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휴약전(裴休略傳)
서기 791년 중국의 허난성(河南省) 멍저우(孟州)의 지위안현(濟源縣)에서 등이 맞붙은 기형 쌍둥이가 태어났다. 지독한 난산(難産)이어서 산모는 아이를 낳은 직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기를 받은 의사가 칼로 등을 분리하였는데, 당시의 의술로는 상처를 남기지 않고 수술하는 일이 어려웠던 것 같다. 쌍둥이의 아버지는 살이 많이 붙은 아이를 먼저 품에 안을 수 있었다. 같은 날 같은 시에 그것도 몸이 붙은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먼저 품에 안은 아이를 형으로 정하고, 살이 적게 붙은 쪽이 동생이 되었다. 형의 이름은 배도(裴度), 동생은 배탁(裴度)으로 작명(作名) 되었다. 형제의 이름에 사용된 ‘度' 자는 법도 도로도 쓰고, 헤아릴 탁 자로도 사용하는, 음(音)과 훈(訓)이 두가지로 쓰이는 글자다. 쌍둥이의 아버지도 자식들이 다 성장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고아가 된 배도와 배탁 형제는 외삼촌이 데려다가 돌보게 되었다. 형제는 소소한 심부름을 하거나, 내방객(來訪客)이 찾아오면 손님을 외삼촌이 거처하고 있는 사랑채로 안내하는 일 등을 하며 지냈다.
어느 날 한 고승(高僧)이 배도 배탁 형제의 외삼촌 댁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을 청하는 목소리를 듣고 대문 앞에 나타난 형제는 고승을 향해 먼저 합장을 하였다. 형인 배도가 공손히 말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스님. ”
고승은 집주인과 오랜 교분이 있었다. 못보던 얼굴을 대하게 된 스님이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저희는 형제인데, 이 집 주인이 외삼촌입니다.”
“그렇구나. 그럼 나를 너의 외삼촌에게 안내하거라.”
형제는 고승을 외삼촌이 거처하고 있던 사랑채로 모시고 갔다. 그런 다음 그들이 문밖에 잠시 대기를 한 것은 혹 외삼촌이 자신들에게 차 심부름을 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방에서 고승과 외삼촌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잠시 후 스님이 묻는다.
“부르신다는 전갈을 받고 한걸음에 달려 왔습니다. 무슨 일로 소승을 찾으셨는지요?”
“사주를 좀 보와 주십사 청한 것입니다.”
“누구 말이오?”
“조금 전에 대사님을 모시고 온 아이들 사주를 알고 싶습니다.”
“외삼촌 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쌍둥이 조카들입니다. 누이는 산고가 어찌나 심했던지 아이를 낳다가 운명했고, 매부도 얼마 전에 세상을 떠, 박복한 아이들을 제가 맡아서 기르게 되었습니다. 태생은 박복하지만 나중에는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관운(官運)을 타고났다고 하시면 공부를 시킬 것이고, 그리 잘되지는 못한다고 해도 스스로 저희들 입건사만 하고 살아도 감지덕지라 여기겠습니다. 대사님의 실력으로 아이들의 운을 감명(鑑命)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시주는 넉넉하게 드리겠습니다.”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형제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형제는 고승이 사주 관상의 대가라는 것을 알게 되자, 더 그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스님의 말이 흘러 나왔다.
“그럼 어디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時)를 일러 주십시오. 소승이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외삼촌이 스님의 요구를 들어준 후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배도 배탁 형제도 비상한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우렸다. 이윽고 고승의 말이 흘러 나왔다.
“인수가 극해된 것으로 미루어 모(母)와 일찍 사별하는 것이 맞습니다. 편재가 극해되어 있으니 부(父) 선망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
이는 이미 일어난 일들이었다. 외삼촌이 알고 싶은 것은 아이들의 장래였다. 그것은 형제의 관심사이기도 하였다. 고승의 말이 이어졌다.
“지난 일은 그렇다 치고 알고 싶은 것은 장래 운명일 텐데-----"
스님은 잠시 말을 끊고 뜸을 드렸다가 천천히 단서부터 먼지 던졌다.
"이런 말씀 드리게 되어 미안합니다.”
배도와 배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 본다. 심산찮은 말을 할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과연 스님의 말은 듣고보니 파급력이 핵폭탄급이었다.
“해묘술(亥卯戌) 즉 돼지, 토끼, 개띠의 3월 생이나, 인오(寅午)에 해당하는 호랑이, 말띠가 12월에 출생한 자, 또는 원숭이띠가 6월에 출생하면 걸인지살(乞人之殺)인데, 형제는 해년(亥年) 3월생입니다. 소승이 보기에 형제는 평생 그 살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즉 거지팔자를 타고 났다는 말이었다. 허긴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외상촌 집에 얹혀 살고 있으니 틀림없는 걸인지살인데, 평생 거지팔자라는 것이 문제였다.
“실은 밖에서 아이들을 만나 잠시 관형찰색(觀形察色)을 해 보았는데, 관상으로도 거지상이 뚜렷하더이다. 눈이 작고 윤기를 내며 반짝여야 하는데, 총기가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고 입술이 두톰하면 부자상인데, 입이 벌어지고, 입술 주위가 쭈글하면 거지상입니다. 귓불이 두툼하고 커야 하는데, 귓불이 작으면서 귀 폭이 좁고 뾰족하면 이 역시 거지상입니다. 부자상은 코는 도톰해야 하고, 콧구멍이 훤히 보이면 거지상입니다. 턱은 양 옆의 균형이 맞고, 강하고 단단해 보여야 하는데, 하관이 급하게 빠졌고. 턱길이가 짧으면 역시 좋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에 부자로 살 상은 없고 거지로 살아야 하는 상은 차고 넘칩니다.”
형이 동생의 얼굴을 본다. 동생도 형의 얼굴을 살폈다. 어린 나이에 불행이 겹쳤는데 총기로 반짝 반짝 빛을 내는 눈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콧구멍이 훤히 들여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다른 것은 스님의 말이 맞는 것도 같고, 틀리는 것도 같아서 정리가 잘 되지 않는데, 방안의 고승은 결정적으로 쿵 형제의 가슴을 때렸다.
“그 아이들을 더 돌보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다."
"아니, 왜요?"
"제 말씀을 듣고도 이해를 못 하신 겝니까. 거지가 될 아이들을 여기다가 그냥 두면 그 아이들로 말미암아 이 집도 잘못됩니다. 아이들이 얻어먹는 신세가 되려면 이 집부터 망해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부모 없는 아이들을 어떻게 박절하게 내보냅니까. 저는 그렇게는 못 합니다. 누이의 자식들인데-----"
"사람은 자기의 복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집이 망하게 되면 아이들의 업(業)도 그만큼 더 깊어질 것입니다.“
형제는 더 이상 고승과 외삼촌의 대화를 엿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그곳을 떠났다.
그 날밤 형제는 나란히 누었지만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도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우리가 이 집에 계속 있다가는 외삼촌이 망한다니 어쩌면 좋겠니?”
탁도 이블을 걷어차고, 상체를 세웠다.
“그렇게 되도록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니야?”
“나도 같은 생각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아서야 되겠어. 기왕 거지가 되어서 얻어먹고 살아야 하는 팔자라면 더 이상 외삼촌 신세를 질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아예 동냥해서 먹고 사는 길을 택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나도 같은 생각이지만 동냥이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니.”
형제는 그 후로도 몇 번 더 그 문제를 두고 설왕설래(說往說來)하다가 최종적으로 는 외삼촌 댁을 떠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외삼촌께 말씀을 드리면 틀림없이 만류할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에,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떠날 수밖에 없었다. 형제는 약간의 준비를 하는 기간을 거쳐, 아직 어둠이 물러가지 않은 첫새벽에, 지금까지 걱정하지 않고 먹고 잘 수 있었던 정든 집을 나섰다. 두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동네를 벗어난 다음 부지런히 앞만 보고 걸었다. 해가 서쪽 하늘로 넘어가는 시각이 되자 연변의 인가(人家)에서 저녁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점심을 건너 뛰었던 형제는 여러 집 대문을 두들기고 나서야 겨우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식은 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서두를 일이 없었다. 걷다가 힘들면 쉬고, 때가 되면 밥을 동냥하여 주린 배를 채웠다.
잠은 헛간이나, 남의 집 처마밑 같은데서 자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산길을 갈 때면 동굴 속으로 기어들어서 밤이슬을 피하기도 하였다. 문제는 밤이슬을 피하는 일이 아니라 밥동냥이었다. 직접 부딪쳐보니 생각보다 쉽지 않았던 것이다. 동냥은 못줘도 쪽박은 깨지말아야 하는데, 동네에 들어서면 아이들이 몰려들어, 전염병 보균자 취급을 하며, 아예 접근도 하지 못하게 돌팔매질을 해대기 일쑤였다. 개들까지 극성스럽게 따라오며 짖어대니 동냥은 시작해 보지도 못하고 마을에서 쫒겨날 때도 있었다. 어찌 대문 앞까지 접근해도, 두 사람 몫을 얻으려 하니 밥을 주는 측에서 부담감을 느낀다는 것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난제(難題)였다.
밥을 얻지못해 주린 배를 욺켜주고 쪽잠을 자는 일이 반복되자 형제는 마침내 나중에 잘되어 만나자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약속을 하고, 서로 헤어지는 결정을 했다. 같이 있으면 의지는 되지만 밥을 얻지 못해 굶는 날이 많으니, 이별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형제는 그렇게 헤어졌다.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암울한 절망속에 내 던져진 것은 똑 같은데, 이 후 형제는 전혀 다른 인생 행로를 따라 나아가게 된다. 우선 형 배도부터 살펴보면 그는 평생 거지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주 감명과는 달리 결론부터 말하면 나중에 당대(唐代) 최고의 재상으로서, 역사에 길이 전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다. 배도 인생의 역전 모멘텀은 ‘생각’이였다. 배도는 바로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뀐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인이다.
『신당서(新唐書)』 권 107에 실려 있는 배도의 출생연도는 791년이며, 몰(歿)한 것은 864년이다. 대만에서 출간한 책에는 출생연도를 797년으로 표기해 놓았다. 그리고 명리에 달통했다는 고승의 이름을 일행(一行) 선사라고 밝혀놓은 책도 있는데, 행장(行狀)을 살펴보면 일행 선사는 683에 태어나서 727년에 열반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배도의 출생연도가 791년이든 797년이든 일행 선사가 열반한 후에 태어났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니까 일행 선사가 형제의 관상이나 사주를 본 고승이라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글의 신빙성을 더 할 목적으로, 관상과 명리(命理)에 정통했던 것으로 알려진 일행 선사를 차용(借用)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감나게 하려다가 엉터리 전기를 만든 것이라 여겨진다.
전해오는 이야기들을 취합(聚合)하고, 전후 사정을 고려하여, 첨삭(添削)하는 과정을 거쳐서 재구성해 보면, 동생과 언제 만나자는 기약도 없이 헤어진 배도는 한동안 걸식을 계속하면서 근근이 목숨을 연명해 나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배도는 바쁠 것 없는 일상을 보내는 방법으로, 빼어난 명승지에 가람을 배치한 사찰을 구경하는, 다소 예상밖의 행보를 했는데, 그의 걸인지살은 바로 그 절에서 삼공(三公)의 영화를 누리는 부귀지상으로 바뀐 것이었다. 정확히 역사는 그 절의 해우소(解憂所)에서 이루어 졌다.
산문(山門) 안으로 들어선 배도는 등에 땀이 흥건히 배어날 만큼 걸어 올라가서야, 지붕 위로 햇살이 내려와서 출렁이고 있는 당우(堂宇)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가람의 위용을, 입을 떡 벌리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천천히 전각(殿閣)들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드렸다. 보시함에 시주할 돈이 없는 것이 한이었다. 무량수전(無量壽殿)의 후불탱화와 팔상도, 극락구품도 같은 것을 살펴보던 그는 문득 뇨의(尿意)을 느꼈다. 법당을 나와, 서둘러 해우소를 찾아갔던 배도는 깜짝 놀란다. 그곳의 세면대 옆에 아주 값비싼 목걸이가 하나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부인삼대(婦人三帶)라 부르는 아주 값비싼 장신구였다. 배도에게는 그것이 당나라에서는 만들지도 못하는 귀중한 명품이라는 것을 알아볼 안목은 없었지만, 그런 그로서도 값이 매우 비싼 귀중품이라는 정도는 능히 헤아릴 수 있었다.
실은 배도가 습득한 부인삼대에는 아주 애절한 사연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오대 독자 아들이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히자, 그 아들을 구명(求命) 하기 위해 가산(家産)을 몽땅 팔아 멀리 촉(蜀)나라까지 가서 구해온 것이었다. 관아(官衙)로 찾아가서 그것을 뇌물로 바치고 아들을 구명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직전에 불공을 드리기 위해 절을 찾았다가, 용변을 보고, 그만 부인삼대를 놓고 가는, 해서는 안 되는 실수를 한 것이었다. 당나라 같은 전제시대의 지방관은 부인삼대 정도의 보물을 갖다 바치면 사형 같은 중형을 받은 사람도 방면(放免)해 주는, 관장 매수가 더러 가능했던 것 같다. 부인삼대는 웬만한 관리가 일생 동안 받은 녹봉(祿俸)을 모두 합해야 겨우 살 수 있는 것이었다.
배도는 부인삼대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과연 부인삼대는 이름 모를 희귀한 보석들이 주렁주렁 달린 명품 중의 명품이었다. 그것을 돈과 바꾸면 평생 먹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구차하게 빌어먹느라고 고생할 필요가 없게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배도는 부인삼대를 들고 그곳을 황급히 떠나는 결정을 하지 않았다. 부자인 외삼촌도 망하게 할 팔자를 타고났다는데, 부인삼대를 돈으로 바꾼다고 해서 타고난 운명이 바뀌어, 평생 동냥을 하지 않아도 되는 복을 누리게 될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팔자대로 되려면 보석을 팔아 돈을 쥐어도 곧 다시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인삼대는 흐지부지 없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원래 주인은 꼭 필요한 곳에다 소중하게 사용할 것이 분명한 보석을 자신이 그렇게 없애버려서는 안 될 것같았다.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한 후, 배도는 그곳을 떠나지 않고 부인삼대의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습득한 남의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거지이기에 더욱 하기 힘든 생각이었다. 그러나 배도는 그 생각을 한 것이었다.
과연 얼마지 않아, 한 부인이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며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배도는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 부인이 보석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부인삼대를 내밀었다. 부인은 금세 희색(喜色)이 돌아온다.
”아이고 부처님, 감사합니다."
그녀는 먼저 부처님께 감사를 드리고, 다음으로 배도에게 허리를 굽신거렸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우리 아들을 살릴 수 있게 해 주었어요.”
그녀는 되찾은 부인삼대를 소지하고 관아로 갔다. 그 얼마 후 사형받을 날만 기다리며 갇혀 있던 죄수가 방면(放免)되었다. 배도의 한 생각이 사람의 목숨을 구한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배도는 이리저리 떠돌며 구걸을 계속하다가, 외삼촌 댁이 있는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다. 배도는 비록 거지 행색을 하고 있지만, 외삼촌이 계신 곳을 지나가면서 인사를 여쭙지 않는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용기를 내어 외삼촌을 찾아갔다. 이때 마침 먼젓번의 고승이 찾아 왔다가 배도와 만나게 되었다. 고승은 배도의 얼굴을 세심히 살핀 후 말했다.
“정승이 될 상이구나.”
그 말을 들은 배도가 언성을 높였다.
“언젠가는 내가 거지가 되어 빌어먹을 상이라고 하시더니, 지금은 정승이 된다니, 관상을 볼 줄 알기는 아는 겁니까?”
“정승도 그냥 정승이 아니라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르겠어. 전에는 내가 너의 관상을 보았었다. 틀림없이 거지가 될 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네 얼굴에 삼공의 지위에 오를 상이 새겨 있으니, 이는 필시 너의 심상(心相)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리-----.”
외삼촌이 끼어들었다.
“심상을 보셨다구요?”
“심상은 마음을 잘 써서 생기게 되는 운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관상(觀相)이 불여심상(不如心相)이라는 말이 있어요. 관상이 아무리 좋아도 마음을 잘 쓰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말인데, 거지 상이 삼공의 지위에 오를 상으로 바뀐 것은 죽을 사람을 살리는 공덕을 지었을 때나 생기는 일입니다."
그 말을 들은 외삼촌이 배도에게 물었다.
"최근에 그런 일이 있었느냐? ”
마음을 잘 쓰면 거지의 상을 가지고 태어났어도 그것이 바뀌어 능히 정승도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마음의 출발점은 생각이다. 배도가 한 생각을 잘 하여 부인삼대를 돌려주는 결정을 했고, 그것이 죽을 사람을 살리는 공덕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배도는 부인삼대를 주워서 돌려준 일의 결과를 알지 못했기에, 죽을 사람을 살렸다고 여길 수는 없었다. 배도는 고개를 갸우뚱 했을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도 고승을 절대적으로 존경하고,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 외삼촌은 배도를 집에 붙들어 앉힌다음,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기 시작했다. 배도는 책을 읽고 글씨를 쓰며 글을 짓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였다. 공부가 힘들기는 해도 온갖 손가락질을 받으며 동냥을 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학문을 익히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움이기도 하였다. 갖은 구박을 받으며 보낸 서러움의 세월이 학문 매진의 원동력(原動力)이 되었다. 새벽 닭이 울때까지 배도의 방에 켜진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을 보고 외삼춘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약을 지어 먹이면서 기다린지 몇 해 만에 배도는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는 쾌거를 일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작은 성공에 불과한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중에는 과연 삼공의 지위까지 벼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삼공은 국가의 대사를 맡아보는 최고의 관직으로서 태위(太尉), 사공(司空), 사도(司徒)를 말한다. 태위는 군사, 사공은 수리와 토목, 사도는 민정 부문을 담당했는데, 삼공(三公) 영의정의 지위에 올랐다는 것은 그 세 부분을 모두 통괄하는 명실공히 제국(帝國)의 이인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출사(出仕)하면서 배도는 배휴(裴休)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하였다. 배휴는 당나라 전체를 돌아보아도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재상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사람은 노력하기에 따라 여러 번 바뀐다는데, 거지였다가 벼슬길에 올랐고, 그는 불교를 외호하는 사람으로 또 한 번 바뀐다. 이제부터 그가 만난 불교의 세계를 따라가 보겠다.
배휴가 불교에 깊이 심취하게 된 것은 배휴의 활동 시기가 선불교가 중국에 뿌리를 내리고 활짝 만개하던 시절 인연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선불교가 교단을 꾸리고 본격적으로 중국인들에게 활착되는 토양을 마련한 선사가 누구냐에 대한 견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대개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의 법을 이은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배휴는 그 9조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벼슬길에 오른 것이었다.
백장 선사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청규 제정자라는 점이다. 청규는 간단히 말하면 수행을 하는 스님들이 지켜야 할 생활규칙이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선종(禪宗)이 나아갈 바를 밝히는 종지(宗旨)가 담겨 있다. 청규의 청(淸)은 청정대해중(淸淨大海衆)이라는 말의 첫 글자로서 수행자는 모름지기 대해(大海)와 같이 청정한 무리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그 청자를 차출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출가자는 강물이 흘러서 종당에는 바다로 들어가고, 일단 바다에 들어간 강물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를 거쳐서 어떻게 흘러 왔건,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바닷물과 한맛(一味)이 되고, 바다같이 청정해져야 하듯, 그렇게 만법귀일(萬法歸一) 만유평등(萬有平等)의 사상을 구현할 것을 요구받게 된다. 즉 불법에 귀의한 출가수행자는 출신성분이나 경력과 속명(俗名)을 버리고 오로지 해탈이라는 한 가지를 추구하는 청정한 무리가 되어 불법의 바다인 법해(法海)에 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출가자가 승단을 이루어 생활하면서 지켜야 할 준수사항이 곧 청규다.
달마가 중국에 새로운 종교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선(禪)을 보급한 이래 6조를 거치며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선종은 율종(律宗) 사찰에 더부살이를 하는 실정이었다. 백장은 청규를 제정하여 율원(律院)으로부터 선원(禪院)을 독립시켜 최초로 선종총림을 수립한 다음, 방장(方丈)을 추대하여 그로 하여금 법을 설하게 하는 식으로 선원을 꾸려 나가도록 직제 개편을 하였다. 또한 그는 불당(佛堂)이 아니라 무설전(無說殿)을 만들었고, 전 대중이 보청법(普請法)에 따라 노동 생산에 참여토록 했으며, 규범을 어긴 대중에 대해서는 경중에 따라 다르지만 엄할 때는 아예 법의(法衣)를 벗겨버리는 식의 엄중한 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로부터 선문에는 불상을 모시는 불전(佛殿)이 아니라 설법(說法)하는 법당이 중심이 되는 가람이 배치되기 시작하였다. 그 영향이 신라에도 미쳐 여러 사찰에서 불상을 모시지 않은 무설전(無說殿)이 건립된 바 있다. 무설전은 불조(佛祖)가 친히 불법(佛法)을 위촉하고 그 법을 이은 큰스님이 상당(上堂)하여 법을 설하는 방식을 통해 교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건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그런 자격을 갖춘 큰스님이 먼저 나와야 한다. 그래서 청규를 철저하게 지키며 수행토록 했던 것이다. 도를 깨칠 뜻이 없음에도 스님의 모양을 하고 대중 속에 섞여 살다가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 깨달음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큰스님 행세를 할 수 있다면 선문의 기강이 제대로 서지 않을 것이다.
백장은 제자들에게 “하루 일하지 않으면(一日不作), 하루 먹지 말라(一日不食)”고 가르쳤고, 몸소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선사는 근검절약이 몸에 배었으며 하루도 무위도식(無爲徒食)한 날이 없는 분이었다. 노구(老軀)임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하니 제자들이 보기에 너무나 민망스러웠다. 그래서 하루는 제자들이 선사께서 일하실 때 사용하는 연장을 감추었다. 그러자 선사께서는 그날부터 단식(斷食)을 했다. 하는 수 없이 연장을 도로 내어 드리니, 말없이 일하고, 일을 한다음 공양을 드시는 것이었다. 이처럼 선사는 친히 몸으로써 실천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의 선농불교(禪農佛敎)에 대한 주창이 선종을 존립시킨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불양답(佛養畓)이 늘어나고, 일하지 않는 스님들의 수효가 많아지자, 중국에서는 폐불을 단행한 적이 몇 번 있는데, 선종은 불교탄압의 빌미를 원천적으로 차단한 청규 때문에 폐불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선농불교는 농사일과 참선 수행을 반반씩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노동을 그대로 수행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이른다.
백장회해 선사는 청규 제정자로서 워낙 높이 평가받다 보니까 그의 선세계에 대한 조명은 오히려 뒷전으로 밀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가 강력한 청규를 제정하여 지키도록 요구해도 제자들이 반발하지 않고 따랐던 것은,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걸출한 선사였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제자들에게 무소구(無所求)를 가르쳤다. 그의 어록을 정리한 『백장록』이나 『백장광록』을 펼치면 도처에서 마음속에 구하는 바가 없고 얻는 바도 없어야 자성을 깨칠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해 놓고 있다. 이렇게 회해 선사는 입도(入道)하는 돈오(頓悟)의 법요(法要)를 불착(不着)의 종으로 삼고 무구(無垢)를 심요(心要)로 삼았다. 그래서 모든 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가질 것을 강조하고 있다.
9조 백장회해 선사의 법을 이어 달마 하 10조로 추앙받는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는 푸젠성 부칭현(福淸縣)에서 농사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0세 되던 789년에 고향 인근의 만복사(萬福寺)에서 동진 출가하였다. 희운 스님은 출가 본사가 있었던 고향의 황벽산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나중에 법호를 황벽(黃檗)이라 정한 것이었다. 행자 기간과 경전 공부를 하는 과정을 거친 후 전국 유명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참문 하던 중, 장시(江西)의 백장회해 회상을 찾게 되었다.
어느 날 포행을 하던 백장 선사가 밖에서 산문으로 들어오는 희운 스님과 마주쳤다. 그러자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고 은사 백장이 제자 희운을 상대로 거량(去量)을 시도한다.
"어디를 갔다 오느냐?"
"대웅산 밑에 가서 버섯을 따가지고 왔습니다."
"산속에 호랑이가 출몰한다는데, 만나지 않았더냐?"
그러자 황벽이 ‘어흥!’ 하였다. 이에 백장이 도끼로 호랑이 잡는 시늉을 했고, 그러자 황벽은 지체없이 백장에게 덤벼들어 뺨을 한 대 올려 붙였다. 이 모든 일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벌어진 것이었다. 제자가 스승의 뺨을 때렸으니 대단히 불경(不敬)한 짓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러나 스승은 화를 내지 않고 고개를 떨구고 돌아섰는데, 다른 사람들은 미처 알아보지 못했지만, 백장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이튿날 백장 스님은 상당(上堂)하여 말했다.
"대웅산 아래 큰 범이 있으니 대중은 조심하라. 내가 어제 한번 물렸다."
이것이 무슨 법거량인가를 알려면 우선 백장의 질문 속에 들어 있는 호랑이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당시 산세가 깊은 대웅산에서는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백장이 황벽에게 그런 산중에 가서 버섯을 따오다니 위험하지 않느냐는 우려를 표명한 것이 아니었다. 호랑이를 보았느냐고 묻자 ‘어흥’ 한 것은 그 호랑이가 바로 자신이라고 답한 것이었다.
맹수가 출몰하는 곳에 가서 버섯을 따온 제자의 무모함을 탓하는 척하였지만 실은 백장은 희운이 호랑이인가를 점검해 본 것이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호랑이는 희운이라는 사람의 몸이 아니라 그 몸을 움직이는 주인공을 의미한다. 옛부터 호랑이는 산의 주인이라고 표현했었고, 산 아래 한 마리 호랑이는 당연히 몸(산)속에 들어 있는 주인(호랑이)을 말하는 것이었다.
상당법문 중에 “대웅산 아래 큰 범이 있으니 대중들은 조심하라. 내가 어제 한번 물렸다.”고 한 말을 상기해 보면 황벽이 범이라는 것이 더욱 분명해 진다. 그러므로 정리하면 백장은 제자에게 ‘버섯 따는 중에도 네 주인공은 항상 깨어 있었느냐?’ 고, 물은 것이었다. 황벽은 무심코 던진 스승의 말속에 들어 있는 숨겨진 의도를 즉시 알아채고 ‘언제나 깨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는 뜻에서 호랑이 흉내를 내어 보인 것이었다. 백장이 물었고 희운이 그 질문속의 의도를 알고 제대로 대답했으니 이것으로 전등(傳燈)의 수순이 다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백장이 도끼를 쳐들어 호랑이를 잡는 시늉을 하였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식으로 날뛰면서 아는 체하면, 네 이놈 죽는다.’ 며, 엄포를 놓은 것이었다. 그러니 황벽희운 스님은 물러설 수가 없었다. 엄포 따위에 주눅들 새끼 호랑이가 아니었던 황벽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스승의 뺨을 쳐 불이 번쩍나게, 자신이 대호(大虎) 라는 것을 입증한 것이었다. 제자에게 뺨을 맞고도 웃었다니 백장이 무척 너그러운 사람이었던 같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백장 아니라 마조라도 뺨을 맞을 수밖에 없으며, 뺨을 때린다고 옹졸하게 야단을 칠 수도 없다. 만약 희운이 스승을 못 때렸다면 얼치기 취급을 당했을 것이다. 스승이 제자로부터 뺨을 맞고도 웃은 것은 제자의 법이 무르익었음을 확인한 기쁨을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항시 시퍼런 날을 세우고 있는 선장(禪場)에서 이 정도는 다반사(茶飯事)다. 나중에 임제의현이 황벽으로부터 두들겨 맞고서도 맞은 이유를 모르다가 깨친 후에 황벽의 불법이 몇 푼어치도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고, 법거량을 하며 스승인 황벽의 뺨을 때렸을 때, 황벽이 제자의 무례를 무례함으로 다스리지 않은 것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백장의 법을 받은 황벽희운 선사는 한동안 행적을 숨기고, 보림(保任)을 하며, 여기저기 행각승(行脚僧)으로 떠돌다가, 한번은 대안정사(大安精舍)에 이르러 채미밭을 가꾸는 등 허드렛일을 해주며 머물고 있었다. 대안정사가 있던 홍저우(洪州)의 자사가 바로 배휴였다.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불교에 관한 공부는 많이 했어도 유서 깊은 사찰을 방문하여 큰스님들을 만나면 상대를 간과(看過)하려는 아만(我慢)을 가지고 있었다. 배휴는 사전 연락도 없이 불쑥 대안정사를 찾았다. 그 지방의 최고 권력자인 관찰사의 기습적인 방문은 소임을 맡은 스님들을 긴장시키는 일대 사건으로서, 그것도 아만으로 스님들의 일상에다 기습을 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상 배휴의 기습은 산골짜기를 흘러내리는 시냇물 정도밖에 되지 않는 미미한 만용같은 것이었다. 황벽이라는 거대한 물줄기를 만나자 그대로 포말(泡沫)도 일으키지 못하고 합수(合水)된다. 당시의 상황을 『완등록』에 적혀있는 기록을 통해 살펴본다.
裵休相國 一日入寺 見壁間畵相 問院主云 壁間是什 主云高僧 休云 形儀可見 高僧向甚處去 主無語 休云 這裏莫有禪和 主云 有希運上座 頗似禪和 休遂召師 擧前話似之 師曰但請問來 休云 形儀可見 高僧向甚處去 師召相公 公應諾 師曰 高僧在者裏 公於言下 領旨
상국 배휴가 하루는 절에 들어와서 벽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고 물었다.
“벽에 그려져 있는 것이 무엇이오?”
원주가 답하였다.
“고승의 진영입니다.”
배휴가 다시 물었다.
“형상은 볼 수 있으나 실제 고승은 없으니 고승은 어디로 간 것이오?”
원주가 아무 말을 못 하였다. 배휴가 말하였다.
“여기에 내 물음에 답해줄 선사가 아무도 없단 말이오?”
“희운이라는 이가 있는데 아마도 그분이 선사 같습니다.”
사람을 시켜 급히 채마전에 있던 희운 선사를 불러오게 하였다. 일하다가 옷에 흙을 묻혀서 나타난 희운에게, 배휴가 조금 전과 같은 질문을 다시 하였다.
“형상은 볼 수 있는데 고승은 어디로 간 것이오?”
이에 희운이 귀청 떨어질 정도의 큰소리를 내질렀다.
"배상공!”
배휴가 엉겁결에 대답했다.
"예!"
그러자 스님께서 곧바로 다시 일갈(一喝) 하문(下問)하였다.
"어디에 있느냐?"
언하(言下)에 배휴가 깨달았다.
대화 마지막 부분의 "어디 있느냐?”라고 한 희운 선사의 말에 사족(蛇足)을 달면, 내가 그대 이름을 부르고 그대가 나의 부름에 대답을 한, 바로 그놈이, 벽에 걸린 고승이고, 동시에 ‘나’라는 뜻이다. 생명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열반한 고승과 배휴가 동일인이고, 예와 지금이 같고, 조사와 범부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일갈 하문하는 것으로 일깨워 준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절대 현재’인 지금 이 순간 오온(五蘊)의 작용으로 희로애락 속에서 헤매는 ‘나’를 인식하는 그것이 ‘나’ 자신일 뿐이다. 이것 외에 다른 곳에서 나를 찾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일체고액(一切苦厄)의 바다를 건넌, 아뇩다라삼약삼보리, 때 묻지 않는 본래 생명 자리를 말한다. 삼세 제불과 숱한 조사 스님들이 이것을 간곡하게 일러 주셨는데, 일생을 다 허비해도 이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배휴는 희운 선사의 일갈에 그것을 알아 차리고 활연개오(豁然開悟)한 것이었다.
배휴는 그렇게하여 고금(古今)을 털어 거사(居士)의 사표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배휴는 그 자리에서 즉시 제자로 받아줄 것을 청하고, 예를 올려, 불교에 귀의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것이 842년의 일이었다. 이후 규봉종밀(圭峰宗密:780∼841)에게도 사사하여 두 고승의 저작에 서문을 썼는데, 특히 황벽희운의 법어집인 『전심법요(傳心法要)』를 편찬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 무종(武宗)이 일으킨 회창(會昌:841∼846)의 폐불(廢佛) 사건 때는 속세에 숨어 사는 위앙종의 개조(開祖)인 위산영우(靈祐: 771∼853)를 찾아내 위산 동경사(同慶寺)에 모시기도 하였다. 『경덕전등록』 권12에 배휴가 황벽희운을 만나는 일화가 전하는데, 이 일화는 ‘황벽형의(黃檗形儀)’라는 화두로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에 실려있다.
배휴(裵休 裵相國)는 장시성(江西省) 종린(鍾陵)의 관찰사로 부임하며, 희운을 그곳의 용흥사(龍興寺)로 모셔갔다. 848년에는 안후이성(安徽省) 완링(宛陵)으로 임지를 옮기게 되자 다시 그곳의 개원사(開元寺)로 희운 선사를 모셨었다. 그것은 단순히 큰스님을 모신 예우의 차원을 넘어 무자비한 피바람을 불러 일으킨 폐불의 법난(法亂)을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한 불교 외호 조처였다. 율종을 신봉한 불교 교단은 폐불로 인하여 쑥대밭이 되었지만 배휴가 있어서 10조 황벽희운 회상의 선종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법의 비를 사위에 뿌려, 생명존중의 불조(佛祖) 혜명(慧命)을 푸르게 길러낸 것이었다.
『완릉록(婉陸錄)』은 희운 선사가 개원사에 주석하실 때 하신 한차례의 상당 법어와, 배휴와 선사 사이에 이루어진 15차례의 문답을 정리하여 편찬한 책이다. 『전신법요』는 직접 황벽희운 선사의 상당법문을 채록하여 편찬한 조사어록이다. 큰스님을 가까이 모시며 늘 법문을 귀담아듣고, 그것을 기록하여 두었다가 조사어록으로 편찬하여 후세에 전한 배휴의 불심은 이때 쯤이 되면 거의 선사에 버금가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그것이 나라에서 폐불을 종용하던 시기에 이루어졌기에 더 큰 의의가 있다.
황벽희운 선사가 개원사에 머물 때 회중에는 1천 명이 넘는 학인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정진을 했던 사람이 임제의현((臨濟義玄)이다. 그는 허난성(河南省) 차오저우(曹州)의 남화 형씨(荊氏)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출가하여 처음에는 율(律)을 배웠고 다음에는 경론(經論)을 탐구하였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마침내 황벽희운 선사를 찾기에 이른 것이었다.
임제는 행업(行業)이 순일(純一)하였고, 천진(天眞)하게 3년을 정진하였다. 밤에 졸음이 오면 20리 길을 걸어갔다가 돌아오고는 했었다고 한다. 임제는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정진하였지만 조금도 깨달은 바가 없었다. 끊임없이 전력해도 성취가 없으니 심기가 편하지 못하였다. 그런 임제의 모습이 수좌(首座)인 목주(睦州) 스님의 눈에 띠었다. 목주 스님은 선방에서 대중들을 지도 관리하는 소임을 맡은 스님을 말한다. 당시 절에 1천 명 내외의 대중들이 모여 살았던 것을 감안하면 수좌가 특별히 관심을 가질 만큼 눈에 띠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3년 만에 목주 스님이 임제를 주목하게 된 것이다.
목주 스님이 말했다.
“내가 그 동안 스님을 말없이 지켜봤는데 나보다 후학(後學)이지만 나를 능가할 재질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동안 방장 스님을 찾아가서 직접 물어본 적이 있어요?”
“없습니다.”
“어째서 묻지 않은 거죠?”
“무엇을 어떻게 물어야 할지를 몰라서 그랬습니다.”
“그러면 내가 가르쳐 주는 대로 해 보겠소?”
“그러겠습니다.”
“방장 스님에게 ‘어떠한 것이 불법의 적적한 대의’냐고 직설적으로 한 번 물어 보세요.”
아무리해도 스스로는 깨달을 수 없었던 임제는 목주 스님의 제안을 받고 용기를 내었다. 그는 황벽 선사가 있는 방장실로 찾아가서 세 번 절을 올린 후에 물었다.
“어떠한 것이 불법의 명확한 대의입니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벽 선사는 법상 옆에 놓여있던 몽둥이를 들어올려 임제의 어깨를 향해 사정없이 내리쳤다. 문헌에 황벽 선사가 임제에게 몽둥이를 가한 횟수가 무려 20방이라고 적혀 있다. 선사가 가르침의 방편으로 방을 내려치는데 사정을 둘리가 없다. 20방이면 온 몸에 피멍이 들 정도로 사정없이 얻어 터졌다는 뜻이다.
이유 모를 매만 맞은 채 돌아온 임제를 보고 목주 수좌가 물었다.
“어떻게 되었소?”
“시키시는 대로 물었더니 가르침은 고사하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매만 치십디다. 20방이나 맞았습니다.”
목주 수좌가 말했다.
“실망하지 말고 내일 다시 가서 한번 더 물어 보시오?”
임제는 그 권유를 받아 드렸다. 불법적대의만 깨칠 수 있다면 매야 아무리 맞아도 좋을 것이다. 공매를 맞는 것이 억울할 뿐이었다. 그는 두 번째로 황벽 스님을 찾아가서 전날 매 맞은 것은 내색하지 않고, 공손히 삼배를 올렸다. 그런 다음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
하고, 말을 시작하자마자 또 그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봉으로 그를 때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분노와 수치심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이번에도 수좌는 방장에게 매만 맞고 온 임제의 경과 보고를 듣자 애써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말했다.
“매를 맞고도 묻는 것이 선행(禪行)이니 다시 한 번 가서 또 물어 보세요. 이번에는 대답을 해 주실지도 모릅니다. 삼 세번이라는 말도 있으니 여기서 포기하면 안됩니다.”
죽도록 얻어맞은 임재의 뇌리에 3년 동안 눕지도 않고 주야로 수행했던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긴 인고(忍苦)의 세월이었다. 이러고도 아직까지 불법에 명쾌하게 접근이 되지 않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는 그대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이번에야 설마 하는 기대를 가지고 세 번째로 방장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모진 매만 맞고 쫓겨났다. 힘없는 늙은 노장이 지치지도 않고 매질을 하는데, 얼굴이 매우 슬퍼보이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이래도 모르겠느냐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워낙 컸던 임제는 정말 맞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 깨우치기는 틀렸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임제는 그곳을 떠날 결심을 하고 목주 수좌를 찾아갔다.
“방장 스님께 세 번에 걸쳐서 법을 물었으나 다만 몽둥이로 얻어맞았을 뿐입니다. 깊은 뜻을 알 수 없으나 인연이 닺지 않는 것 같으니 이제 이 회상에서 물러가겠습니다.”
목주 수좌는 임제에게 부드럽게 말하였다.
“중들이 떠날 때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가기를 잘하는데, 스님은 그러지 마시고, 가더라도 꼭 방장 스님께 말씀드리고 가시오.”
그런 다음 목주 스님은 임제보다 먼저 방장실로 가서, 임제의 사람 됨됨이와 굳센 심신과 특출한 정진 등에 대하여, 누누히 말씀을 드린 다음 후일에 반드시 총림의 동량(棟梁)이 될 큰 그릇임을 아뢰었다.
“큰스님, 임제 스님은 다듬어 잘만 기르면 큰 나무로 성장하여 그 그늘 밑에 많은 사람들이 쉬어 갈 수 있도록 할 사람입니다. 때리지만 말고 잘 이끌어 주십시오.”
임제는 오만정이 다 떨어져 떠나기로 결정했지만 수좌 스님이 시킨 것을 어기기 힘들어 마지막으로 하직인사를 하기 위해 방장을 찾아 갔다.
임제를 맞이한 황벽 선사는 불법을 묻지 않아서 그런지 몽둥이질을 다시 하지는 않았다. 그는 수좌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 드렸음인지 자상하게 물었다.
“갈 곳은 정했느냐?"
"아직 목적지는 정하지 못했습니다."
나아갈 곳도 정하지 않고 이 회상을 떠나려하는 의도를 모를 황벽이 아니었다. 그는 지긋이 눈을 감은채 염주만 돌렸다. 희운 선사의 입장에서도 절절하게 일러 주었는데도 모르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시키는대로 하겠느냐?"
이때 방장의 제안을 받아 드리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모든 것이 도루아미타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제는 깨달을 시기가 거의 임박해 있었다. 그는 잠자코 짧게 의사 표시를 했다.
"네."
"그럼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여기서 나가면 탄두당(灘頭堂) 대우(大愚) 스님을 찾아가서 나한테 했던 대로 법을 물어 보거라. 그러면 대우는 나보다 더 자상하게 너를 인도해 줄 것이다.”
임제는 황벽의 회상을 벗어나자 방장 스님이 일러준 대로 대우 회상을 찾아 갔다. 대우는 마조의 법사인 지상으로부터 법을 이어받은 분이다. 황벽 선사와는 법으로 종형제가 된다. 절을 받은 대우 화상이 임제를 보고 물었다.
“어디에서 왔느냐?”
“황벽 스님 회상에서 왔습니다.”
“황벽이 무엇을 가르쳐 주던고?”
“제가 세 번이나 불법의 큰 뜻을 물었는데 세 번 다 주장자로 도합 60방을 맞았을 뿐입니다. 저에게 무슨 허물이 있다고 그렇게 모진 매질을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대우 화상이 벽력같은 소리를 질렀다.
“네, 이 놈!"
임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우 화상을 응시하였다.
"이 어리석은 놈아, 너의 스님이 노파심에서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불법의 대의를 뼈에 사무치게 가르쳐 주었는데, 대자비를 입은 줄도 모르고 뭐 허물이 어떻다고! "
언하에 임제는 대오(大悟)하였다. 어째서 황벽 선사가 때릴 때는 모르다가 대우 화상이 할하는 소리를 듣고 즉시 크게 깨달은 것일까.
언하에 대오했다는 식의 말을 접할 때면 무엇 때문에 깨달은 것인지를 정확히 알 수가 없어 답답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사족(蛇足)인줄 알면서도 이런저런 생각을 굴려본다.
분명 임제는 방장인 황벽 선사에게 불법의 대의를 물었고, 방장 스님은 그 물음에 대한 답으로 매질을 한 것이니 답을 일러준 것이었다. 때린 사람이 있고 맞은 사람이 있고, 맞았으니 아픔이 있고, 그렇게 온몸으로 뼈에 사무치도록 철저하게 알려 준 것인데, 그 가운데 불법의 대의가 있다는 것을 몰랐을 뿐이다. 대우 스님이 황벽 선사의 노파심을 지적하는 순간 임제의 어두운 가슴에 빛이 열린 것이었다. 그것은 개오(開悟)의 불빛이었다. 처음으로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자기 면전(面前)에 있음을 깨달던 것이다.
60방의 매는 감정의 매질이 아니라 대우의 말처럼 제자가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자비의 가르침이었다. 60방 쯤 맞아 피멍이 들면 비참하고 슬프고 그래서 깨달음이고 뭐고 다 짚어 치우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겠지만 그 정도는 절절하고 사무쳐야 깨다를 수 있다는 것이 스승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늙은 방장이 남아있는 힘을 다 써서 매질을 한 것이었다. 이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자비를 베푼 것이었다. 그랬었다는 것을 귀뜸해주자 활연대오(豁然大悟)한 임제는 다음 순간 호방하게 웃었다.
“으하하……. 황벽의 불법이라는 것이 별것도 아니었구나.”
이 장면을 전하는 문헌의 원문은 ‘원래 황벽불법 무다자(元來 黃檗佛法 無多子)’다. 무다자는 간단 명료한 진실을 표현할 때 사용한 당나라식 속어다. 그렇게 되면 “황벽의 불법이 이렇게 단적(端的)일 줄이야!” 하고 말한 것이 된다. 별것도 아니라고 해석하던가. 단적으로 간단명료한 것이라고 하였던, 은사를 얕잡아 보고 하는 말이라 여길 수 있다. 그러니 대우 화상이 임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 버릇없는 놈. 방금 전까지 무슨 허물로 맞았는지도 모르겠다더니, 뭐! 황벽의 불법이 몇 푼어치도 안 된다고? 이 오줌싸개 같은 놈아, 네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입을 그리 놀리는지 말해 보아라.”
임제는 대답을 하지않고 다만 커다란 주먹으로 대우 화상의 옆구리를 쿡쿡 세 번 쥐어박았다. 그러자 대우 화상이 말했다.
“너의 스승은 황벽이다. 나와는 상관이 없다.”
오줌싸개라고 놀린 것에 주목해 보자. 법을 제대로 알려 주어도 모르는 임제를 오줌싸개 같은 어린애로 취급하여 황벽 산사는 사제인 대우에게 보내어 깨우쳐 주기를 요청했던 것이다. 오줌 싼 소년 임제를 삼촌집으로 보내 소금을 꾸워오도록 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임제가 깨달은 것을 안 대우 화상은 그 깨달음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황벽이니 황벽 스님이 네 스승이라고 한 것이었다. 깨닫기는 대우 회상에서 했지만 황벽 스님이 때릴 때 이미 공부는 다 되어 있었고, 다만 터지지만 못했다가 마침내 터졌으니 바로 말해서 네 은사는 황벽이지 내가 아니라고 환기시켜 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임제가 마침내 깨달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임제가 대우 화상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 것은 자기도 다 알고 있으니 웬간히 하라는 의사를 표출한 것이었다.
임제는 황벽 선사 회상으로 부리나케 되돌아갔다. 다시 돌아온 임제에게 황벽 선사의 호통이 떨어졌다.
“이놈,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는데 무슨 성취가 있었느냐?”
그러자 임제가 대답했다.
“다만 노파심 때문입니다.”
스님의 노파심 때문에 깨달았으니 이제 노파심은 접어두라는 의미의 말을 한 것이며, 대우 화상이 그 노파심을 일깨워 주어서 깨달을 수 있었다는 그 동안의 경과보고를 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자 황벽 선사가 중얼거렸다.
“대우 말쟁이 늙은이가 오면 내가 톡톡히 한 번 맛을 보여 주어야 겠구나.”
그러자 임제가 말했다.
“대우 스님이 이곳까지 오기를 기다릴 것이 뭐 있습니까. 지금 당장 맛은 제가 보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임제는 손바닥으로 황벽의 뺨을 갈겼다. 황벽은 두 눈을 부릅뜨고 벽력같은 소리를 질렀다.
“고얀 놈 같으니. 여기가 어딘줄 알고 감히 호랑이수염을 잡아당기느냐?”
임제는 호령 소리를 듣자, 재빨리 손을 방바닥에 대고 허리를 웅크려서 사자의 형상을 지은 다음 혼신의 힘을 다하여 대갈일성 사자후를 토했다. 당신이 범이라면 나는 사자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자 황벽 선사가 방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여봐라, 저 놈을 큰방(선방)으로 끌고 가거라!”
이 정도면 황벽이 그 옛날 은사인 백장과 거량하던 것과 판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선사들이 전등의 순간에 제자가 스승의 뺨 정도 때리는 것은 정말 다반사다
황벽 선사의 선요를 대표하는 말은 어묵동정(語默動靜) 행주좌와(行躊坐臥)다. 선은 말하거나 고요히 있거나, 돌아다니거나 한군데 머물러 있으나, 앉으나 누우나 할 수 있다는 것을 묘파한 말이다. 일상 속에서 선을 할 수 있다는 그의 가르침은 곧 선의 대중화를 선언한 것이었다. 일하지 않고는 먹지 않는다는 스승 백장회해 선사의 종지(宗旨)는 일하지 않고 먹는 사람들의 집단을 쳐부수어야 한다는 폐불론자들의 주장에 맞서 선불교를 살아남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어묵동정 정주좌와를 외친 제자 황벽희운의 이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일체의 격식을 배제하여 귀족화된 불교의 폐해를 혁파하고 대중 속으로 걸어가서 살아남도록 하는 지침이 되었다. 인도에서 불교가 흰두에 밀려 외면을 받게 된 것은 서민 대중이 아니라 권력의 시녀노릇을 하였기 때문이다. 불교의 그런 잘못을 흰두가 바로잡아서 민중을 감싸 안았기 때문에 종주국인 인도가 불교국가가 아니라 흰두의 천지가 된 것을 감안할 때, 황벽의 선을 통한 대중화는 귀족불교의 폐혜를 바로잡는 것이기도 했었다.
배휴는 이 당시의 희운 선사에 대해 “스님께서 증득한 불법은 낡은 것도 새로운 것도 없으며 깊고 얕음도 없으니 설하신 법은 분별하여 알 바가 아니었다. 또한 종주로 다니지 않으시고 문호도 열지 않으셨으나 스님 계신 그대로가 진리의 하염없는 모습이었다.” 고 하였다.
선불교 중흥기를 이끈 것은 물론 선사들이지만 외호 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배휴가 직접 황벽 선사를 보호하고 외풍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선종도 바람앞에 등불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뿐만아니라 불교를 이해한 관리들의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무주상보시가 큰 재정적 버팀목이 되었는데, 그 중심에 배휴가 있었다.
이 당시 배휴와 황벽 선사가 만나면 늘 차를 나누어 마셨었다. 차는 호포천(虎跑泉)이라는 샘에서 솟는 물을 사용하여 우린 것이었다. 문헌에 ‘황벽사 옆에 있던 호포천은 100m 밖의 용담(龍潭)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샘물은 맑고 지하동굴로부터 솟구쳐 연못을 이루는 것이었다. 사면은 돌로 벽을 쌓고 못 변에 4개의 돌기둥이 있으며, 4개의 돌판으로 난간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눈에 띈다. 호포천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단샘이었다. 황벽은 호포천의 샘물로 차를 달여 사람들과 더불어 음다(飮茶)하며, 그 차로 백장청규 의식에 따라 대중을 제접(提接하였다. 이로써 볼 때 이때 이미 선다일미(禪茶一味)가 뿌리를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강시성은 장강(長江)의 중류에 있는 까닭에 일찍부터 차 문화가 발달하였다. 그러나 차와 선이 만나게 된 것은 마조가 강시(江西)로 옮겨 오면서부터다.
마조가 평상심(平常心)의 도를 농선(農禪)의 기본정신이라고 설파한 이래 마조의 제자들은 그 정신을 실천해 나갔고, 그중 백장은 백장청규를 제정하여 선종의 보청정신을 강조하였다. 백장청규에는 차 마시는 예법까지 제정, 차가 단순히 보차에만 머물지 않고 의식으로까지 이어져 왔음을 보여준다. 백장청규의 「방장점행당다(方丈點行堂茶)」에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주지가 상당하여 설법을 마치면 대중과 함께 당을 돌고 차를 마시는 법식이 있다. 그리고 방장이 행자를 위해 차를 내주는데, 이때 시자가 주지를 대신해서 대접한다”는 대목이 있다.
이와 같은 의식을 선종에서 ‘점다(點茶)’라고 말한다. 그와 같이 백장은 마조의 평상심을 백장청규로 이어왔고 다시 황벽은 날카로운 선지로 대중을 제접했으며 그 정신을 임제가 이어 무위진인(無位眞人)의 사상으로 이끌어감으로써 다선일미의 정신은 비로소 임제의 절대자유의 경지로 되살아나기에 이른 것이다.
정리하면 백장의 은사이신 마조도일이 늘 차를 가까이했었으니, 차 문화는 마조 ➔ 백장 ➔ 황벽 ➔ 임제를 거치며 선 속에 깊이 녹아들어, 다선일미(茶禪一味)니 화경청적(和敬淸寂)이라는 말로 정착된 것이었다. 조주의 ‘차나 마셔라(喫茶去)’가 황벽의 제자인 임제에 의해 차별 없는 참사람(無位眞人)으로 되살아 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차별 없는 참사람이란 바로 차 한 잔의 진리가 담긴 선어라고 말할 수 있다.
배휴는 대중(大中) 4년(850)이 되었을 때 선종에게 주청하여 황벽에게 '단제(斷際)'라는 시호를 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써 배휴가 얼마나 스승 황벽을 흠모했는지를 실감케 한다. 단제 황벽희운 선사의 정신은 황벽차에 녹아들었고, 임제가 차별 없는 참사람으로 이어갔으며, 그 진리 속에 다선(茶禪)의 정신이 살아 있는 것이다. 이 무렵 단제 황벽희운 선사와 배휴는 비교적 자주 다담(茶談)을 나누었다. 선사가 묵묵히 차를 우리고, 그것을 배휴에게 따라준다. 한 모금 차를 마신 다음 배휴가 입을 열었다.
"저는 이린시절 조실부모하고 외삼촌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았었습니다."
"그랬던가!"
"그 무렵 어느 날 사주 관상을 아주 잘 보신다는 한 스님이 외삼촌댁에 오셔서 저와 쌍동이 동생의 사주를 봐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스님께서 저와 제 동생이 평생 빌어먹는 거지로 살 팔자라는 감명을 했었는데, 복은 타고나는 전생업(前生業)인지요?"
"사주가 바뀌지 않는 전생업이라면 지금 자네는 관찰사가 아니라 잘해야 거지 왕초쯤 되어 있을 것이 아닌가! 중이 사주를 본다는 것도 마땅찮고, 게다가 이치에 맞지도 않는 헛소리를 하여, 업장만 두텁게 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의 복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주시는 것도 아니다. 이게 정답이다."
"정말 그게 답니까?"
"그렇다. 다만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이다."
"많은 중생들이 복을 받으려고 불공을 드리고 있는 실정인데요?"
"부처님께 복을 달라고 구걸하는 것이야말로 동냥 얻으려는 거지짓과 다를 것이 없다. 내가 짓고 내가 받으면 되는데, 왜 복을 구걸해서 받으려 하는가. "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으려는 노력을 해도 잘 안되니까, 부처님께 의지하게 되고, 복은 타고 나는 것인가 보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모든 것을 구족하고 태어난 부처다. 그것을 일일히 몽둥이 찜질을 해서 알려 주어야 하겠는가!"
말을 마친 황벽 선사가 주장자를 만졌다. 여차하면 집어 들어 내려 칠 기세였다. 황벽 선사가 임제에게, 맞으면 아픈 몸뚱이 그게 곧 부처라는 가르침을 주었다는 저간의 사정을 배휴도 익히 알고 있었다. 배휴가 황급히 손사레를 쳤다.
"저도 압니다요. 제가 부처더라구요. 평생 빌어먹으며 거지로 살 줄 알았다가, 그런 제가 실은 스스로 모든 것을 구족한 부처라는 것을 알고 얼마나 기뻤는 줄 아세요!"
자신이 모든 복을 구족한 부처라는 것을 알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임제의현 같은 수좌도 60방을 얻어 맞고서야 겨우 그것을 알았었다. 임제의 인시불(人是佛), 사람이 곧 부처라는 사상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황벽희운에게서 구체화된 것이었다. 황벽은 그 이전 6조에게서 그것을 배웠었고, 6조는 금강경을 통해 그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조사마다 표현 방식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은 같다. 인시불이고 누구나 무위진인이다. 배휴는 임제처럼 맞지 않았는데도 그 도리를 알고 있다니 다행한 일이었다. 맞는 것보다 더 힘든 거지생활을 통해 부처로서의 자기 존재를 절절히 깨쳤던 것같다.
배휴는 당나라 여러 지역의 관찰사를 두루 역임하다가 내직으로 승차하여 정승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때까지도 배휴는 등이 붙어 함께 세상에 나온 동생을 생각하고 사방에 수소문해서 널리 찾았지만, 동생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하였다. 어디로 갔는지 무엇을 하는지, 이렇게 정승이 되었으니 힘들게 살고 있으면 좀 도와주고, 함께 잘 지내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자기와 비슷하게 초상화를 그려 전국 요소요소에 방을 부치고, 안면이 있는 여러 지방관들에게도 알려 도움을 청했지만, 동생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행방이 묘연하기만 하였다.
거리를 떠돌다가 역병(疫病)이라도 얻어서 명을 달리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동생찾는 일을 단념했던 무렵의 어느 날, 황허강을 배를 타고 건너는 데, 때마침 더운 여름이라, 배휴가 뱃사공을 보니 웃옷을 벗어부치고 노를 젓는데, 등짝에 자기와 같은 흉터가 있었다.
배휴가 급히 물었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배탁이올시다."
"그렇다면 배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모르느냐?“
“저와 함께 세상에 태어난 쌍둥이 형이 있는데, 그분의 아명(兒名)이 배도입니다. ”
배휴는 반색한다.
“그래, 바로 내가 그 형이다. 내 등에도 너와 같은 흉터가 있다. 보여주면 나를 알아보겠느냐?”
“그러지 않아도 형님인 줄 알겠습니다. 형님이 벼슬길에 올라 높이 되셨다는 소문은 듣고 있었습니다."
"그럼 왜 나를 찾아오지 않았느냐? 내가 정승이 되었는데 동생 하나 못 돌보아 줄 것으로 생각했느냐?”
"형님은 형님 복에 정승이 되어 잘 먹고 잘 지내시는 겁니다. 그러면 됐지 내가 형님 덕 볼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나도 황허강에 배 띄우고 넓은 산과 물을 벗 삼아 오가는 사람을 건네주며 잘 살고 있습니다.”
" 내가 얼마나 너를 애타게 찾은 줄 아느냐?"
"형님이 붙인 방도 보고 저를 찾는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나타나지 않은 것은 첫째는 형님 도움이 없어도 살만하여 그랬고, 두번째는 혹시 형님께 누를 끼칠지도 몰라 그리한 것입니다. 저도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은 사사로운 정리에 이끌려서는 안된다는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뱃사공 일이 삼공(三公) 지위만은 못하겠지만, 부러울 것이 없으니, 뭘 도와주려다가 녹을 먹는 사람의 본분을 해치는 일은 절대 하지 마십시오."
동생의 말을 듣는 배휴의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번진다. 동생의 말 속에는 나라일만 큰일이 아니라, 노를 저어 강을 건너게 해주는 것도, 사람을 도와주는 꼭 해야 하는 일에 해당한다는 자부심 같은 것이 녹아들어 있었다. 배휴는 뱃사공이지만 부귀영화를 초개처럼 알고,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한 긍지를 가지고 있는 동생을 대하니, 몇 십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동생도 어려서는 어렸기 때문에 스스로 호구지책(糊口之策)을 해결할 수 없었지만, 걸인지상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형의 도움도 거절하고 스스로 잘 살고 있음을 볼 때, 아무래도 형제의 사주 관상을 보았던 고승은 잘못 감명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늘 목에 걸린 가시처럼 동생이 걱정되었었는데, 쓸데없는 걱정을 했었음을 알게 된 기쁨은 배휴의 입을 점점 크게 벌려 놓았다.
"하하하!"
배휴는 실로 오랜만에 가슴이 후련해지도록 웃었다. 그의 호탕한 웃음 소리가 장강(長江)을 따라 멀리 펴져 나갔다
후기(後記)
요즈음도 그 옛날의 고승처럼, 사주나 관상을 보고 추명(推命)하는 것으로 업을 삼는 이들이 있는데, 사주는 맞지않는 이론이다. 여존남비(女尊男卑)의 모계 중심사회에서 출발하여 남존여비(男尊女卑)로 바뀐 봉건 농경주의 시대를 관통해온 가치관이 뒤죽박죽 섞여있어서 결코 첨단 정보화시대를 살고있는 현대인들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재단할 수 있는 자(尺)가 될 수 없는데, 수 천 년 전에 만들어진 꽤꽤묵은 이론을 들이밀어 속이고 속는 웃지못할 코메디를 연출하고 있는 것 뿐이다.
배도 배탁 형제의 이야기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인격이 되고, 인격이 곧 그 사람의 인생이 되는 것 뿐이다. 다만 그뿐이지 관상이나 사주팔자가 그 사람의 전체 인생을 지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타고났다는 운명도 저만큼 다른 모습으로 구현된다.
관상은 불여 심상인데, 심상은 불여 불심(佛心)이다. 마음에 부처를 모시고 인과(因果)에 걸리지 않는 삶을 살면 배휴처럼 귀하게 되고, 높이 된다. 배탁처럼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자유롭게 살 수도 있다. 복을 구걸하는 거지가 되지 말고, 복은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임을 아는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점검해 보기 위해, 불제자 배휴의 삶을 간략히 살펴 보았음을 부기(附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