃ uppādeti —
‘arahaggataṃ āyasmanto satiṃ upaṭṭhāpethā’ti;
환자들에게 다가가서
' 존자들은 가장 값진 것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십시오. '라고
마음챙김을 일으키도록 한다.'
'“tassa mayhaṃ, bhante, bhagavantaṃyeva ārabbha sati udapādi —
‘ aho nūna bhagavā, aho nūna sugato, yo imesaṃ dhammānaṃ sukusalo ’ ti.
세존이시여, 그때 제게는 세존에 대한 기억이 일어났습니다.
' 오, 참으로 세존이 계시는구나. 오, 참으로 선서(善逝)께서 계시는구나.
그분이야말로 이러한 법들에 아주 능통한 분이시지. '라고.'
'disvāna bhagavantaṃyeva ārabbha sati udapādi —
“ imāni kho tāni rukkhamūlāni pāsādikāni pasādanīyāni appasaddāni appanigghosāni
vijanavātāni manussarāhasseyyakāni paṭisallānasāruppāni,
yattha sudaṃ mayaṃ taṃ bhagavantaṃ payirupāsāma arahantaṃ sammāsambuddhan ”ti.
보고는 세존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 이 나무 밑은 아름답고 멋있고 조용하고 소음이 없고 한적하고 인적이 드물고
그 아래에서 한거하기에 좋다.
전에 우리는 이런 곳에서 아라한이시고 정등각자이신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는 했다. ”'
'“idha tvaṃ, nandiya, tathāgataṃ anussareyyāsi —
‘ itipi so bhagavā arahaṃ sammāsambuddho vijjācaraṇ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sārathi, satthā devamanussānaṃ buddho bhagavā ’ti.
iti kho te, nandiya, tathāgataṃ ārabbha ajjhattaṃ sati upaṭṭhāpetabbā.
난디야여, 그대는 이와 같이 여래를 대상으로 안으로 마음챙김을 확립해야 한다.”'
이상의 경문의 용례에 의해서도 anussareyyāsi는 sati와 같은 의미이고
'생각' 혹은 '마음챙김'이라는 번역도 모두 '기억'이라는 의미이다.
'“yāvakīvañca, bhikkhave, bhikkhū paccattaññeva satiṃ upaṭṭhāpessanti —
‘ kinti anāgatā ca pesalā sabrahmacārī āgaccheyyuṃ,
āgatā ca pesalā sabrahmacārī phāsuṃ vihareyyun ’ ti;
vuddhiyeva, bhikkhave, bhikkhūnaṃ pāṭikaṅkhā, no parihāni.
비구들 각자가(paccatta) 평소에 ' 다음 ' 과 같은
' 아직 오지 않은 좋은 동료 수행자들은 오게 하고,
이미 온 좋은 동료 수행자들은 편안하게 머물도록 하리라. ' 라는
' 기억 ' 이 확립되어 있으면[satiṃ upaṭṭhāpessanti]
퇴보하는 일은 없고 오직 향상이 기대된다.'
'기억이 확립되어야 한다. sati upaṭṭhāpetabbā'라는 표현은
이와 같이 따옴표 내의 내용이 '기억'의 구체적인 예는 경문에 무수히 나타난다.
호흡념 등의 서두에 나타나는 이 정형구가, 이와는 다른 상황에서도 나타난다.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 na tāvāhaṃ imaṃ pallaṅkaṃ bhindissāmi yāva me nānupādāya āsavehi cittaṃ vimuccissatī ’ ti.
그는 ' 취착 없이 내 마음이 번뇌에서 해탈할 때까지 이 가부좌를 풀지 않으리라. '라고
결심한다.'
위 예에서는 따옴표 내의 내용이 parimukhaṃ satiṃ이다.
그러므로 parimukhaṃ이 '얼굴' 등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역 앞부분의 '그는'이라든지 마지막 부분의 '결심한다.'는 '기억'의 의미가 제거된 번역이다.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는 '對面(abhi-mukha)'할 것에 대한 全반적인(pari-) 기억의 확립이다.
念修行의 4念處에서는 그 구체적 대상은 신수심법이고, 呼吸念에서는 第5境이 아닌 호흡이며,
身至念에서는 身 즉 (명색의) 色범위에 포함되는 것(색계까지)에 대한 sati이다.
그 외에 5장애 해결 등의 경문도 있다.
玄奘스님은 住對面念으로 (金剛經을) 漢譯하였다고 한다.
본 글에 맞게 의역하여 해석하면 '對面(할 것)에 대한 念을 住(=확立)하고서.'
'kattha ca, bhikkhave, satindriyaṃ daṭṭhabbaṃ?
catūsu satipaṭṭhānesu — ettha satindriyaṃ daṭṭhabbaṃ.
비구들이여, 그러면 마음챙김의 기능은 어디서 봐야 하는가?
마음챙김의 기능은 여기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satipaṭṭhānesu)에서 봐야 한다.
“katamañca, bhikkhave, satindriyaṃ?
yaṃ kho, bhikkhave, cattāro satipaṭṭhāne ārabbha satiṃ paṭilabhati —
idaṃ vuccati, bhikkhave, satindriyaṃ.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마음챙김의 기능인가?
비구들이여,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satipaṭṭhāne)을 기반으로 얻어진 마음챙김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마음챙김의 기능이라 한다.'
위 경문에서 paṭṭhānesu/paṭṭhāne란 확립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대상인 신수심법을 말한다.
앞서 upaṭṭhitā sati asammuṭṭhā에서 upaṭṭhitā와 asammuṭṭhā는 sati의 동의어라고 말했다.
upaṭṭhitā가 다른 구문에서 쓰이면 '가까이 대기하면서 시중드는 侍者'라는 의미로도 쓰여서
기본적인 의미는 대기, 준비됨, 現前이라는 의미이다.
직역하면 近立이고 확립이라고 번역하면 적당하다.
그러므로 upaṭṭhitā는 확립이라고 번역하고 paṭṭhānesu는 딛고 설 자리(處)
혹은 출발하는(發趣論의 發趣) 토대가 되는 즉 대상들이라는 의미로서
구체적으로는 신수심법이라는 수행주제를 말한다.
이 두 단어를 혼용하여 번역된 경우가 많은데 분별하여야 한다.
paṭṭhānāna에 대해서는 다음 경문(S47:42)을 참고하라.
'catunnaṃ, bhikkhave, satipaṭṭhānānaṃ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desessāmi.
ko ca, bhikkhave, kāyassa samudayo?
āhārasamudayā kāyassa samudayo; āhāranirodhā kāyassa atthaṅgamo.
…
manasikārasamudayā dhammānaṃ samudayo; manasikāranirodhā dhammānaṃ atthaṅgamo”ti.'
신수심법의 법에 대해서 니까야에서는 作意의 集은 法의 集으로 나타난다.
이 부분에 대해서 雜阿含經24卷 609經(集經)에는
'憶念集 則 法集 憶念滅 則 法沒'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니까야의 표현은
'satādhipateyyā sabbe dhammā, 어떠한 法이든 領導(*끝부분 참조)하는 것은 念'으로 나타난다.
'imesaṃ kho, brāhmaṇa, pañcannaṃ indriyānaṃ nānāvisayānaṃ nānāgocarānaṃ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ṃ paccanubhontānaṃ mano paṭisaraṇaṃ,
manova nesaṃ gocaravisayaṃ paccanubhotī”ti.
바라문이여, 이처럼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각각 다른 대상과 각각 다른 영역을 가져서
서로 다른 대상과 영역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들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마노[意]를 의지한다. 마노[意]가 그들의 대상과 영역을 경험한다.
“manassa kho, brāhmaṇa, sati paṭisaraṇan”ti.
바라문이여, 마노[意]는 마음챙김을 의지한다.'
이와 같이 念과 作意가 비슷한 역할 혹은 일정한 연결(念→作意/혹은 →意)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念)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여리)作意가 가능하고
그러면 수행을 통하여 앎(知)을 지닌 상태에서 見(정견/위빳사나)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失念/邪念/正)念 → (비여리/여리)作意는 위 경우만이 아니고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작동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parato ca ghoso, yoniso ca manasikāro.
Ime kho, āvuso, dve paccayā sammādiṭṭhiyā uppādāyā’’ti.
다른 이로부터 듣는 것<*을 기억하는 상태>과 지혜롭게 잡도리함입니다.
도반이여, 이 두 가지 조건이 바른 견해를 생기게 합니다.'
'manasikārena mānasaṃ gaṇhāti 作意에 의해서 意를 捕捉(잡는다).'(mi)
'taṃ kiṃ maññatha, bhikkhave, api nu so puriso amuṃ telapattaṃ amanasikaritvā
bahiddhā pamādaṃ āhareyyā”ti? “no hetaṃ, bhante”.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데도 그 사람이 그 기름 단지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밖으로 방일한 채 가져가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upamā kho myāyaṃ, bhikkhave, katā atthassa viññāpanāya. ayaṃ cevettha attho —
samatittiko telapattoti kho, bhikkhave, kāyagatāya etaṃ satiyā adhivacanaṃ.
비구들이여, 이 비유는 뜻을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 내가 만든 것이다. 그 뜻은 이와 같다.
비구들이여, 기름으로 가득 찬 단지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두고 한 말이다.'
'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 – kāyena vācāya manasā.
비구들이여, 의도가 업이라고 나는 말하노니
의도한 뒤 몸과 말(*尋>語)과 마노로 업(…見)을 짓는다.'
그래서 '횡설수설'하는 경우에 '정신 차려라.'라는 의미로 다음과 같은 경문이 나타나는 것 같다.
'satiṃ, ayyaputta, upaṭṭhapehi, mā vippalapī”ti.
주인님, 마음챙김<*念>을 확립하십시오. 쓸데없는 말(*尋>語)을 하지 마십시오.'
'“manasi karohi, gahapati , manasi karitvā kho, gahapati, byākarohi.
na kho te sandhiyati purimena vā pacchimaṃ, pacchimena vā purimaṃ.
장자여, 장자여, 마음에 잘 잡도리하여<*作意> 설명(*尋>語)하라.
그대는 앞의 말과 뒤의 말이 일치하지 않고 뒤의 것은 앞의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위 경문의 [憶念의 集과 作意의 集]처럼 [念과 作意]가 연결 되는 상황이다.
다시 處와 近立으로 돌아오면
'te catūsu satipaṭṭhānesu suppatiṭṭhitacittā viharanti. katamesu catūsu?
그들은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 [四念處]에<*satipaṭṭhānesu>
마음을 잘 확립하여<*patiṭṭhita = upaṭṭhita> 머문다. 무엇이 넷인가?'
그러므로 念處라고 한역된 satipaṭṭhānāna의 의미는
가. 미래-앞으로 수행할 혹은 현재 수행의 대상인 身受心法에 대한 念念不忘(즉 집중)하는 기억.
나. 현재-지금 수행하고 있는 身受心法에 대해서 알게 된 경험(無常 등)이 기억됨.(안 것을 기억)
다. 과거-경험한 내용이 현재 혹은 미래에도 기억나서 현전함.(기억나서 앎)
네이버 사전에는 '기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
2 사물이나 사상(事象)에 대한 정보를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정신 기능.'
'“katamañca, bhikkhave, satipaṭṭhānaṃ?
idha,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 pe ...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마음챙김의 확립인가?<*가. 수행주제인 토대들에 대한 기억>
…
“katamā ca, bhikkhave, satipaṭṭhānabhāvanā?
idha, bhikkhave, bhikkhu samudayadhammānupassī kāyasmiṃ viharati,
vayadhammānupassī kāyasmiṃ viharati, samudayavayadhammānupassī kāyasmiṃ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는 것인가? …'<*나. 集滅-無常隨觀>
'etha tumhe, āvuso, kāye kāyānupassino viharatha
ātāpino sampajānā ekodibhūtā vippasannacittā samāhitā ekaggacittā,
kāyassa yathābhūtaṃ ñāṇāya;
그것은 '오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무시오.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하나에 몰입되고,
마음은 맑고, 삼매에 들고, 마음이 하나에 집중되어 몸을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서 머무시오.'
이와 같이 알 것에 대한 기억과, 그 기억에 의해서 알게 되고,
알게 된 것을 기억하며, 기억했으므로 그 이후에도 알게 된다.
때로는 잠시 망각했더라도 다시 기억나면 삼매에 들게 된다.
'마노로 법을 지각하고 사랑스러운 법에도 홀리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는 법도 혐오하지 않는다.
그는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머물고 마음은 제한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그는 이미 일어난 삿되고 해로운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어버리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통찰지를 통한 해탈[慧解脫]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단속한다.
“tassa ce, bhikkhave, bhikkhuno evaṃ carato evaṃ viharato
kadāci karahaci satisammosā uppajjanti, pāpakā akusalā sarasaṅkappā saṃyojaniyā,
dandho, bhikkhave, satuppādo.
atha kho naṃ khippameva pajahati vinodeti byantīkaroti anabhāvaṃ gameti.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머물 때
그가 이따금씩 마음챙김을 놓아 버리기(*satisammosā) 때문에
족쇄와 관계된 기억과 사유<*sarasaṅkappā>가 있는 나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일어나게 되면
비록 마음챙김이 느리게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는 즉시에 그것을 버리고 제거하고 끝장내고 존재하지 않게 한다.
evañhi so, bhikkhave, goṇo kiṭṭhādo gāmagato vā araññagato vā,
ṭhānabahulo vā assa nisajjabahulo vā na taṃ kiṭṭhaṃ puna otareyya —
tameva purimaṃ daṇḍasamphassaṃ samanussaranto.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하면 곡식을 좋아하는 황소는
마을로 갈 때나 숲으로 갈 때나 오래 서 있을 때나 오래 앉아 있을 때나,
이전에 몽둥이로 세차게 맞은 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다시는 그 밭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evameva kho, bhikkhave, yato kho bhikkhuno chasu phassāyatanesu
cittaṃ udujitaṃ hoti sudujitaṃ,
ajjhattameva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 hoti, samādhiyati.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비구는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들에 대해서
마음을 조복 받고 잘 조복 받게 된다.
그러면 마음은 안으로 확립되고 안정되고 하나에 고정되고 삼매에 든다.'
'atha kho aggivessana, tamenaṃ rājā khattiyo muddhāvasitto hatthidamakaṃ āmantesi —
‘ehi tvaṃ, samma hatthidamaka, āraññakaṃ nāgaṃ damayāhi
āraññakānañceva sīlānaṃ abhinimmadanāya āraññakānañceva sarasaṅkappānaṃ abhinimmadanāya
āraññakānañceva darathakilamathapariḷāhānaṃ abhinimmadanāya
gāmante abhiramāpanāya manussakantesu sīlesu samādapanāyā’”ti .
그러면 관정한 끄샤뜨리야 왕은 코끼리 조련사를 불러서 말할 것이다.
'여봐라, 코끼리 조련사여. 이리오라.
그대는 야생 코끼리를 조련 하여 숲 속의 습관을 제어하고
숲 속에서 달리던 생각<*sarasaṅkappāna>을 제어하고 숲 속의 근심과 피로와 열병을 제어하고
마을에 사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습관을 길들이도록 하라.'
evameva kho, aggivessana, ariyasāvakassa ime cattāro satipaṭṭhānā cetasoupanibandhanāhonti
gehasitānañceva sīlānaṃ abhinimmadanāya gehasitānañceva sarasaṅkappānaṃ abhinimmadanāya
gehasitānañceva darathakilamathapariḷāhānaṃ abhinimmadanāya
ñāyassa adhigamāya nibbānassa sacchikiriyāya.
그와 같이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은
재가의 생활 습관을 길들이고 재가에 얽힌 생각<*기억 sarasaṅkappānaṃ>을 길들이고
재가 생활에 따른 근심과 피로와 열병을 길들여서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 성스러운 제자의 마음을 묶는다.'
…
“‘daḷhe khīle vā thambhe vā’ti kho, bhikkhave, kāyagatāya satiyā etaṃ adhivacanaṃ.
비구들이여, 여기서 튼튼한 말뚝이나 기둥이라는 것은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두고 한 말이다.'
'idha, bhikkhave, bhikkhuno cakkhunā rūpaṃ disvā uppajjanti
pāpakā akusalā sarasaṅkappā saṃyojaniyā.
tañce bhikkhu adhivāseti nappajahati na vinodeti na byantīkaroti na anabhāvaṃ gameti,
veditabbametaṃ, bhikkhave, bhikkhunā —
‘parihāyāmi kusalehi dhammehi’. parihānañhetaṃ vuttaṃ bhagavatāti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쇠퇴하는 법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눈으로 형색을 본 뒤 비구에게 족쇄와 관계된
기억과 사유가 있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不善法]이 일어난다.
만일 비구가 그런 것들을 인정해 버리고 버리지 않고 제거하지 않고 끝장 내지 않고
존재하지 않게 하지 않으면 그 비구는 이렇게 알아야 한다.
'나는 유익한 법들로부터 쇠퇴한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이런 것을 쇠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라고.'
위 경문들에서 sarasaṅkappā의 기억은 감각적 욕망과 연결된 갈애라는 의미이다.
'‘‘Āsā ca pihā abhinandanā ca,
anekadhātūsu sarā patiṭṭhitā;
Aññāṇamūlappabhavā pajappitā,
sabbā mayā byantikatā samūlikā’’ti.
기대와 열망 그리고 기쁨,
다수의 계(界)에 확립된 기억들,
앎의 없음을 뿌리로 하여 생겨난 갈망들,
나는 이 모든 것을 뿌리 째 끝내버렸다.[Netti]'
'passaddhakāyo suvimuttacitto,
asaṅkharāno satimā anoko.
aññāya dhammaṃ avitakkajhāyī,
na kuppati na sarati na thino .
“몸은 고요하고 마음은 잘 해탈하며
[의도를] 형성하지 않고 마음챙기고 집착하지 않으며
법을 완전하게 알아 일으킨 생각 없는 참선을 하고
분노하지 않고 추억하지 않고 둔감하지 않도다.'
위 두 게송에서 satimā은 바른 기억이고, sarati/sarā은 삿된 기억이다.
이와 같이 기억은 삿된 기억과 바른 기억으로 나눌 수 있다.
흔히들 sati는 무조건 선법이라고 설명하는데 그 근거로 제시하는
다음의 경문은 5根 사이에서 sati의 역할에 대한 설명이다.
'…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마음이 들떠 있을 때에는
고요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는 것이 올바른 때에 닦는 것이고,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는 것이 올바른 때에 닦는 것이고,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는 것이 올바른 때에 닦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에 의해서 들떠 있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satiñca khvāhaṃ, bhikkhave, sabbatthikaṃ vadāmī”ti.
비구들이여, 그러나 마음챙김은 항상 유익한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또한 기억 등의 5근의 달콤함, 위험함(ādīnava), 벗어남에 대한 경문도 있으며
'yato kho, bhikkhave, ariyasāvako imesaṃ pañcannaṃ indriyānaṃ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pajānāti —
ayaṃ vuccati, bhikkhave, ariyasāvako sotāpanno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ṇo”ti.'
때로는 기억하지 말고,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는 경문도 있다.
'“satīmato sadā bhaddaṃ, satimā sukhamedhati.
satīmato suve seyyo, verā na parimuccati.
“마음챙기는 자는 항상 행운이 함께하고
마음챙기는 자는 행복을 얻도다.
마음챙기는 자는 매일매일 더 나아지지만
결코 증오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다.'
'yasmiṃ, bhikkhave, puggale āghāto jāyetha, asatiamanasikāro tasmiṃ puggale āpajjitabbo;
evaṃ tasmiṃ puggale āghāto paṭivinetabbo.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에게 원한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해서
마음챙기지 않음과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을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그 사람에 대해서 생긴 원한을 제거해야 한다.'
'“tassa ce, bhikkhave, bhikkhuno tesampi vitakkānaṃ ādīnavaṃ upaparikkhato uppajjanteva
pāpakā akusalā vitakkā chandūpasaṃhitāpi dosūpasaṃhitāpi mohūpasaṃhitāpi,
tena, bhikkhave, bhikkhunā tesaṃ vitakkānaṃ asatiamanasikāro āpajjitabbo.
tassa tesaṃ vitakkānaṃ asatiamanasikāraṃ āpajjato
ye pāpakā akusalā vitakkā chandūpasaṃhitāpi dosūpasaṃhitāpi mohūpasaṃhitāpi
te pahīyanti te abbhatthaṃ gacchanti.
tesaṃ pahānā ajjhattameva cittaṃ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 hoti samādhiyati.
비구들이여, 그가 그 사유들의 위험을 면밀히 관찰하더라도
탐욕과도 관련되고 성냄과도 관련되고 어리석음과도 관련된, 나쁘고 해로운 사유들이 일어나면,
그 비구는 그 사유들을 마음챙기지 말아야 하고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가 그 사유들을 마음챙기지 않고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을 때
탐욕과도 관련되고 성냄과도 관련되고 어리석음과도 관련된,
나쁘고 해로운 사유들이 제거되고 사라진다.
그런 것들이 제거되기 때문에 마음이 안으로 안정되고 고요해지고 전일해져 삼매에 든다.'
이와 같이 기억이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와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cakkhuviññeyyānaṃ rūpānaṃ
iṭṭhānaṃ kantānaṃ manāpānaṃ manoramānaṃ lokāmisapaṭisaṃyuttānaṃ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매력적이고 세속적인 것과 연결 되어 있는,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이 있어
paṭilābhaṃ vā paṭilābhato samanupassato
pubbe vā paṭiladdhapubbaṃ atītaṃ niruddhaṃ vipariṇataṃ samanussarato uppajjati somanassaṃ.
그런 것을 획득하고는 획득이라고 여기거나
혹은 이미 지나갔고 소멸되었고 변해버린 이전에 획득한 것을 기억하면서 기쁨이 일어난다.
yaṃ evarūpaṃ somanassaṃ idaṃ vuccati gehasitaṃ somanassaṃ.
이러한 기쁨을 재가에 바탕 한 기쁨이라 한다.'
'“puna caparaṃ, bhikkhave, sāriputto sabbaso ākiñcaññāyatanaṃ samatikkamma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비구들이여, 다시 사리뿟따는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so tāya samāpattiyā sato vuṭṭhahati.
그는 그 증득에서 출정(出定)한다.
so tāya samāpattiyā sato vuṭṭhahitvā
ye dhammā atītā niruddhā vipariṇatā te dhamme samanupassati —
‘evaṃ kirame dhammā ahutvā sambhonti, hutvā paṭiventī’ti.
그는 그 증득에서 마음챙기며 출정하여 과거에 소멸하고 변해버린 그 법들을 관찰[隨觀]한다.
'이와 같이 이 법들은 없었는데 생겨나고, 있다가는 사라진다.'라고.'
'tathārūpānaṃ, bhikkhave, bhikkhūnaṃ dhammaṃ sutvā dvayena vūpakāsena vūpakaṭṭho viharati
— kāyavūpakāsena ca cittavūpakāsena ca.
so tathā vūpakaṭṭho viharanto taṃ dhammaṃ anussarati anuvitakketi.
비구들이여, 그러한 비구들로부터 법을 배워서
그는 몸이 멀리 떠남과 마음이 멀리 떠남이라는 두 가지 멀리 떠남을 갖추어 머물기 때문이다.
그는 이처럼 멀리 떠남을 갖추어 머물면서 그 법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계속해서 고찰한다.
…
yasmiṃ samaye,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upaṭṭhitāssa tasmiṃ samaye sati hoti asammuṭṭhā .
비구들이여,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身隨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물 때,
그에게 잊어버림이 없는 마음챙김이 확립된다.
yasmiṃ samaye, bhikkhave, bhikkhuno upaṭṭhitā sati hoti asammuṭṭhā,
satisambojjhaṅgo tasmiṃ samaye bhikkhuno āraddho hoti.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잊어버림이 없는 마음챙김이 확립될 때,
그때 그 비구에게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念覺支]가 생긴다.'
'‘ajjhattaṃ vimokkhā khvāhaṃ, āvuso, sabbupādānakkhayā
tathā sato viharāmi
yathā sataṃ viharantaṃ āsavā nānussavanti,
attānañca nāvajānāmī’ti.
evaṃ puṭṭhohaṃ, bhante, evaṃ byākareyyan”ti.
'도반들이여, 나는 안으로 해탈을 하였고 모든 취착이 다하였기 때문에
번뇌들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그러한 마음챙김으로 머물며,
또한 나 자신을 경멸하지 않습니다.'라고 저는 이렇게 설명하겠습니다.'
기억의 기능에 대한 여러 경문들이 있다.
'“katamañca, bhikkhave, satindriyaṃ?
idha, bhikkhave, ariyasāvako satimā hoti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so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vedanāsu ... pe ... citte ... pe ...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
idaṃ vuccati, bhikkhave, satindriyaṃ.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마음챙김의 기능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챙기는 자이다.
그는 최상의 마음챙김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 오래 전에 행하고 오래 전에 말한 것일지라도
모두 기억하고 생각해낸다.
그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느낌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마음챙김의 기능이라 한다.'
'“saddhassa hi, bhante, ariyasāvakassa āraddhavīriyassa etaṃ pāṭikaṅkhaṃ
yaṃ satimā bhavissati,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yā hissa, bhante, sati tadassa satindriyaṃ.
세존이시여, 참으로 믿음을 가졌고 열심히 정진하는 성스러운 제자에게는
'그는 마음챙기는 자이다. 그는 최상의 마음챙김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
오래 전에 행하고 오래 전에 말한 것일지라도 모두 기억하고 생각해낸다.'라는 것이 예상됩니다.
세존이시여, 그의 이러한 마음챙김이 바로 그가 가진 마음챙김의 기능입니다.'
*이러한 기억(念)이 그의 기억력(<念根) yā hissa sati tadassa satindriyaṃ.
'“seyyathāpi, bhikkhave, rañño paccantime nagare dovāriko hoti paṇḍito byatto medhāvī
aññātānaṃ nivāretā ñātānaṃ pavesetā abbhantarānaṃ guttiyā bāhirānaṃ paṭighātāya .
evamevaṃ kho, bhikkhave, ariyasāvako satimā hoti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satidovāriko, bhikkhave, ariyasāvako akusalaṃ pajahati, kusalaṃ bhāveti;
sāvajjaṃ pajahati, anavajjaṃ bhāveti; suddhaṃ attānaṃ pariharati.
iminā chaṭṭhena saddhammena samannāgato hoti.
비구들이여, 마치 왕의 국경에 있는 도시에
모르는 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아는 자들이 들어오는 것은 허락하여
내부의 사람들을 잘 수호하고 외부의 적들을 격퇴하기 위하여
현명하고 명석하고 슬기로운 수문장이 있듯이,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챙김을 한다.
그는 최상의 마음챙김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
오래 전에 행하고 오래 전에 말한 것일지라도 모두 기억하고 챙긴다.
비구들이여, 마음챙김의 수문장을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해로운 법[不善法]을 버리고 유익한 법[善法]을 개발하고,
비난받을 만한 일을 버리고 비난받을 일이 없는 일을 개발하고, 자신을 청정하게 유지한다.
그는 이러한 여섯 번째 좋은 법을 구족하였다.'
이상과 같은 정형구를 벗어난 예외적인 경문(A4:35)은
'satimā kho pana hoti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그는 마음챙김을 가진 자입니다.
그는 최상의 마음챙김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 오래전에 행하고 오래전에 말한 것일지라도
모두 기억하고 챙깁니다.'
'최상의 마음챙김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에 해당하는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가 빠진 경문이고 전후문맥상으로 없는 것이 적절하다.
이러한 점에서도 4념처를 수행함에 지혜(聰記, nepakkena)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sati가 반야인 것은 아니다.
'“sa kho so, mahānāma, ariyasāvako
imaṃyeva anuttaraṃ upekkhāsatipārisuddhiṃ āgamma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ati,
마하나마여, 이러한 성스러운 제자는 평온으로 인해 청정해진 최상의 마음챙김에 도달하여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 할 수 있습니다.
“ahañhi, bhante, yāvatakampi me iminā attabhāvena paccanubhūtaṃ
tampi nappahomi sākāraṃ sauddesaṃ anussarituṃ,
kuto panāhaṃ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issāmi, seyyathidaṃ —
ekampi jātiṃ dvepi jātiyo ... pe ...
iti sākāraṃ sauddesaṃ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issāmi, seyyathāpi bhagavā?
세존이시여, 저는 현재의 이 몸으로 경험한 것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해내는 것도 불가능한데
어떻게 제가 세존께서 하시는 것처럼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하여
즉 한 생, 두 생, …
이처럼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해낼 수 있겠습니까?'
금생은 물론이고 숙명통에서도 나타나듯이 과거에 대한 기억도 기억이지만
기억된 상태 혹은 미래에 할 것에 대한 기억도 sati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는 경문 도처에서 발견된다.
'pubbenivāso, bhikkhave, satiyā sacchikaraṇīyo.
비구들이여, 전생의 거주처가 마음챙김으로 실현해야 할 법들이다.'
'satova abhikkameyya, satova paṭikkameyya –
‘ mā maṃ kaṇṭako ’ti.
satova abhikkamāmi, satova paṭikkamāmi,
yāva udakabindumhipi me dayā paccupaṭṭhitā hoti –
‘ māhaṃ khuddake pāṇe visamagate saṅghātaṃ āpādesi ’nti.'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은 가시)
' 가시에 찔리지 않기를 ' 이라는
(작은 양의 물에도 혹시 미세한 생명체가 살고 있을 수 있으니
이런 유정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확립되어 있어)
' 생명이 다치지 않기를 ' 이라는
이와 같이 (自利利他에 대해) ‘ sato ’ 기억된 상태에서 앞으로 나아가거나 뒤로 되돌아온다.
'athassa anāthapiṇḍikassa gahapatissa etadahosi —
“akālo kho ajja bhagavantaṃ dassanāya upasaṅkamituṃ.
sve dānāhaṃ kālena bhagavantaṃ dassanāya gamissāmī”ti buddhagatāya satiyā nipajji.
rattiyā sudaṃ tikkhattuṃ vuṭṭhāsi pabhātanti maññamāno.
그러자 아나타삔디까 장자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세존을 친견하러 갈 적당한 시간이 아니다. 내일 이맘 때 쯤에 세존을 친견하러 가리라.'
그는 부처님을 향해서 마음챙김을 두고 누웠지만 새벽이 다 된 줄 알고 밤에 세 번이나 일어났다.'
'‘Kathañca, bhikkhave, satādhipateyyaṃ hoti?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마음챙김의 통달인가?
<*기억이 이끈다, 領導한다. 아래 따옴표 내의 내용에 대한 기억이 內로 잘 확립되어 있다.>
‘Iti aparipūraṃ vā ābhisamācārikaṃ sikkhaṃ paripūressāmi, paripūraṃ vā ābhisamācārikaṃ sikkhaṃ
tattha tattha paññāya anuggahessāmī’ti – ajjhattaṃyeva sati sūpaṭṭhitā hoti.
' 아직 성취되지 않은 선행에 관한 공부지음을 성취하리라.
이미 성취된 선행에 관한 공부지음을 모든 곳에서 통찰지로써 증장하리라. '라고
안으로 마음챙김이 잘 확립된다.'
'tena hi tvaṃ, ānanda, idampi chaṭṭhaṃ anussatiṭṭhānaṃ dhārehi.
idhānanda, bhikkhu satova abhikkamati satova paṭikkamati satova tiṭṭhati satova nisīdati
satova seyyaṃ kappeti satova kammaṃ adhiṭṭhāti.
idaṃ, ānanda, anussatiṭṭhānaṃ evaṃ bhāvitaṃ evaṃ bahulīkataṃ satisampajaññāya saṃvattatī”ti.
아난다여, 그렇다면 그대는 이것을 여섯 번째 계속해서 생각함의 장소로 호지하라.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마음챙겨서 나아가고 마음챙겨서 물러나고 마음챙겨서 서고
마음챙겨서 앉고 마음챙겨서 눕고 마음챙겨서 업무를 처리한다.
아난다여, 이것이 계속해서 생각함의 장소이니,
이와 같이 닦고 이와 같이 많이 [공부] 지으면 마음챙기고 알아차리게 된다.'
'“katamā ca, bhikkhave, samādhibhāvanā bhāvitā bahulīkatā satisampajaññāya saṃvattati?
idha, bhikkhave, bhikkhuno
viditā vedan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ṃ gacchanti;
viditā saññā ... pe ...
viditā vitakk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ṃ gacchanti.
ayaṃ, bhikkhave, samādhibhāvanā bhāvitā bahulīkatā satisampajaññāya saṃvattati.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삼매 수행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마음챙기고 알아차리게 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에게는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는 느낌들이 일어나고 머물고 꺼진다.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는 인식들이 일어나고 머물고 꺼진다.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는 생각들이 일어나고 머물고 꺼진다.
비구들이여, 이런 삼매 수행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마음챙기고 알아차리게 된다.'
'“tatra, bhikkhave, yvāyaṃ puggalo na ceva lābhī ajjhattaṃ cetosamathassa
na ca lābhī adhipaññādhammavipassanāya,
tena, bhikkhave, puggalena tesaṃyeva kusalānaṃ dhammānaṃ paṭilābhāya
adhimatto chando ca vāyāmo ca ussāho ca ussoḷhī ca appaṭivānī ca
sati ca sampajaññañca karaṇīyaṃ.
비구들이여, 이 가운데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지 못했고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도 얻지 못한 사람은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이러한 유익한 법들을 얻기 위해서
아주 강한 의욕과 노력과 관심과 분발과 불퇴전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행해야 한다.'
'ādittaṃ, bhikkhave, celaṃ vā sīsaṃ vā ajjhupekkhitvā amanasikaritvā
anabhisametānaṃ catunnaṃ ariyasaccānaṃ yathābhūtaṃ abhisamayāya
adhimatto chando ca vāyāmo ca ussāho ca ussoḷhī ca appaṭivānī ca
sati ca sampajaññañca karaṇīyaṃ.
비구들이여, 차라리 옷이 불타거나 머리가 불타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되겠지만
아직 관통하지 못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관통하기 위해서
그는 아주 강한 열의와 노력과 관심과 분발과 불퇴전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행해야 한다.'
'saṃkilesikā ceva dhammā pahīyissanti, vodāniyā ca dhammā abhivaḍḍhissanti,
paññāpāripūriṃ vepullattañca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i,
pāmujjaṃ ceva bhavissati pīti ca passaddhi ca sati ca sampajaññañca sukho ca vihāro.
[그대들이 이대로 도를 닦으면] 오염된 법들을 버리게 될 것이고
깨끗한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며 통찰지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그러면 환희가 있을 것이고 희열과 경안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 있을 것이다.
그런 머묾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natthi, khvāvuso, arahato uttari karaṇīyaṃ katassa vā paticayo;
api ca ime dhammā bhāvitā bahulīkatā
diṭṭhadhammasukhavihārā ceva saṃvattanti satisampajaññā cā”ti.
도반이여, 아라한이 다시 더 해야 할 것이란 없고 더 보태야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법들을 닦고 많이 [공부] 지으면
지금 · 여기에서 행복하게 머물게 되고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 있게 됩니다.'
'kathañca, bhikkhave, bhikkhu sato hoti?
idha,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vedanāsu vedanānupassī ... pe ... citte cittānupassī ... pe ...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evaṃ kho, bhikkhave, bhikkhu sato hoti.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마음챙기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느낌들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 머문다. …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 머문다.…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마음챙긴다.
“kathañca, bhikkhave, bhikkhu sampajāno hoti?
idha, bhikkhave, bhikkhu abhikkante paṭikkante sampajānakārī hoti,
ālokite vilokite sampajānakārī hoti, samiñjite pasārite sampajānakārī hoti,
saṅghāṭipattacīvaradhāraṇe sampajānakārī hoti, asite pīte khāyite sāyite sampajānakārī hoti,
uccārapassāvakamme sampajānakārī hoti,
gate ṭhite nisinne sutte jāgarite bhāsite tuṇhībhāve sampajānakārī hoti.
evaṃ kho, bhikkhave, bhikkhu sampajāno hoti.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알아차리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아갈 때도 물러날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면서[正知] 행한다.
앞을 볼 때도 돌아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구부릴 때도 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가사·발우·의복을 지닐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걸으면서·서면서·앉으면서·잠들면서·잠을 깨면서·말하면서·침묵하면서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알아차린다.
sato, bhikkhave, bhikkhu vihareyya sampajāno, ayaṃ vo amhākaṃ anusāsanī”ti.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그대들에게 주는 나의 간곡한 당부이다.'
그 외 자주 나타나는 표현들
buddhānussati ... dhammānussati ... saṅghānussati... sīlānussati... cāgānussati... devatānussati...
ānāpānassati... maraṇassati... kāyagatāsati... upasamānussati.
sativinayo
sati satiāyatane
첫댓글
앞선 글을 일부 보완한 내용입니다.
사띠가 기억이고, 시띠의 확립을 통해 기억이 현재에 발현되어 작용하는 데, 사띠와 사띠의 확립이 혼용되어 쓰이면서 사띠의 개념이 기억에서 새김, 마음챙김, 알아차림 등으로 넓은 스펙트럼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2023.10.24. 17:00 몇 자 수정하였습니다. 오타를 줄이는 것이.. ^^
[D. II. 303] : Idha bhikkhave bhikkhu santaṃ vā ajjhattaṃ sati-sambojjhaṅgaṃ (dhamma-vicaya-, viriya-, pīti-, passaddhi-, samādhi-, upekhā-sambojjhaṅgaṃ) ‘Atthi me ajjhattaṃ sati-sambojjhaṅgo ti’ pajānāti, Asantaṃ vā ajjhattaṃ sati-sambojjhaṅgaṃ ‘N’atthi me ajjhattaṃ sati-sambojjhaṅgo ti’ pajānāti. Yathā ca anuppannassa sati-sambojjhaṅgassa uppādo hoti tañ ca pajānāti ; yathā ca uppannassa sati-sambojjhaṅgassa bhāvanāya pāripūri hoti tañ ca pajānāti.
비구들이여, 여기에 한 비구가 안으로(ajjhattaṃ) 1.‘깨달음의 요소(覺支)’인 사띠(2.법에 대한 고찰, 3.정진, 4.기쁨, 5.안온, 6.집중, 7.평정)가 있으면,나에게는 안으로 깨달음의 요소인 사띠가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또는 안으로 깨달음의 요소인 사띠가 없으면,<나에게는 안으로 깨달음의 요소인 사띠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깨달음의 요소인 사띠가 생기면 그것을 분명히 알고, 생겨난 깨달음의 요소인 사띠가 발전(bhāvanā)되고 충만 되었을 때 그것을 분명히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