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예수도 붓다도 노숙자였다>>
예수와 노숙자
예수님에 대한 정의는 많다.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말씀, 선포자, 치유자, 전지전능, 예
언자, 사제, 왕, 기적, 사랑의 마술사, 천주의 어린양, 십자가, 부활, 영원한 생명, 하늘나
라, 목수의 아들 등. 수없이 많은 단어로 정의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정의가 불가능한 분
이다.
이런 수많은 정의들 가운데 ‘노숙자’라는 단어는 상상도 하지 않는다. 신학자들에게도 예
외는 아니다. 노숙자라는 정의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불경스런 정의라고까지 생
각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보다 먼저 구도자의 길을 가신 부처님도 노숙자였다. 동굴과 숲 속과 공동묘지에
서 주로 잠을 청했다. 종종 수도승들이 생활하는 공동체에서 머무르기도 했지만 주로 노
숙을 하셨고 노숙을 권고하셨다. 예수님 또한 노숙자였고 부처님처럼 노숙을 가르치셨
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마태 8, 20)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의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마태 10, 9-10)는 예수의 당부를 감안할 때 예수
님과 제자들 역시 노숙할 때가 많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많은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노숙자로 정의하려는 것은 왜일까? 노숙자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예수님을 노숙자로 정의하려는 이유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기후조건과 예
수님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노숙은 흔한 일이었을 것이다.
노숙자, 길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 노숙자들을 생각하면 음식과 잠자리가 떠오른다. 그렇
다면 노숙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사업실패, 왕따, 실직, 무능, 질병 등 다양한 원인들
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인생을 길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인생을 길이라고 말할 때 모든 사람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고, 인생이라는 길에서 잠을 자는 노숙자일 수 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
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
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가수 최희준 씨의 하숙생 가사처럼 인생은 나그네길인지도 모른다. 길거리에서 잠을 청하
는 노숙자는 나그네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지구에 파견된 예수님의 삶도 영원한 세상을
향한 순례의 여정, 나그네이셨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지상의 나그네, 지상의 순례자라고 말한다.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
도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수 천리의 나그네 여정을 가야 했고, 아기 예수님을 위
해 성모님과 요셉성인이 가신 이집트 피난과 나자렛 귀향 역시 나그네 길이었다. 전교여
행을 다녔던 12제자들과 사도 바오로 역시 나그네 여정을 가야 했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
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
한 곳”(루가 9, 12)이라는 오병이어 기적이야기에서 노숙자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 왔던 군중들 역시 나그네 여정이었다.
장정만 오천 명이 배불리 먹은 기적. 예수님 주변의 예루살렘 부인들을 생각하면 여성의
수는 남성의 배에 달했을 것이고,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드린 소년
을 보면 어린이와 청소년의 수도 장정의 수 못지않았을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장정
만 5천명이었으니 2만 명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고, 숙박시설도 많지
않았던 그 시대를 생각하면 군중들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로서 노숙의 삶을 각오하고 모
여든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을 노숙을 체험한 사람들로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예
수님의 주변에는 늘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병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인 노숙자들이 많았다.
예수님을 노숙자의 벗으로 보는 관점에는 노숙자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비난은 물론, 동
정과 안쓰러운 눈길까지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자는 종교적 혜안이 숨어 있다.
노숙자의 삶을 떠오르게 하는 시 한 편이 있다. 나환우 시인인 한하운 씨의 전라도 길이
다.
전라도 길 -소록도 가는 길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 낯선 친구 만나면 / 우리들 문둥이끼
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 벗으면 /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 먼 전라도 길
나환우의 애환을 그린 시지만, 가족과 친구들 이웃과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당하고 있
는 노숙자들의 애환을 아리게 통감할 수 있는 절창의 시다. 의학의 발달로 나환우들이 줄
어들고 여러 이유로 노숙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996년 IMF 이후 노숙자들은 우리 주변
의 풍경이 되었다. 서울역이 그 대표적인 풍경이다.
노숙자가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것은 희망이고,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더
러운 옷을 입고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노숙자들이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은 현실이 아닐
까? 우리가 노숙자를 보고 눈살을 찌푸린다고 해서 노숙자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
다. 노숙자가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옛날이야기일지 모르지만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한 자매님을 만났다. 1950~60년대 우
리 과거를 뒤돌아보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저희 할아버지는 정읍에서 잘 사는 부자였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길거리에 거지들
이 넘쳐 났습니다. 어느 해 봄 읍내 가는 길에서 많은 거지들을 만났습니다. 읍내에서 일
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할아버지는 우리 집에 가서 살자며 길에서 만난 거지들을 데리고
집으로 왔습니다.
집을 지어주고 땅을 주었는데 거지의 게으른 습성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교회를 짓고 읍
내 교회에 찾아가 목사님을 청했습니다. 목사님 봉급을 주며 함께 신앙생활을 하자 거지
들의 습성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고향 마을에 가면 그 교회가 남아 있습니다. 그 거지들의 후손이 지금도 할아버지
의 은혜를 잊지 못해 아버지를 찾아옵니다. 할아버지에게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입니
다.”
먹을 것은 물론 잠자리도 구걸해야 했던 예수님의 공생활,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했던 사
람들의 마음으로 노숙자들을 기쁘게 맞이하는 환대의 집이 있다. 인도의 성녀인 마더 데
레사 수녀의 삶이 그러했다. 한국전쟁 이후 부산으로 몰려든 거지들. 소 알로이시오슈월
쓰 신부는 노숙자들을 거두기 위해 구호병원을 시작했고, 소년의 집 보육시설을 설립했
다.
성서의 등장하는 노숙자들 역시 많다. 대표적인 노숙자는 부자가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
을 받다가 눈을 들어보니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자기 집 대문간에 살았던 종기투성
이의 나자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지 못했던 거지다. 재
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 역시 한동안 노숙자의 삶을 살았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
아오기까지의 과정에서 돼지먹이인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주린 배를 채우려 했으나 아무
도 먹을 것을 주지 않았던 처참한 삶, 알거지가 되어 돌아오는 여정은 노숙자의 삶 그 자
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노숙하며 예수님을 찾아온 가난한 민중에 대한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의 기적이라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소년이 드린 빵과 고기를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자 군중들이 각자 가져온 빵과 물고기를 나누었다는 해석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병을 치유받기 위해 가까운 마을에서 오기도 했지만, 1박 2일
이나 2박 3일 동안 찾아온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장거리 여행 동안 먹을 누룩 없는 빵
이 배낭에 넉넉히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빵을 나누었다. 우리 사회에도 먹을 것을 구걸
하고 잠자리가 없는 노숙자들이 많다. 빵을 나누는 일은 단지 먹을 것만 나누는 것을 이야
기 하지 않는다. 더 넓은 하늘나라를 향한 생각과 행동을 나누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생명과 평화를 위해 스스로 노숙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산과 강을
살리기 위해 현장을 지키는 사람들, 이라크와 레바논에서 전쟁종식을 위해 목숨을 건 사
람들, 평택에서 전쟁기지를 반대하며 노숙했던 많은 주민들과 성직자들, 노동자와 학생시
민들. 평화의 섬인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려는 것을 반대하는 주교님과 성직자들,
수도자들과 평신도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아름다운 이 땅의 하늘나라를 건설하기 위
해 헌신하는 수많은 시민들과 활동가들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놓으신 성체
성혈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신앙인들이다.)
우리들의 삶이 노숙자인 둘째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키우고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성대한 잔치까지 베풀어준 아버지의 마음이 될 때 우리 세상은 좀 더
아름다운 세상, 지상의 하늘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최종수 / 신부, 전주교구 팔복동 성당 주임이며, 지은 책으로 『지독한 갈증』, 『첫눈 같
은 당신』이 있다. |
첫댓글 참 감동적이고 공감가는 좋은 글들이 많네요~~~ '민들레 꿈' 카페에서 인성수양하고 갑니다~ ^^
저희들의 정신을 일깨워주는 카페를 찿아서 참 행복합니다......
아 좋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서영남 선생님과 베로니카님의 희망이 넘쳐나는 민들레 이야기가 좋아서 자주 들어와보게 됩니다.
보듬어 주고, 안아주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왜 우리가 화합하며 살아야 하는지...
민들레 국수집은 행동으로 알려 주네요.
가슴에 우러나오는 사랑과 희망의 나눔은
저의 메마른 가슴에 한줄기 단비를 내려줍니다.
민들레 국수집의 사랑에 이렇게 미소를 지어봅니다.
가난한 이웃 사랑을 천직으로 삼으시고 한결같이 곧고 바르게만 걸어가시는
서영남 선생님과 베로니카님께 주님의 크신 축복이 함께 하시길 빌며 건강하세요!!
서영남 대표님과 베로니카님의
깊은 신뢰를 받아본 이들은 하루를 희망차게,
몇 배의 힘으로 더욱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그 작은 행복의 씨앗이 더 넓게, 더 많이 퍼졌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을 다해 따뜻함을 배울 수 있는 곳 민들레사랑을 응원합니다...
우리사회에 조금은 소외되어 있을 분들을 챙기는
민들레의 따뜻한 마음씨에 마음이 찡해옵니다.
민들레 수사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가난한 마을의 희망을 키워주는 민들레 국수집...
시들지 않는 영원한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민들레의 발전을 기도합니다.
저희들에게 늘 새로운 마음과 겸손을 배우게 해주시는 두분께 항상 감사합니다.
저희들도 이웃분들을 따스한 시선으로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아무리 힘든 여정이라도 사랑이 꽃피는 민들레 국수집과 함께
걷는 여정은 행복과 희망입니다 *^^*
저도 민들레국수집처럼 아름다운 추억 만들어 볼 수 있도록 착하게 살아야 겠습니다.
민들레수사님, 베로니카님 파이팅~~
민들레 국수집 덕분에 진정한 행복함을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민들레 수사님과 베로니카님의 나눔이 우리 모두를 미소짓게 만듭니다.
아릅답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언제나 나누고 함께하는 민들레 국수집.
늘 사랑이 풍성한 민들레 국수집이 되길 바라며~~
오늘도 화이팅!!
아름다운 사랑나눔에 늘 감동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삶에 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의 사랑 계획도 하느님의 뜻대로 이어가시길 바래요.. 민들레국수집 파이팅!
따뜻한 사랑에 절로 따뜻해 지는 마음...
매듭 많은 세상이 돌아가는 작고도 큰 힘을 이곳에서 발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