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고의 안경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최고의 안경은 지난 84년도에 발견된 것으로써, 1590년도에 통신부사로 일본을 다녀오기도 했던 조선시대 사람 김성일의 안경이다.
경북 안동에 거주하고 있는 그의 14대손이 소장하고 있는 이 안경은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테를 만든 재질은 귀갑이며, 폈다, 접었다 할수 있고 정밀한 경첩을 달아서 폈을 때는 고정시킬 수가 있다. 끈을 꿰어 귀에 고정하게 되어 있는데, 이 끈은 후세에 다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안경집은 나무를 파서 안경을 접어 넣게 되어 있고 뚜껑은 옆으로 비껴 열게 되어 있다.
한편 이러한 김성일이 사용하던 안경이 발견됨에 따라 우리나라 안경의 전래사가 수정의 여지를 안게 되었는데, 우선 임진왜란 중에 안경이 전래되었다는 주장이 수정되고 , 최소한 임진왜란 전에 안경이 존재했다는 설이 가능해 진다. 왜냐하면 김성일은 임진왜란 초기에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또 당시에 이미 안경이 제조되었으리라는 추정도 있을수 있다. 그러므로 명확히 알기 어려우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살펴볼 때 우리나라의 안경은 대략 임진왜란 전인 1580년경 이전에 중국을 통해 전래되어 오지않았나 추측된다. 다만 이러한 안경이 착용시의 경이로움과 까다로운 예법 그리고 귀중품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할수 있다.
● 경주남석 안경
1600년대 초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경주남석안경은 우리나라 경주에서 채굴된 수정을 이용해서 만든 안경을 말하는데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경주의 남산에서 나오는 수정을 가공해서 만든 안경을 말한다. 이러한 경주남석안경은 근래에 이르기 까지 특산품안경으로 명성을 떨치면서 우리나라 안경역사의 큰 맥을 형성해 왔다. 오늘날 까지 전하는 안경 유물 가운데서 볼 수 있는 많은 경주남석안경이 이러한 사실을 잘 입증 해 주고 있다.
우리나라에 안경이 전래되어 그 존재가 알려지면서부터 늘어 나는 수용을 감당하기 위해 외국으로부터 안경이 수입되었다. 문헌에 나타난 것을 살펴보면 조선조 중엽인 순조대에 이르러서 안경이 유행하였고 이런 안경 가운데는 일본과 중국에서 수입된 안경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수입 안경은 그 물량이 극히 제한되어 경주남석안경은 많은 인기를 끌었다.
경주 남석안경은 품질이 뛰어난 명성 높은 안경이었다. 그 이유는 경주에서 채굴되는 수정의 품질이 고려 때 중국에 알려질 정도로 우수했고, 거기에 우리 선조들의 제조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남석안경의 값은 당시에 엄청나게 비쌌다. 미국인 선교사 제임스 게일이 [코리안 스케치]에 수록한 일화에 의하면 남석안경은 당시에 미국 돈으로 15달러나 주어야 구입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게일은 또 이러한 거금에도 불구 하고 당시의 양반들은 이를 구입 못해 안달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안경의 제작 기술이 발달하면서 남석안경이 대량 생산되자 가격도 하락했는데, 1939년도엔 최고 80원에서 최저 2원 짜리까지 다양한 제품이 생산,판매 되었다.
● 생활관습과 안경
우리나라의 안경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에 비롯된 유구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오랜 전통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안경은 오랫동안 그늘에 가리워진채 빛을 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안경이 오랫동안 제 구실을 하지 못한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으나, 그 중에서도 우리민족의 생활 관습에 따른 안경착용시의 숱한 제약과 안경에 대한 폐쇠적인 사고가 주요 원인일 것이다.
조선조 중엽에 전래된 안경은 17세기경에 우리의 손으로 제작이 되었다. 그러나 안경은 조선조 후기에 이르기 까지 극히 소량으로 생산되어 제한된 일부 층에게만 보급 되었다. 그러므로 안경에 대한 일반의 인식은 아주 희박 하였으며, 안경은 높은 신분 혹은 나이가 많이 든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 되었고, 이러한 인식은 안경의 생산과 보급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안경이 그래도 나름 되로의 자리를 찾고 발전을 이룩한 시기는 영조 때부터 였다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발전한 안경은 이후 세간에 널리 퍼져 정조 때에는 임금조차 노년에 안경을 사용하였다.
● 안경예법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렸지만 예전에는 안경착용에 매우 까다로운 예법이 뒤따랐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 나설 때에는 안경을 쓰지 못한다던가, 자신 보다 신분이 높거나 연장자인 사람 앞에서는 안경을 착용할 수 없다는 등의 예법이 그것이다.
이는 안경이 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노인들만 쓰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즉 노인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 앞에서 젊은 사람이나 비천한 계급의 사람이 안경을 착용하면 큰 무례를 행하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중기 이후에 그려진 그림 가운데 안경을 착용한 모습이 단한 점도 없는데서 잘 드러난다. 굳이 찾아본다면 조선 조 중엽 문신의 한 초상화가 있을 뿐인데, 이 초상화에서도 안경은 끼고 있지 않고 부자연스럽게 안경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고 있는 그림 일뿐이다.
안경사용에 따른 까다로운 예법은 조선조말까지 이어졌던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 당시 선교사들의기록에서도 많이 찾아 볼수 있다. 안경사용에 따르는 여러 제약은 안경의 보급에 적지않은 장애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안경이 전래된 16세기말에서 18세기 중엽에 이르기 까지 거의 200년 세월이 흐르도록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16세기 말에 전래된 것으로 보이는 안경은 대략 20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야 민간에 까지 보급될 만큼 인습의 벽은 두터웠던 것이다.
● 이탈리아의 프로렌스 지방
안경이 최초로 만들어지고 전파된 곳은 어디일까?
안경을 처음 발명한 사람과 그 시기는 정확하게 기록된 문헌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으나 , 외국의 교재에서 인용되는 기록으로는 이탈이아의 플로렌스 지방의 한 공동묘지의 비문을 들고 있다 .
그 비문에는 '여기 플로렌스 에 살았던 안경 발명자 [Salvino d'Armato degli Armati] 여기 잠들다 . 신이여 그를 용서하소서'라고 새겨져 있다 . 그러나 Salvino d'Armato degli Armati 라는 사람이 진정 최초로 안경을 발명했다는 것에는 많은 의문이 있으나 , 안경의 출현시기와 장소가 , 이 사람이 생을 영위했을 13세기 후반에서 이탈리아의 프로렌스 지방이 유력한 것으로 되어 있다 . 또 중국 문헌에 따르면 13세기에 안경 사용 기록이 있어 안경의 발생의 근원지가 중국이라고 하는 설도 있으나 , 이는 당시 실크로드를 통하여 이탈리아에서 전해져 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안경의 기록이라고 생각된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의하면 이 당시의 중국의 안경은 귀족들의 고급 액세서리로 보여진다 . 안경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그림은 1352년 이탈이아의 화가 '토모소 다 모레나'가 그린 '위고 대주교의 초상화'로 , 이 그림은 현재 이탈리아의 '성 니콜라 사원'에 소장되어 있다 . 이 그림에 나와있는 안경은 일명 '대못안경'으로 나무나 동물의 뼈등으로 만든 안경테에 , 수정이나 유리로 된 둥근렌즈를 끼워넣은 단안경 재질에 따른 두 개를 대못으로 연결시킨 것이다.
이 후 안경테가 점점 개량이 되어 , 15세기경에 두 개의 단안경을 브릿지로 연결시킨 브릿지 안경이 등장하고 16세기경에는 안경이 널리 보급되어 여러가지 독특한 형태의 안경이 등장하게 되었다 .
예를 들면 영국이나 프랑스의 손잡이가 달린 안경과 외알안경(monocle)이 성행되고 , 가위안경도 개발되었다 .
현재의 안경과 같이 귀에 다리부의 끝부분을 걸릴 수 있도록 개발된 시기는 1850년 이후이며 , 이 시기에 무테안경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또 안경테의 재료로 금속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600년대이며 , 이후에는 귀갑테가 사용되었으며 , 1868년에 개발된 플라스틱이 안경테에 사용되어 안경 자체의 무게를 줄이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
안경의 발달과정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1)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안경이 보급되기 시작하여 (2) 1450년 독일의 '구텐베르크'에 의한 활자의 발명은 안경의 폭발적인 보급의 기폭제가 되었고 (3) 1611년 독일의 '케플러'에 의하여 근시현상의 이론체계가 수립되었고 (4) 1623년 근대적인 안경이 스페인에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 (5) 원시현상의 이론체계는 1704년 영국의 '아이작 뉴턴' (6) 이중초점렌즈의 고안은 1775년 미국의 '벤자민 플랭클린' (7) 1801년 영국의 '토마스영'이 자기 눈의 난시 발견으로 토릭렌즈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8) '울라스톤 , 오스왈트 , 체리닝'의 안경광학의 연구를 거쳐 (9) 1825년 , 영국의 '에어리'에 의하여 난시용 안경렌즈가 개발. (10) 다음해인 1826년 미국의 '존 아이작 호킨스'에 의하여 삼중초점렌즈가 개발되고 (11) 1904년 누진다초점렌즈가 미국의 에브스에 의하여 개발되었다
그 후 , 플라스틱 렌즈의 개발과 안경의 경량화 추세 , 그리고 1902년 유리콘택트렌즈의 개발등으로 끊없는 안경의 발달은 이어졌고, 특히 플라스틱 소재는 끊임없는 발달을 이루어 왔다 .
안경의 경량화 바람은 1982년경 일본의 일본등지에서 금속제 티타늄 안경테와 탄소섬유 등으로 만든 안경테가 최초로 발매되어 오늘날의 인기를 독점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안경테의 표면처리기술과 도장기술의 발달로 자원 절약적인 면에 기여한 도장테는 물론이고 형상기억합금 소재를 통한 안경까지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
● 우리나라의 경우
우리나라의 안경에 대한 기원은 아직 까지 선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는 그 당시의 시대상이라든가 문헌기록의 발달 사항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남아 있는 문헌과 김성일의 안경 등으로 추정해 볼 때, 이땅에 안경이 들어온 것은 대략 임진왜란 전인 1580년경 중국을 통해 전래되어 온 것으로 추측된다.
문헌에 따르면 18C중엽에 우리나라 에는30여종의 안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그렇다면 30여종이나 되는 안경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이규경이 써놓은 문서에는 이러한 안경종류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알아보면 [노인안경, 장년안경, 중년안경, 근시안경, 충안경(현미경을 지칭한 말), 수안경, 망안경, 대망속경, 범렬안경(품질이 좋지 않은 안경이란 뜻)] 등등이 있다. 이렇게 많은 안경 가운데는 유물로 전해져 오는 것도 있지만 수안경이니, 다물경이니 하는 것은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이 없어서 구체적인 형태를 알 수는 없다. 당시에는 안경의 재료로써 수정을 사용하였고 유리로 만든 외제 안경을 상품으로 여겼다. 그리고 이때 일본으로부터 망원경 등이 수입되었음을알 수 있으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수정으로 만든 안경알은 화기를 제거한 뒤에 사용한다고 했는데 이는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러한 것은 이규광의 저서 [지봉유설]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이 학설은 또한, 정조실록에 나타난 “안경은 200년전에 처음 있은 물건이다”라는 정조의 말을 통해서도 뒷받침되고있다. 다만 안경이 착용시의 경이로움과 까다로운 예법 그리고 귀중품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 안경의 이름
조선시대에는 안경을 애체라고 하였다. 이 애체라는 말은 중국어 표기에서 그대로 따온 것인데, 학자들은 이 용어로써 안경의 기원을 밝히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제일 먼저 안경을 썼는지 확실한 근거는 없으나 안경계 창간호에서는 임진왜란 당시에 가장 멋쟁이로 불리던 이항복 선생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