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과 관련된 음악 유적지인 정읍시 칠보면 송산 마을, 유상대 유적의 윗마을이 남상계 마을이다. 지금은 가옥은 없어지고 하천뿐이다. 그 서쪽을 '장구뱀이'라 하고 서북쪽에는 큰 절터와 탑 석불이 있는데 '화랑구시'라고 전한다. 신라시대에는 화랑도, 즉 남자 무당들이 음악굿을 하고 장구를 만들고 한 것 같다. 그리고 윗마을은 만궁(滿弓)이라는 이름으로 그 시대에 활을 쏘았던 터로 추정된다. 그러나 조선 중종과 인조의 구테타를 기점으로 최치원은 '유교적 학자'로 채색되었다. 최치원은 음악가, 칠보 남상계 마을이 그 증거
여기서 최치원을 음악적으로 고증할 수 있는 마을 이름이 있어 다시 소개한다. 남상(濫觴)이란 말은 '술잔이 물 위에 흐른다', '술잔에 물이 넘쳐 흘러간다' 라는 뜻으로 사서삼경 공자가어(孔子家語) 편에 전한다.
그러니까 술잔을 시냇물에 띄운다는 의미이다. 공자 역시 음악가이며 음악으로 정치하라고 했다. 그러나 후대인 송나라 주자가 현재의 독재정치 유신헌법 같은 이데올로기적 규율로 음악을 제거시키고 '유교'라는 종교의 교주로 만들어 버렸다. 최치원도 마찬가지이다. 음악가로서 면모는 사장된 채 유교학자로 제조된 것이다. 887년 최치원이 태산태수 시절에 유행했던 풍속을 보여주는 부락 이름이 있다. 그 당시 신라의 방패막이 당나라가 이극용, 주전충 등의 반란으로 당나라는 패망의 위기에 있었기에 신라정부는 흔들리고 있었다. 권력중심부에서 소외된 최치원, '삼대목' 통해 신라음악 수준 높혔다 최치원은 신라로 돌아왔으나 권력층의 따돌림을 받고 지내다가 진성여왕과 세력가인 각간위홍에게 저속한 소리의 신라음악을 당나라 궁중음악의 고급양식으로 제정비하여 만들어 올린 것이 '삼대목'으로 보인다. 태산 지역에 호족으로 기반을 이루고 있던 태산 허씨(태인허씨)가 당나라 최대의 호화예술에 접근한 것은 사실이다. 당나라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서 위기에 처한 양귀비와 현종황제를 구출한 허겸이 당나라 현종 황제가 자기의 성씨 이씨로 성을 하사했다고 하는데 태산 허씨의 족보에 이들은 인천 이씨로 분가되어 나간다 전한다. 아마 태산 허씨 중에서 당나라에서 하성 받고 돌아와 허사문의 양자로 대대로 살다가 인천으로 분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최치원 이전부터 당나라에서 유행하는 고품격의 유상곡수(술잔을 물에 띄워 돌려서 권하기)놀이가 호족 허씨의 세력구역인 여기 칠보 남상계에서 유행되었지 않았나 한다. '삼대목' 출간 배경은 칠보 남상계 마을 최치원은 '저속한' 신라음악을 당나라 궁중음악의 고급양식으로 제정비하여 올리려는 의도를품었다. 음악의 선진지 칠보 남상계 마을에 와서 채보하고 편곡하여 삼대목이라는 음악책이 각간 위홍(진성여왕의 남편)의 이름으로 발행된다. 지금도 세간에서는 무명 작가가 유명인의 이름으로 작곡, 번역 등 출판을 하는 예가 많다. 최치원이 태산태수로 칠보에서 근무한 탓에 신라의 수도와 당나라에서 유학한 인재들이 칠보에 모여 부패한 신라 조정에 대한 불만과 한탄으로 세월을 보냈다. 물가에서 술잔을 돌리고 시를 읊으며 걱정하였다 전한다. 세류(細流), 남바위 등 남상계 주변 마을 이름이 그 증거 이곳 아랫마을인 남전 윗마을에 세류, 남바우 등이 있는데 세류라는 말도 역시 '세류남상(細流 濫觴)'이라는 말로 고서에 전한다. 즉 세류 남상이라는 유행된 문구가 마을 이름으로 그 시대부터 정착된듯하다. 남바위는 진시왕의 만리장성을 쌓으려다가 남은 바위라는 말도 있으나 같은 방식으로 고증해보건데 세류(細流)에서 나온 말임이 유력하다. 전통 음악이 관광상품으로 될 미래가 다가오는데 확실한 음악 유적을 고증을 통해 밝혀야 관광정읍에 미래가 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