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강화 건축 기행
내가 전에 마지막으로 강화도에 간 것은 새천년이 시작되는 날 아침이었다. 그 새해 첫날이 밝기 전해에, 많은 지구촌 사람들은 크고 작은 설레임에 사로잡히듯 하였다. 어떤 종파에서는 20세기가 가는 것을 종말론에 결부시켜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 그런 신념을 갖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 해가 갈 동안 마치 임종을 기다리는 것 같은 심리를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것을 믿지 않지만 예수 탄생을 새기원으로 삼은 후 두번째 새천년이 된 의미가 묘한 대중 심리를 일으키는 듯 했다.
동숭동을 출발하여 가는 동안 차 안에서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새천년이 밝아온 아침에 강화도로 그림을 그리러 갔었던 예기를 했다. 마치 아무것도 별할 것 없고 무엇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처럼 들뜨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화우와 함께 갔었다. 그리고 그 날 세상은 역시 아무일도 없었다. 그렇지만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니 파란 하늘, 갯벌, 갈대등 그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지기는 했다. 그림을 그리고 돌아오면서 그날 보았던 풍경의 느낌을 써 보았었다.
선두리 갯벌
2000. 1. 1
바닷물에 풀려 곤죽된 흙이
세월로 다져져 잿빛이 되고
침잠한 뻘 위로
시지포스 신화처럼
반복되온 밀물 썰물
저 먼 창공을 가벼히
때론 설운 몸서리질 치며
소슬바람 일으키듯
날아가는 기러기떼의
꺄륵 까르륵…
울음소리
어느샌가
도랑을 따라온 밀물에
지워진 갯벌
정박한 어선을 허리쯤 잠구고
이따금 흔드는
바닷물의 찰랑거림
너른 갯벌위를 달려 온
한줄기 바닷바람에
갈대잎처럼
떨림으로 만나는
뭍과 바다
그 위로 어제처럼 내리쬐는
새천년 태양빛
동숭동에서 강화도로 가는 코스의 선택은 뻔하다. 혜화동 로타리를 돌아 창경궁, 창덕궁, 경복궁, 사직터널을 지나 연대앞으로 빠져 성산대교를 건너 88도로를 타고 끝까지 가서 김포로 가는 국도로 접어들어 계속 가면 된다. 서울에서 강화도로 갈 경우 이 코스가 가장 지름길이 되기 때문에, 전에 강화도에 갔을 때도 항 상 이 길로 간 기억이다. 그런데 88도로를 벗어나서부터 김포 시내로 들어가기 전까지의 한적한 구 도로를 지나는 길에서는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거기서는 상암구장과 행주대교 그리고 일산 신도시등 강 건너 풍경이 멀리까지 펼쳐 보이는데, 그 보다 이 길의 강변쪽으로 철책이 쭉 둘러쳐 있기에 도심 가까이서 뜻하지 않은 냉전적 분위기를 대하게 된다. 그런데 알고 보면 도로 측면에 둘러친 이 철책이 휴전선 철책과 같이 경계를 필요로 하는 시설이다. 한강은 행주산성과 통일 전망대 앞 쯤에서 임진강과 합쳐져 강화도 앞 쪽에서 서해 바다로 빠지게 되는데, 임진강이 북한 지역에서 시작되므로 과거에 종종 북의 침투 사건이 발생했었다. 그래서 임진강과 연결된 한 강 하류 양안(兩岸)을 철통 감이 경계를 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 보면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서울이 휴전선에서 깊숙이 내려 와 있는 듯 하지만 강에 의해 남북이 연속된 지점인 점에서 휴전선의 경계 의미가 수도 깊숙이 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현대에 주요 교통의 양상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한강은 지금도 배가 충분히 갈 수 있다. 오늘 만약 배를 타고 간다면 그 냥 그 물줄기를 따라 가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해상 교통로가 대중화되어 있지 않은 내막을 보면 현재의 남북의 대치 상황과 연관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도읍의 경계를 나누는 개념은 현재와 같지 않았다. 지금은 인구수와 산업기반 그리고 계획 가능한 도시영역의 확보가 가장 큰 관건이지만, 과거에 각 고을을 구분할 때는 산맥과 수계등 자연요소가 경계의 큰 틀이 되었다. 거기에는 당시 사람들이 신봉하던 풍수 사상도 크게 작용하였다. 특히 조선의 도읍으로 정한 한양은 풍수지리적 의미를 매우 중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그 풍수적 요소들은 빼어난 경관 요소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진경산수의 대가로서 화선(畵仙)으로 불리는 정선의 그림중 대표적인 적으로 금강산화첩과 경교명승첩을 꼽는다. 그리고 그 중 경교명승첩은 바로 한강주변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명승첩에 그려진 장소로서 양수리와 양천구 등지의 그림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한강변은 화가의 눈으로 보기에도 그토록 아름다웠던 것이다. 현재의 한강은 그 하안을 모두 구조물로 반듯하게 다듬어 놓았고 강 양변에는 고층 건물이 연달아 있어서 과거의 풍경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지만, 호쾌한 장강 주변에 높고 낮은 봉우리가 넘실넘실 펼쳐졌던 옛 지형을 상상만 해도 우리 국토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중 하나였을 것 같다. 그리고 그 한강이 서해로 나가는 길목이 바로 강화도 였던 것이다. 당시 운송 수단으로서 가장 효율적이던 수로를 이용한 한성 교통의 요로이자 입구였다. 그 점은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해서 초지진과 같은 각종 진지를 많이 구축하며 그 곳을 굳게 지키려는 노력이 있어 왔다. 반대로 적의 입장으로 보면 강화도는 한양으로 곧바로 진격할 수 있는 입구였다. 구한말 조선에 문호개방을 강요하며 군사적 행동을 서슴치 않은 서구 열강과 충돌이 강화도에서 일어난 것도 그런 지리적 이유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제시대 철도를 개설하여 새로운 교통망이 형성되었고 지금은 해운보다 철도와 도로를 이용한 교통량이 월등하기 때문에 뱃길이 닿았던 강화도의 지리적 인식이 희박해지게 된 것이다.
강화도가 과거 전략적 요충일 수 있었던 이유는 한양으로 통하는 입구일 뿐 아니라 지키기에도 천연의 요새였기 때문이다.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좁은 바다는 물살이 빨라서 상륙하기 어렵다. 오늘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바로 강화도 옆으로 빠지는 한강줄기를 따라가다 김포읍내로 접어들어 읍내를 관통하는 길을 거치게 되어 있다. 그 김포를 지나 조금 더 가면 강화도로 건너가는 다리가 나오고 그 다리를 건너면 강화도인데 그 다리가 놓인 곳이 바로 물살이 빠른 해협이고, 서해바다쪽으로는 바다로 행해 비스듬한 산자락이어서 성을 쌓고 방비하기 유리한 곳이다. 그 뿐 아니라 강화도는 그 안에서 식량을 자족할 수 있을 만큼 너른 평야를 확보하고 있다. 고려 조정이 온 국토를 몽고군이 점령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강화도를 저항의 무대로 삼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천연의 조건을 갖춘 방어진지와 식량을 조달 할 수 있는 기름진 토지를 갖춘 그러한 특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곳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유적은 고려궁지이다. 몽고가 침입하자 궁을 강화도로 옮기고 끝까지 대항할 채비를 갖췄던 몽고 항쟁의 본산이었다. 고려조정은 그곳에서 군사적으로 대항하는 한편 국난을 불심에도 기대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 곳에서 유명한 팔만 대장경을 만들었다. 그러나 오랜 전란으로 나라가 황폐화되고 백성들의 삶이 말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해지자 몽고 조정은 결국 몽고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때 일부 군사들이 정부의 결정에 반기를 들고 끝까지 몽고에 대항하고 나섰는데 그것이 바로 삼별초의 난이다. 역사적으로는 항쟁의 정신을 높게 평가하고 있지만, 왕실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 그들이기에 몽고에 대항하는 것만이 아닌 정권에 보였던 적대적 행태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현재 강화도에는 고대로부터,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근대의 유물 등이 다양하게 남아 있다. 우리 역사 속의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현장으로서 그와 관련된 유적도 많다. 그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원시시대의 유물인 고인돌로부터 근대 역사의 변화를 떠올리게 하는 강화성당이 있다.
○ 강화성당
9시경 강화도에 도착하여 강화성당부터 답사를 시작하였다. 강화성당은 한옥으로 지은 성당건축으로서 근대 건축사에 중요한 자료이다. 즉 서구양식의 성당 건축이 도입되기 이전에 전통양식으로 서구의 종교건축을 해결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당시 외국 건축을 지은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선인들에게 외국 종교의 낯설음을 해소하려는 의도로 그랬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강화성당은 전통 목구조의 2층으로서 1층의 크기가 정면 4칸, 측면 10칸으로 되어 있다. 한국 전통건축의 간(間) 구성이 홀수인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짝수 구성이다. 가운데 2열이 고주가 되어 1층의 익랑보다 높게 2층이 구성되고 그 외벽에 고창 형식의 창을 설치했다. 그래서 고딕건축의 고창 채광 방식인 크리어스토리와 같은 구조가 되었다. 이 건축에서 특히 건축적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서양의 전통적 종교건축인 고딕양식을 한국 전통 건축술로 이룩하려 한 점이다. 그리고 강화성당은 목조 가구식구조의 건축적 특성을 보여준다. 서양건축사에 고딕 양식은 조적조의 특성을 살린 보울트 구조로부터 출발하여 기본적으로 벽량이 많았다. 그런데 서양 건축가들은 그 조적식 건축의 투박함을 부재 단면을 최대한 가는 힘살로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아치와 크로스 볼트의 원리로부터 첨두아치와 리브볼트 등을 발명하였고 내부공간과 외벽을 좀더 개방적인 구조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가구식 구조는 고딕건축이 오랜 노력끝에 도달한 개방성을 처음부터 갖고 있었다. 이 성당에서는 소박하지만 형식적 짜임새 있는 종교 공간의 힘이 느껴진다.
○ 철종잠저
이 곳은 헌종에 이어 조선왕조 제 25대 왕위에 오른 철종이 살았던 집이다. 섬마을에서 농사지으며 가난하게 살던 청년이 어느 날 왕위에 오른 곳이어서 이 곳을 찾을 때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그를 왕위에 옹립하게 된 내막과 그의 짧은 생애를 알고 나면 그 이야기 뒤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권력욕에 의해 허수아비처럼 살다간 인간에 대한 연민만이 느껴질 뿐이다.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이름은 원범이었다. 원범은 나이 13세때 이 곳 강화도로 어머니를 따라 이사를 오게 되었다. 철종의 어린 시절은 힘겨웠다.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역모에 휩싸여 죽어나가고 숨어살기 위해 강화도로 이사와 초가에서 자신이 왕족이라는 사실조차 숨기며 살아야 했다. 그 가계를 보면 도령의 조부가 되는 은언군이 바로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그리고 은언군의 아들이 철종의 아버지 전계군이다. 그러나 조부 은언군은 도령의 숙부인 상계군이 반역을 꾀했다 해서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그 후 또 그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천주교도였다는 이유로 1801년 신유박해 때 함께 사사되고 말았다. 그리고 아버지 전계군과 친형이 되는 이원경 또한 반역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그의 조부가 비운의 사도세자인 것에서부터가 이 소박하고 착한 성품을 지닌 후손에게는 슬픈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되었을 것이다.
왕이 건재할 때 왕족들은 평민보다 더 목숨을 온전히 지탱하기 어려웠다. 특히 정치가 불안정한 시기일수록 당사자는 가만이 있어도 주위에서 역모를 꾸미고 추대한다 하여 연루되고 그로 인해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조선시대 정치적 갈등으로 반대파를 숙청할 때 가장 강력한 이유가 되는 것이 역모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역모 사건은 당사자가 그 실체가 없이 이름이 거명되는 것만으로 억울하게 희생되는 일이 많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 왕이 되기 전까지 원범은 왕족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삶의 부담이고 앞날의 희망이라고는 떠올릴 수 없던 한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갑자기 왕위가 전해졌던 것이다. 헌종이 후사를 이을 자식하나 없이 승하했을 때 왕실과 조정에서는 후사를 이을 왕손을 찾아보았으나 6촌 이내에 드는 왕손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더 먼 왕족까지 물색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강화도에 사는 원범을 생각해 냈다. 한 사람이 원범을 천거하자 그 주위에 앉은 사람들이 그는 지금 몇살이며 학문은 어떠하냐고 물었다. 그를 추천한 사람은 그의 나이는 열일곱이고 아마도 공부는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논의에 참여한 한 사람이 정치야 어차피 우리가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자 모인 사람들 모두 껄껄 웃었다. 그렇게 해서 지리멸렬한 강화도의 먼 왕족에게 왕위가 전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의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가 힘없는 왕을 세우고 그 뒤에서 마음대로 조정을 장악하려는 또 다른 음모가 숨어 있었다. 한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은 자질이 뛰어나야 하지만 너무 출중한 인물이 왕이 되면 자신들 마음데로 정사를 주무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왕위 계승에 하자는 없으나 좀 무식한 인물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조정은 세도정치의 폐해를 낳은 안동김씨가 장악하고 있었고 후대 왕을 옹립하는데도 그들의 의중이 크게 작용하였다.
원범은 이 곳에 살 때 강화도령이라고 불렸다. 도령은 언덕 초가집에 어머니와 단둘이서 살고 있었다. 부쳐먹을 땅도 없이 매우 가난하여 그의 어머니는 이웃집의 농사일이나 삯바느질을 하며 품삯을 받았다. 도령은 지게 짐을 지고 뒷동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 오곤 했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거기서 멀리 바다가 바라다 보이기도 했다. 도령은 학문은 깊지 않았지만 선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자연을 매우 사랑하였다. 구름과 바람과 꽃과, 땅내음에 귀기울였다. 자연과 친구가 되는 것 같았다. 생활 주변에서 보고 대하는 그러한 자연 현상에 감동되어 한참동안 꼼짝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 귀가가 늦어서 어머니를 걱정하며 기다리게 한 적도 있었다.
강화도령에게는 사랑하는 동네처녀가 있었다. 그 처녀의 이름은 양순이였다. 어느 날 도령은 아무것도 모른 채 오늘도 나무를 하러 가서 동산에서 양순이와 만나고 집으로 돌아 왔다. 도령이 집에 돌아와 보니 관복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원범은 그 모습을 본 순간 무슨 변고라도 당하는 것 아닌지 겁부터 났다. 그런데 도령이 집안에 들어오자 그 사람들이 공손히 읊조리며 길을 비켜섰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나이가 많고 직책도 높아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무릎을 꿇으면서 “전하가 되시옵니다” 했다. 순간 어리벙벙해진 도령은 이내 도성을 향해 집을 떠났다.
양순이는 떠나가는 도령의 모습을 숨어서 보고 있었다. 도령이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도령이 궁궐에 당도한 몇 일 후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왕비를 맞이하기 위한 국가의 금혼령이 떨어졌고 강화도령은 간택된 왕비를 맞았다.
철종 잠저는 그러한 드라마틱한 생애를 살다 간 한 인간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 초가였던 건물은 철종이 왕위에 오른 후 강화유수가 기와집으로 반듯하게 바꿔 놓았다. 그 인간적 체취를 느끼려면 그냥 그대로 두는 게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번듯하게 고쳐 놓아서 그 삶의 체취를 많이 잃고 말았다. 이곳에는 철종의 잠저였음을 표시한 표지석과 그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 놓은 비각이 있다. 그런데 그 비각을 사당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왕이 된 후 그에 관한 제례는 종묘에서 거행되기에 잠저에 사당을 따로 둘 일이 없고 격에도 맞지 않는다. 여기서 순수히 전통가옥으로서의 건축적 의미를 찾는다면 대문을 들어설 때 골목길 같은 전이공간을 만들고 중문을 통해 안채에 진입하게 함으로서 안채의 영역성을 살린데서 찾아볼 수 있다.
○ 부근리 고인돌
지구상에 남겨진 문명의 유산은 대부분 시간적으로 현대에 가까운 것들이 많다. 그리고 그 문명들은 대부분 국가가 성립한 이후의 것들이다. 즉 국가가 성립함으로써 거대한 문명사업을 추진할 능력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구 나이나 인류 역사로 볼 때 그 기간은 매우 짧은 편이다. 그리고 이전 수천 수만년 동안 변화없이 지속되온 문명들이 있는데 고인돌도 그 중 하나이다.
고인돌은 원시적 체취가 배어 있는 유물이다. 허지만 여기 부근리 고인돌은 현대의 철재 울타리를 처 놓아서 그 느낌이 박제된 느낌이 드는 것이 아쉽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창 고인돌군처럼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볼 때 고대의 원초적 느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건축은 인간이 살았을 때 거처하는 주거 뿐 아니라 무덤에 의해서도 많은 발달을 가져 왔다. 특히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욱 그렇다. 무덤은 인간의 존재 의식이 반영된 산물로서 고대 인간들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인간의 사후에 대한 고민이 철학과 종교를 발전시켰듯이 무덤 축조에 정성과 관심을 기울이면서 무덤을 축조하는 기술이 발달했다. 남아 잇는 고대 이집트 건축유적은 신전과 분묘 건축이 많은데 그러한 큰 건조물을 만들면서 건축에 큰 발전을 가져 왔다.
피라미드처럼 고인돌 역시 인간의 죽음 의식에 대한 상징성과 그 구조적 기능성을 갖고 있는데,
고대에 분묘를 크고 호화롭게 만든 이유는 그 무덤의 주인공들이 당시 절대자로 군림하던 왕족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영혼 불멸 사상을 믿었으며, 그를 받들던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 현세에서 뿐 아니라 내세에서도 권위와 복락을 누리도록 극진한 예로 장사지냈다. 그래서 그들의 묘에는 안치될 주인공이 생전에 쓰던 값진 귀중품이나 금관이나 칼과 같은 권위의 싱징물을 넣었다. 그리고 묘실에는 사자를 수호하는 수호신의 그림을 그리거나 시중을 들게 하는 존재들을 부장하였다. 그것이 실제로 생전에 시중을 들던 사람들을 생매장한 예도 있다.
고인돌에서는 원초적 상징성이 더 크게 느껴진다. 고인돌의 구조와 기능은 후대의 분묘 건축에 원형질로 남아 있었다. 분묘 건축의 본질적인 기능은 사신을 안치하는 실을 확보하고 형상에 의한 상징성을 갖는 것이다. 고인돌의 벽과 지붕돌은 시신을 안치하는 그 곽의 구조적 원형이다. 그 벽과 지붕이 이루는 공간 형식은 점차 후대에 분묘의 석실구조의 발달을 가져왔는데, 한 개의 판석으로 큰 실의 구조를 이루기 어렵게 되자 그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통해 삼각 모줄임 같은 분묘 건축술이 발달하였다.
만주 지역의 고구려 시대 고분인 장군총이나 강서고분등은 석실 구조로 되어 있는데 외부는 피라밋처럼 거대한 기하학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 한성 백제시대에 조성된 석촌동 고분도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잇다. 그리고 백제가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한 후 건립된 무령왕능처럼 벽돌을 써서 지상의 건물을 축조하는 것 같은 전축분도 발달하였다. 그리고 무령왕릉에서는 외부형태도 봉분형태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 값비싼 보물이 들어 있는 묘는 항시 도굴꾼들이 호시 탐탐 노리는 표적이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 도굴이 되었다. 그러자 도굴에 대해 안전한 구조를 발명하였다.
신라시대 분묘건축은 도굴 방지를 고려하여 새로운 무덤 형식을 사용하였다. 묘실을 석재대신 목곽으로 만들고 그 주위에 일정한 두께로 굵은 강자갈 층을 두었다. 목곽이 오래지 않아 썩어 붕괴되고 나면 그 위에 있던 강자갈이 무너져 내림으로써 도굴을 어렵게 한다. 그것을 돌무지목곽널무덤이라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묘실이 작아지고 묘지석의 장식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외부에 12지신상이나. 무신, 무인석 같은 외형의 형식을 갖추는 것에 치중된다. 또 조선시대에는 태실이 발달하였다. 그처럼 분묘에서도 시대변천을 읽을 수 있다.
강화도에는 문화유적도 많지만 독특한 맛이 나는 순무와 풍부한 해산물 등 먹거리도 많은 곳이다. 부근리 고인돌이 있는 곳 가까이서 예정에 없던 석탑을 하나 더 보는 바람에 조금 늦게 식당에 도착했다. 당도하니 미리 연락을 받고 이미 자리를 봐 놓았는데, 마주 앉은 2사람당 8가지 젓갈이 담겨 잇는 도시락 그릇 하나와, 비빔밥 그릇이 하나씩 있다. 두 가지 메뉴를 맛볼 수 있게 식단을 꾸며 놓은 것인데, 먼저 둘 중 한 사람의 밥을 비빔밥 그릇에 붓고 비벼 빈 그릇이 생기면 맨밥을 반 덜어서 젓갈과 함께 먹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는 무공해 식품이라고 했다. 설명을 감칠 맛 나게 했지만 말이 빨라서 잘 알아듣지 못하자 다시 설명해 주었다. 젓갈을 맛보고 맛있으면 별도로 준비된 것을 사가라고 했는데, 식사 후 많은 사람이 젓갈을 샀다. 차에 타면서 밥맛도 물론 있지만 주인이 장사를 잘 한다는 말들을 했다.
○ 정수사
정수사 입구에서 순무 밭 옆에서 할머니가 순무를 팔고 있다. 여느 절처럼 상가가 즐비하게 이어진 장면과 맞닥드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편안함 느낌이 들어 좋다. 지방도로에서 연결된 그곳에서 경내로 가려면 1Km 정도 산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차에서 내려 곱게 물들어 가는 단풍길을 따라 올라갔다. 가을이면 연상되는 것이 단풍이고 그것을 인간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사실 단풍이란게 존재가 소멸해 가는 모습이다. 그 의미를 생각하면 단지 아름다움의 감상보다 만물의 생성의미을 생각하게 된다.
길을 가다 경내로 접어드는 입구 계단을 올라가면 정수사는 호젓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 다시 꺽인 계단을 올라 다시 왼편으로 꺽어오른 곳에 편편하게 닦인 마당을 면하여 대웅전을 지어 놓았다. 정수사는 우선 그 진입하는 느낌이 좋다. 그리고 마당에 오르면 바다로 열린 호젓하게 먼 시선을 누릴 수 있다. 그 아담한 규모나 호젓한 분위기로나 암자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정수사는 넓지 않은 터이지만 과장됨이 지어 놓은 건물이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러움이 함께 느껴지는데, 그 까닭은 법당 앞마당 오른 쪽에서 왼편의 요사체와 함께 마당을 위요하고 있는 암벽 때문인 듯 하다. 대웅전 뒷편에 가파른 계단을 오르도록 높게 놓인 삼성각 뒷면의 높은 암벽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그처럼 당우가 적고 암자처럼 아늑한 수도처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지만 법당은 당당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잠시 경내 분위기를 익히고 건물을 찬찬히 돌아보면 법당건물이 좀 특이함을 발견할 수 있다. 건물 정면쪽으로 채양처럼 한 칸을 늘려 마루를 놓았는데 측면에서 보면 용마루를 중심으로 죄우 대칭이 아니고 앞쪽지붕면이 더 길게 되어 있다. 달아낸 흔적이 있고 앞 뒤 포작의 구조도 다른 것으로 보아 원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고 증축때 생긴 모양으로 보인다.
○ 전등사
전등사의 이름은 공주가 이 절에 등불을 밝혀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절에 써 있는 기록으로만 보면 우리나라에서 창건 연대가 가장 앞선 절로 보인다. 기록에는 이 절이 아도화상에 의해 처음 지어졌다고 하는데,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6월에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사신이자 승려인 순도(順道)로 하여금 불상과 경전을 처음 고구려에 보내온 것이 시초이고, 고구려 소수림왕 5년(375)에는 아도가 와서 국내 최초의 사찰인 이불란사(伊弗欄寺)와 초문사(肖門寺)를 국내성에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처럼 아도화상은 우리나라 불교역사의 맨 처음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절이 그에 의해 지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현재 전등사는 정족산성 안에 위치하여 산성의 남문을 통해 들어 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산성은 전등사의 창건보다 훨씬 뒤인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이다. 성의 남문으로 들어서서 300M 가량 가다가 우측으로 계단을 올라 루밑으로 진입하면 곧바로 대웅전 정면을 마주보게 된다.
대웅전은 마당보다 높게 올라서 있는데 축대를 오르는 좌우 계단을 통해 출입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대웅전 향로전, 약사전, 응진전 등 여러체가 연속되어 놓여 있어서 경내가 금새 한눈에 다 들어온다. 그 건물들이 한 개의 넓은 마당을 공유하고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넉넉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게 한다. 그리고 그 마당에서 대웅전과 직각의 축선상에 극락전이 높게 위치해 있다. 또 향로전과 대웅전 사이에 뒤의 삼성각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 있는데 삼성각 마당에서는 멀리 바다가 보인다.
숭유억불 정책을 편 조선시대에는 많은 사찰이 폐해지는 등 불교가 극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지만 왕족중 개인적 선호에 따라 신봉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하는 일은 유야무야 되었다. 효령대군과, 세조, 그리고 문정왕후가 대표적으로 불교를 신봉한 사람들이다. 그 중 효령대군은 동생이 왕이 되는 시기에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 스스로 불자가 되었고 세조는 왕이 된 후 생긴 질병의 치유를 절에 가서 빌었으며 문정왕후는 왕의 힘을 능가하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들의 불교 신봉은 건국 이념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 왕실에게는 다른 잣대의 논리를 적용했다. 그리고 나아가 사찰들로 하여금 왕릉을 수호하는 임무까지 주어졌고 사고를 지키는 임무가 맡겨지기도 했다. 전등사도 정족산성 안에 위치하면서 정족산사고 지킴이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구한말 우리가 잘 아는 데로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강화도에 침범하여 정족산 사고에 있던 문서를 강탈해 가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전등사로서는 더 책임감을 느끼는 처지일지 모른다. 오늘 답사길에도 전등사 입구로부터 경내에 이르는 길가에는 열 지어 구호리본이 등에 매달려 있는데 그것은 프랑스에서 정족산 사고에서 강탈해 간 고문서를 반환하라는 계속된 시위인 것이다.
4시가 지나니 벌써 늦가을 짧은 해가 뉘엇뉘엇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평소 강화에서 귀경하는 길이 막히므로 곧 귀가를 서둘러 4시 10분에 전등사를 출발했다. 예상대로 오는 길은 많이 막혀서 서울까지 오는데 2시간이 걸렸다. 이런 행사 때는 연배 차이가 많은 선배 건축가들이나 처음 만난 회원들과도 건축을 주제로 격의없게 느낌을 나눌 수 있어 좋다.
(2001.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