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날…… 중앙선 열차를 타고 ○○역에 내린 적이 있었다. 초록색 불빛이 역사(驛舍) 천장에서부터 바닥으로 내리 꽃히고 있었다. 바깥 풍경을 바라보니 온통 초록 일색이었다. 쌀쌀한 가을 날씨임에도 초록 물결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다. 역사(驛舍) 밖으로 나오니 주변에 음식점과 옷가게가 보였다.
시멘트 포장도로 옆에서 풍물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한쪽에선 사당패 놀음이 한창이었다. 아름드리 나무에서 가을 냄새를 풍기며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주 청명한 가을날이었다. 쌀쌀한 기운이 옷소매를 파고드는데 형모는 저절로 낭만심리가 떠올랐다.
포장도로가 끝나는 곳에 공군부대가 보였다. 감색 제복을 입은 사병들이 출입하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의 팔짱을 낀 병사들이 만면에 웃음을 띤 채 퐁물 시장이 보이는 쪽으로 걸어갔다. 도로 뒤편으로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다.
드넓은 농토와 갈대숲이 보였고 개울 바로 옆에 돌작밭도 보였다. 교각을 건너자 주택가가 끝나는 곳에 천주교회가 보였다. 국도변에 전형적인 시골 장터도 보였다. 컴컴한 굴속 같은 길다란 통로에 머리에 함지박을 얹은 아낙네들이 바삐 그 길을 지나갔다.
노상 음식점에서는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촌로들도 많았다. 농사일에 찌든 검고 주름진 얼굴에서 담배 연기와 함께 절로 시름이 묻어났다. 포목점과 야채 가게에서 이따금씩 고함이 터져 나오고 장구경도 어느새 파장 분위기에 들어갔다.
형모는 기억을 더듬어 시장 중앙 통로로 들어섰다. 시멘트 바닥에 오물이 흥건했다. 한참 걷다 이상하다 싶어 위를 바라보는데 붉은 차일이 병풍처럼 하늘을 가리우고 있었다. 붉은 차일과 함께 상가들도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있었다.
길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선술집 저편으로 감색 제복이 보였다. 출장 나온 사병이 애인과 함께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모양이다. 둘은 어깨동무를 하면서 지하 다방으로 발걸음을 디밀었다.
시장 골목이 끝나는 대형 마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동네 구멍 가게들은 줄초상이 났겠군.” 이런 시골 구석까지 마트가 들어섰으니. 옛날에는 고작해야 시골 장터 구경하는 게 유일한 구경거리였는데…….
형모는 5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친구인 문규와 함께 온 장터를 쏘다니며 놀았다. 문규의 어머니는 장터에서 해장국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골 국물에 시래기를 넣어 끓인 해장국 맛은 일품이었다. 장날은 물론 평일에도 손님이 끊일 새가 없었다.
수시로 연탄을 갈아넣으며 불을 땠고 손님들로 왁자지끌 할 때마다 온 동리의 돈은 다 긁어모은다며 시샘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문규는 머리가 좋은 편이었지만 노력파는 아니었다. 늘 농땡이를 까면서 읍내를 오가며 지내는데 지도주임 선생에게 걸려 혼이 난 적도 여러번이었다.
여학생들과 어울려 다니다 불량 학생으로 낙인 찍힌 것이다. 지금이야 세상이 달라졌지만 그 당시만 해도 풍기문란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벌써 삼십 년 전의 일이다. 그날도 문규는 하라는 공부는 않고 서울서 내려온 여학생들과 미팅을 하고 있었다.
삼십 년 전이라 중대가리처럼 빡빡 깍은 머리에다 옷은 허름한 남방 차림에 청바지를 입었었다. 반면 형모는 당시 유행하는 빽 바지에다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구두를 반짝 반짝 윤이 나도록 닦아 신고 나선 그는 대학생 같아 보였다. 형모는 미팅이 난생 처음이었다. 문규가 권하는 대로 옷도 갖춰 입고 나섰지만 사실 그는 소심한 데다 부끄러움이 많았다. 어떻게 여학생 앞에서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미리부터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그날도 문규의 재촉에 의해 할 수 없이 끌려나간 것이다. 그들이 만나기로 한 장소는 읍내에서 한참 떨어진 강변 주변에 있는 한 다실(茶室)이었다. 당시 유행하는 단어로 주다야싸였다. 낮에는 차(茶)를 팔고 밤에는 술을 파는 곳이었다. 읍내에도 좋은 장소가 많았지만 언제 꼰대들이 나타날지 몰라 그곳으로 장소를 정한 것이다.
상대 여학생들은 서울에 있는 인문계 여고에 다니는 여학생들이었다. 그날 미팅 주선자는 물론 문규였다. 여름방학 때 서울에 있는 고모집에 놀러 갔다가 사촌 여동생의 친구를 알게 돼 미팅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은 대담하게도 봉고차를 대절해 타고 내려왔다.
갈래 머리를 풀어 헤치고 블라우스와 짧은 스커트를 입은 그들은 하나같이 체격이 날씬하고 예뻤다. 게다가 얼마나 야무지고 똑똑한지 도무지 당해낼 재간이 없어 보였다. 모두가 일류대를 지망하고 있었고 태도가 얼마나 당당한지 마치 시골 남학생들을 놀려주기 위해 온 듯한 느낌마저 주었다.
말도 거침없이 내뱉고 저희들끼리 깔깔대고 웃으며 남학생들에게 일부러 관심을 유도하기도 했다. 얌전하게 콜라나 홀짝이던 남학생들은 처음에는 약간 기가 죽은 듯 보였으나 이내 활기를 되찾았다. 그들은 또 언제 만나랴 싶었는지 있는 자랑 없는 자랑 섞어가며 심지어 거짓말까지 보태며 말했다.
“우리는 다 서울대를 지망하고 있으며 장차 꿈은 교수가 되는 것입니다.”
문규는 각본에도 없는 말을 하며 어깨를 들썩이기까지 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집안을 과수원이 삼천 평이나 되며 강변 쪽에 곧 관광 호텔을 지을 것이라는 둥 말도 안 되는 노가리를 깠다.
짜식, 겨우 읍내에서 해장국집이나 하는 주제에…….
겨우 소작농이나 붙여 먹고 사는 주제에 땅부자로 변한 친구도 있었다. 임야가 삼천 평에다 전답만 모두 이만 평까지 갑자기 졸부로 변신한 것이다. 면서기로 근무하는 아버지를 부농에다 재력가로 둔갑시켜 말한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는 곧 전답을 정리해 서울로 가 새로 사업을 구상할 청사진까지 그럴 듯하게 제시했다.
그런가 하면 있지도 않는 형을 사법고시에 패스시킨 친구도 있었다. 그는 자신도 형의 뒤를 이어 판사가 될 것임을 거듭 천명했다. 모두가 한 순간에 거짓말쟁이 아니 순 사기꾼 소설가로 변신해 있었다.
그때 형모 옆에 있던 정식이는 “노가리 까고 있네” 하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순철이도 “소설 쓰고 있네” 하며 빈정거렸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결같이 열심히 그 거짓말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날 각각 파트너를 정해 헤어졌는데 어쩐 일인지 문규는 제일 예쁜 여학생이 걸렸다. 하긴 문규는 미팅할 때마다 그랬다. 그것을 두고 친구들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날도 여학생들은 소지품 중에서 볼펜이나 손수건을 꺼내 놓고 남학생들에게 선택하라고 했다. 문규가 맨 마지막으로 흰 손수건을 집었는데 그게 하필이면 그날따라 성장(盛裝)을 하고 나온 제일 예쁘고 부티나 보이는 여학생이었던 것이다. 친구들은 문규를 볼 때마다 여복이 터진 놈이라 했다.
형모는 파트너로 정해진 여학생과 함께 다실을 나와 논둑길을 걸었다. 논은 추수가 시작이라 아직까지 황금 벌판인 곳이 많았다. 오른쪽으로 북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고기잡이를 하는지 나룻배가 서너 척 떠 있었다. 노을이 강을 발갛게 물들이며 점점 타오르고 있었다. 형모는 갈대숲이 우거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고민에 빠졌다.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는데 도무지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문규에게 미리 물어보고 나오는 건데, 후회했지만 소용없었다. 뒤쳐져 걷던 여학생이 토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딜 가는 거죠?”
형모는 멈칫했다. 여학생을 바라보는 순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네, 저어…….”
그는 말끝을 흐리며 여학생을 자세히 올려다보았다. 흰 얼굴에 보조개가 패인 아주 귀여운 얼굴이었다.
“미팅 처음인가 봐요.”
“네, 그 그렇습니다.”
“어쩐지…… 전 홍영실이라고 해요 그쪽은요?”
“전 형모 이형모라고 합니다.”
말하다 말고 형모는 그녀가 내미는 작고 야무진 손을 보았다. 악수를 청한 것이다. 손을 내밀어야 하나 마나, 그는 덜덜 떨며 손을 잡았다. 그때까지 그는 여자 손목조차 잡은 적이 없었다. 여학생이 피식하고 웃었다. 그녀는 이번말고도 미팅이 여러번째라고 했다.
걸스카우트로 활동하면서 문학서클에도 가입해 있었다. 위로 오빠가 둘 있는데 하나는 서울대학교 의대에 다니고 또 하나는 미국 유학중이라 했다. 아버지는 검찰청에 근무하고 어머니는 중학교 교감이라 했다. 한참 집안 자랑을 늘어놓은 그녀는 형모에게 아버지 직업을 물었다.
“아버진 농사를 짓고 계세요.”
“농사요?”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대고 웃었다.
“부농이신가 봐요?”
부농…… 계산적인 의미가 깔린 말이었다.
“네 과수원에다 전답이 좀 있는 편이죠.”
거짓말을 못하는 그는 더듬거렸다. 밤새 폐결핵으로 콜록거리던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전공은 뭘로 하실 작정이세요?”
이번에는 앞날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묻는 똑부러진 질문이었다.
“국 국문학이오.”
“국문학이요? 그럼 선생님 하실 건가요?”
“그게 아니라 시나리오를 쓸 작정입니다.”
순간 여학생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다음 순간 그녀는 배가 고파 죽겠다며 맛있는 걸 사내라고 졸랐다. 그날 형모는 가지고 나온 돈을 몽땅 털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오히려 마음이 한없이 기뻤다.
영실은 장차 꿈이 패션 모델이었다. 모델이 되려면 키도 크고 몸매도 좋아야 하는데 그녀는 누가 봐도 그리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다. 얼굴은 그런 대로 예쁜 편이지만 키는 중간쯤으로 결코 모델감은 못 되었다.
“사실 전 모델감은 못 될는지 모르죠. 그래서 전 의상 디자인과를 가서 제가 입고 싶은 옷을 마음껏 해 입을 거예요, 그래서 제 자신이 모델이 되는 거예요, 아참! 이담에 시나리오 작가가 되면 영화 찍을 때 저를 배우로 기용해 주시는 거죠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미래에 대한 포부가 야무지고 똑똑한 여학생이었다.
“그런데 시나리오 작가 하기엔 너무 순진하다 생각지 않으세요?”
질문의 요지를 파악한 그가 대답했다.
“전 폭풍의 언덕이나 에덴의 동쪽 같은 그런 영화를 만들 겁니다.”
“그래요?”
도무지 미덥지 않은 말투였다. 그후 영실이와 여러 번 만남을 가졌던 것 같다. 만나는 방법은 언제나 형모가 서울로 올라가는 쪽으로 택했다. 주로 장충단 공원이나 인천 자유공원에서 만났다. 고향 근처에서 만나다 어른들에게 들키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벌써부터 연애질이라며 야단들을 게 뻔했다.
만날 때마다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영실이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말에 과장이 섞여 있고 뭔가 진실성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의문점이 쌓여갈 무렵 그녀와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두절되었다. 곧 입시가 들이 닥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입시가 끝날 무렵 그들의 인생은 양갈래로 나뉘어졌다.
문규의 말에 의하면 영실은 명문여대 의상학과에 진학했다고 한다. 그녀는 입학 한 이후 취미생활인 미팅과 연애에 열올리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당초에 꿈은 어디로 갔는지 매일같이 놀러 다니기에 바쁘다고 했다.
문규는 여러번 재수 끝에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형모는 법대에 가라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문과에 들어갔다. 사실 그의 실력으로 법대는 어림도 없었다. 법대는커녕 국문과도 과분할 정도였다. 그런데 부모는 입만 열면 판 검사였다. 이웃 마을에 판사 한명 나타난 걸 보고는 아들에게도 그와 같이 될 것을 강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무조건 대학은 판검사가 되기 위한 관문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국문과가 대체 뭣하는 거라냐.”
“거그 졸업하고 나면 밥은 먹고 살 수는 있는 거이냐, 취직이 되기는 혀는 것이 고.”
부모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르던 소를 팔아 입학금을 마련해 주었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학교 옆에 작은 자취방을 마련했다. 이후 먹을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해결해야 했다. 용돈은 물론 등록금을 벌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하루에도 아르바이트를 몇 탕씩 뛰어야 했고 지쳐 코피를 흘리며 쓰러진 적도 많았다.
그나마 흉작일 때는 먹을 양식조차 보내오지 않는 때가 많아 굶기를 밥먹듯 했다. 생각다 못한 그는 자원 입대했다. 가장 위험하다는 최전방 동부전선에 배치된 그는 생사를 오가는 위기를 여러번 겪어야 했다. 때로는 간첩 생포 작전에 동원됐다가 눈속에 파묻혀 길을 잃은 적도 있었고 지뢰 제거 작업을 하던 중, 바로 옆에서 폭발 사고가 나는 바람에 동료의 두 다리가 잘리는 참변을 목격한 적도 있었다. 뿐인가, 산악 훈련 도중 낙오돼 영영 불귀의 객이 될 뻔한 적도 있었다.
그 이외에도 위험은 그의 삶 곳곳에 묻혀 있었다. 제대한 이후에는 더 위험했다.
복학을 해야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어머니의 병세로 가산은 이미 바닥이 드러나 있었고 남동생은 시국사범이 되어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동생은 구로 공단에서 공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근로자들을 동원해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엄청난 죄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동생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집 근처에 있는 관공서에 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농지 파동으로 땅 값마저 하락해 이젠 농사 지을 맛도 안 난다며 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대학 공부 더 할 생각일랑 아여 집어치우고 취직할 생각혀라. 그까짓 공부해서 판검사 될 것도 아니고…….”
아버지는 애초의 진심을 드러내고 말았다. 아버지 입장으론 판검사 못 될 대학 공부는 공부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취직, 말이 좋아 취직이지 당시만 해도 취직은 하늘에 별따기만큼 힘들었다. 대졸도 아니고 대학 중퇴는 어느 곳에도 명함도 못 내밀었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출판사에 들어갔지만 육 개월도 못돼 문을 닫는 바람에 그나마 풀칠 신세도 못 면하게 되었다. 그후 평화 시장 종업원으로 일했고 건설 노동자로 막일도 감당해야 했다. 틈틈이 시나리오를 썼지만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별다른 습작 기간도 거치지 않고 삶에 찌들려 산 그가 써내는 내용이란 게 뻔했다. 긴장미 없고 현실 감각이 뒤떨어진 모조품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써야 한다는 환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영화가 환상이라면 시나리오는 열정이었다. 그는 시나리오가 완성돼 영화 촬영에 들어 갈 것까지 이미 계산에 넣고 있었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기차를 타고 여러 곳을 다니며 촬영장소를 물색했다. 그날도 우연히 기차에서 내린 곳이 바로 ○○역이었다.
컴컴한 지하 굴속을 헤매는 듯한 어느날이었다. 고향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여동생이 고향 근처에 있는 교회 전도사와 결혼한다는 소식이었다. 분명 반가운 소식일진대 그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이제부터 자신이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로 들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딸의 결혼식을 안타깝게 지켜본 뒤 이듬해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뒤, 두 달 후에 남동생이 출소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경찰의 요주의 대상이었다. 집안에 잠시 들렸다 사라진 그는 또다시 어디론가 잠적해 버렸다. 적막해진 집안에 아버지 혼자 덜렁 남게 된 것이다. 형모는 그런 아버지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서야 했다.
어떡하든 취직해 잘 모실 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 했다. 물론 씨도 안 먹힐 소리란 건 그도 아버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 혼란한 군사정권 하에 취직하기란 정말 어려웠다. 형모는 또다시 일가친척 한명도 없는 서울로 올라갔다. 친구들과의 소식도 일절 끊겨진 상태였다.
그는 새벽 도매시장에 나가 간신히 연명이나 하면서 살아갔다. 부엉이처럼 밤새도록 일하느라 그는 세월 가는 줄도 몰랐다. 잠에서 깨어나면 어느새 한낮이었고 잠시 TV에 시선을 박다 보면 어느새 출근 시간이었다. 감옥살이가 따로 없었다.
그 힘든 감옥살이를 하느라 연애 한번 해 볼 기회도 없었다.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며 살아가는데 어느날 새벽시장에서 정식이를 만나는 행운을 겪었다. 행운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 그건 그가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 겪는 지인(知人)과의 첫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는 인간적인 정(精)에 굶주려 있었다. 각박한 서울 생활을 하느라 별다른 인간관계를 하지 않고 산 그는 고향 친구이자 고등학교 동창인 정식이를 만나자 너무도 반가웠다. 정식이는 어느새 결혼해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어지자 아내가 하는 옷가게를 부부가 함께 하던 중, 그날 새벽 시장에 나왔다 우연히 형모와 만나게 된 것이었다.
정식이는 제기동에 있는 경동시장 근처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어서 장사는 그런 대로 잘 되는 편이었다. 그의 아내는 어린 딸을 돌보랴 손님 붙잡고 장사하랴 여간 바쁜 게 아니었다. 형모는 그런 그의 아내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 정식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근처에 있는 단란주점으로 형모를 이끌고 간 정식은 맥주 두 병을 시켰다.
“자식 대낮부터 술은…….”
어느새 잔을 비운 정식은 형모에게 잔을 빨리 비우라며 손짓을 했다.
“짜식 넌 평소에도 이런 술집을 출입하는 거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에도 빠듯할 텐데 웬 단란주점 출입이냐는 뜻이었다.
“그럼 어떡하냐, 이곳 종업원들이 우리집 단골인 걸 서로서로 상부상조해야지 안 그러냐?”
하긴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넌 아직도 혼자냐?”
연거푸 잔을 비우며 정식이 물었다.
“그럼 어떡하냐? 나 혼자 살기도 빠듯한 걸, 누가 나한테 시집와 줘야 말이지.”
그는 정식의 말투를 흉내내 가며 말했다.
“고향 친구 중 유일하게 장가 안 간 놈은 너 혼자야 알겠냐, 뭐 장가란 게 가봐야 그렇지만.”
“뭐? 나 혼자라구 벌써?”
“벌써라니, 우리 나이가 장장 서른 셋 아니냐.”
“서른 셋…….”
형모는 잠시 손가락을 헤아려 자신의 나이를 가늠해 보았다. 그러니까 고향 떠난지 햇수로만 8년 째 되는 것인가.
“헤아려 보긴…… 넌 고향 친구들 소식 듣고 있냐?”
“아니, 고향 떠나 객지밥 먹느라 그런 건 신경 쓸 새도 없이 살았다. 보시다시피 내 신세가 이렇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는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잠시 후 그의 귓가에 청천 벽력과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너, 문규 죽은 거 알고 있냐?”
“문규가 죽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는 아닌 밤에 홍두깨라는 식으로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보다도 너 문규가 공군 파일럿 된 것 알고 있었냐?”
“응. 그렇담 사고(事故)로?”
“그래, 서대전인가 어딘가에서 비행 도중 추락사고로 죽었다고 하더라. 자식 공군 파일럿 됐다고 온 동리가 떠들썩하게 자랑 자랑 하더니만.”
“그 그게 언젠 적 얘긴데.”
“한 사오 년 됐다.”
“그랬구나.”
형모는 잠시 정신이 멍멍했다. 그동안 세월의 간극이 실감나는 듯했다.
“문규 죽고 나서 그 집안 식구들도 고향에서 모두 떠나 버렸다고 하더라. 그 어머니는 거의 실성하다시피 했고 문규 아내는 남편 죽자마자 고무신 거꾸로 신고 미국으로 날아버렸단다. 죽일년 같으니…….”
정식이는 분노를 못 참겠는지 거품까지 물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는 또다시 어안이 벙벙했다.
“도대체 어떤 여자였길래…….”
“너도 잘 알 거다.”
“알다니 내가 아는 여자도 있었던가?”
그는 잔뜩 호기심을 갖고 물었다.
“그때 말이다 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 미팅한 적 있었잖냐.”
“그랬지 그때도 문규 파트너가 제일 예뻤잖냐 그 여자냐?”
“아니?”
“그럼 누군데?”
“너 파트너 했던 홍영실.”
“뭐 뭐라구?”
순간 형모는 뒤로 넘어질 뻔했다. 홍영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아니 어쩌다 술 마실 때면 입안에서 뱅뱅 도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 홍영실이가 문규의 아내였다니…… 그는 순간적으로 배반감과 뜻모를 분노가 치밀었다.
“이담에 시나리오 작가가 되면 영화 만들 때 나를 영화배우로 기용해 줄 거죠?”
아아! 십오 년 전에 그녀가 했던 말이 전광석화처럼 떠올랐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홍영실의 집안이 그렇게 대단한 명문가인데 어떻게 문규 같은 집안과 결혼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읍내 장터에서 해장국이나 팔던…… 문규의 어머니는 웬만한 남정네 못지 않게 성정이 드세기로 소문난 여자였다. 하나뿐인 아들인 문규에게도 살뜰하지 못할 만큼 괄괄하고 억척스러웠다.
“언 언제 그런 일이…… 그보다도 걔들은 언제 결혼한 건데.”
“말하자면 사연이 길다. 너도 아다시피 문규 어머니가 좀 드세냐, 그 양반이 걔들 결혼 엄청 반대했다.”
“반대라니 왜?”
반대라니…… 반대는 오히려 영실이 쪽에서 해야 정상이 아닌가.
“응 어디 가서 점을 봤는데 영실인가 그 여자가 남편 잡아먹을 팔자라는 게야, 그 양반 어디서 족집게 무당을 알았는지 맞히기는 기가 막히게 맞았지.”
하긴 그 양반 성격에 그냥 며느리를 맞을 리가 없지. 그나 저나 어떻게 영실이 집안에서 문벌 없고 재력 없는 한미한 집안의 문규를 사위로 맞이할 수가 있었을까. 형모는 방금 전에 느꼈던 분노는 다 어디로 갔는지 새로운 궁금증이 자꾸만 떠올랐다.
“반대는 오히려 여자 쪽에서 해야 하는 것 아니냐?”
형모의 말에 정식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여자 쪽에서 왜?”
“내가 알기엔 여자 쪽 집안이 훨씬 더 우세한 것 같던데, 검찰청에 다니는 장인에다 교감 출신 어머니에다 해외 유학파 오빠에다…….”
그는 용케도 십오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물었다.
“누가 그래? 그 여자 집안이 그렇다고.”
“누구긴 영실이, 아니 문규 처가 그랬지.”
“짜식 너도 속았구나.”
“속다니?”
“하긴 모두 깜빡 속았으니까, 그 여자 집안 이야기 그거 다 꾸며낸 이야기다. 완전한 가짜 소설이라구.”
“뭐라구? 그렇담 명문여대 출신이란 것도 가짜란 말야?”
“명문 여대 좋아하시네. 대학 들어가기 위해 삼수 했는데 모조리 떨어지고 집안도 형편 없다더라, 그년이 다 소설 쓴 거라구, 그년 집안이 그렇게 훌륭하담 왜 문규 어머니가 그렇게 반대했겠냐, 지난 얘기해서 뭘 하겠냐만…….”
이젠 아예 막 대놓고 이년이란다. 도대체 무슨 잘못을 얼마나 했길래 남편 친구로부터 그런 욕을 얻어먹는단 말인가.
“요는 그 불여시 같은 것이 인물이 반반 하잖냐, 문규 직업이 그렇고 허니 생명보험도 여럿 들어 놓고 그것도 모자라 샛서방꺼정 두었다 그 말이여.”
“뭐라구?”
형모는 너무 기가 막혀 할말을 잃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긴데 문규가 죽은 건 순전히 문규가 실수한… 그러니까 신경을 너무 쓴 나머지…….”
점점 모를 소리였다. 그러니까 아내의 바람기를 눈치 챈 문규가 조종석에서 딴 생각을 하다 실수를 했단 말인가.
“암튼 여자는 잘 얻어야 혀, 인물 하나만 보고 덤벼 들었다간 신세 망쳐 버리기 십상이여, 그저 우리 집사람처럼 인물은 없어도 생활력 강하고 남편 잘 섬기고 자식 잘 낳아 기르는 여자가 최고인 거여, 그런 의미에서 형모 너도 여자 잘 얻어야 혀, 알겠지 인물 너무 밝히지 마라, 문규 짝 난다.”
그 소리를 들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많이 흘러 버렸다. 어느덧 군사정권 시절도 지나가고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그 무렵 형모에게도 아내가 생겼다. 서른 넷이라는 나이로 늦장가를 간 것이다. 여자는 같은 평화 시장에서 일하는 여자였다. 그가 그녀와 결혼했을 때 가장 기뻐해 준 사람은 역시 정식이었다.
서로 비슷한 처지라 두 부부는 더 각별하게 지냈다. 결혼한 이후에는 중국에서 물건을 직수입해 판매하는 코너를 개설, 많은 돈을 벌었다. 아내는 장사에 특출난 재주가 있었다. 소심한 형모에 비해 통도 컸고 부지런하고 건강했다.
아들도 둘이나 낳아 주었다. 아이들도 엄마를 닮아 건강하게 자라 주었고 공부도 잘했다. 착하고 말도 잘 듣고 아빠를 잘 따라 주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아내가 강남으로 이사를 가자고 제의했다. 강남은 땅값도 비싸고 또 아이들 교육시키기엔 최고라는 것이었다. 어느새 아내에게도 고급 과외 열풍이 든 것이다. 아내는 대담하게도 은행에 대출을 받아 역삼동에 있는 고급 빌라를 샀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아이들 교육에 극성을 부렸다.
이제 오학년인 딸을 예중에 입학시키기 위해 아내는 미술 레슨을 시도했다. 따로 몰래 고급 과외도 시켰다. 자신이 못 배운 한을 마치 자식을 통해 성취하려는 몸부림으로 보일만큼 아내는 절실했다. 남편에게 장사를 맡기고는 아이들 과외 시키랴 학교 쫓아 다니랴 여간 바쁜 게 아니었다. 아내가 빠지자 장사가 엉망이었다. 수입 지출이 들쑥 날쑥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있던 단골들마저 다른 곳으로 빼앗기는 사태가 발생했다. 보다 못한 아내가 말했다.
“이제부터 가게는 내가 맡을 테니 당신은 아이들 학원 태워다 주고 데려 오고 하세요.”
그는 순한 양처럼 아내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그는 장사가 죽기보다 싫었다. 먹고살기 위해 억지 춘향식으로 장사판에 뛰어 들긴 했지만 한마디로 죽을 노릇이었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이들 뒷바라지에만 힘썼다. 장사에 신명 붙은 아내는 돈 버는 재미에 빠져 세월 가는 줄도 몰랐다. 그는 아내 덕에 팔자 좋은 백수가 되어 돈 씀씀이만 헤퍼졌다. 자연히 시간이 많아졌고 그러다 보니 잃어버린 옛꿈이 마음속에 새록새록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제라도 영상학부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써봐?
나이가 사십 대 중반인데 이 나이에 될까. 그러나 그는 잠잘 때 이외에는 항상 몽롱한 환상에 취하는 자신을 보았다. 그것은 그의 마음을 동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진실한 꿈 역할을 했다.
그래 누가 알아 주든 않든 무슨 상관이냐, 나 혼자만 보고 즐기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 나 좋으면 그만이지.
그는 밤이면 자리에 엎드려 영상 화면을 떠올리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흔한 멜로물에서부터 공상 과학 추리, 휴머니즘에 이르기까지 비록 완성도는 떨어졌지만 열정을 가지고 쓴 결과 몇 편의 완성작을 건졌다. 그것을 시나리오 공모에 보냈다. 물론 될 거라고 기대는 안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바람도 있었다. 결과는 역시 낙방이었다. 신세대의 젊은 감각과 기발한 소재 선택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의 사고(思考)는 이미 낡고 퇴락한 구조를 못 벗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순수한 인간미를 강조하는 휴머니즘에 도전했지만 그마저 마찬가지였다.
하긴 처음부터 무리수를 둔 것 같아 그는 자제하기로 했다. 실망하긴 아직 이르다. 그는 시나리오 작법에 대한 책도 여러 권 읽고 실제로 영화관을 찾아 나름대로 상상력을 펼치며 좀더 심사숙고하기로 했다. 아내는 그런 그의 생각을 적극 찬동하며 위로해 주었다. 대기만성이라고 언젠가는 꼭 성공할 것이라며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정말 고마운 여자였다. 자기 혼자 가정 경제를 몽땅 끌어안으면서 불편한 기색 한번 없이 남편을 잘 건사해 주는 이 시대에 보기 드믄 현모양처였다. 뿐이랴, 시골에 계신 시아버님에게 생활비는 물론 보약까지 철철이 대는 효부였다. 그는 아내의 내조 덕으로 뒤늦게 자신의 꿈을 이룰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개봉작이란 개봉작은 몽땅 훑어보면서 창작에 대한 전의를 다졌다. 뒤늦게나마 꿈을 이룬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쓴 시나리오가 채택돼 영화로 크랭크된다?
생각만 해도 가슴 뿌듯한 일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인생은 한편의 영화다. 정해진 시간 내에 끝내야 하는 한시적인 드라마, 그래서 더 성공적으로 화려하게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이 그의 눈가를 스쳐 지나갔다. 한 커트 한 커트, 최선을 기울이며 그는 자신의 삶조차도 영상으로 대비하는 버릇이 생겼다. 꿈은 과연 위대한 것이었다. 꿈은 그의 일상을 화려한 버팀목으로 그리고 순간마다 영상으로 삶을 지배했다. 그렇게 영화는 그의 환상이자 열정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영화사에서 소식이 왔다.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긴 한데 재차 삼차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수정이라니……?
내용인즉슨 여러번 수정과정을 거쳐 시나리오가 완성된 다음 전 스탭진이 모여 한 커트 한커트 다시 만든다는 것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감독의 입김이 가장 많이 작용할 것이었다. 그건 이미 각오한 바였다. 소문으로 들어 대충 알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그는 자신의 시나리오가 채택되었다는 사실에 날아갈 듯이 기뻤다. 온 천하를 손에 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새로운 제의가 들어왔다. 원고 내용을 어떻게 변경하든 상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는 것이었다. 각서라니…… 재차 삼차 원고 수정도 모자라…… 또?
자존심에 파열음이 났다. 그는 도로 원고를 찾아오고 싶은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그만 주저앉았다. 아내가 이번 딱 한번만 참아보라고 했기 때문이다. 처음이니까 우선 영화화되는 게 중요하니까 그 다음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게 첫 데뷔 작품인데…….
그는 자신에게 무릎 끓고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그래 이번 한번만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어찌 단 한번뿐이겠는가. 삶의 골목 골목마다 함정과 함께 무리수는 항상 도사리고 있는 것을. 산다는 건 결코 만만한 게 아니었다.
한 고비 넘고 나면 또 한 고비가 있고, 갈수록 태산준령이었다. 필생의 소원을 이루었다고 좋아했더니 그 이면에는 또다른 아픔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가 크랭크인 되기 바로 전날이었다.
아내가 새벽시장에 나갔다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전날 저녁, 영화 촬영이 시작된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좋아하더니만 몇 시간도 채 지나기 전 그녀는 의식불명에 빠지고 만 것이다. 소식을 듣고 달려간 그는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엄마 앞에서 울다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게 활기차고 무슨 일이든 자신감 있고 긍정적이던 아내는 식물인간이 되어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휴면 상태에 들어갔다. 그동안 아내가 피나게 일해서 모아 놓았던 돈은 병원비로 뭉텅뭉텅 들어갔다. 그는 아내의 병간호하랴 가게 일하랴 정신없이 바빠 영화 쪽에는 미처 신경 쓸 사이가 없었다.
양쪽을 오가며 지낼 수가 없어 그는 일단 가게 문을 닫고 아내를 살리는 쪽을 택했다. 아내는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혼수상태가 지속되었다. 아이들은 풀이 죽어 밥도 안 먹고 학원도 심지어 학교도 가지 않으려 했다. 그는 사면초가 앞에서 그저 낙망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 이것보다 더 큰 환란은 당해 본 적이 없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는 한없이 눈물을 쏟으며 처음으로 신(神)의 존재를 물었다.
“하나님 정말 당신은 살아 계셔서 인간에게 복을 주기도 화를 주기도 하는 분이십니까?”
그는 병상의 아내 앞에서 한없이 몸부림 치며 물었다. 생각해 보니 아내가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었다. 아내는 바닷가 고향에서 간신히 중학교만 마친 채 상경하여 공장 생활, 식당 종업원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워낙 총명하고 야무져서 그렇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평생 밑바닥 인생을 못 면했을지도 모른다.
새벽시장에서도 남자 못지 않게 수완을 발휘해 장사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가난에 한이 맺혀서인지 돈버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나섰다. 아이들 교육 문제로 잠시 한눈 판 이외에는 잠시도 장사판을 떠나 본 일이 없었다. 그녀는 장사하면서 거센 남자들 만 상대한 탓인지 기질이 고운 그를 만난 걸 다행으로 알고 남편에게 싫은 소리 불평 한마디도 없었다. 세상에 그렇게 고마운 아내는 둘도 없을 터였다.
그런 아내가 덜컥 누워 버리고 나자 그는 새삼 아내의 존재에 대해 절실해지는 것이었다. 그는 아내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작정이었다. 우선 아내의 의식이 돌아오기만 해도 천지신명께 감사할 것 같았다. 그러나 애타는 그의 심정과는 반대로 아내의 의식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내가 누운 지 두 달이 지났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병실 창 밖으로 성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옆 침대에 누었던 환자들은 하나 둘 일반 병실로 옮겨갔다. 언젠가는 아내의 의식도 돌아오고 기력이 회복되어 저들처럼 일반 병실로 갈 날이 오겠지.
그는 시나리오를 쓰듯 자신의 삶의 역전을 꿈꾸었다. 그러느라 피곤한 줄도 몰랐다. 어쩜 이건 현실이 아닌 영화의 한 장면일지도 몰라. 그렇지 아내는 이렇게 누워 있지만 반드시 깨어나 전처럼 다시 일하러 나갈지도 몰라. 세상에는 기적이라는 게 있다잖아. 종교에 기적이 있는 것처럼.
어느날 아내 곁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영실이와 고향 강변을 걷고 있었다. 영실이는 하얀 드레스 같은 차림에 빨간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녀가 형모의 팔장을 끼면서 깔깔대고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의 목을 확 휘어 감는 것이었다. 아악! 목이 조여오는 느낌이 들면서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괴이한 꿈이었다. 영실이가 꿈에 보이다니…….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했다. 그는 문규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가 도로 넣었다. 내가 지금 뭘 알아보겠다는 것인가. 아내는 아직도 의식불명 상태인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내의 손이 움직였던 것 같다. 그는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분명 아내의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손가락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움직였다. 분명히 움직였어 의식이 돌아온 거라구.”
그는 너무 기뻐 눈물이 나왔다. 자세히 보니 아내의 눈꺼풀이 떨리면서 눈물이 새어 나왔다. 아내의 의식이 돌아온 것이다. 그의 소리를 듣고 달려온 의사는 아내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보고 눈을 움직여 보았다. 잠시 후 아내가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움직여 뭔가 말하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의사는 기적이라며 축하한다고 했다.
사실 그런 일은 중환자실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형모는 그 모든 일을 기적으로 여기며 의사에게 거듭 거듭 감사했다. 살다 보니 이런 기쁜 일이…… 뺑소니 교통사고가 최대의 악운이었다면 무의식에서 의식이 돌아온 건 최대의 행운처럼 느껴졌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神)에 대해서도 거듭거듭 감사를 표시했다.
아내는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한 달이 지나자 일어나 걸을 수 있을 만큼 상태가 호전되었다. 아이들도 안정을 되찾아 학교도 학원도 잘 나갔다. 그는 아내의 두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그동안 당신 너무 힘들었지, 이제 퇴원해서 집에 가면 다신 가게 나가지 마, 이제부턴 내가 당신 우리 애들 책임질게.”
“당신 영화는 어떡하구요?”
아내는 여전히 그의 걱정뿐이었다.
“영화는 다음달이면 개봉한대,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각색이 된 모양이야 할 수 없지 뭐, 그래야 흥행이 된다고 하니까.”
“그럼 촬영하는 동안 한번도 못 가본 거예요?”
“내겐 당신이 더 중요하잖아 그까짓 영화야 다시 만들면 어때.”
그러자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 아내가 퇴원하기 이틀 전이었다. 그가 원무과에서 퇴원 수속을 마치고 있을 때였다. 응급실을 향해 급히 달려가는 무리가 있었다. 아마도 교통사고나 중환자가 발생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의 곁을 빠르게 지나는 여자 얼굴이 어딘지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지? 그는 발걸음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갑자기 섬광같이 스쳐 지나가는 편린을 보았다.
영실이? 그래 맞아 영실이야.
그러나 그는 다시 발걸음을 돌이킬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꾸었던 꿈의 실체가 궁금했지만 그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병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까짓 30년 전의 기억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현실이 더 중요하지. 병실로 돌아오니 아내는 머리를 빗고 있었다. 벌써 짐도 다 꾸려 놓았다. 아이들이 학원에 잘 도착했는지 확인 전화까지 넣고 있었다.
“뺑소니 교통사고라 보험 혜택도 못 보고 입원비가 많이 나왔죠?”
“돈이 문제야, 당신이 이렇게 회복된 게 난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데.”
“누구한테요?”
“누구긴 당신이지, 만일 당신이 깨어나지 않았다면 나 그리고 우리 애들은 모두 당신 따라갈 작정이었다구.”
그러자 아내는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그동안 손해본 것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뛰어야죠.”
그 말을 듣고 있던 옆 침대 보호자가 말했다.
“어쩌면 두 분은 그렇게 똑같이 착하세요, 나 같으면 그 뺑소니 운전자 욕을 밤새도록 해도 모자랐을 텐데.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잘 되나 보자고 생각날 때마다 욕하고 증오했을 텐데요.”
“그런다고 그 사람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마 그 사람도 어딘가에서 결코 편치 않을 거예요."
바깥 바람이 꽤 거센 모양이었다. 창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마치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의 가슴처럼. 퇴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정식이 내외가 찾아왔다. 정식이 처는 피곤한 몸에도 잣죽까지 쑤어와 정성을 보여줬다. 퇴원을 축하한다며 아내에게 옷 선물까지 했다. 검은색 줄가라가 있는 정장이었다. 유명 메이커가 찍힌 걸로 보아 꽤 고가로 여겨졌다.
그들은 한참 아이들 이야기를 하더니 곧 장사 이야기로 들어갔다. 원래 그들의 전공이 장사이니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 정식이 내외는 가게 터를 넓혀 곧 번화가로 진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종업원도 늘리고 좀더 실속있게 운영할 모양이었다. 형모는 정식이에게 조금 전 영실이 비슷한 여자를 본 것 같은데 요즘 그녀 소식을 아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어쩐지 아내에게 미안하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병실을 나설 때였다. 빨간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곁을 지나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여자도 지나다 말고 그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대로 지나갔다.
착각일 거야. 벌써 삼십 년도 더 된 일인데. 병원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자꾸만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분명 영실이 같은데…….
순서가 와 택시에 아내를 먼저 태우고 막 올라 탈 때였다. 그의 눈앞에 빨간 물체가 지나갔다. 섬뜩한 느낌에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영실이 빨간 투피스를 입고 서 있었다.
“이형모…… 양평에 있던…… 맞죠?”
여자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확인하듯 물었다.
“아는 여자예요?”
이번에는 아내가 물었다.
“글쎄 난 모르는 여잔데.”
그는 택시 문을 닫자마자 기사에게 소리쳤다.
“역삼동 뱅뱅 사거리요.”
이튿날 형모는 정식을 만났다. 그와 이야기하던 중 기어코 영실이 이야기를 묻고 말았다.
“너 요즘 영실이 소식 듣고 있냐?”
정식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건 왜?”
“사실 나 집사람 입원했던 병원에서 영실이 본 것 같다. 응급실 앞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막 뛰어 가는데…… 그리고 퇴원할 때 택시 기다리고 있는데 영실이가…….”
“짜식! 기억력 하나는 여전하다니까 그 삼십 년도 더 지난 일인데 너 영실이 많이 좋아했었구나, 하긴 그때만 해도 우린 정말 순진했었지.”
정식은 옛날을 회상하듯 잠시 눈을 감았다.
“영실이 애가 하나 있었는데 얼마 전 그 병원에 급성 맹장염으로 입원했다가 퇴원했다더라.”
“애라니? 누구 애?”
“누구긴 문규 아들이지.”
“문규 아들? 문규는 애도 없이 죽었다며?”
“글세 우리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그게 아니라니?”
“우리 생각으론 영실이가 미국 간 이유가 남편 죽자마자 서방질하러 간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더라구. 사람들이 하도 서방 잡아먹은 년이라구 손가락질해서 그런 상황 속에서는 도저히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었다는 거야.”
“그럼 문규가 죽었을 당시 이미 뱃속에 아이가 있었단 말이네.”
“그렇지 아이가 태어나면 애비 잡아먹고 태어난 놈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게 두려웠다는 게야. 그래서 미국행을 결심했다는군.”
“그럼 문규가 죽을 것 대비해서 생명보험도 여럿 들어 놓았다는 건 또 무슨 얘긴데.”
“그건 문규가 살아았을 때 자기 처 모르게 들어놓았다는 거야. 영실이도 문규가 죽고 난 다음에 알았다는 거야, 그래서 돈도 생겼겠다 이참에 미국으로 뜨자 결심했겠지.”
잠시 숨을 고른 정식은 중요한 고백이라도 하듯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문규 죽자마자 문규 어머니가 영실이 머리채 쥐어뜯으면서 서방 잡아먹은 년이라구 물고 뜯고 때리고 그러게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그 녀석이기어코 하더니만 비명횡사했다고 점궤가 맞았다고 울고 불고…….”
하긴 문규 어머니 성격에 그러고도 남지. 결혼식 당일까지도 문규 붙들고 난리를 쳐댔다니 알만도 했다.
“그런데 왜 애는 데리고 다시 나타난 거래?”
“문규 어머니 돌아가셨단다. 그래서 초상 치르려고 나타난 거지.”
“그럼 문규 어머닌 손자 얼굴도 못 보고 돌아가셨나?”
“임종 직전에 보았다고 하더라.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손자 손을 붙잡고 울고 또 울고, 그러더니 영실이 손을 붙잡고 고맙다고 눈물을 하염없이 쏟더니 곧 운명하시더란다.”
그랬구나. 그런데 그녀는 왜 택시 타는 곳까지 나타나 나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을까. 형모는 알 수 없는 궁금증에 빠졌다. 그러나 그 궁금증마저 그에겐 너무도 감미로웠다. 마치 삼십 년 전, 고향의 강가를 거닐며 첫 순정을 느끼던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내 무의식 속에 그녀가 살아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그녀 역시 오랜 세월 동안 나를 기억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형모는 꿈을 꾸듯 환상에 빠졌다. 이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써서 확 히트를 쳐봐? 형모는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는 그가 글을 쓰는 줄 알고 커피를 타서 갖다 주었다. 정말이지 고마운 아내였다. 퇴원하자마자 남편 뒷시중 들고 아이들 건사하고 가게 일까지 맡아하니 세상에 이런 아내는 둘도 없을 것이었다.
에휴! 그때 영실이와 헤어지길 잘했지. 그게 다 저 고마운 아내를 만나기 위한 수순이 아니었겠어. 감사할 일이지. 아내를 만남으로 그렇게 위험했던 삶의 요소들이 모두 제거된 것 같았다. 그는 아내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당신 알지. 당신이 나에겐 첫 여자라는 거, 나 당신 만나기 전에도 여자 손목 한 번 잡아본 일 없다고, 당신 믿지?”
그러면서 형모는 첫 미팅 때 고향 강가에서 영실이와 악수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럼요.”
아내는 눈물을 글썽이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났다. 자신도 모르게 인터넷을 마우스로 클릭한 모양이었다. 총천연색 화면이 눈을 압도했다. 서양 남녀들이 한데 뒤엉켜 섹스를 하는 장면이었다.
“어! 왜 갑자기 이게 뜨지?”
그는 서둘러 컴퓨터 전원을 껐다. 그것을 보고 있던 아내가 소리쳤다.
“당신 평소에도 이런 것 보고 그래요? 세상에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아내는 어느덧 그의 멱살을 쥐고 흥분하고 있었다.
“아 아니야 난 이런 것 절대로 안 봐 실수로 그러니까 어쩌다가 실수로 딱 한번 본 것뿐이라고.”
첫댓글 신외숙 작가님,드디어 소설을 올리셨네요. 신외숙 작님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아서 빨리 좀 올려 주길 바랬는데~~ 뛰어난 그 심리묘사 솜씨. 그리고 감칠맛나는 문장과 활력있는 속도감, 여기서 읽게 되어 기뻐요.열심히 올려주세요.~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