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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인 스크랩 선인봉 경송A길
티노(이영대) 추천 0 조회 53 07.09.06 16: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선인봉 경송A길○

 


-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서울의 소나무

 

 

 ◇ 후배들의 확보로 둘째 마디 침니를 건너 직상하는 최길용씨. 공재은씨와 함께 경송길 개척을 주도했다.



서울의 소나무’라는 뜻을 지닌 ‘경송’이란 말은 어딘지 친밀감이 묻어난다. 만일 그 이름에서 고향 동네와 친구를 연상할 수 있다면 필시 서울 태생이거나 소나무에 얽힌 추억을 가진 사람일 게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그냥 넘기지 못하는 일이 세상 도처에 널려있다.
그처럼 서울이 고향인 내게도 경송산악회와 연관지을 수 있는 일이 있다. 경송산악회는 종로구 수송동에 있던 수송전기고등학교 산악부로 출범했다. 1969년 경송이 태어나던 해 나는 시내 중심에 살다가 면목동이라는 변두리로 옮겨 살았다. 그런데 거기서 만난 친구들 중 상당수가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그 중 3명이나 수송전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80년 초에 첫 직장을 얻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 회사가 바로 수송전기고등학교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회사였다.


그곳에서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의 나날을 보냈으나 단지 산에 가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미련은 없지만 넥타이를 매고 꼬박 6년을 출근했던 그때를 수송동 시절이라 가슴에 담고 있다. 이 쯤 되고보니 수송과 경송이 생소하지 않을 수밖에. 수송전기고등학교는 1980년도에 35회를 끝으로 사라지고 대원고등학교로 바뀌었다.
그리고 경송산악회 역시 학교산악부를 떠나 일반산악회로 거듭나게 되었다. 학교산악부가 일반산악회로 바뀌어 명맥이 잘 유지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런데 경송은 이 점에서 성공을 거둔 사례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아마도 이들이 지향하는 등산관에 있는 듯싶다.


‘산이 가진 모든 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 산에서 만난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그 길은 경송이 걸어왔고 앞으로도 걸어 갈 길이라 한다. 탈퇴란 있을 수 없다는 이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산행가치는 ‘사람’이다. 어딘지 마음이 푸근해지는 대목이다. 그런 가치관 속에서 산을 올랐던 사람들을 도봉산 천만불상회에서 만났다. 그곳은 할머니가게와 함께 많은 이들의 추억을 담고 있는 곳이다. 등산학교를 두 군데나 졸업해 가방 끈이 길어졌다는 경송산악회 총무 나민씨의 모습이 보이자 회원들은 모두 배낭을 메고 일어섰다. 품이 넓어 보이는 산악회장 성연수씨보다 늦게 나타난 그는 한눈에도 활달하고 성격이 좋아 보인다.

- 끊임없는 볼트의 유혹

오랜만에 경송길을 가는 오늘의 화두는 루트가 끝나는 지점에 산재한 낙석이다. 작년에 지렛대를 이용하여 밑으로 굴려 내린 돌만 해도 20톤은 족히 된단다. 현재 좋은 방법으로 생각되는 낙석방지 대책의 하나는 잡목지대를 거쳐 정상까지 오르지 않고 루트의 하단부가 끝나는 셋째 마디 또는 다섯째 마디에서 하강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드프리 시대가 도래한 80년대 이후의 기존 루트 등반 스타일과도 어울리는 것이다. 경송길의 출발점은 이름에 걸맞게 아름드리 거목이 된 소나무 아래서 출발한다. 오늘의 A파티는 이명운·김도용·박건수, B파티는 성연수·차상철·송영주·나민씨가 배정되었고 그 중간에 내가 섰다. 등반대장 이명운이 줄을 묶고 선등하는 모습이 이곳만큼은 자신 있다는 표정이다.


그러나 첫 마디 슬랩이 5.10b로 매겨질 만큼 경송길은 헐렁하지 않다. 두 번째 볼트를 지나는 구간에서 몸놀림이 가벼운 명운씨의 짧은 슬립을 지켜보는 회원들은 잠시 긴장한다. 이 부분은 손끝 한마디로 잡히는 1cm 미만의 홀드를 정확히 찾아내서 잡고 또 밟아야 자유등반이 가능하다. 몸이 무거워진 옛날 클라이머들은 끊임없이 볼트의 유혹을 받기 마련이다. 김도용이 두 번째로 출발한다. 도용은 의정부 샤모니 암장의 고 김형진과 의정부고등학교의 같은 반 친구였으며 그와 등반을 같이하던 친구였다. 군살 없는 탄탄한 몸매를 가졌으나 오늘 선등의 자리는 등반대장이 차지했다.

 

몸집 큰 성연수 회장이 B파티 선등을 고수하는 것은 회장이란 직책을 십분 활용한 것이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밸런스 까다로운 슬랩을 밀리지 않고 잘도 오른다. 경송은 회장님도 선등 설만큼 힘 있는 모임이라는 것이 입증되는 셈이다. 슬랩에서 침니를 건너가 다시 날등 슬랩을 이어 오르는 둘째 마디의 발상도 재미있지만 경송길의 하이라이트는 셋째 마디에 있다. 이곳의 짱짱한 슬랩과 얇은 크랙 그리고 벙어리 크랙을 지나는 동안 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것이 경송길의 매력이다. 이곳을 통과하면 넷째 마디부터는 한숨 돌려도 좋을 만큼 편안해진다. 그래서 경송길 하단부가 끝나는 이곳에서 등반을 종료하기도 한다.

 ◇ 50대 중반의 나이에도 후배들과 등반을 함께하는 차상철씨. 1969년 경송산악회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장본인이다.



- 먼저 간 산친구 위해 개척

“인수엔 돈 깨나 있는 친구들이 많았고 선인엔 돈 없는 사람들이 있었죠.”공재은씨와 함께 경송길 개척의 주역이었던 최길용씨는 흔히 테크닉과 힘으로 인수·선인을 비교하던 것과는 달리 경제적인 시각으로 인수파와 선인파를 구분한다. 사실 옛날치고 넉넉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 기준은 자못 흥미롭다. 간혹 부모의 은덕으로 외제 장비를 줄줄이 메고 다니던 사람들이 있긴 하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그보다 더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산 친구들은 가난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가난 때문에 강한 동류의식을 가질 수 있었고 같이 울고 웃을 수 있었다. 그런 ‘헝그리 정신’은 항상 남는 것을 염려하고 버릴 것을 걱정하는 요즘, 더욱 필요한 일일지 모르겠다.


경송산악회의 맏형인 차상철씨가 슬랩을 올라 벙어리 크랙에 왼쪽 어깨를 강하게 밀착시키고 호흡을 조절하는 것을 보니 경송의 장래가 참 밝다는 생각이 든다. 차상철은 바로 경송을 만든 창립회원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산에 올랐던 그가 친구들과 어울려 2학년 때 산악부를 만들었다. 선배들이 군대 가면서 물려준 등산 장비가 바로 창립의 계기가 되었으며 지금은 대원고 재단이사가 된 손상호씨가 당시 지도교사였다. “옛날에는 산에 가면 두들겨 맞는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도 가고 또 가고….”“어느 해 비 오는 날 마신 소주병을 세어 보니 40병이나 되데요.”“천만불상회에서 일차로 망가지고 동대문 곱창집까지 가서 냉면 대접에 소주를 따라 마시던….

 

”경송길 개척 당시인 1983년 여름, 하강 로프가 모자라 50m를 추락해 바닥까지 떨어진 경험이 있는 최길용씨의 비망록엔 그런 추억들이 빼곡하다. 18년 정권을 잡았던 ‘박통’보다 2년이나 더 길게 경송을 이끌었던 그가 떨어질 때 회원들은 경포대 해수욕장에서 설악산을 함께 가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그러나 최길용은 그로부터 4일이나 지나서야 깨어났다. 외아들이었던 그의 사고 소식을 차마 집에 알릴 수 없어 연락을 두절하고 있었으나 병원 서류에 보호자 도장을 찍는 과정에서 결국 들키고 말았다. 그 때문에 한동안 최길용은 죽었다고 소문이 났었다. 네 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그의 이력은 은행 털다 들어간 일(은행을 따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병원에 실려 간 일을 그렇게 표현했다), 아스팔트가 벌떡 일어난 사건 등 두루 다양하다.


경송A길은 최길용이 회장을 맡고 동기생인 공재은이 천만불상회 위에서 구들장 깔고 등반대장을 맡던 시절에 이루어낸 길이다. 1975년 8월 27일 선인봉 박쥐길을 등반하다가 추락사 한 김진흥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개척한 경송길은 1982년 6월 22일에서 8월 25일 사이에 하단부가, 상단부는 1983년 6월 15일에서 8월 15일 사이에 개척되었다. 당시 대원으로는 경송OB 3기 회원인 김동욱을 비롯하여 김원창·김대명·최길용·공재은·김상훈·박건수·성열인·남명호·이상인 등이 참여했다. 동원된 장비는 맘모스 9mm 40m 2동과 10.5mm 1동, 동경 톱 9mm 33m 1동, 롯데 9mm 40m 1동, 설악자일 9mm 40m 1동, 에버뉴 점핑 세트, 고정용 볼트 32개, 하켄은 취너드 앵글 1개만 쓰였다.


카라비너는 50여 개, 스카이 훅 2조, 래더 1조, 두 자루의 햄머와 슬링테이프 50m 등이 쓰였다. 2개의 등반 팀이 오르는 모습을 일일 지켜보느라 놓치고 있던 또 한 사람의 개척자 박건수씨가 둘째 마디를 지나 셋째마디 건너가는 모습을 보니 그 옛날의 날랜 모습이 그려진다. 휙휙 지나친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동작이 빠르다. “저 형 별명이 준치잖아.”  “썩어도?”  “그렇지.”  “야! 돈 모아서 건수 형 벨트하고 신발 사줄까?”  “돈 많은 사람이 그렇다니까.” “연수 형이 회장이니까 20만원 내고 우리는 만원씩 내고 말이야….”

 ◇ 1969년 수송전기고등학교 산악부인 경송산악회가 창립된 이듬해 수원의 용주사에 모인 회원들. 아랫줄 왼쪽부터 효선·동용·필순·충환·호석·승기·호경·수창·승철·윤복·상록 등 반말투가 어울리는 고교시절의 청춘들이다.



- 인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겨울이면 빙장을 누비던 송영주씨의 푸념이 뒤에서 들려온다. “이 시끼들이 길을 이렇게 내어가지고 이런 고생을 시키나.” 아무리 몸이 가벼워도 어려운 것은 어렵고 힘든 것은 힘들다. 예전과 달라진게 있거나 없거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60~70년대 깃발을 날리던 전통적인 도봉산의 산악회들에 비하면 경송산악회는 자기만의 울을 쌓고 사는 비교적 조용한 팀이라 할 수 있다. 고교산악부가 요즘처럼 입시제도 때문에 활동이 어려운 상황에서 산악회의 명맥을 이어간다는 것은 불황에 사업을 벌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시절 좋은 때 만나 산과 더불어 지내온 인연은 그리 쉽게 끊어질리 없다.


20년 남짓한 경송길은 이미 선인봉에 선 긋기 작업이 거의 끝난 80년대에 생겨났으니 신생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이즈음에 활발한 활동을 펼친 산악회의 시대가 지금 도래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들의 역할에 영향을 받아 또 다시 신생팀이 생겨나고 전통적인 팀들도 다시 자극 받아 옛 친구를 만나고…. 그렇게 해서 산에는 진정한 사람들이 넘쳐 났으면 좋겠다. 여유를 부려도 좋을 넷째마디. 아치형의 볼트 따기를 넘어 나머지 넓은 디에드르 크랙을 오르니 염려했던 낙석 유발지대다. 상식적인 일이지만 이곳에선 작은 돌이나 흙을 밟지 말고 몸놀림을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전혀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출발점의 오래된 소나무 아래로 돌아와 잠시 동안 느꼈던 밀도 높은 공포와 긴장을 풀어버리자 박건수씨가 서해안에서부터 준비해 온 포상을 내린다. 살아 움직이는 해산물이다. 선배에게 받은 박해를 이렇게 되돌리는 그가 오늘의 천사다. “건수는 무지하게 맞았지.”“우리는 주로 많이 먹었어요.”“선배들이 주는 파리, 나방, 구정물도 함께….”오늘도 후배들은 짓궂었던 선배들의 행동을 비폭력 무저항의 원칙에 입각하여 되새길 뿐. 장비처럼 놓여진 1.8ℓ소주 한 병을 말없이 해치운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내려간다. 어디로? 천만불상회로.


 

- 선인봉 경송A길 등반가이드

경송A길은 1983년 경송산악회에서 도봉산 선인봉 동면에 개척한 루트다.
등반 길이는 개척당시 177여 m에 여섯 마디로 보고 되었지만 지금은 상단부의 낙석 위험지대로 인해 루트의 하단부(86m)인 셋째 마디까지만 오르고 끝내는 경우가 많다.
또한 상단을 더 오른다 해도 다섯째 마디(123m) 위로는 등반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루트는 전체적으로 슬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분적으로 크랙이 섞여있다.


평균 경사는 70도. 밸런스를 요하는 첫마디 중간 부분 슬랩의 자유등반 난이도가 5.10b, 둘째마디 슬랩에서 크랙으로 진입하는 부분이 5.10c로 평가되어 있다.
등반의 출발은 선인봉 동면벽 오른쪽의 큰 소나무에서 한다.
하강은 등반 루트로 내려서기 때문에 출발점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 첫 마디(21m) 경사 70도 정도의 슬랩을 출발, 12m쯤 위에 있는 첫 볼트를 통과한다.
이곳에서 네 스텝을 오르면 나란히 박힌 2개의 볼트를 지나게 된다. 첫마디 종료 지점인 테라스까지는 홀드가 얇고 미세한 편으로 정확한 스텝과 동작을 요한다.

 

- 둘째 마디(26m) 왼쪽으로 3m정도 이동하여 폭 150cm 정도의 침니를 건너간 후 슬랩을 따라 15m쯤 오른다. 오른손은 침니의 모서리를 감아 잡고 왼손은 적당한 홀드를 찾아 푸시로 오르면 좋다. 왼쪽으로 7m쯤 이동해 양호한 테라스에서 확보한다.

- 셋째 마디(39m) 미세한 홀드를 따라 70도 정도의 슬랩을 오른쪽으로 6m쯤 오른 후 왼쪽으로 이동해 직상한다. 손가락 한 마디가 채 안되는 얇은 홀드는 볼트를 잡고 밟는 유혹을 끊임없이 일으킨다. 왼쪽의 얇고 비스듬한 언더크랙을 잡고 오른쪽에 덮개처럼 덮여있는 크랙으로 진입하여 작은 호수의 캠을 설치하고 크랙을 따라 직상한다. 크랙이 끝나면 다시 슬랩을 따라 오르다가 디에드르 형태의 벙어리 크랙으로 진입한다. 크랙 하단부에 볼트가 설치되어 있고 오른쪽에도 확보용 볼트가 있다. 크랙을 벗어나 오른쪽 상단에 설치되어 있는 쌍볼트에 확보한다.
개척 당시엔 이곳까지를 하단부로, 위를 상단부로 구분했다.


- 넷째 마디(25m) 넷째마디는 슬랩을 따라 15m쯤 오르다가 왼쪽 아치형으로 박힌 4개의 볼트를 이용하여 오른 후 테라스에서 마디를 끊는다.


- 다섯째 마디(12m) 개척 당시엔 38m를 다 오른 다음 마디를 끊었지만 요즘은 좌향 디에드르 크랙을 지나 테라스까지 12m 정도만 오른다. 낙석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등반성이 약한 상단을 생략하고 이 곳에서 종료, 하강하는 것이 보통이다. 선인봉 정상까지 가려면 나머지 넓은 크랙을 따라 20여 m를 더 올라 테라스에서 마디를 끊는다.


- 그 다음 마지막 넓은 레이백 크랙과 슬랩을 통과하는 여섯째마디 22m를 더 올라 루트 끝 지점의 볼트에 확보한다. 이곳에서 하강할 수 있지만 볼트가 안전한지 살펴야 하며 낙석이 생기지 않도록 특히 유의해야 한다. 정상은 잡목지대를 통과하여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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