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마11:25]
그 때에 - 마태는 이 시간의 어구를 역사적인 시점을 명시(明示)해 주는 시간적 표현으로 사용하지 않고 다만 앞뒤 문맥을 분명히 구분하며 잇는 연결 내지는 접속사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즉 20-24절의 내용이 하나님의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묘사라면 이 어구가 시작된 25절에서부터 30절까지는 하나님이 용납(容納)해 주신 자들에 대한 설명이라 볼 수 있다. 한편 누가는 눅 10:21에서 이 어구와 비슷한 '이 때에' (*, 엔 아우테 테 호라)란 표현을 사용하면서 70인 전도사역의 성공적인 결과와 연결시키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 예수께서는 지금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갖는 엄숙하고도 고결한 영적 교제의 분위기에 잠겨 계신다(A.T. Robertson). 실로 예수께서 막힘없는 언어로 엮어낸 이하의 말씀은 당신의 경건한 영혼에서 우러나온 기도이자, 찬양이며, 자기 성찰(省察)이기도 했다(Bruce).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 이는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가리킨 표현이다. 특별히 '천지의 주재'라는 표현은(Tobit 7:18)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모든 피조물의 소유권이 그분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시 146:6; 사 42:5; 행 17:24). 그리고 '아버지'란 성부 하나님과의 인격적 일체(一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한 것이다(6:9; 26:39; 요 11:41; 17:1). 한편 이 말들을 다음 절의 내용과 연결시키면 하나님은 우주의 주권자이시므로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그의 뜻을 나타내시기도 하며 감추시기도 한다는 점이 암시(暗示)되어 있다.
이것을 - 예수의 이적을 가리킨 표현으로서 그 당시에 펼쳐지기 시작하였던 메시야 시대에 대한 인식과 예수가 가르치신 교훈의 의미까지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 - 어떤학자(Meyer)는 이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킨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문맥상 이 어구는 이 보다 더 넓고 포괄적인 대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예수는 16절에서 이 세대를, 그리고 20-24절에서는 몇몇 도시들을 책망하셨던 바, 이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란 이적과 권능을 보고도 자고(自高)하여 예수를 영접지 않는 이 도시들의 주민들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숨기시고 - 실로 자기 아집(我執)과 편견 및 이성적 판단으로서 예수와 그의 나라를 영적으로 깨닫기는 불가능하다. 특히 본문의 '숨기시고', '나타내심'등의 표현은 이러한 영적 진리의 이해가 하나님의 주권적 배려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시사한다. 정녕 성령의 도우시는 내적 조명(illumination)이 없이는 아무도 자연적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계시에 접근할 수 없다.
어린아이들 - 어린아이와 같이 솔직하고 순박한 자들로서(시 19:7; 119:130)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의 가르침에 기뻐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즉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란 스스로 만족하며 자칭 지혜롭다 하여 주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인 반면 어린아이들이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을 구하는 자들인 것이다.
감사하나이다(*, 여소몰로구마이 소이) - 찬송을 연상시킬 만큼의 감격적인 고백을 뜻한다(수 7:19; 대하 30:22; 롬 15:9).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초월적인 경륜(ruling)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同意)를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계신 것이다.
성 경: [마11:26]
옳소이다 - 이 말은 앞 구절에서 예수께서 감사하신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본 절의 맨 앞부분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 '왜냐하면')란 말이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고 있지 않으며, '아버지'란 호격(呼格) 역시 번역에서 생략되어 있다.
이렇게 된 것 - 25절에 언급된 바 하나님의 독특하신 계시 전달 방법을 가리킨다.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 직역하면 '당신 앞에 좋게 여겨지는 바가 되었습니다'가 된다. 이를 아람어식 표현으로 이해할 때 '당신의 은혜로우신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로 번역할 수 있다(삿 13:23).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실현이 완전히 합치(agreement)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는 곧 하나님의 즐거움이요 기쁨이 되는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이 표현은 하나님의 의지의 실현을 고대(苦待)하며 실현된 의지를 전적으로 수납(受納)했던 자들의 신앙 고백이 되기도 했다(말 1:15; B. Berakhoth 17a, 296). 실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지상의 기이한 일들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란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을 때가 빈번히 있다. 즉 우리의 지식을 넘어선 신비로운 사건에 대해 그것이 정당했다고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뜻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성 경: [마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 예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과는 구별되는 성부에 의한 성자로서의 권위를 스스로 주장하셨다(28:18; 요 13:3). 이 내용은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도 분명히 언급되고 있다(요 3:35; 6:46; 골 1:26, 27). 여기서 '모든 것'이란 성부께서 위임(委任)한 모든 것에 대한 통치권(Meyer), 또는 모든 인류를 통괄하실 권위(Bengel, De Wette), 가시적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Weiss), 전적인 위탁(委託)과 위임(McNeil), 그리스도의 진리에 관련된 모든 것(Grotius, Kuinoel),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Wycliffe) 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에의 위임은 성부의 통치가 중단되었음을 뜻하기 보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하여 만물을 지배하고 계시며 또 온 우주가 그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구속할 수 있으며 그들을 영광스러운 곳으로 인도하실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실로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시다(엡 1:21). 한편 본문의 '주셨으니' (*, 파레도데)란 무시간(無時間)적 부정 과거형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모든 것을 성자께 주셨음을 뜻하고 있으며, 결국 예수의 역사적 선재성(先在性)을 증거해 주고 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분명한 어구이다. 예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규정함으로써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인격적 일체성을 이루는 특별한 것으로서 다른 어떤 피조물의 접근도 불허(不許)하고 계신다. 한편 '아는'에 해당하는 원어 '에피기노스케이'(*)은 단순한 지적인 인식(*, 기노스케이)을 훨씬 능가하는 의미이다. 즉 이는 완전한 상태의 지식, 또는 전인적이고 초월적인 앎을 뜻하는 것이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본질적인 동일성을 이루지 못하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고전 2:10). 실로 아버지와 아들 상호간의 지식은 완전한 것이다. 따라서 계시가 인간에게 전달되지 않는 한 인간은 하나님, 곧 성자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부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다.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 여기서 '소원대로'(*, 부레타이)란 '...을 하기 원하는'이라는 뜻으로 강한 의지적 소망을 담고 있다. 이는 결국 성자는 성부를 인간들에게 능히 계시(revelation)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계시하시고자 하시는 강한 의지를 지니고 계심을 보여준다.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 이는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하는 메시야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의 본질적인 형상으로서의 성자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시자요(골 1:15),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시자(요 1:14, 18) 말씀 그 자체이시다(요 1:1). 하나님은 예수와 부자(父子) 관계에 있고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기 때문에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 자신을 나타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아버지를 계시하여 아버지를 알게 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을 권한도 부여받았던 것이다.
성 경: [마11:28]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초대의 말씀]
수고하고 - 원어 '호이 코피온테스'(*)는 현재 분사 능동형으로 명사적 용법으로 쓰이고 있다. 이는 스스로 많은 일들을 하여 계속해서 피곤에 지친 상태를 말한다.
무거운 짐진 자 - 원어 '페포르티스메노이'(*)는 현재분사 수동형으로서 타인에 의해 무거운 짐을 진 채 계속해서 지쳐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는 죄와 염려의 고통이나 육체적 의무 외에 특별히 전통적으로 부과되고 있는 율법과 유전(遺傳)의 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운다고 비난하신 적이 있다(23:1-4).
다 내게로 오라 - 예수는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죄인들을 초대(invitation)하시는 분이기도 하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마음을 두고 나아오는 그 어떤 사람도 모두 받을만한 넓은 사랑과 모든 인간을 친히 부르실 만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시고 구원과 안식(rest)에의 초대를 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예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25절)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 그리고 '아이같이 지혜는 없으나 순박한 자들'을 모두 초대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이것은 마지막날의 영원한 안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의 모든 갈등을 해소(解消)한 후의 평화와 안식까지도 가리키고 있다. 즉 신자가 주께로 가면 신자는 죄에서의 해방과 율법의 속박에서의 해방, 불안과 염려, 고통에서의 해방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은 특히 '내가' (*, 카고)란 말이 강조되어 있다. 즉 인간에게 무거운 짐을 맡겼던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친히 권위에 찬 초청에 걸맞게 절대적인 안식을 약속하셨던 것이다.
성 경: [마11:29]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초대의 말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 이사야는 메시야를 겸손히 고난받는 종으로 묘사하였고(사 42:2, 3; 53:1-2등), 다른 예언자들은 종말론적 메시야를 온유하고 겸손한 인격의 소유자로 소개하고 있다(슥 9:9). 마태는 이 예언의 성취(成就)를 지적하기 위해 예수의 겸허하며, 비천(卑賤)하신 모습을 종종 언급하였다. 여기서 '마음' (*, 카르디아)이란 원래 심장을 의미하는데 이는 단순히 육체의 일부로서의 심장 기관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히브리적 관념으로 인간이 지닌 전인격의 핵심적 좌소(坐所)로 이해된다. 이는 결국 예수의 본질적 성품을 언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은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순하다는 뜻이 아니라 종(servant)으로서 타인을 섬기며 고난을 당해서 타인의 아픔을 안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있는 말이다.
나의 멍에를 메고 - 유대인 사회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훈육(訓育)관계를 가리킬 때 이 표현을 관용적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멍에란 것은 짐승들에게 무거운 짐들을 지게 하여 그것들을 부리기 위해 씌우는 도구로서 당시 팔레스틴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pair)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었는 바, 결국 예수께서 주신 멍에를 멘다는 것은 곧 예수와 함께 메는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여하튼 본문은 제자들의 영적인 신앙 생활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율법의 멍에(Pirke Aboth 3:6, 집회서 51:26)를 메게 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지고 있는 멍에를 질 것을 당부한다. 실로 율법과 세상의 멍에가 아니면 예수와 사랑의 멍에를 메어야만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이다. 우리가 괴로움과 사망을 안겨다 주는 세상과 율법의 멍에를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방법, 곧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새롭고도 가벼운 멍에를 지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의 인생 질고(疾苦)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내게 배우라 - 이는 자신을 '모방하라', '자신의 경험을 배우라'(Stauffer)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만이 전달해 줄 수 있는 계시의 진리를 와서 배우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Schmid). 이는 결국 완전한 신앙 생활에의 부름일 것이다.
너희 마음이 - 여기서 '마음'(*, 프쉬케)이란 예수의 '마음'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생물학적인 생명의 요체(要諦) 또는 생명의 혼(soul)을 뜻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자의지(自意志), 자아(自我)라 할 수 있다.
쉼을 얻으리니 - 이는 28절의 '쉬게 하리라'는 약속에 대한 응답이다. 여기서 '얻으리니'(*, 휴레세테)란 원래 '찾다', '발견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참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안에 있었고, 또 그분이 주리라 약속한 것을 발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어구는 렘 6:16의 어구를 인용한 것 같다. 거기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고 하시면서 그러면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따라서 본문을 이 부분과 연관지어 이해하면 '옛적 길 곧 선한 길'로 행하려면 예수의 멍에를 메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멍에는 율법학자들이 뒤집어 씌운 그런 무거운 짐이 아니라 안식을 가져다 주며 평강을 가져다 주는 쉽고도 가벼운 것이다.
성 경: [마11:30]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초대의 말씀]
내 멍에는 쉽고...가벼움이라 - '쉽고'(*, 크레스토스)란 '부드럽다', '좋다', '은혜스럽다', '안락하다', '친절하다'등의 다양한 뜻으로 해석된다. 실로 예수의 멍에는 이 다양한 의미를 모두 갖추고 있으면서도 가장 가벼운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해 어거스틴(Augustine)은 예수의 멍에를 새의 깃털에 비유하여 그 깃털이 창공을 자유롭게 날 수 있을 만큼 가볍다고 설교한 바 있다(F.R. Fay). 이와 같이 예수께서 제공하신 짐, 곧 그의 계명은 사랑의 게명(commandment of love)으로서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다(요일 5:3). 그러나 이는 결코 예수의 가르침이 세상의 도덕이나 율법보다 무가치하거나 경박(輕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가르침보다 더 준엄하고 숭고(崇高)하며 엄정한 것이다(Clausner). 그러나 예수의 짐은 (1) 확실한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2) 선하고, 바르고, 좋은 것이기 때문에, (3) 항상 예수의 능력에 의존하는 신앙이 전제되기 때문에, (4) 나 혼자가 아니라 예수와 함께 사랑으로 메기 때문에 가볍고, 또 영생을 동반한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마12:1]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노동에 관한 논쟁]
그 때에...안식일에 - 이삭이 익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일년 전 4월의 유월절과 밀추수를 기념하는 칠칠절(태양력으로는 5-6월에 해당)의 중간 어느 한 안식일이다. 그런데 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일을 취하신 날로서, 율법에는 이 날을 기념할 것과 쉴 것을 동시에 명하고 있다. 만약 이 명령을 어기는 자에게는 죽음과 같은 극단의 형벌이 예비되어 있었다(출 20:9 ff ; 31:14 ff ;신 5:12 ff).
밀밭 사이로 가실새 - 먼저 랑게(Lange)에 의하면 전답(田畓)으로, 루터(Luther)에 의하면 곡식으로 이해되고 있는 '밀밭'(*, 스포리모스)은 파종한 밭 혹은 곡식 밭으로 이해되며, 그중에서도 특별히 '보리밭'으로 해석 될 때가 많다. KJV에서는 '곡식밭'(grainfieled)으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 제자들이 이삭은 잘라 먹은 일에 대한 시비가 논쟁의 초점으로 대두된 것으로 보아 이때 예수의 사건은 바리새인들이 규정하고 있는 안식일에 여행할 수 있는 거리(약 1.8km) 내에서 발생한 것이 분명하다. 한편 그 당시 팔레스틴에 있는 경작지들은 대부분 길고 좁다란 이랑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이랑 사이의 땅이 사람이 지나다니는 통로로 활용되었다.
제자들이 사장하여 - 그 당시 제자들은 안식일의 그지 조항을 간과해 버릴 만큼 몹시 배가 고파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 당시 예수의 선교활동이 매우 활발하고도 촉급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이삭을 잘라 먹으니 - 율법에 의하면 이 행위는 추수하는 것과 동일한 일로 간주되었다. 한편 평행구인 눅 6:1에 보면 '손으로 비비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타작(打作)에 해당되며 만약 그 이삭 껍데기를 입으로 불어 털어 버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미(精米)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신 23:25에는 시장할 때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잘라 먹는 행위가 허용)許容)되고 있다. 따라서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먹은 행위 자체는 결코 죄가 되지 않지만 그 일을 안식일에 행했다고 하는 문제가 발생된 것이다. 실로 유대인들의 율법주석서 미쉬나(Mishina)에 따르면 '안식일에 어린 양이 한 입에 넣을 남큼의 이삭을 잘라 취하는 것도 죄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M. Sabbath, 7:4).
성 경: [마12:2]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노동에 관한 논쟁]
바리새인들이 보고 - 이는 한 순간의 동작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찰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칼끝같은 눈초리로 예수의 무리들을 항상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고하되...당신의 제자들이 - 바리새인들의 시선은 현상적으로는 제자들에게 머물러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예수께 고착(固着)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그들은 사사건건(9:14 ; 15:2) 제자들의 반율법적 행위를 빌미로 예수께 도전과 비난을 일삼았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 - 여기서 '하지 못할 일'에 해당하는 '욱크여세스틴'(*)는 '합당치 못한 일'을 의미한다. 한편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일에 대한 규정은 모세의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조상의 유전에 의한 것으로 39개의 항목이 있다. 즉, 39개 항목이 기록된 할라카(Halakah)에 의하면 성전에서 예배드릴 경우나 기근(饑饉) 등으로 인해 생명이 위태로울 경우에는 그것을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본문의 경우에서처럼 피할 수 있는 경우에는 밀추수를 하는 일은 엄연한 범법(犯法)행위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본 사건이 있은 때보다 훨씬 후에는 이 조항들이 다소 완화되어 안식일일지라도 손으로 곡식을 잘라 먹는 것은 허락하지만 어떤 기구를 사용하는 것만큼은 금지하였다(The Gemara).
성 경: [마12:3]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노동에 관한 논쟁]
다윗이...시장할 때에 한 일 - 이는 삼상 21:1-6에 나오는 사건으로서, 다윗이 요나단의 도움으로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을 피하여 호위병 몇 명과 함께 도망하다가 놉에 있는 하나님의 전(殿)에 들어가 제사장 아히멜렉이 주는 거룩한 떡으로 그들의 주린 배를 간신히 채웠던 일을 말한다. 그런데 이일은 제사장만이 그 거룩한 떡, 즉 하나님 전에 진열되었던 12개의 떡을 먹을 수 있다고 하는 모세의 율법(레 24:5-9)을 위배(違背)한 행위가 된다. 또한 삼상 21:5-6의 본문에는 진설병이 방금 대체(代替)되어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이 사건이 안식일에 발생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유대사가 요세푸스는 진설병은 금요일에 만들어져 다음날 안식일에 진설했고, 그 묶은 것은 대체되어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고 한다(Josephus, Antiq., III, 10:7). 여하튼 예수의 의도는 다윗이 시장할 때 몬세의 율법을 어겼으므로, 시장한 그의 제자들이 조상의 유전을 어긴 행위도 용납될 수 있는 것이며, 어떤 예외(exception)들을 허용해야 한다고 하는 사실들을 주장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다만 구약 자체는 다윗의 그러한 행위를 정죄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나치리만큼 무리하게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근본 정신에 어긋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Cranfield). 즉 예수의 기본 관점은 '안식일이 너희에게 주어진 것이지, 너희가 안식일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Mek Exod 26:13 ; 2 Macc. 5:19)에 지나치리 만큼 매사에 적용하고, 유전을 사람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실로 아히멜렉이 율법의 규정을 어기면서도 다윗과 그의 소년들에게 떡을 주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바리새인이라고 한다면 시장한 예수의 제자들의 행위를 당연히 용납했어야지 정죄해서는 안되었던 것이 아닌가(Hooker).
성 경: [마12:4]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노동에 관한 논쟁]
하나님의 전 - 이는 솔로몬 때에 건축된 성전이 아니라 광야의 여행길을 앞서 가며 이스라엘을 인도했었던 그 희막을 가리킨다(삿 18:31). 그러나 '하나님의 전'이라는 이 표현은 신.구약을 통틀어 하나님이 거처(居處)하시는 거룩한 곳이라는 보편적 의미로 흔히 사용되기도 했다(대하 5:14 ; 딤전 3:15).
진설병 - 이스라엘 12지파의 수(數)에 따라 성소의 금상위에 두 줄로 배설했던 12개의 떡이다(출 25:30 ; 레 24:5-8). 이는 제사 제물이 아니라 여호와의 생명적 교제를 상징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주의 거룩한 성만찬을 예시(豫示)하고 있다.
성 경: [마12:5]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노동에 관한 논쟁]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 다윗의 안식일 예외 조항에 이은 두번째 예외 사례이다. 안식일 법은 출 20:8-11과 신 5:12-15의 십계명 중 제 4계명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도록 규정한 안식일 규례에도 불구하고 성전안에서 매 안식일마다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의식(儀式)을 행할 때 몇 가지의 일들, 예를 들어 진설병은 대체시키는 것(레 24:8), 수양 둘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것(민 28:9-10) 등의 직무를 행한다. 이러한 율법의 규정은 안식일에 관한 법이 하위법이요, 성전에 관한 법이 상위법이며 또한 상위법을 지키기 위해 하위법을 범(犯)해도 된다고 하는 사실을 구약성경 자체가 인정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 규정을 범한 것과 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존칼빈(J. Calvin)은 '성전법이 희생드리는 일과 모든 외적 제사에 관련된 제사장들이 안식일 범법행위를 거룩한 것으로 인정한다고 한다면, 참되고 신령한 성전인 예수께서는 그 예배자들이 신성한 의무를 행할 때 그들이 범한 모든 과오(예를 들어 안식일을 범하는 것)를 보다 더 거룩케 하실 능력이 있다. 더욱이 제자들은 현재 복음으로 인해서 다소 거룩해진 그들의 영혼과 육신을 강건하게 하여 복음전파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려고 하는 생각에 열중해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한 행위는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대속사업의 지속과 복음전파를 돕는 것과 예배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때에 이는 결코 과오로써 인정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실로 제사장들이 안식일에도 불구하고 성전 제사를 집례(執禮)하기 위해 일을 하여도 율법적으로 아무런 하자(瑕疵)가 없었다면, 그 성전과 제사의 궁극적 존재이신 예수와 그의 사역을 위해 안식일을 범한 제자들의 행동도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 예수께서는 율법 자체가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안식일의 노동을 명시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레 24:8) 안식일에 대한 당신의 새로운(유대인의 고답적인 사고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위한 외적이고 통속적인 규례를 철폐(abolition)하시고(F.R.Fay)이제 하나님 중심의 내적이고 본질적인 규례를 깨우치고 계신 것이다.
성 경: [마12:6]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노동에 관한 논쟁]
성전보다 더 큰 이 - 성전법이 안식일 법에 우선하듯이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활동은 성전법보다 우선한다. 이 구절의 논쟁의 형식은 할라카(Halakah)의 매 규정들을 확립시키는 데에 있어서 이미 공인(公認)된 논증 절차인 '칼 와호메르'(qal wahomer)에 해당한다. 이 '칼 와호메르'는 문자적으로는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즉 어떤 애매모호한 논리에 대해 더 분명한 논리를 제시하는 논쟁법이다(Daube). 한편 성전보다 '더 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이존'(*)은 남성명사일 수도 있고 중성명사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메이존'에 대한 견해는 (1) '예수가 하나님께 예배드린 것'이 성전에서의 '제사장 예배'보다 더 위대하다는 의미라고 하는 게하르트슨(B. Gerhardsson)과 힐(David Hill)의 주장, (2) 성전보다 더 크다는 것은 사랑의 계명을 의미한다고 보는 시갈(Sigal)과 콘 쉐어봐(Chon Sherbok)의 견해가 있다. 이들은 7절의 '자비를 원한다'는 말씀을 근거로 삼고 있다. 또한 (3) 성전보다 더 큰 것이 굶주림에 대한 긍휼의 생각 혹은 사랑의 운동이라고 여기는 슈티엘의 견해가 있으며, (4) '메이존'은 바로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고 보는 보른캄(Bomkamm)과 그랜더(Georfges Grander)의 견해가 있다. 이중 (4)의 견해가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 주장에 따르면 성전은 안식일보다 더 크고 예수는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이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율법 이해에 의해서도 알 수 있는데, 율법은 바로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분 안에서 율법은 비로소 완상된다고 하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5:17-48).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자신을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이는 예수의 권위가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를 무죄(無罪)케 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Lohmeyer). 따라서 예수가 그의 모든 제자들이 바로 신약 시대에 있어서 제사장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크게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예수가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은 바로 예수 자신의 권위와 제사장들의 권위를 대조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Carson). 사실 성육신(Incamation)하신 말씀으로서의 신인(神人), 즉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권위는 제한적이고 상대적인 인간 제사장의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 한편 성전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 다음가는 최고의 존재였었다. 그런데 예수의 이 견해에 의하면 건물로서의 성전은 한낱 예수 자신을 예표, 상징(히 8:5)하는 일시적 모형일 뿐, 예수 자신의 등장 이후에는 결코 존속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성전 속에서 그의 임재와 현현(顯現)을 나타내어 보이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성전인 예수 안에서 임재하시고 그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요 12:45). 따라서 예수가 모세보다(5:21-28), 아브라함보다(요 8:58) 성전보다 더 큰 이임은 당연하다.
성 경: [마12:7]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노동에 관한 논쟁]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 이미 앞에서(9:13)인용된 바 있는 호 6:6의 말씀으로 '자비가 제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비의 헬라어인 '엘레오스'(*)는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친절과 구제 행위로서 중심에 사랑과 자비와 헌신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는 경건한 행위이다. 그리고 제사를 뜻하는 '뒤시아'(*)는 연기로 제사를 올리는 희생 제물이나 제사행위를 말한다. 물론 여기서는 단순히 형식적이고 습관적이며 무의미한 종교 행위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자비를 원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제사 행위를 부인하거나 중단해 버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종교적 의무를 배겨고한 채 온전히 인본주의만을 주장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 곧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실천하는 자비의 행위를 율법의 의무보다 우위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자비와 제사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피치 못한 경우가 생겼을 때에는 제사보다는 오히려 자비가 먼저 베풀어 진다고 해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예배가 소홀해졌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너희가 알았더면 - 예수는 또 다시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책망하셨다. 즉 율법을 대하는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호세아 시대 사람들이 피상적(superficial)이고 위선적으로 종교의식에만 관심을 기울였던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책망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 그들의 유전인 할라카가 바로 이를 입증한다고 하는 것이다. 실로 종교의식에만 관심을 갖는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모든 세대 사람들의 공통된 과오'에 속한다고 피력한 칼빈(Calvin)의 견해는 깊이 음미해 볼 만한다.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 이로써 제자들은 예수로부터 무죄(innocent)하다고 하는 선언을 받은 셈이다. 물론 제자들이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배가 고픈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로르도르프(Rordorf)의 견해보다는 오히려 성전보다 큰 이가 그들과 함께 게시며 그들의 행위를 정당하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카슨(Carson)의 주장이 더 적절한 해석이 될 수 있다.
성 경: [마12:8]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노동에 관한 논쟁]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 <눅 6:1-5 주제 강해 '안식일과 예수님과의 관계' 참조>. 막 2:27에는 안식일 제정(制定)의 근본 목적을 정의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마태와 누가는 이를 생략하고 있다. 마태는 1-7절의 말씀의 요점을 제사와 자비의 대조적 비교나 안식일의 기원은 사람의 안식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에 두지 않고 오히려 기독론(Chriistology)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고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였다. 랑케(Lange)에 의하면 주님은 그 자신이 신령한 안식이 되시므로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안식일 준수(observance)가 되며 그를 떠나는 것은 바로 안식일의 파괴가 된다고 하였다. 특히 '주인'이라는 말은 어떤 일에 대한 주체적 운용자(運用者)라는 측면에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는 안식일을 소유하고 주관하며 안식일 규례를 해석하며, 지금까지 가려워졌던 안식일이 지닌 참 자유함과 참 평안을 들추어내 모든 이들에게 그것들을 향유(enjoyment)할 수 있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칼빈(Calvin)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는 말씀은 바로 안식일에 얽매여야 하는 의무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권세를 예수께서 받으셨다고 하는 것이며, 따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율법을 멍에에서 벗어나서, 멍에를 대신 져 주시는 주님에게로 와서 쉼을 얻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였다. 실로 인간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종말론적 메시야이신 인자, 곧 예수는 그 인간들을 위해 안식일을 개방하고 계신다.
성 경: [마12:9]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치유에 관한 논쟁]
거기를 떠나 - '떠나다'의 뜻인 헬라어 동사 '메타바이노'(*)의 일상적 의미는 '자리를 바꾸다'이지만 특별한 본문에서는 이야기를 화제나 그 이야기가 진행되던 장소와 시간 등이 전면적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요 5:24 ; 요일 3:14에서는 사마에서 생명으로 옮기웠음을 나타낼 때 이 '메타바이노'를 사용하고 있다. 한편 본문의 평행구인 눅 6:6에 의하면 회당에서 손 마른 자를 고친 사건이 일어난 날은 밀밭에서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사건이 바로 그 안식일과는 다른 인식일 날로 보고(report)하고 있다. 따라서 마태가 사용한 '메타바이노'란 말과 누가의 기록에 의해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신 날이 같은 안식일이 아니라 또 다른 안식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간의 공백과 장소 변경이 예수께서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시고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되돌아가신 여정(旅程)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그레스웰). 물론 '메타바이노'는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도(11:1 ; 15:29) 이미 '되어진 한 여정'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으며, 요 7:3에서도 '여기를 떠나'의 뜻인 '메타베디 엔튜덴'(*)이라고 하는 유사한 표현이 갈릴리에서 유다로 간 여행에 사용되고 있다. 여하튼 비록 이동된 장소가 과연 어디였는지 또 시간적으로 1-8절과 얼마만큼의 간격이 있는지는 확정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으며 그것 때문에 논쟁이 발생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저희 회당에 들어 가시니 - 본장에서의 두번째 사건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것과 그에 따른 논쟁의 무대(setting)가 된 '저희 회당'이란 표현은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A.D. 50-70년경) 이미 세워져 있었던 초대 기독교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유대교 회당 간의 거리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저들의 회당은 유대인들이 본격적인 디아스포라(Diaspora) 시대를 이루게 되었던 바벧론 포로기와 학사 에스라 통치 시기에 성전과 율법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된 유대인들을 위해 설립된 것으로 A.D. 70년 예루살렘이 파멸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예루살렘 안에서 약 480여개의 회당이 되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회당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따라서 경건한 유대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의 경우 그는 매일 회당을 방문하였으며, 모든 유대인들은 안식일과 절기 때에는 반드시 회당을 방문하곤 하였다. 한편 유대교 회당은 초기 기독교 복음 전도자들이 최초의 설교와 말씀전파를 행하였던 선교의 매체(媒體)라고 하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행 9:20). 그런데 예수께서 '저희 회당'에 들어가신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날이 안식일이었음은 더욱 더 분명해 진다. 회당에 대한 좀더 풍부한 이해를 위해서는 죽 4:15-30의 주석, 주제 강해 '유대교 회당과 초대교회'를 참조하라.
성 경: [마12:10]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치유에 관한 논쟁]
한편 손 마른 사람 - 이 사람은 뇌의 손상으로 인한 중풍이 아니라 피의 순환이 불순함으로 손의 근육기능을 상실한 자를 가리킨다(왕상 13:4). 한편 눅 6:6에 의하면 마른 손은 더구나 오른 손이었다. 그리고 외경 가운데 나사렛파와 에비온파가 사용한 복음에서 제롬(Jerome)이 인용한 것(Wordsw. & White's edition of the Vulgate, A.D. 383)에 의하면 이 사람은 예수께 지신은 '손으로 벌어먹고 사는 석공이 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랑케(Lange)에 의하면 이 사람은 우연히 그 회당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의 대적자들에 의해, 주를 모함하고 송사하기 위한 '악의적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 특별히 불려왔다고 한다.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 회당은 유대인들의 종교 사회의 중심지로서, 결정짓거나 특정한 사실을 발표, 공표하거나, 서약을 행하거나, 재판을 행하거나 죄인을 석방하는 등의 공적인 일을 위한 회합(會合) 장소였다. 즉 회당은 율법을 연구, 가르치는 학교와 기도의 처소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지방 법정으로서의 역할까지도 감당하였다. 따라서 이곳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한 것은 곧 예수를 의식적으로 음해(陰害)할 목적으로 지방 법정에 고소하고자 한 것이 된다. 실로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예수를 고소할 증거와 명분을 찾아 기회만 있으면 그를 정식재판에 회부(reference)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손 마른 사람을 이용한 저들의 이번 모략이 성공하지 못하자 마침내 그들은 예수를 감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직접 살해할 음모를 꾸미는 데까지 발전하게 된다(14절).
물어 가로되 - 마가와 누가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송사할 고소거리를 찾기 위해 그의 행위를 감시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울법을 연구하는 곳이며 기도처로서 유대인들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회당 안에서 저들은 회당의 목적과는 반대로 악의에 찬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마태는 마가와 누가로 보고(막 3:1-6 ; 눅 6:6-11)와는 달리 바리새인들이 보다 진취적이고 공격적으로 손 마른 사람의 불행한 처지를 이용해 예수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예수가 먼저 그의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지지와 갈채를 받게 되는 일을 미연(未然)에 방지하려고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들의 의도에 의하면 저들은 자신들의 질문 때문에 예수께서 병자를 고침으로써 고의(故意)로 안식일 규정을 어길 수도 없고, 또 예수께서 손 마른 자를 외면하심으로써 제사보다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라는 당신의 지난번 가르침을 스스로 파기(破棄)할 수도 없게 만들려 했던 것이다. 실로 저들은 예수를 위선적이고 편파적이며 일관성이 없는 자로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에 빠지게 만들려 이 같은 교묘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 이 질문은 눅 14:3에서 예수가 저들에게 한 질문과 똑같다. 본문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그것이 자비로운 것인가'가 아니라, '여세스티'(*), 즉 합법적(lawful, KJV)인가 하는 것에 머물러 있다. 그들 조상의 유전에 의하면 만일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울 경우라면 안식일일지라도 의사는 그 사람의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Mishnah, Yomah 8:6 ; Mek Exod 22:2 ; 23:13). 그러나 문제는 목숨이 위태로운 정도의 경우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의 경우 , 즉 중풍이든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에서든 손에 힘이 없어지거나 손이 말라버린 상황은 그것이 결코 시각을 다투어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위급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제기한 질문의 출발점이 되었다. 한편 A.D. 1C경의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환자들을 간호하는 것을 허락하는 율법에 대해서 상세히 논의한 바 있었다고 한다(Mishnah Eduyoh 2:5 ; M. Sabbath 6:3 ; Mek Exod 22:2 ; 23:13).
성 경: [마12:11]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치유에 관한 논쟁]
양 한 마리...안식일에...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 이 논쟁은 눅 13:15 ; 14:5와 유사성이 있다. 비록 쿰란 공동체는 기껏해야 동물 스스로가 구덩이에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널판지를 넣어 줄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나 바리새인들은 이보다 더 적극적인 보호 규정을 제시하고 있다. 즉 그들은 일차적으로 웅덩이에 빠진 동물이 그 웅덩이에서 안식일을 무사히 지낼 수 있을 정도의 음식을 넣어주면 2차적으로는 그 동물의 목숨이 위험할 경우는 사람이 직접 그 동물을 끌어낼 것을 규정하고 있다(Maimonides, Talmud).
성 경: [마12:12]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치유에 관한 논쟁]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 예수의 답변은 또 다시 '칼 와호메르'(qal wahomer)의 성격을 띠고 있다(6절). 즉 한마리 양과 한 인간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시 144:3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생각되어지는 존재이다. 본문에 나오는 손 마른 사람은 웅덩이에 빠진 양 한 마리보다 물론 귀하다. 그러나 바리새인들 안식일에 웅덩이에 빠진 양은 건져낼지언정 손 마른 사람에게 자비(mercy)를 베풀려는 마음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즉 예수를 송사하려는 것의 도구로 삼았을 뿐이었다.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예수께서는 만일 안식일에 동물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훨씬 의롭고, 보다 당연한 처사(conduct)임을 주장하셨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옳으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라고 대답하셨다. 저들은 안식일에 선한 일이나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규정된 법규만을 지키려 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선을 행해야 한다고 하심으로써 율법의 규정을 뛰어 넘으셨다. 예수의 관심은 안식일이 선을 행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악을 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가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여기서 선은 바로 불쌍한 자들에게 자비(mercy)를 베푸는 일과 연관된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행위를 무죄한 것으로 선언하신 7절의 말씀을 연상(association)시킨다. 즉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의 행위나 손 마른 사람을 고칠 예수 자신의 행위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자신에 의해 선한 것으로 선언되고 있는 것이다. 막 3:4 ; 눅 6:9에서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을 주제로 한 예수의 반론(反論)에도 역시 저들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함으로써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이 비록 안식일에 이뤄진다 하더라도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이 자명(selfevidence)하게 인정되었다. 실로 안식일에는 세속적 관심에 대해서는 쉬어야 하겠으나 하나님과 인간 생명과 관련된 선한 일에 대해서는 열심으로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성 경: [마12:13]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치유에 관한 논쟁]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 마태는 지금 바리새인들의 무자비하고 불신앙적인 태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손이 마른 자가 예수에 대해 신뢰와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한편 예수께서는 다른 곳에서 병자 약한 자를 고치셨을 때와는 달리 병자의 몸에 손 조차 대지 않으시고 다만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그대로 즉시 존재케 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는 창 1:3의 말씀처럼 손을 내밀라고 하는 단 한마디의 '말씀'에 의해서 치유의 기적을 베푸셨다. 이러한 기적과 치유 앞에 우리는 예수의 권위에 찬 말씀과 더불어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예수의 말씀이 옳은 것임을 확신케 된 손 마른 자의 즉각적 순종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안식일에 대한 랍비들의 유전에 의하면 손 마른 자는 결코 병고침을 받아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악을 꾸미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뻔했던 그는 안식일에 소극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일임을 깨닫고 자신을 예수의 신성(神性)을 입증하는 선한 도구로 기꺼이 제공했다. 실로 그러한 순종과 결단에 의해서 그는 부자연스러운 육체의 속박(束縛)에서 벗어나는 축복을 부여받게 되었다.
회복되어 성하더라 -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께서는 밀이삭 사건을 통해서는 자신이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진 분이심을, 손 마른 사람의 사건을 통해서는 사람을 온전케(육체와 영혼 모두를) 하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확증하셨다. 여기서 '회복되어 성하더라'라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아포카디스테미'(*)의 과거형이 사용되어 '완전하게 나았다', 즉 이미 완치(完治)된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치유의 순간이 손을 내밀기 이전이었는지 이후이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손을 내미는 것은 바로 손이 낫게 되었음을 입증하는 행위'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Alford). 예수께서는 믿음의 고백을 들으시고 당신께 간청하는 환자들의 병을 고치셨었다. 이번의 경우에도 손을 내밀라고 하는 당신의 명령에 대해 순종과 믿음의 고백으로서 그가 손을 내밀므로 그의 병을 고치셨다고 보는 것이 좋은 듯싶다. 그리고 한편 병자의 믿음의 고백은 치유의 선행 조건이 아니라, 치유의 병행 조건이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주장한 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는 진리와 부합(符合)된다. 진정 예수로 말미암아 나을 수 있다고 하는 믿음과 참으로 낫고자하는 깊은 열망을 동시에 가졌었던 손 마른 자는 예수의 창조적인 능력 앞에 온전케 되는 축복을 얻게 되었다.
성 경: [마12:14]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바리새인들의 모의]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 이는 예수를 율법 위반자로 규정한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동일한 건물 내에 있기 조차 꺼려하는 행동으로 보이는 건물 내에 있기 조차 꺼려하는 행동으로 보이는 결별 선언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랍비가 아닌 더 이상 접촉해서는 안 되는 한낱 부정(惡)한 자였던 것이다.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 안식일에 예수께서 선(善)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신 것과는 반대로 바리새인들이 악을 꾀하여 사람을 죽일 모의를 한다는 것이참으로 아이러니킬(ironical)하다. 시갈(Sigal)은 여기서 사용된 '죽일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레소스'(*)이 '죽이다'의 뜻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회당의 결의에 의해서 파문시키다'의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바리새인들이 단지 할라카식의 논쟁(율법규정에 대한 해석 문제)으로, 그들의 견해와 다른 이론을 제시한다고 해서 사람을 처형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태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어떠한 행동들을 해야만 율법의 주장과 일치하는가를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한 것에서, 그리고 제자들의 행위와 자신의 행위가 유대인들이 볼 때는 율법의 규정을 어긴 것이라고 할지라도 만물의 주요, 성전의 주이시며, 안식일의 주이신 예수 자신에 의해서 무죄로 선고받고 그 정당성을 부여한 것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바리새인들의 살해 의지를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 한편 막 3:6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이 헤롯당과 더불어 예수를 죽일 모의(conspiracy)를 하고 있다고 기록한 반면에 마태복음은 헤롯당(Herodians)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학자들의 많은 이견(異見)이 있다. 어떤 학자는 바로 그 점이 마태복음이 A.D. 70년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이론을 입증시킨다고 주장하였다. A.D. 70년 이후에는 헤롯당이 유대 땅에 존대하지 않았으며 기독교의 유일한 적대세력을 바리새파이기 때문에 굳이 헤롯당이 거론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마태가 이 말을 생략한 것으로 이해된다(Hummel, Hill). 그러나 이것은 마태의 기록 의도를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된 오해이다. 즉 마태는 율법의 위반(unlawfulness)이라는 측면에서 예수를 사형에 처하고자 했던 주도 세력이 바리새인들이었음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실로 그들은 자신들의 살의(殺意)를 실천키 위해 정치적인 세력(헤롯당)을 이용했던 것이다. 본문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된 예수 살해 의도는 이후로 예수의 선교 사역이 더욱 빛을 보면 볼 수록 노골화, 구체화 되어간다.
성 경: [마12:15]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각종 병자들을 치유하심]
예수께서 아시고 - 여기 '아시고'에 해당하는 원어 '그누스'(*)는 '알다'는 뜻인 '기노스코'(*)의 제 2부정과거 능동태 분사로서 벌써부터 확연히 인지(認知)하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이는 예수의 신적(神的) 능력의 탁월성을 암시하는 것인 동시에 예수를 둘러싸고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의 경색(梗塞)되고 분노에 찬 모습이 노출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거기를 떠나가시니 - 헬라어 '아나코레오'(*)는 '철수하다', '물러가다'(KJV, withdrew)의 뜻으로 이는 바리새인들의 의논이 예수를 죽일 모의와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모의가 당장 실천의 차원으로 직접 예수를 배척하거나 죽이려고 시도했던 일은 이미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예수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때를 기다려 물러나시곤 하였으며 또한 마태도 예수의 물러나심에 대한 기록 뒤에 반드시 구약의 인용문을 첨가하여(2:22, 23 ; 4:12) 예수의 이 행위 마저도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바 그대로의 모습임을 입증하려 하였다. 더욱이 예수의 이 피신(避身)은 당신이 친히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지혜로운 위기 극복법(10:23)을 몸소 실천하신 것이기도 했다.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 '좇는다'고 하는 동사가 제자됨(fellowship)을 의미하는 용어이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이 제자가 되기 위해 예수를 좇은 것은 결코 아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라고 하는 말 속에는 이 날이 비록 안식일이라고 할지라도 바리새인들의 반대에 맞서 자신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많은 병자들이 속해 있었을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이라고 하는 이 표현은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시도(attemot)하고 있는 소수의 바리새인들과 대조적으로 비교하기 위해 특별히 사용되었을 것이다.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 20절에 인용된 이사야서에 의하면 예수가 많은 병자들을 고친 행위가 바로 심판에서 이길 때까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의 긍휼과 사랑의 역사(役事)임을 의미한다. 실로 예수는 고생하며 유리(流離)하는 자들(9:36)과 수고하여 무거운 짐진 자들(11:28), 그리고 연약한 자들에게 결코 냉담하지 않으시고 궁극적인 구원을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예수는 바로 그들의 메시야이기 때문이다.
성 경: [마12:16]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각종 병자들을 치유하심]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 예수의 함구령은 그가 행하신 치유 기적이 그를 사람들의 눈에 더욱 더 강하게 드러나게 함으로써 대중들의 흥분이 더욱 더 고조되고(W. Argyle), 따라서 그 일이 반대자들의 적대감을 더욱 더 크게 부채질하게 될 것임을 염려하여 내려진 명령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보다는 이미 네번에 걸쳐서(8:4 ; 9:30 ; 16:20 ; 17:9) 행해진 바대로 예수 자신을 단순히 기적행하는 자로 나타내시지 않기 위해서 내려진 함구령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상(像)은 그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고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야로서 신적(神的) 권능을 소유한 자였다. 그러므로 예수가 메시야 이외의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불치(不治)의 병들을 치유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당장 그에게 몰려들어 자기들의 임금을 삼으려고 함으로써, 결국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당신의 메시야 사역을 감당치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내려지는 이 함구령(緘口令)의 시한(時限)은 막 9:9에 의하면 부활 때까지인데 이는 예수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부활 이후에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 경: [마12:17]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각종 병자들을 치유하심]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 이하에 인용된 사 42:1-4은 70인역(LXX)에 의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의 자유로운 인용이다. 한편 이사야의 인용구는 바로 앞의 예수의 함구령과 연관해서 성령과 이방인들이라고 하는 두 주제를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Cope, Hill). 즉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19절) 성령부음을 받은 그가 공의를 행하고 있기 때문에)예를 들어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이방인들은 그의 이름을 바라게'(21절) 되리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사야는 행위자(agent)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로서,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를 예언하였다. 그리고 이 예언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 특히 바리새인들에 의해 핍박받고 있는 예수의 모습 속에서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태는 무엇보다 무리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예수의 사역이, 곧 이사야가 예언한 바 메시야 사역과 일치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당신이 전파하신 천국을 영적이고도 의로운 관점에서 가르치고 계셨으며, 그런 점에서 예수는 격앙된 분위기로 군중을 선동(煽動)하거나 폭발적인 소문을 통해 당신의 신분이 노출(exposure)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수는 당신으로 인해 약한 영혼들을 거스리기를 원치 않으셨다.
성 경: [마12:18]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각종 병자들을 치유하심]
나의 택한 종...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 사 42:1 ; 43:10 ; 44:1의 인용으로 특별히 '나의 택한 종'이란 히브리어로는 '내가 붙드신 나의 종'이 된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한 이상적(理想的) 종을 붙잡으셨는데, 그런 점에서 '붙잡다'는 말은 선택한 자를 내밀(內密)하게 기억하시면서 지극히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라는 표현은 이미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로서 들려왔던 소리(3:17 ; 17:5)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만족과 인정과 축복을 동시에 받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것과 선택하는 것은 서로 밀접(密接)하게 관련된 것이므로, '마태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범주(category)안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예수의 역활까지도 포함시킨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킹스베리(Kingsbury)의 견해는 부적절하다. 오히려 마태는 마가복음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아들'(막 3;11)을 생략하고, 본문에서는 다만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고 보는 힐(Hill)의 견해가 더욱 더 설득력 있게 보인다. 예수는 아들의 위치를 버리고 하나님께 선택된 바의 종의 위치를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이 특별한 설교 목적을 갖고 선택하신 종의 위치를 기꺼이 받아 들이셨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이 특별한 선교 목적을 갖고 선택하신 종이요, 하나님이 성령으로 기름부은 자이다. 한편 본분의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명사 '파이스'(*)는 '아이'에 대한 애칭으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종종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종'이라고 불리웠다(사 41:8). 따라서 이 '파이스'는 사람들 사이에서 신분상의 종으로 통용되고 있는 '둘로스'(*)와는 달리, 종으로서의 메시야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야임을 분명히 나타내주고 있는 말이다.
내 성령을 줄터이니 - 하나님이 당신의 영(spirit)을 주신다는 것은, 곧 그를 통해 하나님 자신의 활동하실 것을 내포한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참여 의사(will)는 예수의 말씀과 사역에 초월적인 권위와 능력을 부여한 것이 되며, 이같이 주어진 능력과 권위의 실현은, 곧 이 땅에 하늘 나라가 도래했음을 입증해 주는 확실한 근거가 된다(28절).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 이방에 심판을 알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택하신 종인 메시야의 독특한 직무에 해당된다. 한편 이 직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들이 있다. 여기서 '심판'의 뜻인 헬라어 '크리시스'(*)가 '율법', '판결', '정의', '결정하는' 등의 뜻을 지닌 히브리어 '미쉬파트'(*)에 해당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심판'이라고 해석된 이 단어에 대해 (1) 델리취(Delitzsch)는 모든 관계에 있어서 생(生)의 규범과 표준으로서 종교의 실제적인 면을 보인 '진실한 신앙'으로, (2)헨드릭슨(Hendriksen)은 죄인들의 회개하고 주 예수께 나아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의 '복음'으로, (3) 칼빈(Calvin)은 심판이라는 말을 통해 공평과 의(義)의 충만함을 정체(正體)로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대의 한 구석에만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로 확장시키는 것이 메시야의 임무라고 하였으며 (4) 알포드(Alford)의 경우, 심판은 바로 최후 심판을 의미한다고 보았으며, (5) 카슨(D.A. Carson)의 경우, 여기서 문제삼고 있는 심판 혹은 공의란 하나님이 모든 이방 나라들을 위해서 자신의 본성을 계시하시는 것(사 51:4)인 동시에 사람들이 계시(revelation)된 하나님의 본성, 즉 공의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요구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일반적인 제견해들에 비해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한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 계시되고,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공의,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을 복음을 통해서 예수께서 재천명하시고 그의 제자들이 그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심판'은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經綸)의 대강(大綱)으로서 예수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이다. 한편 본문의 전파 경로가 암시되어 있는데, 예수께서 원래 목적하신 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우선 복음이 전파될 것이지만(10:6 ; 15:24), 그들의 핍박과 배척으로 그 대상이 이방인에게로 확장될 것이었다(8:10 ; 15:28). 이러한 사실은 선교의 지상 명령 부분(28:19-20 ; 행 1:8)에 이르러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성 경: [마12:19]
주제1: [바리새인의 메시야 배척]
주제2: [각종 병자들을 치유하심]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 이는 메시야의 직무에 이은 그 이행 방법 또는 태도 중의 하나이다. 한편 아사야의 예언에서는 '그는 외치지도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사 42:2)로 묘사되어 원래의 의미를 더욱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본문에 제시된 '다투다'는 말은 언쟁이 심화된 상태를 뜻하는 말로 아사야의 의도처럼 '큰 소리로 외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와 함께'들레다'의 뜻인 '크라우가조'(*)는 '부르짖다', '야단스럽게 떠들다'(cry out, KJV)를 의미하는데 이는 종교적 기쁨이나 소리나 전쟁에서의 승리의 외침이 아니라,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전 9:17)과 대조(contrast)를 이루는 '우매(愚昧)한 어른의 호칭'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크라우가조'는 신약이외에서는 마술과 악마의 영역에서 지하 세계의 신들을 불러내는 소리로 이해되었다. 신약에서도 이 말은 예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실 때 귀신들이 지르는 것으로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막 5:5 ; 9:26)를 말하며, 행 19:28에서는 왁자지껄하는 폭도들의 소란으로, 계 21:4에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로부터 쫓겨난 분노를 나타내는 외침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으나 긍정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탄원(歎願)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 역시 고난과 섬김의 종인 메시야의 자세를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메시야가 논쟁하지 않고 외치지 않고 길거리에서 소리 드높여 선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완벽한 침묵을 고수(固守)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다만 메시야로서의 그의 모습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메시야가 16절에서와 같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도 얼마든지 그의 메시야 직무를 수행할 수 있으며, 또한 지금하고 계신 것이다. 그와 더불어 참다운 종이란 그의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행함에 의해서 자신의 직무를 다하는 자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성 경: [마12:20]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각종 병자들을 치유하심]
상한 갈대...꺼져가는 심지 - 이 표현은 종이 자비심이 많고 오래 참으시며, 온유하신 사람임을 보여준다. 이 표현에서 사용된 두 상징에 대해 카슨(D.A. Carson)은 상한 갈대는 고생하며 유리(流離)하는 자들(9:36)을 꺼져가는 심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11:28)을 말한다고 하였다. 또한 제롬(Jerome)은 전자는 이스라엘을, 후자는 이방인을 표현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상한 갈대란 사회의 구조적 모순, 유대 사회에서는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육체를, 그리고 꺼져가는 심지란 그들이 영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두 비유는 연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을 상징하낟고 봐야할 것이다. 즉 '상한 갈대'란 연약한 인간(왕하 18:21 ; 겔 29:6), 고통과 좌절로 인해 심령이 산산히 부서져 쇠잔해 있는 영혼을 가리키며, '꺼져가는 심지'는 마지막 한가닥 소망마저 다 없어져가는 인생, 양심의 빛을 상실해 심령이 어두워져가는 영혼 등을 의미한다. 실로 상한 갈대는 오직 하늘의 기원으로 소생하고, 꺼져가는 심지는 신령한 기름을 흡수(absortion)함으로써 회생(回生)할 수 있다(Clarke).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 사 42:4에 의하면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로 메시야 직무 수행의 목적을 나타내는 말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심판하여 이길 때'란 월리암스(A. Williams)에 의하면 '하나님의 법의 계시를 인간의 마음에서 성공시키는 것'을 뜻한다. KJV에 의하면 이 구절은 '그가 심판을 승리로 몰고 갈 때까지'(until he expel to victory the judgment)로서, 고난의 종인 메시야가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의 영광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유와 겸손과 섬김의 도(道)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상의 악의 세력 위에 세우게 될 때까지를 말한다. 이는 긍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의미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정복하셨고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 위에 굳게 세우셨다.
성 경: [마12:21]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각종 병자들을 치유하심]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 사 42:4에 의하면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이다. '섬'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이'(*)의 기본 개념은 '거주 가능한 땅'으로, 이사야 본문에서는 내륙지방과 구별되는 해안지방(coast)을 의미한다. 해안지방은 부분적으로 뵈니게인과 블레셋인과의 교역(交易)이 이뤄지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섬'이란 말이 가끔은 '이방'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또한 마태는 70인역(LXX)을 따라서 '율법' 대신에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바라리라'(will put their hope, NIV)는 관용적인 표현으로서 '기대한다', 또는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이런 사실들에서 결국 이방이 바라고 소망하는 바는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랑게(Lange)에 의하면 메시야의 이름은 '하나님의 진리를 요약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선언하는 말이다.
성 경: [마12:22]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바리새인들의 비방]
그 때에(*, 토테) - '그 때'가 언제인지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9-21절 사건보다 훨씬 후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 다이모니조메노스 뒤플로스 카이 코포스) - 헬라어 원문의 정확한 의미는 '그 사람은 귀신이 들리게 되었으므로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된 자'이다. 마태는 그 사람의 병을 원인이 특별히 '귀신에 의한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예수의 능력이 귀신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모함(謀陷)이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하려고 하였다. 또한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예수가 다윗의 자손 메시야이심을 알지못한 바리새인들이 바로 '영적으로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라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 마태를 위시한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본 사건이 이적이라는 사실 그 자체보다는 바리새인들과 충돌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본 치유 이적을 간략히 소개하는데 그쳤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그 근본적인 장애 요인이었던 영적 장애(귀신들림)에 대한 근원적인 치유를 하심으로써 육체적인 장애(시각, 언어)를 제거해 주셨다. 실로 그분은 영. 육의 온전한 구세주이시다.
성 경: [마12:23]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바리새인들의 비방]
무리가 다 놀라 -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죽어버린 교훈에 이미 익숙해 있었던 무리들은 예수의 생명력 넘치는 이적 앞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처럼 실재하는 천국은 기습적으로, 각 사람들의 마음에 돌입한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 예수의 치유의 기적을 보고 놀란 사람들 중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낸 반응의 말이다. 이 물음은 헬라어'메티'(*)로 시작되는 부정 의문문으로서 부정(不定)하는 답을 예상하고는 있으나 그것에 대한 결정적인 확신이 아직 없기 때문에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말은 '아무래도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나 그들 자신들이 메시야가 오면 표적을 행하리라고 하는 사실(38절)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치유기적이 혹시 메시야의 징표(徵表)를 나타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다. 실로 예수가 권능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친 것은 무리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께서 세상의 왕과 같은 권세를 행사(行使)하지 않고 지금껏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취하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의 메시야됨에 대해 의혹을 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고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 이후에 기독교 공동체가 이해하게 되었고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상(像)과 유대 국가의 멸망이후 포로기를 거치면서 형성된 유대인의 정치적 메시야상(像)이 근본적으로 불일치된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는 배타적 민족주의에서 파생된 저들의 메시야니즘(Messianism)을 거부하고 자신의 고난과 섬김의 삶을 통한 인류구원을 위한 메시야의 길을 걸으셨다. 한편 그곳에 모든 사람들, 즉 병고침을 받은 자나 그 사건을 지켜본 자들은 예수가 메시야이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나 그곳에 함께 있던 바리새인들 때문에 자신들의 생각을 감히 단정(decisive)적인 말로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는 추측이 있다. 유대인들의 정치적인 메시야의 상(像), 즉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왕국을 재현(再現)시켜줄 이상적인 왕에 대한 칭호인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마 1장의 주석,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성 경: [마12:24]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바리새인들의 비방]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 예수의 치유 능력을 보고 놀란 사람들 중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난 반응 속에서 나온 말이다. 첫번째 부류의 삶들이 품고 있는 일말(一抹)의 희망, 즉 예수가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일축(一蹴)하고 그 확신을 제거키 위한 노력에서 나온 적대적 표현으로, 실제로 예수와 그들 사이의 바알세불 논쟁의 계기가 된 문구이다. 사단이 예수의 영(靈)속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가 더러운 귀신에 들렸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막 3:30 ; 요 8:48). 한편 귀신의 왕 바알세불은 간혹 바알세붑으로도 불리우는데(왕하 1:6), 이 말은 땅의 주인인 '바알'이라는 뜻으로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우상의 이름에 그 기원이 있다. 후에 유대교에서는 귀신들의 두목인 사단을 가리키는 수 많은 명칭들 중의 하나로 취급하였다(10:25).
성 경: [마12:25]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저희 생각을 아시고 -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품고 있는 생각을 정확히 알고 계셨다. 그 시점에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가를 비로소 명확히 알게 되었던 것이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동네...집 - '나라'(*, 바실레이아)는 영토적 지역을 말한다기 보다는 전체를 움짖일 수 있는 힘으로서 왕권, 주권(主權)을, '동네'는 정치적 사회, 즉 이웃 공동체 집단을, '집'은 건물이 아니라 가장(家長)을 위시한 질서 체계가 바로 잡힌 가족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집단일수록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세력에 의해서는 하나로 결집되어 그 세력을 막아내지만 내부에서 발생되는 싸움에 의해서는 완전히 파멸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사단이 그의 부하들인 귀신을 조종(操縱)하는 사단의 나라도 동일한 것이다(H. Kruse). 즉 만약 귀신들(demons)의 군주인 사단이 그의 부하들을 쫓아낸다면 그는 사실상 자신을 쫓아내는 것과 다를바 없다. 왜냐하면 그의 부하들은 바로 그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Broadus). 한편 여기서 귀신들은 흔히 역사의 전면에서 실제적으로 활약하는 악의 세력으로, 사단은 그 실제적 활약자들의 배후에 존재하는 궁극적 악의 실체로 이해된다. 더 자세한 내용은 4장 강해 '사단과 귀신'을 참조하라.
성 경: [마12:26]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 이 말은 사실상 모순(contradiction)이다. 사단의 나라에는 사단만이 귀신들의 왕이므로 따라서 이말은 사단이 그의 부하세력인 귀신이 사람을 사로 잡고있는 상태에서 그를 축출해 내버리는 것을 뜻하며 이는 그들 나라의 파멸을 자초(自招)하는 결과가 된다. 실로 사단은 그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통찰력과 분별력이 있다는 점에서 자기 파괴적 행동은 삼가 할 것이다. 그러나 엡 6:12 ; 계 20:7-10에 의하면 사단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분명히 존재하게 됴마 것이다.
성 경: [마12:27]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너희의 아들들 - 단순히 '너희(바리새인) 사람들'(your peoele, NIV)을 의미할 수도 있고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자들, 즉 제자들이나 그 당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다.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너희늬 아들들'이란 표현이 바리새인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의 아들들'의 의미로서 옛부터 가나안과 유다에 족속해 있던 마술사(삼상 28:7-14, 신접한 자 혹은 박수)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들을 히브리어로는 '오브'(*)라고 부르는데, 이는 원래 바람을 일으키기 위한 풀무같은 도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신접(新接)한 자가 그것을 가지고 기체와 같은 영(靈)을 구멍에서 불어내는 동작을 취한데서 나온 이름이다. 물론 이스라엘에서는 일찍이 이들의 행위를 금지(禁止)시킨바 있다(레 19:31 ; 20:6, 27 ; 신 18:11). 그러나 왕조시대에는 이방 문물과 종교의 수입으로 인해 이러한 행위와 이에 대한 미신이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왕하 21:6; 23:24 ; 대하 33:6). 물론 본문에서의 바리새인들의 제자들 혹은 추종자들 역시 그들 역시 조상의 영향을 받아 귀신을 쫓아내는 등의 능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몇몇 그릇된 상황과 관습에 의존하여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행 19:13 ; 외경 Tobit 8:2,3 ; Justin Martyr 85). 특히 유대사가 요세푸스의 보고에 따르면(Josephus, Antiq. VIII, 45-48 ; id., Wars VIII, 185) '솔로몬은 귀족 축출(逐出)법을 터득하여 각종 질병을 치료하고 후대에 전하였는데, 그 방법에 의해 치료받은 자가 다시 그 귀신의 지배를 받지 않을 만큼 완벽한 치료법을 구사(驅使)했다. 이 치료법은 오늘날 까지도 효과적이다. 내가 목격한 바로 베스파시안(Vespasian) 황제 때 엘리아살(Eleazar)이라는 사람이 황제와 그 아들, 지휘관들과 군중들 앞에서 귀신들린 자를 치료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치료법은 솔로몬이 창안한 것 중 하나로 한 식물 뿌리로 된 반지를 귀신들린 자의 코에 꿰고 그것으로 귀신을 끌어내어 그 사람이 졸도하면, 그때 솔로몬의 이름과 솔로몬이 만든 주문(呪文)을 외우면서 귀신에게 다시는 그 사람에 들어가지 말 것을 명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솔로몬의 지혜와 기술이 매우 명확히 증명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에 의해 전수(傳受)된 주술이나 마술들로 인간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질병과 슬픔과 악에서 구원받으려 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더욱이 초대 교회 교부였던 이레니우스(Ireneaus) 는 그의 '이단 교서'(2권, 4:2)에서 유대인들이 사술(black magic)을 사용하면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귀신을 쫓는 습관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런 까닭에 그들 바리새인들이 말한대로 예수께서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었다면 그 당시 유대인들 역시 바알세불의 도움에 의해 귀신을 축출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예수의 말씀의 요지였다.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 예수께서는 저들이 제자들의 귀신을 쫓아내는 것에 대해서 일체 부정하거나 인정하는 등의 말씀은 없으셨다. 다만 바리새인들은 저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을 가정하면서 따라서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즉 '너희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면 그들은 너희들이 내게 대하여 잘못된 말을 한 것, 즉 바알세불의 힘을 입었다고 한 것 때문에 너희를 위선자요 죄인으로 선고하리라'고 하는 표현이다. 실로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귀신을 쫓았다면, 유독 예수만을 바알세불의 능력하에 있다고 하는 것은 부당(不當)한 일임에 분명했다. 예수의 이 반론에 의해서 이제는 바리새인들이 오히려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제자들의 귀신축출 행위가 바알세불에 의한 것이라고도 할 수 없고 또한 예수의 행위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성 경: [마12:28]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 평행구절인 눅 11:20에 의하면 '하나님의 손'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의미하는 구약적 표현(출 8:19 ; 31:8 ; 시 8:3)으로서 '성령을 힘입는'것과 결과적으로 동일한 묘사이다. 예수의 귀신축출행위와 사단과의 연관성은 논리적 모순임을 지적함으로써 그들의 사악한 시기심을 밝혀내신 예수께서 이제 자신의 행위가 성령의 임재와 사역에 의한 것으로 역(易)으로 그리스도의 권세가 지상에서 명백히 드러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임을 주장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 '임하다'의 뜻인 '프다노'(*)는 '뒤따라 잡다'(overtake)의 의미로 본문에서는 제 1과거형으로 어미변화가 되어서(*, 에프다센) '이미 임한 것'을 가리킨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웨슬리(Wesley)와 스티어(Stire)는 본문을 '하나님 나라는 너희가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너희 앞에 전개되어 있다'로 해석하였다. 예수가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사람들의 병을 고친 것은 분명히 사단의 왕국이 괴멸(壞滅)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성령이 현재적(現在的)으로 역사한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던(Dunn)은 '이미 실현된 종말'(the realized eschatology)이라고 불렀다. 그에 의하면 '종말론적인 성령'(the eschatological Spirit)은 예수에 의해서 이 땅에 강림했으며 또한 종말론적인 나라(the eschatological Kinddom)도 역시 예수에 의해서 그 시작이 알리어졌다. 종말론적인 성령이 활동하는 그곳에 하나님 나라의 활동도 진행되고 있으며 그 활동이 일어나고 있는 곳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역사의 현장 그 한 복판에서이다. 한편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적으로 볼 때 단순한 축복의 장소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미치는 전 영역을 가리킨다. 이런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성육신 사건으로 인해 이 땅에 실제적이고도 종말론적으로 도래했으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훗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된 형태로 도래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천국은 이미(alredy) 도래하였으나 아직(not yet)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성 경: [마12:29]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 이 구절에 대해서 예수의 재림으로 인한 종말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 구절은 종말의 완성으로 이해될 필요없이 순수히 예수의 사역(work)을 나타내는 것으로, 즉 기독론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몇몇의 유대 문헌에는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하면 메시야가 사단을 결박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Moses, 10:1 ; 계 20:2). 여기서 '강한 자'란 사단을 가리키는데 예수는 자신이 귀신을 쫓아내는 행동을 통해 (1) 자기가 이미 사단을 결박하고 있다고 함과 (2) 따라서 자신이 귀신의 왕인 사단 보다도 더 강한 자('능력이 더 많으신 이', 3:11)라는 사실과 (3) 이 세대의 종말이 지금 여기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현존하여 악의 권세를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재림으로 인한 완성된 종말의 날이 될 때까지 그 강한 자인 사단의 세력은 여전히 이 세상에서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겠지만 그는 이미 예수에 결박되어 있는 존재이다. 한편 '강한 사람'의 뜻인 '이스퀴로스'(*)가 손과 관련된 기능, 수완이 좋은 사람을 나타내며 특별히 사단에 관련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견해(Campbell)가 있으나 본문의 맥락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 '세간'으로 번역된 헬라어 '스퀘에'(*)의 문자적 의미는 '그릇들'(vessels)이다. 이는 결국 사단에게 사로 잡힌 자, 즉 귀신들린 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늑탈하다'의 뜻인 '디아르파조'(*)는 약탈을 하되 모두 털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KJV에 의하면 특별히 이 '늑탈하다'(plunder)라는 말은 전시(戰時)나 내란(內亂)때 적들로부터 물건을 샅샅이 약탈당한다고 하는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신 전복자 예수께서 지금껏 사단이 마음대로 지배하던 이 세상에서 영혼과 육체 모두가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물건을 빼앗아 악의 세력에서 건져질 것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빼앗은 그들 모두를 다시 인생의 원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되돌려 보내시어 하나님이 주시는 힘, 즉 성령에 따라 사는 자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의 권세있는 사역은 십자가, 부활 사건 이전에 부터 이미 활발히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 같은 사실은 사 49:24, 25의 예언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지금은 이미 도래된 메시야의 시대이고 예수께서 사단의 소유물이 되었고 사람들을 하나하나 자신의 품으로 회수(回收)하시는 기간이다. 따라서 지금은 예수에 의해 사단의 집이 약탈(掠奪)되어 가는 과정이며 사단의 집이 모두 털린 후에, 즉 악의 세력에서 모든 사람이 풀려난 후에 예수의 재림으로 결박된 사단은 영원히 멸망 당하게 될 것이다. 눅 10:17, 18의 칠십 명의 전도인들에 의하면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그들에게도 항복하였으며 예수께서는 사단이 하늘로 번개같이 떨어짐을 목격했다고 하였다. 사단이 권세의 무너짐은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계속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복음전파와 그 실천적인 삶에 의해 점차 진전(development)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성 경: [마12:30]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 - 여기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의 반대적 의미는 막 9:40과 눅 9:50에 의하면 '우리'(마가) 또는 '너희'(누가)를 '위하는 자'이다. 그런데 이것은 마가복음에서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 무관심한 자들에 대해 언급한 것이며 누가복음에선 예수를 따르기를 거부하는 어떤 사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이에 비해 본문의 논지는 매우 직선적으로 중립적인 태도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권세와 사단의 권세가 서로 투쟁하는 와중(渦中)에서 중립적 입장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의 '함께 아니하는 자'에 대해 크리소스톰은 '마귀'로, 벴겔과 네안더는 앞에서 나온 '유대 마술사' 등을 언급한다고 본다. 이 중에 크리소스톰의 견해가 환영받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함께 아니하는 자'란 단순히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대해 무관심한 자, 예수와 연합(union)하기를 싫어하는 자를 말한다기 보다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바리새인들과 그의 추종자들처럼 '공공연히 예수를 비난하고 서로 의문을 제기하는 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 - 구약에서 흔히 하나님이 추수하는 분으로 묘사되었듯이 신약에서 예수는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모으고 또한 추수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3:12 ; 13:30).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기적행위를 보고 그를 메시야로 고백하려는 자들에 대해 예수가 바알세불의 힘을 입은 자라고 거짓 증언함으로써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려는 것을 방해하였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전진과 확산을 막기 위해 예수로 부터 사람들을 흩으려는 자들이 바로 '모으지 아니하는 자', 곧 흩어버리는 자들인 것이다. 실로 예수의 위대한 사역은 바로 잃어버린 양을 찾아 모으고 또 모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사단은 되찾은 양 조차도 다시 빼앗고 될수 있는 대로 그들을 흩으려는 악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여하튼 본문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결단코 중간적 입장에 머무를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정녕 예수의 사역에 적극 동참치 않는 자들은 예수의 나라를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자들인 것이다.
성 경: [마12:31]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 공동번역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거나 모독하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으로 번역되어 있다. 헬라어 본문의 문자적인 의미 역시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죄와 비방은 사하심을 받게 될 수 있으나'의 뜻으로 이래된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가 무한, 풍성하므로 인간의 모든 죄악이 도말(塗抹)될 수 있다는 성경의 보편적 진리를 입증해 준다(시 63:3 ; 86:5 ; 130:3,4 ; 사 1:18 ; 미 7:19 ; 요일 1:7). 더욱이 이 진리를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대속사역은 완전, 충만하여 그 어떤 죄악일지라도 능히 용서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여기 언급된 '훼방'에 해당하는 헬라어 '블라스페미아'(*)는 '심한 비방'이나 상대방에 대한 지독한 '모독'(9:3) 또는 어떤 대상은 '반대하여 말하다'(32절)는 뜻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비방하는(blasphemy) 행위에는 매우 심각하게 대처(reaction)했다(26:65). 그러나 예수는 이 부분에서 인자, 곧 자신을 거역하는 행위와 심지어 암묵(unspokenness)적 의미에서이지만 하나님을 훼방하는 행위 조차도 용서의 가능성이 주어짐을 시사하셨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 이 선언은 하나님의 자비가 예수의 대속 사역에 어떤 결함이나 불충분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더욱이 성삼위 하나님의 위상(位相) 중 제 3위에 해당하는 성령의 탁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한편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란 성령의 이지적 사역을 사단의 능력으로 간주하는 것이라 보는 학자들이 있다(Broadus, Chafer, Gebelein). 그런 점에서 바리새인들은 이미 그 죄를 범하고 말았는데,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덧입은 예수의 이적을 바알세불의 소치(result)로 매도했던 것이다(24절). 이와 대조적으로 본문을 단순히 예수를 헐뜯고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일 뿐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성령의 독특한 사역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 발생하신 분으로서(요 15:26 ; 16:7 ' 롬 8:9 ; 갈 4:6) 창조와 구속을 완성하는 사명을 맡으셨다. 그런 까닭에 그분은 죄인들에게 죄를 자각케 하고, 예수의 초청을 수락(acceptance)케 하며, 영원한 진리를 깨닫게 함으로써 더 성숙한 신앙 인격체로 자라나게 하신다. 그러므로 비록 성부를 경원(敬遠)시 하고 성자를 미워한 자라 할지라도(딤전 1:13), 이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역사로 인해 참회(懺悔)의 자리를 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성령이 역사를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비방, 모독하는 것은, 곧 참회와 중생에 이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遮斷)해 버리는 일로서 결국 심판에 회부될 수밖에 없는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된다(요 3:36). 한편 신.구약을 통틀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한 규정한 것이 있다. 그것은 '짐짓 범한 죄', 곧 의지적 결단에 의해 자행한 죄이다(민 15:30 ; 히 6:4-6 ; 10:26-32 ; 요일 5:16).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며, 은혜의 빛이 어떻게 비취는가를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그것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부지중(不知中)에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의 경우(고전 15:9)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범죄이다. 이같은 범죄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과 긴밀한 관련성이 있다. 즉 예수가 행하시는 놀라운 사역들(치유, 금식, 부활하심 등)이 분명히 하나님과 성령의 능력안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충분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완강하게 부인하는 것은 결단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분명한 것임을 인지하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성령께서 인간의 내면에 들어오셔서 감동, 감화하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의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곧 용서의 가능성을 완전히 막아버리는 일아 된다. 결국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란 어떤 특수한 경우에만 적용시킬 수 없는 일로서, 죄를 깨닫게 하고 참회케 하는 성령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거나 고의적(故意的)으로 성령에 대항하려는 고집스럽고도 악의에 찬 심령과 그 모든 활약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Alford, Plummer, Robinson 등).
성 경: [마12:32]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누구든지 말로 - 앞 구절에서도 소개한 바 있듯이 '훼방', 곧 '블라스페미아'는 의지적 범죄로서 특별히 '말'에 의한 성령이 가르침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사실 '말'이란 인간 내면을 외부로 표출(表出)시키는 통로로서 '말에 의한 훼방'은, 곧 전인격적 훼방을 암시한다(24절).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 본문에서 나오는 '인자'라는 칭호가 무엇을 의미하는 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혹자는 이를 막 3:28의 평행구와 연관시켜 복수 개념('인자들')으로 읽음으로써 단순히 사람들을 지시하는 말로 이해한다. 그러나 '인자'란 마태가 일반적으로 사사한 바대로(8:20) 성육신(Incarnation)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Origen). 한편 인자를 거역하는 것과 성령을 거역하는 것의 차이점에 대한 견해는 (1) 인자의 성령보다 덜 중요하다거나, (2) 전자는 세례받기 이전과 관련된 문제이고, 후자는 세례받기 이전과 관련된 문제이고, 후자는 세례받은 이후에 관련된 문제라고 하거나, (3) 또는 전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람을 후자는 그리스도인 예언자들의 권위를 부인한다는 것, (4) 또 전자는 예수의 인성을 후자는 예수의 신성을 가리킨다 등등 많은 견해가 있으나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5) 스텐달(Stendahl)과 보링(M.E. Boring)의 견해로서 인자를 거역하는 자들을 불신앙인들로서 만약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 반면 성령이 거역하는 자들은 오순절 사건 이후에 성령강림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로서 후에 배교(背敎)하거나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하는 다른 그리스도인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자들로서 이들은 결코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물론 이 견해 역시 일면 타당한 점은 있으나 전적으로 환영할 수는 없는 주장이다. 이러한 제 견해들에 비해 다음 견해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즉 (6) 인자를 거역한다고 함은 예수 그리스도가 전하는 복음의 진리를 거부하거나 거스리는 것을, 그리고 성령을 거스리는 것은 예수가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 것과 같은 놀라운 사건들(치유, 금식, 부활하심 등등)이나 성령의 내적인 감동이나 회개에 역사가 분명히 하나님 능력 안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충분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완강하게 성령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 해석이 정당하다면 인자와 성령의 차이는 어느 정도 부수적인(relatively incidental)것에 해당한다. 요컨대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곧 예수 자신의 주장들을 거역하는 셈이 된다. 실로 '인자를 거역하는 데'서 전진하여 '성령을 거역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그 죄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정녕 성령을 거역하는 일은 종말론적인 범죄로서 영원한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인간 최고(最高), 최후(最後)의 죄가 된다.
거역하면(*, 카타) - 일반적인 의미로서 무엇을 '반대한다'는 의미이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성령의 제 사역과 그분의 존재 자체에 대한 전면적 부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말'을 통한 훼방한 행위는 이 거역 중에 한 부분에 속한다.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 이 말을 단지 관용적 표현으로 취급하여 결단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Plummer). 그러나 이것은 너무 안이한 해석이다. 한편 '세상'의 뜻인 헬라어 '아이온'(*)은 '세대'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이 세대', 즉 구약의 우대인 세대(율법시대)로, '오는 세상'은 '오는 세대', 즉 신약의 그리스도인 세대(은혜시대)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Clarke). 그러나 대체로 현존(現存)하는 세상과 예수의 재림으로 이뤄질 미래의 영원한 세계라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Calvin). 한편 유대인들은 전 역사를 메시야 이전과 이후 세계로 양분하여 생각하고 있다(에스라드마 2서 5:47,50). 그리고 로마 카톨릭에서는 '오는 세상에서의 사하심'이라는 말을 통해서 이 '오는 세상'을 현 세상과 마지막 세상 사이의 중간 기간으로 이해 함으로써 이 구절을 그들의 연옥(purgatory)설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용서받지 못하고, 즉 회개치 않고 죽은 불신앙인도 세상 끝날에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강림이 그분의 미래적 강림(*, 파루시아)의 기초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존하는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미래에 다가오는 세상의 역사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죄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하신 것은 바로 성령 훼방의 죄를 범한 사람은 영원히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위치, 즉 마귀들과 같이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의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의미한다.
성 경: [마12:33]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 열매에 의한 나무 판단의 교훈은 이미 7:17, 18에서 본 바 있다. 한편 본문을 이중적 구조로 이해하여 첫번째 등장하는 나무와 살과를 성령을 힘 입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치유에 의한 선한 결과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등장하는 나무와 실과를 스스로 악히기(나무) 때문에 성령을 훼방하는 말(열매)을 할 수밖에 없었던 바리새인들의 행각(行脚)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Alford). 실로 나무는 필연적 인과(因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좋으면 둘다 좋고 나쁘면 둘 다 나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귀신을 쫓아내고 정의를 외치는 예수의 실과(fruit)는 결국 그 근본 나무가 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너무도 분명한 예수의 실과를 부인하지 못하였으니까 대신 예수의 나무를 비방했는데, 그들의 허구성(虛構性)이 이제 논리로 격파당한 것이다. 예수는 근본과 결과를 모두 선한 교사이신 동시에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소개, 변호할 수 있는 능력의 교사이기도 하셨다.
성 경: [마12:34]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독사의 자식들아 - 바리새인의 본성을 지적하시는 엄한 표현으로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서도 나온 말이다(3:7). 바리새인들은 예수 뿐 아니라 세례 요한을 가리켜서도 '귀신이 들렸다'(11:18)고 했는데 결국 그들은 예수와 세례 요한을 똑같이 정죄(condemnation)한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한 그 바리새인들은 이제 열매를 맺지 않은 그들의 사악함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찍혀 불에 던지우게 되는 운명에 이르른 것이다(3:10). 그들은 종국(終局)에는 영원한 멸망에 이르고 말 사단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 본질과 외부로 표출된 현상이 동일할 수 밖에 없음을 강력히 암시하는 말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그들의 실체(독사의 자식)를 노출시킴으로써 그들의 악의적 모함(예수를 바알세불이라 한 것)의 거짓말을 확증하셨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 그의 말과 행동을 결정한다. 왜냐하면 마음은 인간 본성의 중심체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 '가득한'을 뜻하는 원어 '페리스슈마'(*)는 충일(充溢)함', '(식사의) 남은 찌꺼기'등의 뜻으로 비의지적이고, 체질적이며, 생산적인 넘침을 암시한다. 실로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자연적이고 체질적으로 '말' 또는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요구하는 것은 마음의 참된 변화였던 것이다.
성 경: [마12:35]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아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 '쌓을 선'을 새 번역에서는 '선한 마음의 곳간'으로, 공동번역에서는 '선한 마음을 쌓아 두었다가'로 표현하고 있다. 실로 마음이란 그 사람의 모든 사상과 생각과 의지와 도덕률의 총체적(總體的) 창고이다. 선악의 창고인 사람의 마음에서 선한 말 혹은 악한 말이 나오는데 선한 창고, 즉 착한 마음씨에서 사람들에게 좋고 유익한 말이, 악한 창고, 즉 악한 마음씨에서 사람들을 해롭게 하는 말들이 나온다. 결국 이 표현은 '그 실과로 나무를 알 수 있다'고(33절)하는 진리와 일맥상통한다.
성 경: [마12:36]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 여기서 '무익한'(*, 아르곤)이란 부정 접두어 '아'(*)와 '공적'(功積), 또는 '일'을 뜻하는 '에르곤'(*)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부주의한', '쓸모없는' 등을 뜻한다. 특히 본문에서 이 말은 '근거없는'(unfound, JB)이라는 의미보다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나타내지 않은 채 '무가치한, 무의미한'(insignficant, Stendahl, Peake) 말, 곧 생명력이 결여된 도덕적으로 무익한 말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 모든 말을 일일이 아신다.
심판 날에...심문을 받으리니 - 전우주적 종말이 이를 때, 곧 심판 날에(10:15) 심판주이신 예수께서는 각인의 사소한 행동까지, 특히 그 사람의 '무익한 말까지 심문하실 것이다(갈 6:7 ; 엡 6:8). 실로 인간의 현재적 언어 생활은 종말의 영욕(榮辱)을 결정하는 중요한 것이다(엡 5:3, 4 ; 골 3:17 ; 약 1:19 ; 3:1-12).
성 경: [마12:37]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네 말로 의롭다...정죄함을 받으리라 - '의롭다 함'과 '정죄함'의 기준은 선한 말을 하였느냐, 악한 말을 하였느냐에 달려 있다. 여기서 말과 행위는 완전히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선한 말을 할 수 있고 또 진정한 의미의 선행을 베풀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의 수준을 그 사람의 말하는 것에서 판단할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의롭다하심, 정죄하심을 인간의 말에 의해서 판단하신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고이'(*)는 단순한 음성으로서의 말이 아니라 발화자(發火者)의 의식과 내재적 지식을 담고 있는 언어라는 뜻이다. 이는 결국 심판 대상이 되는 말은 겉으로 드러난 입술만으로서의 화려한 말이 아니라 그 원칙적 동기인 속마음으로 부터의 말임을 알 수 있다. 실로 예수는 인간의 속깊은 생각을 익히 알고 계신다(22:18 ; 요 2:24, 25).
성 경: [마12:38]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요나의 표적]
그 때에...말하되 - 여기서 '말하되'의 원어 '아페크리데산'(*)은 '대답했다'는 뜻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논쟁을 계속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표적 보여 주시기를 - 여기 '표적'(*, 세메이온)이란 자연적이고 일반적인 것을 통해 초자연적인 사실이나 진리를 나타내 주거나 어떤 예언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한 증거로써 즉시 또한 신속하게 발생되는 어떤 증표(somemiraculous token)를 의미한다. 이들이 요구하는 눈에 뵈는 표적은 적들의 메시야 상(像) 에 근거한 이적적 사건, 즛 예수께서 로마에 물리치시고 다윗의 통일왕국을 건설하는 것, 또는 천군천사의 대군을 몰고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서 그들의 정치, 종교적 지도자가 되는 것 등이다.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메시야 상과는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만이 발생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예수께서는 수많은 기적을 베푸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심으로써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춘분히 증거하셨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모든 것을 바알세불의 영향력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또 한 번의 이 표적(sign) 요구는 뻔뻔스럽고도 무례한 것으로서 자신들의 악의에 찬 불신앙적 내면을 여실히 내보인 것이었다.
성 경: [마12:39]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요나의 표적]
악하고 음란한 세대 - 예수께서는 이 세대가 도덕적으로 타락했으므로 악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불충실하기 때문에 음란하다고 정의하셨다. 이는 렘 3:6-13 ; 겔 16 ; 호 1:2-2:15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결혼으로 결속한 부부와 같은 관계이므로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과 우상숭배 행위는 바로 하나님께 대한 간음(adultery)으로 인식됨을 의미한다. 이 영적 간음은 유대인들이 그동안 범한 우상숭배 행위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렘 3:10), 하나님을 향한 내적 적개심(호 7:13-16), 세상과 벗을 삼는 것(약 4:4) 등등으로부터 예수가 제시한 구원의 길을 버리고 다른 것을 좇는 불경건 및 예수의 사랑과 은혜의 표적을 경멸하고 자신들의 기준에 적합한 표적을 요구하는 등의 불신앙적 행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으로부터 불충실한 위선적 행위 전반을 내포한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 - 요나의 표적(the sign of Jonah)이란 말은 요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며 따라서 요나에 의해서 주어진 어떤 표적을 말하지 않는다(Zerwick, Turner). 요나는 일종의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니드웨 사람들 앞에 나타났으므로 요나 자신이 그들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Jermias, E.H. Merill). 요나가 밤낮 사흘을 물고기 배속에 있다가 구원 받은 것같이 예수도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사흘동안 그의 시체가 무덤에 안장(安葬)되었다가 제 3일에 부활되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곧 예수가 어떤 표적을 보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메시야이시며 메시야의 표적이 된다고 함을 의미한다.
성 경: [마12:40]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요나의 표적]
요나가...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 이는 욘 1:1-2:10에 나오는 바다 속 경험과 예수 자신의 십자가 죽음 및 부활사건을 비교하신 부분이다. 한편 본문의 '큰 물고기'(*, 투 케투스)란 바다의 괴물 또는 거대한 불고기란 뜻으로, 이 물고기 배 속에서 구출된 요나의 경험은 곧 예수의 땅속 3일간의 묻힘과 그 3일후의 부활을 예시하는 예언적 모형이 된다. 그런데 예수의 목요일 수난설을 주장하는 학자들(W.G. Scroggie)은 '밤낮 사흘'을 문자적인 의미로 취급하여 목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 만 72시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수난 주간에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보고(26:17-30)에 의하면 예수는 무덤속에 불과 36시간 남짓 있었던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그러므로 '밤낮 사흘'이란 유대인의 시간 계산법에 따른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랍비들은 한 날(a day)과 한 밤(a night)을 하나의 묶음으 생각했다. 그들은 한 묶음의 일부분이라 하더라도 단위상 전체 묶음으로 이해하였다(삼상 30:12, 13 ; 에 4:16 ; 5:1 ; SBK, 649). 따라서 그들의 전통적 해석법에 따르면 '밤낮 사흘'은 단지 '세 날들'(three days)을 의미할 수도 있고 밤이나 낮이 셋으로 결합된 것, 곧 2박 3일을 의미할 수도 있다. 여하튼 예수는 '제 3일'(on the third day)에 무덤에서 일어났던 것이다(16:21).
땅 속에(*, 엔 테 카르 디아 테스 게스) - 문자적으로 '땅의 심장에'로서, 욘 2:2의 '스올의 뱃속'이 문자적으로 '음부의 심장으로부터'란 뜻이므로 아마 이 표현 양식을 따라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 '땅의 심장에'라는 표현은 예수가 지옥으로 내려갈 것이라는 의미(Meyer)가 아니라 단지 예수의 시체가 땅 속 무덤에 안치(安置)될 것을 의미한다.
성 경: [마12:41]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타락한 이스라엘의 실상]
심판 때에 니드웨 사람들이...정죄하리니 - 요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라면, 요나의 절도로 회개의 자리에 섰던 니드웨 사람들은 예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형이었다. 그러나 요나와 예수 모두는 죽음에서 구원받음으로써 자신들이 전파한 복음의 확실성을 입증하였으나 그들의 전도를 받은 대상자의 반응은 서로 정반대의 것이었다. 즉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드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으나(욘 3:1-10),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나보다 더 큰 이'이신(요나는 심판과 복음을 선포하는 자, 예수는 심판자요, 그 선포의 대상자이셨다. 그리고 요나는 친히 세상 죄를 지심으로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을 마련하셨다<5:21ff ; 12:6ff>. 예수의 전도와 이적을 보고서도 결코 회개하지 않았다. 따라서 심판 날에 하나님은 니드웨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보다 더 악하다고 입증된 이 세대 사람들의 잘못된 점을 일어나서 증거하게 하실 것이다. 한편 여기서 '심판 때에 일어난다'는 것은, 곧 심판 법정의 증인으로서(욥 16:8)최후 심판 때에 이 세대의 잘못을 송사(頌辭)한다는 의미로서 셈어의 법률에 관한 관용적 표현이다(Black, Wellhausen).
성 경: [마12:42]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타락한 이스라엘의 실상]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 남방(아라비아 반도)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루살레미로 왔다(왕상 10:1-13). 왕상 10:1에 의하면 본문의 '남방'을 구체적으로 '스바'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곳 '스바'는 유대인들이 '땅끝으로'(at the ends of the earth, 렘 6:20) 알고 있던 아라비아 서남부의 한 왕국이었으나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에디오피아의 여왕이었다고 전한다(Josephus, Antiq. VIII, 165). 여하튼 남방 여왕은 열정적인 탐구열을 가지고 '땅끝에서', 곧 아주 멀고 먼 이스라엘 밖으로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왔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그들과 함께 계시는 지혜의 근본이신 그리스도를 보면서도 교만과 율법적 허영에 가득찬 나머지 귀기울이지 않고 그의 거부함으로써 마지막 날에 남방 여왕으로부터 송사당할 것이다. 한편 예수는 자신이 솔로몬보다 극히 탁월한 존재임으로 선포하셨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진리이다. 즉 예수는 신.구약을 통틀어 모든 지혜자, 예언자보다 또한 모든 지혜 문학보다 더 큰 감회와 영향을 온 세상에 미쳤다. 그리하여 솔로몬이 단지 진리를 간파(看破)할 줄 아는 한 여왕을 이끄는 것이 큰 화재가 되었던 반면 예수는 빈부귀천을 망라(網羅)한 모든 사람들을 당신에게로 이끄셨던 것이다(요 12:32).
성 경: [마12:43]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타락한 이스라엘의 실상]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때 - 이 가분은 22-37절의 바알세불 논쟁과 연결되어 있다. 한편, 많은 학자들은 눅 11:24-26의 평행본문 가운데서의 이 비유는 개인에게, 마태복음에서는 나라(nation)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본문을 두 가지 측면으로 분리해 볼 수 있는데, (1) 역사적 측면에서 볼 때, 바벧론 포로에가 돌아온 유대인들은 학사 에스라와 느헤미야 등 선지자들에 의해 그들의 우상숭배 행위, 종교혼합주의, 잡혼(mixed marriage) 등의 불결한 모든 관습을 제거하게 되었는데 이 기간은 더러운 영이 이스라엘에게서 나간 시기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2)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의식과 바리새주의에 신음하던 유대민족이 예수의 복음 사역(귀신을 쫓아내는 치유, 이적에 비교), 곧 바알세불 논쟁과 요나의 표적, 강한 자가 집에 들어가 귀신을 축출하는 기사 등을 전해듣고 예수에게 중립적 태도를 취하였던 시기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 사막 혹은 광야를 뜻하는데 흔히 이런 곳을 귀신이 좋아한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 예수께서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4:1) 나가셨던 것은 이에 대한 한 본보기일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물없는 곳'은 거주지가 없는 곳(욥30:3 ; 시 107:4-7 ; 바룩서 4:35)이요 원기(元氣)를 회복할 수 없는 척박한 곳(시 63:1)이라는 의미로 이해할수도 있다.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 귀신은 인간의 마음속에 거하며 그 인간을 자기에게 종속시키기를 열망한다. 그런데 그의 거처가 될 곳은 맑고 깨끗한 영혼이 아니라 타락하고 부패한 영혼, 진실과 불의의 중간에서 회색빛 태도를 취하는 영혼이다. 그곳을 찾기까지 그는 쉼을 얻지 못하고 계속 찾아 헤맬 것이다.
성 경: [마12:44]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타락한 이스라엘의 실상]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 헬라어 본문에서는 특히 '내 집으로'(*, 에이스 톤 오이콘 무)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다. 귀신은 전에 자기가 거하던 인격을 이렇게 부르면서 그곳이 여전히 자기의 소유임을 확신하고 있다. 적어도 귀신은 자신이 옛날 거했었던 그 인격의 본질적 특성이나 신앙, 의지적 특질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집이 비고 소제되고 - 문자적으로는 '사람이 살지 않고 비로 쓸어 깨끗케 되고'이다. 이는 (1) 역사적으로는 이스라엘이 비록 이방의 우상 신상들을 파괴하였으나 그들의 삶에는 하나님의 부재(不在)하고, 그들 종교는 형식에 치우쳐 있었음을 나타내며 (2) 영적으로는 예수의 전한 복음에 솔깃하기는 했으나 단지 예수에 대한 악의적 대항을 삼가하고 중립적 태도를 취했을 뿐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영적 세계에서는 불의와 적극적 악의가 없는 상태를 경건하고 거룩한 상태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Hendriksen). 오직 전적 헌신이냐 전적 부인(否認)이냐만 있을 뿐이다.
수리되었거늘(*, 케코스메메논). 헬라어 동사 '코스메오'(*)의 완료 수동분사로, 정확한 뜻은 '장식되어졌다'이다. 바벧론에서의 종교 혼합주의 등과 같은 더러운 악령의 영향력이 제거된 이스라엘이 (1) 주의 회복케 하시는 은혜에 의해 장식(裝飾)되었다고 보는 견해(De Wette, Chrysostom), (2) 또 다시 새로운 죄 또는 악령으로 장식되었다고 보는 견해(F.R. Fay. Origen), (3) 바리새파의 인본주의적 사고방식과 위선 및 랍비들에 의한 율법주의로 장식되었다고 보는 견해(Alford)가 있다. 일반적으로 비고 소제되고, 수리된 집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알포드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율법에 대한 형식주의적인 태도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의 참 정신이 가리워진 상태의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본다. 한편 비고, 소제되고, 수리된 그 집은 악한 영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는 했으나 참된 영적 변화가 아직 발생되지 않은 상태를 암시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여전히 율법 규정들에 대한 맹목적 추구와 열심으로 그의 영혼의 문제, 즉 영생과 구원의 열망을 이루려는 헛된 노력을 하고 있는 상태이다.
성 경: [마12:45]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타락한 이스라엘의 실상]
더 악한 귀신 일곱 - 여기서 '귀신일곱'이라는 말의 '일곱'은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숫자로 완전한, 더 이상은 생각할 수 없는 정도의 양(quantity)과 질(quality)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곱 귀신이란 가장 강하고 악한 귀신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본문은 역사적 측면에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the Great Alexander, B.C. 356-323) 왕의 침략과 시리아의 안티오커스 에피타네스(Antiochos IV)에 의한 예루살렘의 헬레니즘화(Hellenize)를 상징할 수도 있다. 실로 안티오커스 4세는 페르시아 시대 이래로 유대인들에게 보증되어 있던 종교상의 특권을 박탈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우스 제의(祭儀)를 거행, 참여토록 하였다. 이 같은 사악한 정책에 대한 유대인의 반발로 인해서 안티오커스는 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전락(轉落)시켰다고 한다.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 비유에 대한 전체 결론으로 악한 세대로서의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저주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저들의 자랑이며 종교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은 A.D. 70년에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멸당했다.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가 쉬우리라"(10:15)는 말씀처럼 이스라엘이 완전히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에 가서 그들의 형편은 전보다 더욱 더 비참해졌다. 이와 더불어 종말에 처할 유대인들에게는 귀신의 강력한 역사로 인해 더욱 큰 고통이 기대된다(계 9:1-11).
성 경: [마12:46]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예수의 거룩한 가족]
예수께서 무리하게 말씀하실 때에 - 문자적으로 '예수께서 무리에게 여전히 말씀하시고 있는 동안' 이다. 이는 앞 구절과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는 집안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막 3:20, 21).
그 모친과 동생들 - 13:55-56에 의하면 예수에게는 모친 마리아와 그 형제들 야보고, 요셉, 시몬, 유다와 그 누이들이 있었다. 여기 언급된 형제들은 같은 어머니에서 출생한 예수의 동생들이다. 그런데 신약 성경이나 초대교회 교부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지만 마리아의 평생 처녀설을 주장하기 위해 로마 카톨릭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펼친다. 즉 로마 카톨릭은 '형제들'이 요셉의 전처(前妻)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들이거나(Hillary, Epiphanius) 아니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똑같은 이름을 지닌 동생 마리아에게서 출생한 아들들이라는 견해이다(Lange, McHugh, Jerome, Lightfoot). 사실 '형제들'이란 남자 친척들이라는 광의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다(행 22:1). 그러나 이런 광의적 의미에 근거하여 '형제들'을 전처 소생으로 본다면 예수는 법적 측면에서 다윗 왕위를 계승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이름이 동일한 마리아의 여동생의 아들이라고도 볼 수 없는데, 이유는 두 딸에게 똑같은 이름을 지을 부모가 없는데, 이유는 두 딸에게 똑같은 이름을 지을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 견해로서(Tertullian, Heggesipus) '형제들'은 예수의 친동생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한편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훗날 예수가 최후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 무리에 함께 가담하여 예수의 처형장면을 지켜보았으며(요 19:25) 예수가 승천한 이후에는 오순절 사건에 참여하였다(행 1:14). 또한 주의 형제 야보고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행 15:13 ; 21:18 ; 고전 15:7 ; 갈 1:19 ; 2:9, 12 ; 유 1:1).
성 경: [마12:47]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예수의 거룩한 가족]
예수께 여짜오되...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 본절은 권위있는 사본들(시내, 바티칸 등)과 역본들(시리아역, Vulgate역)에는 생략되어있기 때문에, 46절과 48절을 자연스럽게 잇기 위해 후대 필사자들이 의도적으로 첨가한 설명구로 보기도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본절은 분명히 이 부분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평행구절(막 3:32 ; 눅 8:20)에서 그 타당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적어도 원문(the Original Text)에는 기록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D.A. Carson). 한편 예수의 어머니와 그 형제들이 예수를 만나려고 진지한 노력을 한다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예수가 전통적 권위를 지닌 바리새인들의 대적자(對適者 )가 되고 있었기 때문에, (2) 예수의 발빠른 선교사역으로 인해 그의 건강상 어려움을 직감했기 때문에(막 3:21), (3)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의로의 이사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4:13 ; 눅 4:16-31 ; 요 2:12) 등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그들은 수없이 운집한 무리들 때문에 예수와의 접촉이 심히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눅 8:19).
성 경: [마12:48]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주제2: [예수의 거룩한 가족]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 이는 어머니와 동생들의 존재, 즉 혈연관계를 부인하려는 것이 절대 아니다(요 19:26, 27). 이 말은 출생과 유전(遺傳)으로 이뤄지는 혈연 관계보다 영혼의 거듭남으로 이뤄지는 하나님과의 영적, 신앙적 관계가 더 중요함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실제로 예수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세워진 교회를 통하여 보다 더 위대하고 영속적인 영적 가족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기초적인 노력으로 이 땅의 한 가정에 태어나 혈연관계를 맺으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호 1:9)한 선언과 긴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바로 본문의 이 구절이 예수의 '로암미(Lo-Ammi) 선언'에 해당한다. 이미 선택된 백성이라고 해서 개별적으로 영원히 선택된 각각의 인격들이라고 볼 수는 없듯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자는 비록 혈연적 가족일지라도 예수가 선언하시는 하늘나라의 영적 가족이 아님을 선언하신 것이다.
성 경: [마12:49]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베척]
주제2: [예수의 거룩한 가족]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 여기 손을 내뻗은 것은 예수의 애정어린 마음의 표현인(Hendriksen) 동시에 최대의 겸손(Bengel)이며 확신에 찬 행동 언어였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몸짓과 더불어 자신을 구주로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향하여 '성(聖) 가족'이라는 영광스런 선언을 하셨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신앙으로 아뤄지는 공동체 안에서는 모두가 한 아버지를 모신 동일한 가족의 일원이 됨을 보여주셨다. 비록 이들 중 나약한 본성에 의해 넘어지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예수는 여전히 그를 향하여 가족됨을 선언하실 것이며, 그들을 내 형제라 부르기에 부끄러워 아니하실 것이다(롬 8:17, 29 ; 히 2:11).
성 경: [마12:50]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예수의 거룩한 가족]
누구든지 - 이는 성(聖) 가족의 개방성과 포괄성 및 무한대성을 나타내주는 표현이다. 실로 성부 하나님을 중심하여 이뤄지는 영적 가족은 빈부의 차이나 지역, 문화, 사상 및 계급 간의 차이없이 그리고 영원한 세대에 이르기까지 그 대상이 확대될 수 있다. 이는 만유(all thing under the sun)의 주인이시요 만유보다 크신 분이 바로 이 가족의 친부(親父)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든지'는 무조건적 개방성을 띤 것만은 아니다. 이에는 철저한 제한성과 배타성이 내포되어 있다. 즉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 행함과 동참하는 자'라는 절대적 제한이 바로 그것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 - 이는 신령한 가족을 정의하는 말로 눅 8:21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다. 주를 따르는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권속(眷屬)이요(엡 2:19), 믿음의 식구들(갈 6:10)이다. 여기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란 초자연적인 차원의 신비를 함축한 말로써 예수께서 절대적 존재자로서의 성부 하나님과 특별한, 곧 부자(父子)의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다'는 것은 어떤 의롭고도 선한 일을 몸소 행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계시된 그분의 구원 의지로서, 예수를 신앙하고 그의 뜻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애쓰는 일을 의미한다(요 6:29).
성 경: [마13:1]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그 날에 - '그것' 또는 '그 사실' 등 바로 앞 내용을 가리키는 말인 '에케이노스'(*)가 첨가된 '그 날'이라는 말은 어느 특정한 사건 또는 일이 발생된 바로 그 날을 뜻하는 말로, 과거의 어느 막연한 시기 혹은 시간을 가리키는 말인 '그 무렵 쯤'의 뜻을 가진 '그때에'(*, 토테)와는 구별되는 말이다. 본문의 경우에 이 말은 천국 비유를 베푸신 그날은 자신의 육적(肉的) 모친과 그 동생들이 주님을 찾아온 바로 그 날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즉 예수 자신의 참 형제 자매와 참 부모는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임을 가르치셨던 날과 같은 날로서, 예수가 바로 이날 자신의 육적 가족을 만나 대접하는데 힘쓰지 않고 영원히 영적 가족이 될 이런 자들에게 천국에 대한 비유를 가르치는데에 먼저 힘쓴 것은 결국 예수가 죄인들 모두를 당신의 가족으로 여겨 주시며 그들에게 천국을 가르치시느라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강력히 암시해 주고 있다. 마태가 굳이 '에케이노스'를 사용한 것도 바로 이 이유이다.
집에서 나가사 - 예수께서 자신을 찾아온 가족들과 잠시 집으로 들어가셨다가 다시 집 밖 바닷가로 나오시는 장면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 '집'은 갈릴리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일 것으로 추측된다. 예수는 집안에서는 비교적 구원된 무리들, 즉 12제자를 중심한 그 가족과 동료들을 위한 제자훈련에 힘을 쓰셨던 것이다. 한편 옥외(屋外)에서는 많은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이적을 행하셨는데 그 장소는 산(5-7장의 산상수훈), 바닷가, 길가, 뽕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 등 다양한 여러 곳으로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든지 그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말씀을 전파하셨다.
바닷가에 앉으시매 - 갈릴리 바다 혹은 디베랴 바다 또는 게네사렛 호수라고 불리우는 이곳의 해변가는 예로부터 레바논 산과 어우러진 푸른 물로 인해서 풍경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어업(fishery)이 성해 소금에 절인 어류들이 멀리 스페인에까지 수출되었으며 전 국토가 메마르고 험한 팔레스틴에서는 비교적 기름진 곳으로서 디베랴, 벳새다, 가버나움, 고라신 등의 많은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었다. 예수께서 비교적 한적한 시간과 때를 택하여 이곳에 앉아서 둘러싼 무리를 향하여 말씀을 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은 단순한 목가풍(牧歌風)의 수채화적 감상을 넘어 일상생활의 타성(楕性)을 깨는 진리에 귀기울이는 구도자(求道者)들의 기쁨과 진실함을 느끼게 해준다.
성 경: [마13:2]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씨부리는 자의 비유]
무리 - 원어 '오클로스'(*)는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가리키는 말인 '플레도스'(*)나 '데모스'(*)와는 달리 천민 집단, 속(俗)된 무리라는 뜻으로 일종의 가치 판단이 개입된 말이다. 또한 '오클로스'는 유대교권주의자들이 율법을 잘 준수치 않고 또 그럴 능력조차 갖고 있지 않는 낮고 천한 지위나 형편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모욕적으로 부르는 말인 히브리어 '암 하아레츠'(*), 즉 '땅의 백성들'에 해당하는 헬라어로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주로 예수께로 달려나온다거나(13:2), 예수를 찾아다닌다거나(눅 8:40), 예수의 전도여행에 줄곧 동행하던(막 5:27; 눅 7:9) 무리들을 지칭하여 당시의 정치, 경제, 종교의 상류층 사람들이 부르던 말이다. 어떤 경우에 '오클레스'는 예수의 친족보다도 더 그와 가까운 관계가 되기도 하였으나(막 3:31 ff)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은 예수를 물질적이고 일시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주는 구원자로서만 이해하고, 인간의 영원함과 관련된 영혼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는 메시야로서는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께서 천국비유를 전파하시던 그 당시에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배 -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소형 어선은 보통 하나의 돛대와 두 개의 노(櫓)가 달렸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배를 타시게 되었는데, 이 배는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므로써 순식간에 형성된 군중집회에서 하늘나라의 새 소식이 조용하게 때로는 엄숙하게 선포되는 설교강단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편 대개의 학자들이 인정하듯이 육성(肉聲) 이외의 특별한 기계설비가 없던 때였으므로 비록 군중집회였다 하더라도 예수의 이 호반(湖畔) 설교의 분위기는 매우 고요하고 진지했을 것이다.
성 경: [마13:3]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비유 - 예수께서 비유 교수법(method of teaching)을 창시한 분은 아니라 할지라도 비유를 활용하여 영적 진리를 유효 적절하게 가르친 사실에 있어서는 그 어느 누구보다 탁월하다. 여기서 '비유'(*, 파라볼레)란 '곁에'라는 뜻의 '파라'(*)와 '던지다'는 뜻의 '발로(*)의 합성어이다. 즉 이는 '옆에 던지다'는 뜻으로 한 사물을 또 다른 사물 곁에 놓아두고 대조, 비교함으로써 그 사물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게 하는 진리 교육의 한 방법이다.
씨를 뿌리는 자(*, 호 스페이론) - 여기 사용된 정관사 (*)는 대표 단수로서 어떤 계층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결국 '씨 뿌리는 자'란 농사를 짓는 모든 사람, 즉 농부를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말 속에는 '농부라면 일반적으로 다 경험하듯이'라는 뉘앙스가 은근히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씨 뿌리는 자'란 말은 결국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위시한 중근동 지방에서는 밭에 씨를 뿌릴 때 농부가 직접 손으로 갈아놓은 이랑에 뿌리기도 하고 가축을 이용하여(가축의 등에 씨앗 담은 주머니를 달아 이동할 때마다 주머니에 뚫린 구멍으로 조금씩 씨앗이 떨어지게 함) 씨앗을 뿌리기도 한다. 본문의 비유는 그러한 씨뿌리는 방법에 대한 관심보다 씨뿌려지는 밭으로 비유된 사람들의 마음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한편 '씨 뿌리는 자'란 다음 세가지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1)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는 선지자들의 예언에서 유추(類推)해 볼 수 있는데, 특히 예레미야는 하나님 자신의 의지를 예언하면서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라"(렘 31:27)라고 선포했다. 실로 남은 자들의 거룩한 씨는 하나님에 의해 보존되고 심기워져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완성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 자신. 예수 이전에도 선지자와 많은 교사들이 율법의 씨를 부지런히 뿌렸으나 많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예수 자신은 밭의 종류에 따라 엄청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사랑과 복음의 씨를 뿌리신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라고 직접적으로 표현된 37절에 따라 예수를 씨뿌리는 자로 이해하는 이러한 경우에 이 비유는 바로 자서전(自敍傳)적 요소를 갖고 있는 셈이다(Buttrick). (3) 모든 기독교인들. 귀중한 복음의 씨를 뿌린다고 하는 것은 먼저 믿은 자들의 특권이자 의무이다. 구원받은 자녀들에게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라고 약속하셨다. 사도 바울도 성도들로 하여금 신령한 씨를 뿌리도록 권고하였다(고전 9:11).
성 경: [마13:4]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길 가(*, 파라 텐호돈) - 이를 직역하면 '길을 따라'가 된다. 이는 밭고랑 사이를 따라 만들어진 길을 가리키는데 이 길은 뭇사람들의 발길에 의해서 단단하고 반질반질하게 다져진다. 본문에서는 이 길이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청중(audience)을 의미한다. 본 비유에서 '길가'의 결정적 특징은 마음이 굳어져 새로운 씨가 자신의 내부에 뿌려질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결국 인간 영혼이 복음으로 대표되는 새 진리에 대하여 아예 처음부터 철저히 배격, 거부하는 것을 가리키는 바 우리는 그 이유를 다음 두가지 경우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1) 의식적 원인 : 자기 자신의 경험이나 학식만을 최고의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만을 고집하는 교만과 독선, (2) 무의식적 원인 : 이 땅에서의 삶이나 목숨보다는 영생의 문제라고 하는 복음의 중대성과 심각성을 채 깨닫지 못하여 아예 처음부터 복음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경솔한 무지와 부주의한 태만에 의한 것이다.
새 - 팔레스틴에는 약 삼백여 종(種) 이상의 새가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흔한 새가 바로 '참새매'이다. 레 11:16과 신 14:15에서 부정한 새로 분류된 이 새는 유대 땅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특별히 이 새를 염두에 두셨는지는 정확치 않다. 그러나 새에 의해 상징되는 악한 자, 즉 사단은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으면서, 복음의 씨앗을 그 자신의 내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방치(放置)하고 있거나 나중 일로 미루어 지체하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는 진리를 경험할 가능성을 갖지 못하게 하는 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받아들이지 않은 복음의 씨앗은 그대로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에 의하여 신속히 제거된다고 하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받을 수 있다. 실로 길가 밭과 같은 사람은 씨앗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거부하였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선과 악, 하나님과 사단, 천국과 멸망의 길이 판가름나는 결정적인 것이다. 사실 복음의 반대 세력은 지금도 기회만 있으면 거부된 씨앗을 앗아가기 위해 혈안(血眼)이 된 채 적극 활동하고 있다.
먹어 버렸고(*, 카테파겐) - 이는 '철저하다'는 뜻의 '카타'(*)와 '먹다'는 뜻의 '에스디오'(*)의 합성어로 조금도 남김없이 완전히 먹어치워버렸음을 나타낸다.
성 경: [마13:5]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흙이 얇은 돌밭 - 팔레스틴에서는 매우 흔한 지형으로, 석회석 지층 위에 얇은 지표가 형성되어 있어서 자연히 바위의 온기(溫氣)에 의해 뿌리가 쉽게 나오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뿌리가 계속 성장할 수 없는 곳을 가리킨다. 씨가 뿌리워진 길가와 같은 사람들은 진리를 전혀 인식하거나 파악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 한다면 돌밭의 경우와 같은 사람들은 진리를 단순하고도 피상(皮相)적으로 이해하는 자들을 대표한다. 흙의 얕음은, 곧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신앙 인격의 천박성 또는 경박성을 매우 효과적으로 형상화시켜 주는 표현이다. 이런 자들의 특징은 그 행동은 빠르나 지속적이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특히 물질문명과 기계의 발달로 극도의 속도와 거대한 분량만을 추구함으로써 대부분 인간의 심성이 표피화되어가며 또한 기계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돌밭 유형의 사람들을 더욱 빈번하게 만나고 발견할 수 있다. 실로 복음의 진리를 성장시키기 위한 영적 토양이 부족한 상태에서 어떤 선한 목적을 추구한다해도 선한 열매를 거둘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결과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표피화(表皮化)된 인간 심성과 경박함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성 경: [마13:6]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해가 돋은 후에 - 식물은 뿌리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영양분도 필요하지만 태양열 또한 필요한 것이다. 태양열은 탄소동화 작용등을 통하여 식물의 생장에 결정적 원동력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흙이 씨로 비유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영혼의 상태를, 뿌리가 씨(복음) 자체에서 나온 생장력을 가리킨다면 여기 해는 그 복음의 씨가 계속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각종 연단과 훈육을 가리킨다 하겠다. 즉 씨 뿌리는 행위가 단회적인 반면 여기 해는 계속적인 에너지 공급 행위, 즉 일반적 신앙 생활을 통한 신앙 훈련을 가리킨다 하겠다. 아니면 여기 해가 돋은 후에는 순간적 감격이 끝나고 이제 신앙인이 되어 일상적 신앙생활이 시작된 후에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7절의 가시와 비교하자면 둘다 땅위에서 연단(鍊鍛)을 준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해가 응당 치러야 할 운명을 가리킨다면 가시는 제 욕심, 염려에 의한 불필요한 시련을 가리킨다고 보겠다. 여기서 밭은 곧 인간의 영혼 상태의 상징이며, 얕은 돌밭은 결국 껍데기는 부드럽지만 그 속은 아직도 채 깨어지지 않은 완악한 상태의 심성을 지닌 사람을 가리킨다. 즉 겉마음은 경박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 속마음은 성령에 의하여 부서지지 않고 자기 아집과 주장으로 가득찬 상태의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밭으로는 복음의 뿌리가 내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일관성과 성실성 그리고 끈기가 요구되는 신앙 생활이 시작되어 해, 곧 시련이 봉착하게 되면 곧 그 복음의 씨는 말라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자에게는 영적 소망을 기대할 수 없다.
성 경: [마13:7]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가시떨기 - 이를 가리키는 헬라어 '아칸다'(*)는 '열매가 없어서 쓸모가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기후가 건조한 팔레스틴에서는 거의 사계절에 다 볼 수 있으며, 그 종류도 약 200여 가지가 된다고 한다. 성경에서 가시는 주로 약을 행하는 자(삼하 23:6; 미 7:4), 이스라엘의 적(민 33:55; 수 23:13; 겔 28:24), 저주(창 3:18), 황폐함(사 9:18) 등으로 상징되고 있는데 본문에서의 가시떨기는 천국복음에 대한 신앙적 장애요소로서, 복음의 씨의 기운을 꺾어 버리게 하는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가시떨기 밭은 가시가 자랄 수 있을 정도의 지력(地力)이 감춰진 곳이지만 생장력이 강한 가시나무 외에 다른 채소나 곡식은 결코 함께 자랄 수 없는 거친 땅이다. 팔레스틴 땅에서는 개간(開墾)된 밭 옆에 흔한 가시떨기가 자라는데 이곳에 밀이나 보리 씨가 떨어져 같이 자라는 수가 있다고 한다. 이때 곡식 낟알의 푸른 껍질까지는 생기지만 내용물은 전혀 없다고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를 알고 믿은지 상당히 오래 되었으나 의와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성도들의 대부분은 이 세번째 부류의 땅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기운을 막았고 - 헬라어의 문자적 의미로는 '숨을 막아 질식시키는 것'을 말한다. 한편 영적인 의미로는 이 '숨' 또는 '기운'은 프뉴마(*)를 번역한 말로 '성령'의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가시떨기가 '기운을 막았다'함은 믿는 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 나가는 모든 영적생활을 훼방하거나 혼돈시키는 것을 말한다. 길 가 밭과 돌밭의 경우는 주로 밭내부가 문제였으나 여기 가시밭은 밭 외부가 문제임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앞의 경우들은 마음 밭이 아예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경우이지만 이 경우는 마음 밭 자체는 쓸만한데 그 마음 밭에 영적 성장에 장애가 될 만한 부정적 씨앗이 더 많은게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열매를 맺는 좋은 밭이 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마음 밭 내부도 좋아야 하지만 외적으로 각종 신앙적 장애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기운찬 영적 생명력과 진취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성 경: [마13:8]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좋은 땅 - '좋은'의 뜻으로 사용된 '칼로스'(*)라는 말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도덕적으로 선한 상태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좋은 땅이란 땅이 기름지고 수분이 충분할 뿐만 아니라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위치하며, 적절한 지력(地力)이 보존되어 있고(레 25:4, 5), 그리고 또 잡초들과 같은 씨앗의 성장에 불필요한 것들이 미리 제거된 순수한 땅을 가리킨다. 이는 결국 이 비유의 원래 의미와 연관시켜 생각해 본다면 진리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영혼의 심지가 깊고 성실한 자, 신앙적 줏대(fixed principle)가 있고 진리에 대해 순박한 자를 가리킨다 하겠다.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 -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의 놀라운 수확량은 4분의 3의 상실, 즉 길가, 돌밭,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앗으로 인해서 생겨난 모든 손실을 충분히 보상하고서도 남음이 있었다. 한편 결실의 창이에 대해서 포세트(Pausett)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삼십 배는 가장 적은 결실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며, 육십 배는 중간 정도의 결실이며, 백 배라고 하는 것은 한 개의 곡식 낟알이 맺을 수 있는 최고의 결실을 나타내기 위한 예로서 사용된 숫자이므로 모든 결실이 항상 30, 60, 100배의 숫자로 거두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경우에 따라서 200배 혹은 300배 까지도 결실을 맺을 수 있다(Herodotus).
어찌되었든지 이는 결실을 맺지 못하는데에 정도의 차이가 있었듯이 결실을 맺는 데에도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보여 준다.
결실을 하였느니라(*, 에디두 카르폰) - 헬라어 원문은 미완료 과거 시제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결실이 어떤 한계점에 도달할 만큼 겨우 이뤄진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생명력 넘치게 결실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인다. 한편 여기 결실은 (1) 내적으로는 복음 씨앗을 받은 각 성도의 영적 진보를, (2) 외적으로는 구속사 전개에 따른 천국 시민의 숫적 증가를 동시에 가리킬 수 있다.
성 경: [마13:9]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성경의 여러 용례에서 '귀'는 복종하는 것과 관련되어 자주 등장한다. 즉 귀는 이해력과 아울러 순종하려는 마음 자세를 가리키는 말로 자주 쓰였던 것이다. 이처럼 추상적 개념을 눈에 보이는 구체적 사물로 대치시켜 표현하는 것은 특히 히브리인이 즐겨쓰던 표현법이다. 예레미야에 의하면 사람들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이유는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함이며 따라서 그 말씀을 욕으로 여겨서 즐겨 듣지 않는다고 하였다(렘 6:10). 이러한 경우에 그들은 영적인 귀머거리인 셈이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귀있는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분별력이 있는 자요 그 말씀을 순종하려고 하는 마음을 준비하는 자를 의미한다. 한편 이는 비유 자체가 갖는 이중 목적, 즉 순종하는 자에게는 더욱 뜻을 명료하게, 순종할 의사가 없는 자에게는 오히려 참 진의를 숨기기 위한 목적과 일맥 상통(一脈相通)하는 말이다.
성 경: [마13:10]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진리를 아는 축복]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 여기서 제자들이라고 해서 '12사도'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평행구절인 막 4:10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곳에는 '함께 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로 더불어 ... 묻자오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예수께 나아온 제자들의 정체(正體)는 그렇다 해도 이들이 예수께 나아온 시점은 분명치 않다. 36절의 표현과 연결지을 때에는 군중집회 중 잠시 틈을 내었을 때의 일로 볼 수 있고 시간적 순서를 무시한 마태의 기본적 편집 태도로 보면 아예 군중 집회가 완전히 파(罷)한 뒤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일반 군중들 중에서 소수 제자들이 특별히 예수께 나아왔다는 사실만은 중요하다. 그들은 예수 앞으로 나아오기까지 먼저 예수의 계신 곳을 찾는 수고의 과정을 겪었으며(연단), 바닷가에서 만난 예수의 비유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까지 참고 기다린 이후에(인내),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바를 제대로 알기 위해 예수께 나아와 질문을 하였으며(적극성), 그 결과 그들은 천국 도래의 비밀을 알게 되는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어찌하여 ...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 이 물음은 이중적인 뜻을 담고 있다. 하나는 비유의 사용 목적에 관한 질문이며, 다른 하나는 방금 말씀하신 비유의 의미에 관한 질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11-17절까지는 비유 사용의 목적에 대하여 가르치시고, 18-23절까지는 씨 뿌리는 비유의 의미를 해석해 주시고 있다.
성 경: [마13:11]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진리를 아는 축복]
천국의 비밀 - 여기서 먼저 '비밀'(*, 뮈스테리온)은 원래 '닫다', '가두다'는 의미의 '전수(傳授)받은 자'란 뜻인 '뮈스테스' (*)가 파생되었고, 이 '뮈스테이'에서 바로 '뮈스테리온'이 파생되었다. 그런데 혹자는(Robertson) 이 용어를 단순히 동방의 신비 종교의 입문, 교리 교육 등에 관계된 용어로만 단정짓지만 오히려 이것은 어느 정도의 종말론적인 비밀을 지닌 셈족어의 '라즈'(*)라는 말과 연관짓는 것이 좋다(R. E. Brown). 이 말은 다니엘서에서 언급된 바 있는데(단 2:18, 19, 27, 28, 30), 거기서는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것이 미래에 일어나게 될 징조임을 시사하고 있다. 더욱이 헬라어 '뮈스테리온'은 히브리어 '소드'(*, 비밀)를 반영하는데, 이 '소드'는 사해사본에서 확실히 발견할 수 있듯이, 천상의 회의에서 유래된 말이다(Brown). 결국 '뮈스테리온'은 하나님의 계획 또는 뜻으로서, 때로 은밀한 말로 전달되기도 하며, 선택받은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며, 항상 종말론적 사건에 관계되어 있다. 한편 '천국의'라는 말이 비밀의 내용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비밀'이라는 말은 천국에 관한 내용이 문자 그대로 '닫아 둔 것'(*)이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천국에 대한 일은 인간 스스로는 결코 알거나 할 수 없는 것으로서 오직 그것을 닫아 둔 것을 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영역의 진리임을 전제하는 표현이다. 본문에 있어서 천국비밀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킬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결코 비밀이 아닌 공공연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의 천국의 비밀이란 유대인들은 상상조차 못한 천국이 역사 안에 이미 시작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 즉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하는 놀라운 소식을 의미한다(Ladd).
너희에게는 ... 저희에게는 - '너희'는 12제자와 함께 주님에게로 모여든 소수의 무리, 즉 영적 의미로는 남은 자(remnant)들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 안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저희'는 외인들(*, 토이스 여소)로서 은혜 밖에 있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저희에 속하는 자들은 당장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다. 어차피 우리는 비유를 깨닫는 자의 놀라운 은혜를 허락받지 못한 자들이므로 비유를 못 알아 듣는 것은 우리 책임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은혜 밖에 있음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주시기를 싫어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요 3:16; 딤전 2:4; 벧후 3:9),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깊이 고찰할 때 우리는 신학의 한 핵심인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엡 1:3-13강해 참조). 그리고 '저희'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대략 다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주어진 은혜의 말씀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유대교권주의자들, (2) 병고침, 오병이어의 기적만을 기대하고 모여든 군중들로, 결국 그들은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예치 못하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김을 당할 것이다(25:30).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밖에 있는 '저희'의 자리가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너희'의 자리에 있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성 경: [마13:12]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진리를 아는 축복]
있는 자 ... 없는 자 - 이 말은 격언적 교훈으로서 마치 비정한 자본주의적 논리에 예수가 동조(同調)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는 물질계에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말씀하심으로써 영적 차원에서도 진리를 깨달은 자는 더욱 더 깨닫게 되고 진리를 거부한 자는 오히려 더욱 더 비참해 진다는 사실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으로 조소(嘲笑)가 아니라 경고의 말인 것이다. 여기에서 있는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자를 의미하며, 없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거나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자를 의미하는 말이다. 있는 자나 없는 자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것'이며 그가 행한 기적들을 '본 것'이다. 그러나 없는 자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그 보고 들은 것을 통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이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해 오고 있다고 하는 깨달음이다. 깨닫고 믿는 자에게는 그 나라에 참예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며 영생이 보장되어 있으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그에게 베풀어졌던 천국복음 마저도 악한 자들에게 빼앗기게 됨으로써 마침내 영원한 멸망에 처해 질 수 밖에 없다.
성 경: [마13:13]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진리를 아는 축복]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 11절이 비유를 사용하는 궁극적 원인이라고 한다면 본 구절은 그 현상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차피 사실 그대로 말해도 그들을 수동적으로 보자면 알아듣지 못할 것이고 적극적으로 보자면 아예 알아들으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보는 것(seeing)이 그대로 아는 것(knowing)이 되지 못하며, 듣는 것(hearing)이 바로 깨닫는 것(perceiving)이 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영적 불구자의 심령 상태, 곧 영적 소경(사 59:10; 막 4:12; 요 12:40; 롬 11:25), 영적 귀머거리(렘 6:10; 겔 12:2; 슥 7:11; 행 28:26)인 죄인의 영혼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성 경: [마13:14]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진리를 아는 축복]
이사야의 예언이 - 예수께서 인용하신 이사야의 예언은 사 6:9, 10에 해당하는 70인역(LXX)의 번역을 옮긴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두가지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1) 이 문장은 이사야 본문에서는 문자 그대로 미래에 대한 직접적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선지자 소명을 주시는 중에 백성의 완악성(頑惡性)을 꾸짖는 말로 주신 간접적 예언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 말씀이 당시의 비유를 듣는 무리들의 심령 상태에도 잘 적용되었기 때문에 동질성(同質性)이란 측면에서, 즉 이사야의 말이 당시의 무리에게도 잘 적용된다는 측면에서 예언으로 보았던 것이다. (2) 이하 인용된 14, 15절의 말씀은 70인역(LXX)의 번역을 옮긴 것으로서 문맥이 조금 불분명한 감(感)이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사야서의 해당 본문 자체를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어찌되었든 이 말씀도 11절과 마찬가지로 표면적으로만 살펴서 형식논리로만 생각한다면 백성이 악하기 전에 마치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악하게 만드신 것처럼 오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실(其實)은 스스로의 자유 의지(free will)에 따라 완악해진 인간을 하나님이 그대로 방치해 두시겠다는 구체적 의지를 강조 표명한 것으로서, 즉 사태에 대한 당신의 주권적 작정의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서 이는 11절에 인용된 바대로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 의지란 심오한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이루었으니 - 이에 해당되는 헬라어 동사 '아나프레루타이' (*)의 시제는 현재 완료형이라기 보다는 진행형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이사야의 해당 본문이 예수 자신의 시대에까지 적용되고 있음으로 해서 예언적 본문이 된 것이라는 예수의 해석을 가능케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이 동사를 진행형으로 보면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이 말씀은 계속 적용되고 있는 것으로서 일부 사람들이 복음 선교에 대하여 거부하고 있는 현상적 원인(13절)과 그렇게 된 궁극적 원인(14절)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성 경: [마13:15]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진리를 아는 축복]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 '완악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퀴노' (*)는 살이찌고 둔하여진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생명력으로 자기 사상과 자기 의지에 제 스스로 살찐자가 되어서 영적 감수성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실로 인간이 자기(육체적 삶) 중심적일 때 필연적으로 하나님(영적 생명력)과의 관계는 단절, 상실되고 만다. 이것은 곧 허무와 절망의 제 1 보(步)이다.
듣기에 둔하고 - 여기서 '둔하고'란 말의 원뜻은 '눌러 내리다'(oppress), '짐을 지우다'(burden), '가리우다'(curtain)로서 가는 귀가 먹거나 말귀를 못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듣지 않으려고 하는 상태를 말함을 알 수 있다.
눈은 감았으니 - 여기서 눈을 '감다'로 번역된 '캄뮈오'(*)는 원래 '내리닫다'의 뜻으로서 눈에 밀납이나 기름 등을 바름으로써 억지로 감기게 한다고 하는 의미가 있다. 실지로 고대 사회에서는 누에 밀납을 칠해 사물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는 형벌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만 스스로 눈을 감아 진리 보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자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돌이켜(*, 에피스트려소신) - 이 말은 하나님 보다는 죄된 세상을 더 사랑하던 사람이 그 전존재를 하나님께로 복귀하는 행위라는 뜻으로서 '회심' 혹은 '회개'(*, 메타노이아)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이 '돌이킴'은 신앙 생활로 들어가는 제 1단계로서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5:7; 고후 7:10)과 제 2단계로서의 새생활에로의 전반적인 변화(막 1:15; 눅 13:3, 5; 행 2:38)로 나뉘어 질 수 있다. 물론 제 1단계의 자각은 죄된 인간 자신의 반성과 회개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제 2단계의 새로운 변화는 하나님께 '고침을 받게' 되기 전까지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보다 일차적인 문제는 인간 스스로의 돌이킴(자각)이다(눅 15:17).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자각 조차 하지 않는 완악한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의 길로 그대로 가도록 허락하심은 그들을 벌하시고자 결정하신 연고이다.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 '...하지나 않을까'라는 뜻의 미래 직설법 접속사 '메포테'(*)의 지배를 받아 '내가 고치다, 내가 낫게 하다'의 뜻인 '이아오마이'(*)가 미래형으로 변형되었다. 이 문장을 영어로 고치면 'lest ... and I should heal them'으로, 주절과 합쳐진 전체 문장의 주어는 그들(they)이 된다. 따라서 이사야 본문에서는 두려워하는 주체가 하나님 자신인 것과는 달리 본서에 인용된 이사야 예언은 백성들 스스로가 돌이키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게 될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게 되지 않기 위하여 자신들의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로부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하는 증거를 접하고서도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은 행위를 말함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유대인에게, 나중에 이방인에게 전해야 하나, 유대인들이 이를 거부하고 멸망받을 자로 자처한 행위를 말한다(행 13:46). 이것은 그들의 영원을 결정짓는 지상 최대의 실수였다.
성 경: [마13:16]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진리를 아는 축복]
너희 눈은 ... 귀는 - 단순히 보고 듣는 육체적 행위가 아니라 보고 듣는 사건의 의미를 탐구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영적 의지와 감수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문장을 '너희 눈은 보니 복이 있고 너희 귀는 들으니 복이 있다'로 보다 정확히 번역해 보면 15절의 닫힌 눈과 막힌 귀와 잘 대조가 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사랑이나 천국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구평히, 객관적으로 제시되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주관에 따라 그야말로 극과 극의 결과를 가져옴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역(逆)으로 보면 천국 복음은 들으면 좋고 안들으면 그만인 선택(option)의 문제가 아니라 생과 사를 가늠하는 필수(obligation) 문제임을 발견하게 된다.
봄으로 ... 들음으로 - 여기 보고 듣는 대상은 11절에 전제한 천국의 비밀이다. 거듭 말하지만, 그 비밀의 구체적 내용은 지금껏 구약에서는 예언으로만 존재하던 천국, 즉 메시야의 나라가 이 역사 안으로 들어 와서 우리의 삶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통치(주권)에 의하여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무리들(국민)을 규합하여 이 세상에서 새 하늘과 새 땅(영토)에 이르게 하기 위해 이미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16절은 단지 개인적 관점에서 지금 주어진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자는 복이 있다는 사실만을 말하지만 17절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너희들은 이전 시대 사람들은 보고 또 들으려고 원해도 천국의 비밀을 알 수 없었는데 이것이 너희에게는 이미 주어져 있음을 새삼 강조하면서 예수 이후 시대 사람들의 구속사적 특권과 책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복이 있도다(*, 마카리오이) -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행복을 찬양하는 말로 사용되었다(5:3). 성경적 용례를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듣는 자들, 이 메시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눅 1:45), 헛된 요구를 하지 않는 자들(요 20:29), 예수의 말씀과 행위를 깨닫는 자들(요 13:17)이 각각 복이 있는 자들이라고 불리웠다.
성 경: [마13:17]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진리를 아는 축복]
내가 진실로 - '진실로'라는 뜻의 헬라어 '아멘'(*)은 구약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 즉 축복이나 저주 등의 수락(受諾)을 확증하는 것으로서(대상 16:36), 또는 송영에 답하여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입증(대상 16:36)하기 위하여 기도와 송영의 끝에 붙여서 사용하였다. 결국 이는 하나님의 말과 행위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찬양이 타당한 것일 뿐만 아니라 구속력이 있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말을 당신이 특별히 강조하고 싶으신 내용에 앞서 사용함으로써 이하 전개되는 말씀의 진정성(verity)과 진실성(truth)을 미리 확증하시면서 우리를 각성시키고자 하실 때 사용하셨다.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 못하였느니라 - 많은 선지자와 의인(righteous men)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뤘던 구약의 선지자들과 그밖의 사람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고대(苦待)하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메시야를 영접했던 사람들 또는 그 이후의 우리들이야말로 단지 예언을 통해 메시야를 대망했을 뿐이며(히 11:13, 39) 믿음의 선진(先進)들이 열망했던 그 영광스런 특권의 실질적인 수혜자(受惠者)인 것이다(벧전 1:10-12, Homer A. Kent, Jr). 한편 그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 그들의 개인적 자질이 상대적으로 우리보다 뒤졌거나 또는 그들이 듣고 보기를 싫어하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세워진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질적 차이 때문이었다. 신약 시대의 우월성은 그 신약 시대에 속한 우리들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1) 더 큰 감사와 (2) 더 큰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원해서 신약 시대의 축복이 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많이 받은 자가 많은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개 때문이다. 한편 이런 구약과 신약의 질적 차이에 대한 언급으로는 11:11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신약 시대의 우리는 그 위대한 구약의 이사야와 다니엘, 아브라함과 다윗도 보고 듣지 못한 천국의 위대한 비밀을 알게된 큰 축복을 받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성 경: [마13:18]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그런즉 ... 들으라 -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 안된 '너희'(*, 휘메이스)란 단어가 특히 강조된 구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단순히 '이해하라'는 정도(De Wette)의 의미 이상의 뜻으로서 구약의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갖기를 원하고 완악한 자들이 단호히 거부했던 영적인 진리를 알 특권이 '너희에게'까지 확대되었다는 측면에서 '너희는' 반드시 들어야만 한다는 강조적 구절이다.
성 경: [마13:19]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아무나(*, 판토스) - '모든 것',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파스'(*) 속격으로, 본문에서는 '들으면서'(*, 아쿠온토스)도 '깨닫지 못하는'(*, 쉬니엔토스)의 뜻인 두 분사를 취하여 '누구든지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Ereryone hearing ... and not understanding)의 뜻으로, 말씀을 듣고도 현재 깨닫지 못하여 그 말씀을 잠시 유보하거나(행 24:25), 또 다른 말씀, 즉 거짓 진리에 대해서도 귀기울이며 이것 저것을 망서리는 사람은 누구나가 다 같이 그리스도의 천국 진리의 말씀을 잃게 된다고 하는 말이다.
천국 말씀 - 막 4:14과 눅 8:11에 의하면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이 씨는 기록된 말씀들로서의 구약의 율법을 가리키기 보다는 아직 기록되지 않은 말씀, 즉 예수의 복음이며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과 천국이 도래했다는 벅찬 내용으로 전파되고 있는 말씀이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에 오셨으므로(요 1:1) 그분 자신이 바로 보이지 않는 씨이다. 이런 점에서 성령은 살아있는 말씀으로 오신 그분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요 5:39).
악한 자 - 마가는 이를 '사단'이라고 (막 4:15) 했으며, 누가는 '마귀'라고(눅 8:12) 표현하였는데 이들의 역할은 모두 사람의 마음에 뿌리워진 씨앗으로 하여금 결실을 맺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것이다. 즉 그는 자신의 직접적 개입이나 그 하수인(새들)을 통해 복음의 청취자가 지닌 영적인 은혜를 즉각 앗아간다(Homer A. Kent, Jr., 렘 5:26, 27). 실로 악한 자들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가 하면(벧전 5:8)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진리의 말씀에 회의하고 외면하는 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파멸의 길로 이끈다.
길 가에 뿌리운 자(*, 호돈 스파레이스) - 이는 '씨가 뿌리워진 길가'와 같은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3절에서의 '씨 뿌리는 자' (*, 호 스페이론)와 대구를 이룬다. 즉 '뿌리운 자'는 씨를 받는 자, 즉 선포하는 말씀을 듣는 청중을 가리키며, '씨 뿌리는 자'는 선포자로서의 예수, 혹은 제자들, 혹은 전도자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말씀이 씨가 뿌리워진 길가와 같은 사람은 아직 말씀을 받아 들일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진지하게 경청하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들로서, 말씀에 대해 전혀 반응하거나 응답하지 않는 청중(the unresponsive hearer)이다. 그 사람들은 '새'로 비유되고 있는 사단에 의해 결국 말씀에 응답할 기회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성 경: [마13:20]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 '씨가 뿌리워진 돌밭'과 같은 사람이라 함은 흙이 얇은 관계로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는 싹과 비유하여 '심지가 굳지 못하며 경박한 마음의 청중'(the shallow hearer), 또는 철저히 감정적인 청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말씀을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진리를 듣는 순간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즉시 신앙 생활을 시작하지만 성장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시련들(태양)에 대해서 인내로써 대처하지 못하고 그 시련에 의해 넘어지는 자이다.
기쁨으로 받되 - 말씀을 들을 때 기쁜 마음을 가지고서 귀기울이거나 또는 말씀을 기쁨의 대상, 즉 은혜나 복음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예수의 말씀을 인류 구원을 위한 참된 진리로 알게 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이러한 절대적 가치를 인정(agree)하면서도 그들은 확신(assurance)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 경: [마13:21]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 여기서 뿌리가 없다는 것은 결국 복음에 대한 그 개인의 인격적 확신이 결여(缺如)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이에 대해 누가는 '잠깐 믿다가'라는 연결구를 덧붙임으로써(눅 8:13) 복음에 대한 즉각적 수용 뿐만 아니라 인격적 확신에 근거한 지속적인 보존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환난이나 핍박 - 환난을 뜻하는 말인 '들리프시스'(*)는 '밀어대다, 몰려대다, 답답하게 하다'의 뜻인 '들리보'(*)에서 나온 말로서, 삶의 여러 조건들을 통해서 억압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핍박을 뜻하는 말인 '디오그모스'(*)는 도망가는 노예를 잡기 위해서 개를 보내 추격하게 한다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디오코'(*)에서 나온 말로서, 본문에서는 종교상의 '박해'를 가리킨다. 결국 이 두 낱말은 한 개인의 생활 전반에 걸쳐 만날 수 있는 모든 고난과 거침돌을 의미한다.
넘어지는(*, 스칸달리조) - 함정, 올가미, 덫 또는 죄를 짓게 하는 유혹을 뜻하는 '스칸달론'(*)에서 나온 말로서, 여기서는 죄에 빠지다, 배반, 배교하다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또한 환난이나 핍박으로 인해서 생겨난 갈등으로 어리둥절하거나 휘청거리는(stumble)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성 경: [마13:22]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 자신의 내부적인 문제와 갈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위의 환경, 물질 등의 외부적 요소가 가져오는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하며 방황하는 사람의 상태를 의미한다. 즉 가시떨기 밭은 그 토양 자체는 비옥하나 밭 위가 손질되지 않아 유익한 곡식과 가시떨기가 함께 자라난, 즉 순수와 세속이 혼재(混在)된 자아의 분열된 심적 상태를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과 세상의 재물을 겸(兼)하여 섬기려는 사람이며, 세상의 유혹에 귀기울이므로써 말씀이 그 마음 안에서 질식(窒息)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람이다. 이를 한마디로 말해서 '세속에 물든 청중'(the worldly hearer)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인격은 결단코 영적 성숙에 이르지 못한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 세상의 염려란 내세(來世)에 대한 관심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6:25-34). 즉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눅 12:22)하는 현세 위주의 생각으로 영원한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질만한 여유와 용기가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특별히 여기서 '염려'라는 뜻의 헬라어 '메림나' (*)는 '마음이 나뉘다, 분열되다'라는 뜻이다. 실로 감정과 생각과 판단이 세상을 향한 욕구로 혼탁해지고 나누어진 사람은 모든 일에 있어서 정(淨)함이 없다(약 1:8). 그리고 재리의 유혹은 '재물의 즐거움'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는 부요한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더 많은 재물을 얻고자하는 욕망에 빠지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재리'란 '많다', '풍성하다'의 뜻에서 나온 '플루토스' (*)라는 말로서, '풍성한 재물' 혹은 '부요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재리의 유혹이란 재물 자체에 대한 필요 욕구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위하여 필요 이상의 재물을 쌓아두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오류(誤謬)에 빠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는 주께서 그 쓸 것을 미리 알고 채워주시므로 현재의 삶에서 겪게 되는 물질의 빈곤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마음에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또한 이 세상의 재물에 대한 '부'보다는 하나님께 부요함으로써 영원한 기쁨과 세상이 주는 거짓 기쁨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
말씀이 막혀 - 여기서 '막혀'에 해당하는 헬라어 '쉼프니게이' (*)는 '질식시키다', '숨막히게 하다'는 뜻이다. 이는 세상 욕심이 영혼의 양식과 청결한 공기 및 거룩한 햇빛을 날마다 공급받아야 하는 우리의 영적 숨통을 졸라 질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정녕 말씀의 성장을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는 세상의 악한 세력들이 주는 환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 세상이 지닌 파괴적 영향력으로 인해 거룩한 신앙적 성품과 영적 생명력을 모두 잃게 될 것이다.
결실치 못하는 자 - 천국 복음을 수용한 자의 궁극적 목적은 한 인격에 내재한 복음의 넘치는 생명력으로 인해 풍성한 열매를 맺는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열매 맺는 전(前)단계(싹, 잎, 줄기 등)가 아무리 탁월하다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성 경: [마13:23]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 - 이는 귀기울여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순종하는 겸손한 마음을 소유함으로써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는(갈 5:22, 23) 성공적인 청중들(the successful hearer)의 상태를 일컫는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 - 철저한 자기 부인과 겸손한 수용의지를 통해 복음을 듣고, 수납(受納)하고, 그에 합당하게 생활함으로써 풍성한 영적 결실을 이루게 된 자를 가리킨다.
혹 백 배 ... 혹 삼십 배 - 소출(所出)의 차이는 하나님의 은사의 다양성 및 천국 복음을 받아들인 각 개인의 기질과 능력의 차이로 이해해야 한다(25:24-30). 그러나 아무리 작은 결실을 한 땅이라 해도 결실했다는 그 자체로서 '좋은 땅'으로 인정되고 있다는 데 유의해야만 한다.
성 경: [마13:24]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천국은 ... 사람과 같으니 - 여기서 ' ... 과 같다'는 말은 아람어의 관용적 표현인 'X의 경우는 Y의 경우와 같다'는 뜻을 반영하고 있다(Jeremias). 따라서 본 구절은 '천국은 ... 한 사람의 상황(경우)과 같으니'라고 해석하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깝다.
좋은 씨 -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나오는 한 종류의 좋은 씨앗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 반면 본문의 좋은 씨는 마지막 주님의 심판을 직면(直面)해야 하는 성도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제 밭에 뿌린 사람 -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라고 하는 설명(37절)에 따르면 본문의 구절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대하여 그의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말씀이다. 주의 몸된 교회만이 그의 것이 아니라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다(시 24:1). 따라서 '제 밭'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창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는 말과 의미상 동일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이후에 그 세상에 대해서 아무런 관여나 관심을 기울이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본문에서처럼 사람의 거듭난 탄생을 위하여 세상을 보호하시고 가꾸신다. 세계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버려진 쓸모없는 땅이 아니라 악이 만연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가꾸어지는 좋은 땅이다.
성 경: [마13:25]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사람들이 잘 때에 - 여기서 '잘 때에'란 농부의 태만함을 꼬집는 말이 아니라 원수가 농부 모르게 슬그머니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절호(絶好)의 기회를 암시하는 말이다. 사실 악한 어두움의 세력은 주로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경계(警戒)도 하지 않는 평화와 안식의 시간인 밤에(at night) 활동한다. 여기 농부의 원수도 농부가 휴식을 취한 밤에 몰래 들어와 악한 씨앗을 뿌리고 간 것이다. 한편 그 당시 로마에서는 보복하기 위해 상대방의 밭에 가라지와 같은 잡초들을 뿌리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가라지(*, 지자니온) - 독보리(lolium temulentum)의 일종으로 '가짜 밀'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싹의 모습이 밀이나 보리와 아주 흡사하여 실제로 이삭이 패기까지는 얼른 식별하기 어렵고, 잘못해서 먹었을 경우 급한 설사와 구토 등의 여러 증상이 있으며, 심할 경우에는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예수의 설명에 의하면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로서(38절), 사람들을 의의 자리에서 넘어지게 하는 자이며, 또한 불법과 부정을 행하는 자들이다(41절). 그들의 특징은 (1) 위장성(僞裝性). 곡식과 가라지가 싹이 난 초기부터 결실을 거둘 때까지 사람들의 눈에 잘 분별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 끝이 올 때까지는 성도들과 잘 분간되지 않도록 위장되어 있다. (2) 잠복성(潛伏性). 이삭이 나오기까지 평상시에는 곡식과 마찬가지의 외형과 생장 과정을 보이는데 일단 이삭이 패면서부터 알곡과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즉 가라지들이 평소에는 잠복해 있다가 결정적 순간에 그 감춰진 마각(馬脚)을 드러내 놓고 알곡에게 해를 끼친다. (3) 해독성(害毒性). 가라지는 알곡 뿐 아니라 인체에까지 큰 피해를 안긴다.
덧뿌리고 갔더니(*, 에피스페이로) - '위에'를 뜻하는 말인 '에피'(*)와 '씨를 뿌리다'의 뜻인 '스페이로'(*)의 합성어로서, 뿌린 씨 위에 한 번 더 씨를 뿌리는 행위를 가리킨다. 레 19:19과 신 22:9에서는 다른 종류의 씨앗을 섞어 뿌리지 말라고 하는 규정이 있다. 이는 두 씨앗 중 어느 한 씨앗의 열매조차도 올바로 수확할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 조항인 동시에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과 비타협성을 상징하는 교훈적 율법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과 민족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가나안의 이방신앙과 그들과의 혼혈 결혼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바로 그런 점에서 악한 씨앗, 곧 가라지의 씨앗을 곡식의 씨앗 사이에 덧뿌려 놓은 원수의 행위는 도덕적으로나 율법적으로 모두 부정한 것이었음이 명백해진다.
성 경: [마13:26]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결실할 때에 - 열매로써 그 나무나 씨앗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이다(7:17). 여기 가라지도 생장기에는 그 악한 실체를 감출 수 있을지 모르나 그 결실기에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 놓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결실의 때는 영적으로 최후심판이라고 하는 마지막 추수기 이전까지의 기간으로 악의 세력과 죄악의 관영이 그 절정에 달한 시기를 상징한다. 따라서 빛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이 때는 고난의 때이고 신앙의 시련을 통과하는 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는 의의 면류관과 영생이라고 하는 주님의 약속이 곧이어 실현되려고 하는 때를 의미하기도 한다(10:22).
성 경: [마13:27]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집 주인 - 씨뿌리는 자의 비유(3-23절)에서는 예수를 비롯한 12제자들과 많은 복음전도자들이 씨뿌리는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가라지 비유에서의 씨를 뿌리는 일은 오로지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비록 종들이 가라지의 연유(緣由)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 집 주인은 직관적으로 그것이 원수의 방문에 의한 것임을 감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선과 악의 구별 및 그 기원에 대한 완전한 통찰력을 가지신 한 분은 오직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뿐이시다.
주여(*, 퀴리에) - '주'라고 하는 호칭은 마태가 즐겨 사용하던 표현이다. 예수를 부를 때 '주'라고 하는 호칭과 '선생'이라고 하는 호칭이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자들은 주로 제자들(8:25; 14:28; 16:22) 또는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8:8; 20:30)이며, 예수를 '선생'으로 부르는 자들은 바리새인, 서기관 등의 유대 지도층을 중심으로,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를 '주'라 함은 예수를 하나님으로서, 즉 신앙과 예배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선생'이라고 함은 그를 다만 예언자들중의 하나 또는 본받고 따라야 할 모범으로서만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하시는 대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시므로 마땅히 우리가 불러야 할 호칭은 '랍비'(선생)가 아니라 '퀴리오스'(주님)이다.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 종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사실은 바로 '좋은 씨 사이에 어떻게 가라지가 섞여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의문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세상을 창조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악이 이 세상 혹은 교회에 들어와 있는가 하는 신정론(神正論, Theodicy)적 물음이다. 악은 인간의 생명과 삶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해를 입히는 유형, 무형의 부정적 실재로서 이는 현상학적으로 말하는 선(善)의 부재 혹은 결핍의 상태(Augustine) 이상을 의미한다. 아무튼 '인류역사의 모든 시대에서 사상을 괴롭혔고 신앙을 시험한 이 악의 기원에 관한 악명높은 물음'(John S. Whale)에 대해서 성경은 종말의 날에 모든 악은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파멸당할 것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롬 16:20; 요일 3:8; 계 20:2, 10).
성 경: [마13:28]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원수 - '미움', '증오'의 뜻인 '에크드로스'(*)에서 파생된 말로 문자적인 의미로는 '원수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는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부정하는 자이며 예수가 다시 오실 때까지 성도들을 미혹하고 박해하는 적그리스도(antichrist)이다.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 종들의 이 두번째 질문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밭에 있는 가라지를 지금 당장 모조리 뽑아 버리고자 하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의 이러한 성급함과 경솔은 추수(秋收)의 '때'(*, 카이로스)를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영적 우둔함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성 경: [마13:29]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가만 두어라 - '그대로 가만 두고 지켜보도록 하라'는 의미로서, 이는 바로 이 세상의 악의 세력들에 대한 주님의 지혜롭고 여유있는 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악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악의 근절(根絶)을 아예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의 악행을 허락하시는 경우는 하나님의 은혜가 일층 더해지기 위한 도구로 사단이 이용되는 때 뿐이다(욥 2:4-7; 눅 13:16).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 곡식 하나하나에 대한 애정과 염려 때문에 주님께서는 악을 멸하시지 않고 있다. 가라지는 보통 곡식보다 더 강한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리지를 뽑을 때는 종종 어리고 약한 곡식이 함께 뽑힌다. 따라서 곡식에 대한 주인의 관심이 가라지에 대한 관심에서 생겨난 종들의 열의 보다 우선적인 것이다.
성 경: [마13:30]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추수 때에(*, 엔 카이로 투 데리스무) - 추수는 마지막 심판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비유이다. 심판이 행해지는 종말의 때는 세상의 끝이라고 하는 시간적 의미를 가짐과 함게 성취, 완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끝나버리며 최후의 대심판에 의해 악한 자는 영원히 멸망할 곳으로, 의인은 추수가 끝난 마당에서의 축제와 같이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함께 자라게 두어라 - 여기서 '두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테' (*)는 '완전히 포기하여 버린 상태대로 방치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결국 집 주인의 주권적 명령으로서 '내가 그대로 자라게 내버려두기로 결정했으니 너희들은 관여치 말라. 너희들의 소관(所關)이 아니다'라는 의미를 함축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이 비유는 로마 제국의 여러 황제들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아 수 많은 순교자와 배교자를 낼 수밖에 없었던 초대 기독교회의 현실에서 자주 인용되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대박해때 어쩔 수 없이 배교(背敎)를 했던 많은 사람들이 박해가 끝나자(A.D. 4C경)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들의 행동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용서하고 다시 교회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도나티스트파) 한 번 배교하여 파문(破門)을 당한 사람은 영원히 교회에 들어올 수 없는 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갈등이 점차 심하여지자 성(聖)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교회는 완전히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들만이 모이는 완벽한 곳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치 못한 자들을 함부로 제거해서 교회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실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16:17, 18)토대로 하여 세워진 하나의 거룩한 몸이다. 그런데 세상의 교회는 절대 완전한 천국 상태에 있다기 보다는 세상 끝날까지 알곡과 가라지, 즉 의인과 악인의 복합체(複合體)의 상태로 존속(存續)할 것이다.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 결실기에 이르게 되면 가라지는 알곡과 확연히 구별된다. 이로써 추수 일꾼은 손쉽게 가라지를 수거(收去)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알곡보다 먼저 가라지를 거두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알곡이 가라지보다 많이 수확되었음을 의미한다. 그와 더불어 가라지를 단으로 묶는다고 하는 표현은 가라지의 숫자도 꽤 많은 것임을 암시한다. 또한 일상적인 추수 방법, 즉 알곡을 먼저 단으로 묶어 곳간에 들인 다음 쭉정이는 한 곳에 모아서 불사르는 것과는 달리 가라지를 먼저 추수하는 독특한 방식은 재림하신 예수께서 그의 대적 마귀의 우두머리를 먼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처넣기 위에 결박하는 것으로부터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신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로 하나님의 나라는 죄악이 완전히 도말되는 것으로부터 완성될 것이다.
곳간(*, 아포테케) - '위'를 가리키는 말인 '아포'(*)와 '두다', '쌓다'의 뜻인 '티데미'(*)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물건을 넣어두는 창고나 곡식을 쌓아두는 곳간을 가리킨다. 이는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와 함께 거하실 안전한 처소, 곧 하늘에 예비해 두신 하나님의 집으로 의인(義認)된 성도들만이 들어가기를 허락받는 곳이다.
성 경: [마13:31]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겨자씨 비유]
겨자씨(*, 시나피) - 겨자는 배추과의 일년생 또는 이년생 풀로서, 씨가 많고 향기롭기 때문에 양념과 약재로 사용되며 잎과 줄기는 식용으로 이용된다. 겨자씨는 다른 모든 씨앗 보다 작은 것(32절)이지만 생장력(生長力)이 대단하여 보통 1m 정도로 크게 자라며, 특히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약 3m 가량 자라 마치 나무처럼 무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 중에는 그것을 정원수로 심기도 했다고 한다(F.R. Fay). 이러한 겨자씨를 예수께서 천국에 비유하신 것은 겨자씨가 지니는 몇 가지 특성 때문이다. (1) 은밀성. 겨자씨의 크기가 매우 작기 때문에 사람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성장해 나간다. 마찬가지로 천국은 확연히 노출되지 않은채 조용히 성장해 간다. (2) 확장성. 겨자씨와 마찬가지로 천국이 비록 현재는 미약하고 보잘 것 없게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나중은 창대해질 것이다. (3) 변화성. 겨자씨는 크기에 반해 놀랄만한 변화를 남긴다. 마찬가지로 천국은 그 나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아주 작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크고 놀라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마 17:20).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작은 시작과 성숙한 끝맺음의 유기적 결합(Dahl)으로 볼 수 있다. 실로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고대하는 바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크고 웅장하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예수의 사역 속에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임하였다. 또한 살아있는 씨앗처럼 생명력을 가진 복음의 결과로서의 교회는 예수 - 12제자 - 120문도에 의해서 발전되어 현재는 온 인류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큰 나무로 성장하게 되었다.
성 경: [마13:32]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겨자씨 비유]
모든 씨보다 작은 것 - 예수께서 비유로 사용하신 검은 겨자씨(sinapis nigra)는 비교급 '미크로테론'(*)이 사용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가장 작은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 '보다 작은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당시 유대 격언에서는 가장 작은 것을 의미할 때 '겨자씨 만큼 작은 것'이라고 말했을 만큼 그 크기는 매우 작은 것으로 공동 인식하고 있었다(Buxtorf). 더욱이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씨의 크기가 아니라 씨의 결과인 나무의 크기이다.
공중의 새들 - 겔 31:6과 단 4:12에서의 '공중에 나는 새'는 하늘까지 닿은 나무로 상징된 '대제국 앗수르'의 속국들과 '대제국 바벧론'의 속국들, 곧 제국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모여드는 많은 나라와 그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겨자씨 비유에서의 공중의 새들은 겨자 나무, 곧 천국의 실체가 얼마나 크게 성장했는가를 보여 주는 존재들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을 영적으로 좀더 확대 해석하면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도 볼 수 있다. 즉 고통에 지쳐 평안과 안식을 갈망하며 쉴만한 곳을 찾는 인생들. 이들은 참 포도나무요 생명 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깃들이느니라(*, 카타스케노오) - 천막을 가리키는 말은 '스케노마'(*)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살다' '거주하다'의 뜻을 나타내는 '스케노오'(*)와 '아래', '밑'을 가리키는 전치사인 '카타' (*)의 합성어로서, '장막을 세우다', '장막에 들어가다', '진을 치다'의 의미로 민 14:30; 신 33:12; 시 16:9에 의하면 안전하고도 영속적인 거처를 마련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행 2:25에 인용된 시 16:8에 의하면 부활 이후의 삶을 가리키기도 한다. 겨자씨 비유에서의 새의 깃들임도 역시 새들이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날아가 버리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검은 방울새와 홍방울 새와 같이 겨자나무에 떼를 지어 지속적으로 깃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마13:33]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누룩 비유]
본 누룩 비유는 해석상 여러 견해가 전해진다. (1) 부정적 측면에서, 여자를 악한 존재(슥 5:7, 8), 곧 이세벧(계 2:20), 큰 음녀(계 17:1) 등으로 이해하여 가루로 표현된 교회의 순수성을 변질시키는 누룩으로 보는 것이다(랍비전승). (2) 긍정적 측면에서, 교회의 지역적 확장 내지는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 등으로 이해한다. 물론 두 견해 모두 그 타당성이 있으나 두번째 견해가 더욱 적절할 것 같다.
여자가(*, 귀네) - 누룩의 헬라어인 '쥐메'(*)와 대구를 이루도록 선택하신 예수의 의도를 살펴볼 수 있게 하는 단어이다. 한편 남자의 활동이 앞의 겨자씨의 비유에서 처럼 외적(外的) 성장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여자는 본문에서의 누룩의 역할과도 같이 집과 교회와 다른 여러 사회공동체 속에서 그 활동이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그 사회를 놀랍게 변혁, 성장시키는 내적(內的)인 변화를 가져온다.
가루 서말(*, 사타 트리아) - NIV성경은 가루 서말을 '많은 양의 가루'(a large amount of flour)라고 번역하였는데 아마도 가루 서말이란 여인이 하루에 빵을 구울 수 있는 최대한의 양을 의미하는 데서 표현된 말일 것이다. 여기서 '말'을 뜻하는 '사타'는 히브리어로는 스아(*)이며 에바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따라서 '서말'은 1에바로서 약 22-23리터에 해당된다. 이것은 구약에서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사자 세 사람을 대접하기 위하여 준비한 분량(창 18:6)이나,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무교전병(無교煎餠)을 만들어 드린 양(삿 6:19), 사무엘의 모친 한나가 그를 여호와께 드릴 때 제물로 가져가던 소제의 양(삼상 1:24)과 일치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 1오멜(Omer 약 2.34l)로 하루를 지낼 수 있었던 것(출 16:33, 36)에 비추어 볼 때 하루서말의 분량 1에바는 10오멜에 해당하므로 아마도 가족 9-10명의 하루 세끼 분량의 음식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누룩과 같으니라 - '끓어 오르다', '끓이다'의 뜻인 '제오'(*)에서 유래한 말인 '쥐메'(*)는 누룩, 효모(yeast)를 가리킨다. 성경에서의 누룩은 보통 교만이나 죄된 욕망(고전 5:6), 또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대적자들의 가르침 속에 있는 부패하고 썩게 하는 요소(16:6; 막 8:15; 눅 12:1)를 가리킨다. 그러나 본문의 예수의 비유 속에서의 누룩의 의미는 그것의 부정적, 긍정적 결과의 중요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결과를 낳는 놀라운 변화력과 정복(征服) 능력에 있다.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보잘 것 없이 시작된 천국 복음은 세상 곳곳을 묵묵히 정복해 들어가 그곳의 많은 사람들을 죄된 욕망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진정한 변화의 요인이 되었다.
성 경: [마13:34]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 강화의 의미]
비유가 아니면 ...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 말씀하지 않았다는 뜻의 동사 '엘랄레이'(*)는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과거의 단 한 번의 동작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형과는 달리 습관적인 행위를 나타낸다. 그런데 이 말이 ' ... 을 제외하고', '밖에'라는 부사 '코리스'(*)와 연결됨으로써 본문이 예수께서 오로지 비유로만 이야기하고 다른 말씀은 전혀 하시지 않았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를 통해 볼 때, 그분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비유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본문은 단지 그날은 '천국'을 이해시키고 깨닫게 하기 위해 특별히 비유로만 말씀하셨다고 하는 해석이 더욱 적절하다.
성 경: [마13:35]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 강화의 의미]
선지자로 -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바'라는 의미로, 어떤 사본(시내 사본, 에티오피아 사본 등)에 의하면 선지자라는 말과 더불어 '이사야'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뒤에 이어지는 인용문은 시 78:2에서 인용한 것으로 (70인역에서는 시 77편으로 기록) 저자는 '아삽'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선지자는 이사야가 아닌 아삽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사실 대하 29:30에 의하면 히스기야왕은 아삽을 선견자로 부른 적이 있었다. 한편 아삽은 다윗과 솔로몬의 치하에서 찬송의 책임을 맡았던 베레갸의 아들로서 시편 중 12편의 뛰어난 시(시 50, 73 - 83편)를 지었다. 그의 이름은 헤만과 여두둔과 함께 다윗의 세 악사로서 언약궤를 에벧에돔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에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특별히 여두둔과 아삽은 왕의 선견자(先見者)라고 불리웠다(대상 25:5, 6; 대하 35:15).
내가 ... 비유로 말하고 - 이를 원문에 좀더 가깝게 해석하면 '내가 다른 일들과 비교해 가면서 말하고'가 될 것이다.
창세부터(*, 카바볼레스) - 이는 '밑으로'의 뜻인 '카타' (*)와 '던지다'의 뜻인 '발로'(*)의 합성어로서 '기초', '창건', '시작'을 뜻하는 말인 '카타볼레'(*)의 소유격이다. 따라서 '창세부터'라는 말은 '세상(코스모스)의 기초가 놓여지던 때부터'의 의미를 나타낸다. 구약에서의 이 말은 '옛부터'(민니 -케뎀)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70인역(LXX)에서는 '태초로부터'(*, 아프 아르케스)로 번역되었다. 한편 어떤 학자에 의하면 시 78편의 문맥이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창세부터'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the beginning of the nation)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추인 비밀은 바로 전(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의지와 뜻이므로 어느 특정된 한 민족과는 관계없이 인류를 창조하실 때부터 계획되었던 것일 것이다.
감추인 것들(*, 케크륌메나) - '수수께끼', '가려진 말'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히도트'(*)와 같은 말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 소극적 의미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게 하기 위하여 숨긴 것이라고 하는 적극적 의미가 잇다. '창세부터 감추인 것' 또는 '옛 비밀한 말'(시 78:2)은 바로 구속(救贖)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행위들(Lindars)이며 과거의 사건들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크고 깊은 영적 가르침이다. 이것은 이제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밝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는 전에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시는 계시자(啓示者)인 동시에 자신에 대해서 이미 예언, 선포되었던 구속의 역사를 성취하시는 완성자가 되신다.
드러내리라(*, 에르소마이) - 감추인 것을 가리키는 말인 '케크뤼메나'가 본래 사람이 은밀하게 선언한 것을 의미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에르소마이'는 '선포하다', '크게 말하다'의 뜻으로 거칠고(rough) 큰(aloud) 한 마디의 '말을 토해 내다', 강물이 콸콸 소리내어 흐르듯이 열정적인 마음으로 '연설을 하다'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아삽이 비유를 통하여 유대의 지나간 역사와 사건들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발표(發表)했듯이 예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대제사장, 서기관 등의 교권주의자들에게는 숨겨진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고 하는 '시대'(*, 카이로스)의 비밀을 군중들에게 밝히 계시하셨다. 더구나 이 비밀들은 서기관이 율법을 가르치듯이 말씀되지 않았고 마치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을 받아 그 감동 속에서 진리를 선포하듯이 권위에 찬 음성으로 선언되었던 것이다.
성 경: [마13:36]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무리를 떠나사 - KJV에 의하면 예수게서 무리들을 해산시킨 것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RSV에 의하면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떠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이스'(*)는 '아피에미'(*)의 현재 수동형으로서, '가게 하다'(let go), '보내 버리다'(send away) 또는 '버려두다'(leave), '포기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께서 들을 귀와 볼 눈을 갖지 못한 많은 무리들을 집으로 돌려 보내시고 그의 비유속에 무엇인가가 숨기워져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여러 제자들을 데리고 앞서 떠났던(13:1)집으로 다시 돌아오셨음을 나타낸 장면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36절 이후의 3개 혹은 4개의 비유들(보화, 진주, 그물, 서기관)의 청중들은 일반 무리들이 아닌 소수의 제자들로 바뀌었으며 비유의 목적도 깨닫지 못하도록 감추는 것이 아니라 깨우치기 위해, 밝히 알리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또한 알려진 천국 도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제자들의 계속적인 노력을 촉구(促求)하기 위하여 베풀어졌다.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 '설명하여 주다'의 뜻인 동사 '디아사페손' (*)은 '뚫다', '통하다'의 의미인 전치사 '디아'(*)와 '맑은', '깨끗한'의 뜻인 '사페스'(*)의 합성으로 되어진 말로서, '철저히 말하다', '분명히 가르치다' 또는 '밝히 말하다'의 의미이다. 한편 18:31에서 이 동사는 '낱낱이 고하다'(report)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아무튼 이 단어는 제자들이 예수의 비유 중 그 어느 하나도 자신들의 힘으로는 풀거나 해석할 수 없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어떻게든 예수의 말씀을 철저히 알기를 원했다고 하는 사실을 암시한다. 신령한 말씀은 신령한 영의 도움으로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처럼 겸손하고도 열정적으로 진리를 알기 원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비밀스런 진리들을 가르쳐 주신다(10절).
성 경: [마13:37]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인자 - 복음서 중에 나타나고 있는 '인자'(the Son of Man)라는 표현들은 그 칭호와 관련된 주제에 따라 (1) 종말의 날에 영광 가운데서 임재하실 묵시적인 의미의 인자 (2) 고난받다가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어가는 인자 (3) 현재 이 세상 안에서 자신이 위탁받은 사명을 수행하는 인자로 분류해 볼 수 있다. 본문에서의 씨 뿌리는 자로서의 '인자'의 의미는 세번째 유형으로서 복음의 첫 선포자로서의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참조, 누가복음 5장 주제 강해).
성 경: [마13:38]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밭은 세상이요 - 이 표현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에 미칠 것을 암시한다. 이같은 사실은 본문의 헬라어 표현, 곧 '밭'과 '세상'이라는 명사 앞에 각각 동일한 관사(*, 호)가 붙어 있음으로써 양자는 서로 위치를 바꾸더라도 의미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따라서 지나칠 정도의 출교(excommuication)를 강조하는 도나티스트들(Donatists)과 싸우기 위해 '밭은 교회'이며, 또한 그곳에 참 신자와 거짓 신자가 함께 섞여 있는 것이 바로 교회에 대한 '표적'이라고 말한 어거스틴(Augustine)의 주장은 자신이 살던 시대 상황을 고려한 협의적(狹義的)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천국의 아들들 - 인자에 의해(37절) 이 세상에 뿌려진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메시야 왕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언약의 권리를 포기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인 '그 나라 자손들'(8:12)과는 달리 하나님의 은총으로 메시야의 왕국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참백성들로서, 법적권리, 즉 상속권을 소유한 아들의 신분에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5:9). 특히 '천국의 아들들'이란 히브리적 표현으로서 그들이 천국에 어울리는 속성을 지닌 자들이라고 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천국에 어울리는 속성이란 신령(神靈)과 진정(眞情)으로 하나님과 그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성품이며 성령의 여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믿음과 인내를 소유한 것을 가리킨다.
악한 자의 아들들 - 악한 자에 의해 세상에 흩뿌려진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멸망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자들이며 그 나라의 특성에 맞게 사악한 속성을 지닌 자들이다. 그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는 사악한 근성을 가진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성도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의 복음과 율법의 길에서 벗어나게 한다.
성 경: [마13:39]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원수는 마귀요 - '원수', '대적자'를 뜻하는 말인 '에크드로스'(*)는 '적의', '불화', '이간', '분리'를 가리키는 말인 '에크드라'(*)에서 유래한 말로서, '분리되어 나온 자'를 의미한다. 한편 마귀를 가리키는 말인 '디아볼로스'(*)는 '사이에'를 뜻하는 '디아'(*)와 '밀어넣다', '끼어넣다', '던지다'의 뜻인 '발로'(*)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중상(中傷)하는 자', '비방, 거짓 고소하는 자', '밀고자'의 의미이다. 따라서 원수라는 단어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버린 자로서의 악의 기원과 그 정체성(正體性)을 나타내며, 마귀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비방하는 행위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불화를 조성(助成)하는 그들의 사악한 행위(work)를 드러내 주는 말이다.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나간 자는 마귀의 역할, 즉 사악의 영향력을 세상에 퍼뜨리는 일을 담당한다(4장 강해 '사단과 귀신' 참조).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 여기서 '세상 끝' (*, 쉰테레이아 아이오노스)이란 문자적으로 '이 시대의 완료(결말)'를 의미한다. 결국 이때가 이르면 현존하는 이 시간들이 완료되고 동시에 영광스런 새 시대가 도래하게 될 것이다. 한편 이때는 예언된 다니엘의 70이레(Seventy Weeks)의 끝(단 9:24-27; 계 11:1-13), 곧 예수의 재림의 때를 암시한다.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 천사들은 구약에서 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창 18:2-15; 출 3:2; 삿 13:6-21)을 하는 것으로서 묘사되었다. 그런데 신약에서, 특히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중의 천사의 중대한 역할과 책임은 종말에 인자와 함께 세상에 와서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며 악임을 멸망의 장소로 인도하여 영원히 파멸하게 하는 것이다(마 24:31; 25:31-46; 막 13:27; 계 14:17-20). 더 자세한 내용은 히 1장 강해 '천사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성 경: [마13:40]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불에 사르는 것 같이 - 세상 끝날 곧 종말에 있을 가장 놀라운 사건 중에 하나는 가라지(악한 자들)의 묶음이 영영한 멸망의 불에 던져진다는 것이다(계 14:9-11). 이는 단지 상징적, 교훈적 차원에서의 형벌이 아니라 영원한 내세(來世)를 가늠하는 존재론적 심판이다(42절).
성 경: [마13:41]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보내리니(*, 아포스텔로) - '앞', '미리', '전에'를 뜻하는 말인 '아포'(*)와 '차례로 놓다', '준비하다'의 뜻인 '스텔로' (*)의 합성어로서, '사명을 띠고 목적한 장소로 가게 하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위임받은 자', '보내심을 받은 자'를 가리키는 말인 '아포스톨로스' (*)는 특별히 예수께서 선택하신 12제자를 일컫는 말로(10:2),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본문의 천사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 나라에서 - 문자적인 의미는 '그의 왕국 안에서'(in his kingdom)의 뜻으로, 하늘 나라는 바로 아버지의 나라(the kingdom of the Father)이며, 인자의 나라(the kingdom of the Son of Man)로서 예수의 지상 사역(ministry)에 의해서 이미 시작된 종말의 나라이며 그의 뜻이 실현되고, 통치되는 나라이다. 그런데 분명 '그의 나라'는 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Bornkamm). 왜냐하면 부활과 재림 이후의 예수의 통치 영역은 온 우주에까지 미치게 되었기 때문이다(28:18).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 - 이 말은 습 1:3의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 이라는 원문을 완곡하게 번역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습 1:3에서의 '거치게 하는 것'은 주로 우상을 가리키는 말로서, 선민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악에 빠져들게 하는것을 의미한다. 마태의 표현도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걸려넘어지게 하는 함정이나 미끼 또는 그러한 것을 통해서 악을 행하게 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또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란 문자적으로 '법을 무시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7:23). 한편 바울은 불법의 사람을 가리켜 멸망의 아들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라고 했는데(살후 2:3-4), 이는 그가, 곧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성 경: [마13:42]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풀무 불 - 이는 마태의 기록 중 본절과 50절에만 언급된 말로서 직역하면 '화덕', '불을 지피는 아궁이'를 가리킨다. 이는 하늘의 심판을 받는 사람들이 무서운 불로 영원히 형벌을 받는 장소를 가리킨다. 이것은 흔히 '불못' 또는 '지옥'으로도 일컬어지고 있다(렘 29:22; 단 3:6; 계 20:15; 에스드라서 7:36). 모든 불의한 것들이 징계되고 일소(一掃)되는 이곳에서 악인들은 종말적인 영원한 운명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울다'의 의미인 '클라우드모스' (*)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哀悼)를 가리키는 말로 라마에서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우는 것이나(마 2:18), 회당장의 집에서 훤화 하는 것(막 5:38) 등에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를 갈다', '이를 악물다'는 뜻인 '브뤼그모스'(*)는 '물어 뜯다'란 뜻의 '브뤼코'(*)에서 나온 말로 굶주림에 계속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모습이나, 분노로 씩씩대는 사람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행 7:54에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은 유대인들이 '이를 갈거늘' 이라는 표현에도 사용되었다.
성 경: [마13:43]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 본문의 말씀은 단 12:3의 내용을 암시해주고 있으나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다니엘서의 기록과는 달리 '지혜있는 자들'(이해하는 자들, *, 호이수니엔테스)이란 말이 생략되고 단지 '의인들' (*, 호이 다카이오이)이란 말만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예수께서 그 당시 당신의 메시지를 지혜롭게 이해하는 자들이었던 제자들만을 이상화 시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따라서 '의인들'이란 복음의 빛을 수용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 의인들은 바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아버지의 나라' 곧 영원한 본향으로 삼고 있다.
해와 같이 빛나리라 - 여기서 '빛나리라'에 해당하는 '에크람프수신' (*)이란 '...로부터'(from)의 뜻인 '에크'(*)와 '등불'이란 뜻인 '람파스'(*)가 합쳐진 말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는 결국 의인들의 빛남이 마치 어둠가운데 있는 모든 사물들을 밝히 볼 수 있게 하는 등불과 같이 빛나게 된다는 의미로 세상 끝날에 성도들이 덧입게 될 영광의 광채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말이다. 한편 의인들의 해같이 빛나는 모습의 예표는 바로 변화산에서의 변형된 예수의 모습(17:2), 또는 예수의 무덤 속에 앉아있던 주의 천사의 모습(28:3)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의 일반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모든 만물이 다 해처럼 빛날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되던 처음 모습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되찾을 것이다.
성 경: [마13:44]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세 가지 천국 비유]
밭에 감추인 보화 - 팔레스틴 지역은 약탈(plunder)이 빈번하고 오늘날의 은행과 같이 재물을 맡길만한 공식 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 주민들은 자기의 소유를 땅에 감춰두는 예가 흔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처럼 보물을 발견한다는 것은 일생에 단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Huffman). 이처럼 본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최상의 가치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랍비 율법에 따르면 만일 일꾼이 밭에서 일하다가 보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파내었으면 그 보물은 당연히 그 밭 주인의 소유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Derrett). 그러나 본문의 사람은 매우 신중하여 자기가 그 밭을 살 때까지 보물을 파지 않았다. 따라서 이 비유는 법과 도덕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보화의 가치가 그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얻을 만한 것임을 가르치는데 그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사실 그 사람은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그 밭을 삼으로써 결국 치른 대가보다 훨씬 더한 이익을 얻게 되었다. 그러면 보화는 왜 감춰져야만 했는가? 이는 (1)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가치한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기 위함이다.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께서 천국의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과같다. (2) 진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근면성을 시험하기 위하여 보화는 감추어졌다. 부지런히 말씀을 사모하는 자만이 천국복음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3) 보화가 밭에 감추어진 까닭은 그것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의 인내를 시험하기 위해서이다. 천국복음의 진리는 그것을 발견하기까지는 계속적인 노력이 요구되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 보물이다. 그러면 밭에 감추인 보화는 어떤 사람들이 발견하기 어렵게 숨기워져 있는가! (1) 스스로 지혜롭고 의롭다고 생각하여 보물을 찾아 나서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물이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자신이 소유한 사상이나 철학, 종교만이 최고의 진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결부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들은 결국 멸망으로의 길을 안내받고 있는 셈이다. (2) 그 보화는 진리에 대해 아예 무관심하며, 감각적인 쾌락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다. 이들은 영원한 삶과 부활에 대해 완전히 무감각하기 때문에 밭에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아무리 열심히 권고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게 마련이다. 보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생명을 찾으려는 자에게는 너무나도 쉽게 발견될 수 있는 일상의 삶속에 감추어져 있다. 한편 보화라는 말은 귀하고 값진 모든 물건들을 총칭(總稱)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것이 보석이든 금괴이든 간에 보화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을 상징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사람에게 있어서 추구되어야 하는 가치(예를 들어 부귀, 명예, 자기의 이상과 주의등)는 비록 사람에 따라 다르고 다양한 것이지만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추구해야만 하는 최고의 가치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사죄(赦罪)의 은총과 죄에서의 해방된 삶, 곧 천국의 삶이다. 이러한 값진 진리를 발견한 사람의 기쁨은 족히 비교할 것이 없을 것이다.
돌아가서...다 팔아...샀느니라 - 여기 제시된 세 동사의 시제는 모두 현재형으로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의 즉각적이고도 단호한 행동의 일면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절대적 가치 앞에 상대적 가치를 단호히 거부할 줄 아는 용기있는 진리 추구자의 모습이다. 성경에서 무엇인가를 사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돈 없이, 값 없이 사는 것이며(사 55:1, 계 21:6), 둘째는 본문에서처럼 모든 소유를 다 투자하여 사는 것인데, 이는 얻고자 하는 것에 비하여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 모두 무익하거나 오히려 해(害)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빌 3:7, 8). 이에 비해 마 19:21, 22에 나오는 청년은 보물이 무엇임을(온전하여지는 것) 알고 그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한다는 것을 배웠으면서도 이미 획득한 가치들을 포기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놓쳐버리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다.
성 경: [마13:45]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세 가지 천국 비유]
좋은 진주 - 진주는 그 당시 페르시아만과 인도양 등지에서 채취한 것이 가장 고가품(高價品)으로 여겨졌다. 그 당시만 해도 부자가 아니고서는 이 지역들에서 '진주'를 구입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흔히 성경에서는 이 '진주'를 고결한 것을 상징하는 물품으로 취급하고 있다(7:6; 잠 3:15). 그런데 본문에 언급된 장사는 바로 이러한 '좋은 진주'를 구하고 있었다. 즉 그는 결코 흠이나 티가 있거나, 모양이 좋지 않은 저가품을 구한 것이 아니라 매우 값나가는 진주에만 관심이 있었다.
장사(*, 엠포로스) - 여행을 뜻하는 말인 '포로스'(*)에서 나온 말로, 주로 이곳 저곳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부유한 도매 상인을 가리킨다. 밭에서 우연히 보물을 발견한 평범한 농부와는 달리 진주장사를 하는 사람으로서 전문적인 안목(眼目)을 갖고 진주가 나올만한 곳을 찾아 다닌다고 하는 점에서 인생의 허망한 것을 좇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진리가 무엇이며, 어떻게 찾아 얻을 수 있는가에 유념치 않고 그냥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과는 달리 애써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 진리를 찾아 다니는 구도자(求道者)이다.
성 경: [마13:46]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세 가지 천국 비유]
극히 값진 진주 하나 - 여기서 '극히 값진'에 해당하는 '폴뤼티몬'(*)은 45절의 '좋은'을 뜻하는 '칼루스'(*)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값 나가는 것을 나타낸다. 실로 그 상인은 자신이 목적하고 소망했던 것보다 더 좋은 진주를 만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위해 자신의 전 의지(意志)를 불사르는 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헤이다. 더불어 본문에서 '하나'(*, 헤나)란 여럿 중의 하나란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the only)라는 의미로서 그 진주의 희귀성을 더욱 강조해 주고 있다. 한편 하나님과 죄된 인간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한 대속(代贖)의 피값은 결코 값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크고 귀한 것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여기의 '극히 값진 진주'와 비교될 수 있다.
성 경: [마13:47]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세 가지 천국 비유]
각종 물고기 - 예수께서 비유를 베푸셨던 곳은 갈릴리 주변 동리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적어도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는 갈릴리 어부 출신 제자들과 갈릴리의 어족(魚族)을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한편 갈릴리 바다에는 약 22종 이상의 물고기들이 생존한다고 한다. 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물고기는 결국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국한(局限)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여러 인종과 민족이 이에 포함될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각종 물고기'라는 말은 비유의 의미상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모두 담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며 밀과 가라지와 같이 의인과 악인이 함께 섞여 살아가는 상태를 암시한다. 그러나 비유 자체 내에서 좋고 나쁨의 구분은 도덕적 의미에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먹기에 좋고 크기도 알맞은 고기와 그렇지 못한 고기를 가리키는 말로, 좋은 고기란 가치가 있는 것, 그리고 나븐 고기란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고기를 말한다.
그물(*, 사게네) - 이는 4:18의 그것과는 크기와 사용법에서 차이가 난다. 여기의 그물은 두 배 사이에 묶어서 끌고 다니거나 아니면 한 쪽 끝은 해안가에 고정시키고 다른 한 쪽 끝은 배에다 달아매어 긴 밧줄로 끌어당겨 밖으로 끌고 나올 수 있게 만든 것으로서, 무거운 납을 달아 바다 밑바닥까지 훑어 대량으로 고기를 잡는 대단히 큰 그물이다. 욥 19:6과 시 66:11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 그물속에 들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다. 한편 이 그물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세계 도처에 복음이 확산되는 것과 더불어 그 확산의 결과로서의 신앙 공동체, 곧 교회를 상징한다. 실로 그 교회는 종말의 심판 때까지 참 성도와 거짓 성도가 함께 존재하게 될 것이다. 한편 성경에서는 흔히 '바다'를 영적 혼미(stupefaction)의 와중에 처한 세상 족속들을 상징한다(단 7:3; 눅 21:25).
성 경: [마13:48]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세 가지 천국 비유]
물가로 끌어내고 - '물가'란 시간적인 개념으로서, 종말의 심판과 영원한 하늘나라의 완성 사이의 중간 시기를 의미한다. 그물에 걸린 고기가 물가에서 버리워진든지 아니면 그릇에 담기워지든가 하듯이 종말에 악인들은 영영한 형벌의 처소로, 성도들은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의 심판과 천년 통치를 경험하는 자리고 영원히 분리된다. 이런 의미 속에서 물가의 장소적 개념이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한 심판의 현장이라 할 것이다.
성 경: [마13:49]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세 가지 천국 비유]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 여기에서 '갈라내어'(*, 아포리우신)란 완전한 격리를 암시하는 용어이다. 이는 마지막 심판 날에 실행될 의인과 악인에 대한 분리 작업의 냉엄한 장면을 예감케 한다.
성 경: [마13:50]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세 가지 천국 비유]
풀무 불에...울며 이를 갊이 - 이 비유의 초점에 해당하는 구절이다. 이는 마지막 심판 때에 있을 악인들의 영원한 형벌의 상황(the situation)에 대한 경고적 메시지이다(42절; 8:12; 22:13).
성 경: [마13:51]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천국 제자된 자의 도리]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 '영적 이해력을 소유하게 되었는가'하는 뜻이다. 이같은 예수의 말씀은 비유 설명을 요구하던 제자들의 의문점을(10절) 깨끗이 해소시켜 주었을 것이라고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 모든 것, 즉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Filson, Plummer, Schweizer, Schmid)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밀'(Grundmann, Bonnard, Hill, Fenton)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중 하나를 잘못 이해하면서 나머지 것들은 제대로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하오이다 -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였다고 그들 스스로 확신(確信)하며 강한 자부심에 따라 대답한 것이다. 이는 결코 성령의 내적 조명을 통한 확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Alford). 이같은 사실은 그들이 얼마 안 가서(15:16) 예수로부터 어리석다고 하는 책망을 듣는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여하튼 그 당시 제자들은 분명히 무리들보다 많은 이해를 하게 되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성 경: [마13:52]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천국 제자된 자의 도리]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 이 난해한 비유에 관한 해석은 참으로 다양하다. 즉 (1) '천국의 제자가 된 서기관'이라고 말하는가하면(Jeremias), (2) '기독교 공동체에 연합하게 된 유대 서기관'(Hummel), 또는 (3) 교회 안에서 마치 유대 서기관들과 같은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인 율법사'를 가리킨다고 하는 학자도 있다(Kilpatrick). 그러나 일반적으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란 예수 당시의 서기관들의 역할, 즉 율법 및 경전에 대한 해석과 율법 교육은 물론하고 그 이외에도 하늘나라에 대한 교훈을 깨닫고 그것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한 가지 더 붙는 새로운 의미에서의 서기관을 가리킨다. 결국 이 말은 '모세 율법의 제자된 유대 서기관'과는 질적으로 다른 천국의 비밀을 깨닫고 그에 준하여 생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가리킨다. 실로 그들은 예수의 발 아래서 겸손히 배우고 소박한 마음으로 그 진리를 수용한 자들이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해를 겸비(combination)한 랍비가 유대인들의 서기관보다 더 탁월하고 이상적인 제자의 모습일 것이다.
새 것과 옛 것 -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고 깨달을 수도 없었던 것이었으나 예수께서 새롭게 계시하신 새 진리가 새 것이라고 한다면 오래 전부터 알려지고 깨우쳐진 옛 진리, 곧 구약의 율법을 옛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 서기관들은 율법을 지나치게 자구(字句)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사람들의 영혼을 감동시키지 못했고 전체 율법 속에 흐르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역사를 간과(overlooking)해 버렸으며 다만 교조적(敎條的)으로 옛 것(율법과 전승)만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고 암송하는 데에 그쳤다. 그러나 '천국의 제자'된 자는 이러한 형식의 틀에서 벗어나 예수로 인해 시작된 새 것과 전해오던 옛 것을 동시에 취합(聚合), 활용할 수 있는자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놓칠 수 없는 사실은 계시는 오직 하나이며 그 계시의 초점은 "옛 것"을 성취하며 새롭게하는 '새 것'에 있다는 점이다(Bonnard). 실로 구약의 율법과 신앙은 물론 메시야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들도 모두 '새 것'을 이끄신 예수의 인격안에서 성취된다. 따라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새롭게 변화된 시각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꺼내어 온다.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 여기서 '곳간'(*, 데사우로스)이란 말은 주로 사람의 '마음'을 나타내는데 사용된 말이다(12:35). 따라서 본문은 천국 제자가 된 서기관이 그의 마음, 곧 그의 지각과 인격과 그 존재 자체 내에서 그 무엇을 꺼내어 온다고 이해해야 한다. 특별히 본문의 곳간은 진리가 전수되고, 보관되어 오는 곳으로서, 구약과 신약을 모두 포함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사건의 역사가 쌓인 마음의 창고이다. 따라서 집주인과 같은 주의 제자들은 주께서 맡기신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된 비밀들을 심령 깊숙한 곳에서부터 끄집어 내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제공하고 그 의미를 깨우쳐 주어야 한다.
성 경: [마13:53]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고향에서 배척받으심]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 이 구절은 마태복음에서의 설교들을 매듭짓는 다섯개의 형식적인 결론들 가운데 하나이다(7:28; 11:1; 19:1; 26:1). 특별히 본문에서는 지금까지의 천국 비유가 종결되고 이제 새로운 사건, 곧 예수의 고향 주민들의 배척에 대한 사건으로의 자연스러운 전환을 나타내 준다.
성 경: [마13:54]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고향에서 배척받으심]
고향으로 돌아가사 - 예수의 공생애 중에 있었던 세차례의 갈릴리 전도 사역 가운데서 제 2차의 갈릴리 사역(8:5-13:58)을 종결(終結)하시기 위해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 처음 고향으로 귀환(歸還)하시는 모습이다. 예수의 고향은 물론 나사렛을 가리킨다(눅 4:16). 이 때부터 예수께서는 더욱 더 적극적으로 그의 말씀 전파 사역을 감당하셨고, 따라서 그에게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반감(反感)이 한층 더 고조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예수와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대립은 그의 고향에서부터 그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 마태는 유대교인들과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의 모임을 구별하기 위하여 특별히 '저희'라고 하는 표현을 회당 앞에 사용하였다. 예수께서는 믿고 따르는 자들의 모임인 제자들의 집단이나 이적을 바라며 찾아다니는 무리들의 모임에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그를 모함(謀陷)하고 해하려는 무리들이 공식적으로 모이는 회당에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이는 예수께서 어디를 가시든지 그의 사역, 즉 가르치심(teaching), 복음을 전파하심(preaching), 병을 고치심(healing)에 최선을 다하시려고 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예수께서 순전히 회당에서만 가르치시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주로 회당에서 천국 복음을 소개하셨으며,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던'(*, 에디다스켄)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눅 4:16-30의 강해 '유대교의 회당'을 참조하라.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 묻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의문점은 예수가 권위자이심을 증명해 주는 그의 지혜와 능력, 즉 진리를 가르치는 것과 기적을 행하는 힘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는 것인지 바알세불에게 있는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 자신도 예수의 지혜와 가르침이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놀라운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나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결코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 예수의 출신과 배움의 정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신적 권위가 초경험적이며 지적 이해를 초월한 초이성적인 것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성 경: [마13:55]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고향에서 배척받으심]
목수의 아들 - 예수는 실제로 목수였다(막 6:3). 사실 당시의 유대 관습에 의하면 자녀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직업을 계승(繼承)했다고 전한다. 그런 점에서 예수도 공생애 이전까지는 목수의 일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유대의 주택들은 대부분 흙벽돌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목수'란 넓은 의미에서 건축 기술자 또는 목공 기술자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순교자 저스틴(Justine Martyr, A.D. 150년)은 예수가 쟁기와 멍에를 만들었다고도 증언한다. 한편 본문의 '목수'라는 단어앞에 정관사 '투'(*)가 사용됨으로써 나사렛 동네에는 오직 한 사람 또는 한 집안의 목수가 존재했음을 암시한다.
그 형제들 - 이들이 예수의 이복(異腹) 형제 또는 사촌들이라는 견해들이 있으나 요셉과 마리아 사이의 아들들, 곧 예수의 친 동생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12:46 참조). 여기서 '야고보'는 후에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자(행 15:13) 야고보서의 저자로 여겨진다. 그리고 유다는 유다서의 저자일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을 위시(爲始)한 그외의 형제들(그들의 신분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음)은 예수의 공생애 때만 하더라도 예수를 구주로 신앙치 않았으나(요 7:5)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 승천 이후 그들의 믿음이 온전하여진 것 같다(행 1:14).
성 경: [마13:56]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고향에서 배척받으심]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 예수의 형제와 모친은 일찍이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이주한 것 같고(4:13), 그의 누이들은 결혼을 하여 나사렛에 계속 정착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예수의 누이들이 복수로 표기된것으로 보아 적어도 2명 이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 외에 그들에 대한 정보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막 6:3)
성 경: [마13:57]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고향에서 배척받으심]
배척한지라 -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들이 걸려 넘어졌다', '그들의 감정이 매우 상했다', '그들이 적대시했다'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를 종합해 보면 그들은 예수에 대해 매우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고 또한 예수를 도무지 용납치 않을 태세였음을 알 수 있다. 실로 예수는 고향방문 때마다 모두 거절되고 배척당하였다(눅 4:29). 고향에서 조차 배척받았다고 하는 사실은 첫째, 장차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로부터 거부 당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구속 사건을 예고한다. 둘째, 예수의 지혜와 권능이 저희들에게는 거침돌이 되어 저들이 예수의 말씀을 거부함에 따라서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나아가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셋째, 예수를 배척함으로써 그들은 예수로부터 그들의 육신과 영혼의 질병을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loss)하게 되었다.
선지자가...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 이는 유대 뿐 아니라 그리이스와 로마의 문학 작품에서도 볼 수 있는 격언구이다(Logia of Jusus, Oxyrincus Papyri). 그런데 구약 선지자 중에 예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향에서 배척을 당한 선지자는 바로 예레미야이다. 아나돗의 제사장의 아들(렘 1:1)이었던 그에 대하여 그곳 사람들은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렘 11:21)고 하였다. 한편 평행구절인 막 6:6에서 예수께서 그들의 불신에 대해서 놀라움과 경악을 금치 못하셨는데, 이는 6절 하반부에서 드러나는 대로 나사렛을 제외한 모든 촌에서는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기적을 베푸는 일이 가능했으나 고향에서만큼은 그에 대한 불신과 시기가 지나치게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로 선지자의 자연적 속성을 익히 알고 있는 자는 그 선지자가 지닌 초자연적 속성(신적 권위에 의한)을 소극적으로 간과해 버리거나 적극적으로는 배척한다(Bengel).
성 경: [마13:58]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고향에서 배척받으심]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 이 구절과 평행 대조되는 막 6:5의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라는 말의 뜻은 본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실제로 권능을 행하실 능력이 없다거나 행하실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 기간에 많은 기적을 행하신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오천 명을 먹이심, 풍랑을 잠잠케 하심등등). 따라서 마가가 행하실 수 없다고 표현한 것도 예수의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 자체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의 복음전파의 사명과 관련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나타내시며 전파하시고자 할 때만 그의 기적을 행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의 고향 사람들이 자신이 하늘로서 난 자이며 하나님이 주신 권능을 행하시는 자라고 하는 사실과 천국이 이미 도래하고 있음을 알리는 말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기적을 행치 않으셨던 것이다. 계시(믿음)의 문이 열리지 않은 자들에게는 기적과 치유의 문도 열리지 않았다.
성 경: [마14:1]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헤롯의 예수에 대한 견해]
그 때에 - 헤롯이 세례 요한을 처형시킨 A.D. 39년 이후이며, 갈릴리 전도의 후반기가 시작되는 때로 예수와 반대자들과의 갈등이 표면화되어 가는 시기이다. 개인적으로는 예수의 선구자로서, 구속사적으로는 구약의 종말과 신약의 출발을 증언하기 위하여 특별히 부름받은 세례 요한은 세례 행위와 예수에 따른 메시야의 등의 직접적 방법으로 선구자의 사명을 감당하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삶을 예표하였다. 다시 말하면 세례 요한의 삶과 죽음은 그 전체가 예수의 모형(模型)이었다. 즉 그의 투옥(14:3)을 통해서 예수의 수난의 삶이, 그리고 그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예표(豫標)되었다. 한편 이 세례 요한의 죽음을 기점으로 해서 예수의 사역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 예수께서 직접 당신의 선구자라고 지칭하였다. 요한의 죽음 이후, 즉 의로운 말을 외치다가 세상 권력자에게 당하는 죽음에서 조차 당신의 예표의 역할을 한 요한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예수는 본격적으로 스스로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시고 수차의 수난 예고를 하시는 등 당신의 메시야직의 절정인 십자가 고난을 준비하시게 된다. (2) 당시 팔레스틴 북부, 즉 헤롯 안디바스의 관할 지역은 물론 전 유대 땅에서 가장 큰 사회.종교적 이슈(issue)의 주제이던 세례 요한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예수 한사람에게 전 사회적 억압에 시달리던 일반 대중들은 예수에게 정치적인 기대를, 주로 정치 기득권층은 예수에게 적대적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1),(2)의 사실을 종합래 볼 때, 예수는 전 구속사적 관점에서 사역을 행하고 미래를 준비하셨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의 행위의 참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여 부단히 자신들만의 편협한 시각으로 예수를 오해하고 있었다. 이런 오해는 예수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해소되기 시작한 것이다.
분봉왕 헤롯 - 여기서 분봉왕(*, 테트라아르케스)이란 '네 개로 이뤄진 한 벌'을 뜻하는 '테트라스'(*)와 '통치'를 뜻하는 '아케르'(*)의 합성어로 문자적인 뜻은 '한 나라의 1/4을 통치하는 자'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 로마의 정복지역의 한 부분을 통치하는 괴뢰 정부의 왕을 가리킨다. 더 자세한 내용은 신약 개론 중 '정치적 배경'란을 참조하라. 본문의 헤롯은 헤롯대왕이 죽은 B. C. 4년 부터 A. D. 39년까지 네 개의 통치지역으로 나뉜 유대 땅 가운데서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렸던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이다. 따라서 이 시대를 주무대로 활동하셨던 세례 요한 및 예수와 관계가 깊었던 사람으로, 예수로부터는 그의 교활하고 간사한 성품 때문에 '여우'라고 불리우기도 하였다(눅 13:32).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그에게 심문(審問)을 받으심으로써 그는 세례 요한 및 예수의 처형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되었다(눅 23:7).
예수의 소문을 듣고 - 막 6:14에 의하면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 것'이며, 눅 9:7에 의하면 예수의 행한 '모든 일'에 대해서 헤롯에게 보고(報告)가 된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마가와 누가의 두 복음서에서의 예수에 대한 소문은 모두 그의 '제사 파송'과 관련된 것으로 편집되어 있다. 그러나 대략 A.D. 29년경, 즉 아무리 빨리 잡는다해도 주께서 죽기 1년전에 있었던 제자들의 전도 파송의 결과, 제자들이 행한 사역과 능력에 의해서 예수에 관한 소문이 더욱더 멀리 퍼져나갔다고 하더라도 헤롯이 지금 처음으로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미 일년 이상 헤롯의 통치지역인 갈릴리에서 말씀을 전파하시고 이적을 행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롯은 갈릴리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고 주로 세례 요한을 가두어 놓았던 베레아의 마케루스(Machaerus) 궁전에 있었거나 또는 사치와 향락에 심취해 있었으므로(F.R.Fay, Homer A. Kent, Jr.) 갈릴리 지방에서는 그가 예수에 관해서 가장 나중에 알게된 사람 중에 속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한편 그의 신하들이 예수의 소문에 관해 언급하고 그 일을 문제삼으려고 하는 일은 예수의 사역이 예수의 진의(眞理)와는 달리 그들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위협(威脅)으로 다가오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정의와 진리는 그것이 굳이 불의와 비진리를 정면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해도 물과 기름이 서로 갈라지듯이 서로 서로를 밀어내기 마련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성 경: [마14:2]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헤롯의 예수에 대한 견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 누가는 이 부분에 대해 먼저 신하 중 몇몇이 보고하고 헤롯이 곧 그 사실을 거부하는 듯한 인상으로 기술하고 있다(눅 9:7-9). 이에 비해 마가는 헤롯이 신하들의 말에 동조(alignment)한 것으로 기술했다(막 6:14-16). 아마 이러한 차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튼 심경의 변화를 표현한 것으로, 누가는 헤롯이 신하의 말을 듣고 난 즉시 일어난 상태를, 마태와 마가는 시간이 조금 더 경과한 뒤에 헤롯의 감정이 가라일은 후 헤롯이 예수를 세례 요한으로 판단할 때의 일을 기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세례 요한이라 - 헤롯이 예수를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으로 오해한 원인은 (1) 그가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며, (2) 예수의 사역과 세례 요한의 사역에 있어서 유사점, 곧 설교에 있어서의 회개 촉구와 하나님 나라 도래의 임박성 강조, 유대 교권주의자들에 대한 책망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사실 헤롯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예수를 부활한 세례 요한으로 이해(16:14)는 예수를 유일무이(有一無二)한 메시야로 고백한 제자들의 신앙고백과는 엄청난 질적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 이러한 결론을 내린 사실에서 적어도 헤롯은 미신적이며 절충적인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바리새적인 부활관에 영향을 받은 듯, 자신이 살해한 요한이 부활하여 죽기 전보다 더욱 강한 모습으로 행동한다는 미신적 사고에 사로 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때문에 그는 훗날 예수를 십자가 형(刑)에 처하도록 하는데도 묵시적 동조를 하게 된다. 한편 유대인들의 부활관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정립된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구약 시대에도 이미 부활사상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몇몇 구절들(욥 14:13-15;단 12:2-3;호 6:2)이 있다. 그러나 부활사상이 훨씬 다양해지고 많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신구약 중간시기를 거친 신약 시대였을 것이다. 특히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신앙의 열렬한 신봉자였고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사상을 전면 부정(否定)하였다(행 23:8). 실로 여기서 죽은 자는 모두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는 신약의 가르침과 달리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할은 의로운 유대인들에게만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차이점이 있다.
이런 권능이 - 세례 요한이 그의 사역 중에 비록 어떠한 표적도 해하지 않았다(요 10:41) 하더라도 헤롯의 이 말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그를 권세(*, 여수시아)와 능력(*, 뒤나미스)을 갗춘 자로, 즉 적어도 그는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구러나 요한의 권위에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이런 자 심지어 11:11에 묘사한대로 여자가 낳은 자, 즉 사람의 피를 받고 태어난 자 중 가장 큰자가 예수에 대한 선구자로서 예수의 메시야직에 대한 증거라는 점에서 마태는 이를 부각시킨 것 같다.
운동하는 도다 - '운동하다'는 헬라어 '에네르게오'(*)는 '활기를 돋우다', '움직이다'의 의미인 영어의 'energize'에 해당하는 말이다. 즉 무엇인가 초월적 힘이 한 인격에게 영감(靈感)과 (動力)을 주는 상태를 가리킨다. 예수는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다른 초자연적인 힘(바알세불 등)의 도움으로 행한다고 생각했듯이 헤롯도 죽은 세례 요한의 영(靈)이 예수 안에서 그 권능들을 행하게 생각하였다.
성 경: [마14:3]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세례 요한의 순교]
전에 - 이 말은 3-12절의 내용이 적어도 1, 2절의 시점 이전에 일어났던 일의 회상(回相)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공관복음 모두 이 헤롯의 공포와 세례 요한 살해의 사건을 12제자 파송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12제자 파송을 즈음하여 요한 살해가 있었고 12제자 파송으로 전국이 예수 소문으로 들끓자 헤롯이 두려워하였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동생 빌립 - 헤릇 빌립 1(Herod Philp 1)세를 말한다. 헤롯 대왕과 대제사장의 딸 마리암네(Mariamne 2)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헤로디아의 첫 남편이며 살로메의 부친이다. 한편 그와 헤롯 안티바스와의 관계는 이복 형제간이었다<헤롯왕가의 가계 도표 참조>.
헤로디아의 일 - 여기 헤로디아는 헤롯 안티바스의 이복 형제인 '아리스토블루스'(Aristobolus)의 딸이었다. 그녀는 헤롯 빌립, 곧 자신의 삼촌과 결혼하여 살로메를 낳았다. 그런데 사바티안(Sabatian) 왕인 아레타스(Aretas)의 딸과 이미 결혼한 바 있는 또다른 삼촌 헤롯 안티바스가 그녀를 유혹하여 남편 빌립을 버리고 자신과 불법적인 재혼을 하게 했다. 그런 까닭으로 인해 아레타스의 딸은 본국으로 도망가게 되고 끝내 두 나라 간에 전쟁이 발발 하게 된다. 결국 안티바스는 이 전쟁에서 참패하게 된다.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이때가 세례 요한을 참수(斬首)시킨 바로 직후였기 때문에 이 참패의 원인을 의인의 살해로 말미암은 징벌이라고 간주한다. 한편 본문의 '헤로디아의 일'이란 헤롯 안티바스와 헤로디아의 불법적인 결혼에 대한 세례 요한의 책망을 가리킨다. 이 일로 인해서 헤로디아는 신약의 엘리야인 세례 요한을 미워하고 죽이고자 계획하였는데(막 6:19), 이는 바알의 선지자를 죽인 일로 엘리야를 죽이고자 했던 이세벨의 경우와 좋은 대조가 되는 사건이었다(왕상 19:1,2).
옥에 가두었으니 - 요한은 유대인의 3대 요새(要塞) 중의 하나인 마케루스에 있는 감옥에 갇히었다고 한다. 이곳은 헤롯과 헤로디아가 주로 거처하는 베레아의 남부를 방어하는 요새로, 표고 736m의 사해 동편 황량한 사정에 위치하고 있었다. 요한의 투옥 이후에 그의 제자들 중 일부는 별개의 집단으로 계속 존속하고 있었으며 그가 옥에 갇혀 있을 동안에는 계속해서 그의 지시를 받았던 것 같다(11:2).
성 경: [마14:4]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세례 요한의 순교]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 헬라어 동사 '엘레겐(*)은 과거 미완료시상으로서 '그가 반복해서 말하곤 했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요한이 헤롯을 직접 만나 그를 책망했다고 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설교 하는 중에 혹은 세례를 주는 등의 여러 행위속에서 헤롯과 헤로디아의 불법적인 결혼에 대해 공공연히 비난하였음을 의미한다.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 '광야에서의 외치는 자의 소리'였던 세례 요한의 '고발 내용'이다. 요한이 헤롯을 책망한 것은 그가 첫번째 부인인 아라비아 왕 아레다(고후 11:32)의 딸을 버림으로써 외교적 갈등으로 인하여 나라의 정치적 위기를 몰고온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방인 출신(헤롯대왕은 이두매 사람이었다)인 헤롯이 자신이 유대인이 되었음을 자처하면서도 유대의 율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율법(레 18:16;20:21)에는 형제의 아내와 결혼할 수 있는 조건은 그 형제가 아들이 없이 죽었을 때 뿐이다. 그러나 헤로디아의 첫 남편인 헤롯 빌립 1세는 여전히 살아있었으므로 그들은 간음죄를 범한 것이며, 또한 헤롯파 헤로디아는 삼촌과 조카(헤로디아는 헤롯 대왕의 또 다른 아들 아리스 토블루스의 딸이다) 사이로 이들은 근친상간(近親相姦)의 죄를 범한 것이 된다.
성 경: [마14:5]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세례 요한의 순교]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 그 이유는 두 가지, 즉 (1) 도덕적 이유, 즉 요한이 자신의 비윤리성을 비난했기 때문에, (2) 정치적 이유, 세례 요한이 민중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너무 심각해졌기 때문에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문제는 상호 연결된 것으로서 나누어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유대인 사가(historian) 요세푸스(Josephus)등은 정치적 이유에 초점을 두고, 성경 기자들은 비교적 전자에 기울어진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실 세례 요한에게 있어 헤롯 가문이나 로마의 식민체제 등을 비판하는 것이 임무는 아니었다. 오히려 구속사적 입장에서 구약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인한 신약의 시작을 증언하는 것이 그의 주(主) 임무였다. 또한 그가 세속 정치인에게 오해를 받아 죽임을 당하는 것은 예수께서도 정치적 오해를 받아 죽임을 당한 것과 연결되어 다시 한 번 세례 요한이 예수의 선구자였음을 상기시켜 준다.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 막 6:20에서 헤롯이 요한을 두려워하여 그를 처형하지 못하고 있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이때 헤롯이 요한을 단번에 처형치 못한 것은 백성들의 폭동을 우려했기 때문이라 전한다. 여하튼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을 제외한 민중의 태도는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매우 호의(好意)적 인 것이었다(3:5, 6;11:7-4). 그에 대한 민중들의 신뢰와 지지의 원인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1) 유대지도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그들을 책망하였기 때문이다. (2) 적국(敵國)인 로마를 등에 업고 민중들을 억압하고 있는 헤롯왕가를 비판하였기 때문이며, (3) 예수께서도 그를 크게 칭찬하셨으므로 예수를 따른 자들도 세례 요한을 참선지자요, 예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선구자로서 인식하고, 사실을 사람들에게 전했기 때문이며, (4) 헤롯이 세례 요한을 불법적으로 감금한 것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와 동정으로 인해서 세례 요한의 인기가 더욱 더 고조되고 전국민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 경: [마14:7]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세례 요한의 순교]
헤롯의 맹세로 - 살로메의 육감적 독무에 심취한 헤롯 안티바스는 탐욕스럽고 권세있는 제왕(帝王)으로서의 기분을 맘껏 누렸다. 그는 분위기에 도취되어 마치 고대 페르시아 군주들이 하던 식으로 호언장담을 늘어 놓았다(에 5:3, 6;7:2). 헤롯은 자기 어리석음에 도취되었던 것이다.
허락하거늘 - '호몰로게오'(*)는 '확언하다', '공언하다' 등의 의미로, 맹세와 다짐을 동반한(*, 메타) 허락으로서 반복될 수 없는 약속이다. 물론 왕이 기쁜 날을 맞아 신하에게 훌륭한 선물을 내리는 것은 일상의 일이었지만 헤롯은 자신이 이행해야 할 내용을 알지도 못하면서 기분에 도취된 채 호언 장담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과오(過誤)를 저지르게 된다.
성 경: [마14:8]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세례 요한의 순교]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 그 당시 살로메는 육체적으로는 뭇남성의 시선을 집중시킬만큼 성숙했는지 모르나 정신적으로는 아직 제 어미에게 의존해야 할 만큼 미숙한상태였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악의 도구로 전락하게 된 크나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시킴'에 해당하는 원어 '프로비바스데이사'(*)는 '선동하다', '권면하다'는 뜻으로 헤로디아의 집요하고도 악의에 찬 일면을 보여준다. 여하튼 본문은 세례 요한의 죽음이 바로 헤로디아의 사주(使嗾)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말이다. 요한의 죽음은 그녀의 간계(奸計)에 의한 것이었다. 헤로디아는 분명히 요한의 처형에 대해 끊임없이 헤롯을 졸랐을 것이다. 그러나 결심을 못하는 헤롯의 행동을 통해서도 자신의 요구를 포기하지 않던 헤로디아는 어린 딸을 이용하여 눈에 가시와 같이 자신의 부정(不貞)을 고발하던 요한을 제거하려 하였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 헤로디아의 흡혈귀적인 완악상을 드러내 준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에 의하면, 이때 헤로디아는 자신의 부정한 결혼을 고발하던 요한의 칼날같은 혀가 침묵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 원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요한을 마음껏 저주하고 조롱하기 원했기 때문에 참수(斬首) 당한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다고 한다. 한편 여기 언급된 '소반'은 타원형으로 된 얇고 큰 접시를 가리킨다.
여기서 내게 주소서 - '여기서'라는 말은 유대의 정치, 종교지도자와 로마시의 군관들이 모인 잔치 자리로서 연회석이자 공식적인 모임의 장소이다. 헤로디아는 헤롯이 그의 딸에 대한 맹세를 깨뜨릴 것을 염려하여 모인 사람들의 눈과 귀를 담보(擔保)로하여 그(헤롯)를 위협하고 요한의 처형을 더이상 지체치 말고 즉각 실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성 경: [마14:9]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세례 요한의 순교]
왕이 근심하나 - 헤롯의 근심이 무죄한 자를 죽이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아니면 요한의 죽음으로 인해서 일어날지도 모를 민란 때문인지 확실치는 않다. 어쨌든 그의 근심은 '양심의 최후 투쟁'(plumptre)이었으나 그는 의가 아니라 자신의 위치에 집착, 선택함으로써 악에게 굴복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자기의 맹세한 것 헬라어 '호르쿠스'(*)는 맹세의 뜻인 '호르코스'(*)의 복수형으로, 맹세가 여러 번 반복되었거나 아니면 그 맹세가 확정적일만큼 강력했던 것임을 의미 하는 말이다. 헤롯이 세례 요한을 처단하도록 허락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첫째, 고대 근동에서의 맹세는 율법에서도 평시되어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특히 성경적인 맹세는 하나님앞에서 거짓없음과 약속이행의 의지를 엄숙하게 맹세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반할 경우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향 처벌을 받더라도 이의(異意)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민 30:1-8, 강해 '서원과 맹세에 대하여') 신약 시대에 이르러 맹세는 하나님 대신에 신의 인격, 예배에 관련된 물체, 우주만물, 성전 등을 가리켜 맹세가 행해졌다. 그러나 맹세의 남용(남용)으로 인해서 예수께서는 일체(일체)의 맹세를 반대하시기도 하였다(마 5:34-37). 한편 구약의 인물 중에서도 경솔한 맹세로 인해서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게 된 사람으로 입다(삿 11:31-39), 사울(삼상 14:38ff)등이 있다. 둘째, 헤롯은 그의 왕으로서의 권위 때문에 맹세를 깨뜨릴 수 없었을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왕의 말은 곧, 국법이었다. 그 예로 다니앨을 사자굴에 집어넣었던 메대 나라의 다리오 왕의 금령을 들 수 있다(단 6:14-15).
그 함께 앉은 사람들 - 막 6:12에 의하면 이곳에 초대된 사람들은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듸이다. 이 사람들은 왕의 잘못을 제지하는 엘리야김의 방백들과는(렘 36:25) 달리 헤롯의 불의를 조장하고 촉구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같은 깃털을 가진 새들이 함께 모이듯' 헤롯의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모두 헤로디아와 같이 부정하고 사악 한 자들로서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대신에 그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함으로써 세례 요한의 참수를 결단하게 하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들이 바로 어리석은 헤롯의 맹세의 증인이 되었고 사악한 헤로디아의 살인에 동조자(同調者)가 되었다.
성 경: [마14:10]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세례 요한의 순교]
사람을 보내어...옥에서 목 베어 - 심문이나 재판의 판결없이 사람을 처형하는 것과 더구나 모세 율법에 따르면 목을 베어 죽이는 일은 종교적, 신앙 공동체에 대한 공적 범죄이외에는(출 32:27;신 13:6-18) . 참수헝은 그리이스나 로마의 관습을 따른 것이다. 헤롯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이러한 이방적 태도를 반율법적이고 반민족전인 것이어서 그가 아무리 유대인임을 자처한다고 하더라고 민중의 미움을 받는 이유가 되고 있다.
성 경: [마14:11]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세례 요한의 순교]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 헤로디아는 그녀의 부정과 불의를 끝없이 고발하던 세례 요한의 혀가 잠잠해졌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의 머리를 요구한 것 같다. 그러나 요한의 처형이 정의를 부르짖던 그의 '소리'를 결코 잠재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아에게 주니 - 여기서 '여아'(*, 코라시온)란 혼기(婚期)가 가까운 처녀를 가리킨다. 사실 그 당시 증근동 지방에서는 조혼(早婚)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십대 중반에 이른 살로메에게 이 용어를 붙인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제 어미에게 가져 가니라 -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목을 받아들 수 있게 되었다. 실로 악인은 피흘리기를 좋아하며, 그것을 신속히 행한다. 한편 루핀(Rufin)의 제롬(Jerome)은 이때 헤로디아가 뽀족한 바늘로 피로 젖은 세례 요한의 혀를 사정없이 찔렀다고 전한다. 한편 무고(誣告)한 피를 흘리게 한 헤롯은 얼마 후 그의 전처의 본국이었던 페트라(Petre)의 아레타스 왕과의 전투에서 참패하여 도주하였고, 또 로마 황제의 진노를 사게 됨으로써 로마 원로원에 의해 프랑스 리용으로 추방되어 거기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또한 살로메는 겨울에 얼음 위를 걷다가 얼음이 꺼져 그만 날카로운 얼음에 목이 찔려 죽었다고 한다(Josephus). 정녕 하나님은 요한이 아닌 헤롯과 그 일당의 목을 요구하신 것이다.
성 경: [마14:12]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세례 요한의 순교]
요한의 제자들이...장사하고 - 하나의 조직체로서의 요한의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이 살아있을 때에 스승과 연락이 잦았으므로(11:2) 스승의 참수 소식을 곧바로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그들은 머리없는 스승의 시신을 안치한 후 곧 예수께 나아갔다. 즉 그들은 스승인 요한의 증언, 곧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 양(요 1:35-40)이라는 말을 듣고 점차 예수를 신뢰하게 되었는데, 이제 그 스승이 죽자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예수에게로 와서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하였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요한은 생전 뿐 아니라 사후에도 그의 영향력이 대단했는데, 그 결과로서 요한의 제자들은 팔레스틴을 벗어나 지역에서 여전히 작은 분파로서 존재하였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예수를 중심한 복음의 충만한 지식을 지니지 못하고 단지 편협한 신앙적 지식만을 소유하고 있었다(행 18:24-19:7).
예수께 고하니라 - 막 6:30에 의하면 이 보고는 사도들의 선교 활동에 대한 보고였다. 그러나 마태는 이 보고가 요한의 처형에 관한 것임을 서술하는 가운데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흡수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옥에 있는 요한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보고한(11:4 ff) 제자들이 요한의 처형 소식을 주님께 알렸다는 사실은 이미 그들이 예수와 스승 사이의 사상의 일치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의 가르침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은 자들이 많았을 것임을 의미한다.
성 경: [마14:13]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오병 이어의 기적]
예수께서 들으시고 - 본문에서 예수께서 들으셨다고 하는 내용은 '요한의 처형'에 관한 소식이 아니라 예수의 권능에 대한 소문이 신하들에 의해 헤롯에게 보고되었고 헤롯이 그를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소식이다(1절). 따라서 3-12절의 내용은 부록적(附錄的) 설명임에 분명하다. 3절에 보면 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헬라어 '가르'(*, 왜냐하면)로 시작되는데, 이 '가르'는 어떤 사실에 덧붙여 설명하고자 할 때 쓰이며, 반면에 3절의 초두에 나타나는 '데'(*, 그리고)는 어떤 일을 새롭게 전개시코고자 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L. Cope).
따로 빈들에 가시니 - 세례 요한의 사후(死後) 헤롯이 이번에는 자신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것과 헤롯의 미신적인 두려움과 그가 자신을 만나보기를 간절히 기대한다(눅 9:9)는 사실을 아신 예수께서는 해롯의 관할지역을 떠나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벳새다 광야로 가셨다. 이때부터 예수의 사역은 주로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훈련하기 위한 것이 되었는데, 이는 그가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길이 바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역 주위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과 이적들은 예수의 공생애에 있어서 그 절정에 속하는 것이며 그 이후의 사건들은 수난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하는 의의를 갖는다.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 예수께서는 전에도 바리새인들의 적의(敵意)를 피해 떠나신 적이 있는데(12:15), 이제는 헤롯 안티바스를 피해 안식과 묵상을 위해 떠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피하신 또 다른 이유는 12제자들이 선교 여행을 마치고 막 도착했기 때문이다(막 6:30;눅 9:10). 그 제자들은 영.육의 휴식기가 필요했고 자신들의 선교 방법에 대한 검토 및 예수께 복음의 비빌을 좀더 깨우침 받아야 했다. 한편 누가는 예수가 가신 빈들이 벱새다(눅 9:10). 즉 갈릴리 북동쪽 해안에 위치한 벳새다 율리우스(Bethsaida Julius) 지방에 속한 곳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 해변을 따라서 도보(徒步)로 예수를 좇아갔을 것이다. 무리들은 선지자로 여기던 세례 요한의 처형소식을 듣고 목자 잃은 양처럼 방황하다가 예수 계신 곳을 듣고 그분에게서 영혼의 쉼을 얻고자 찾아 나선 것 같다.
성 경: [마14:14]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오병 이어의 기적]
예수께서 나오사 - 예수께서는 자신이 공개됨으로써 대적자들의 표적이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자들과 조용한 무리를 향해 나아오셨다. 이것은 바로 인간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결단에 대해 선택, 구원하시기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의지가 응답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큰 무리 - 직역하면 '많은 무리'라 된다. 한편 이 사람들의 수(數)를 21절과 막 6:44에서는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 당시 숫자 계산에 들지 않는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포함한다면 이 무리는 적어도 만 오천내지 이만 명은 넘었을 것이다.
불쌍히 여기사 - (*, 스플랑크니조마이). 헬라어의 이 동사는 유대인듸이 참으로 애끓는 아픔의 세월을 보낸 디아스포라(Diaspora)상태로 살아가기 시작할 때 생겨났다고 한다. '불쌍히 여기다'라고 하는 말은 내장 혹은 심장 등 인간의 내부로부터 그 아픔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히브리인들이 '내장'(*, 스플랑크나)을 인간의 깊은 감정이 거하는 곳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실로 '인간에 대한 긍휼'은 예수의 전인격성을 대표하는 속성으로,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간절한 정(情)이상의 애틋한 긍휼의 마음이다. 한편 예수의 인간에 대한 최대한의 긍휼은 바로 십자가 상에서의 대속의 행위로써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경우 사람의 믿음을 보고서 행하시는 적도 있지만 흔히는 그 자신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병고침의 이적을 행하셨다.
성 경: [마14:15]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오병 이어의 기적]
저녁이 되매 -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저녁(*, 옵시아스)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이해하였는데, 제 1저녁은 늦은 낮, 주오후 3시부터 시작되고, 제 2 저녁은 일몰 이후 부터 시작되었다. 본문의 구절은 제 1저녁을, 23절에서는 제 2저녁시간을 가리킨다.
이곳은 빈들이오 - 빈들을 가리키는 말인 '에레모스'(*)는 광야 혹은 한적한 곳으로,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던 곳도 이러한 곳이었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나와 메뚜기로 매일의 양식을 삼았던 곳도 바로 이러한 곳이었다. 따라서 마을이 없고 인적이 드문 이러한 곳에서 자연식품인 메뚜기와 석청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에 의해서 마련된 만나를 제외한 다른 떡이나 음식을 기대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헤롯은 그의 찬란한 궁전에서 귀족들과 연회릍 벌렸지만 그 연회는 살인과 범죄의 현장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제자와 큰 무리들과 함께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 '빈들'은 바로 하나님의 축복과 인간의 감사가 넘쳐나는 은혜의 땅이며, 천국잔치의 전례(前例)가 행해진 곳이다.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때가 벌써 지났으니'가 된다. 그렇다면 이 '때'란 어떤 상황을 말하는가. 이에 대해 예수께서 가르침을 마칠 때, 식사할 때, 무리들을 돌려보낼 때, 밝은 시간이 지나는 때 등으로 해석하는데 이 여러 견해들은 모두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어느 것을 취하더라도 거의 동일한 의미일 것이다.
무리를 보내어...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 어쩌면 현대에 만연하고 있는 금전만능적이고 지극히 타산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처럼 들리는 제자들의 무책임한 발언이다. 사설 제자들 중에는 (아마 가릇유다일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에게 필요한 돈이 얼마쯤 남아 있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며, 그 돈으로는 약 2만여명의 무리를 먹이기에 역부족임을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무리를 자기들에게서 떠나게 하는 것 밖에 다른 방도(方途)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성 경: [마14:16]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오병 이어의 기적]
갈 것 없다 - 문자적으로 '가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서, 부정어 '우'(*)가 사용되어 강압적인 부정문이 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꽤 합리적이고 설득력있는 것과 같은 제자들의 주장을 이 한 마디의 말로 단호히 거부하셨다. 예수께서는 해산(解散)하기를 종용하는 제자들의 말에 따라 힘없이 돌아가는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을보고, 깊은 연민과 애정으로 돌아가려는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것이다. 실로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는 일은 결코 필요치 않다. 정녕 예수께서는 지금도 인간이 안고 있는 그 어떤 문제일지라도 외면치 않고 당신의 넓은 품 안으로 받아 들이고 게신다(요 14:1).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제자듸은 '스스로 사 먹게하소서'라고 말하였고 예수는 '너희가 그들에게 그것을 주라'고 하셨는데,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참으로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명령에 쓰인 동사 '도테'(*)는 '주다'란 뜻의 '디도미'(*)의 제 2 과거형으로, 즉각적이고 긴급한 행동이 요구됨을 의미 한다. 실로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했던 제자들에게는 무리들에게 음식을 대접해야 할, 그것도 지금 당장 수행해야 할 의무가 주어졌다. 물론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거의 만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이나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굶주린 군중들에 대한 그들의 책임감을 일깨워 주는 것과, 또한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신앙의 정도를 시험하기 위한 의도에서 행해진 것일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책임은 무리들에게 물질적인 양식 뿐만 아니라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고 세 번이나 거듭 부탁하셨듯이(요 21:15-17) 본문에서도 제자들에게 그들의 사명을 잊지 않도록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책임은 현존하는 교회의 사명이기도 하다. 교회는 굻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육의 양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심령이 굶주리고 메마른 자에게 영원한 생명수를 마시게 할 할 책임이 있다.
성 경: [마14:18]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오병 이어의 기적]
내게 가져 오라 - 마태만이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분명히 떡의 끝없는 분배 사건이 예수의 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의 명령을 이해치 못한 제자들의 연약한 믿음에서 기적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는 예수의 마음에서부터 그것은 발생되었다. 따라서 제자들은 기적의 공동 창조자가 아니라 기적의 분배자(分配者)에 불과하였다. 실로 제자들의 이러한 연약한 믿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예수의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는 이 말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키 위해 제자들에게로, 교회 자체에게로가 아니라 오로지 교회의 머리 이신 주님에게로만 자신을 가져가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암시한다.
성 경: [마14:19]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오병 이어의 기적]
잔디 위에 앉히시고 - 눅 9:14에 의하면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셨다고 하였고, 막 6:40에 의하면 혹 백씩 혹 오십씩 알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알았다'의 뜻인 '아나클리노'(*)는 물론 이스라엘인들의 보통의 식사 때의 자세와 마찬가지로 비스듬히 기대어 눕는 것을 의미한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신령한 이적을 행하시기에 앞서 그 이적에 참여하게 될 무리들에게 먼저 '순종'과 '질서'를 요구하셨다. 한편 본문의 '잔디'에 관한 언급으로 보아 이때는 대략 3, 4월 경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팔레스틴에서는 우기(雨期)가 막 끝나가는 2월 중순 경부터 빈들에 잔디가 돋아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요 6:10). 더욱이 요한은 이때가 유월절(니산 월 14일)이 가까운 때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요 6:4). 참고로 유월절 기간이 다한 이후로는 잔디가 푸른 기운을 잃고 시들기 시작한다.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 이러한 행동은 유대 가정에 있어서 가장(家長)이면 누구나 하는 평범한 일이었다(롬 14:6; 딤전 4:5). 유대인 탈무드(Talmud)에 의하면 '감사없이 무엇을 즐기는 자는 하나님께 강도짓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감사의 일상화(日常化)를 가르쳤다. 바로 예수께서 이 날의 잔치를 주관하시는 주인이시며, 제자들은 그의 시중꾼이며, 무리들은 잔치에 초대되어 온 손님들이다. 여기서 '축사하다'의 뜻인 '유로게오'(*)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먹기 전에 하는 유대인들의 공통된 기도의 내용은 '땅으로부터 양식을 얻게 하시는 우주만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감사하나이다'였다. 본분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기도의 내용 역시 그들 앞에 적은 양이나마 음식이 놓여진 것에 대한 감사이지, 그 음식의 무한정한 증가를 간구한 기원에 집중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예수께서 평소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실때 드리던 기도 그대로였을 것이다(26:26;눅 24:30).
떡을 떼어 - 떡을 떼시며 그것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예수의 손이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 5천명과 여자, 어린아이가 먹을 수 있었던 기적의 근원지요, 기적이 일어난 현장이며, 떡을 떼시는 그 순간이 바로 그러한 기적이 발생한 시점(時點)이다. 예수가 행하시는 기적은 이상한 주문(呪文)이나 신기한 동작이 필요치 않는 일상적인 자연스런 행동 속에서 이루어졌다. 조각이 계속해서 불어나며 떡덩어리가 결코 없어지지 않는 이 기적을 나타내는 말이 바로 '떡을 떼며'라는 이 단순한 한 마디의 말이다. 그런데 이 뗀 떡은 그것이 바로 인류의 영적 생명을 위해 찢기울 생명의 떡이신 예수와 그분의 육체의 모형이라고 하는 점에 그 큰 의의가 있다(요 6:26, 27). 예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손으로 떡을 떼셨다. 오늘도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께서는 우리의 육과 영의 양식을 위해서 여전히 떡을 떼어주신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 제자들은 언제나 예수의 사건을 다른 사람보다 더 가까이, 더 먼저 경험한 목격자들이며 그 목격한 사실들을 전달해 주는 증인들이다. 떡과 물고기가 전해지는 이러한 과정은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말씀이 먼저 복음에 사로잡힌 자들에 의해 세상에 전달되는 과정과 동일하다.
성 경: [마14:20]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오병 이어의 기적]
다 배불리 먹고 - 겨우 목을 축이고 한 끼니를 때우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자신의 집을 찾아 갈 기운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게 떡과 물고기가 배급(配給)되었다는 말이다. 특히 '배불리 먹었다'고 하는 말은 아마도 미래에 있을 메시야 왕국의 잔치의 풍성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는 그리스도의 몸은 온 인류의 영적 양식이 되며 모든 죄인의 죄악을 모두 사(赦)할 수 있는 큰 사랑의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남은 조각 - 기름으로 모든 빈 그릇을 채운 이적(왕하 4:1-7)과 스무 개의 보리떡과 자루에 담은 채소로 100명을 먹인(왕하 4:42-44) 엘리사의 기적과 신약에서 나오는 예수의 모든 기적들의 공통점은 바로 '사용하고도 남았다'고 하는 사실에 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기적에서도 병자는 그 자신의 병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몸이 완전히 건강해지는 것을 체험한다. 이러한 차고 넘치도록 후히 주시는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다. 따라서 남은 조각들은 바로 주님이 행하신 기적의 조각들이며 주님의 사랑의 파편(破片)들이다. 한편 여기서 '남은 조각'은 단지 먹다가만 부스러기만을 의미하지 않고 예수께서 나눠주시기 위해 손으로 떼 놓은 조각듸까지를 포함한 말일 것이다.
열 두 바구니 - 열 두 제자가 각각 한 바구니씩 거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그 남은 조각들은 12제자들의 계속되는 식량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바구니를 뜻하는 헬라어 '코피노스'(*)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버들가지로 만든 음식담는 그릇으로서 여행자들의 휴대용 주머니로 활용된 것이었다. 그에 비해 예수께서 4천명을 먹인 이야기에서 나오는, 일급 광주리는(15:37) 헬라어 '스퓌리스'(*)로, 흔히 이방인들이 물고기나 과일을 담는데 사용하는 갈대로 만든 광주리였다. 그리고 오천 명, 떡 다섯 개, 열 두 바구니 등의 5와 '12'라는 숫자는 '모세 오경'과 '열 두 지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의미 있는 슷자로 이해된다. 결국 이러한 점들은 많은 학자들로부터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은 유대인에게, 4천명을 먹인 기적은 이방인들에게, 예수가 생명이 됨을 나타내기 위해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성 경: [마14:21]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오병 이어의 기적]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 - 오병 이어의 기적 사건은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만 1년전인 유월절이 임박한 기간에 베풀어진 것으로 보인다(요 6:4). 따라서 그 당시 무리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많은 숫자가 한꺼번에 운집(雲集)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때 모인 무리는 성인 남자만을 계수(計數)하는 유대인의 계산법에 따라 '오천 명'이었기 때문에 여자와 아이 (*, 파이디온, 조그마한 아이란 뜻)까지를 합산하면 1만 5천명에서 2만명 정도로 추산(推算)된다. 예수의 공생애 중에 최대의 군중이 운집한 것이다.
성 경: [마14:22]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즉시...재촉하사 - '재촉하다'의 헬라어 '에낭카센'(*)은 '억지로 시키다'의 뜻이다. 예수께서 오천 명이 넘는 무리들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하신 후에 급히 서둘러 제자들을 무리로부터 멀리 떠나가게 한 이유는 다음과 갈이 추측해 볼 수 있다. (1) 주님은 한적한 곳에서 홀로 기도하기를 위하셨다(23절). (2)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동요하고 있는 무리들을 피하여 한적한 곳에서 잠시 쉬시기를 원했다(막 6:31-32). (3)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먼저 해산시킴으로써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하는 백성들의 의도와 분위기를 잠재우려고 하였다(요 6:15). 왜냐하면 그의 제자들은 주님을 도와 무리들의 잘못된 기대를 올바로 잡아줌으로써 주님을 돕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정치적 욕망을 성취하려는 기대에 빠져 있었으므로 그들이 남아있는 일이 예수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막 8:27-9:1 주제 강해, '메시야 사상 전개' 참조).
앞서 건너 편으로 가게 하시고 - 음식을 먹은 벱새다 광야의 건너편은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게네사렛일 것이다(34절). 할편 요 6:17은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웨스트코트(Westcott)와 모리스(Morris)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예수께서는 벱새다 율리우스에 근접해 있는 동쪽 해안에서 자신을 기다리라는 당부와 함께 제자들을 보내어 호수를 건너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내는'이라는 가정법 과거 동사와 함께 쓰인 '동안에'란 뜻의 '헤오스 후'(*)는 '때까지'(until)로 번역되어야 한다. 따라서 건너펀으로 가게 하셨다고 하는 의미는 주님께서 무리들을 해산시킬 때까지만 제자들이 앞서 가다가 그 후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고 다시 제자들과 만나 건너편으로 건녀가시려고 했다는 것이다.
성 경: [마14:23]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무리를 보내신 후에 예수께서 이제부터 그와 함께 하려는 많은 군중들을 집으로 돌려 보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될 수 있다. (1) 여러가지 이적, 특히 오병이어 사건에서 그가 참 메시야이심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무리들에게 옹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며(21장), (2) 비록 그가 유대인들이 고대(苦待)하던 참 메시야이시라고 하더라도 메시야가 올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들을 시켜 생선과 육류를 준비하여 잔치를 배설(排泄)할 것으로 생각하던 그들의 예측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온 인류가 고대하는 구원자로서 오히려 유대인듸에게는 배척당하고 수난당하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예수께서는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리들의 갈채와 소란은 마귀의 유혹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먼저 여기서 '산'은 혼잡한 무리들과 격리된 영적 교제의 장소이다. 더불어 이곳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항해 모습을 주시(注視)할 수 있었을 것이다(막 6:48). 한편 예수께서는 자신이 행한 기적을 둘러싸고 중대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종종 한적한 곳을 찾아나섰으며 그곳에서 기도와 명상을 하곤 하셨다(막 1:35;눅 5:16;6:12). 예수의 능력의 비밀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에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성부 하나님과 계속적으로 교제를 나눈 것에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사역을 가눙케하는 예수의 내적인 삶의 본질이었다. 기도와 이적 행위 사이의 바른 관련성은 행위가 일차적으로 중요하고 기도로써 그 행위를 돕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최고로 중요한 것이며 행위는 그 기도를 입증하는 것일 뿐이다(Archbishop William Temple).
저물매 - 두번째 저녁을 의미한다(15절 참조).
성 경: [마14:24]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 헬라어 성경에서 이 표현은 '메손 테스 달라세스'(*)로, '바다 한 가운데'를 의미한다. 이곳과 평행구절인 요 6:19에는 '십여 리'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25-30 스타디온쯤 되는 거리이다. 그렇다면 1스타디온(stadion)은 184.85m 이므로 따라서 육지에서 배까지의 거리는 4.6km 내지 5.5km에 해당한다(제 1권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란 참조).
바람이 거슬리므로 - 갈릴리 오수에서 부는 바람은 폭퐁우를 동반한 돌풍으로 급격한 기후 변동과 고난의 위험성이 있다(막 4:37;요 6:18). 한편 성경 문학적으로 바람은 생의 덧없음(시 78:39), 하나님의 심판(렘 18:17),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는 재난(렘 49:36), 사람을 미혹하는 교훈(엡 4:14)등을 상징하다. 따라서 본문의 이 말은 환호, 열광하는 군중들을 뒤로하고 예수로부터 떠밀려 배를 타고 있는 제자들이 이미 마귀가 가져다 주는 시험, 즉 세상 권력에 대한 미련이 여전히 그들을 괴롭혔을 것이라고 하는 상상을 가능케 한다. 실로 그들의 배는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거슬리고, 그들의 영혼은 그들을 향해 불어 오시는 성령의 바람을 거스렸다.
고난을 당하더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바사니조'(*)는 '시금석으로 시험하다', '고통을 주어 심문하다', '동요케 하다'등의 뜻으로, 제자들이 풍랑으로 인해 육체와 정신의 급격한 위기에 봉착(逢着)했음올 암시하는 말이다. 한편 제자들이 이러한 곤란을 경험하는 이 시간에 예수께서도 협곡(峽谷)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시면서 역시 고난 중에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셨다. 물론 예수에게 있어서 고난은 바로 유대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 사이의 음모 구상과 박해 공작(plot)에 대한 예견(foreknowledge)과 자신을 이 세상의 왕으로 삼으려는 군중들의 오해와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내면서도 예수 자신을 올바로 이해하고 평가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지 등등의 사유로 인해서 생겨난 것일 것이다. 이처럼 예수와 제자들은 그 시간에 함께 고통을 당하였으나 주님께서는 기도틀 통하여 그 고난을 스스로 극복하시고 능히 물리치셨다. 그에 반하여 제자들은 주남님 도우심으로써만 그 고난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배 가까이 오신 예수 주님으로 확신할 때까지 배에서 고난을 당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때 예수께서는 그들의 고난을 친히 목격하고 계셨으나 즉시 그들을 찾지 않으셨다. 이는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훈련시키기 위한 조처로서(Chrysostom), 예수께서 육신으로 그들과 더불어 계시지 않더라도 그분의 보호하시는 능력이 여전히 그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다는(8:23-27) 사실을 확신시키기 위해 이런 시련의 기간을 두셨던 것이다(Homer A. Kent, Jr.).
성 경: [마14:25]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밤 사경에 - 유대인들은 밤을 3경으로 아누었으나(일경을 4시간씩, 막 6:48) 그리이스나 로마에서는 밤을 4경으로 나누었는데, 여기서 마태는 로마식을 따른 것 같다. 따라서 1경은 오후 6시부터 9시까지이며, 2경은 9시부터 12시까지, 3경은 12시부터 새벽 3시까지, 그리고 본문에 묘사된 4경은 '새벽 3시부터 6시까지'의 시간을 말한다.
바다 위로 걸어서 - 예수의 만유의 주재로서의 초자연적 위상(位相)을 나타내주는 부분이다. 사실 바다 위를 걷기 위해서는 세찬 바람과 거친 물결 및 지구의 중력을 모두 극복해야 하는데, 예수께서는 이 모든 자연의 사슬들을 지배하시고 그 위에 우뚝서신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사건은 그 결과가 바로 제자들의 최초 신앙고백, 즉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33절)라고 하는 참 신앙적 고백을 하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다. 또한 그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생략된 누가복음을 제외한 마태, 마가, 요한복음의 서술이 모두 오첨 명을 먹이신 급식 사건 다음에 기술되어 출애굽 사건을 연상케 함으로써 모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바다를 건넜지만 예수는 스스로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 바다 위를 걸었다고 하는 것, 즉 모세보다 탁월하신 예수의 신성(神性)을 나타내 보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실로 예수(복음)의 새시대는 모세(율법)의 옛시대를 포함할 뿐 아니라 크게 능가(surpass)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14:26]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유령(*, 팥타스마) - 이는 꾸며서 나왔다는 뜻인 '판타조'(*)에서 유래한 말로서 실체가 없는 허상(虛像), 곧 망령 또는 귀신을 의미한다.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 기(寄)현상 앞에 제자들은 그것을 하나의 환각 내지는 미신적 현상으로 오판(misjudgement)하였다. 적어도 그들은 '유령이라' 외치면서 그들의 눈 앞에 직면한 죽음의 위기에 몸이 굳어버렸을 것이다.
성 경: [마14:27]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안심하라 내니 - 여기 '안심하라'(*, 달세이테)는 말은 '담대하라', '용기를 내라'는 뜻이며, '두려워 말라'(*, 메 포베이스데)는 말은 즉시 '두려움에서 헤어나오라'는 뜻이다. 즉 두 용어는 결국 안심하라는 의미의 중복적 권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는 예수의 권고의 말씀은 '나다'(*, 에고 에이미)라는 확신을 주는 말씀에 의해 더욱 밑받침이 되고 있다. '나는 나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여호와의 이름이기도 하며(출 3:14),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굶주린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셨으며,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셔서 권능을 주신 분으로서의 예수 자신을 저들에게 확인시켜 주시기 위한 참으로 친근한 말씀이다. 이 위대한 위로의 말씀은 풍전 등화(風前燈火)와 같이 파선의 위기를 겪고 있는 제자듸 뿐만 아니라 압제자들로 부터 대박해를 당하여 신앙과 삶의 위협을 받고 있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며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힘을 주는 것일 것이다.
성 경: [마14:28]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베드로가 - 물 위를 걸은 기록은 이곳에서만 나온다. 이 부분은 14-17장 가운데서 베드로가 예수께 특별한 취급을 받는 세 경우(16:13-23;17:24-27) 중의 하나로서, 베노이트(Benoit)는 이 기사에서 이미 베드로가 수석 제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만일 주시어든(*, 에이 쉬 에이) - 앞에 '에이'는 접속사이며, 뒤에 '에이'는 '...이다, 있다'의 뜻인 '에이미'(*) 동사의 2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 형태이다. 그런데 접속사 '에이'는 가정적 조건문에서는 '...인지, 아닌지'의 뜻을 갖지만, 본문의 경우와 같이 결론이 확실한 내용에서 도출(導出)되어 직설법 동사와 연합되는 경우에는(εἰ + 직설법) 토론적으로 사용되어 '과연 주님이시므로'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만일 주시어든'이라는 말은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는 사람이 주님이신가 아닌가를 시험하기 위한 의도에서 한 말이 아니라 예수께서 지금 물 위로 걸어 오신다고 하는 사실과 주님의 명령과 그 능력에 의해 그 자신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직설적이고 열정적인 베드로의 일면을 보여준다.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 베드로가 '나로 하여금 물 위로 걷게 하소서'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의 '명령'에 초점을 맞춘 것은 그분 자신의 말씀보다 그분의 초자연적 능력을 더 신뢰하는 오류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친지를 창조하셨으며, 말씀(*, 로고스)이신 예수께서 육신이 되셔서 그 말씀으로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천국 비밀을 선포해 주심과 같이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 한 마디에 의해 자신이 그 무엇이라도 할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물 위를 걸으라고 하는 허락과 능력이 주어지기를 요구하는 베드로의 행동은 비록 순간적이기는 했지만 주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과 그분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 경: [마14:29]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오라 하시니...배에서 내려 - 예수의 '오라'는 명령에는 이미 당신을 믿고 오는 자에 대해 보호와 안전을 마련해 두고 계신 권위에 찬 명령이다. 한편 신앙이란 하나님의 명령에 자신의 전인격을 복종시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모험과 같다. 아브라함도 그의 나이 75세에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오라' 부르시니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 이스라엘 사람들도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다'(히 11:29).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믿음으로 알지 못하는 세계(풍랑이 휘몰아치는 바다)로 나아갔다.
성 경: [마14:30]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바람을 보고 - 충동적인 성격의 베드로가 예수에게로 나아가는 동안 관심의 대상이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믿음'의 고갈(枯渴) 상태를 의미하기 보다는 예수의 초자연적 능력을 믿었지만 폭풍의 위험에도 침착히 인내할 수 있을 만큼의 더 큰 믿음이 없었다는, 즉 믿음의 수준의 문제인 것이다. 정녕 그는 예수(앞)만 바라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바람(밑)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을 삼킬듯이 달려드는 풍랑에 대해 두려워 하게 되었다. 정녕 온전한 믿음의 눈은 결코 두 개의 초점 (예수와 세상의 풍파)을 가질 수 없다.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 베드로는 예수와 그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앙하는 믿음의 빛을 잃었을 때, 그 즉시 예수의 보호권에서 벗어나 중력에 의해 빠져드는 자연 현상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실로 신앙 세계에는 중간 지대가 없다. 물 위(완전한 믿음)가 아니면 물 아래(완전한 의심), 둘 중 하나에만 머무르는 것이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퀴리에 소손 메) - '구원하소서'의 뜻인 '소손'은 '구원하다'란 의미인 '소조'(*)의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 그때의 상황이 매우 긴박했음을 시사해준다. 물론 본문에서의 이 말은 물에 빠지게 된 베드로 자신의 몸을 구원해 달라고 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종종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영혼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은 하나님을 떠났던 죄인이 그 죄악의 구덩이에서 헤어나오기를 원할 때 부르짖는 소리이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한계를 깨닫고 절망 가운데서 비로소 주님께 돌아설 때 하는 첫 마디에 해당한다.
성 경: [마14:31]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 주님의 신속한 구원 행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더구나 예수께서는 물에 빠지는 그를 건지기 위해서는 단 한 마디의 명령으로 충분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친히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붙잡으셨다고 하는 이 말은 특별히 주의 '붙잡으시는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로 거친 죄악의 세상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즉시 붙잡아 주시는 주 손님에 의해 우리의 신앙생활은 보존, 유시될 수 있을 뿐이다.
믿음이 적은 자(*, 올리고피스토이) - 이 표헌은 신약성경에 모두 다섯 번 나오는데(6:30;8:26;16:8;눅 12:28), 항상 제자들에게 말할 때 사용되었다. 이는 가장 믿음이 깊어야 할 그들이 믿음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예수로 하여금 그들을 책망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마태는 막 4:30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표현을 '믿음이 적은 자'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마태가 제자들이 이미 예수의 제자가 된 사실 자체가 어느 정도의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욱이 본문에서 베드로는 비록 충동적이나마 그리스도와 그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소유했던 터였다(28절). 한편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원했던 것은 '오라'하신 당신의 말씀을 끝까지 전적으로 신뢰하는 참 믿음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책망은 믿음의 양(적다, 많다)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상황 중에도 그리스도께 대한 영속적 신앙을 간직하는 것, 곧 그 믿음의 질적 측면을 강조한 말이다.
왜 의심하였느냐(*, 에이스 티 에디스타사스). - '왜'(*)라는 말은 히브리어 '레마'(*)에 상당 하는 말로 대개의 일반적인 표현인 '디아 티'(*)와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디아 티'는 '무엇 때문에'(because of what)라는 의미의 '새'이며 '에이스 티'(*)는 '무엇을 위하며'(in order to wher)라는 의미의 '왜'이다. 즉 '에이스 티'는 '디아 티'의 물음에 비해 보다 호의적인 의도에서의 물음이다. 즉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왜(because of what) 의심하였는지 그 의심의 원인을 알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무슨 목적으로', 즉 '무엇을 위하여'(to what end) 의심하였는가를 물으신 것이다. 예수가 손을 내밀면 잡을 듯한 가까운 거리까지 도달한 베드로는 무엇을 의심하였는가(Turner)? 한편 여기서 '의심하였느냐'란 말의 원뜻은 '이중적으로 하다'는 의미로서 마음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는 다혈질적인 베드로의 심히 당황해 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표현이다.
성 경: [마14:32]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바람이 그치는지라 -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기적이 풍랑 중의 첫번째 기적이라면 배에 오르자 마자 즉시 바람이 그친 것은 두번째 기적이다. '수고', '고통', '피곤'을 의미하는 '코포스'(*)에서 나온 '그치다'라고 하는 동사는 바람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그 고통 속에서 헤어나와 잠잠케 되고 평온함을 찾은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막 4:41은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라고 표현하였다. 정녕 예수는 모든 만물을 지배하시는 만유의 주이신 동시에 모든 혼란과 두려움을 잠재우시는 질서와 평화의 왕이시다(요 14:27). 그가 거하시는 장소, 그가 머무시는 인격에는 영원한 샬롬만이 있을 것이다.
성 경: [마14:33]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절하며(*, 프로스퀴네오) - 헬라어의 이 말은 제자들이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경배하였다고 하는 말로, 이번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깨달아 알므로써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전적인 신앙 고백(16:16)의 준비가 마련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 이는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칭호에 상당하는 용어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완전한 칭호로 예수를 불렀던 첫번째 경우이다(16:16;26:63;27:40, 43, 54). 물론 이 칭호는 3:17에 나타난 하늘의 성에서 계시된 바 있고, 광야 시험 중 사단도 이 칭호를 사용한 적이 있다(4:3, 6). 또한 예수 자신이 스스로를 '아들'이라 부른 경우도 있다(11:25-27). 실로 예수께서는 하늘과 흑암의 세력과 또한 땅의 무리들 및 자신이 스스로 인정하시는 완전한 구주요 메시야이셨던 것이다(16장 주제 강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 참조).
성 경: [마14:34]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게네사렛에서의 사역]
게네사렛 - 갈릴리 호수 서안(西岸)에 자리잡고 있는 기후가 온화(溫和)할 뿐 아니라 비옥한 평야지대이며 북쪽에는 가버나움이, 남쪽에는 디베랴가 위치해 있다. 한편 게네사렛 사람들이 즉시 예수를 알아보고 그에게 모여 들었다고 하는 사실은 예수의 사역 범위가 얼마나 넓었는가를 말해준다.
성 경: [마14:35]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게네사렛에서의 사역]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 '통지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아포스텔로'(*)는 사자(使者)를 보내어 소식을 전한다고 하는 뜻으로 게네사렛 사람들이 이웃과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찾아 다니며 주님이 그들의 동리에 오신 사실을 가르쳐 주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이는 마침내 예수의 공적인 사역의 범위가 온 유대 전역에까지 미치게 되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성 경: [마14:36]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게네사렛에서의 사역]
옷가에라도 손을 데게 하시기를 - 예수의 신성에 대한 엄청난 소문은 9:20의 혈루증의 여인의 경우와도 같이 그분이 입은 옷을 손으로 대기만 하여도 병을 낫게 한다는 믿음을 갖게 하였다. 따라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으므로 예수께서 한 사람씩 차례로 만져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던 그들은 비록 예수께서 만져주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병자 자신이 그분에게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것이라는 강렬한 믿음을 소유하였던 것 같다.
나음을 얻으니라(*, 디에소데산) - '완전히(*, 디아) 구원을 받다(*, 소조)' 의미로 병자들이 육신의 병에서 고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질병, 즉 죄된 세상의 여러 욕망이 주는 고통 속에서도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이중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