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은 http://www.kssline.pe.kr/travel/t_base.html 이란 사이트에서 99년에 심양, 연길을 거쳐 백두산 등정을 하고온 여행기를 부분적으로 발췌해서 옮긴것입니다. 이번 백두산 등정에 참고가 되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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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 공항은 심양과는 달리 한국의 어느 도시에 온 느낌을 준다. 화장실의 변기부터 한국産이고 광장의 광고판도 대우와 아시아나의 광고로 메워져 있었으며 건물과 거리의 안내판은 모두 한국어, 중국어순으로 적혀 있었다. 마치 '우리 동네 같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았다. 공항 앞에 놓인 철도로는 60년대 풍 열차가 지나간다. 연길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는 확실히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었다. 초가집들이 있었기 때문일까?
연길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전용버스에서부터 현지 가이드(이수남 씨, 93년 설립된 연길문화국제여행사 직원)가 동승했다. 조선족 출신임이 언어적 차이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길의 비행기가 제시간에 뜨면 '부정상(비정상)'입니다. 우선 호텔에 도착하여 방을 '뽑으신(정하신)' 다음…". 그리고 가이드의 연길시 안내를 들으며 시가지 관찰이 시작되었다.
연길이 속한 연변은 길림성 조선족자치주로서 총인구 200만 중 80만이 조선족(한민족, 한족과 구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길은 조선족자치주의 州都에 해당되는 인구35만의 도시로서 조선족의 문화적 중심지이며 주민의 절반이 한국인이라고 하였다.(중국의 행정구역은 자치주(자치구, 성, 직할시와 동격)·시·군·읍·면·리로 나뉘며, 읍·면·리는 진·향·촌으로 불린다)
헐렁하게 생긴 골프연습장 앞과 시장 터를 지나자 '약방', '의약소', 미발소 등 옛날 이름의 상호가 닥지닥지 붙은 가게들이 보이고, 삼륜차와 합승버스(70년대의 마을버스), 프라이드 팝 크기 만한 택시들(CHANGAN)이 신기하게 보인다. 그래도 가이드는 인구당 택시 비율이 상해 다음으로 많으며 주로 한국에서 돈벌어온 부자들 소유임을 자랑한다. 영락없이 6,70년대의 우리나라 도시형태 모습이다.
백두산 호랑이像이 있는 로타리를 지나자 비교적 큰 건물인 연변조선족자치주 시청 사와 연길중심버스터미날, 연변동북아호텔이 보이기 시작했고, 연길시 중심을 가로지르는 하남 교(1936년 일제 때 건축, 공업구인 하남과 상업구인 하북을 분리) 건너 연변병원, 연변인민방송국(70%가 한국어방송, 한국 드라마 편성, '질투', '사랑이 뭐 길래' 등이 인기였다고 함, 연길 사람들이 보는 한국 드라마의 특징은 진실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연변 조선족의 민족성 동화에 기여했다고 함), 北大시장(북쪽에서 제일 크다는 의미)을 지나자 5성급 호텔이라는 연길대우호텔에 도착한다.
자신의 안내에 흡족한 듯 마지막으로 가이드가 묻는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도시라는 기분으로 편안하게 대하십시오"
연변대우반점(延邊大宇飯店 : YANBIAN DAEWOO HOTEL)
연길 공항에 내려서 승용차로 20분 거리, 연길역에서 10분 거리인 연길시 국자가에 위치해 있는 중국 동북아 지역의 유일한 5성급 호텔로서 우리 나라 기업인 대우가 독자 브랜드를 가지고 운영하고 있다. 1만 3천 5백평의 대지에 263개 객실을 갖고 있으며, 비지니스센타, 중식당, 한식당, 양식당, 각종 연회장, 디스코 클럽, 헬스 클럽, 사우나, 실내수영장 등이 있다.
호텔의 뷔페식당 겸 공연장에서 연변가무단의 특별 디너쇼(연변가요, 현대무용, 부채춤, 창고 춤 등)를 보게 되었다. 사회자의 말투부터가 관심을 끌었다. "여러분들을 '높이 모시고' 열심히 노래 불러 드리겠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오래오래 '앉으세요'(사세요)", "총경리(사장)께서 여러분께 보내는 감사의 편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등등‥
쇼를 보면서 옆에 있던 이 차장과 나는 무대 옆에서 반주 테이프를 돌리는 기사(악단장 역할)의 행동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가끔 스타트가 끊겨 관객의 이목을 받게 됨에도 줄담배를 피우질 안나, 한 잔 걸친 듯한 얼굴에 바지까지 걷어올리고 음료수를 마시는 등 전혀 관객에 대한 매너를 안중에 두지 않는 돌출된 행동을 하고 있었다. 마치 촌 건달이 타지 사람들 앞에서 걸렁 대듯이‥
여기서 우리는 사회주의 직업 관에서 발생하는 공통된 특징을 보게 된다. 자기도 즐기면서 일한다는 것이다. 이는 평등한 직업의식에서 나온 것 같다. 우리가 보아온 승무원도 그랬고, 식당의 웨이트리스와 가수, 무용단 모두 자신을 중시하는 작위적 행동을 조금씩이나마 보이고 있었다. 표정과 행동에서 무의식중 드러난다. 가령 호텔의 웨이트리스에게 냅킨을 요구하자 던지다시피 놓고 나간다. 가수나 무용수는 자기감정 표현에만 충실하다. 아직은 일방적인 CS을 구하기 힘들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서비스 제공자의 업무를 존중하며 서비스를 요구받는 것이 현명함을 느낀다.
이 같은 형태는 관광안내 팜플렛 문구에도 은연중 나타나 있다.「저희 연변국제문화려행사는 '고객제일, 질량제일'의 목표와 평등호혜의 원칙으로 국내외 려행업계 인사들과 정성 어린 합작을 원하고 있으며, 공동으로 려행사업을 발전시킬 것을 희망합니다.」
7월 16일 오전 6시 30분 호텔을 출발한 버스는 약간의 비가 내리는 연길 시가지를 빠져 나와 백두산을 향했다. 백두산까지는 70%정도가 비포장 도로로서 약 150여Km, 버스로 다섯 시간 이상이 걸린다. 이곳 사람들에게도 방문이 어려운 길인만치 상당한 인내력이 요구된다.
연길 거리(동서로 뻗은 길을 路라고 하며, 남북으로 뻗은 길을 거리라고 함)에는 은행(중국건설은행, 농공은행, 중국은행, 교통은행 등)과 우전국(체신국, 우정저축 취급)은 많았으나 보험회사(중국인민보험공사, 태평양보험, 평안보험, 중국보험 등이 있음) 건물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보험회사에서 왔다고 하니까 가이드는 연길에서도 보험에 들지 않고 있다가 사고 난 후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였다.
교통수단으로서 중국은 과히 자전거의 천국이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르면, 80년대에는 자전거가 귀해 가정의 중요한 기물(재산목록)로 취급되었으나 지금은 한국에서의 자가용 소유만큼이나 보편화되어 옛날 같은 재산적 메리트를 갖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새로 지은 아파트도 곳곳에 들어서고 있었다. 연길 사람들이 갖고 싶어하는 주택은 소위 '온돌식(보일러설치, '귀뚜라미 보일러'가 많이 들어와 있음)' 아파트로서 요즈음 작은 평수라도 온돌식 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는 총각이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했다.
기왕 나온 김에 인기 있는 신랑감이란 60년대에는 노동자와 군인, 80년대에는 대학생과 고등기술자가 최고였지만 지금은 합작회사나 무역회사에 근무하거나 가이드를 맡고 있는 이수남 씨 같은 여행가이드가 최고급 직업이라고 하였다.(가이드가 포함된다는 말에 이수남 씨 본인은 물론 일행 모두가 웃는다)
연길 시내의 교통질서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무질서가 질서에 가깝다. 언제든지 접촉사고를 볼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가 탄 버스는 호텔서 나오자마자 반대편 차량과의 충돌위기를 넘긴다. 그러나 운전자들은 당연한 일상으로 보듯 담담한 표정을 짓는다. 시내 도로에는 횡단보도와 신호등이 거의 없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차량들이 우선 회전이 법이고 보행자들은 상시 사고에 노출되어 있다. 교통표지판도 빈약하고 도로상태도 열악하다. 일단 교외로 들어서면 위험한 추월이 계속된다. 어찌 이러고도 교통사고가 없으랴.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의외로 자동차 수리소가 많아 보인다.(낡은 차량이 많은 것만으로도 자동차 수리소는 많아야 할 것이다)
한 때 주현미, 김지혜, 태진아가 공연하였다는 인민극장을 지나자 『개고기왕』이라는 대형 간판을 단 보신탕 집이 눈이 띈다. 원래 연변 사람들은 보신탕에 관심이 적었으나 한국 사람들이 찾고 나서 개고기, 미꾸라지 값을 올렸다고 한다. 결국 연변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한국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
연길 교외를 벗어나 용문 방향으로 '곧추' 내려가면 확장 공사 중에 있는 유로도로(收費處 있음)가 나오고 여기서 노동자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들이 일하는 태도가 한량해 보인다. 열의도 부족해 보인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르면, 여기에서 일하는 인부들은 대게 남부지방 출신이며 막노동은 가장 힘든 직업이라고 한다. 연변 사람들은 이들보다는 생활수준이 높아 이같이 어렵고 힘든 직업(3D업종?)은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인근의 시멘트공장 벽에는 '환경을 보호하여 인민에게 복지를 마련하여 주자'라는 붉은 표어가 적혀있었다. 중국에는 표어가 많다. 산림보호와 관련해서는 요소 요소마다 '산림녹화(樹林綠化), 산불소방(산불예방)'라는 표어가 걸려있었다. 농경지역 입구에는 '법을 어기고 토지를 비준, 사용하는 모든 행위와 간결히 투쟁하자'. 법원 건물에는 '당에서 만족하는 법원이 되고, 인민이 만족하는 법관이 되자', 경찰서 기둥에는 '긴급, 위험, 곤란한 일에는 경찰이‥' 등등, 중국도 북한처럼 표어 사회라고 보여진다. 어쩌면 이것이 그간의 사회주의를 지탱한 원동력일는지 모른다.
중국의 시골 색상을 두 가지로 표현하라면, 〈땅은 푸르고 가옥은 빨갛다〉고 할 수 있다. 농촌의 가옥은 대부분 빨간 흙벽돌로 지어진 단층가옥이며, 반점(飯店)급 이상의 식당들도 한국의 중국 집 분위기처럼 금분을 입히거나 붉은 초서체로 쓴 글씨의 간판을 달고 있다.(반점은 일반 식당이나 여관, 대반점은 대형식당이나 호텔) 가옥은 단독가옥과 연립형 단층가옥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연립형 가옥은 집단농업의 잔재가 아닌가 싶었다.
들을 빼앗긴 민족의 애환이 겹겹이 서려있는 용정시를 지나 역시 인구의 66%가 조선족이 산다는 화룡縣을 지난다. 버스는 길 위를 배회하는 황소 대여섯 마리를 조심스럽게 비켜간다. 연변에는 조선족이 한국(조선)에서 들여 온 요소들이 많다고 하였다. 황소만 보더라도 노란 빛을 띠는 조선 황소와 검은빛을 띠는 동북 황소가 섞여 있다. 가옥형태를 보면 어느 집이든 지붕만 보면 조선족이 살고 집임을 알 수 있는데 漢족(중국인구의 92%)의 지붕처마는 밋밋한 사각이지만 조선족의 지붕처마는 갈라진 팔각구조로 지어져
있다.
백두산 가는 버스 안에는 2명의 가이드가 타고 있었다. 이번 여행을 진행하는 혜초여행사 이진영 과장과 연길문화국제여행사의 현지가이드 이수남 씨였다. 막간을 이용하여 마이크를 잡은 혜초여행사 이진영 과장으로부터 회사명의 내력과 네팔근무 체험 등을 들을 수 있었다. '혜초'란 이름은 시인 고은 씨가 '신왕오천축국전' 집필을 위해 네팔을 여행할 당시, 신라시대 혜초 스님의 원대한 이상과 고행을 생각하며 지어준 이름이며 이름만큼이나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자랑하였다. 이와 별도로, 이진영 과장은 유명한 TV 드라마 작가와 함께 하며 배운 것이 있다며 의외로 드라마 작가들은 말하기보다는 시종여일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체험을 끝까지 진지하게 듣더라는 것을 강조했다. 이 과장의 결론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일수록 듣는 시간이 많으며, 스스로 생각해 볼 때 '주워 들어서 만든다'는 것만큼 작가에게 필요한 자질은 없다고 하였다.
잠시 천막을 친 간이휴게소에 들리자 상인들의 세가 시작된다. "산삼(장래삼)이 10만원이면 거저 주는 것"이라며 달라붙는데 이들은 한 번 가격을 물어보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상혼을 발휘한다. 1,500원 하는 커피 4잔을 시키고 1만원 짜리 지폐를 주었으나 잔돈을 거슬러주지 않아 "왜 거스름돈 안 줍니까?" 물었더니, 대뜸 "줬잖아요"라고 황당한 대꾸를 하여 놀래기도 하였다. 어느 곳이든 장사하는 방법은 똑같다. 신사적이고 점잔은 방법으로는 장사하기도 힘들고 물리치기도 어렵다.
화룡은 일제시대 때 김좌진 장군이 이끈 독립군의 청산리 전투가 발생한 곳이다. 간도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통쾌한 싸움은 없었다며 청산리 전투를 소개했다. 2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 왔지만 이제 겨우 1/3밖에 오지 못했다고 한다. 비속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몇 시간을 견딘다는 것도 대단한 고역이다. 이러한 마음을 아는지 가이드 이수남 씨는 중국에서는 중국식대로, 느긋한 마음을 먹지 않으면 관광하기 어렵다고 말해준다.
느긋함을 가져보려고 애써 본다. 창문을 열자 숲 속을 지나는 시원한 공기가 들어온다. 삼림욕이 따로 없다. 화룡시에서 송강진으로 가는 길은 해발 1,500미터 완만한 고개의 연속이다. 전신주는 낮고 조금씩은 기울어져 있다. 큰 나무 아래로는 잡목들이 울창하고, 도로는 비록 비포장이지만 노면 상태와 배수로는 간결하게 정비되어 있다. 흥겨운 기분으로 음악을 듣던 중 문득 백두산에서 읽어보라는 준희의 편지를 꺼내본다.
길고 지루했던 고개 길을 넘어가자 내리던 비가 멈추고 깨끗한 하늘이 드러난다. "와! 개인다"는 환호가 나온다. 군데군데 구름이 걸쳐있어 아직은 안심할 수 없다. 백두산 주변의 변덕스런 날씨 때문에 구름 낀 날씨에 천지만 볼 수만 있어도 행운이라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송강津에 들어서자 '백두산 62Km'라는 작은 안내판이 눈에 띈다. 적재함이 터질 듯 위태하게 목재를 실은 차량도 비켜 지나간다.
송강진 읍내에 들어서면서 처음으로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길 양편에 빼곡이 들어선 봇짐장수며 아마도 장날인 듯 싶었다. 한립식당(칸막이가 없는 재래식 간이화장실 있음)에서 북한식 점심을 먹고 나와 그곳에 살거나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리어카 달린 자전거가 있고 마차를 끌고 가는 노부부도 있다. 마차에 웅크려 앉은 여자의 얼굴이 창백해 보인다. 어디 아픈 것은 아닐까. 햇볕에 그을리고 세파에 찌들려 어디 보도사진 공모전 모델로 나올만한 모습이다. 문명과 비문명이 동시에 교차한다. 여유가 많아 단지 여행이나 하는 사람들이 볼 때는 이들에게 희망이 무의미해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여행자들을 의식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지나친다. 삶이 다 그런 것임을 아는 것일까. 어쨌든 진솔한 삶의 현장을 보는 것 같아 여행의 리얼함을 느낀다.
송강津과 이도백하津을 지난 버스는 끝없이 펼쳐진 수림가도(樹林街道) 사이를 힘차게 달린다. 비가 그친 땅이라 먼지조차 없다. 간간이 따라붙은 승용차와 지프들이 요란한 크락션을 울리며 정신없이 추월해댄다. 언제 백두산 정상이 보일는지 초조한 마음으로 밖을 내다본다. 백두산 천지를 보기 위해 정말 먼길을 돌아왔고 아직도 남아있는 먼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드디어 백두산 입구에 도착한다. 관리사무소(收費處)에서 입장료(100元, 한국 14,000원)를 내고 장백산(長白山)이라고 적힌 관문을 지나 25Km를 더 들어가니 천지 행 지프들이 대기 중인 주차장에 도착하고, 곧바로 바꿔 탄 지프는 관경대와 흑풍구를 경유하는 왼쪽 오름 코스를 통해 20여분 달려 기상대 지나 천문봉 바로 아래의 개활지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였다.
비는 걷혔지만 천문봉(2,670m) 주위를 덮은 짙은 구름 때문에 천지(天池)가 보이지 않는다. 10여분을 기다렸지만 좀처럼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우선 백두산에 올랐음을 확인하는 비석 앞에 서서 사진 찍기에 바쁘다. 가이드 2인은 다음날 천지 재등반 스케줄이 있고 도보로 내려가야 하므로 시간이 없다며 하산을 재촉했다. 백두산 날씨가 변덕스러운 것은 러시아 한류와 태평양 난류가 천지주위에서 교차하기 때문이며, 시간이 제한된 관광객들은 통상적으로 열 번 중 잘해야 두세 번 볼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아쉽지만 다음날을 기대하며 하산에 임해야 했고 하산 코스는 승사하(乘 河)가 있는 달문(천지와 장백폭포의 연결통로) 쪽이었으나 여기서부터 의외의 행운이 시작되었다.
천문봉에서 팔괘암 근처로 내려올 즈음 구름의 일부가 걷히며 가파른 능선 사이로 푸른 수면이 스치듯 나타나기 시작했다. "천지가 보인다!" 외치자, 모두 천지 쪽으로 모여든다. 극적인 순간이었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던가.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스텐바이 - 큐"다. 셔터소리가 정신없이 터진다. 그러나 천지의 일부 모습조차 잠시일 뿐, 다시 구름이 덮이며 천지는 좀처럼 얼굴을 들어내지 않는다. 다시 천지관광을 포기하고 하산을 시작하려 했으나 변덕스런 구름은 마치 약올리기나 하려는 듯 살짝 구름 치마를 들치며 발길을 막는다. "다시, 천지다!" 외치자, 모두 가던 길에서 올라와 천지 쪽으로 향한다. 이젠 속지 않는다고 마음먹기 무섭게 본격적으로 안개는 걷히고 천지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행운이다! 누가 천지를 포기하라 했던가. 있는 대로 필름을 돌린다. 그러나 줌(ZOOM)은 작동되지만 셔터가 열리지 않는다. 이게 무슨 불상사란 말인가. 배터리 용량이 부족하다는 표시가 나온다. 리듐 배터리라 어디서 구할 수도 없다. 그러나 뜻이 있으면 길이 열린다고 할까. 예전에 쓰던 배터리로 갈아 끼우자 다시 셔터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절벽 사이로 형성된 가파른 통로를 타고 천지로 내려간다. 화강암과 화산석, 화산재가 섞여있는 지면은 조금만 잘못 밟아도 부서져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매우 위험한 길이다. 화산재와 용암이 말라서 만들어진 화산석은 백짓장처럼 가볍다. 한라산에서도 보았던 용암석과 같다.
수면이 완전히 드러난 천지를 눈앞에 두고 승사하 차가운 물을 건넌다. 양말을 벗고 바지춤을 걷어올린 채 무릎에 차는 깊이를 만끽하며 건너는 기분이 마음에 삼삼하다. 마치 도하작전을 연상시킨다. 먼저 건너던 사람들이 "아! 뜨거워!"란 말로서 차가움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옳건 그르건 모두가 즐겁다는 표정이다.
드디어 천지 수면에 다다른다. 물은 맑고 차갑다. 산천어는 보이지 않지만 무당벌레 몇 마리가 돌멩이 위를 기어 다닌다. 200mm 마크로 렌즈를 돌려본다. 수면위로는 간간이 가벼운 물결이 인다. 明鏡止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퇴임한 강 이사께선 흥에 겨워 하모니카를 꺼내 분다. '고향의 봄',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등. 알고 보니 강 이사 생일이라고 하였다. 누구보다도 뜻깊은 하루를 보내는 것 같다. 모두가 합창으로 생일을 축하한다. 물통에 천지 물을 담아 배낭 속에 넣는다. 즉석에서 끓인 라면 국물과 고량주 한잔은 기분을 고조시킨다. 드디어 반대편 북한 땅에 있는 장군 봉의 구름마저 걷히려 한다. 백두산 가장 높은 봉우리인 장군봉 구름이 걷히자 모두가 탄성을 지른다.
우리 일행만이 점유했던 천지에서의 1시간은 이렇게 지나갔다. 오후 3시 반이 지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이드는 하산을 재촉한다. 하산은 2시간 반 내지 3시간이 소요된다. 오던 길을 다시 올라 흑풍구 쪽으로 향한다. 아쉬움은 있지만 내일의 산행이 다시 있고 이미 충분한 시간을 가진지라 더 이상의 미련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산 길은 나무 한 점 없는 초원이다. 잘게 흩어진 화산석과 푸석푸석한 흙을 덮은 풀잎은 카페트를 깔아놓은 듯 연약하고 푹신푹신하다. 바닥이 물러 조심조심 발길을 내딛는다. 미끄러지기 쉬워 한쪽 발바닥과 발목에 바짝 힘을 준다. 원체 바닥에서 탄력을 받지 못하므로 하체의 피로가 가중된다. 하산 코스 중 절반이상은 고산 식물로 덮인 구릉지대가 계속된다.
일행과 떨어져서 1Km 쯤 내려왔을 때, 왼쪽 계곡에서 나오는 우렁찬 물소리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백두산 또 하나의 명물인 장백폭포가 보인다. 전망 좋은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땀을 씻고 절벽아래의 폭포를 관전한다. 떨어지는 물소리가 양안의 거대한 절벽을 치고 협곡에 메아리친다. 세찬 소리가 바람에 묻혀 피부 속까지 차갑게 스며드는 것 같다. 서녘의 햇빛을 받은 맞은 편 산등성이는 푸른 하늘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신비의 지평선을 창조한다.
짜릿한 감동을 느끼며 다시 한 번 천지 주변의 봉우리를 바라본다. 저 봉우리가 언제 다시 폭발할까. 백두산의 화산이 다시 폭발하는 날 우리 푸른 민족은 불같은 역사를 창조하리라!
Think! Think! 또 Think!
보고 생각할수록 감동적인 장면의 연속이다. 역시 대자연은 '나'라는 존재의 미미함을 깨닫게도 하지만 한편, 이 땅을 사는 작은 개체로서 자아의 소중함과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삶의 의미를 깨우치게 한다.
백두산 등산의 진미는 천지만이 아니었다. 백두산 중턱에서 내려다 본 광활한 초록바다. 하늘과 지면이 맞닿는 수백 리 바깥까지 원시림(原始林)으로 펼쳐진 끝없는 '수림(樹林)의 바다'(林海)는 더욱 장관이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젊음이 불타오른다. 돌아가면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백두산 천지가 어떠했냐고? 그 때 나는 대답할 것이다. 천지보다 북방을 흐르는 임해가 더 인상적이었다고. 누가 말했던가. 중국은 잠자는 호랑이라고. 자원이 이러하듯이 중국은 하늘이 부여한 엄청난 인프라와 가능성을 가진 나라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좀 더 능선을 내려오다 보니 장백폭포의 전경이 보다 더 잘 보이는 구조물이 나타난다. 이곳은 능선이 좁고 절벽 사이가 낮아 세찬 바람이 지나가는 곳이기도 하다. 이름하여 흑풍구(黑風口)라고 한다. 흑풍구에는 피풍석(避風石)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피풍석은 이곳을 지나다 세찬 바람에 날려 죽었다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바람을 잠재우기를 비는 마음에서 세운 것이라고 하였다.
주차장에서 천문봉 아래까지는 포장이 되어있고 관광객을 태워 오르는 지프 차량이 다닌다. 흑풍구부터 주차장까지는 산길과 도로의 만남을 반복한다. 흑풍구에서 산길 능선을 따라 좀 더 하산하다 보면 천 길 높이의 절벽을 기점으로 도로와 능선이 만나는 전망소에 이른다. 누가 보아도 위험해 보인다. 특별한 방어 구조물이 없는 전망대에는 간단한 난간만이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소문에 의하면 예전에는 관광객을 버스가 운송했으나 이곳 내리막길에서 버스가 구른 후로는 버스 대신 위험이 적은 지프로 운송 수단을 바꿨다고 하였다.(연도 미상, 군인 1명 외 승객 수십명 전원 사망)
주차장 방향으로 내려오기를 두어 시간, 온몸은 상당한 피로를 느낀다. 지름길인 산길보다는 돌아가더라도 도로 보행이 편하다. 초지가 끝나고 스키장입구부터 포장된 오솔길로 들어선다. 내려갈수록 점점 굵어지는 나무숲에서는 새 소리가 들리고,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음을 감촉한다. 높은 지대여서 그런지 생각보다 어둠은 늦게 찾아오는 것 같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전용버스를 이용 호텔(장백산국제관광호텔, 한일합작기업)에 도착한다. 호텔 직원은 슬리퍼란 용어대신 '끌신'이란 용어를 사용하란다. 그렇게 백두산에서의 하루를 마친다. 하늘엔 선명한 별들이 반짝인다.
깊은 계곡임에도 새벽 4시가 되자 여명이 시작된다. 6시가 되자 한낮처럼 밝다. 아침에 본 호텔의 외관은 밤의 신비와는 딴 판이다. 사회주의 건물은 디자인보다는 기능중심으로 지어져 창호와 마무리가 떨어진다. 일반 공산품의 품질은 발전이 더딘 것 같다. 여종업원들의 용모는 시골티가 나지만 화장 끼 없는 얼굴이다. 성형된 세련미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수수함이 좋아 보인다.
7월 17일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이도백하(二道白河, 장백폭포에서 송화 강으로 흐르는 지류) 계곡 물을 건너 우측 능선을 경유, 천지로 향하는 트레킹을 시작했다. 전 날의 피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첫 번째 목표는 계곡 근처에 있는 소천지(小天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원주 260m, 깊이 10m의 소천지는 장백호 또는 은환호(銀環湖)라고도 불리는 작은 천지다. 이도백하 계곡에는 소천지와 적지(赤池)라는 두 개의 화산구가 있다. 빽빽이 들어선 나무숲을 따라 가파른 능선을 오르자 초지로 뒤덮인 탁 트인 능선들을 맞
는다.
여기서 천지까지는 능선들의 연속이다. 힘든 고비 때마다 평지가 있고 풀밭의 규모는 점점 커진다. 지난 밤 오늘의 산행 여부를 두고 말들이 많았었다. 이미 천지를 보았으니 더 이상의 천지 산행을 그만두고 다른 프로그램을 갖자는 의견들이 있었다. 그러나 원래의 계획대로 다시 한번 천지에 오르기로 결정하였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천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다시 오르고 싶은 것이다. 반대편(오른 쪽) 능선 너머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어떤 세계가 펼쳐 있을까 하는 궁금함이 있었다.
탐험가의 마음속에는 항상 발길이 닿지 않았던 저 산너머의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그리움이 있다. 그것은 미래를 향해 살아가는 인간의 본능일 뿐이다. 우리가 어렵게 백두산 천지를 찾아온 것도 결국 백두산 정기로 내일의 새로움을 취하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하나의 언덕을 오르면 또 다른 언덕이 기다린다. 언덕과 언덕 사이에 펼쳐진 초원은 너무도 깨끗하고 아름답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 울리는 알프스 초지와 다를 바 없다. 스위스 융프라우요흐에서 라우터부르넨 계곡에 이르는 초원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마음은 이미 자연에 동화되어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들도 나무도 푸른빛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임 속에서 빛으로 파란 하늘 보며 자랄 거예요…♪♬."
계속되는 오르막길이라 가끔은 휴식이 필요함을 느낀다. 산은 아름답지만 인간의 체력은 유한하다. 효과적인 페이스 유지를 위해서는 체력의 안배가 필요하다. 무리하지 않는 가운데 탄력을 받는 전진을 해야한다. 등산의 묘미는 생각과 신체의 조화에서 나온다. 등산행위도 하나의 작은 드라마요 작품세계와 같은 길을 걷는다. 쓰라림 속에서 피어난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나 이역만리 고행의 여로를 파헤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같은 맥락의 작품일 것이다. 결국 등산이 인생의 모습이라면 다름 아닌 혜초의 길이다. 목표에 오를 때까지는 잠시 쉬었다가도 떠나야 할 구도자의 길인 것이다.
몇 차례 작은 정상을 갖춘 날카로운 능선에 서자 이번 코스에서 단 한번 주어지는 장백폭포 전경이 드러난다. 잠시 땀을 닦으며 폭포를 감상한다. 장백폭포를 중심으로 좌청룡 우백호는 갈라진다. 승사하를 따라 내려온 천지 물은 68m의 장대한 거대한 장백폭포를 힘차게 뛰어내려 가파른 협곡을 세차게 흐른다. 장백폭포에 이르는 1.2Km의 승사하(일명 통천하)는 멀리서 볼 때 마치 폭포의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라 하여 불려진 이름이며 이도백하를 흐른 물은 연해주 쑹화강(松花江)으로 흐른다.
날씨가 변덕인가 보는 마음이 변덕인가. 아래서 보면 산꼭대기만 구름에 덮여 있건만 구름 덮힌 산꼭대기에서 보면 천하가 흐려보인다. 용의 비늘 모양으로 주름져 쌓여있는 잔설지대(녹지 않은 눈이 이물과 함께 굳어 멀리서 볼 때 기묘한 형상을 보임)를 돌아 그럭저럭 정상 부근에 다다르자 천지가 내려다보인다. 적당한 위치에서 배낭을 등받이 삼아 누워 천지를 바라본다. 나밖에 없는 공간이다. 그리고 스쳐 지나간 생각들을 정리해 본다.
"Listen And See!, Think And Write!"
살아있는 한 정진하라는 파우스트의 정신을 되새기며 잔뜩 생각에 힘을 줘 본다. 왜 이 좋은 벌판에 사람들이 거의 없을까.. 교통의 불편함도 있고 접근 상 폐쇄성도 여전히 남아있다. 사회주의 국가에 들어 올 수 있었던 것만으로 행운임을 자족해야 할까. 어차피 관광수입을 위해서 개방했다면 최소한의 편의시설 등 관련시설을 준비해 놓았어야 할텐데 송강진 한립식당이나 매표소 주변시설을 보면 너무 열악하다는 아쉬움이 든다. 현재의 실태를 보고 묻는다. 이런 것이 어찌 인민의 낙원이었단 말인가. 눈앞의 현실이 그간의 산물이라면 사회주의는 분명 현실성이 없는 이념이었던 것 아닌가?
천지를 보고 앉아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일행들이 주변에 모이기 시작한다. 이어서 백두산 삼행시를 지어보는 시간을 갖는다.
백, 백두산 높이 올라 민족의 정기를 호흡하며
두, 두 갈래로 나뉜 칠천 만의 마음을 생각하니
산, 산산이 찢어진 그 마음을 어찌 헤아리랴. (곽)
백, 백두산 瑞氣 어린 천지에 올라 힘차게 뻗어 내린 요동 땅을 바라보니
두, 두만강 허리 삼아 동북을 내닫던 가마민족의 기백과 영화가 되살아난다.
산, 산천초목아, 너 또한 세월을 함께 했듯이 신 천년의 역사를 지켜줄거나. (金)
잠시 후 못내 천지가 아쉬운지 바로 위에 있는 봉우리(용문봉 2,595m)까지 다녀 온 곽대표이사께서 취재기자(?)를 찾으며 새로 떠올랐다는 시상(詩想)을 이야기한다.
백, 백두산에 올라 명경 같은 천지를 바라보니
두, 두 갈래로 갈라진 인간의 선과 악을 생각하고
산, 산에 핀 들꽃 처럼 고고 하게 살지어다
'마지막 천지방문' 때문이련 가. 좀처럼 하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짙은 운무가 몰려오고 결국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정신없는 하산을 시작했다. 신발 속까지 물이 스미고 비옷 속으로 더운 땀이 흘러내린다. 미끄러짐도 조심해야 했다. 중간쯤 내려왔을 때 대상(隊商 Caravan)의 무리처럼 길게 늘어서 빗속을 오르는 한미은행 산악회(25명)와 교차한다. 오를 땐 2시간 반이 걸렸지만 내려올 땐 1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숙소 가까운 소천지에 이를 때서야 비는 멈추고 햇빛은 다시 돋기 시작했다. 장백폭포 위쪽의 천지주변 구름도 걷히기 시작한다. 공안원의 눈길(?)을 피해 이도백하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두 번째 등산의 피로를 씻는다.
이로서 백두산 등산을 마친다. 중식 후 버스에 오르자 호텔직원들이 현관에 나와 손을 흔들며 배웅한다. 주차장 근처에 이르자 들어오고 나가는 차량이 뒤엉켜 한동안 교통마비를 이룬다. 토요일, 일요일 연휴(중국의 雙休假제도)이기 때문이란다. 왕복 2차선 도로임에도 행락 버스가 1개 차선을 점유하자 남은 1개 차선을 교차하는 차량들이 먼저 진입하느라고 애쓴다. 이럴 때 교통경찰은 어디에 있나? 나가는 차량들이 먼저 진입하였으나 뒤늦게 나타난 교통경찰관은 들어오는 차량을 우선 통행시킨다. 이유를 묻자 '정부 차량'이기 때문이란다. 사회주의에서는 아직도 기관원의 끗발이 유효한가 보다.
어느 곳을 돌아보아도 산림녹화가 잘 되어있다. 백두산 주변은 천연림이 무성하다. 나무숲 사이로 반듯하게 닦여진 도로를 따라 이도, 송강, 화룡, 용정을 거쳐 연길로 돌아온다. 갈 때보다 오는 길의 마을에는 사람들이 많다. 아이들도 많이 나와있다. 방학을 하였고 휴일이기 때문인 것 같다. 연변 일대의 자연부락 환경을 보면 "그 시절을 아시나요"가 생각난다. 아무리 보아도 60년대의 우리 모습이다
두만강에서 가까운 용정市는 북간도의 수도로서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강한 우리 민족성도 남아있다고 하였다. 가이드는 용정시 입구에 있는 수수밭 농장을 가리켜 길이 60리에 해당하며 조선족이 경영하는 농장 중 2번째로 큰 규모라고 자랑하였다. 용정시에는 '선구자' 노래가사에 나오는 '한줄기 해란강'과 '일송정 푸른 솔'이 있다. 고향을 버리고 이곳에 정착한 한민족에게는 슬픈 역사를 지닌 도시임에 틀림없다. 원래 일송정 밑에는 1,000년 묵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었지만 일제가 이를 미워하며 갖은 학대를 가해 1938년 말라 죽었다고 한다. 지금 있는 소나무는 조선족 자치정부에서 민족 정기를 고취하고자 백두산에서 옮겨 심어 놓은 것이라고 하였다.
어느 덧 황혼이 질 무렵 연길 시내로 들어선다. '천람 야시장'에는 연길 사람들이 모두 모인 듯 북적거린다. 도로를 점유한 행상과 노견의 포장마차가 입추의 여지없이 자리를 메우고 있다. 마치 조선족의 천국처럼 보인다. 연변자치주조선청사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건축한 공공건물로서는 제일 오래된 건물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우리 조선족이 자치정부를 두고 있듯이 중국사회에서는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이상의 대우는 불가능할뿐더러 소수민족의 분수에 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넓은
교차로에는 "중국 제일의 모범적 자치주를 건설하자"는 표어도 붙어 있었다.
대우호텔에 도착하기 전에 朝中합작 류경호텔 1층의 류경반점(북한음식점)에서의 저녁식사가 있었다. 음식은 볶은 나물類 중심의 코스요리였으나 음식자체보다는 이곳의 분위기와 여종업원들의 서비스 형태가 관심을 끌었다. 식당 TV모니터에는 꽃 파는 소녀와 광산 굴진공('노동영웅' 취급)의 관계 등을 그린 북한의 영상물이 나왔고, 북조선 뱃지를 단 종업원들은 음식 서빙을 끝내자마자 기다린 듯한 즉석 공연을 펼치기 시작했다. 연변가무단에게서 들었던 연변의 민족가요 '반갑습니다'(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동-포-여러분 반갑습니다…♬)를 필두로 레이저디스크 반주기에 맞춰 북한 노래를 부르자 흥에 겨운 관광객들은 주위에 몰려들어 기념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구성지게 잘 부를까! 연기를 하듯 감정을 실은 열창에 빠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더욱 예뻐 보인다. 가름한 용모는 아니지만 흔히 이북 사람들이 말하는 복스러운 얼굴이다. 눈가에 스치는 부드러움이며 뜯어볼수록 순수해 보이는 미인이다. 남남북녀라는 아버지의 말을 실감한다. 이토록 아름답고 수려한 아가씨들이 어째서 '수령님'이란 우상 속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어야 하는가. 더구나 이들 스스로 사상과 체제의 유물을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고 있다면 이 또한 기막힌 운명의 굴레 아니겠는가.
외면적으로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데 넘어야 할 내면의 갭이 존재한다는 것이 같은 동족으로서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생각할수록 가슴 저리고 바라볼수록 연민의 정이 스민다. 하지만 우리가 멀었던 연변 땅에도 올 수 있듯이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한 언젠가 대동강 물을 녹이는 봄기운처럼 체제의 벽은 부식될 것이라 믿는다.(대우호텔 앞 노래방 주인은 류경반점 종업원들을 비롯한 파견 직원들은 주로 북한의 상류층 딸들이라고 하였다. 상류층이란 성분이 좋은 출신이며 예쁘고 노래와 무용 잘하고 봉급도 많다고
하였다)
7월 18일(일) 다시 연길을 나와 두만강에 접경도시 도문(투먼)을 향한다. 이른 아침임에도 중심가 노상에는 패션쇼 준비가 한참이다. 축하식의 전통무용 연습인 것 같다. 벌써 연길 시내는 4번째 지난다. 저녁때 돌아오면 5번째 지나는 셈이다. 시내지도는 없지만 벌써 웬만한 건물은 머리 속에 그려진다. 이 날 가이드의 첫 인사말은 "밥 드셨습니까?"였다. 사회주의 초기시절 중국사회는 너무 빈곤하여 이렇게 첫인사를 시작하였다고 하였다.(5부 심양에서 재 언급)
연길에서의 도문까지는 두 시간 거리다. 용정부터 도문까지는 비포장 상태다. 지나는 차량이 거의 없고 간간이 버스만이 다닌다. 이윽고 막바지 고개를 넘자 준용하천 크기의 두만강이 보이고 좀 더 거슬러 오르자 중조(中朝)국경 초소가 있는 삼합대교(1937년도 준공, 총 길이 300m)에 도착한다.(여기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야겠다. 사전 안내에 의하면 우리가 방문하는 두만강 접경은 도문이라고 했지만 도문(?)에 이르는 동안 어떠한 표지판이나 시가지조차 보지 못했다. 여기에 의문을 품고 확인한 바에 따르면 북한의 회령으로 통하는 삼합대교는 행정구역상 용정 삼합에 있으며, 원래의 도문은 한반도 최북단 은진으로 통하는 두만강 철교가 있는 곳으로 용정 북쪽에 다른 길이 있다.)
"국경에서는 담배피지 마라, 군인을 찍거나 사람 없는 사진은 찍지 마라, 벌금은 부르는 게 값이다."라는 가이드의 말에 약간은 긴장하고 있었으나 국경은 기대이상으로 평온한 분위기였다. 많지 않은 군인들은 건물 마당에서 상의를 벗은 채 족구를 하고 있었고 꽃제비 차림의 아이들 너덧 명이 군인들 주변에서 놀고 있었다.
중국 측 바리케이트 앞에는 정복차림의 군인 1명이 지키고 있었다. 가이드 이수남 씨가 복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군인 한 명과 밝은 표정으로 다가오자 바리케이트 넘어 다리 위에서의 사진 찍기가 허용되었다. 불과 100m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북한측 군인 3명이 사진을 피해 초소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북한 쪽으로 달려갈 수 있으련만 아무도 그런 걱정은 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사람들은 자유로운 행동을 두려워하고, 통제에 익숙한 사람들은 오히려 자유로운 행동을 찾으려 하는 인식의 비대칭이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매번 지나치기만 했던 용정은 연변관광의 마지막 코스였다. 용정시는 어린 시절의 추억를 되살리게 하는 도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말 마차, 소 구루마, 자전거로 끄는 인력거, 구멍가게, 구형자전거, 나무시트의 리발점, 미발청(미용실), 아이들의 옷차림, 곳곳의 다방, 스탠드가 하나인 가유점(주유소), 일명 '아이스께끼' 형태의 얼음과자, 딱딱한 연필과 누런 노트, 다라에 넣어 파는 과일장사 등 모든 면에서 어린 시절의 우리 모습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했다고 본다.
용정은 (북)간도의 수도로서 일제하 독립운동의 성지라 할 정도로 민족정신이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첫 번째 방문은 시인 윤동주의 생가가 있었던 '명동마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명동마을의 존재는 삼합에서 용정으로 오는 길에 세워진 「윤동주의 生家」란 돌비석으로 알 수 있다. 조선인 서른세대가 모여 산다는 명동 촌은 구한말(1899) 윤동주의 외삼촌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약연 목사가 이 곳에 교회와 명동학교를 짓고 정착한 마을로서, 수많은 민족지사를 배출한 민족공동체 마을로 알려져 있다.
'해란 강'과 '일송정 푸른 솔'로 대변되는 민족혼의 도시 용정을 떠난다. 이제부터는 아쉬움만 남는다. 연길 공항으로 가는 길에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곰락원과 연길선물센터에 들렸다. 곰락원(1988년 설립)은 용문과 연길 사이에 있는 대 단위 곰 사육지로서 러시아 불곰과 백두산 반달곰 580여 마리를 키우고 있다. 북경지사에 있는 곰 480마리까지 합치면 아시아 최대규모의 곰 사육단지라는 자랑이 있었다. 년간 40여 마리의 아기 곰이 탄생하고 있으며, 야생보호의 차원에서 곰은 죽이지 않거니와 매년 5마리씩 백두산에 방목한다고 하였다. 곰의 일생 중 1년 동안만 쓸개즙을 빼내는데 1일 평균 50내지 80cc를 빼내며 이 정도는 하루 이틀이면 재생되는 정도라고 하였다. 가이드 관광에서 으례이 경험했듯이 지정된 통로를 따라 곰 사육 과정을 안내 받고 마지막엔 웅담주 시음과 황담(120$) 또는 흑담(85$)을 사게 된다.
영업을 본업으로 하는 보험회사 직원들이지만 우리 일행은 이들의 세일즈 기법에 대하여 혀를 내두른다. 용정중학교 안내원도 뛰어나지만 곰락원과 길림성여행자상점의 상술에는 '사상 최고의 약장사'라는 별명이 따를 만 했다. 기(도입, 관심집중) 승(전개, 흥미고조) 전(반전, 극적인 호소) 결(여운, 소기의 결과도출) 논리에 따라 판매 목적을 완수하는 기법은 배울 점이 많다.
중국인의 상술이라고 할까. 이들의 판매기술이 뛰어난 것은 멀지도 않은 연길 공항에서 확인하게 된다. 곰락원에서 산 18만원 짜리 황담이 4만원에 판매되고 있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14만원의 부가가치를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엄격히 보아 황당해할 필요도 없다. 애초 현지 가이드가 말하기를 중국에서는 결코 조급해서는 안 되며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만사에 느긋한 관광을 해야 좋다는 충고를 잊은 때문 아닐까.
이 같은 해프닝을 뒤로하고 17시 50분말 항공편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 연길을 떠난다. 연길 시내는 오고가며 5번이나 지나친 덕분에 왠 만한 건물은 눈에 익을 정도가 되었다. 이미 정들은 도시를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아쉬움 때문이런가. 비행기에서 바라본 요동 하늘의 구름 띠(雲海)는 가히 환상적으로 다가왔다. 갖가지 모양의 층층진 구름은 서녘의 태양 빛과 조화를 이루며 갖가지 형상을 만들고 있었다.
불과 4박5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먼길을 다녀온 기분이다.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들었고 많은 것을 배웠다. 민족의 靈山인 백두산에 올라 천지의 신비로움과 끝없이 펼쳐진 원시림의 바다를 보았고, 만주 연변에서 나라 잃고 살아온 조선족의 애환을 엿볼 수 있었다.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 '선구자'와 '두만강' 노래를 부르며 민족혼을 느낄 수 있었고, 동포애를 통해 하나의 세상에 살고 있다는 동질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보다 더한 체험의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 본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사고로 인식할 때 비로소 진정한 지식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뜻깊은 여행이란 익숙했던 곳에서든 낯선 곳에서든 변화의 바람을 실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함에서도 그렇고, 자기 스스로의 변화에서도 똑같은 스펙트럼이 요구됨을 느꼈다.
누구에게나 나름대로 사물을 보는 중심이 있다. 중심적 사고는 특유의 정체성 때문에 쉽게 바뀌지 않는 성향이 있다. 따라서 상시 상황을 파악하고 변화와 더불어 좌표를 보강하는 개방성과 탐구욕을 갖지 않는 한, 건강한 지식 샘을 갖추었다고 보기 어렵다. 마르지 않는 지식샘은 나이 속에서의 젊음이요, 사람 속에서의 사랑이요, 가슴속에서의 혁명이요, 생각 속에서의 비전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번 백두산 여행은 두 가지 의미를 남겨주었다.
하나는, 백두산 천지 자체가 주었던 진한 감동이다. 그간 접근이 어려웠던 백두대간의 최고봉에 올랐다는 것이 뜻 깊은 도전이었으며, 마르지 않는 신비의 샘, 천지로부터 얻는 특별한 영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개인이건 회사건 천지의 물과 같이 마르지 않는 복원력과 깊이를 갖출 때 비로소 젊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백두산 등산은 천지와 같은 젊음을 일깨우는 계기로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Think-Week서의 보람이다. 백두산 주변의 조선족 삶과 역사를 통해 과거를 돌아보고 새로운 천년을 바라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溫故而知新이라고 할까. 중세에서 현대에 걸친 장구한 밀레니엄의 역사가 장백의 폭포수와 연변의 역사처럼 흘러가고 있건만, 안타깝게도 천지 너머의 세계처럼 舊천년의 굴레를 벗겨내지 못한 구태의 요소도 남아있음을 새겨보게 된다.
백두산 가는 길에서 선구자들의 화신을 보고 겨레의 소중함을 느꼈다. 천지에 올라 20세기의 황혼과 21세기의 서광을 지켜보았다. 연변 조선족의 생활상을 반추하며 삶의 소중함과 세월의 도도함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신 천년을 맞는 각오와 계획을 가다듬게 되었다. 백두산 여행은 성찰의 기회로서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 어떤 시간과 역사도 한 번 지나가면 되돌릴 수 없다는 것과 당면한 수레바퀴는 스스로 굴려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새삼 되새기며 짧은 여행 소감을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