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州 5·18의 一片(일편) 사람들은 불편한 사실은 잊고, 유리한 상상만 남기기 쉽다 趙南俊 전 월간조선 이사
*김대중이 5·18을 주모했다고 볼 수는 없다, *전두환이 광주 학살범이라는 주장은 문제가 있다. *북한군 투입설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 *전남도청 근처에서 헬기가 기총사격을 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엊그제, 올해 51세인 사위가 관람객 1200만 명을 넘겼다는 영화 ‘서울의 봄’을 보았냐며 5·18의 진실에 대해 물어왔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내가 아는 5·18을 쓰고 싶었다. 다음은 사위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필자는 조선일보 사회부 국방부 출입기자로서 1980년 5월22일 부터 28일까지 1주일간 광주에서 활동했다.) <진실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신만이 아신다. 물리적 한계를 지닌 한 인간의 관점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은 한 개의 점에 불과할 것이다. 종합보고서를 본 사람조차 聯想(연상)하여 추론할 뿐이다. 보통 사람들의 기억 속에 불편한 사실은 잊히고, 유리한 상상만 살아남아 꿈틀거리며 자라나기 쉽다. 12·12로 실권을 쥔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는 ‘서울의 봄’을 기대하고 이어지는 학생들의 시위와 3김을 위시한 정치권의 활동을 보면서 국면 전환의 필요성을 절감한 나머지, 전군지휘관 회의를 거쳐 5·17 전국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계엄사는 포고령을 통해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런데 광주에서는 시위가 계속됐다. 5·18 오전에 전남대생들이 학교에 주둔한 군인들에게 돌을 던지며 시위했다. 시위대와 경찰의 攻防(공방)은 중요한 특성이 있다. 물리적 거리가 유지된다는 점이다. 시위대가 돌을 던지며 공격하면 경찰은 물러난다. 경찰이 페퍼포그, 최루탄을 쏘며 공격하면 시위대는 도망친다. 따라서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군인은 어디 그런가. 총알이 날아와도 ‘돌격’하는 명령이 내려지면 달려가야 하는 것이 군대다. 하물며 돌멩이 정도이랴. 시위대와 진압대 사이에 거리가 없어지니, 물리적 충돌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다. 5·18 아침부터 시위대에 시달린 경찰은 오후부터 군인들과 협동작전이 시작된다는 말을 들었다. 5·17 조치로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조선대에는 7공수여단(전북 익산 주둔)이 주둔해 있었다. 군은 시위진압 투입에 대비하여 평상시 ‘충정작전’이라는 훈련을 받는다. 요체는 초기 강경진압이다. 투입된 군은 檀木(단목) 진압봉으로 무자비하게 시위대를 구타했다. 이 장면을 본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너무 심하지 않냐” 항의했다. 군인들은 “너희는 뭐야” 하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시위대와 같은 强度(강도)로 시민들을 구타했다. 현장에 투입된 군인들은 정무적 판단을 할 수 없는 존재다. 지휘관들이 미리 광주의 특성을 파악하여 “시민들은 건들지 말라”고 지침을 줬어야 했다. 왜냐. 광주는 익명이 보장되는 서울, 부산 같은 대도시와 달리, 일종의 게마인샤프트다. 인구로만 보면 당시 75만 명으로 대도시 같지만, 길거리에서 만나면 대부분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많은 情(정)의 도시였다. 이런 근친감이 있으므로 광주 시민들은 서울, 부산의 경우와 달리, 진압부대의 난폭함을 보고 그냥 넘기지 못했던 것이다. 분노한 시위대는 기아자동차 공장에서 탈취한 APC(장갑차)와 택시 등을 동원하여 시위를 벌였다. 헤드라이트를 켜고 몰려오는 차량들을 보고 진압군은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5월19일, 진압군 장교 하나가 택시 헤드라이트를 향해 총을 쏘았다. 당시 병사에게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다. 진압군의 총탄에 희생자가 나오자, 시위대는 광주 근교 화순, 광산 등지의 예비군 무기고를 털어, 칼빈, 엠원 소총으로 무장했다. 진압군이 5월21일 전술적 퇴각을 할 때까지, 진압군과 시위대 사이에 수차례 교전이 이루어졌다. 5월27일 계엄군이 다시 전남 도청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도청을 사수하던 시위대원들이 여러 명 죽었다. 사망자 합계가 2백여 명이었다. 계엄군이 광주에서 일시 퇴각한 후, 광주는 자율 ‘시민공화국’이 되었다. 전남도청, 광주시청, 광주지방검찰청을 비롯한 관청이 문을 닫지 않았다. 공무원들은 출근했다. 광주 외곽은 계엄군이 포위했으나, 광주 교외 담양, 화순, 광산 등지에서 반입되는 쌀, 채소 등 생필품은 자유롭게 나가고 들어왔다. 치안부재 상태였지만 광주에 있는 동안, 은행, 금은방 등에 무장 강도가 들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난 뒤, 수사당국은 당시뿐 아니라, 여러 정권을 거치며 몇 차례 수사보고서를 작성했다. 여기에는 사망자와 부상자 숫자, 死因(사인) 등이 담겨 있다. 이게 내가 보고 들은 5·18의 전부다.> ◇몇 가지 쟁점 ▲김대중은 사태가 진압된 후, 광주사태와 관련, 내란음모사건으로 김상현, 이해찬, 이신범, 심재철 등과 함께 육군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됐다. 5·18 때 바로 구속된 김대중이 어떻게 내란음모를 획책했겠는가. 전남대 복학생 鄭東年(정동년)이 시위를 부추긴 측면은 부인할 수 없으나, 김대중이 5·18을 주모했다고 볼 수는 없다, ▲전두환이 광주 학살범이라는 주장은 문제가 있다. 전은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다. 지휘계선 상에 있지 않았다. 정호용 특전사령관도 부대를 계엄분소에 배속시켰다. 따라서 법률적 책임은 없다. 책임 계선은 정웅 향토사단장, 윤흥정 전투교육사령관, 진종채 2군사령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최규하 대통령이다. 다만, 전두환은 신군부의 실세였기 때문에, 계엄사령부의 결정에 실효적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의적 책임은 물을 수 있다고 본다. 전두환이 집권 시절, 사과를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군 투입설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 아마도 수많은 간첩들이 암약했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 좋은 기회를 놓칠 북한이 아니지 않은가. 간첩들은 다른 시민들보다 더 선량한 모습의 가면을 쓰고 다녔을 가능성이 높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수 있는 폭력행위에는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좀 이상한 사람이다 싶으면 시민군이 적대 관계에 있던 군에 신고했을 정도였으니까. ▲전남도청 근처에서 헬기가 기총사격을 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만약 그런 사실이 있었다면 엄청난 숫자의 시민들이 듣고, 보고, 그로 인인 피해자가 발생했어야 한다. 기총소사를 할 수 있는 캘리버 50의 위력은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은 다 안다. 그보다 훨씬 약한 엠원도 1m 간격으로 떼어놓고 18명을 관통하는 위력이 있다. 그로 인한 피해자가 있었다면 상처부위가 다른 사람과 달랐을 것이고, 사상자 종합보고서에 당연히 그 기록이 올라가 있었을 것이다. 있던 사실을 덮을 수 있을 만큼 광주는 親與(친여)나, 親軍(친군)이 아니다. 수천, 수만 명의 광주시민, 헬기조종사, 기총사수 등 증인이 너무 많다. 당시라면 몰라도 이후 수십 년 동안 계속 숨기기는 불가능하다. ▲검시 결과, 신원 不明(불명)자가 다수 나왔다더라, 밀매장 당한 희생자가 많을 것이다 등등, 별의별 소문이 나돌았으나, 누군가 정밀한 자료를 갖고 있는지는 몰라도, 내 수준에서는 확인할 길이 없는 부분이었다. 참고로, 5·18 초기, △2000~3000명 사망설(북한 방송에서 퍼뜨림)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다 죽인다(초기 투입된 부대는 전북 익산에 주재하던 7공수여단이었다)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태질했다(유탄에 맞아 숨진 임산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시위 여학생의 유방을 대검으로 잘라냈다(대검은 찌르기 용도이지 자르기 용도로 쓸 수 없다)는 등,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수많은 유언비어가 떠돌았음을 밝힌다. 언론부재(비상계엄 하에서는 모든 언론이 군의 검열을 받아야 한다)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