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악마의 신명과 21세기 국학운동
- 李承憲 (국학원 이사장, 새천년평화재단 총재) -
1. 붉은 악마의 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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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월드컵 기간에 우리는 거리마다 자발적으로 모여 한마음으로 응원하는 감동의 붉은 물결을 보았습니다. ‘대~한민국’과 ‘오! 필승코리아’를 외치는 혼연일체의 함성과 치우천황의 상징에서 우리는 민족의 신명을 체험하였습니다. 초대형 태극기와 아리랑 노래의 열창에서 ‘우리는 원래 하나’임을 뜨겁게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제 국민적 열기(熱氣)를 차분하게 돌아볼 때가 되었습니다. 철학이 없는 열광, 비전이 없는 열광은 ‘광기’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월드컵 기간의 국민적 열기를 어떻게 ‘민족정기(民族精氣)’로, 국운 상승의 기운으로 발전시킬 것인가를 우리 스스로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국민적 열기가 민족정기로 승화하려면 민족철학과 만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운의 ‘기(氣)’를 주관하는 것은 ‘이(理)’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오랜 지혜인 ‘이기묘합(理氣妙合)’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민족정기와 이기묘합에 마음을 두다보면 우리의 진정한 정신적 뿌리가 무엇이냐에 관심이 모아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정신적 뿌리를 찾는 ‘국학운동’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국학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사대주의, 편협한 민족주의가 자리잡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나는 한 차원 높은 국학운동을 실천하기 위해 ‘국학원’을 창립하였습니다. 국학원은 민족정신 교육단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학원은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정신적 뿌리인 천지인 사상과 심신교육에 집중할 것입니다. 국학 강사를 집중적으로 배출하여 일반 시민은 물론 사회지도층 인사에게도 민족정신을 가르치는 민간교육기관으로 활동할 것입니다.
나는 국학원 창립을 세상에 알리는 이 자리에서 붉은 악마의 응원으로 조성된 민족의 신명과 21세기 국학운동에 관한 나의 생각을 밝혀보려고 합니다.
나는 붉은 악마의 응원 함성에서 5천년 동안 잠자고 있던 한민족의 영혼이 부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치우천황의 영혼과 단군할아버지의 지혜와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정신을 보았습니다. 우리 국민은 붉은 악마가 내건 치우천황의 상징을 계기로 치우천황이 단군시대 이전 한국의 고대국가인 배달국(倍達國, 밝은 나라)의 제14대 왕이라는 사실을 접하였습니다. 치우천황이 단군왕검보다 3-4백년 전에 살았던, ‘전쟁의 신’으로 불리던 용맹스런 국가지도자였다는 점은 우리 국민들의 고정관념을 깨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붉은 악마의 응원과정에서 단군시대를 신화로 이해해온 고정관념이 깨지고 민족상고사에 관한 공부가 저절로 되었던 셈입니다.
이제 붉은 악마는 우리의 강력한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붉은 악마는 국민적 신명과 에너지, 자신감의 문화적 코드가 되어 언제든지 부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명·에너지·자신감을 사회 전반으로 확산하기 위해서는 신명·에너지·자신감의 실체를 깊이 있게 읽어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붉은 악마는 해방 이후 우리 국민의 잠재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린 두 가지 고정관념을 깼습니다. 즉 ‘붉은 색’에서 오는 레드 콤플렉스와 ‘악마’에서 오는 천사·악마의 이분법적 콤플렉스입니다. 고정관념에 의한 콤플렉스는 다름 아닌 피해의식입니다.
개인이나 민족이나 국가가 피해의식에 매달려서는 자긍심을 지닐 수 없으며 의식의 성장에 장애를 초래합니다. 우리 국민은 전쟁과 분단이라는 현대사의 상처로 인해 사상의 자유를 누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좌익사상에 물든 것이 판명되면 사회적으로 매장되고 가족까지 피해를 입는 정신적·물질적 고통이 뒤따랐기 때문입니다. 붉은 악마의 티셔츠가 국민에게 파고들면서 ‘붉은 색’은 이념의 상징이 아닌 열광과 에너지의 상징으로 바뀌었습니다.
인간은 피해의식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때 새로운 발전 에너지를 얻어 변화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뇌생리학 차원에서 충분히 검증된 것입니다. 국가나 민족 유기체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피해의식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때 발전 에너지를 얻어 변화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피해의식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자세, 즉 과거의 정신적 뿌리를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붉은 악마를 통한 ‘악마’ 이미지의 변신은 천사와 악마로 나누는 이분법(二分法)적 세계관에서 탈피한다는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붉은 악마에 대해 종교계 일각에서 우려를 보이기도 했으나 우리 국민은 특정 종교에서 기인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원래 우리 민족은 선과 악, 내편과 네편을 나누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조화와 상생을 중시한 우리 조상들은 언제나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라는 삼원론(三元論)적 세계관을 중시해왔습니다. 붉은 악마는 역설과 해학으로 이분법적 사고의 고리를 멋지게 끊어냄으로써 우리 조상의 지혜를 5천년만에 되살려냈습니다.
붉은 악마의 신명 잔치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민족혼의 부활과 더불어 ‘가능성의 신화’를 창조한 것입니다. 우리는 급속한 경제성장기였던 1970년대의 한때 ‘하면 된다’는 가능성의 신화를 창조했으나 언제부터인가 패배주의와 사대주의에 묻혀 살았습니다. 이번 월드컵을 통해 우리는 민족적 에너지를 모으면 세계 40위 권에서 도약하여 4강 신화에 도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이 가능성은 모든 분야로 퍼져나갈 수 있습니다. 뇌생리학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한번 체험한 사실을 의미 있게 기억함으로써 다른 새로운 사실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축구와 응원에서 시작된 신명이 스포츠의 울타리를 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으로 퍼져나가야 합니다. 붉은 악마의 신명이 우리 사회 전체에 퍼져나가 인간사랑·지구사랑의 정신으로 꽃피어 민족을 살리고 인류를 살리는 메아리로 울려 퍼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붉은 악마의 신명의 정신적 바탕이 무엇인지를 깊이 성찰하여야 하겠습니다.
붉은 악마의 신명에는 첫째, 모든 대립과 분열을 뛰어넘기를 바라는 민족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거리 응원의 현장에는 지역감정이나 세대 차이, 계층간의 분열과 대립, 그리고 사상과 종교의 대립을 넘어선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우리를 하나로 묶은 신명은 천지인(天地人) 사상을 바탕으로 한 ‘우리는 원래 하나’라는 정신 그 자체였습니다.
분열과 대립을 씻고 냉소와 이기주의를 넘어 민족의 대통합과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이하려는 역사의 섭리가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 내려와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회를 살려야 합니다. 어느 누구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스스로 나서 모든 대립을 뛰어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은 국민단합을 가로막는 장벽을 거둬내어 끝내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붉은 악마의 신명에는 둘째, 성숙한 시민의식의 잠재력이 담겨 있습니다. 급속한 산업화와 정치적 민주화 과정에서 보여준 지난날의 집단 행동과는 달리 축제 분위기에서 정연한 자율적 질서를 보여 세계인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자율적 질서는 우리 국민의 성숙한 시민의식을 세계에 보여줌으로써 우리 민족이 정신문명의 시대를 열만한 도덕성을 갖추고 있음을 과시하였습니다.
붉은 악마의 신명에는 셋째, 우리 민족 전래의 복본(復本)의 의지, 깨달음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부도지(符都誌)』에 등장하는 마고성(麻姑城)의 이야기를 잠시 언급하고자 합니다.
마고성은 모든 이들이 깨달음에 이르러 완전한 평화와 조화를 이루며 살았던 이상적인 공동체의 원형입니다. 마고성에 거주하던 ‘신인’들의 에너지는 하늘과 땅과 하나였기 때문에 유한한 육체의 한계를 넘어 무한한 생명을 누렸다고 합니다. 그들이 타락하면서 신성이 사라지고 신과 분리되어 불완전한 인간이 되어갔습니다. 원래 하나였던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서로 분리시켜 생각하기 시작했고, 다른 존재와의 일체감도 놓치게 되었습니다. 마고성의 지도자들은 이 상황에 연대책임을 지고 자신의 후손들을 데리고 마고성을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떠나면서 언젠가는 반드시 그들의 신성을 회복하고 다시 ‘신인’이 되어 마고성으로 돌아오리라고 맹세했습니다.
이것이 복본의 맹세이며 신과 다시 하나되겠다는 신인합일의 맹세입니다. 마고성의 이야기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고 이원론이 아닌 삼원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원론은 음과 양, 밝음과 어둠, 선과 악으로 세상을 나누지만 삼원론은 ‘조화’를 중시합니다. 천지인(天地人),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로 만나는 것이 삼원론의 핵심입니다. 신은 축복과 저주로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고 인간은 신의 축복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이 합일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나는 붉은 악마의 신명에서 대립·분열 극복, 성숙한 시민의식, 그리고 복본·깨달음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신적 바탕을 감안할 때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국학운동에 나설 때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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