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도군 운문면 대천리 일대는 밀성박씨 집성촌이다. 대천 평리를 중심으로 시조 박혁거세로부터 48세, 중시조 박언부의 12세손인 소요당(逍遙堂) 박하담 [朴河淡, 1479~1560]의 후손이 많다.
초기의 신라박씨는 혁거세를 시조로 하며 그의 맏 증손 일성왕(逸聖王)계와 둘째 증손 파사왕(婆娑王)계로 크게 나누어지게 된다. 일성왕계는 밀양박씨를 비롯하여 많은 파들이 있으며, 파사왕계는 신라의 제5대 왕(재위 80∼112)인 파사왕의 현손이며, 파사왕의 아들 지마왕의 고손인 박제상 [朴堤上, 363~419]의 후손인 영해박씨를 비롯 강릉박씨, 고려 개국공신 박술희를 시조로 하는 면천박씨 등의 제파가 있다. 즉, 영해·면천·강릉 등으로 분파 관적(貫籍)했고, 비안·우봉(牛峰)·이산(尼山)·해주(海州) 등도 파사왕의 후손이라 한다. (신라박씨의 상계도를 참조)
밀성박씨의 세계 대강을 살펴보면, 통일신라 말기 3대를 박씨가 신라왕으로 등극하였고, 일성왕계는 혁거세 28대손인 신덕왕(神德王, 박경휘景暉), 신덕왕의 장남 경명왕(景明王, 박승영昇英) 차남 경애왕(박위응魏膺)의 3대가 바로 이들이다. 경명왕계는 아들 8형제(8대군파) 또는 9대군파가 있는데, 이는 각기 박언침彦忱 밀성대군파(密城大君派: 밀양, 반남, 진원 박씨 등) 박언성彦成 고양대군파(高陽大君派: 고령 박씨) 박언신彦信 속함대군파(速咸大君派:함양·삼척박씨 등), 박언립彦立 죽성대군파(竹城大君派:죽산·음성·고성박씨), 박언창彦昌 사벌대군파(沙伐大君派:상주·충주박씨), 박언화彦華 완산대군파(完山大君派:전주·무안박씨), 박언지彦智 강남대군파(江南大君派:순천·춘천박씨 등), 박언의彦儀 월성대군파(月城大君派:경주박씨)의 8대군파와, 박교순 舜 국상공파(國相公派:울산박씨)로 신라가 폐망하자 각 지역으로 분파하였다.
신라왕자로서 고려의 호족이 되어 분파하게 된 이 8대군파 도는 9대군파가 신라박씨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경주로 습격한 견훤에 맞서 싸우다 죽음을 맞이한 경명왕의 아우 경애왕의 후손으로 계림대군파가 있으며, 혁거세 22세손 박대령의 차남 박니수의 후손인 적도후공파도 있다. 이 중에도 밀양박씨는 맏아들 박언침의 후손을 이르는 것으로 그 후손이 가장 많다.
이 밀성대군 박언침의 후손을 밀양박씨라고 하는데, 밀양박씨의 상조上祖인 그는 제54대 경명왕의 맏아들이며 경명왕이 여덟 왕자를 각기 분봉할 때 밀성대군(密城大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를 중조로 하고 밀성(密城)이 뒤에 밀양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을 밀양(密陽)으로 하였는데, 옛 지명을 따라 밀성박씨(밀박)라고도 한다. 박언침의 묘소는 실전되고 전설로만 밀양읍 영남루 광장에 있었다고 전해져 오다가 1921년 여름, 심한 폭우가 쏟아져 산사태를 이루면서 영남루 북쪽 광장에 드러난 커다란 구덩이가 전문가들의 조사에 의해 밀성대군의 묘소임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제단을 설치, 매년 음력 3월3일과 9월9일에 향사 하고 있다. 밀성대군의 박언침의 7대손인 박언부(彦孚:고려 문종 때 문하시중)를 중시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를 비롯하여 도평의사사사공파(都評議使司使公派)·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판도공파(版圖公派)·좌윤공파(左尹公派) 등으로 대별되고, 각 파는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또 여러 파로 분파된다. 문하시중공파는 다시 종파인 박영균 은산군파(銀山君派:永均)· 박세균 행산군파(杏山君派:世均)로 나누어지고, 은산군 박영균의 장남 충숙공 송은(松隱) 박익(朴翊:1332~1398)은 고려충절로 포은 정몽주, 야은 길 재, 목은 이색 등과 같이 송도 8은 중의 한분으로, 1392년 7월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고려 관리들은 더 이상 신하의 의리를 지킬 수 없다며 하나 둘 개성을 떠났다. 이들은 개성 동남쪽 고갯마루에 올라 과거 임금을 조회할 때 쓰던 예복과 관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평복과 삿갓으로 바꿔 썼다. 이들이 들어간 곳은 개풍군 광덕산 서쪽 골짜기인 두문동(杜門洞).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유래한 그 골짜기이다. 이들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신념에 따라 그 곳에서 생을 마쳤다. 당시 두문동에 들어간 고려의 유신은 72명. 이들의 이름은 ‘두문동 72현록’, ‘두문동실기’ 등의 기록에 전하고 있다. ‘두문동 72현’에는 박익, 박문수, 성사제, 조의생, 임선미, 고천상, 전귀생, 이유, 이맹예, 전조생, 우현보, 이행 등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기록에 따라 72현의 명단에 차이가 있는 데다 문헌도 소략해 구체적인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72현 중의 한 사람인 박익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고려말 문신으로 예부시랑, 중서령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여러번 왜구와 여진을 토벌하여 전공을 세웠다. 조선이 개국되자 은거하였으며 태조 이성계가 여러 판서직과 좌의정을 제수하며 불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의 수도 송경(松京)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집 뒤의 산을 송악, 마을을 송계, 호를 송은, 집을 송암이라고 했다’라고 간략히 기술돼 있다. 두문동 72인의 한 사람 정도로 알려진 채 역사 속에 묻힌 박익이 최근 들어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600년 넘게 잊혀진 박익이 조명을 받게 된 계기는 전혀 뜻밖의 일에서 비롯됐다. 2000. 9. 15~16일 경남 지방에는 태풍 ‘사오마이’가 몰아쳤다. 초속 30m의 강풍을 동반한 태풍은 경남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에 위치한 박익의 묘를 강타, 봉분을 무너뜨리는 등 곳곳을 훼손시켰다. 한달 뒤 보수작업에 나선 밀양 박씨 문중은 봉토 아래에 도굴 흔적과 함께 석실 내부에 벽화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문화재 당국에 신고했다. 이후 전문가의 조사결과 석실 벽면 4곳에서 화려한 색채의 고려풍속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무덤 안에서 박익의 관직과 가족관계를 나타내는 지석(誌石)과 연꽃문양을 새긴 혼유석도 함께 출토됐다. 전국적으로도 드물게 보이는 고려벽화, 그것도 남녀 인물과 말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진 인물풍속화였기에 박익의 고분벽화는 관련학계를 흥분시켰다. 당연히 박익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그러나 아직 이렇다할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 관련 자료가 너무 없는 탓이다. 고법리 고분 유적 이외에 박익에 대한 역사자료는 그의 문집 ‘송은집’(松隱集)이 전부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영인한 ‘송은집’(규장각 소장본)에 따르면 그는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등과 교유했다. 그를 이들과 함께 고려말의 ‘팔은’(八隱)이라 일컫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박익은 ‘정몽주에게 준 시’에서 “송계에 숨어사는 사람을 찾아오셨네 / 석양에 사립문 닫아 놓아 꽃잎은 쌓이는데 / 술동이 앞에 두고 나의 심정 묻노니 / 저기 보이는 청산이 내 마음이라오”라며 은거하고 사는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송은집’에는 또 이색이 밀양에 사는 박익의 집을 방문한 뒤에 두 사람이 술 마시며 놀았던 일을 회고한 한시가 실려 있다. 팔은 가운데서도 박익은 포은, 목은과 깊이 사귀었던 것 같다. 박익은 이색보다는 5세가 적고, 정몽주보다는 6세 연상이었다. 특히 정몽주에게는 네명의 아들을 보내 교육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말 정치 상황은 더 이상 이들의 우정을 허락치 않았다. 조선초의 문인 김대유는 정몽주가 조영규에게 격살되기 직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죽음을 맹세하던 날 정몽주는 박익에게 눈물로 말했다.‘살고 죽는게 천명이라고 하지만, 나는 고려왕조를 위해 죽을 것이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대와 야은, 목은은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 믿소.’이에 박익은 ‘그렇소, 나 또한 이씨의 녹을 먹지 않으리라’고 대답했다』 정몽주가 살해당하자 박익은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얼마 뒤에는 고향인 밀양 송계로 낙향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평생 고려신하의 절조를 지킨 박익은 죽음을 앞두고 네 아들을 불러 “고려와 조선, 나와 너희가 사는 때가 다르다. 나는 죽어 왕씨의 혼이 될 것이니, 너희는 이씨의 세상에서 살아라. 기왕에 남의 신하가 됐으니 충성을 다하거라”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그림은 박익 선생의 묘소 내부 서쪽 벽화의 일부이고, 밀양에 있는 선생의 묘소와 문집인 송암집이다. 박융은 창녕에서 거주하고, 관직을 재수받아 이조정랑에 이르렀으며, 그 의 차남 46대 박건, 47대 박승원에 이르러 청도에 비로소 입향하게 된다. 사직공 박건 선생의 휘는 건乾이고, 호는 소고 또는 두곡이며 송은 박익 선생의 손자로서 무예에 출중하여 사람들이 진장부(眞丈夫)라 하였다. 조선조 초에 밀양 서면의 삽포리에서 청도에 들어와 시거한 밀성 박씨의 입청도조이다. 14의사는 임진왜란에 밀성 박씨 문중의 부자 형제, 종반숙질(從班叔侄) 등이 망우당 곽재우등과 연합 의병을 창의(倡義)하여 훈공을 세운 충의지사로 삼우정 박경신, 용연 박경인, 제우당 박경전, 국헌 박경윤, 증좌승지 박경선, 괴정 박선, 운옹 박찬, 행와 박린, 기포 박우, 진사 박근, 용암 박숙, 중추부 동지 박지남, 박철남, 판관 박구 등 14선생이 있다. 용강서원충열사및십사의사묘정비(龍岡書院忠烈祠및十四義士廟庭碑)가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학산리 있으며, 이들 14의사는 부자, 형제, 숙질, 종형제사이로 온 가족이 나라를 위해 몸바친 선열들이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때 몸을 던져 구국한 위국충절로 귀감이 되고 있다. 형조판서, 오위도총관을 역임한 이가환이 [십사의사합전十四義士合傳]을 찬하여 이르기를 박경전이 먼저 그 어머니를 운문산중에 모시고 임란시 4.25일에 군을 일으키어 적을 막게하니 경윤이 말하기를 우리 일족이 모아 싸우는데 싸움에 지면 전멸할 것이므로 세군데로 나누어 서로 구하고 돕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여 경신, 경전은 上東상동에 주둔하고 경윤, 린은 中東중동 吉夫山길부산에, 경선은 鳳凰崖봉황애에 주둔하여 적과 싸우고 또한 지켰다. 이러한 의병의 활약 때문에 적이 이르기를 청도는 함부로 침범하지 말라하였다. 이로서 대구 동쪽은 패전을 면하고 백성들의 경작이 평일과 같으니 모두 박씨의 힘이라 하였다. 경인은 연약한 서생으로서 힘껏 적을 치다가 부상이 더욱 심하므로 아들 선에게 위촉하고 죽었다. 선은 이로서 더욱 힘내 싸웠으나 최마(상주의 몸)로서 매양 功공을 사양하였다. 경선은 봉황애에서 적을 만나 오른편 팔을 끊기어 지탱하기 어렵게 되자 피난 중의 어머니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왼팔로서 적을 껴안고 낭떨어지에 떨어져 같이 죽었다. 경신은 적의 머리를 얻으면 문득 아랫사람에 주었던 까닭에 더욱 병졸들이 분발하였다. 경전는 이미 공이 많았으나 군수 배응경에 돌아와 그 공을 차지하려하자 여러 전사들이 분노하는 것을 경전이 눈물로서 말리면서 군수의 입성을 맞이하니 이로서 모든 공이 군수에게 돌아갔다. 경윤은 전후로 적을 벤 것이 천명도 더 되었으나 그 공은 단지 2급에 그쳤다. 우는 상동에 있으면서 싸우면 문득 먼저올라가 적을 대항하므로 얼굴과 발을 심히 다쳤으나 보답한 공이 없었다. 이때를 당하여 박씨군은 그 용기와 예의가 이와 같았다. 우는 후에 무과에 등과하였고 李适이괄의 난리에 南以興남이흥을 따라서 저탄에서 적을 막아 공이 있었으며 병자호란에는 파관하여 집에 있었으나 일어나 충청병사 이의배 군을 따라가 적을 만나 쌍령에서 죽었다. 논공할 때 선무로서 경신이 일등이고 경전, 경윤, 근, 지남, 철남은 2등이며, 찬, 선, 숙, 구 등은 3등이며, 우는 진무공 1등인데 모두 원종이었다. 경인과 경선은 일찍 죽어 녹에 들지 못했다. 박씨는 모두 소요당 하담에서부터 나왔다. 청도 이서면 일대에 터를 잡았다가 운문으로 입향한 선조는 48대 박하담이며, 이서와 청도를 왕래하면서 노유하다가 그의 손자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운문에 거주하게 된다. 즉, 제우당 박경전, 상우재 박경준 후손들이 운문에 많이 거주하게 되고 용암공 후예들도 운문에 다수 있다. 약 450년 전에 밀성박씨들이 운문 대천리, 금천 신지리를 중심으로 터 잡기 시작한 것이다. 재경향우회 회원으로 첨정공 박찬 璨(僉正)의 후손으로는 박재문 현 서울 송파구 의원이 있고, 박경전 제우당 후손은 박순한 운영위원을 비롯 박토현, 박우현, 박상현, 박순보 등 제씨이며, 상우재 후손이 가장 많고 번성하여 박재욱 국회의원,박기현 향우회 고문, 박선현 향우회 회장을 비롯하여 박재형 부회장, 박성현, 박재현, 박청길, 박순록 감사, 박순덕 전총무를 비롯, 박경숙, 박대성, 박만식, 박말숙, 박명순, 박문현, 박상길, 박성기, 박순길, 박순만, 박순식, 박순열, 박순영, 박순우, 박순욱, 박순철, 박신우, 박영옥, 박영자, 박을학, 박재건, 박재돈, 박재두, 박재득, 박재락, 박재삼, 박재현, 박정순, 박정순, 박정현, 박정희, 박창현, 박청길, 박토현, 박홍현, 박화현 등 제씨가 있고, 용암공 후손은 박길전부회장을 비롯, 박의경, 박재명, 박재서, 박형문 등 제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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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
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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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 시조왕 박혁거세 赫居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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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 남해왕南解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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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3 유리왕儒理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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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4 일성왕逸聖王 | 4. 파사왕 婆娑王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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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5 아달라왕阿達羅王 | 5. 지마왕 祗摩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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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6박벽방碧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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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7박무영武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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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8박판득判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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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9박광흠光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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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10박미일美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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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11박내물乃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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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12박상건相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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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13박인엽仁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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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14박계보啓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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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15박명신明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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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16박정환貞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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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17박로겸露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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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18박남선楠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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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19박금산金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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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20박응찬應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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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21박덕흥德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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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22박대령大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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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23박니순尼淳 | 니수尼秀(적도후공파) | 니국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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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24박륭검隆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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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25박지곤之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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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26박성순成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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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27박추신秋信 | 선성왕宣聖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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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28박희복僖福 | 28신덕왕神德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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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29경명왕景明王 | 景哀王 | 박魏欣 | 박孝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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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30박언침彦忱(밀양박씨) | 등 8왕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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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31박 욱 郁 | 高麗 太祖때 삼한벽공도대장군(三韓壁控都大將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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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32박 란 澜(요동독포사) | 遼東督捕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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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33박영정永禎 | 독포사(督捕使) 난의 아들.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참지정사(參知政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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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34박기세基世 | 고려 때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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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35박시주施做(吏部尙書) | 고려(高麗)에서 보문각시제(寶文閣侍制)를 지내고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중국(中國)에 다녀와서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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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36박찬행讚行 | 政堂文學 檢校太傅를 거쳐 門下侍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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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 37박언부彦孚 | 高麗 文宗때 문과 급제,崔沖과 함께 太師를 지낸 후 門下侍中 都評議事를 역임, 密城府院君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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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38박효신孝臣 | 시호(諡號)는 문익(文翼). 고려 때 문과(文科)에 급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문장(文章)과 충절(忠節)이 뛰어나서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 | 박의신 義臣(後 潘南 분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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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39박공필公弼 |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평장사(平章事) 효신(孝臣)의 아들. 고려 때 대장군(大將軍) ,도검사(都檢事)를 지내고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올랐으며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윤 관(尹瓘) 등과 함께 여진국(女眞國)을 평정한 공(功)으로 진국공신(鎭國功臣)에 책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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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40박육경育慶 | 병부상서(兵部尙書) 공필(公弼)의 맏아들. 고려 인종(仁宗)때 대장군(大將軍)과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김부식(金富軾)과 함께 도적 조광(粗鑛) 등을 쳐서 평정하고 왕에게 상소하여 양현고(養賢庫)설립으로 많은 선비 양성 | 박育和 | 박育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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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41박대화大和 | 고려 때 대호군(大護軍)과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 |
育和의현손 박鉉(糾正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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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 42박 간 幹 | 시호(諡號)는 양효(良孝). 고려조(高麗朝)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병부참정(兵部參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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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43박영균永均(銀山派) | 시호(諡號)는 문헌(文憲). 이부상서(吏部尙書) 대화(大和)의 손자(孫子). 고려조(高麗朝)에서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와 3재상(三宰相)을 역임하였고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다가 뒤에 은산부원군(銀山府院君)으로 추봉 | 박세균(杏山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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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 44박 익 益(松隱公) | 자(字)는 태시(太始), 호(號)는 송은(松隱).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등과(登科)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 중서령(中書令) 등을 역임 | 박天卿(松窩公) | 박文卿(松齋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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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 45박 융 融(憂堂) | 자는 유명(惟明), 호는 우당(憂堂), 익(翊)의 아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 1408년(태종 8) 생원시를 거쳐 식년문과에 급제, 1411년 정언(正言)을 거쳐 전한(典翰)이 되었다. 1423년(세종 5)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강원도경차관(江原道敬差官)을 지낸 후 군수(郡守)에 이름 | 박昭(忍堂) | 박調 (啞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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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聡(拙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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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 46박 진 震 | 46박 건 乾(소고,두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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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 47박승원 承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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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 48박하담河淡(逍遙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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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박河淸(성와) | 48박河澄(병제공) | |||||||||||||||||||||||||||||
49 | 49박 영 穎(誠孝公) | 49박 이 頤(慕齋公) | 49박 기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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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우(知止亭) |
박적 頔(守慕齋) | |||||||||||||||||||||||||||
50 | 박慶延贈參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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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慶新三友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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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慶因 持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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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慶傳悌友堂 |
박慶胤 菊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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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慶宣贈承旨 |
박慶俊尙友齋 |
박慶恭
嘉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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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慶承 | 박慶生 | 박慶緖 | 박慶纘 |
박慶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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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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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임란창의14의사 |
박 換 參奉 |
박 璨 僉正 |
박 瑀 杞圃 |
박 琡 龍巖 |
박 珪 黃硯 |
박 玖 處士 |
박夢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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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智男 溪厓 |
박哲男 雲厓 |
박 瑄 槐亭 |
박 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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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珽 儉窩 |
박 璘 杏窩 |
박 球 判官 |
박 瑜 部將 |
박 璃 嘉善 |
박 瓘 判官 |
박 璡 聖五 |
박 玷 松軒 |
박 璣 竹窩 |
박起和 柏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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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后 |
박 瑒 鳳湖 |
박 璋 將仕郞 |
박 瑾 進士 |
박 璜 持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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