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서씨 연혁]: 대구서씨 홈페이지 인용(네이버) 오(吾) 대구서씨는 고려 중엽 후에 군기 소윤공 휘 한을 시조로 하고 근 구백년에 이른 것이다. 그 이상을 더 소급해 보자면 신라말에 휘 신일 아간공 이천서씨 시조가 계시고 여러 문헌에는 기자의 사십대 손 기준(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이 이천에 정착하여 그 후손이 서신일이라 한다.
서신일의 자손이 이천을 본관으로 하고 대구(달성), 장성, 평창 남평, 연산, 부여로 분파되어 관을 달리 하였다고 한다. (부여서씨는 일설에 백제 의자왕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오 대구서씨는 이천에서 어느 때 누가 갈려 나왔다고 확정할 수 있는 문헌의 고증이 없으나 휘 한 고려조 군기 소윤공(少尹公)을 대구서씨의 시조로 모시고 있다.
그러나 대구서씨의 또 한 파가 있으니 고려 말 판도판서를 지내신 휘 진(晋)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달성으로 하는 일파가 있다. 성이 같고 한 지방에서 살아 한 근원임에는 의심할 바 없으나 이 역시 어느 때 어디서 갈렸다는 문헌이 없어 휘 진을 1세로 하고 보첩을 간행하였으며 우리의 선대조가 되시는 휘 문중 몽어상공께서 판도공보다 년대가 근 백년을 먼저 한 소윤공이 선조이심을 확신하고 대구가 지방명칭의 본명이라 대구로 본관을 정하시고 1세에 소윤공 한을 위시(爲始), 보책(譜冊)을 간행하신 것이다.
먼저 말한 바와 같이 지방 명(名)이 원래 대구였던 것이 조선 초에 달성으로 개명되었으므로 오 선대 다수가 지명을 따라 속칭 달성으로 많이 불러와 본을 대구와 달성으로 혼용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안다.
또한 혹자는 판도공이 소윤공의 증손이며 장손이라는 책자를 간행한 사람이 있는데 그 역시 확실한 고증을 못하고 추상적인 것이니 후세인 우리가 선대께서 기히 확정하신 것을 왈가왈부하여 현혹케 함은 삼가하는 것이 자손의 도리가 아닌가 한다.
휘 한 소윤공 이하 5대는 무전으로 실전되었고 7세의 휘 익진(益進)께서 고려조 전객사(典客事), 8세 휘 의(義)께서 고려조의 호조전서(戶曺典書)로 계시다가 혁명으로 고려조가 붕괴되자 양대께서 은거하셨으며 9세의 휘 미성(彌性)께서 비로소 조선조의 벼슬에 올라 안주목사(安州牧使)가 되시고 보조좌리공신(補祚佐理功臣) 달천부원군(達川府院君)에 봉(封)하셨고 아들 형제를 두셨는데 큰 아드님 휘 거광(居廣)은 무과 급제하셔 언양현감(彦陽縣監)이 되시고 작은 아드님 휘 거정(居正)은 문과에 급제하셔 육조판서(六曺判書)를 거쳐 문장으로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을 23년 하시고 5대의 왕을 섬기시어 좌리공신(佐理功臣) 달성군(達城君)에 봉하시니 당대 명성이 높았도다.
그러나 자손이 한미(寒微)하였으며 언양공께서 아들 팽소(彭召)와 팽여(彭呂) 등을 두셨는데 팽소 장영공(掌令公)께서 4형제를 두셨으나 위로 3형제는 절손지경(絶孫地境)이고 넷째 휘 고(固) 이조(吏曺) 참의공(參議公)께서도 4형제의 아드님을 두셨으나 역시 3형제는 자손이 번창하지 못하고 세째 휘 해 함제공(涵齊公)이 휘 성 약봉(藥峯)을 나으시고 다음해 졸(卒)하시니 서씨 일가의 명맥을 겨우 이어가는 정도로 미약하였으나 약봉께서 아들 4장부와 손자 15명 증손 근 100여명을 두셔 차츰 거족으로 번창하는 동시에 약봉을 위시하여 상신(相臣)이 9명, 증직상신(贈職相臣)이 11명, 중신(重臣)이 55명, 증직중신(贈職重臣)이 28명, 군위(君慰)가 4명, 문형옥당(文衡玉堂)이 26명, 각신청환관(閣臣淸宦官)이 18명, 등단대장(登檀大將)이 6명, 명신(名臣)이 9명, 서원배형(書院配亨)이 3명, 불조지전(不兆之典)의 예위(禮位)를 받으신 분이 4명, 대과급제(大科及第)가 155명, 무과급제(武科及第)가 305명, 관행직(官行職)이 1,400여명이라는 굉대(宏大)한 수의 인물이 배출되었으며 종태(宗泰), 명균(命均), 지수(志修) 등의 3대 정승(政承)과 유신(有臣), 영보(榮輔), 기순(箕淳) 등의 3대 대제학(大提學)을 6대가 계승했고, 명구(命九), 효수(孝修), 유린(有隣), 준보(俊輔), 기순(耆淳), 상조(相祖), 병찬(丙贊) 등의 7대가 대과급제(大科及第)를 연속했으며 3대 문장(文章)으로 명응(命膺), 호수(浩修), 유구(有구) 등의 명사가 나열하니 대구서씨를 타성들도 명문대가(名門大家)라고 말한다.
이같이 고관직에 높은 명사가 많았으나 서씨로서 역적이 없으며 대대로 벼슬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조선조 말까지 이르렀으며 한일합방에서도 치욕적인 일본국 작위를 받은 사람이 없으니 또한 자랑거리라 하겠다.
서씨는 보수적이고 성격이 강직한 소치로 타성에 비하여 개화가 늦었으며 휘 광범(光範), 휘 재필(載弼) 두 분이 박영효(朴泳孝), 김옥균(金玉均) 등과 개화당(改化黨)을 조직하고 정부를 개혁한 바 있고 (즉시 번복되었음) 재필은 신문학(新文學)에 전진하여 한국인으로서 미국 박사학위를 한국 1호로 획득하였으며 지금은 오 서문에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 부지기수다.
조선조 중엽 초에 동서남북 사색정파(四色政派)가 있었는데 약봉께서는 서인파(西人派)에 친하셨고 북인(北人)의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 간흉(奸凶)의 무고에 의하여 십 여년의 유배를 당하셨고 자손들은 관직을 물러 나기도 하였다.
인조반정으로 북인당파가 물러나고 서인파가 복귀한 후에는 노소로 갈라지자 오 서씨도 당시 노론소론(老論少論)으로 분파되었으나 조선조 말까지 노소 구별없이 조정에 참여하였다.
끝으로 출가하신 서씨들 따님의 특유한 사항을 첨기하는 바 전첨공(典籤公)의 증손 휘 종제(宗悌)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 따님이신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영조대왕의 왕후로 국정에 공정을 기하시고 사(私)에 치우치지 아니하시며 국정이 어지럽고 왕실이 문란했을 때는 중립을 지키셨으며 더욱이 친가에도 심려(心慮)하시어 안동(安東) 소재 약봉공의 태실(胎室)과 소호현(蘇湖軒) (함제공께서 수학(修學)하시던 집)을 불미(不美)한 자손이 타인에게 매도하였던 바 그 정상(情狀)을 아시고 내당전(內堂錢)(왕후의 용전(用錢)을 내주시어)을 구매하게 하심으로 지금까지 서씨 종중(宗中) 소유로 보존되어 있으며 현 정부에서 국보물 제475호의 문화재로 지정하였고 1974년 정부로부터 보수 경비를 지급받아 보수한 바 있다.
그리고 전첨공의 8대손 휘 경순(庚淳)의 따님이 민겸호(閔謙鎬)의 부인이시다. 부인께서는 민충정공(閔忠正公) 영환(泳煥)을 낳으시고 우리나라가 일본국과의 합병을 반대하고 할복 자살한 충신인 민영환의 어머니이시다.
고려 말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蒙周)가 있고 조선조 말 충신 계정(桂庭) 민영환이 있으니 이 두 분은 충절의 혈죽(血竹)이 솟아나서 나라의 빛을 세계 만방에 떨치셨다. 정성왕후와 민충정공의 어머니 정경부인이 다 약봉의 후예이시니 본손(本孫)과 외손(外孫)을 망라하여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음은 우연한 소치가 아니고 평소에 선조께서 후덕을 베푸신 여덕(餘德)이라 할 것이다.
우리 후손은 다시 옷깃을 여미고 경건한 마음으로 선조들의 무언의 교시를 받들어야 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선조의 빛을 길이 보존하며 이어 받아야 할 것이다. 더 한가지 첨가코자 함은 오 서씨는 대구서씨라도 구(丘)자를 사용한 것은 고대에 지명이 대구(大丘)였으므로 사용하는 것이며 그러나 지금 지명을 대구(大邱)로 쓰는 것은 고려시대는 불교를 숭상하였고 그 당시 대구(大丘)였으며 조선시대는 불교를 배제하고 유교 즉 유학을 숭상하였으므로 유학을 창도하신 공자를 지극히 숭배하여 공자의 휘자인 구(丘)자를 사용하는 것을 기피하여 구(丘)자를 구(邱)자로 고쳐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대구서씨는 구(丘)자 그대로 쓰는 내력이 있다. 즉 족보의 창간당시 본관을 제정함에 있어 몽어공(夢漁公)께서 본시 간행이 대구(大丘)였으나 먼저 말한 바와 같이 공자의 휘자(諱字)이므로 자의로 사용할 수 없으므로 상감께 주청 하였더니 그 당시 국왕이신 숙종(肅宗)께서 경의 본가는 나라에 공신이 많으며 본관을 제정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니 구(丘)자를 변경하지 말고 그대로 사용하여도 가하다는 윤허(允許)를 내리시어 확정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