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침반 사용방법>
'오온'과 '오온이라는 법'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것은 아니지요.
불교가 어려운 이유는 위와 같은 표현 때문입니다.
그러할 때, 나침반을 사용하면
나침반의 한 쪽 끝이 '오온'이 아니라 '오온이라는 법'을 가르키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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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온'과 오온이라는 법'은 어떻게 차이점이 있겠습니까?
원시불교 뿐만이 아니라 모든 불교에서는
법(dhamma, 담마)이라는 용어의 기본 개념이 '심의식의 대경'입니다.
따라서
설사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는 법개념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가르침 자체는 '심의식의 대경'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비법(법의 이치에 맞지 않는 엉터리 주장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법(법의 이치에 합당한 올바른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땟목의 비유를 염두에 두고서 결국에는 버려야 하는 것'이라고 설해지는 것입니다.
'오온'은 그냥 오온입니다. 그러나 '오온이라는 법'은
'심의식의 대경으로서의 오온'을 뜻합니다. 그러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반야심경이라는 말은 '반야를 갖춘 마음에 대한 가르침'이지요.
거기에 마음이 거론됩니다. 그리고 오온이 관해집니다.
거기에 나침반을 가져다 놓아 보십시오.
정확하게 양쪽 방향을 가르킵니다.
오온은 현실에서의 현재상황입니다.
그러나 '오온이라는 법'은 '심의식의 현재 실재상황'입니다.
심의식은 그 형체가 없고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비색(非色, 색이 아님)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법은 무견무대색(無見無對色, 볼 수 없고 만져지지않는 色)입니다. 비록 볼 수 없고 만져지지 않지만
결국은 색(色)인 것이 법입니다. 무색(無色, 색이 없음)은 비색(非色)과 다른 용어입니다.
무색은 비록 색은 없지만 '색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색에 속하지 비색에 속하지 않습니다.
심의식만 비색입니다.
그러한 심의식이 법을 대할 때(=對法, 아비담마 상황일 때)
다음의 3 종류가 설해집니다.
심의 경우-----법은 단수형으로 설해짐.
의의 경우-----법은 단수형(12처설)과 복수형(오욕락 상황)이 모두 설해짐.
식의 경우-----법은 반듯이 복수형으로 설해짐.
심의식의 치명적인 차이점은 위와 같은 차이점입니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식을 미워합니다. '지극한 도는 간택하지 않음'에 있는 법인데,
식은 오직 간택하기 때문입니다. 선(자나)하고는 담 쌓은 것이 식입니다.
(원시불교에서는 대승의 선가보다 더 심합니다.)
자나(선정)상태에서는 위딱카와 위짜라를 식 대신에 사용하여 아비담마합니다.
혹은 대상을 관(觀)합니다.
그리하여 법의 본질을 꿰뚫어 나아갑니다. 그리하여 모든 법이 단수형의 대상임을 깨닿는다면
놀랄 일이 벌어집니다.(결국엔 사성제입니다만 일단은)
그것이 심일경성입니다. 하나의 대상에 하나의 마음만 성립하는 상황!이 바로 그것입니다.
법은 서로 이어진 부분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보십시오. 그 마음에 서로 분리된 부분이 있습니까?
그 마음의 대상인 법도 그러합니다.
대승의 선사상이 탁월한 이유가 '법에 대한 파악'에 있습니다.
옛날 그 어느 선사가 '왕의 스승을 하다가, 왕자의 스승'까지도 겸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입적이 다가왔을 때, 왕자가 묻습니다. "스승님에게 어떠한 사리탑을 지어드릴까요?'
선사의 대답은 '무봉탑(이음새가 없는 탑)을 건립해 주십시오'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탑은 이음새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음새가 있는 탑이라 하더라도 그 탑이 물에 비치면 그 물 속의 탑은 이음새가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오온을 지니고 있지만, 그 오온이 심의식의 대경일 때는
이음새가 없습니다. 단수형의 법이 법의 본래면목입니다. 선사께서 말씀하신 무봉탑이란 바로 그러한 법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했던 법이 왜 무수한 법계를 가지게 되었겠습니까?
법성게(법의 성품에 대한 게송)의 첫 구절은 "법성원융무이상"입니다.
'법의 성품은 원융하여 본래 두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건만'이라고 해석됩니다.
그러했던 법에 왜 두 모습이 생겨났을까요?
동일한 법에 대하여 좋아하는 부분과 싫어하는 부분을 간택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극한 도를 모르고(사성제를 모르고, 무명에 빠져서) 간택하기 시작하여
식이 발생하면 무수한 법들이 생겨납니다. 그 법들의 수는 마음대로입니다.(界의 원리입니다.)
그렇게 법들이 많아지니 번뇌도 늘어갑니다.
'마음이 어리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는 이치이지요.
법성게의 마지막 부분에 '중도좌(中道座, 중도라는 자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념처가 중도이지요. 여기에다가 나침반을 놓아 보십시오.
심과 법의 사이에 무엇이 위치하고 있곘습니까?
정확하게는 '욕탐(잔다라가)'이지만, 쉽게는 탐진치입니다.
심념처(심수관)과 관련하여 탐진치가 언급됩고, 그러한 탐진치 없는 경지인 해탈이 언급됩니다.
심이 법에 대하여 탐진치가 있음을 먼저 수관하고
그러한 탐진치 없음을 수관할 때 해탈을 보는 것이 '중도좌에서 중도를 깨달음'입니다.
원시불교의 법성게라 할만한 경전은 '법구경'입니다.
서점에 가셔서 '법구경-담마빠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역주, 5만원'을 구입시어
법구경의 첫 구절을 읽어 보십시오.
(전재성박사님이 그 첫 구절을 엉터리로 번역해 놓았으니 번역 하단의 원어를 보십시오.
그 언어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意가 法들을 이끄니,
意가 그것들(=법)의 지배자고, 그것들(=법)은 意가 지은 것이다.
심의식과 법의 관계가
법구경의 첫 구절을 장식하고 있지요.
법구경의 후반부는 안보아도 뻔합니다.
중도인 37조도품이 당연히 언급됩니다.
대소승을 막론하고 모든 경전은 그 구성과 내용이 동일합니다.
사실은 대승이 더 알기 쉽고, 선가의 가르침이 더 직설적입니다만,
대승과 선가의 가르침을 세밀하게 이해하려면 니까야가 필수적입니다.
(니까야는 너무 자세하고 너무 친절한 것이 흠입니다.)
손오공이 제아무리 날아가도 부처님 손바닥이듯이 불교교리체계는 아무리 어려워도
사성제를 벗어난 교설이 없습니다.
그러한 사성제를 깨닫는 방법은 남과 북을 잘 알아야 합니다.
즉 나침반을 수시로 꺼내보면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 나름대로는 나침반 사용방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인데요. 어렵습니까?
질문을 해 주시면 설명의 방향을 수정하겠습니다.
질문이 없으시면 다음 번에는 나침반의 원리인 고짜라(고유영역)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첫댓글 _고맙습니다_()_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