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뭐? "
" 바라는 게 뭐냐고. 내가 싫은 거냐? 그럼 계약 해지해 줄까? "
무뚝뚝하게 대꾸하는 내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주변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이사나는 점차 성난 듯이 얼굴을 붉히며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 책임을 회피할 셈이야? "
" 책임이라니? "
" 너 때문이란 말이야. 내가 이렇게 된 게 모두 너 때문이라고! 그런데도 뻔뻔하게 그냥 돌아가겠다고?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
…이 쯤 되면 내가 아무리 마음이 좋아도 그냥 듣고만 있을 수가 없다. 나는 반쯤 기가 막힌 시선으로 녀석을 응시하며 물었다.
" 내가 너에게 뭘 어떻게 했는데?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 네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조차 제대로 판단을 하지 못하겠거든? 너야말로 무작정 남에게 덮어씌울 생각 말고 제대로 설명이나 해봐. "
" 이익! 물이 없었단 말이야! 그것 때문에 모든 일이 틀어졌단 말이야! 물을 관장하는 것은 물의 정령왕인 네가 하는 일 맞지? 옛 고문서에 기록되어있는 걸 읽었어! 비를 조정하는 건 엘퀴네스의 일이라고! "
" 하아. 너 바보냐? "
" 뭐? "
멍청이 대꾸하는 이사나를 보자니 그대로 한대 쳐주고 정신이나 차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녀석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서둘러 입을 열어 '그것은 오해라느니', '정령왕이 아니라 신이 하는 일이라느니' 떠들어 대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거기 너희들!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마찬가지면 제발 닥치고 있어!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 아, 그래. 자연계의 물을 관장하는 건 내가 맞아. 그래서 뭐? "
" 뭐, 뭐라니? "
" 내가 설마 심심해서 장난이라도 쳤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곳의 자연을 가지고 얼마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면 멸망할지, 어떨 지? 그리고 그걸 다른 정령왕들은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었고? 그런 거야? "
다른 정령왕들의 존재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이사나는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떻게든 억지를 부려보려는 아이마냥 사정없이 고개를 휘저은 녀석은 작은 반박을 시도했다.
" 하, 하지만 엘퀴네스는 정령왕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했어. 다른 왕들의 개입이야 힘으로 억압하면… "
" 미쳤냐? 정령왕들은 평등한 존재야. 힘이 더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다고. 애초부터 그런 순위를 멋대로 정한 건 인간들이잖아?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이지, 여기가 멸망하면 정령계도 무사하지 못해. 그런데 내가 왜 그런 짓을 하냐? 내가 무슨 자살 신봉자라도 되는 줄 알아? "
" 하지만…. "
" 하지만은 무슨 얼어 죽을! 말해두겠는데 이번 일에 피해를 입은 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원망을 하려면 제대로 알고 해야 할 거 아냐? 도대체 내가 왜 처음으로 소환된 인간한테 다짜고짜 저주한다느니, 책임을 지라느니 따위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건데? 아악. 신경질 나! "
" ……. "
그리고 이어지는 잠깐의 침묵. 씩씩거리는 나를 멍하니 보던 이사나는 무언가 맥이 풀린 마냥 추욱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리곤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차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뱉어내고 말았던 것이다.
16살도 넘어 보이는 다 큰 사내자식이 훌쩍이는 꼴은 곱게 봐줄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모습이 어찌나 처량해 보이던지, 문득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켜보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인 것 같았다. 녀석을 바라보는 얼굴마다 하나같이 안타까움이 표출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평생 동안 울 눈물을 이번기회에 다 털어놓으려는 듯, 한참이나 흐느끼던 이사나는 간신히 진정하며 입을 열었다.
" 정말… 내가 오해한거야? 이번 재앙이… 정령왕이 일으킨 게 아니야? "
아~ 거참. 사람…아니 정령왕 말 되게 못 믿네!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이사나의 표정이 워낙 진지했기에 나는 말없이 고개만을 끄덕여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었는지, 침울하게 고개를 숙인 녀석은 이윽고 한참을 망설인 끝에 한마디를 뱉어냈다.
" 믿고 싶지 않아. "
" 뭐? 야, 너 정말~! "
지금 나 놀리는 거냐? 하지만 화를 내려던 나보다 이어지는 이사나의 말이 더 빨랐다.
" 원망할 존재가 필요했어. 그래야 내가 살아나갈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네가 아니라고 하면 …난 누구에게 짐을 돌릴 수 있을까? 돌아가신 아버지께? 아니면… 숙부를? "
망연히 중얼거리는 것이 꼭 인생 다 포기한 인간 같다. 그것을 본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단숨에 물의 기운을 끌어 모아 그대로 이사나의 머리에 직격으로 퍼부어 주었다.
촤악
" !!! "
" 헉. 이사나님! "
엄청 시원했을 거다. 일부러 차가운 성질만 모아서 뿌려줬으니까. 갑작스런 물세례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녀석을 보며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 이제 정신 들겠냐? "
" …? "
" 책임을 회피하는 건 오히려 네 쪽인 거 같은데? 다른 사람 원망할 시간 있으면 좀 더 제대로 살아볼 구상이나 더 해봐. 너 거울은 보고 다니냐? 지금 모습, 진짜 못 봐주겠다. "
" ……. "
지구에서야 흔하디흔한 게 거울이었지만, 이곳 아크아돈에서는 금보다 귀한 값으로 거래되는 것이 유리이고, 때문에 이런 상거지 꼴을 하고 있는 무리가 그런 걸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알 리가 없던 나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여주곤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리곤 꼬맹이에게 훈계하는 어른마냥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 나도 나름대로 혼자 땅 파는 타입이긴 한데 말이야, 넌 아무래도 정도가 더 심한 것 같다. 그리고 오해란 걸 알았으면 사과부터 하는 게 예의 아니야? 설마 그 정도도 못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건 아니겠지? "
" 아, 아니야. 미안해. 난 그저… "
" 좋아. 사과 받았으니 됐어. 그럼 이제부터 자세한 설명이나 해봐. 도무지 뭔 소린지 알아야 장단이라도 맞춰주지 원. 나를 트로웰이라고 착각하는 게 아니라면, 속으로 백날 궁리해봤자 소용없으니 말로 털어놓으란 말이다. 자 뭐부터 말할래? "
" ……. "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75 회]
날 짜 200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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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재앙과 비운의 황제
내가 너무 능청스러웠나? 주변의 사람들은 저마다 할 말을 잃고 눈만 말똥말똥 굴리고 있었다. 그 중 이사나는 설마하니 내가 사과를 받아줄 거란 생각을 못했던 건지,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 화…내지 않는 거야? 그렇게 심한 말을 했는데? "
" 아아. 괜찮아. 그 정도 악담은 익숙하니까. "
" ?? "
강지훈 이었을 시절, 아버지나 형제들에게 걸려 된통 맞을 때마다 들었던 말에 비하면, 이사나가 퍼부은 악담정도는 그야말로 애교나 마찬가지였다. 영문도 모른 채 다짜고짜 욕부터 먹은 게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그 정도 가지고 끝까지 치사하게 굴 정도는 아니라는 말씀. 게다가 사과까지 받았는데 감정을 악화시켜 좋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렇게 간단하게 결론지어버리는 나는, 아까와는 달리 한층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상황설명을 재촉했고, 그 몫은 이제까지의 설명을 전담했던 알렉에게로 돌아갔다. 그가 망설이는 이사나를 대신해 번쩍 손을 들어 자청했던 것이다.
"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엘퀴네스님. 아마도, 아까 전에 못 다한 설명의 연장일 듯싶으니까요. "
" 헤에. 그래주겠어요? 나야 설명만 들을 수 있다면 아무나 상관없지만… "
" 예. 아무래도 이사나님은 많이 지쳐계신 듯하니,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전에 잠시, 왕시이여? 이사나님의 성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
엥? 별안간에 왠 성?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대답하지 못할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 이사나*란느*솔트.…맞죠? "
" 예. 정확히 맞추셨습니다. 그리하다 면, 현재 저희가 있는 이곳이 어느 나라라고 했는지도 기억나십니까? "
" 흐음? 정령왕의 기억력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예요? 그러니까 솔트레테 제국의… 엥? 솔트? 그러고 보니 이사나의 성과 비슷하네? "
뭐야? 나라의 이름을 성에 붙여도 되는 건가? 아니면 이 나라 귀족들의 성은 모두 솔트라는 이름으로 시작하던가. 새로운 사실에 놀라워하자 이사나는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고, 알렉은 맞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습니다. 정령왕께서 인간세상의 관습을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대륙에서는 '성'을 쓸 수 있는 건 소수의 귀족들뿐입니다. 이사나님은 이곳 솔트레테 제국 황실의 피를 계승하시는 분이시죠. "
" 그, 그래요? "
귀족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황실의 피를 잇고 있을 줄이야. 그럼 황자라는 걸까? 그렇다면 알렉 등이 기사들이라는 것도 쉽게 납득이 갔다. 그래도 한 가지 껄끄러운 점이라면…
' 황자씩이나 되는 주제에 왜 이런 곳에서 거지꼴을 하고 있는 거지? '
태어난 본바탕은 나쁘지 않았지만, 지저분한 옷과 먼지로 범벅이 된 머리카락을 보면 아무리 좋게 봐도 귀족으로도 보기 힘들었다. 며칠을 굶은 듯 비쩍 마른 몸과 거친 피부가 기아 직전에 빠져 허덕이는 소말리아 난민이라면 또 모를까. 아무튼 황당한 표정으로 이사나를 바라보고 있자, 알렉은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 이사나님께서 이리 되신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아마도 정령인 당신께서는 이해하기 힘드실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흐음, 설마 10년 재앙이 원인이 되서? 그러고 보니 아까 그랬었죠? 솔트레테의 황제는 비운의 황제로 통한다고…. 이사나가 황실의 피를 잇고 있다면, 그것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겠네요. "
" …맞습니다. "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알렉의 설명은 듣는 나로서는 입이 저절로 벌어질 수밖에 없는 충격과 경악의 연속이었다. 그러니까 때는 재앙이 시작되고 난지 7년, 모든 작물과 곡물이 말라버리고 바다와 강물이 그 흙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수십 수천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솔트레테 제국의 황제 ' 카일 란느 솔트'는 계속되는 백성들의 고통을 보다 못해, 국교인 어둠의 신전에 청하여 마신의 신탁을 받기에 이른다. 현 재앙의 원인과, 그 해결 방식을 그들이 믿는 신에게 의뢰했던 것이다. 마침, 그의 동생인 ' 유카르테 란느 솔트' 대공이 마신교의 신관장의 위치에 속해있었기에, 신탁을 받는 행사는 모든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공공연히 행사되었다.
" 신탁은 그다지 잘 내리는 편이 아닙니다. 때문에 황제폐하께서도 그다지 기대하고 계시지는 않았지요. 다만, 전혀 나아지지 않는 상황의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여 어떤 방법이라도 닥치는 대로 써보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
하지만 정말로 기적적으로, 신탁은 의식을 행사한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내려오고 말았다. 마신 역시 아크아돈의 재앙을 염려하고 있었던 걸까? 사람들은 드디어 재앙이 끝날 것이라는 기대감에 환호성을 올리며 신탁의 내용이 공개되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그 공개된 신탁의 내용이란 것이…
" 현황제의 업보에 의해 일어난 재앙? 그래서 죽음으로서 속죄를 해야만 끝난다고 했다고요? "
기가 막힌 표정으로 묻는 나에게 알렉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신탁의 내용은 신언으로 이루어져 있어, 대 신관이라 하여도 정확한 내용의 해석이 불가능 합니다. 하지만, 그날 공개된 신탁은 정확한 의미를 담고 재앙의 책임을 황제 폐하에게 돌리고 있었지요. …때문에 민중은 분노하고 말았습니다. "
[ 타오르는 열기의 울음은 어둠의 지배자를 책망하는 도다.
그대 삶의 1년은 백성의 10년을 대가로 하는 것. 죽음만이 속죄할 수 있으리라.]
여기서의 '어둠의 지배자'란, 마신교를 국교로 정하는 솔트레테 제국의 황제를 뜻하는 것이었다. 즉, 솔트레테 제국의 황제가 백성의 10년 삶을 자신의 생명과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까지 들은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 자, 잠깐만요. 그 신탁이란 것이…신뢰성이 있는 건가요? 어떻게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있죠? "
" …신탁이니까요. 신이 직접 내려주시는 것인데 어찌 불신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그때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든 재앙을 끝내야한다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가뭄의 기간이 너무 길었던 탓에 이성적인 판단력을 잃었던 거지요. …그러니 역사 중 가장 위대한 성군이셨던 황제폐하에게 그리 쉽게 등을 돌릴 수 있었던 겁니다. "
" 크흑. "
생각하는 것만으로 분했는지, 알렉의 말을 듣고 있던 이사나는 입술이 새하얗게 되도록 깨물면서 짧은 신음을 삼켰다. 그 모습을 잠시 멍하게 바라본 나는 결말이 뻔히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
설마… 죽은 거야?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알렉은 어두운 표정으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백성은 이미 폐하께 등을 돌렸고, 황제 다음으로 권력행사가 높은 마신교에서는 신탁의 내용을 들먹이며 폐하를 향한 탄압을 끊질 않았으니… 그분께서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지요. 결국 모든 책임을 지고 처형을 당하신 것이 바로 두 달 전 이야기입니다. "
" !!! "
맙소사. 두 달 전? 그땐 내가 막 태어났을 시기잖아! 과연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이사나가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것 같은 얼굴로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 그리고 나서 바로 자연이 회복단계에 돌입하기 시작했지. 비가 내리고, 물이 깨끗해지고, 공기에 수분이 생기기 시작하는 거야. 그러자 '설마'하던 사람들이나, 폐하의 처형을 반대하던 사람들까지 모두 마신교로 돌아서고 말았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폐하는 그들을 누구보다 사랑했어. 당신이 드실 물조차도 백성을 위해 쓰라고 하셨던 분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그들이!! "
" 이사나님…. "
" 하아, 그래서… 비운의 황제라고 했던 거군요. "
이사나가 황자라면, 처형당한 황제는 그의 아버지란 소리가 된다. 가족간의 애틋한 감정은 경험한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존재가 그런 식으로 어이없게 죽는 것을 목격했다면, 절대로 멀쩡한 감성을 유지할 리가 없겠지. 그야말로 누구하나 붙들고 원망한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 화살이 나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는 이유도 충분히 공감했고 말이다.
설마 그런 말도 안돼는 것을 빌미로 황제를 처형할 줄이야. 민주국가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아닌가. 이래서 중세인들은 무섭다니까? 아연한 표정으로 멍하니 중얼거리자, 알렉이 냉큼 끼어들었다.
" 아, 물론 그렇기도 합니다만. '비운의 황제'의 정확한 명칭은 여기, 이사나님께 향한 것입니다. '
" …에? "
그건 또 뭔 소리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와 눈이 마주친 이사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조금은 심통 맞으면서… 쑥스러워하는 것 같달까? 그 해답은 이제껏 모든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정령사 페리스에 의해 드러났다. 슬픈 듯, 안타까운 듯, 괴로운 표정을 채 숨기지 않은 그는, 그러면서도 은근히 자랑스럽다는 기색으로 이사나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 선황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황제 위를 그분의 아들이셨던 황태자전하께 물려주셨습니다. 재앙의 책임은 선황 자신에게만 해당할 뿐, 핏줄에까지 이어진 건 아니었으니까요. 바로 이사나 란느 솔트,- 이분이 솔트레테 제국의 현 황제십니다. "
" !! "
뭐어?? 그 순간 내 머릿속을 강타한 생각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 황제가 왜 이런 꼴이 되어있는 거야!! '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76 회]
날 짜 200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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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재앙과 비운의 황제
어찌나 충격이 컸는지, 나는 이후로도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도 못한 채 멍하니 입만 벌리고 이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어쩐지 신계에서 엘뤼엔이 '역시 내 아들이야. 첫 계약자가 황제라니, 날 닮아서 능력도 좋다니까? '라고 중얼거리는 듯한 환청이…가 아니잖아!! 도대체 저 녀석의 어디가 황제로 보인다는 거야!
그런 내 심정을 공감했는지, 자신들이 말해놓고도 한동안 머쓱한 얼굴이 되어 서로를 마주보던 사람들은, 결국 무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여, 역시 믿기 힘드시겠지요? 제국의 황제폐하와 그 호위 기사들이라고 한다면…. "
" 에에… 보시다시피 식사는 벌써 3일째 굶고 있고, 옷도 걸레와 다름없는 넝마에, 갑옷이나 쇠붙이종류는 눈에 뜨일까봐 버린 지 오래. 휴우, 믿지 않으셔도 할말이 없습니다. "
" 인원도 처음엔 이보다 많았지요. 황제폐하의 직속 친위기사단이니까요. 중간 중간 다치거나 굶어 죽은 녀석들이 나오는 바람에, 지금은 12명 정도밖에 안 남았지만. "
" 그것도 오늘로서 11명이 될 뻔했잖아? 케이 녀석, 반드시 죽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
" ……. "
케이라면… 내가 치료해준 남자를 말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꽤나 심한 상처를 입었는데도 제대로 된 응급처치조차 되어있지 않아, 잔소리를 퍼부으며 회복시켰던 기억이 났다. 죽은 동료들의 모습이 생각난 탓인지 주변의 공기는 순식간에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그 갑작스런 암울함에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할 무렵, 이제껏 침묵을 지키던 이사나가 쓸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내가 아니었다면, 그들도, 케이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을 거다. 부족한 주군을 만나 그대들의 고생이 심하구나. "
" 그, 그런! 당치 않으십니다 이사나님. 폐하의 탓이 아닙니다. 이 모든 건 그 간악한 유카르테 대공에 의한 것이 아닙니까? "
" 맞습니다! 오늘의 받은 이 수모와 모욕, 동료들의 억울한 한을 반드시 그 목숨으로 받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저희는 끝까지 폐하와 함께 하겠으니, 부디 물러서지 말아주십시오! "
" 저희들의 목숨은 폐하와 언제까지고 함께 할 것입니다! "
이제 상황은 죽은 부하를 위해 애도하는 군주와, 그것을 위로하는 기사들의 모드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넝마 같은 차림과 지저분한 얼굴만 아니었다면 꽤 봐줄 만 했을 텐데. 아쉽게도 내 눈엔 하나같이 거지꼴이 된 남자들이 어린 소년하나 붙들고 엉엉거리는 것으로 밖에 안보여, 그다지 감동이 느껴지진 않았다.
대체 얼마나 억울한 사연이기에 황제라는 녀석이 이 지경까지 되어 산속을 헤매고 있는 걸까? 이미 그 아버지의 일로도 충분히 심각했지만, 녀석의 겪은 일 또한 만만치 않아 보여 나는 잠자코 이사나의 앞에 주저앉으며 물었다.
" 유카르테 대공이라면, 너의 숙부라는 그 사람? 설마 황 좌를 노리고 너를 숙청하기라도 한거야? "
" 으으응? "
" 그렇잖아. 10대의 소년황제-라고 한다면 대부분 뒤에서 섭정을 하는 사람이 등장하니까 말이야. 그걸 섭정 왕이라고 하던가? "
분명 책이나 드라마에서 몇 번 본적이 있었던 것 같다. 아직 세상사를 모르는 어린아이가 왕으로 즉위했을 경우, 그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국정을 대신 돌보아 주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 말이다. 그 과정에서 권력에 심취한 나머지, 진짜 왕을 몰아내고 스스로가 왕으로 즉위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지 않은가.
이사나의 나이는 얼핏 보아도 이제 10대 중반. 섭정 왕이 등장하는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하는 내게, 이사나는 짧은 신음과 함께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 맞아. 내가 성년이 되는 2년 후까지 내 대신 국정을 치리하도록 되어있었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내가 의지할 사람이라곤 숙부밖에 없었기 때문에 맡겼던 거였는데… 설마 그가 이런 식으로 나를 몰아세울 줄이야. "
역시. 그래서 궁에서 쫓겨나 간신히 몇 사람만을 데리고 도망쳐 다니는 건가? 산에 숨어 있는걸 보면 계속 쫓기는 중인 것 같은데… 이 녀석이 살아있는 이상, 유카르테 대공이란 녀석은 온전한 황제가 될 수 없을 테니, 이사나는 앞으로도 계속 위험한 상황에 처하겠지.
젠장. 엄청 골치 아픈 녀석하고 계약했잖아? 내가 속으로 이렇게 투덜거리는 것도 모르는 채, 흥분한 기사들의 목소리가 높여졌다.
" 대공은 반드시 죄 값을 치르게 될 것 입니다. 감히 존귀한 솔트레테제국의 정통하신 황제폐하에게 등을 돌리다니! 신이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
" 그 간악하기 이를 데 없는 마신 교 놈들! 그 신탁도 분명 거짓이었을 겁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대공의 간교한 꾀에 빠져, 그의 손안에서 놀아났던 거라 구요! 뿌드득! "
" 선황폐하께서 어찌나 원통하셨을꼬. 지금도 한이 되어 차마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계실 겁니다. 반드시 이 원수를 갚겠나이다! "
…아니, 분노하는 중에 미안한데 말이야. 이미 선황의 영혼은 저승사자들에게 무사히 인계 되었을걸? 지금쯤 명계를 거쳐 다시 환생의 궤도에 올랐을지도 모르지. 업이 없는 상태라면 신족으로 태어났을 테지만. 하지만 워낙에 사람들의 기세가 흉흉했던 관계로, 이러한 속마음은 꿀꺽 하고 삼켰다.
괜시리 잘못 건드렸다가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꼴이 되는 건 사양하고 싶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나자 이사나는 황궁에서 쫓겨나게 된 자세한 경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 처음엔 기사들의 대련 중에 일어난 사고를 가장한 암습이었어. 하지만 운 좋게 목숨을 건지자, 이번엔 끊임없이 음식에 독을 타기 시작했지. 웬만한 독엔 내성이 되어있는 관계로 그마저도 듣지 않자, 이판사판이었는지 군대를 일으켜 밤중에 몰래 죽이려고 했어. "
" 으음…"
" 다행히 알렉이 그들의 계획을 한발 먼저 눈치 채었던 바람에, 나는 이렇게 오늘까지 무사할 수 있었다. 그 밤을 틈타 도망치던 중에 부하의 반 가까이가 죽거나 다쳤지만, 무력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대체 무엇을 위한 황제라는 거지? "
자책하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깊은 한이 서려있었다. 스스로의 나약함에 대한 한심함과 자괴감. 아마도 자신을 지키다가 죽는 사람들을 보며 차라리 먼저 죽고만 싶었을 테지. 모든 절망을 한꺼번에 드러낸 듯한 슬픈 푸른 색 눈동자를 보며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 .황성을 지킬 생각은 하지 않았던 거야? 황제잖아, 일단은. 군대를 일으키면 반역으로 간주하여 오히려 역으로 네가 진압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
" 크윽. 무리야, 그건. "
" 응? "
계획까지 미리 눈치 챘다 면서 어째서 무리라는 거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기사들 중 한명이 침통한 표정으로 그의 대답을 대신했다.
" 이미 황궁 안엔 폐하의 무리가 없었습니다. 간교한 대공이 어느 샌가 하나둘씩 제 편으로 흡수시켜버린 뒤였지요. 폐하의 편이 되 줄 만한 세력을 가진 귀족은 자택 내에 강제칩거를 당해버렸고, 외성과 내성 안팎으로 대공의 수하들이 들어 찬 상태였습니다. 직속 친위기사단인 저희들만으론 간신히 도주로를 확보할 수 있었을 뿐, 진압은 무리였습니다. "
" 흐음…이사나, 그렇게까지 될 동안 넌 뭘 하고 있었던 건데? "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신에게서 돌아선다. 좋건 싫건 분명히 느낌으로 어느 정도 파악이 됐을 텐데, 어째서 이 녀석은 방관만 하고 있었던 걸까? 내 질문이 직구였는지, 움찔 어깨를 떤 이사나는 입술을 가늘게 깨물었다. 그리곤 아직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목소리를 떠듬떠듬 내뱉었다.
" 미워했으니까. 내게서 돌아서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어. "
" 뭐? "
" 선황폐하의 죽음에 대한 충격이 너무 컸어. 그 분은 나의 전부였으니까. 때문에.. 그분을 그렇게 쉽게 파멸시킨 존재들을 원망하는 것을 달래는 것만으로 하루하루가 버거웠지. 차마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상태가 아니었다. 아마,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일거라 생각해. 이런 내가 구제불능인건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어. 한심해 해도 돼. "
" ……. "
의지하고 있던 상대가 어이없이 죽는다면 누구나 다 화가 날것이다. 특히나 이사나의 경우는 나이가 어린 만큼, 감정을 추스르기가 더욱 힘들었을 테지. 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 가장 비난을 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자신이었다.
" 난… 황제다. 광활한 영역 솔트레테를 통치하는 황국의 지배자야. 16세의 어린 나이라는 것도, 의지할 사람을 잃었다는 것도 변명이 안돼. 난 한 사람이기 전에, 스스로가 황제라는 위치임을 자각했어야 했어. 그것을 못했기 때문에 죄 없는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또 그것에 자학하는 나날을 반복하게 됐지… 정령의 왕인 너라면, 이런 내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겠지? 이 세계의 모든 정령들의 네 휘하에 있으니까."
" 그, 글쎄…? "
정령 왕이라고는 해도, 위치상의 서열이 높다는 것만 알뿐, 정령들에게 특별하게 느껴지는 책임감이라던가, 왕이라는 자각을 필요로 했던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왜 주변에선 나에게 왕으로서 보여야할 덕목이나 위엄 같은 걸 공부시키지 않는 걸까? 능력의 자각은 꽤나 주의를 주면서도, 성격 조정에는 전혀 관심들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자 그런 내 의문을 눈치 챘다는 듯 어느새 옆에 등장한 시큐엘이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왕께서는 존재하시는 것만으로 이 세계의 균형을 이루시는 분, 그 존재만으로 이미 모든 정령들의 생을 책임지고 계십니다. 왕으로서 요구되는 책임은 이미 능력을 자각하신 순간부터 모두 이루신 상태입니다.
" …아, 그렇구나. 하긴, 꽤 애먹긴 했지. 빨리 능력을 자각해야만 이 세상이 살아난다고 닦달들을 해댔으니 말이야. "
" 응? 누구와 이야기 하는 거야? "
아참, 그러고 보니 시큐엘은 사람들 눈에 안보이나? 이사나의 마나를 부여하면 보이게 할 수는 있겠지만, 하급정령만으로 빌빌거리던 녀석이 시큐엘을 감당할 것이라곤 보기 힘들었기에 나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 아, 옆에 시큐엘이 와있거든. "
" 시큐엘? 설마 물의 상급정령? 그런데 왜 내겐 안 보이는 거지? "
" 그거야 네가 '소환'하지 않았으니까. 마나를 부여하지 않으면 정령들은 인간 세상에 겉모습을 투영시키지 못해. 넌 나의 계약자니까, 굳이 시큐엘하고는 계약하지 않아도 소환할 수는 있지만… 이상하게도 마나가 너무 부족해서 말이야. 나이아스들만 으로도 버거워. "
" 그, 그런 거야? 하아… 왜, 왠지 실감이 안나. 네가 정령왕이라는 것이.…아, 아니…내가 정령왕과 계약을 했단 것이… 이거, 꿈은 아니겠지?"
이제까지 아무렇지 않게 대화도 나누고 정령왕이 어쩌고저쩌고 떠들던 녀석이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어색해 하자 오히려 내가 더 뻘줌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이제껏 누적된 피로감과 절망감에 의해 인식하지 못하던 현실이, 드디어 피부로 실감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이제까지 무겁게 흐르던 짓눌린 분위기가 차츰 밝아지더니, 기사들의 표정도 한결 여유로워졌다. 그들은 감탄 반, 동경 반의 시선으로 나를 흩어보며 어딘지 들뜬 듯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사나님! 인류최초로 물의 정령왕의 계약자가 되신 겁니다. 역대 정령사의 역사서에 단연 돋보이는 이름으로 기록되실 겁니다. "
" 엘퀴네스의 능력은 뜬 구름 식으로만 알려져 있어, 제대로 알 수가 없었는데… 이번에 보니 과연 대단합니다. 그 엄청난 치료능력이라니! 또한 이 고아한 품위와 자태는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겁니다. 저는 처음엔 여신이라도 하강한줄 알았다니까요? "
" 쿨럭. 여, 여신??? "
왜 하필이면 하고많은 비유 중에서도 여신인거야? 경악할 일은 다음이었다. 뜨악한 표정으로 되묻는 나를 이상하단 듯이 바라보던 기사들이 하나둘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 어라? 실례지만. 엘퀴네스님은 여성이…아니셨습니까? "
" 엥? 저는 틀림없이 여자라고만 생각했는데…이사나님도 그렇지요? "
끄덕끄덕.
" !!! "
이 인간들이 눈이 다 삔 거 아니야? 어떻게 이런 빈약한 가슴을 보고 여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냐고! 너무 기가 막혀서 말을 못 있고 있는데, 이때가 기회라는 듯이 정령사 페리스가 자랑스럽게 끼어들었다.
" 이런, 그런 실례되는 발언을! 정령은 성별이 없습니다. 정령에 대해 조금만 관심이 있으셨다면 아실 수 있을 텐데. 설마 모르셨나요? "
" 아? 그런 거야? 그럼 무성?? "
" 예, 역대 정령왕서를 보면, 정령들은 전체적으로 무성이고, 겉모습에 따라 여성 형, 남성 형이 구분된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정확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엘퀴네스님은 여성 형 쪽의 정령이실 뿐. 인간적인 개념으로의 여자인 것은 아니라는… "
" 무슨 헛소리야!! 난 남성 형이란 말이다!!! "
그나마 믿음직했던 페리스마저 배신 때릴 줄은 몰랐기에 나는 거의 울고 싶은 기분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이 썩을 놈들은 오해한 것을 미안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저들이 더 충격 받았다는 듯한 얼굴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 말도 안 돼. 저 얼굴이 남성 형이라고? 그럼 여성형의 정령은 대체 어떻게 생겼다는 거야? "
" 빌어먹을. 한눈에 반했었는데! 남성 형이라니!! 나 설마 그쪽이었던 건가? "
" 이럴 리가 없어. 이건 사기야~!! "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77 회]
날 짜 2004-08-14
조회 / 추천 3823 / 36
선작수 2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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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재앙과 비운의 황제
" !!! "
이, 이것들이!
촤아악!
" 으악!~~ "
결국 열 받은 나는 그대로 녀석들에게 사이좋게 한 덩이씩의 물을 퍼부어 주고 말았다. 하지만 이놈의 겁 없는 녀석들은 비 맞은 생쥐 꼴이 되고서도 정신을 못 차린 채, 여전히 불신의 눈빛을 보내며 저들끼리 중얼거리고 있었다.
" 봐~ 외모에 민감한걸 봐선 여자가 맞다니 까? 저 얼굴로 남성 형이라니 믿을 수가 없어. "
" 크흑. 끝내주는 미인이라고 감탄했었는데. 남성 형이라니… 싫닷! 그냥 여자로 생각해 버릴 테다! "
" 저 얼굴이 남성형인 것은 이 세상 모든 남자들에 대한 도전이라고. 순순히 인정할 성 싶으냐! "
" ……. "
말을 말자, 말을 말아. 저런 것들을 상대하다간 내가 제명에 못 죽을게 틀림없어. 암 그렇고 말고. 그리하여 녀석들을 과감히 무시하기로 결정지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사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째 이 녀석도 내가 여성 형이란 것 에 점수를 주는 모양이었지만, 후환이 두려웠는지 차마 내색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이빨이 바드득 갈리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그래서? 넌 이제 어떻게 할 거야? "
" 응? "
갑작스런 질문이 이해가 안 되었던지 이사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역시 아무리 봐도 황제로 안보여.
" 황제라며? 궁에서 쫓겨났다면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 정해야 할 거 아니야? 역시 돌아가고 싶겠지? "
" 하, 하지만. 숙부가 무슨 짓을 해놨는지, 나와 나를 따르는 기사들을 반역의 무리로 모함하고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어. 사람이 있는 곳엔 내려갈 수 없는걸. "
허걱? 황제를 반역자로 모함할 수도 있는 거였나? 뭐, 나라를 팔아먹으려 했다거나, 황제가 아닌 다른 세력으로 꾸몄다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처음으로 강지훈일 시절, 학교에서 역사공부를 제대로 해 두지 않은 것이 후회됐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삼국지건, 수호지건, 혹은 스타크래프트같은 게임이라도 전략이나 역사에 관한 것은 닥치는 대로 배워두는 건데!
"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곳에 죽치고 있을 수는 없잖아? 밥도 못 먹었다며? 이대로 굶어 죽을 생각이야? "
" 그, 그건…. "
" 어휴. 답답아. 몽타주가 전 세계에 도배 되도, 관심이 없으면 못 알아보는 게 사람의 뇌라는 거야. 괜히 미아 찾기가 힘든 줄 알아? "
" 모, 몽타주? 미아 찾기? 그게 뭐야?"
"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뭣하면 내가 도와 줄 테니까, 우선 내려가고 보자고. 그대로 있다간 쓰러질 것 같다. "
무심코 꺼낸 말이었는데 그 말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순간 사람들의 눈빛이 희망으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 맞습니다! 폐하! 지금의 우리에겐 정령왕 엘퀴네스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 대로라면 저 간악한 대공을 몰아내고 황성을 되찾는 것도 시간문제일겁니다!! "
" 오오! 차라리 이대로 황성으로 진격하는 것이 어떠실지? 폐하께서 엘퀴네스의 계약자라는 것을 알면 사람들의 마음도 돌아설 것 입니다! "
하지만 이사나는 아무래도 따로 생각해 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한결 안색이 어두워진 녀석은 한숨과 함께 나와 기사들을 차례대로 둘러보더니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황성에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이미 나는 백성들로부터 신임을 잃었다. 절망과 한탄에만 빠져 백성을 돌보지 않는 나태한 황제로 찍힌 지 오래야. 무력으로 황성을 쟁취할 순 있어도, 그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쉽지 않을 거다. "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이사나는 황제가 되고서도 국정에 전혀 관여를 하지 않았다. 황제의 일 따윈 오로지 섭정왕인 그의 숙부에게만 맡겨 둔 채, 모든 일에 방관하는 입장을 취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겨우 1달 밖에 안 되는 짧은 치리기간이었음에도, 사람들의 기대를 끊어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특히 그와 달리 현명한 섭정을 펼쳐가는 유카르테 대공의 활약으로, 이사나의 입지는 나날이 약해져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도망치듯 쫓겨나고도, 당당히 궁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현재의 처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는 말에 기사들은 비통한 표정이 되어 소리치기 시작했다.
" 크흑.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 그때 이사나님은 선황폐하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너무 깊어, 국정에 전념하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 어느 누가 아비를 잃고 멀쩡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 그들도 폐하의 진심을 알아줄 것입니다!"
" 그건 우리만의 생각일지도 몰라. 실제로 나는 백성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이곳 솔트레테가 타국에서 어떤 영향을 발휘하고 있는 지 조차 알지 못하는 미숙한 황제다. 아마 이대로 황성에 돌아가게 되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없을 거야. 그건 내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
" 폐하…. "
불안한 표정으로 마주보던 사람들은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로 어색한 시선만을 교환하고 있었다. 이럴 때 이프리트나 엘뤼엔이라면 가차 없이 '그럼 황제자리 때려치우면 될 거 아냐! ' 라고 말하겠지? 속으로 쿡쿡 웃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바닥만 노려보고 있는 이사나에게 입을 열었다.
" 그렇게 깨달았으면 된 거 아니야? "
" 응? "
" 방금 그랬잖아? 백성이 어떤 삶을 사는지, 네가 다스리는 나라가 타국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 알지 못한다고. 황성으로 돌아가게 되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을 거라고 말이야. 그럼 이제부터는 알아갈 수 있다는 소리잖아? 평생 모르고 있는 것 보다는 훨씬 낫다고 보는데? "
" 하, 하지만…. "
" 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해. 알아가고 싶다는 '의지'만 있으면 넌 분명히 잘 해갈 수 있을 거야. 백성들의 삶이라는 게 별거 있나? 황제인 너보다 조금 못 먹고, 조금 못 입을 뿐일걸? 돈 많다고 으스대지만 않으면 세상사는 대충 사이좋게 돌아간다 이 말이지. 아, 여기는 한국과 달라서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
" 한국? "
" 그런 게 있어. "
대충 얼버무렸지만, 그다지 궁금했던 건 아니었는지, 이사나는 금새 다른 생각으로 진지한 표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했던 말의 의미를 되씹어 보는 모양인 듯. 점점 확고해지는 표정이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내가 말하고서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저 녀석이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째 괜히 멀쩡한 애한테 나쁜 바람이라도 넣은 것 같다. 그냥 해본소리라고 둘러 댈까나?
하지만 내가 막 '농담이야~'라고 변명하려는 순간, 완전히 결심을 굳혔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사나로 인해 그 말은 목구멍까지만 차오른 채 다시 안으로 넘어가고야 말았다.
" 카웰 형님을 찾아뵙겠어. "
" 엉? "
갑자기 웬 난데없는 형님? 그 갑작스런 발언에 놀란 것은 나만이 아니었는지, 주변에 있던 기사들도 하나같이 얼빠진 얼굴이 되어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그나마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알렉이었다.
" 예에? 카웰님이라면…폐하의 사촌이신?? "
" 외가 쪽의 형제다. 외조부님으로부터 작위를 하사받고, 현재는 후작이 되었다고 했어. 대관식을 치른 이후, 여러 가지 일로 만나지 못했었는데…아무래도 그를 만나봐야 할 것 같다. "
" 하지만, 폐하? 황성은 어쩌시려고요? 카웰 후작령은 수도와 정반대의 방향에 있지 않습니까? 이러는 사이에도 대공은 세력을 더욱 확장시킬 겁니다. "
" 알고 있어. 하지만 이정도의 인원으로 황성을 찾아가는 것은 도리어 반격당할 우려가 있다. 이미 숙부는 우리를 반역자로 간주했어. 무사히 귀환하기는 힘들 거야. "
" 하지만 우리에겐 엘퀴네스님이! "
필사적으로 외치는 소리에 이사나의 가라앉은 눈동자가 약간 흔들렸다. 하지만 금방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다잡은 녀석은, 술렁이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분명, 엘퀴네스와의 계약은 내 인생에 다시없을만한 행운이며, 기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의지할 생각만은 없어. 미안해 엘퀴네스. 모처럼 계약해줬는데… 난 아무래도 내 스스로의 능력으로 일어서고 싶어. "
" …어떻게 할 생각인데? "
사실 말만 정령왕이지, 내가 제대로 할줄 아는 거라곤 물을 만드는 것과, 상처를 치료하는 능력이 전부였다. 그런 내가 도와달라고 부탁한다고 뭘 해줄 수 있겠는가? 내심 뜨끔한 심정으로 어설프게 묻자, 이사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카웰 후작은 백성들로부터 선망이 두터운 자야. 또한, 현재의 황실에서 얼마 안 되는 내 편이기도 하지. 그의 군대를 빌리고 싶어. 개인의 사병이라고 해도, 2만에 다다르는 숫자니까 숙부와 맞서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해. "
" 으음…. "
" 이건 내 자신을 위한 시험이야. 카웰을 만나러 가는 길은 여러 가지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겠지. 그 결과가, 나보단 숙부가 황제가 되는 편이 백성에게 이롭다는 판단이 내려진다면, 나는 기꺼이 그 자리를 양보할 생각이다. "
" 헉, 폐하!! "
" !! 무슨~!! "
경악한 기사들이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지만, 이사나의 결심은 철회될 생각이 없어보였다. 사실 그 결정이 누구보다 억울했을 것은 바로 이사나 자신일 텐데. 원인이야 어찌됐든, 녀석의 아버지는 숙부가 몸담고 있던 종교의 삼판을 받아 죽었고, 그 자신은 반역이란 모함을 받으며 쫓기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백성을 위해 선뜻 황제의 자리를 양보하겠다는 결심을 하다니… 아무리 봐도 내 나이 또래가 가질 생각이 아니었다.
과연 황제는 황제라는 건가.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내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지. 네 마음대로 해, 이사나. 어차피 나로선 도와줄래도 그다지 쓸데가 없었을 거야. "
" 그, 그렇지 않아! 물의 정령왕의 위대함을 모르는 이는 이곳에 아무도 없어. 너의 능력을 무시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게 아니야, 난 그저…. "
" 알아. 요컨대 인간들의 일은 인간들끼리 해결하고 싶다, 이거잖아? 나도 솔직히 골치 아픈 싸움에 끼어드는 건 내키지 않았으니까 상관없어. 아, 그래도… "
" ……? "
내 도움이 필요 없다는 것에 불쾌해 할줄 알았던지, 잔뜩 긴장하고 있던 녀석은 내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대꾸하자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내가 금새 다른 말을 할 것처럼 말끝을 흐리자, 다시 굳어진 얼굴이 되어 입술을 꽉 앙다물었다. 아마도 내가 당장이라도 계약을 해지하자고 말할 것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미안해서 어쩌나? 난 이왕에 잡은 유희의 기회를 그렇게 쉽게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거덩? 대답하는 내 얼굴은 스스로가 의식하기에도 무척 즐거운 표정이 되어있었다.
" 그냥 따라다니는 것은 상관없지? 이왕에 계약한거니까 말이야. 썩혀버리면 아깝잖아? "
" ……!! "
" 그래, 이렇게 된 거 네 일행 중에 한사람으로 끼워 넣어주라. 마침 나도 여행 다녀보고 싶었거든. 그 정도면 괜찮지? "
" 아…무, 물론이야! 당연하지!! 고마워, 엘퀴네스!! 정말 고마워! "
함지막하게 벌어지는 입을 보니 어째 내가 엄청나게 착한 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일행으로 쭐래쭐래 따라다니겠다는 건데, 뭐가 저리 반가운걸까? 불안해하던 처음과 달리, 어느새 흐뭇한 시선이 되어 '폐하의 결정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기사들을 둘러보며, 나는 어쩐지 마음속 깊은 곳에 따스한 기운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 역시 소환에 응하길 잘 한 것 같네. '
드래곤과 했다면, 이런 극적인 느낌도, 또래의 친구라는 느낌도 받지 못했을지 모른다. 불쾌했던 첫 인상은 어느새 스멀스멀 녹아내려,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아내기 힘들 정도가 되어 있었다.
'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
기뻐하는 이사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모처럼 기분이 좋은 하루였다.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78 회]
날 짜 200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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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재앙과 비운의 황제
" 아구아구… 꿀꺽, 크아~ 이제야 살 것 같다! "
" 우물우물 쩝쩝, 닥치고 더 먹기나 해! 이런 기회는 다시없다고! "
" 어이! 그건 내가 찍어둔 거야! 손대지 마! "
" 지랄! 먼저 집은 게 임자지 어디서 생깡이야? 한번 죽어 볼 테냐? "
엄청난 폭언을 날리며 게걸스럽게 음식을 입에 집어넣는 사람들은, 바로 얼마 전부터 나의 일행이 된- 이사나의 기사들이었다. 며칠을 굶었으니 허겁지겁 먹는 건 그렇다 쳐도.. 저 험한 말투는 정말 적응이 안되는구만. 어떻게 바꿀 수 없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덮어쓰고 있던 후드를 만지작거렸다. 제발 나의 여행에 대한 환상을 깨트리지 말란 말이다!
" 싸우지 말고 천천히 먹어요. 음식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
" 아, 저도 그러고 싶은데 저 개쉐이가 성질을 건드리잖습니까? 저 딴 자식은 인간 말종이라 언제고 한번 두들겨 놔야 한다고요. "
" 뭐가 어째? 이 자식이 죽고 싶어 발악을 하는구만! 오냐~ 어디 한번 해보자! 덤벼! "
삼류 건달 같은 대사를 날리며 일어선 남자는,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투박한 검을 꺼내들었다. 그러자 식당 안은 피해를 입지 않으려는 다른 손님들의 비명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꺄악! "
어둡고 좁은 가게였지만 한창 점심때였던 지라, 안에는 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의 소동이 반가울 리 없을 터. 사색이 된 주인은 냉큼 달려와 곤란한 얼굴로 말리기 시작했다.
" 다른 손님들께 피해가 갑니다. 제발 진정하십시오. "
" 시끄러-주인장! 내가 누군지 알아? 나는 말이야! 이래봬도~ 이 검 하나로 대륙을 떠도는 방랑무사란 말이시다! "
" 흥~ 그래봤자 미천한 삼류용병밖에 더 되냐? 오늘 만난 의뢰주 만 아니었어도 당장에 굶어 죽었을 판국이었으면서 허풍은~ "
" 이 자식이!! "
아아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부채질된 꼴인가? 결국 그들을 제재하는 것은 졸지에 '의뢰 주'로 찍혀버린 내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마에 작은 혈관마크를 그리며 짜증스러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 자꾸 이런 식이면 의뢰고 뭐고 다 그만 둬버릴 거예요. 이래도 멈추지 않을 건가요? "
" …쳇- 너 말이야. 오늘 이분 때문에 산 줄 알아! 원 재수가 없으려니! "
" 누가 할 소리! 닥치고 밥이나 마저 처먹어! "
과연 내 한마디의 타격이 컸는지, 금새 얌전해진 그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사이좋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식당의 주인은 내게 감사의 눈길을 보내며 친절한 목소리를 건네 왔다.
" 저분들을 진정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란이 커지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
" 아, 미안해요. 이분들은 제가 고용한 자유 용병인데, 워낙에 거치시다보니… 곤란을 끼쳐드렸네요. "
후드로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지만, 목소리로 내가 아직 어린 것임을 눈치 챈 식당주인은 한결 정중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이어린 소년이 용병을 고용했다는 대목에서, 아마 여느 부자 집 도령이라고 생각해 버린 모양이었다.
" 괜찮습니다. 이곳엔 용병이 자주 오거든요. 이런 종류의 소란은 늘 익숙하답니다. 필요하신 것은…? "
" 으음. 그렇다면 약 5명의 인원이 먹을 1주일분의 식량을 준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부터 여행을 갈 예정이라 서요. "
" 물론입니다. 그 밖에 따로 더 필요하신 것은? "
" 그거면 충분해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
반갑게 대답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주인이 총총히 사라지자, 나는 그제 서야 숨겨뒀던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러자 이제까지 한껏 껄렁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던 두 명의 남자들도 덩달아 한숨을 내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이번이 마지막이지요? 엘퀴네스님. 휴우. 정말 못해먹겠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체면도 던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 하는 심정이라니... "
" 나도 동감.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니까요. "
" 쿡쿡. 다들 잘 하시던데, 뭘 그래요? 저번 타임의 알렉과 페리스보다 훨씬 그럴 듯 했다고요. "
" 그, 그게 정말입니까? 헤헤. "
슬쩍 건네는 칭찬에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기쁜 빛을 숨기지 못했다. 역시 순진하달까. 아까전의 험악한 말을 골라하던 남자들과는 도저히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주위를 둘러본 뒤, 아무도 우리의 대화를 신경 쓰고 있는 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이것으로 대충 식량은 전부 확보한 것 같은데요. 이런 식으로 4번 정도 식당을 돌았으니까.. 적어도 한달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예요. 모자라면 중간에 다른 마을이라도 들려서 구해야 할 테지만…. "
" 하지만 정말 현명하신 방법이었습니다. 한꺼번에 대량의 식량을 구입하는 무리가 있으면 의심의 눈을 받게 될 여지가 있으니, 인원을 나눠 가장 한적한 곳만 골라 구입한 것 말입니다. "
" 그것도 지금처럼 용병의 무리로 속여, 귀족이라는 의심을 받지 않게 했다는 점도요. 정말 대단한 판단력이셨습니다. "
그랬다. 내가 이사나의 일행으로 합류하기로 결정된 날. 그날로 카웰 후작령을 향해 떠나야 했던 우리에게는 한 가지 변고가 존재했으니- 그것은 바로 이들이 벌써 며칠째 굶고 있다는 것과, 앞으로도 먹을 식량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정령인 나야 먹지 않아도 살수 있으니 상관이 없다지만, 다른 이들은 엄연히 생식기관이 있는 인간이 아니었던가.
때는 초겨울. 산속이라 해도 그 흔한 풀뿌리 하나 제대로 캐어먹을 만한 계절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추위와 배고픔에 허덕이는 이들에게 무리한 강행을 요구할 수 없었던 이사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근처의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도 들릴 생각을 했지만, 그것 역시 또 하나의 문제점이 가로막고 있었으니 그것은…
" 먹을 거 살돈은 있어? "
" ……. "
" 설마 이 근처의 마을엔 너희들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져 있지 않다는 건 아니겠지? 한꺼번에 수상한 무리들이 우르르 마을을 돌아다니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
" ……. "
이상하다 뿐이겠는가? 나 같으면 당장이라도 경찰에 달려가 신고하고 만다! 아무튼 당연하다면 당연한점에서 허를 찔린 무리들은 이후로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도 못한 채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 급하게 도망쳐 나온 탓에 귀중품이라고는 하나도 들고 있지 않은 상태였고, 때문에 식량으로 바꿀만한 금전적인 가치를 가진 무엇 하나 지닌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앞뒤 생각 없이 무작정 도망만 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나사 하나가 빠져있던 상태였음이 틀림없었다.
결국 심한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일행을 구제해준 것은 나였다. 나는 이전에 에바스 에덴에서 채집(?)한바 있던 보석 꽃잎들을 꺼내어 이사나의 눈앞에 살짝 흔들어 보였다. 그리곤 쩌억-하며 입만 벌리는 녀석을 향해 생긋 웃으며 말했다.
" 나중에 갚아라. "
" 에, 엘퀴네스…. "
" 식량을 사는 것은 일정한 시간차를 두고 인원을 분산시켜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옷도 사야겠네. 이사나. 네가 보기엔 이 꽃…아니, 보석을 돈으로 바꾸면 얼마나 될 것 같아? "
하지만 이사나는 감격해 하느라 내 말에 차마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자 녀석을 대신해서 옆에 있던 정령사 페리스가 냉큼 끼어들더니, 보석을 요리조리 살피기 시작했다.
" 제가 잠시 봐도 괜찮겠습니까? 꽤 큰 캐럿의 다이아 같은데. 호오…그러고 보니 꽃잎 모양이군요! 이렇게 아름다운 세공은 처음 봐요. 정말 훌륭한 결정입니다. 이정도의 커트면, 못 받아도 60골드는 받지 않을까요? "
" 60골드라고 해도… 얼마의 가치인지 모르겠는데. 으음, 그 정도면 한 달 치 식량을 살수 있을까요? "
" 사다 뿐입니까? 식량은 물론,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옷과 말까지 구비하고도 남는 돈입니다. 아마 도시 쪽으로 가면 경매에 붙여 100골드까지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
오오! 백합 꽃잎 한 장에 그런 어마어마한 가치가? 하긴, 다이아몬드는 지구에 있었을 때도 천문학적인 금액을 넘나드는 보석이었다. 이곳이라고 금전적인 가치가 다를 것은 없겠지. 루비로 된 장미나, 사파이어로 된 풀잎을 보여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꽃잎을 붙들고 서로 눈을 붉히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작게 키득거렸다. 꽃잎을 채집하며 황홀해 하던 나를 보고 쯧쯧 거리던 이프리트의 심정이 어느 정도 공감이 되는 기분이었달 까?
이후 나는 물정에 밝은 듯 보이는 페리스만을 동행한 채 그날로 하산을 하여 가까운 마을의 보석상점을 찾기로 결정지었다. 그리하여 도착한 보석상에서 그는 엄청난 언변을 사용하여 주인을 홀린 뒤, 60골드의 가치였던 꽃잎을 80골드 이상까지 받아내어 나의 존경스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알고 보니 페리스는 평민 출신으로, 정령사라는 능력이 눈에 띄어 귀족이 된 케이스였기 때문에, 날 때부터 귀족이었던 다른 이들에 비해 물건을 사고파는 것이나 흥정을 하는 것에 익숙했었던 것이다. 제법 묵직한 돈 자루를 들고 흥얼거리는 그를 보며 나는 문득 궁금하단 표정으로 물었다.
" 특별한 능력이 있으면 귀족의 작위가 수여 되나 봐요? "
" 음… 모든 나라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솔트레테 제국이 그러 면에서 관대한 편이지요. 인재의 양성에 힘을 쏟는 취지랄까요? 하지만, 정령사인 경우는 그 수가 워낙 희박하기 때문에, 저 같은 하급정령사라 할지라도 어느 나라에서나 귀족의 작위를 내려주고 있습니다. 물론, 영지는 없는 이름뿐인 귀족이지만요. "
" 흐음. 그렇다 해도 꽤 대단한데요? 10년 재앙 때문에 그동안 다른 정령왕들도 스스로의 힘을 최대한 줄이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런 상황에서 정령과 계약할 정도의 친화력이라면, 페리스는 앞으로 더욱 더 발전할 거예요. "
" 호오? 그랬습니까? 정령왕들께서 힘을 줄이고 있었다고요? 그래서 요 근래 정령사의 배출이 적었던 거군요. "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오는 얼굴에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유야 어찌됐든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가 태어나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니까. 하지만 그러한 속사정을 모르는 페리스는 그저 순수하게 정령왕들의 노고를 치하했을 뿐이었다.
" 정말 고생들이 많으셨겠군요. 자연계의 평화를 유지하려면 균형을 맞춰야 하니, 물이 극도로 없는 상태에선 다른 분들의 능력역시 줄일 수밖에 없었겠지요. 새삼 정령왕들께 감사한 마음이 생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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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홈에 올려진 것과는 약간씩 다른 부분이 있을겁니다^^;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79 회]
날 짜 200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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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작수 2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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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재앙과 비운의 황제
" 하하. 나한테 뭐라고 하지는 않는 거예요? 내가 의도한건 아니었지만, 가뭄이 든 건 내 관할내의 일이었다고요. "
" 하지만… 엘퀴네스님께도 피치 못한 사정이 있으셨겠지요. 저는 한낮 미천한 인간일 뿐. 정령왕께서 하시는 일에 대항할 마음을 먹을 만큼 어리석은 인물이 못됩니다. 저는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엘퀴네스님을 직접 뵙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영광이라고 생각하니까요. "
그렇게 말하며 웃는 페리스의 얼굴에는 정말 순수한 기쁨 외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새삼 이사나 옆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구나…라고 생각하며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그나저나… 옷을 사야겠죠? 지금의 차림으로 돌아다니기에는 문제가 많으니…. "
그나마 페리스는 깔끔한 편이었지만, 넝마나 다름없던 기사들의 옷차림을 떠올리며 나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자 페리스 역시 공감하고 있었다는 듯,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내 팔을 잡아 길을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걱정하는 부분은 나와는 다른 것이었던 모양이다.
" 물론입니다! 빨리 옷을 사야겠어요! 역시 후드가 좋겠지요? 얼굴을 가리기엔 그것보다 제격인 게 없을 겁니다. "
" 후드? 얼굴을 가리는 건 상관없지만… 그 많은 인원들이 다 모자를 뒤엎고 다니면 수상해 보이지 않을까요? "
" 아니, 엘퀴네스님 말입니다. "
" …에? "
갑자기 내가 왜? 당황한 나는 얼른 내 옷차림을 살펴봤지만, 지나다니는 마을사람들과 비교해서 딱히 이상한 점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물론 옆의 페리스와 비교해서 상당히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기야 했지만…그게 큰 문제가 된다는 걸까?
그러고 보니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나를 힐끔힐끔 바라 보는 것 같았다. 그저 외부인임이 한눈에 티 나는 사람들이 있어서 바라보는 줄 알았더니, 내 차림이 이상했던 거였나? 나는 멋쩍은 얼굴로 페리스를 바라보며 짧게 사과했다.
" 미안해요. 이런 차림이 눈에 뜨일 거란 생각을 못했네요. 정령계에서는 항상 당연했던 거라…. "
" 예에? 옷차림이 뭐가요? 아무렇지 않은데요? "
" 엥? 그런데 왜 후드를? "
" 그거야 엘퀴네스님이 너무 미인이시라 그런 거죠. 벌써부터 몇 놈들이 흑심을 품고 바라보고 있잖습니까? 쓸데없는 사고는 미연에 방지해야지요. "
" 하하하하…"
미, 미인? 그렇지 않아도 '여성 형'이란 말에 충격 받은 것이 아직 다 가시지도 않았는데, 이런 곳에서 또 타격을 받을 줄이야! 할말을 잃는 나는 그저 허무한 웃음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잠자코 그의 의도대로 후드가 달린 옷차림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내 자체가 물로 되어있다 보니, 겉모습을-기본적인 외모는 바뀌지 않지만, 옷차림이나 형체를 바꾸는 건 가능하다- 형성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매우 신기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페리스는 금새 기쁜 얼굴로 경비를 절감했다며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쩐지 숨겨둔 살림꾼이 등장한 것 같아 소름이…쿨럭.
그 후, 근처의 옷 상점에 들려 기사들이 입을 여행복과 평상복, 외투와 신발 등을 고른 우리는, 그제 서야 여유로운 기분으로 마을의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었다. 마을은 제국의 변방이라고 해서 아주 낙후된 시골마을을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제법 규모도 컸고, 상점과 건물들의 분배도 깔끔하게 되어있는 편이었다.
영주가 사는 성과 그것을 지키는 경비대들도 있었고, 중앙공터에는 사람들이 나와 어울릴만한 커다란 광장도 만들어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페리스는 어지간한 소도시 급의 마을이라면서 짧게 감탄하기도 했다.
광장 한쪽에 마련된 벽보에는 한 장의 그림과 함께 제시된 금액이 기제 되어 있었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것을 살피던 나는 그려진 사람의 얼굴이 내가 아는 누군가와 아주 흡사하게 닮았다는 것을 떠올리곤 대경실색한 표정으로 안색을 굳혔다.
[ 이사나 란느 솔트 - +죄명+ 황제라는 지위를 망각하고 제국의 중대사항에 관련된 기밀을 타국에 유출한 혐의- 17세 전후로 보이는 짧은 금발. 하얀 피부에 단정한 이목구비를 지녔음. 신고하는 자에게는 포상금을 내리겠음. (1만 골드.) 책임자- 교황 하이오네.]
" 헉… 뭐야 이건? "
황제한테 현상금 따위를 매기다니! 뭐 이런 나라가 다 있어? 경악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놀라고 있자니,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페리스가 그것을 힐끗 보고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 결국 여기까지 마신교의 힘이 미쳤군요. 어쩔 수 없죠. 솔트레테는 타국과 달리 황권과 신권이 분리되어 있는 곳입니다. 어둠의 신전 교황의 힘이 황제의 권력과 비례하지요. 하지만 이런 모함까지 하며 황제에게 반기를 드는 자들이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되 버렸는지. "
" 으음…. "
" 아무튼 이런 식이라면 빨리 움직여야겠습니다. 대공은 이사나님이 사촌이신 카웰님에게 찾아갈 것을 예상하고 있을 겁니다. 지금쯤 그곳에 대공의 기사들이 지천에 깔려있을 지도 몰라요. 서두르시죠, 엘퀴네스님. "
" 알았어요. "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나는 페리스와 함께 다시 이사나들이 있는 산으로 돌아온 후, 간단하게 그들을 씻기고-나이아스들한테 시켰다- 준비해온 옷을 입힌 뒤, 조를 짜서 인원을 나누었다. 그리하여 총 4차례, 자유용병과 그들을 고용한 의뢰주의 모습을 연기하며 마을에 들러 식량을 사 모으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눈속임을 하기 위해 일정한 시간 차이를 두고 이루어졌고, 때문에 모든 일이 끝났을 때는 밤 깊은 어둠이 지면에 내려앉아 있는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출발을 내일 새벽으로 미룬 우리는 한자리에 모여앉아 앞으로의 일정과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의견을 제시한건, 차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알렉이었다.
" 지금의 인원 전부가 함께 행동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카웰님이 계시는 영지까지 가는 길은 총 3개의 도시를 거쳐야 하는데, 10명이 넘는 인원은 검문을 할 때 눈에 뜨일 겁니다. 적당히 인원을 갈라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게 좋을 듯 합니다. "
" 하지만 인원을 나눈다고 해서 별도리가 있나? 이미 수배되어있는 상태라고. 몇 명이든 검문에 걸리면 들킬게 틀림없어. "
" 우리들 중에 몇 명은 가족을 인질로 붙들려서 협박을 당하고 있는 처지다. 어차피 들켜서 죽을 거라면, 함께 움직이는 게 더 나아. "
" 그렇지 않아. 우리는 어떻게 되더라도 폐하는 무사해야 할 것 아닌가? 폐하. 저희들은 이곳에 남겨두고, 엘퀴네스님과 함께 떠나십시오. "
" 무, 무슨 소리를?? "
알렉의 발언에 대한 파장은 삽시간에 주변을 둘러싼 모든 일행들에게 전염되었다.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사나와 달리, 이상하리만치 담담한 표정의 기사들을 보며 나는 그들이 처음부터 이 말을 하기 위해 모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까지의 대화는 그저 이 말을 유도해 내기 위한 복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 저희 전부와 함께 이동하시면 그만큼 대공의 기사들에게 쉽게 뜨일 겁니다. 저희는 폐하를 지키기 위한 근위기사단. 폐하를 위험에 노출시키는 짓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행이도 수배를 내린 전단에는 저희들의 대한 것은 자세히 기제 되어있지 않으니, 당분간은 이 마을에서 숨어 지내도 무리가 없을 겁니다. 반드시 카웰님과 함께 수도로 돌아오십시오. 저희 역시 수도에서 폐하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불허한다! 그럴 순 없어! 이제껏 고생을 같이한…나를 위해 가족도 목숨도 버린 그대들을 버리라는 거냐? "
" 버리는 게 아닙니다, 폐하! 폐하께선 다시 황성으로 돌아오시지 않습니까? 저희들은 그것을 기다리고 있겠다는 것입니다. 수도에 가게 되면 현재 귀족들 중, 대공과 이사나님 편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는 자들을 설득하겠습니다. 반드시 그리할 것이니 저희들을 믿어주십시오. "
" 불허한다! 불허해!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럴 수 없다. 난, 나는-! "
" 폐하! 제발 현명하신 판단을…. "
" 통촉해 주십시오, 폐하. "
" 폐하…. "
으으음… 아무래도 내가 끼어들면 안 되는 상황 같지? 격한 얼굴로 계속해서 고개를 가로젓는 이사나와 그것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연신 '폐하'라고 외치는 기사들을 보며 나는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아니, 소름이 끼친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많은 남자들이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소년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그를 지키기 위해 위험을 떠안는 모습은, 분명 한국이라는 민주화에 익숙해져 있던 나로서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참을 밀고 당기던 지루한 감정싸움은, 결국 이사나의 패배로 끝이 나고 말았다. 녀석에겐 기사들의 확고한 결단을 막을 용기가 없었고, 또한… 그 역시도 이 많은 인원을 한꺼번에 데리고 이동하는 것 에 따르는 위험부담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이사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 미안하다. 이렇게 약한 황제라…이렇게 모자란 주군이라…그대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해서 미안하다…. "
"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주군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기사는 저희들의 꿈 입니다, 폐하. 저희들의 염려는 하지 마시고, 부디 무사히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십시오! 저희들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
" 그렇습니다, 폐하! "
눈시울이 붉어진 이사나는 연달아 '염려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가장 자신의 앞에 있던 알렉을 와락 끌어안은 녀석은 크게 흐느끼며 소리쳤다.
" 흐윽, 흑…약속한다. 반드시…반드시 숙부를 이길 기사들을 데리고 돌아올 테니까…그리하여, 반드시 황성을 되찾을 테니까. 너희들도 약속해라. 절대로 죽지 않겠다고. 돌아오는 나를 환송하는 무리에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
" 크흑. 물론입니다, 이사나님….부디…부디…다시 뵈올 날까지 강녕하십시오. 이 알렉! 폐하께서 돌아오시기만을 이들과 함께 수도에서 기다리고 있겠나이다. "
" 흐윽…흑…으흐흐흑… "
주변은 어느새 울음을 삼키는 사람들도 가득 차 버리고 말았다. 얼싸안은 알렉과 이사나의 어깨를 서로 감싸며 눈물을 터뜨린 기사들은, 한참동안 서로의 안전과 무사함을 당부하며 하늘에 있는 신에게 빌고 또 빌고 있었다. 간간히 내게 보내는 눈빛에서 '이사나를 잘 부탁 한다'는 것을 읽은 나는 걱정 말라는 뜻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것만으로 그들은 안심이 되었는지 한결 감정을 가라앉힌 눈으로 이사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 엘퀴네스님이 함께 하시니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폐하. 이제부터 설득시킬 중립귀족들도 엘퀴네스님이 폐하와 함께 하신단걸 아시면 분명 흔쾌히 손을 들어주실 겁니다. "
그러나 이사나는 그것에 만족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흔든 녀석은 한사람 한사람의 얼굴을 마주보며 여전히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어. 그대들은 무사하기만 하면 된다. 나를 위해 더 이상 희생하지 말아.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도망치는 약은 모습을 보여도 좋다. 내가, 너희들의 주군이 그것을 허락한다. "
" 크흑.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주군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
" 주군의 명령을 따르겠나이다. "
그날 저녁은 밤새도록 기사들과 이사나의 못 다한 이야기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마치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기라도 하는 마냥, 지난날의 황성에서 있었던 일이며, 자신들의 가족들 얘기를 꺼내는 사람들의 얼굴은, 슬픔보다는 안도와 서로에 대한 위로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그때 그러셨지요? 폐하? 하루에도 몇 십, 몇 백번씩 검을 휘두르시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었는지. 분명 위대한 검사가 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
" 지금은 아니라는 거야? "
" 쿡쿡. 그럴 리가요.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강하고 멋지신 걸요. 폐하께서는 앞으로도 더욱 굳건한 황제가 되실 겁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 이 백성이 폐하를 찬양하고 경배하게 될 겁니다. "
다정하게 오가는 말임에도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내 착각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만남을 기약하는 이별임에도 이렇게 가슴이 아프다면…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과의 이별은 얼마나 아프게 될까?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아릿한 통증에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시큐엘이 위로하듯 얼굴을 내게 부벼오자 나는 그것을 쓰다듬어 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 이 정도의 이별은 앞으로 아무것도 아닐지도 몰라. 나중엔… 이런 장면을 보고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도록 익숙해져 버릴까? 그만큼 수많은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게 될까? 아무래도..내키지 않아, 시큐엘. 하지만…이별이 두렵다고 해서 만남을 거부한다면… 나는 세계 최고의 바보 정령왕일거야. 그렇지? "
- 아무도 엘퀴네스님을 바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책망하지 않을 겁니다.
" 쿡쿡쿡…그럴까? 하지만. 나 자신은 분명히 그렇게 느낄 거야. 그리고 나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게 될 테니까…. 하아, 어쩌면 정령왕이란 거…적성에 안 맞을 지도 모르겠는 걸? "
하지만 인생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더 많은 법. 정령왕으로 태어나, 유희를 즐기겠다고 작정한 이상은, 이 모든 것은 내가 감수해야만 할 문제였다.
[받아들이도록 해.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지훈에게는 의지할 존재가 필요해. 그것이 우리들 다른 정령왕들이 될 수는 없을 거야. 우리는 어디까지나 동료, 혹은 친구로서 서로의 갈 길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라고 하면 언제나 한 자리에서 너를 지켜봐 준다는 거니까… 외로움을 잘 타는 지훈에겐 가장 커다란 의지가 될 거야. ]
언젠가 트로웰이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였을까? 유난히 엘뤼엔이 보고 싶어진 밤이었다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80 회]
날 짜 200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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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재앙과 비운의 황제
다음날 아침, 나는 여행을 위해 모아둔 식량 중, 일부를 제외한 전부를 기사들에게 넘겨주었다. 나에겐 아직도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보석이 넉넉했기 때문에, 모자라면 언제든지 다시 살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중 금전관리가 가장 확실해 보이는 페리스에게 보석을 팔고 남았던 돈의 전부까지 넘겨준 나는 감격으로 눈물을 글썽거리는 그들 하나하나를 마주보며 ' 조심하라 ' 고 신신당부를 거듭했다.
그들은 나와 이사나가 떠나고 나서도 당분간은 이대로 산에 남아 가끔씩 마을을 내려가며 제국의 동태를 살펴볼 작정이라지만, 그 사이에 정체가 발각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 때문에 이사나의 얼굴은 이미 한참이나 우울해져 있는 상태였다.
" 저희들의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수배전단에는 저희들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기제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으니까요. 엘퀴네스님이 주신 경비도 넉넉하니 수도까지 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
" 흐음? 인원이 많은데 괜찮겠어요? 페리스, 돈이 얼마나 되죠? "
완전히 안심이 되지 않는 마음에 나는 서둘러 재정담당(…)인 페리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는 염려 말라는 듯이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품안에서 큼직한 주머니를 꺼내보였다.
" 저희들의 옷과 식량, 몇 가지 무기를 구비하고도 30골드 이상이 남았습니다. 이 정도면 헤리카(솔트레테 제국 수도 이름이다)에 도착할 때까지 당할 여러 가지 변고를 예상하더라도 넉넉히 쓰고도 충분히 넘칠 양입니다. "
" 으음. 그래요? 그건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마실 물은… "
" 아, 그것도 걱정 마십시오. 이 정도 금액이면 일행이 돌아가며 목욕할 양의 물도 살수 있으니까요. "
" 아, 그래요… 가 아니라, 네에? "
아무렇지 않게 대꾸한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인 나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 되물어 버리고 말았다. 바, 방금 뭐라고? 물을 산다고 한거야, 지금?
' 아니. 한국처럼 물이 오염 되서 아무대서나 떠먹지 못하는 것도 아니면서 물을 왜 산다는 거지? 물을 담을 통을 산다는 걸 잘못 말하는 거 아니야? "
하지만 기가 막히게도 페리스가 했던 말은 사실이었다. 이후 이들이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일정기간 필요한 물을 구입해야 했던 것이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놀라는 나를 보며 알렉은 차분한 설명을 곁들였다.
" 10년 재앙이후로 물이 귀하게 되어 버렸거든요. 그래서 일정 양의 물을 한 통에 담아 판매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의한 수익은 그 지방의 영주에게 돌아가 재앙의 해결책을 마련하는 경비에 포함되지요. 대부분 비구름을 불러올 마법사를 초빙하는 데에 쓰입니다만…. "
" 저기, 잠깐만요. 지금은 자연이 완전히 회복 계에 돌입했을 텐데요? 그런데 아직도 물을 사고판다는 건가요? "
가뭄이 들었을 때야 물이 부족하니 사고팔았다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엄연히 재앙이 끝난 시기가 아니던가. 더구나 요 몇 달간 4대 정령왕의 필사적인 수고로 인해 아크아돈의 자연은 완전히 재앙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가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가뭄시기에 실시한 정책을 유지하다니… 대체 뭐하자는 거지?
어이없는 표정으로 묻는 나에게 페리스는 씁쓸한 어조로 대답했다.
" 제 배를 채우자는 몇몇 파렴치한 귀족들의 행패입니다. 힘없는 평민들은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요. 그렇게 판매하는 물의 값이 너무 비싸서… 한 양동이당 10실링이나 한다고 하더군요.(평민 노동자 하루 품삯이 50실링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끔씩 내리는 빗물을 받아다가 다음 비가 올 때까지 생활을 연명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
맙소사. 대체 이놈의 제국 황제는 뭘 하고 있는… 아, 맞다 이사나가 황제였지, 참. 정말로 기가 턱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귀족과 평민의 신분차이가 크다지만, 먹는 물…그것도 자기들이 만든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치사하게 나올 줄이야.
그래도 설마하니 이들이 산에 들어와 있는 며칠사이에 상황이 호전이 되지 않았을까 슬그머니 기대했던 나는, 마을 근처에 흐르는 시내에 떡하니 경비대가 버티고 서서 물을 떠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뒤따라왔던 페리스가 냉큼 한마디 덧붙였다.
" 참고로 엘퀴네스님이 소환되셨던 산속의 연못은 저희들이 이곳에 와서 발견한 것입니다. 요 몇 달 사이에 내린 폭우로 만들어진 것인지, 아직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았더군요. 참으로 운이 좋았지요? "
하지만 난 그의 말을 귀담아 들어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때 마침 갓난아이를 데리고 온 여자 하나가 경비대에게 매달려 하소연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 나으리. 제발 부탁드립니다. 남편은 죽고 이 어린 것 하나 키우며 혼자 살고 있는 여자가 무슨 힘으로 하루에 10실링이나 하는 금액을 마련하겠습니까요. 모쪼록 자비를 베푸셔서 물 좀 마시게 해주세요. 한 모금이라도 좋습니다. 벌써 5일이나 한모금의 물도 마시지 못했습니다요. 이 아이에게 만이라도 제발… "
검댕이 잔뜩 묻은 바래진 금발머리와 누더기 같은 옷차림.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아이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컥컥거리고 있었다. 여자가 비쩍 마른 손으로 경비병의 바지자락을 붙잡자, 남자는 똥이라도 밟은 것처럼 인상을 화악 찡그리더니, 거친 동작으로 여인의 배를 걷어찼다.
퍼억-
" 아악! "
" 빌어먹을. 어디서 거지 년이 와서 행패야? 나설 때 못 나설 때를 가릴 줄도 알아야 할 거 아니야? 감히 추렛 기사단의 일원인 나를 우습게 보는 거냐? 앙? 애새끼와 함께 세상 하직하고 싶지 않으면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네 년 놈들 입을 적셔줄 자비로운 물 따위는 없다!"
꽈악.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를 진정시키면서 나는 타오르는 분개에 입술을 앙다물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걷어차인 충격으로 몇 번이나 기침을 하며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온 피를 뱉어냈다. 등 뒤의 아이는 울 힘도 없었는지, 작은 신음만을 색색거리며 눈동자를 허옇게 드러내고 있는 상태였다. 그것을 보자 다급해진 여자는 아픈 배도 무릅쓰고 다시 남자의 바지춤을 붙잡기 시작했다.
" 제발 부탁드립니다, 나으리! 제발 한번만 자비를! 이 불쌍한 어린 것을 봐서라도, 제발! 제발 나으리!! "
" 아니, 이 년이 그래도?! "
눈을 부라리며 다시 발을 치켜드는 남자. 그리고 맞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붙잡는 손을 놓지 못하는 여자. 나는 더 이상 그 것을 지켜보지 못하고 그 들 사이로 끼어들며 남자의 행동을 가로막았다.
" 그만 둬!! "
" 어떤 싸가지 없는 자식이 또… 헉. 뉘, 뉘신지? "
처음 그 경비는 험상궂은 얼굴이 되어 갑자기 끼어든 나에게 한바탕 욕을 퍼부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후드를 벗어 훤히 드러난 내 얼굴을 보고는 금새 대경실색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일반 평민들에 비해 눈에 띄게 새하얀 피부와 곱상한 외모를 보곤, 귀족 집 아들이라도 되나보다며 지레짐작했던 모양이다.
나로서야 나쁠 것 없는 오해이지. 특히나 이런 상황에서라면 말이다. 나는 일부러 도도한척 턱을 거만하게 세우고는 강압적인 말투로 경비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 아이를 가진 여인에게 너무 심한 행동이 아닌가? 그 까짓 물이 몇 푼이나 한다고 사람을 이리 대한단 말인가. 이런 그대가 기사라는 직분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요? "
어디선가 '기사도'는 여인과 약자를 지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던 나는 최대한 당당한 표정으로 그의 잘못을 꾸중하려고 했다. 그럼 적어도 양심의 가책은 받겠거니 하고 말이다. 그러나 녀석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를 철부지 아이 보는 듯한 시선으로 흩어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능청맞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 쯧쯧, 어디서 기사도에 관한 글이라도 읽으신 모양입니다만, 요즘 세상에 그런 고리타분한 것이 통용되다 여기시다니. 영애께서도 참으로 순진하십니다, 그려. 그 고운 얼굴 다치시기 전에 얼른 본가로 돌아가십시오. 저런 거지 년은 영애같이 아름다우신 분이 감싸줄 대상이 아닙니다. "
" 뭐, 뭣? "
여, 영애에??? 지금 그거 나한테 '아가씨'라고 부른 거나 다름없는 거…맞지? 전혀 예상치 못한대서 직격한 쇼크에 한순간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차마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나를 보며, 녀석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껏 비굴해진 모습으로 두 손을 슬며시 마주 비벼 보였다.
" 헤헤. 수행원도 없이 귀하신 분이 혼자 나오시다니.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그러십니까? 거처를 알려주시면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실례지만 영애의 성함은…? "
" 죽… "
죽고 싶냐!! 나는 대뜸 녀석의 면상을 향해 이렇게 쏘아붙여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등장한 페리스에 의해 그것은 앞글자만 장식하고 그대로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웃음을 참는 듯한 억눌린 표정으로 나타나더니, 당장이라도 물 공격을 퍼부으려는 내 손을 남몰래 제지시키며 경비를 향해 입을 열었다.
" 저런, 수행원이 없다니, 실례입니다. 저희 영. 애. 께서는 분별없이 혼자 행동하실 정도로 감성적이신 분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
비록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 아니었다고 해도, 정령사라는 특별한 능력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이사나의 옆에서 그를 보필해왔던 페리스는 겉으로 보기에 흠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귀족, 또는 귀한 사람을 모시는 수행원으로 보였다.
단정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나는 그를 본 경비는 쳇-하고 짧은 불만을 삼키더니 곧 싱글싱글 웃으며 나에게 허리를 굽신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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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81 회]
날 짜 2004-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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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재앙과 비운의 황제
" 일행이 있으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이 근방에 산적이 나타난다고 하니 서둘러 돌아가시지요. 영애께서 불쾌히 보셨던 저 거지 년의 처분은 맡겨주십시오. 깨끗하게 처리하여 다시는 이 땅을 밟지 못하게 할 테니까요. "
" 뭐… "
" 아니,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 여인에 대해서는 저희 쪽에서 알아서 하지요. 여러 가지로 수고를 끼쳐드려 죄송했습니다. "
이번에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내가 화낼 순간을 미리 캐치한 페리스는, 떨떠름한 표정의 경비가 말을 꺼내보기도 전에 냉큼 작별인사를 건네더니, 쓰러져있는 여자를 안아 일으켰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무언가 아쉽다는 의미가 가득담긴 얼굴로 계속해서 내 쪽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을 무시하며, 페리스와 함께 물가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한적한 장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주변에 아무런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내가 제일먼저 행한 행동이 뭐였냐면…
콰아앙--!
" 크아악! 그 빌어먹을 자식! 누구더러 여자라는 거야!! "
머리끝까지 치솟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내리친 바닥은 반경 1m의 원을 그리며 커다란 구덩이를 남기고 말았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 안에서 맑은 샘물이 치솟아 오르자, 남자에게 맞은 배를 감싸 안으며 끙끙거리던 여인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동그래졌다.
신기했던 것은 페리스 역시 마찬가지라, 그는 참던 웃음을 터뜨리지도 못하고 놀란 눈으로 순식간에 만들어진 샘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인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대놓고 감탄하지는 못하고 일부러 여자에게 들으라는 듯이 떠들었다.
" 호오, 아무리 엘…크흠…님의 힘이 장사라지만 이런 효과가 나타날 줄이야. 아무래도 수맥을 건드리신 모양인데요? 마침 잘 되었군요. 목이 마르다고 하셨지요? 이거라도 좋으시다면 드시겠습니까? "
" 저, 정말입니까요? 나으리? "
" 물론입니다. 이런 행운은 흔한 게 아니니 어서 드시고 아이에게도 먹이십시오. "
"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
허둥지둥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여인은 곧 폭발적인 기세로 달려들어 샘물을 움켜쥐듯 떠 마시기 시작했다.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얼굴로 꾸역꾸역 물을 들이키는 모습을 보니, 경비에게 여자로 오해 받은 일 따위로 화내고 있던 내가 한심해 질 정도로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가는 기분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천천히 여자 앞에 다가앉았다.
" 천천히 마셔요. 물도 채 한 다구요. 그렇게 급하게 마시면 오히려 탈이 나요. "
" 꿀꺽 꿀꺽. 크흡. 읍… 웁 꿀꺽 "
하지만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급하게 물을 들이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사람이 물에 목마르면 저렇게 까지 될 수 있는 걸까? 한참 만에 자신의 먹을 양을 채운 여인은 업고 있던 아이를 앞으로 안아 서둘러 물을 한 모금씩 입안에 떠 넣어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는 엄마만큼의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모양인지, 넣어주는 물을 거의 다 삼키지 못하고 입 밖으로 그대로 흘러버리고 있었다.
작게 경련을 떠는 가녀린 육체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위태한 모습이었다. 아이가 좀처럼 물을 받아 마시지 못하자, 다급해진 여자는 울먹거리며 어떻게든 물을 넣어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아이를 다독였다.
" 레이. 이것 좀 마셔 보거라. 물이야. 우리레이, 물이 마시고 싶다고 했었지? 물이야, 물..자, 봐. 이렇게나 많아. 제발…아가야, 제발 한모금만이라도…흑흑. 아가야…. "
이제 겨우 5살쯤 되었을까? 앙상한 뼈만 드러난 팔뚝은 태어나 살아온 동안 얼마나 고생이 심했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었다. 이사나들도 그다지 좋은 상태가 아니었지만, 이 아이의 경우는 그보다 더 심했다. 하긴 5일이나 물조차 마시지 못할 환경이었으니 오죽했겠는가.
나는 누구에게 향한 건지도 모를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여자에게서 아이를 받아 안았다. 그러자 여자가 기겁을 하며 도로 뺏어들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이후에 아이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곤 그대로 떡-하니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 회복 】
파아아앗- 눈부신 빛이 아이의 몸을 감싸더니 다 죽어가던 몸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엘퀴네스의 고유의 능력인 치유술이 발휘된 것이다. 보통의 심한 상처에 해당하는 내상과 외상 외에도, 엘퀴네스의 능력은 이렇듯 체력이 극도로 약해진 신체에 생명의 기운을 회복시키는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빛이 사라짐과 함께 안색이 한결 밝아진 아이를 보고 눈이 동그래진 여인은, 내가 그 대신 아이에게 물을 떠 넣어 주는데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그리곤 아이가 방금 전과 달리, 제법 기운이 도는 얼굴로 얼른 물을 받아 마시는 모습을 보고는 감격적인 표정이 되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줄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내가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건지, 내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한, 오로지 무한한 감사와 안도가 드러난 표정이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 이해심 깊은(?) 여인이 구나 ' 하며 속으로 다행이다 여기는 순간, 울먹이는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나는 아이에게 물을 떠 먹여주던 손을 멈칫했다.
" 아아아… 이런 곳에서 설마 엘뤼엔님의 사제를 만나게 될 줄이야. 정말 감사합니다, 사제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정말 죽을 날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흐흐흑.. "
" …예? "
에, 엘뤼엔의 사제라니? 설마 이런 곳, 이런 상황에서 엘뤼엔의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던 나는 당혹한 표정으로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치료했으니 여느 신관이라고 생각하는 건 이해한다 쳐도… 왜 그게 하필이면 엘뤼엔이야? 그 녀석은 치료와는 전혀 상관없는 '형벌'의 신인데? 그런 내 혼란한 마음은 옆에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페리스에 의해 해결되었다.
" 흐음. 확실히… 엘뤼엔의 사제는 어려운 이웃을 위한 치료순례를 도는 특이한 행사를 한다고 했었지. 보통 다른 신전들의 사제들은 공짜로 치료 같은 걸 해주지 않으니까 오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가. 더구나 엘퀴네스님이 그마한 괴력을 보이고 난 뒤였으니…. "
" 에? 그건 무슨 소리예요, 페리스? "
" 음? 아, 들으셨습니까? 그러니까… 엘뤼엔신의 사제들은 일정한 시기가 되면 치료순례를 행하거든요. 대부분 사람들은 설마 형벌의 신의 사제들에게 치료에 대한 신성력이 있을 거란 생각은
못하지만 말입니다. 게다가 체술 역시 상당히 뛰어나서, 어지간한 무장 병들과 싸워도 거뜬히 이긴다고들 하더군요. 아마도 그래서 이 여인이 오해한 듯싶습니다. "
여자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는 설명을 들으며 나는 복잡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다른 사람을 벌주는 것에 의미를 두는 엘뤼엔의 사제들이 치료 술을 쓸 줄 알다니…이 무슨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러자 마치 그 의문을 예상했다는 듯한 페리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 형벌의 신이라고 해도 자비심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선'을 이해해야 '악'을 처벌할 수 있다는 취지로, 일정 기한을 정해 이런 식의 치료순례를 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워낙 그
수가 적어 알고 있는 이가 오히려 드문 일이었는데, 이 여인이 용케도 알고 있던 모양입니다. "
" 그, 그렇군요. "
수없는 감사의 말을 읊조리며 고개를 숙이는 여자를 보자니, 새삼 이제와 엘뤼엔의 사제가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무안했던 나는 그저 말없이 미소 지어 주었다. 그러자 여인은 나를 완벽하게 엘뤼엔의 사제로 믿어버렸는지, 다시 감격적인 얼굴이 되어 연거푸 절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간절하게 내뱉는 부탁의 말에 나는 난감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 부디 사제님의 성함을 알려주십시오. 오늘 입은 은혜는 후에 이 아이가 자라 반드시 갚게 할 겁니다. 그 때 아이가 사제님을 찾을 수 있도록 은인의 성함을 알려주십시오. "
" 에? 제 이름이요? 아… 그, 그러니까…음…. "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것이라 나는 적잖이 당혹한 심정이 되어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만큼은 페리스도 도와줄 마땅한 명분이 없었는지 마찬가지로 곤란한 표정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본래의 내 이름을 알려줄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적당히 꾸며 대자니, 후에 정말로 나를 찾게 될지도 모를 아이가 걱정스러웠다.
활활 타오르는 여인의 기새를 보니, 정말로 아이가 자라면 나에게 은혜를 갚으라며 집에서 내 쫓고도 남을 것 같았던 것이다. 엘뤼엔의 정식 사제로 등록되어있지도 않은, 그야말로 뜬 구름 같은 은인을 찾기 위해 대륙을 헤맬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때문에 대답을 고르는 내 자세는 무척이나 신중해져 있었다.
" 으음. 제가 엘뤼엔의 사제는 맞긴 합니다만, 현재는 신전을 나와 방랑중인 몸입니다. 언제 다시 돌아가게 될지도 알지 못하지요. 신의 섬기는 사제로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니, 은혜라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
"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사제님은 죽을 뻔한 저희 모자를 구해주신 은인이십니다. 부디 살아있는 몫을 다하도록 사제님의 성함을 알려주십시오. "
간곡한 목소리에 서린 단호한 의지에 나는 변명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름을 알려주지 않으면 눈앞에서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하고 있는 것 같은 비장한 표정이었던 것이다. 한참이나 머뭇거리며
고심하던 나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 정 그러하시다면 어쩔 수 없네요. 저의 친우들은 저를 '엘'이라 칭합니다. 현재는 거처할 곳을 나와 떠돌아다니는 몸입니다만. 후에 당신의 아들이 저를 찾고자 한다면, 솔트레테 제국의 황성-
황제폐하를 알현하도록 하십시오. "
" 예, 예? 화…황제폐하를?? "
눈을 동그랗게 뜬 여인의 표정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드러났다. 하지만 페리스는 그것에서 무슨 생각을 떠올린 건지, 그가 걸고 있던 수정 목걸이를 빼어 여인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아이의
목에 걸어주는 것이었다. 그리곤 의아해 하는 여자에게 생긋 웃으며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 찾아올 때에는 황성의 경비대에게 이 목걸이를 보이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아이를 황제폐하에게 안내할겁니다. 당신의 눈앞에 서계신 분은 엘뤼엔신의 고위 사제이자, 현 이사나
란느 솔트황제 폐하의 최 측근이시랍니다. "
" !! "
" 겁이 나신다면 찾아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목걸이는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데 쓰셔도 무방합니다. "
현재 이사나가 제국의 반역자의 누명을 쓰고 쫓기는 상황에서 그의 측근이 건네준 소지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죽음과 연결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때문에 페리스는
그 점을 짚어 여인이 포기한다 해도 나무라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였으나, 순식간에 표정을 굳힌 여자는 나와 페리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어차피 죽을 몸이었습니다. 반드시 은혜를 갚을 것입니다. 귀하신 분들을 미천한 몸이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
" 과연…백 명의 기사보다 더욱 용맹한 여인이로군요. 그대의 용기를 높이 사서, 여기 엘님은 반드시 당신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당신의 아들이 무사히 엘님을 찾아올 수
있도록 빌어드리겠습니다. "
어이어이. 지금 내 기억력을 너무 맹신하는 거 아니야? 이 꼬맹이가 자라려면 아직도 한참인데…내가 그걸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을 거란 말이냐! 황당한 심정에
가슴이 뜨끔해져 왔지만, 이미 분위기는 내가 거절하게 만들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여인은 감동어린 표정으로 다시 절하며 소리쳤다.
"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으리. 이 아이의 이름은 '레이'입니다. 평민이라 성은 업사오나 부친이 살아생전 뼈대 굵은 용병이었으니, 장성하면 어지간한
성인의 몫은 해낼 수 있을 겁니다. 후에 사제님의 노예로 부리시던, 다른 이에게 팔아넘기시던 뜻대로 해 주십시오. 아이도 기쁜 마음으로 사제님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
…으으음. 이런 말까지 들었는데 정말 기억을 못하게 되면 곤란하지. 그래서 나는 한숨을 내쉬며 페리스가 아이에게 걸어준 목걸이의 수정에 남모르게 내 기운을 불어 넣었다
. 아마 나중에 만나게 되면, 얼굴과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익숙한 내 기운을 느끼고 알아볼 것이리라.
이후 여인은 페리스가 급하게 마련해서 건네준 물주머니와, 몇 푼의 돈을 받고 몇 번이나 감사의 말을 건네며 돌아갔다. 희미하게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보던 나는 그제 서야
아차 싶은 마음에 페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 괜찮은 걸까요? 일을 벌인 내가 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저러다 저 사람이 경비대에 밀고라도 하면…. "
" 후후. 괜찮습니다. 저런 류의 사람은 자신의 신념은 굳게 지키니까요. 또한 마음이 변심해 밀고를 한다 하더라도, 거지와 다름없는 행색의 여인의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이사나님께 엘뤼엔의 고위사제가 최 측근으로 있다는 것부터가 어부성설 이니 말입니다. "
" 하하하… "
대책 없던 나와는 달리 페리스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누가 정령왕이고 누가 인간인지 헷갈리는 걸?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속으로 대책 없던 자신을 반성했다. 하지만 저런 신중한 모습의 그를 보니, 헤어져 있어도 잘 지낼 거란 확신이 들었다. 믿음직스러운 얼굴로 그를 보던 나는 문득 떠오르는 생
각에 황급히 물었다.
" 그러고 보니 페리스, 물의 정령과 계약할 생각 없어요? 일일이 물을 사는 것보다 정령과 계약하는 편이 편할 텐데. "
" 예? 제가 물의 정령과 계약을요? 아…이것 참. 저는 바람의 정령사라 물의 정령과의 계약은 무리…. "
" 바람과 물은 그다지 거스르지 않은 속성이니까 상관없어요, 친화력만 충분하면 소환이 가능할걸요? 10년 재앙기간에 바람의 정령과 계약한 페리스의 친화력이라면, 운디네하고도
계약이 가능할거예요. "
" 예, 예? 그게 정말입니까? "
일반적으로 정령사는 자연의 4대 속성 중 1가지의 속성만을 다루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검사가 마법과 검술을 동시에 부리기 힘든 것과 같은 이치였지만, 어디까지나 세상
사는 예외가 있는 법. 크게 속성이 다르지 않는 한, 소환할 정령의 친화력과 마나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다른 계열의 정령도 불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페리스의 경우는 물의
정령왕인 내가 바로 곁에 있었으므로, 물의 정령을 소환할 때의 친화력을 쉽게 이끌어 낼 수 있었다.
10년 재앙동안 모든 정령왕의 힘이 극도로 축소된 상황에서, 바람의 정령과 계약한 그의 정령사로서의 자질을 생각하면, 내가 조금만 도와주면 운디네가 아닌 시큐엘하고도 계약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런 내 생각을 조심스레 건네자 페리스의 얼굴은 눈에 띄게 화악 밝아졌다.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자의 표정이었다.
"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법사가 높은 서클을 구사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정령사 역시 보다 상급의 정령을 소환하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 말입니다. "
" 그럼 해보겠어요? 이번 소환에 성공하면 나중에 바람의 중급정령과도 계약할 수 있을 거예요. 다만, 속성의 제한을 받아 바람의 상급정령의 소환은 힘들겠지만…. "
" 상관없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엘퀴네스님! "
매사에 침착한 표정으로 생글거리던 페리스가 이순간은 두 눈에 불을 뿜듯 안광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어색한 웃음으로 바라본 나는 곧 사람들의 시선이 모일 것을 우려해,
처음 내가 이사나에게 소환되었던 산속의 샘으로 곧장 텔레포트했다. 물론, 페리스 역시 같이 데리고 온 것은 물론이다.
그리곤 기대가 잔뜩 서린 얼굴로 눈을 빛내고 있는 페리스를 샘 옆에 앉힌 후,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게 한 다음, 그의 주변으로 내 기운을 퍼뜨리며 물의 상급정령-시큐엘의 소환주문을
외우도록 종용했다. 처음 그는, 내가 그의 옆으로 퍼트린 물의 차가운 기운을 느끼고 어려워하는 듯 했지만, 금새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와 또박또박 입을 벌려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 태초의 자연은 나의 마나를 받아 운동할지어다. 바다의 광활한 영역을 감시하는 자- 그대 물의 시큐엘이여, 이 순간 그대의 소환을 원하는 나의 부름에 응답하소서. ]
슈우욱- 내가 도와준 덕분인지, 아니면 페리스의 정령사의 능력이 워낙 뛰어난 탓인지, 응답은 금새 이루어졌다. 그가 주문을 마치는 순간, 페리스의 주변을 돌던 물의 기운들이 폭풍이 치듯 거칠게 요동하더니 곧 그의 눈앞에서 한가지의 형체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나의 급격한 소모 때문에 안색이 나빠지는 와중에도 페리스는 그 모습에서 눈을 때지 못하며 멍하니 감격을 거듭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풍성한 몸체를 자랑하며 멋들어진 갈기를 휘날리는 물로 된 늑대의 형상이 드러나자, 페리스는 헉-하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등장한 시큐엘은 그런 페리스의 모습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먼저 그 옆에 서있던 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 위대하신 물의 정령왕을 뵈옵니다. 바다의 광활한 영역을 감시하는 자- 시큐엘이옵니다.
모습은 완벽하게 똑같았지만, 이번에 소환된 시큐엘은 평소 내가 데리고 다니던 그 녀석이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녀석 역시 내가 만들어낸 정령중의 하나였으므로, 나는 반가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다쟁이인 나이아스나 수줍은 많은 운디네에 비해 시큐엘은 상당히 터프한, 과묵한 느낌의 정령이다.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 돌아선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소환자인 페리스를 바라보며 엄숙하게 물었다.
- 그대가 나를 소환한 자인가?
" 그, 그렇습니다! "
- 무례한! 정령왕의 앞에서 어찌 나에게 말을 높이는가? 그대는 지금 이 순간 나와 계약을 이행함으로 왕을 모실 의무가 주어지는 몸이다. 살펴본바, 그대는 나와 계약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지니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나와 계약하겠는가?
" 무, 물론 입…아니, 물론이다. 내 이름은 '페리스 드 해머.' 그대 물의 상급정령 시큐엘과의 계약을 원하는 바다. "
- 좋다, 계약은 이루어졌다. 페리스여. 그대는 나를 소환함으로서 원하는 것을 구하며, 나는 소환됨으로서 그대의 뜻을 돕는 보필자가 됨을 약속한다.
파아앗- 짧은 대답을 마친 시큐엘은 둔갑하는 구미호처럼 몸을 뒤로 빙글 돌리더니, 그대로 한줄기 물이 되어 페리스의 이마에 강하게 내리 꽃히며 사라졌다. 그러자 그의 이마엔 미리 새겨져 있던 바람의 인장 옆으로, 물의 상급 정령사를 뜻하는 물의 인장이 선명하게 자리 잡는 것이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줄기가 닿은 이마를 매만지던 페리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 저, 정말 제가 시큐엘과 계약한겁니까, 엘퀴네스님?? "
" 쿡쿡. 믿지 못하겠으면 지금 불러보면 되잖아요. "
" 예? 아…그, 그렇군요! 으음. 시…시큐엘? "
- 불렀는가?
평소의 지적인 모습은 어디다 내 팽개쳤는지 상당히 흐트러진 모습으로 시큐엘을 부른 그는, 한 마리의 늑대가 공중에서 순식간에 등장하며 물어오자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참으로 혼자보기 아까운 장면이었다고나 할까? 그나저나… 저렇게 상급정령을 자주 부르면 몸의 마나가 바닥이 날 텐데 말이지.
아니나 다를까. 계약직후인 상태에서 다시 몸에 무리한 마나의 소모가 생기자, 페리스의 안색은 그냥 보기에도 위험해 보일만큼 새파래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던 나는 얼른 시큐엘에게 돌아갈 것을 명령한 후, 페리스에게 회복의 주문을 외워주며 엄한 목소리로 충고를 시작했다.
" 당분간은 운디네와 나이아스들만 불러서 마나의 소모에 익숙해지도록 해요. 시큐엘의 소환은 아직 몸에 부담이 되는 것 같으니까요. 꾸준히 수련하면 나중엔 시큐엘 여럿을 한번에 불러내고도 끄덕 없을 겁니다. "
" 미…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 내가…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상급정령사가 되다니. 모두 엘퀴네스님 덕분입니다. "
감격이 서린 목소리로 연신 내 덕분이라 말하는 페리스의 눈은 어느새 촉촉이 젖어있었다. 정령사의 재능을 인정받아 황성에 들어왔지만, 하급정령을 다루던 그는 여러 가지로 천대받는 나날을 계속해 오고 있었다고 했다. 애초에 그가 이사나를 모시게 된 경위가, 어느 곳에도 쓸모가 없는 그의 처분을 고민하던 유카르테 대공이, 이사나를 더욱 웃음거리로 만들기 위해 붙여준 것이 계기였다니 말이다.
오히려 이사나 본인은 그의 정령사로서의 능력을 무척 아끼며 실프들을 보는 것을 좋아했지만, 페리스는 자신이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에서 몇 번이나 좌절감을 맛보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또 자신과 계약을 한 실프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이어져 페리스는 종래에 스스로를 자학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고 있었다.
고해성사를 하듯, 그동안의 모든 심정을 고백하는 그의 복잡한 얼굴을 보던 나는 어린아이에게 그러하듯, 그의 숙여진 머리를 쓰윽 쓰다듬어 주었다.
" …? …에, 엘퀴네스님? "
" 강해지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이 아니라도 누구나 마찬가지이죠. 그것이 지켜야 할 자가 있다면 더욱 그렇고요. 실프들도 그것을 이해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페리스가 자책할 필요는 없어요. "
" 하, 하지만…. "
" 친구라고 인정해 주기만 하면 되요. 정령을 당신의 수하가 아닌 친구로만 받아준다면, 실프들은 넓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해 줄 겁니다. 설마 페리스는 약한 친구를 외면하는 사람은 아니겠지요? "
" 그,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
말도 안 된다는 듯 얼굴까지 붉히며 반박하는 모습에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쿡쿡. 그래요. 그거면 됐어요. 본래 하급정령은 공격이나 방어의 입장보단 곁에 머물러 위로해주는 의미가 더 강하니까요. 아마도…가장 자연 그 자체인 것은 하급정령일지도 몰라요. "
" 에, 엘퀴네스님…. "
상급의 정령일수록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입장에선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 될 뿐, 언제까지나 곁에 머무는 친구의 모습이 되어 줄 수는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하급정령들만큼 친근하고 항상 곁에 둘만한 존재를 찾기도 힘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급정령의 능력을 우습게보면 곤란한데 말이야.
아마도 페리스는 실프들을 정찰 외의 목적으로 불러내본 적이 없는 모양이지만, 실프의 바람의 칼날은 꽤나 위력적이라, 어지간한 나뭇가지라도 단번에 꺾어 낼만한 힘이 있었다. 그것은 다른 하급정령도 마찬가지. 결국 정령 능력의 상하유무는 사용자의 능력수준에 비례한다는 소리다.
특히 하급정령의 경우, 인간 세상에 소환되고 난 후에는 계약자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소환자가 얼마만큼 컨트롤을 할 수 있느냐에 따라 능력사용이 무궁무진했다. 뭐, 그 점을 굳이 알려줘서 페리스에게 자격지심을 느끼게 할 필요는 없겠지.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니 말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순수하게 물의 정령과 계약함을 기뻐하고 있는 페리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사나로서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측근이 한 명 더 생긴 것과 마찬가지. 황궁 탈환의 계획은 조금 더 순조롭게 진행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