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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내수(內修)와 외치(外治)
유자(儒者)는 안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그 수양을 바탕으로 밖으로 실천하여 자신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사람마다 자신에게 맞는 수양법으로 자신을 닦아 일을 이룬다. 후창의 주요한 수양과 처세, 업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경성(敬誠)과 자경십측(自警十則)
후창이 내수(內修)로써 중요시한 것은 “경성(敬誠)”이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을 스스로 경계하면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심신을 닦아 실천하려고 했다. 후창은 “경성(敬誠)”의 개념12)에 대하여 직접 분석을 하지 않고 “경성(敬誠)”의 실천적 효과에 대하여 주로 얘기하였다. 이런 내용을 알 수 있는 문장으로는 자경십측「自警十則」, 우서「偶書」, 자기론「自欺說」, 「우설자계憂說自戒」등이 있다. 이 글들을 바탕으로 후창의 수양(修養)과 조행(操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우서「偶書」와 자기설「自欺說」에서 경성(敬誠)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우선 우서「偶書」에 나오는 경(敬)에 관한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심(敬心)을 한번 세우면 백사(百邪)가 물러나 순종하고 나태한 마음이 한번 싹트면 백사(百事)가 이뤄지지 않는다. 경성(敬誠)과 나태(懶怠)사이가 흥망의 기틀이니 두려워하지 않으리오? (敬心一立, 則百邪退聽, 怠心一萌, 則百事無成. 敬怠之間, 興亡之機, 可不懼哉.)13)
치국에 하나의 ‘인(仁)’자(字)가 부족하면 나라가 없어지고 치가(治家)에 하나의 ‘예(禮)’자(字)가 부족하면 집이 없어지고 치신(治身)에 하나의 ‘경(敬)’자(字)가 부족하면 몸이 없어지게 된다.(治國少仁字是無國, 治家少一禮字是無家, 治身少一敬字是無身.)14)
이상에서 그는 사람이 경(敬)을 실천하게 되면 온갖 사악한 것들을 물리쳐 유혹당하지 않게 되므로 사람 노릇을 하여 흥하게 되지만 그 반대가 되면 흉하게 되어 몸을 망친다고 하였다.
12) 誠과 敬의 개념에 대하여 후창이 직접 분석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후창은 誠과 敬의 개념으로 주자의 설을 따랐을 것으로 추론된다. 주희는 誠과 敬에대하여 誠은 “眞實無妄”이라 하고, 敬은 “主一無適”이라고 하였다.
13) 後滄先生文集 10권 188쪽.
14) 後滄先生文集 10권 192쪽.
성(誠)에 대하여 자기설「自欺說」에서 “아는 것이 지극하지 못하여 정성스럽지 못한 자는 정성스럽지 못하다고 하면 정성스럽지 못한 것이지만 자기(自欺)는 아니니 무엇 때문인가? 그 견해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여 실제로 속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비록 지극하다고 할지라도 그 힘을 실요(實用)하지 못하는 자의 경우에 이르러야 자기(自欺)라고 하는데 무엇 때문인가? 그가 이미 알면서도 하지 않아서 본심의 밝음을 속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기(自欺)는 지(知)의 과실(過失)이 아니고 의(意)의 사사로움이라고 말한다.”15)라고 말하였다. 이는 자신을 속이지 않고 성의(誠意)를 다하는 것이 아는 것을 실천할 수 있는 원천이라고 말하면서 성(誠)`을 매우 강조한 것이다.
이어서 그는 자경십측「自警十則」을 지어 수양의 실천 조목을 정하고 설명을 하였다. 그는 자경문(自警文) 첫머리에 면제 황헌(勉齋 黃幹)의 말을 인용하여 “스스로 잘못을 알고서 말하는 것은 말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책망하여 뉘우치고 깨닫는 간절함만 못하다.”라고 하고 이제 마음에 경계할 것이 있어서 문득 스스로 명으로 새겨 경계를 붙인다고 하였다. 이후에 그는 열 개 항목으로 대지제일(大志第一), 근려제일(勤勵第二), 독서제삼(讀書第三), 효우제사(孝友第四), 개과제오(改過第五), 검신제육(檢身第六), 회량제칠(恢量第七), 겸비제팔(謙卑第八), 강의제구(剛毅第九), 존양제십(尊攘第十)을 제시하였다. 열 개 조목 중 대지(大志)와 회량(恢量)은 자신의 뜻과 역량을 키우는 일에 속하고 나머지 일곱 가지는 실천하는 일에 속한다. 구체적으로 풀이해 보면, 큰 뜻을 세우고 역량을 키워서 부지런히 노력하고 독서하며 과오를 고치고 몸을 단속한다. 그리고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다른 사람과 우애 있게 지낸다. 끝으로 심신을 굳건하게 만들어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것이다. 이 중에 후창이 살았던 시대가 패도(覇道)가 난무한 일제 강점기임을 감안할 때 주목을 끄는 것은 ‘강의(剛毅)’와 ‘존양(尊攘)’의 조목이다. 후창은 ‘강의(剛毅)’를 설명할 때 “천근을 짊어진 자가 강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가 없고 의(毅)하지 않으면 중도에 그친다. 인(仁)은 사(士)의 천근(千斤)으로 유약(柔弱)하고 해이(解弛)한 자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負千斤之重者, 不剛則不能起, 不毅則中途而止.)”고 하였다. 그리고 존양「尊攘」에서는 “춘추(春秋)의 대의는 수십 번 존양(尊攘)이 크다고 하였다. 지금은 이적(夷狄)이 성하여 우리가 장차 그들에게 쫓겨날 지경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의 제도(制度)를 따르지 말고 죽을 뿐이니 이것이 바로 물리치는 방법이다.(春秋之義, 數十尊攘爲大. 今也夷狄盛,我將爲其所攘, 如之何? 曰但不從其制, 有死而已, 便是攘野.)”라고 하였다.
15) 제 4장 「知行自欺說」원문 참조.
이는 후창이 당시를 살면서 인을 실천하여 왕도를 회복하고 일본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으로 과제를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전통 유학자로서 시대 문제에 대하여 대처한 방법이고 또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한계였다고 할 수 있다.
종합하면 그는 경성(敬誠)으로 내수(內修)를 한 다음 인의(仁義)와 효우(0孝友)를 실천하고 힘을 길러서 존양(尊攘)하고자 한 유자(儒者)라고 할 수 있다.
2. 절의(節義)와 위정(衛正)
후창은 국가의 위난을 맞이하여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절의를 몸소 실천한 사람들에 대하여 많은 글을 지었는데 1906년 23살 때에는 태인에 머물고 있는 최익현 창의군(崔益鉉 倡義軍)의 위국지충(爲國之忠)을 위로하고 간재(艮齋)선생 서신을 전달하였고 1908년 25년 때에는 의병장 기삼연(奇參衍), 고흥순(高興詢)과 제의사(諸義士)의 전망(戰亡)을 듣고 글을 지어 권찬(勸讚)하였고 1909년에는 안중근의사의 거사소식을 듣고 서찬(書贊)하였으며 1910년에 경술국치와 동문 박병하(朴炳夏)의 순의(殉義)를 듣고는 통곡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글을 볼 때, 후창은 절의와 위정에 대하여 평소에 대단히 관심이 많았는데 그의 절의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는 문장으로는 편고동문첨공「偏告同門僉公」이 있다. 그 문장에서 “절의는 도학의 울타리이고 도학은 절의의 집과 방이다. 도학을 하지 않고 절의가 있는 사람은 있어도 도학을 하면서 절의가 없는 사람은 없다.(節義者, 道學之籓籬, 道學者, 節義之堂室. 有節義而無道學者, 有矣. 未有有道學而無節義者也)”16)라고 천명하고, 우설자계「憂說自戒」에서는 “세상이 만이(蠻夷)로 변하고 도(道)가 밝혀지지 않고 학문이 발전하지 않고 스승이 속임을 당하고 집이 보호되지 못하고 자손이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질병이 침범해 오는 것을 근심한다. (憂世變夷, 憂道不明, 憂學不進, 憂師受誣, 憂家未保, 憂子孫無敎,憂疾病交侵)”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일제 강점기의 극도로 암울한 세상에서 스승에 대한 무고를 근심하면서 절의(節義)를 매우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절의는 사회가 혼란하고 삶이 힘들고 궁핍해질수록 절의(節義)가 더욱 필요해 지는 것은 매우 역설적인데 후창은 우서「偶書」에서 “궁핍할수록 더욱 뜻을 굳건히 하고 가난할수록 더욱 청렴을 지키고 세상이 혼란할수록 더욱 더 그 절개를 힘써야 한다.(窮當益堅其志, 貧當益修其廉, 世難當益勵其節)”라고
16) 後滄先生文集 10권 280쪽.
하였다. 이런 절의의 중시 결과로서 그는 일찍이 1906년(23세)에는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의 의병진중(義兵陣中)을 방문하여 간재(艮齋)의 서한을 전달한 적이 있고 1915년(32세)에는 일제가 보낸 은사금(恩賜金)을 물리친 적이 있다. 이런 절의(節義)와 위정(衛正)의 정신을 더욱 살펴볼 수 있는 시로는 송「松」, 죽「竹」, 국「菊」, 고국「枯菊」, 매화「梅花」, 고매「古梅」등이 있고, 문장으로는 편복설「蝙蝠說」, 담송설「啖松說」, 견동국식감「見冬菊識感」, 선군휘일거감자경겸시아배「先君諱日書感自警兼示兒輩」등이 있다. 후창은 견동국식감「見冬菊識感」에서 “가을바람이 한번 일어나자 모든 꽃들이 다 시드니 서리 맞은 국화가 너무나 고귀하거늘 하물며 눈 속의 국화랴! 선비의 오늘은 국화의 눈 내리는 하늘과 같으니 누가 능히 겹겹의 변란을 겪으면서도 절조를 더욱더 닦아서 나와 함께 돌아갈 것인가? 무릇 국화에 대한 사랑은 정절 다음이라고 내가 어찌 감히 말하리오? 오늘날에는 인류가 짐승처럼 변했고 윤리가 타버린 재가 되었으니 어찌 다만 참절찬시지화(僭竊篡弑之禍)속에 노예처럼 붙어 있는 것이 아니리오? 많은 국내 지사들은 향기 나는 국화꽃을 안고 절개를 가지고 아홉 번 죽어도 변하지 않고 지금 천하의 겨울국화가 되어 정절의 가을국화를 빛나도록 하기를 바란다.”17)라고하면서 겨울국화의 절조를 칭송하고 많은 지사들도 국화의 절개를 본받아서 죽어도 변하지 않는 절조를 실천하기를 기원하였다. 이는 후창 자신도 겨울국화를 본받아서 겨울처럼 냉혹한 일제 치하에서 한 송이 국화처럼 절조를 지키며 살겠다는 맹세인 것이다.
이어서 그는 선군휘일서감자경겸시아배「先君諱日書感自警兼示兒輩」라는 문장에서 “내가 만약 몸뚱이와 목숨을 아껴 이적(夷狄)의 제도(制度)를 따르고 너희들이 만약 굶어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불의(不義)한 물건을 먹고 이것이 유체(遺體)를 보존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비록 육십 칠십까지 살아서 선친의 말을 증명하더라도 오히려 오래 살지 못함이 나음 되는 것만 못하고 그 증험도 오히려 증험이 아닌 것이다... 이제 오랑캐 제도를 면하고 더러운 물건을 물리쳐 북쪽 창문아래서 늙어죽을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사는 것을 버리고 의(義)를 취해야 하니 이것이 선군이 나에게 가르쳐준 뜻이다. 내가 너희와 더불어 마땅히 소리 없는
17) 後滄先生文集 10권 241쪽. “秋風一起, 群芳摧盡, 霜菊已爲可貴, 況雪菊乎?士之今日, 菊之雪天, 疇能歷盡層層變難, 而節操彌厲, 與爾同歸? 夫菊之愛, 靖節之後, 我何敢言? 顧今人類翔走, 倫理灰盡, 豈但寄奴僭竊之禍? 吾願海內志士, 抱香持節, 九死不變, 誓作今天下冬菊, 于以有光靖節之秋菊”
가운데 듣고 특별하게 맹성(猛省)해야 한다.”18)라고 하여 오랑캐의 제도를 따르고 불의(不義)한 물건을 먹고 사느니 차라리 죽어서 의(義)를 취하는 것이 도리라고 하였다.
그는 편복설「蝙蝠說」을 지어 당시 절조 없이 갈팡질팡하는 사(士)들을 박쥐를 가지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박쥐를 잡게 된 경위와 생김새를 묘사 한 다음, 옛 얘기를 인용하여 “어느날 모충(毛蟲)이 그가 능히 날 수 있다는 것을 듣고 가서 그를 힐난하며 말하기를 너는 나의 원수가 아니냐? 하니 그는 양쪽 날개를 거두어 들여 날쌔게 뛰어가며 말하기를 ‘내가 어찌 우족(羽族)인가? 나는 너희들과 똑같다’라고 하였다. 또 어느 날 모충(羽蟲)이 그가 능히 달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또한 가서 그를 힐난하니 양쪽 날개를 펴서 분연히 날면서 말하기를 ‘누가 나를 모족(毛族)이라고 하는가?’ 너희와 무슨 원수를 졌는가? 이런 까닭으로 우족(羽族)과 모족(毛族)에게 모두 싫어함을 당하지 않았으니 그 이름은 박쥐이다. 네가 바로 그런가? 네가 진실로 그런가? 오호라, 오늘의 선비로 시비쟁론에 망설이는 자들은 또한 너희들에게서 법을 취한 것인가?”19)라고 한탄하였다. 본문에서 박쥐는 당시의 절조 없이 기회를 엿보며 몸을 보호하고 먹고 살기 위하여 이리저리를 뛰어다니는 사(士)들로 비판한 것이다. 후창은 이런 사(士)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담송설「啖松說」을 지었다. 그 뜻은 솔잎을 먹고 살자는 뜻이다. 이 설은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캐어먹다 굶어 죽었다는 고사를 나름대로 새롭게 해석하면서 고사리 대신에 솔잎을 먹자고 하면서 자신이 솔잎을 잘게 썰어 먹어본 효험까지 소개한 뒤 마지막 문장에서 “감히 말하노니 진실로 능히 저들의 음식을 먹지 않고 이 솔잎을 먹는 자는 일찍이 처음부터 백이와 숙제의 풍절을 듣지 않은 것이 아니니 동지들이여, 힘쓸 지어다.(敢曰苟能不食彼食而啖此松者, 未始非聞夷齊之風者也, 同志乎勉乎哉)”20)라고 하였다.
18) 後滄先生文集 10권 186쪽. “吾若惜軀命, 而從夷狄之制, 汝輩若怕餓死而食不義之物, 認此以爲保愛遺體, 雖壽至六七旬, 而驗先君之言, 反不若無年之爲愈, 而驗猶不驗也....免夷制却汚物, 而得老死牖下, 則幸矣. 如其不然, 當舍生而取義, 此又先君平日所以敎不肖之意, 吾與汝輩, 所當聽於無聲而分外猛省也...”
19) 後滄先生文集 10권 204쪽. “一日, 毛蟲, 聞其能飛, 往詰之曰: “爾非吾仇乎?”則斂其兩翅, 分作四足, 銳然而走曰: “吾豈是羽族, 吾與爾一也.” 又一日, 羽蟲,聞其能走, 亦往詰之, 則張其兩翅, 奮然而飛曰: “孰謂吾毛族, 與爾何仇?” 是以,於羽於毛, 俱無嫌隙, 其名曰蝙蝠. 爾則是耶? 爾眞是也. 嗚呼! 今之士之依違於是非爭論者, 其亦取法於爾歟?”
20) 後滄先生文集 10권 208쪽.
이는 후창이 당시에 왜놈들이 쌀을 나눠 주자 그 쌀을 먹지 말고 대신에 솔잎을 먹자고 제안한 것으로 후창의 일제에 대한 저항과 의리를 알 수 있다.
이상에서 후창은 국화의 절조를 본받아서 의(義)를 실천할 것을 호소하고, 박쥐처럼 이리저리 기회를 엿보며 살기 위하여 오랑캐의 제도를 따르지 말며, 불의(不義)한 물건을 먹느니 차라리 솔잎을 먹고 떳떳이 살라고 하였다. 후창의 이런 외침을 통하여 그가 혼란한 시기에 얼마나 절조를 이지키며 바르게 살려고 했는가를 알 수 있으며, 왜놈이 준 은사금을 물리침으로써 이런 절조를 몸소 실천한 진정한 유자(儒者)였음을 알 수 있다.
3. 제가(齊家)와 교육(敎育)
후창이 일제 강점기에 혼란한 현실 속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미래를 기약하기 위한 방법으로 가장 중시한 일은 가족보호와 우애 및 교육이었다. 후창은 가족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하여 시가중「示家衆」, 가규「家規」를 지었다. 시가중「示家衆」은 가족에게 가족의 중요성을 알리는 총론적인 글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큰 흉년에 구학(溝壑)에 떨어져 시체로 나뒹굴지는 않을까 사람마다 관심을 가지고 있고, 떠돌며 이별하는 참상이 곳곳에서 눈에 가득하니 죽고 사는 것은 큰 문제이다. 보통 사람의 마음이 어찌 그렇지 않으리오? 그러나 공자가 말하지 않았는가? ‘자고로 언제나 죽음은 있었으니 백성은 믿음이 없으면 서지 못한다.’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이 될 수 있는 도이니 한 집안으로 말하면 자식이 효도하며 어버이는 인자하고 부부는 의롭고 형제는 우애하는 것이다. 지금 마을의 무지한 사람을 보면 그 마음이 먼저 생사의 갈림길에서 움직여서 부모, 형제, 처자를 버리고 스스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을 구하니 설사 먹을 것을 얻어서 살았더라도 이미 사람이 노릇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잃었으니 세상에 설 수 있겠는가? 무릇 믿음 없이 산다는 것은 살아있어도 오히려 죽은 것과 같고, 믿음이 있어서 죽었다면 죽었어도 오히려 살아 있는 것과 같으니 우리 집안사람들은 이 이치를 궁구하여 마음을 굳건히 정하여 효자(孝慈)와 우의(友義)를 명맥(命脈)으로 삼아 한 방에 머리를 모아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뿌리, 줄기, 껍질, 잎사귀로 식료를 만들어서 차라리 믿음이 있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믿음 없이 사는 것을 구하지 말라.”21)고 하였다.
21) 後滄先生文集 10권 237쪽. : “値此大無, 溝壑之憂, 人人關心, 流離之慘, 在在滿目, 死生大矣. 常情, 安得不然? 然孔子不云乎?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信者何? 人所以爲人之道, 以
후창은 가족들에게 믿음이 없으면 백성들이 이 세상에 서서 살 수 없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뒤, 사람이 사람 노릇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식이 효도하고 어버이는 인자하며 부부는 의롭고 형제는 우애하는 것이라고 한 뒤 효자(孝慈)와 우의(友義)로써 목숨을 삼아 초근목피를 먹으면서 신의 없이 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이는 일제 치하에 왜놈이 주는 더러운 음식을 먹고 의리 없는 목숨을 유지하기 보다는 가족 간에 효자(孝慈)와 우의(友義)를 지키면서 사람답게 살자는 것을 제창한 것이다. 따라서 후창의 제가법은 효자(孝慈)와 우의(友義)로써 집안을 다스리는 것으로 목숨을 걸고라도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 여겼다. 또한 후창은 가족을 위하여 구체적인 실천 규칙으로 가규「家規」를 지었다. 그 내용은 당시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에 관한 것으로 항목은 제사(祭祀), 사당(祠堂), 혼정신성(昏定晨省), 홍인(婚姻), 장지(葬地)등에 대한 설명이다. 제사와 사당의 항목에서는 제사의 의미와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낼 것을 설명하였고, 혼정신성에서 있어서는 자식의 도리를 설명하였으며 혼인에서는 혼인하는 사람의 생기를 살피고 그 선조는 따지지 말라고 하면서 생기는 자손이 번창하고 식도(食道)가 풍부함을 의미한다고 하였다.22) 장지에서는 무덤을 파내고 넘기는 땅을 사지 말라하였고, 타인 묘에 투장하지 말라 하였으며 평장을 하는 것은 시신을 버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 중 혼인을 할 때 가문을 따지지 말고 생기를 보라는 후창의 말은 매우 주목할 말한 말로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그 견해를 엿볼 수 있다.
교육은 일제 강점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 후창이 자신이 닦고 배우고 터득한 것을 현실세계에 실현하여 할 수 있었던 수단이었고, 사람들을 깨우처 패도를 극복하고 왕도를 회복하여 나라와 민족을 중흥시키고 미래를 기약할 수 있었던 희망의 끈이었다. 후창은 학행과 포부가 있었던 부친의 지시에 따라 17세 때(1900)부터 간제 문하에 나가 20여간을 수학하고 지극 정성으로 스승을 섬기면서 학문과 강학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그의 강학과 교육은 스승 간재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925년 42세 때부터 만종재(萬宗齋)에서
一家而言, 則子孝父慈夫婦義兄弟友, 是也. 今觀鄕里無知之人, 先動其心於死生之際, 棄父母兄弟妻子, 自求就食之方. 政使得食而生, 已失所以爲人之道, 何以立於世乎? 蓋無信而生, 則生而猶死, 有信而死,則死而猶生. 願我家衆, 深究此理, 堅定其心, 以孝慈友義爲命脈h, 聚首一室, 同心協力, 以根莖皮葉作食料. 寧可有信而死, 毋求無信而生也. 且死生有命, 聚居而未必皆死, 分散而未必皆生, 則何苦而先犯生, 而猶死之無信, 而竟失有信, 而生之兩得矣乎? 其亦惕念乎哉!”
22) 後滄先生文集 10권 226쪽. : “所謂生氣者, 指子孫繁衍, 食道豊裕而言也”
시작되었다. 그 후 2년 뒤에는 정읍군 덕천면 망제리 동곡에 동곡서재를 지어 후학을 양성했다. 그의 교육에 관한 이념과 체계적인 항목을 알 수 있는 글로는 남산제유제군「南山齋諭諸君」, 덕천사사규약「德川書社規約」과 대암서사시제군「臺巖書社示諸君」23) 등이 있다. 덕천서사규약「德川書社規約」에서는 거처(居處), 위의(威儀), 예수(禮數), 교도(交道), 과정(課程), 휴양(休養), 강규(講規) 등으로 항목을 나눠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였다. 이를 통하여 후창은 교육에 대하여 매우 엄밀하고 체계적인 교육시스템을 만들어 학생을 교육하였음을 알 수 있다. 후창이 만든 각반(各班)의 각과(各課) 교재는 다음과 같다.
갑반(甲班)- 원과(原課):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시경(詩經),
서경(書經),주역(易經), 춘추(春秋)
성리학과(性理學課): 근사록(近思錄), 성리대전(性理大全)
예과(禮課): 의례(儀禮), 예기(禮記), 가례(家禮)
사과(史課): 좌전(左傳), 마사(馬史), 강목(綱目), 속강목(續綱目), 동사제서(東史諸書)
정치과(政治課): 성학집요(聖學輯要), 반계수록(磻溪隨錄)
법과(法課): 대전통편(大典通編)
문장과(文章課): 팔대가(八代家)
을반(乙班)- 원과(原課): 소학(小學), 대학(大學), 논어(論語)
예과(禮課): 예기(禮記), 사례편람(四禮便覽)
사과(史課): 강목(綱目), 속강목(續綱目)
문장과(文章課): 고문진보(古文珍寶)
병반(丙班)- 원과(原課): 소학(小學), 논어(論語)
예과(禮課): 사례편람(四禮便覽)
사과(史課): 동사제서(東史諸書)
정반(丁班)- 원과(原課): 요결(要訣), 소학(小學), 대학(大學)
예과(禮課): 사례홀기(四禮笏記)
사과(史課): 동사제서(東史諸書)
23) 대암서사시제군「臺巖書社示諸君」은 후창이 대암서사(臺巖書社)에서 제군에 고한 글로 그 주요한 내용의 일부는 “제군들의 용심(用心)이 오히려 농공상고의 소인들이 힘을 쓰는 것보다 못하니 나는 제군들이 백성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을 바라기 어렵고 어쩌면 백성들의 좀벌레로 떨어지지 않을까 두렵다. 만약 이와 같다면 집으로 돌아가서 각자 농공상고의 일을 하여 그 일로 먹고 사는 것이 부끄럼이 없고 죄가 없는 것일 것이다. 각자는 두려워하면서 힘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스승을 따라 몸을 완성하는 것은 병자가 의원을 믿고 몸을 구제하는 것과 공이 같은 것이다.”
교과과정을 보면 전통 유학자가 배워야 할 서적과 실생활에 필요한내용을 체계적으로 배합하여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정반(丁班)에서 갑반(甲班)까지 빠지지 않고 들어 있는 과목은 원과(原課)에 속한 경전, 예과(禮課)에 속한 예서, 사과(史課)에 속한 역사이다. 이는 후창이 세 과목을 가르쳐야 할 가장 기초과목으로 여긴 것이다. 이 중 특이한 것은 최하위 과정인 정반(丁班)에서부터 갑반(甲班)까지 예서와 우리 역사를 체계적으로 가르친 다음 중국 역사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예(禮)는 개인과 사회의 실천규범으로서 예(禮)를 기초부터 체계적으로 가르쳤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예의가 바르고 사회와 국가적으로는 예(禮)로써 다스리는 예치(禮治)를 법치(法治)보다 우선한 것이다. 또한 그가 을반(乙班)부터 갑반(甲班)까지 문장과(文章課)를 넣은 것은 한문교육의 난이도를 고려하고 문장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으로 문장에 대한 그의 인식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갑과(甲課)에 법과(法課)와 정치과(政治課)가 있고 과목 중 반계수록이 있는 것을 보면 후창의 실용적 교육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특히 교과목의 하나로 반계수록을 채택하여 가르쳤다는 것은 그가 단순히 유가(儒家)의 원리적 이론만을 강조하여 가르친 교조적 유학자가 아니고 이용후생의 실학자적 면모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위의 과목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후창은 모든 반에 공통으로 낮에는 글씨를 연습하고 밤에는 수학과 작문(製述)을 하도록 규정해 놓았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후창이 길러내고자 한 사람은 유학적 자질을 갖추고 예를 잘 알아 바르게 행동하고 문장을 쓸 수 있으며 실용지식까지 겸비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후창은 교육에 있어서 전통유학자로서 매우 선구적이고 새로운 교육방법을 창안하여 실천했던 교육가였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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