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 강의(심화) 4강
1. 심화반-[동영상]
지식채널-혼혈인. 노무현 대통령 독도 연설,
2. 민족문제
*세계화 시대에 민족의 의미
-민족이란 집단의 구성원을 하나로 묶고 사회를 통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민족이란 구호만 앞세울 경우, 자칫 개인들은 전체주의 속에서 소외되고 개인의 중요성은 사라질 위험성이 생긴다.
-민족주의는 자기 민족의 번영과 영광을 위해서라면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제국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억압받는 식민지 국가의 시민들에게 민족주의는 제국에 대항하는 해방적 이데올로기로 사용되기도 한다.
3. 생각열기
-민족이란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실체인가? 고도의 정치적 상상물인가?
-세계화 시대에도 여전히 민족주의의 의미는 유효한가?
-가장 한국적인 것이 정말로 가장 세계적인 것인가?
-우리 사회에 코시안 2세,3세까지 크게 늘어 30년 후 전체 인구의 45%에 달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그들이 성공적으로 정착했다고 하자. 여전히 한민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가?
4. 관련 기출
- 2009 인하대 수시2-1 논술문제
5. 칼럼 읽기-위구루 유혈사태(2009.7.16 중앙일보)
위구르인들은 왜 그토록 분노했을까. 평화롭던 일요일 밤 인민광장이 왜 피로 물들었을까. 184명이 희생된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 유혈 사태 이후 우루무치(烏魯木齊)와 카스(喀什) 일대를 취재하면서 내내 들었던 의문이다.
여전히 빈곤층이 있지만 신장 자치구의 물질적 생활 수준은 최근 10여 년간 눈에 띄게 개선됐다. 1999년 시작된 중국 정부의 ‘서부 대개발’ 전략 덕분에 2003년 이후 지역 경제는 매년 두 자릿수 성장을 계속했다. 중국 정부는 2007년 3월 ‘소수민족 발전계획’을 수립해 자국 내 소수민족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다. 그에 따라 신장 자치구의 가난한 농촌 노동자들이 광둥(廣東)성의 완구공장에 대규모로 취업할 수 있었다. 나는 2002년 여름 우루무치를 처음 여행했다. 7년 만에 다시 찾아간 우루무치는 몰라볼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대부분의 위구르인들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위구르인들은 극도의 분노를 한꺼번에 분출했다. 중국 공안 당국의 주장처럼 미국에 망명 중인 레비야 카디르가 폭력을 선동했기 때문일까.
사실 이번 사태의 기저에는 중국이 신장을 강점한 49년 이후 60년째 계속되고 있는 한족의 지배에 대해 누적된 거부감이 자리하고 있다. 현지에서 만난 위구르인들은 “위구르 자치구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반문했다. 위구르인들이 그런 말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듯했다. 우루무치와 카스를 왕복하는 항공기에는 많은 위구르인이 탑승하지만 기내 안내 방송은 중국어와 영어뿐이었다. 365일 공안의 밀착 감시가 이뤄지는 카스에서는 작은 시위 움직임만 감지돼도 이슬람 사원(모스크)의 문이 닫혀 버린다. 예배가 곧 생활인 위구르인들의 문화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이다. 동서 거리가 5200㎞인 중국 땅은 물리적으로 4시간의 시차가 존재하지만 전국이 베이징(北京) 표준 시간에 맞춰져 있다. 요즘 오후 10시30분이 돼야 해가 저무는 카스의 하루 생활도 베이징 표준시간에 예속돼 있다. 가위 ‘생활 속 폭력’이라 할 만하다.
서부 대개발도 위구르인들에게는 인디언의 땅을 잠식했던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로 비춰진다. 한족에게 더 많은 기회와 이익이 돌아간다고 의심한다. 49년 6%이던 신장자치구의 한족 비율이 최근 40%까지 급증해 위구르인들의 위기감을 키웠다. 한족이 주인 행세를 하는 모습을 참아오던 위구르인들은 광둥성에서 동족이 한족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집단적 분노를 폭발시켰다.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통해 민족 간의 원망과 증오가 확대 재생산됐다.
중국 땅 서쪽 끝에서 일어난 유혈 시위를 보면서 한반도의 남쪽을 떠올렸다. 날 선 이념 대립, 깊어지는 계층 간 반목, 극한으로 치닫는 정쟁, 여전히 뿌리 깊은 지역 감정. 이런 갈등을 제때 풀지 않고 방치하면 어느 순간에 마른 장작 불씨에 기름을 퍼붓듯 불길이 번질지 모른다. 위구르 사태는 한국 사회가 해묵은 갈등을 더 적극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줬
다.
[한국경제신문 생글생글 2009.7.20]
위구르 사태는 차별 대우에 불만 폭발
“서부대개발 성장 과실 한족이 독차지”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최악의 유혈시위가 일어난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수도 우루무치.
사태 발생 이후 첫 금요일인 지난 9일 위구르족과 한족 간 민족분쟁의 긴장은 이슬람사원으로 옮겨졌다.
중국 정부는 이슬람교도인 위구르족들이 금요 기도를 위해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이슬람사원의 문을 닫도록 했으며, 이에 대해 위구르족은 강력 반발했다.
또한 중국 공안은 13일 우루무치에서 흉기를 들고 폭력을 휘두르던 위구르인 3명에게 총을 발사,2명이 사망하고 1명은 부상했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가 위구르인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고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55 반란'의 화약고 '신장과 시짱'
위구르 사태는 중국의 소수민족 문제를 되돌아보게 한다. 중국은 '1+55'의 국가다.
'1'이란 인구의 92%를 차지하는 한족을 말한다.
'55'는 중국에 존재하는 소수민족의 숫자다.
인구비율로는 적지만 55개 소수민족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지역은 중국 영토의 65%에 해당한다.
이들은 중국 정부 입장에선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다.
도화선은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15개 나라로 연결돼 있다.
티베트족은 네팔과 인도,위구르족은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인들과 정신적으로 동일한 뿌리를 갖는다.
터키 산업장관이 9일 중국산 제품 불매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위구르족과 인종적으로 동질감을 갖고 있어서다.
조선족이나 몽골족처럼 이웃한 독립국가와 같은 언어와 문화를 갖고 있는 종족도 있다.
소수민족 반란의 선봉은 서부지방에 위치한 신장과 시짱이다.
신장의 위구르족이나 시짱의 티베트족은 모두 중화인민공화국 설립과 맞물려 독립국가의 깃발이 꺾였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위구르족의 독립 움직임은 지난 수백년간 지속돼 왔다.
아랍인 외모를 하고 있는 위구르족은 종교 문화 언어 등 모든 면에서 중국인과 이질적이다.
1759년 청나라 지배를 받기 시작한 이래 42차례에 걸쳐 독립운동을 벌였고 1865년에는 봉기로 잠시 독립을 이루기도 했다.
국공내전의 틈을 타 1933~1934년,1943~1949년 독립국가인 동투르키스스탄을 건립했으나 1949년 중국의 지배 체제에 완전히 편입됐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한 이듬해인 1950년 10월 중국 인민해방군이 진주,강제 합병한 티베트 역시 독립 요구가 끊이지 않는다.
전환점은 1959년 3월의 대규모 폭동이었다.
수천명이 희생되고 최고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인도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티베트 망명정부는 이후에도 프랑스 등의 지지에 힘입어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작년만 해도 208명이 숨지는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나머지 소수민족 중에도 일부는 중국에 동화돼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가 하면, 일부는 이따금 한족과 충돌하며 야성을 보이기도 한다.
⊙ 우대냐 차별이냐 논란
소수민족 정책과 관련해 중국 내에선 상반된 시각이 존재한다.
한족들은 소수민족을 지나치게 우대해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올해 충칭시에선 대학입학 시험을 본 31명이 소수민족이라고 속였다가 적발돼 합격증을 반납했다.
소수민족에겐 일정한 가산점이 붙기 때문에 핏줄을 속였던 것이다.
허저족 등 인구가 극히 적은 종족은 출산장려금을 받는다.
중국 '민족구역 자치법'에는 자치지역의 경제 발전과 투자 확대 등을 위해 별도의 감세가 가능하도록 했다.
'양소일관(兩少一寬)'이란 정책도 있다.
이는 소수민족 범죄자는 '처벌을 적게하고 처리를 관대히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소수민족들의 머리속엔 차별이란 단어가 따라다닌다.
예컨대 '부(副)는 되고 정(正)은 안 된다'는 콤플렉스다.
2인자까지가 최고로 올라갈 수 있는 자리란 말이다.
실제 자치주의 성장은 소수민족이지만, 성의 당서기는 모두 한족으로 구성돼 있다.
중국 공산당원 수 7593만명 중 소수민족은 인구비율에 못 미치는 494만명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경제 발전은 한족과 소수민족 간 빈부 격차를 확실히 벌려놨다.
대표적인 게 서부대개발이다.
우루무치의 1인당 평균소득은 2003년 9823위안에서 2007년 1만6860위안으로 70% 이상 늘었다.
하지만 거대기업은 대부분 한족이 소유, 위구르인은 주변인에 머물고 있다.
이 지역의 경제 성장은 '서부대개발' 정책에 의해 인프라, 석유, 자원 개발 등의 분야에 중국 정부가 대대적인 규모로 투자를 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중앙 권력과 강하게 연계되어 있는 한족들이 성장의 과실을 독차지하는 이유다.
게다가 돈이 없으니 소수민족의 자녀는 좋은 학교에 갈 수도 없고, 가난은 대물림된다.
차별받는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중국정부는 소수민족 거주지역의 안정을 위해서 경제 발전을 핵심 과제로 삼고 있지만 그 정책이 도리어 시위의 동력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 공산당의 철칙은 '독립 불가'
중국공산당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다는 데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신장과 시짱지역은 국토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게다가 이들 지역엔 무궁한 자원이 묻혀 있다.
신장위구르자치주만 하더라도 중국이 생산하는 원유의 3분의 1을 공급한다.
희귀 자원의 보고이기도 하다.
중국 정부가 이런 땅을 소수민족에게 내줄 리가 없다.
중국 지도부는 한족들을 소수민족 거주지로 대거 이주시켜 동화시키는 정책을 펴고 있다.
그러나 고유 문화를 잃지 않고 있는 소수민족들의 민족의식은 오히려 높아지는 추세다.
소수민족 밀집지역에서 한족이 밀려 들어오고, 한족의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소수민족의 소외감이 증폭돼 결국 소수민족 정체성 강화로 귀결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을 달래고 그들을 통합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은 많지 않다.
다양한 민족에 중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갖도록 할 수 있는 새로운 비전이나 가치를 제공하는 길이 협소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공산주의는 하나의 이념으로서 정체성을 상실한 지 오래되었으며 한족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이번 신장 사태도 중앙 정부와 위구르족 사이의 문제가 아닌 한족과 위구르족 사이의 인종 갈등 양상을 강하게 보였다.
광둥과 우루무치에서 위구르족을 테러한 것은 경찰과 군인이 아니라 바로 한족 시민들이었다.
유일한 대안이라 할 수 있는 경제 발전은 오히려 소수민족의 소외감을 키웠을 뿐이다.
결국 중국 정부로서는 소수민족을 경찰력을 동원해서라도 압박하는 수를 쓸 수밖에 없다.
이번 우루무치 사태를 수습하는 데 중국 정부는 사망자에겐 20만위안의 보상금을 지급하고 1680명의 부상자 전원에게 의료비를 전액 지급하기로 했다.
민심을 추스르기 위한 조치다.
하지만 한편으로 후진타오 주석을 비롯한 중국 당국은 시위 주동자들을 사회 불안 세력으로 규정해 사형 등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천명하고 나섰다.
중국 경제가 발전하고 민주화가 진전될수록 소수민족 문제는 뇌관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조귀동 한국경제신문 기자 claymore@hankyung.com
[기사] 다문화가족: 2009.8.7 조선일보
결혼하는 100쌍 중 11쌍이 국제커플이다(2008년). 하지만 그들이 쉽게 정착할 만큼 우리 사회의 시선이 우호적이진 않다. 태국 출신의 온노이 라오(32)씨에게도 한국의 시집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7년 전 전북 장수군의 농가로 시집온 라오씨는 한국에 와서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한국 속담을 실감하게 됐다고 했다.
"말이 잘 안 통하니 오해가 쌓여 갈등도 많았어요. 서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나쁘게 이해하고 서먹해지는 거죠. 가족 행사 때 7남매가 다 모이는데 시누이들이 '부모님한테 잘하라'고 한마디씩 하면, 그걸 나무라는 걸로 이해하고 속상할 때도 많았고요. '나이 어리고 외국에서 왔다고 무시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죠."
눈이 형형한 이국적 외모의 그의 입에선 진한 전라도 억양이 섞여 나왔다. 이제는 주변에서 "한국 아줌마 다됐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지난 7년간 참 속앓이도 많이 했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라오씨의 시집은 쌀과 쌈채소 농사를 짓는 평범한 시골 농가다. 2002년까지만 해도 이 집엔 한상철(73)·윤망내(64)씨 부부와, 윤씨 표현을 빌리자면 '쉰내 푹푹 나는' 노총각 아들 둘, 네 사람이 단출하게 살았다.
하지만 라오씨가 장남 준희(44)씨와 결혼해 들어오면서 적막하던 한씨네 농가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라오씨가 세 딸을 낳으면서 식구가 불더니, 차남 도희(42)씨도 올해 초 베트남에서 온 누엔 녹띰(25)씨를 아내로 맞았다. 임신 중인 녹띰씨가 올해 말 몸을 풀면 딱 열 식구가 된다.
한 국내 교회의 주선으로 한국에 들어온 라오씨는 준희씨와 두어 차례 데이트를 한 뒤, 결혼식을 올렸다. 라오씨는 "처음에는 한국말, 한국음식, 한국문화, 모든 게 어려웠다"고 말했다. "손짓 발짓으로 이야기하는데 오해가 안 생길 수가 없었죠. 집에서 큰소리라도 나면, '또 나 때문인가' 하고 움츠러들기도 했었고요."
태국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던 그에게 농사일도 쉬운 게 아니었다. 한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입덧도 심해, 서울에 사는 친척을 통해 태국 음식을 구해다 먹으며 버텼다.
라오씨는 시집 온 뒤 지금까지 딱 2번 태국 친정에 다녀왔다. 하지만 빠듯한 시골 살림에 준희씨는 아직 처가 구경을 못 해보았다.
아이들이 크면서 준희씨에게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엄마를 닮은 딸들이 학교에 가게 되면 '까무잡잡한 피부 때문에 왕따를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준희씨는 "해가 갈수록 정은 더 들고 오해하는 일은 적어진다"고 했다.
"말이 안 통하니 혼자 속으로 삭이는 건 또 얼마나 많았겠어요? 손끝이 야물어 일 많은 시골 살림도 잘 꾸리고, 부모님한테도 잘해요. 가끔씩 아이들 교육 문제나 살림하는 걸로 다투긴 하지만 아내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더 커요."
◆따뜻한 시선이 필요한데…
다문화 가족은 보편적인 가족 형태로 자리 잡았다. 결혼 이민자가 16만7090명에 달하고,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는 10만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이들 다문화 가족이 문화적 차이를 넘어 '진짜 가족'으로 화학적 결합을 이루기까지는 저마다 어려움이 적지 않다. 친지·이웃이며 주변 사람의 시선이 아직은 차갑고, 우리 사회가 이들을 받아들일 충분한 준비가 돼 있다고는 보기 힘들다.
라오씨는 비교적 한국사회에 잘 정착한 편에 속한다. 요즘 장수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통·번역 일을 하고 있는 그는 결혼 이주여성들이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자주 본다고 털어놨다.
"어린 신부가 도망갈 수 있다고 집에 가둬놓는다든지, 험한 말을 하거나 때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한국말도 모르고 친구도 없는데 식구들마저 그러면 누구를 믿고 살겠어요."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1년간 다문화 가정에서 한국인 배우자에 의한 가정폭력 발생률은 47.8%에 달했다. 2쌍 중 1쌍은 폭력을 경험한다는 얘기다. 모욕적인 말로 괴롭히는 정서적 폭력이 가장 많았고(27.9%), 물건을 던지거나 내리치는 신체적 폭력도 25.3%에 달했다. 외출을 못하게 하거나 주민등록증을 빼앗는 등의 인권침해도 적지 않았다.
이혼도 증가추세다. 작년 기준으로 전체 이혼 10건 중 1건은 다문화 가족이었다.
다문화 가족의 어려움이 자식 세대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국말을 못하는 엄마와 지내다 보니 언어발달이 늦어져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초·중·고 취학연령의 다문화 가정 아이들 2만5000여명 중 24%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고, 특히 고교 진학률은 30%에 불과했다(2008년 교육과학기술부).
라오씨는 요즘 옆 마을에 새로 시집온 베트남 신부가 걱정이라고 했다. "집에 가겠다고 울고불고한대요. '여기가 우리 가족과 내가 살 곳이다'고 생각하면 다 좋아지는데…. 우리 동서(녹띰)도 조용한 성격이라 말이 없는데 지금 무지 힘들 거예요. 제가 한국말도 더 가르쳐주고 다독여줘야죠."
[칼럼]
다문화 가정이 겪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한국 사회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데 있다. 다문화 가정의 부인들은 우리나라 청년들과 결혼해 농촌을 지키는 고마운 존재들이다. 하지만 정작 가정을 꾸리고 나서는 생활수준이 낮은 데다 체계적으로 한국어를 배우지 않아 문화적 갈등을 겪고 있다. 더구나 가정에서 교육을 책임진 어머니들이면서도 자식들을 잘 돌보지 못해 그 자녀들마저 사회부적응 상태에 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전남대병원은 지난 2월부터 다문화 가정의 안주인인 동남아 5개국 여성 10명을 홍보사절로 위촉하고, 매주 수요일마다 나라별로 돌아가면서 근무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7월부터는 11개국 15명으로 규모를 확대했다. 이들은 외롭게 입원해 있는 모국의 환자들에게 통역을 해주고 대화도 나누면서 안정을 취하도록 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전남대병원이 홍보사절 프로그램을 시작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동남아 출신 거주민들도 대학병원 접근이 용이하도록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둘째, 가정과 농촌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다문화 가정 여성들이 건전한 사회활동을 통해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찾아내도록 하자는 데에 있다. 병원 입장에서는 이 프로그램이 활성화되면 외국인에게 차별 없는 의료혜택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인권 광주의 이미지를 제고시키고, 장기적으로는 동남아를 대상으로 한 의료 국제화의 성과를 거둘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실제로 이 병원 산부인과에서는 베트남어 책자를 발간해 베트남 임산부들이 유용하게 이용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2020년이 되면 전남지역 농어촌학교 학생 가운데 25%가 다문화 가정 출신일 것으로 추산된다. 그런데 다문화 가정 어린이들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성장한다면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이며, 사회적 부담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 반대로 그 어린이들이 한국어와 어머니 나라 말을 배우면서 제대로 성장한다면 한국 사회는 물론 어머니의 모국에도 기여하는 유능한 국제 인재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한국의 가정을 지키고 있는 다문화가정 어머니들에게 보다 많은 사회적 기회를 제공하고, 자식 교육에도 적극 나서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나아가 어머니들의 친척들에게까지 후원을 아까지 않음으로써 아시아 청소년들이 한국을 보면서 꿈과 희망을 키우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정부와 민간이 나서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우르는 ‘나눔 프로그램’을 활성화시킬 때 가능해질 것이다. 우리도 지난 세월 국제사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이제는 우리가 보답에 나설 때다.
김성 광주 지역활성화연구소장
[칼럼]곽금주-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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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개 인종의 생물학적·생리학적 특징에 따라 계급이나 민족 사이의 불평등한 억압을 합리화하는 비과학적인 사고방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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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이러한 사고방식은 인종을 사회의 성립·발전의 기본적인 요소로 보는 견해이다. 인종주의는 이미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근대적 형태는 J.A.C.고비노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세계문명의 발전은 백색인종이 창조한 것이며, 열등인종과의 혼혈에 따른 인종적 퇴폐로 문명은 몰락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고는 H.S.체임벌린의 아리안인종론과 함께 나치스 독일의 세계관의 기초를 이루었다. 인종의 유전적 소질과 정신적 능력 사이에는 직접적인 필연적 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므로 인종주의가 인종적 편견 위에 수립된 오류임은 명백한 일이다. 그러나 인종주의는 흔히 민족적인 지배나 정복을 정당화하고, 개인의 헤게모니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되기도 하였다. |
첫댓글 7월 13일(월) 수업을 함-독서논술실: 단일민족인가? 인하대 2009 수시2학기 문제-다문화사회. 논제 및 문제제시문 읽기. 비문학과 논술제시문읽기. 용광로 모델. 샐러드모델. 국수대접모델,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상상의 공동체. 태극기휘날리며의 이진태에게 민족의 의미가 있었을까?. 상상되는 공동체가 민족. 아마도 인하대 논술문제는 상상되는 공동체의 측면에서 혈연, 언어 등의 순수적인 면의 변화를 이해하고 다문화사회의 바람직한 모습을 물어본 것 같다. 수업 시간에 못한 내용: 별별이야기-저전거 여행 보기, 지식채널-혼혈 보기. 문학작품-혼혈. 다문화 문제 다룬 작품(중국인 거리).노무현 전 대통령 독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