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에 있어서 실패와 성공, 그리고 헌신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00만평의 농장주가 되기까지-
-강연 요지-
1. 서언
먼저 부족한 저를 이 영광된 자리에서 강연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독립유공자 유족회회장이신 김삼열회장님과 유족회 이사님들과 민족단체 단체장님들, 그리고 이 자리를 함께 해주신 관계자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선 저는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고귀한 지식이나 학식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저의 처절했던 실패와 수많은 역경을 극복해 오면서 겪었던 경험을 진솔하게 전함으로써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에게 꿈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고 “농사를 지어도 잘 살 수 있다”는 확신을 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감히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혹 저의 강연도중 마치 자기 자랑처럼 들리는 대목이 있더라도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2. 성공의 개념
많은 주위 분들이 “김용복은 성공했다”라고 부러워하면서 칭찬을 하곤 합니다. 제가 생각해도 저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성공의 정의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성공이라는 것이 어린 시절의 꿈과 희망했던 목표를 성인이 되어 온전하게 이루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면 분명 저도 성공한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혹독하고 처절한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상의 어떤 행복한 사람, 성공한 사람이 맛보았던 기쁨과 희열보다도 더 크고 짜릿한 행복과 기쁨, 그리고 성취감도 여러 차례 만끽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흔치않은 행운아라고 스스로 자평하면서 그 누구도 누리기 힘든 행복한 노후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감히 고백합니다.
3. 실의와 역경의 극복
저는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강진군의 한 작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재산이라고는 박토 200여 평뿐이고 일자무식인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의 5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3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늙은 홀아버지의 말라비틀어진 나오지도 않은 젖꼭지를 빨고 만지며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아직도 한으로 남아있거니와 어머니의 얼굴조차 모르고 성장해 가는 처절한 인생 출발을 겪어야 했던 인간으로 회고합니다. 이런 불우한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천만 다행으로 머리는 가히 나쁘지 않았던지 비록 농촌의 시골학교였지만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으며 리더십 있는 반장으로 열심히 성장하는 착한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너무나 가난했던 나의 선친께서는 막내아들의 월사금(등록금)도 책임질 수 없었으며 나는 중학교 2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채 치르지 못하고 교실에서 쫓겨 나와 별수 없이 학업을 중단하고 책가방 하나 달랑 메고 울면서 고향을 떠나 객지(부산)로 떠날 수밖에 없는 딱한 신세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4. 두 가지 꿈(땅 부자가 되자, 가난한 청소년을 돕는 장학 사업을 하자)
비마저 처량하게 내리던 어느 봄날 울면서 고향 하늘을 뒤돌아보며 몇 번이고 다짐했습니다. “기어코 성공해서 돌아오리라. 돈을 많이 벌어 우리 고향에서 제일 땅(전, 답)이 많은 부자가 되어 평생을 부잣집 일만 하러 다니시던 우리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리라, 천석꾼, 아니 만석꾼이 되리라. 그리고 나처럼 공부 잘하고 착한데도 가난 때문에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못하는 불쌍한 학생들을 도와 실컷 공부하도록 학비를 대주어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는 참된 일꾼으로 키우는 그런 사람이 되리라.” 이렇게 다짐에 다짐을 하면서 고향을 떠났던 것이 저의 15세 때의 모습이었습니다. 고생고생 끝에 청운의 꿈을 품고 도착한 부산이었지만, 아는 이 하나 없는 타향에서 나는 길거리나 기차역 대합실에서 밤을 새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이루어야 할 꿈이 있었으므로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배고프고 외로웠지만 영어사전과 씨름하면서 성공을 위해 열심히 힘을 길렀던 것입니다. 얼마 후 저는 미군 부대의 하우스 보이로 취직이 되었으며 성실함을 인정받아 부대장의 당번이 될 수 있었고 운전까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 시절 배운 영어와 운전 실력으로 저는 19세의 나이에 광주의 상무대 군사고문단(KMAG) 수송부의 통역관이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다시 서울에 올라와 미군부대에 취직을 하였으며 우여곡절 끝에 27세의 나이로 건국대학교 정외과 야간학부에 영감 소리를 들으며 입학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경야독으로 인한 과로로 저는 폐결핵을 얻게 되었으며 직장과 학업을 동시에 잃을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아내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학업만은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결핵이 완쾌된 후 저는 다시 미군부대에 직장을 얻었으며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미8군 사령부내 주한 메린랜드 주립대학 서울분교의 교무과장이라는 직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5. 전쟁터에 돈벌러 나가다.
월남전이 발발했을 때 저는 미 빈넬회사에 월급 375달러의 보급행정 기능공으로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역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출국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학 은사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출국할 수 있었고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끝내는 주월 한국인 협의회장이라는 직위(파월기술자 3,900여명)에까지 오를 수 있었고 상당한 재산가가 되어 이를 바탕으로 저는 서울에 나와 국제PP밴드라는 작은 공장의 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연탄가스 중독사고로 5명의 직원이 쓰러졌고 그중 2명이 사망하여 저는 다시 좌절의 늪으로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6. 다시 원점으로 전락 (150원짜리 설렁탕 장사)
이후 성남에서 150원짜리 설렁탕 장사를 하며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 사우디아라비아에 375달러의 미국회사 기능공 신분으로 다시 취업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저는 단돈 7달러를 손에 쥐고 10년 안에 성공하지 못하면 비록 시체로 돌아올망정 결코 이 나라에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몇 번이고 되새겼습니다.
7. 도전과 성취 (사우디 사막에 도전)
몇 년 후(1978년) 저는 사우디 사막에 푸른 초원을 가꾸겠다는 신념으로 삽 네 자루를 가지고 농장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직원들의 좌절, 배신 그리고 무더위 등 저의 앞길을 가로막는 수많은 난관이 저를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피눈물 나는 고생 끝에 드디어 1979년 4월 20일 배추 500㎏, 시가 2,500리얄(한화 약 50만원 상당)의 첫 수확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피와 눈물의 첫 수확 이었기에 감격하여 모든 직원들과 함께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때의 기쁨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 후 저는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사우디에서도 왕족들이나 타는 벤츠500을 타고 다니며 사우디아라비아 전역을 휩쓸었습니다. 이런 공로로 녹색혁명의 기수라는 거창한 칭호와 함께 1982년 저는 기능공의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정부로부터 석탑산업훈장을 받았으며, 1980년 이후 저는 한동안 개인 외화보유 랭킹 1인자의 위치까지 올랐습니다.
8. 새로운 꿈 (100만평의 농장주가 되자)
그리고 사우디에서 번 돈으로 우리나라에 버림받은 땅 100만평을 구입, 농경지를 조성 드디어 꿈에 그리던 만석꾼이 되었습니다. 저는 현재 서울에서 가장 부자촌이라는 강남의 압구정동에 살고 있으며 강남의 명동이라고 일컫는 압구정동의 로데오 거리에 (서울)영동농장 사옥을 세워 농장간판을 크게 내걸고 최신형 벤츠 420을 타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작으면 작고 크다면 크다고 할 수 있겠지만 현금 10억 원을 출자하여 (재)용복장학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존경받는 젊은 현직 판사, 대학교수, 의학박사 등 이미 100여명의 인재를 양성해 가고 있습니다. 저는 드디어 어린 시절의 꿈과 목표를 온전하게 다 이룬 셈입니다.
9. 꿈을 갖자, 목표를 정하자, 최선을 다하자.
저는 제 성공의 요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우선 저는 부모님과 환경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나만큼 비참한 가난과 실패를 겪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부모를 원망 할 수도 있었으며 환경을 탓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난과 실패를 탓하기보다는 매번 슬기롭게 극복하였습니다. 이것이 제가 사막에 녹색혁명을 이룰 수 있었던 요인이었습니다. 둘째 저는 남들보다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군부대 하우스보이 시절부터 철저하게 익힌 영어는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무기가 되어 주었으며 해외에서 성공하는데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셋째 저는 미래에 대한 정확한 예측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측을 바탕으로 저는 남들이 기피하고 싫어하는 그런 길(農業)을 걸어 오늘의 위치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10. 참 아름다운 삶 (인생 3기 분류)
저는 인생을 3단계로 구분해 볼 때 1단계는 출생에서부터 30세 전후 까지를 인생을 준비하는 단계로 보고, 2단계는 30세부터 60세 전후까지로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단계로 설정. 마지막으로 3단계는 60세부터 생을 마치는 날까지로 그동안 이루었던 모든 것(지식, 경험, 재산)을 정리하고 사회에 환원하는 기간으로 설정해 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사람은 우여곡절, 천신만고 끝에 사막에서 농업으로 승부를 걸어 단돈 7달러를 손에 쥐고 사우디아라비아 사막에 도전하여 야채재배에 성공,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여 100만평의 농장주가 되었을 뿐 아니라 “녹색혁명의 기수”라는 명예로운 칭호까지 얻었으며 자랑 같지만 IMF관리체제 하였을 때도 최고급 벤츠차를 당당하게 타고 다니면서 그래도 農者는 天下之大本이라고 서슴없이 외치며 농사꾼도 열심히 하면 벤츠차를 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며 여러 사람들의 격려와 박수를 받는 그런 위치에서 여생을 멋있고 아름답게 그리고 모든 것을 환원하고 향기 나는 삶의 마무리 길을 걷고 있음을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다는 것은 나의 작은 행복입니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공적인 삶을 원한다면 과욕을 버려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한도 끝도 없이 욕심을 부려 인생을 망치고 가족을 비롯하여 국가와 사회에 누를 끼치는 그런류의 성공은 재산, 높은 위치를 막론하고 성공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11. 사회에 환원
1년 앞을 내다보는 사람은 꽃씨를 심고, 10년 앞을 내다보는 사람은 나무를 심는다고 합니다. 저는 100년 앞을 내다보고 사람을 키우는 장학 사업에 전력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저의 삶이 식물을 재배하는 농부였다면 현재의 저의 삶은 인재를 키우는 농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82년 1차로 사재 현금 10억 원을 출자하여 재단법인 용복장학회를 설립 운영해 오고 있던 차 지난 2003년, 제가 만 70세가 되던 해에 2차로 작으나마 개인 재산 일백여 억 원을 출연하여 한사랑농촌문화재단의 선포식을 하였습니다.
어려운 농업과 농촌에서 새로운 희망을 모색하고 있는 숨은 애국자들을 찾아 2006년에 제1회 시상식을 거행했고, 올해 두 번째 시상식을 거행하였습니다.
70세가 넘은 저는 지금 제 인생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70, 80세가 넘어서 까지도 끝없는 욕심을 부리다가 끝내는 인생을 망치고 있으나 저는 후배들에게 남길 작은 지혜와 사회에 환원할 것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12. 재산에 대한 나의 철학
저는 돈에 대해 “돈은 분뇨와 같아서 한사람이 너무 많이 너무 오랫동안 가지고 있으면 부패하여 구린내가 나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적기에 여러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져 뿌려지면 향내가 나는 비료가 되어 죽어가는 생명도 살릴 수 있다.”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주변에서 몇 백억 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단 몇 원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쓰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과연 그런 사람들을 부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남들이 부자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요즘도 구멍 난 양말을 기워 신으며 밑창이 떨어진 십 수 년 된 낡은 구두를 아까워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몇 천 만원 아니 몇 억을 써도 아깝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돈은 어떻게 버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돈이란 벌 때보다 남을 위해 보람되게 쓸 때 행복을 가져다주는 묘한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13. 결론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저는 남달리 처절했던 인간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이제 행복한 노후를 살고 있습니다. 그간 70평생 살아오면서 여러 번의 좌절과 실패를 겪었지만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농업, 특히 그것도 사막에서의 농업을 시도하여 이제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부를 이루었고 사회적인 명성도 얻었습니다. 가난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00만평의 농장주가 되었으며 불우한 가정에 태어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100여명의 인재를 양성하여 사회 각 분야에 진출시키는 행복도 맛보고 있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은 이 사람이 강연이랍시고 여러분들 앞에서 귀한 시간을 빼앗은 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이 되기도 합니다. 연배자의 경험을 들으시고 조금이라도 여러분들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며 건강과 행운이 항상 여러분의 가정과 하시는 일에도 함께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울러 한민족단체협의회와 독립유공자유족회, 효세계화운동본부 효행종합건설주식회사가 더욱 발전하고 번성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7년 10월 10일
김 용 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