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불교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작]-가작
수 국 / 정창영
추녀 끝 풀어 헤쳐 달아맨 풍경들이
산책을 하다 말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달리며 새벽참부터 절터를 흔들어댄다
일 바쁜 주지스님이 잠시 출타한 사이
늙은 절은 힘에 겨워
한참을 버티다가
마침 들어온 동자승에게 대웅전을 내준다
잠 취한 동자승은 성큼, 절 문턱 내려서고
절 혼자 가을이라
발갛게 취해서
활활 타오르다가 보살님 눈치만 본다
좌르르 쏟아지는 쌀 이는 소리에
잠 깨신 부처님
빙긋이 웃으시며
빈 소매 걷고 내려와 문턱에 턱, 걸터 앉으신다
* [시조 당선 소감]
열병처럼 감기가 왔다. 한참동안 들락거리면서도 감기는 좀체 낫지 않았다. 감기가 몸 안에 머물면서 괴롭힐 때마다 간헐적으로 온 몸이 후들거렸다. 하루종일 묵직한 머리, 아픈 목을 뒤로 한 채 버티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몹시 아프던 새벽 끝, 아직 진짜 아픔을 알기에는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나고 있었다. 시를 알게 된 이후 어둠은 감기처럼 내 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 속에서 온 몸을 휘둘리면서 처음 시 쓰기를 배웠고, 본격적으로 친해지다보니 어느덧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강요하거나 애걸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지 나는 자연스럽게 시를 따라 나서게 된 셈이다.
시는 오늘도 끊임없이 나를 힘들게하고, 때로 좌절하게 만들면서도 어김없이 내 방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린다. 모든 것을 포기한 마지막 순간에 시가 나에게로 왔듯이, 나 역시 언젠가 흔쾌히 웃으면서 그를 떠나보내야 할 것이다. 온몸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감기가 소리없이 빠져나갈 때쯤이면 조금은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이다. 그 끝이 어떻게 마무리 될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인가를 느끼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누군가의 물기어린 시선이거나 행복한 미소이거나 간에 말이다.
이제 조금씩 주변을 돌아보는 연습들을 서서히 해야하리라. 기억 저편에서 아슴아슴하게 다가오던 사랑들이 그러했듯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 적지 않은 도움이 있었다. 늘 믿음으로 묵묵히 지켜보아주는 가족들, 그리고 주위의 우정어린 시선을 기억한다.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한다.
약력 1967년 전주생, 전북대 국어교육과 졸업·전북대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현대시) 현재 전주대 교양학부 객원교수
* [심사평]
불교적 사유 시속에 녹아 / 시조 정형 탈피 파격 돋보여
응모한 작품들에는 응모한 사람들의 정성이 행간에 숨쉬고 있었다. 시를 사랑하고 불심에 가득찬 응모자들의 마음을 행간에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행복이었다. 우열을 가늠하기 힘든 작품들을 두고 고민에 빠졌던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시조에서 정현숙의 ‘11월, 장곡사에 비가 내리네’ 외 4편과 정창영의 ‘수국’외 6편, 시에서 박형수의 ‘佛影寺에서’외 4편, 박성필의 ‘남장사’ 외 5편, 이주렴의 ‘강’외 6편을 마지막까지 읽고 또 읽었다.
정현숙의 시조는 시조시의 정통성을 이은 모범답안적 작품이라 할만했다. 언어의 조탁과 시조가 가진 자수율에 의한 운율의 획득 등에서 나무랄 데가 없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모범답안이 항용 그렇듯이 파격적인 창의성과 무한한 상상력에로 향한 아쉬움과 갈증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장창영의 응모한 시조들은 수준이 모두 고른 편이었고, 무엇보다 시조의 정통적 틀을 벗어나려는 파격과 개성이 돋보였다. 현대시조시가 추구하는 바람직한 행로를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예사롭지 않은 행갈이 방법과 언어의 조탁에서 현대시조가 고시조와 왜 다른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창영의 시조를 가작으로 선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형수의 시들은 단아했다. 그 단아함은 언어의 절제를 통한 조사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응모한 시편들의 수준이 고르지 않은 것은 흠이었다. 박성필의 시는 화려한 시적 수사와 자유분방한 시적 상상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는 기성시인 누군가의 시에서 읽었던 분위기가 자꾸만 느껴졌다.
이주렴의 시는 도도한 흐름으로 이어지는 강한 개성을 가진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언어의 절제도 생각하는 것이 이 시인에게는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강’은 불교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불교적 사유를 시 속에 용해시킨 작품이다. 윤회와 인연 그리고 부처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이만큼 승화시켜 놓은 것은 이주렴의 시적 역량이 일정한 수준이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면서 이 시인이 더욱 분발하기를 기대한다.
김 선 학(문학평론가·동국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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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매일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남문산역에서 / 손영희
기차는 아직도 이곳에 닿지 않았다 해묵은 선로만 시린 발을 끌고 와
창문을 기웃거리고
나는 짐처럼 놓여 있다
갈 곳 잃은 전화번호와 헐벗은 상념들
한 줌의 값싼 희망 주머니에 구겨 넣은 채
바람의 갈피 속에서
들썩이는 잠이여
나를 깨우는 건 언제나 냉혹한 시간
완강한 어둠을 덧문 밖에 밀쳐 놓아도
저만치 유배된 내일이
복병처럼
달려든다
* [시조 당선소감]
그 숲은 물기 없는 마른 스폰지 같았다. 조형의 나무들이 바람도 없이 흔들리고 빗물도 잘 스며들지 않던 푸석한 내 눈물샘. 언제부터였을까. 읽히지 않는 기억들 이 굳게 닫혀진 문 뒤에서 서성이고 발이 짧은 아버지는 읽다만 소설책들을 불사 르고 있었다.
타다만 글귀들이 내 의식 언저리에서 아우성치고 꼬인 물줄기는 풀릴 줄 몰랐다. 너무 늦은 나이에 혼신의 힘으로 붙잡으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항상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나는 너무 열등한 자아에 시달렸다.
들썩이는 잠 속에 아버지는 늘 등만 보였다. 나의 오래된 미래 샹그리라(히말라야 에 있다고 전하는 이상향의 나라), 미지의 거처에 이제 발을 들여 놓으려한다. 늘 서툴러, 무릎에 피가 배일 때도 있겠지만 내 안의 상처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낼 때마다 꼬인 물줄기는 시원하게 뚫릴 것이다.
시조라는 정형의 틀 속에서 자유한 시정신을 넋두리가 아닌 진솔한 삶의 풍경으로 풀어놓고 싶다. 그 문을 손수 열어주신 매일신문사와 심사위원 선생님께 진심으 로 감사드린다.
늘 격려를 아끼지 않던 석필 문우들과 교수님, 화요회원들, 박종현 선생님께 감사 드린다. 나에게 글방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한 남편과 연이 연선이에게 사랑을 보내 며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약력 △1955년 충북 청주 출생 △창신대 문예창작과 졸업 △경남문학 수필 신인 상
* [시조 심사평]
문학은 시대를 앞서가는 정신의 소산이다. 우리가 신춘문예에서 기성문단을 흔드 는 정서적 충격을 기대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런 가운데 ‘푸른 곰팡이’.‘ 남문산역에서’.‘못물을 보며’.‘어항 속의 바다’ 같은 작품들을 만나면 흐린 안경알을 닦지 않을 수 없다.
저마다 개성적인 시각으로 다양한 경험의 세계를 녹여낸 작품들을 앞에 놓고 전체 를 한눈에 다잡아 읽기도 하고, 개별 작품끼리 맞씨름을 붙여 보기도 했다. 윤채 영씨의 ‘못물을 보며’는 미묘한 정서의 흐름을 안정된 호흡으로 풀어내고 있으 나, 신인다운 패기가 부족한게 흠이다.
‘어항 속의 바다’를 쓴 이우식씨의 경우는 선이 굵고 새로움에 대한 의욕이 넘 치는 반면, 관념적 어휘에 이미지의 반전 효과가 희석된 느낌이다. 김경미씨는 ‘ 푸른 곰팡이’를 통해 강한 자의식과 점액질의 서정성을 보여준다. 자연스러운 가 락의 운용을 체현한다면 한층 깊고 푸른 인식의 세계에 가 닿을 것으로 본다.
고심 끝에 손영희씨의 ‘남문산역에서’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이 작품은 시상의 전개가 역동적이면서도 도입부의 신선한 감동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또한 그것 이 완강한 어둠을 밀치는 힘과 치열한 정신의 깊이를 동반하고 있다.
외면할 수 없는 분단 현실 속에서 눈부신 자성과 생존의 의미를 일깨워 가는 것이 다 . 어디든 미답의 세계는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시조의 새로운 길을 열어 가기를 당부한다.
박기섭(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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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농민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판전(版殿) 앞에서 / 손태원
어슬렁 뒷짐 지고 숲속 길로 접어든다
가다가 걸음 멈추고 가쁜 숨결 고르는 듯
병중작 칠십일과(病中作七十一果)여! 맥박소리 들린다.
흙마당 쓸다 남은 비질 자국 보이는 듯
새하얀 아가손이 쓰다 멈춘 낙서인 듯
다가온 계곡 물소리 문득 끊긴 저 정적.
꽃도 잎도 다 시들어 빈 대궁만 남은 가을
얼마나 깊었던가 잠겨버린 하늘 위로
동동 뜬 낙관이 하나 늦잠자리 앉아 있다.
* 판전(板殿) : 추사 김정희 선생이 칠십일세 와병중 임종 3일 전에 썼다고 전해오는 봉은사에 있는 마지막 현판 글씨
* 병중작 칠십일과(病中作七十一果) : 판전의 낙관 글씨
* [시조 당선소감]
당선 통보를 받고, 정말 꿈인 듯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선 소감을 쓰면서도 혹시 꿈에서 깨어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당선 소감과 사진을 보냈느냐는 기자님의 확인전화가 오는 것을 보니 정녕 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먼저 소중한 등단의 기회를 마련해주신 농민신문 신춘문예 관계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스승이신 정완영 선생님과 박영식 선생님,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큰절을 올립니다.
신춘문예에 응모하려고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너무나 부족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마감 하루 전날까지 망설였는데, 원고를 빼앗아 대신 보내준 친구 K 시인도 잊지 못할 은인입니다. 그리고 못난 자식의 뜨거운 시심을 꺾지 않고 자연인으로 살게 해주신 돌아가신 부모님의 맑은 피가 흘러 더욱 행복합니다.
반백살, 늦은 나이에 얻은 영광인 만큼 ‘묵향 짙은 시, 시 향기 짙은 서예’에 더욱 정진하여 모든 분들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늘 보살펴주시고 기대해주시는 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손 태 원〈울산시 남구 신정동〉
* [시조 심사평]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김차순의 〈바늘쌈 보며〉, 장기숙의 〈꿈꾸는 침목〉, 손태원의 〈판전(板殿) 앞에서〉, 황성진의 〈칠판을 지우며〉 등 네 작품이었다.
이 가운데 〈바늘쌈 보며〉는 깨끗한 시상에 호감이 갔으나 시조의 형식에 많이 어긋나 있어 1차로 당선권에서 멀어졌고, 나머지 세작품이 끝까지 당선을 놓고 겨루게 되었다. 〈꿈꾸는 침목〉과 〈칠판을 지우며〉는 당선작으로 뽑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시를 다루는 솜씨가 능숙했다. 그러나 응모된 작품이 전체적으로 고르지 않은 것이 흠이었다.
이에 반해 〈판전 앞에서〉의 경우 손태원씨가 함께 응모한 〈운문사 하루〉〈토종에 대하여〉 역시 그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완성도 면에서 뛰어났다. 이 가운데에서도 추사 김정희 선생이 71세인 임종 3일 전에 썼다는 서울 봉은사 현판 글씨를 소재로 한 당선작인 〈판전 앞에서〉의 명징한 이미지와 높은 서정성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시인 탄생에 축하를 보내는 한편, 비록 당선은 되지 못했지만 장기숙씨와 황성진씨에게도 그 가능성에 격려를 보낸다.
박시교, 유재영(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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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조선일보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봄의 계단 / 이송희
반쯤 열린 문틈에서 들어오는 햇살을 두꺼운 침묵으로도 밀어내지 못하고 푸석한 낯빛 하나로 거리를 나선다
반만 남은 노을이 감싸 안은 거리는 가슴까지 차 오른 꿈, 푸르게 출렁이고 그 속에 섞이지 못한 삼각 파도의 내가 있다
무심코 올려다 본 유년의 하늘은 골 패인 기억들만 촘촘이 찍어낸다 시간의 고삐를 풀어 얼마를 더 가야할까?
날카로운 바람이 붉은 알들을 쏟아내면 부스스 일어나는 어린 잎새 한 줄기 하늘가 꽃물을 토해낸 아침이 오고 있다
◆ [당선소감]“살아있는 삶의 언어 엮어낼 것”
12월의 어느 날, 거리를 가득 메운 수많은 발걸음들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추위에 떨며 싸늘하게 웃고 있는 가로수들, 낡은 콘크리트 벽면에 아무렇게나 그려진 낙서 자국들. 그 회색의 흔적을 따라 가끔씩 걷는 것은 나에게 크고 작은 위안이었다.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아도 늘 어떠한 의미가 되어 몽글몽글 부풀어 오르는 삶의 모습 속에서 때로는 박힌 못을 빼내고, 또 한 줌 빛을 발견했었다. 그러다가 두꺼워진 어둠 속에서 길을 잃어 헤맬 때면, 햇살이 올라올 즈음까지 기다렸다 부스스 일어나곤 했다.
이제는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빛줄기에 나를 꼿꼿이 세우고, 안개 낀 공간에서 살아 숨쉬는 삶의 언어들을 한 올 한 올 엮어내고 싶다. 미처 의미가 되지 못한 언어 조각들을 가슴으로 보듬고 싶다.
부족한 작품을 기꺼이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따뜻한 가르침으로 나에게 시조 창작의 문을 열어주신 이지엽 선생님과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켜봐주신 ‘우리시 문학 동인’ 에게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아낌없는 격려를 해준 나의 가족들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나무는 잎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때 가장 행복해 보인다. 시인은 가슴 속에 시(詩)를 키우며 향기롭게 뻗어나갈 때 비로소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것. 그 초록 희망으로 힘껏 내달리고 싶다. 또 다른 세계가 내게 문을 열 때까지…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으로 보답할 것이다. (이송희)
▲1976년 광주 출생 ▲2002년 월드컵 기념 시조 백일장 대상 ▲전남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재학중
◆ [심사평]‘인공 조미료’없는 그윽한 멋 우려내
올해 시조부문 당선작으로 이송희씨의 ‘봄의 계단’을 선정하였다. 흔히 시조는 맺고 푸는 시가형식이라고 말한다. “맺되 옹이를 지우고, 풀되 굽이치는 여울을 둔다”고 한다. 당선작은 그런 시조의 형식미학과 구문법을 오롯하게 갖추고 있다.
응모작 수준이 상향 평준화를 이루어 그 어느 해보다 각축이 치열했던 시조부문. 1차로 골라낸 ‘가을풍경’(이창호), ‘가을은 해탈을 꿈꾼다’(김경택), ‘가을 문턱에서’(김기철), 그리고 ‘봄의 계단’ 등 네 편을 놓고 당락을 가리게 되었다.
‘가을풍경'은 주제가 구체적으로 소화되지 않은 채 생경하게 겉돌고 있다. 소화불량의 주제는 결국 ‘백화점식 언어의 나열’과 우편엽서 같이 ‘화려한 풍광 묘사’에 치우치고 만 것이다. ‘가을은 해탈을 꿈꾼다’ 역시 상징과 은유가 때로는 겉돌며, 발상법이 기발하지만 그 재치가 경이로움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최근 문학작품 소재로 너무 많이 다루어 이제 식상(食傷)할 대로 식상해버린 특정 종교 주제를 다룬 점도 이 작품의 ‘간택’을 망설이게 하였다. ‘가을 문턱에서’는 완성도 높은 단아한 시조다. 그러나 ‘사유의 깊이가 따르지 않은 단순한 기교’에 의탁, 시적 긴장미를 연출해내지 못했다.
당선작 ‘봄의 계단’은 인공 조미료를 넣은 흔적이 없다. ‘관조의 총혜’를 읽을 수 있는 당선작은 조미료를 쓰지 않아 오히려 더 깊고 그윽한 맛을 우려낸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새로운 시조문맥을 일구어나갈 재목으로 성장하기 바란다. (윤금초·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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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당선작]
촉지도(觸地圖)를 읽다. / 유종인
휠체어 리프트가 선반처럼 올라간 뒤
역 계단 손잡이를 가만히 잡아본다
사마귀 그점자들이 철판 위에 돋아있다
사라진 시신경을 손 끝에 모은 사람들,
입동(立冬) 근처 허공 중엔 첫눈마저 들끓어서
사라진 하늘의 깊이를 맨얼굴로 읽고 있다
귀청이 찢어지듯 하행선 열차소리,
가슴 저 밑바닥에 깔려있는 기억의 레일
누군가 밟고 오려고 귓볼이 자꾸 붉어진다
나무는 죽을 때까지 땅 속을 더듬어가고
쉼없이 꺾이는 길을 허방처럼 담은 세상,
죄 앞에 눈 못 뜬 날을 철필(鐵筆)로나 적어 볼까
내안에 읽지 못한 요철(凹凸)덩어리 하나 있어
눈귀가 밝던 나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몸,
어머니 무덤마저도 통점(痛點)의 지도(地圖)였다.
* [당선소감]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시각표를 보았다. 가고자 하는 곳의 시간대를 보니 방금 전에 버스가 떠난 것을 알았다. 배차 간격만큼의 시간을 고스란히 기다려야 했다. 어디에다가도 쉽게 풀어버릴 수 없는 허허로운 시간이 정류장에 머물고 있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기다림이 그렇게 시작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먼 길을 가기에 앞서 내 앞에 고여 있는 시간의 물을 들여다보면 거기에 내 모습이 비춰지는 게 아닐까. 물 거울을 들여다보는 말없는 계절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거기 비친 잎새 무성하던 버즘나무는 갈퀴 머리를 하고 이즈음 제자리서 헤매는 미친 여인네 같다. 제 안에 품은 헤매임이 너무나 많은 가지의 길을 키웠던 것일까. 가을이 오기 전 그 가지들은 가뭇없이 베어져 파란 트럭의 짐칸 가득 실려 어디론가 실려갔다. 어쩌면 내 어지러운 모색이 누군가에게 번다(繁多)한 치장쯤으로 여겨질 때, 나는 그 어지러움 속에서 부드러운 칼 하나 뽑고 싶었다.
차창 밖으로 겨울빛이 빈 들녘에 쏟아 부어지고 있었다. 저 빛들은 다시 봄볕으로 바뀌고 뙤약볕이 되었다가 서늘해진 가을볕으로 멀어질 것이다. 그 멀어짐이 가까워지는 것임을 아는 순간, 겨울빛은 조금 눈물겨울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나에게서 멀어짐으로써 진정 나에게 가까워진다는 것을 나는 소외의 장르가 아닌 시조의 문맥(文脈) 속에 찾고 싶었다. 단순히 오래되고 낡은 것만이 아닌 새로움을 그 안에서 캐어낼 수는 없는 것일까. 광의(廣義)의 시에 있어서의 시조는 그 중핵(中核)임을 증거하게 해주신 심사위원님과 말없이 마음을 더하여 주신 많은 주위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시에 대한 외도(外道)로서가 아니라 시에 대한 본도(本道)로써 시조의 품격을 감히 생각해 본다. 미약함으로 떠나지만 뜨거움은 늘 가슴에 묻은 채 매진하라고 겨울 숲은 무수한 회초리들로 서 있다. 참 맑은 가난을 한 줌 가지고서 말이다.
유종인
△1968년 인천 출생 △1992년 인천전문대학 도서관학과 졸업 △1996년 계간 '문예중앙' 시부문 당선
* [심사평] 촉지도(觸地圖)를 읽다. / 이우걸(시조시인)
신춘문예작품들이 가져야 할 미덕은 무엇일까? 아니 우리는 신년호 혹은 그 근일 사이로 만나게 되는 작품들이 어떤 특징을 보여주길 바라고 있을까? 독자에 따라 그 주문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선자는 이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몇 가지 체크리스트를 가지고 작품을 대하곤 한다. 그 첫째는 젊은 시조이길 바란다. 두 번째로는 개성적인 시조이길 바란다. 세 번째로는 무난한 완제품보다는 흠이 보여도 가능성이 많은 작품을 휠씬 더 바란다.
많은 응모작 가운데 이런 관점에서 눈에 띈 작품들은 장기숙, 한경정, 김종길, 유종인 시인의 것이었다. 장기숙은 최근 우리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통일과 관련된 작품들을, 또는 젖은 농촌의 풍경을 균형 잡힌 어조로 노래했다. 한경정은 사소한 사물에도 새로운 발견을 하려는 성실한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두 시인의 작품을 먼저 선외로 가려내었다. 장기숙의 경우 지나치게 안정되어 있고 작품의 폭이 좁다는 생각에서, 한경정의 경우 시어들이 다소 부정확하고 공소한 시구들이 많이 눈에 띈다는 이유였다. 이러한 지적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평가에서의 견해라고 얘기할 수 있다. 그 만큼 위 시인들의 장점 또한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김종길의 7편 응모작중 '붕어빵'과 유종인의 5편 응모작 중 '촉지도를 읽다'를 앞에 놓고 고심하였다. 김종길의 경우 다양한 소재를 다룬 모든 응모작품의 수준이 고를 뿐 아니라 특히 위의 작품은 대상을 철저히 묘사하면서 궁핍한 삶의 풍경을 적당한 거리에서 환기시켜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종길의 시조들이 강인한 개성을 독자들에게 각인 시키기엔 무언가가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유종인의 '촉지도를 읽다'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그의 시조들은 호방하고 섬세하며 날카로웠다. 특히 당선작의 경우 그 소재가 특이했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인식이 피상적으로 끝났다면 흔히 신춘문예작품에서 등장하는 소재주의의 혐의를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섯째 수가 일구어낸 반성적 사유는 이 시조의 시적 성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성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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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경향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꿈꾸는 門 / 선안영
어둡기 전에 불을 켜야 조금 덜 쓸쓸하다는
아버지의 말씀 따라 촛불을 밝힌다.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
편지 속에 추운 문자들
흔들리는 불꽃 따라 바람벽이 출렁이고
마른 잎새의 귀를 달고… 웃고 있던… 눈사람
幼年이 긴 꼬리를 감고
소리 없이 굴러온다
우리 잠시 지나왔던 길들 다시 포개져
아버지, 지치도록 걸어온 불의 몸을
저녁 내 그림자가 껴안고
까무룩 졸고 있다.
뜨거운 세상 향해 심지를 밀어 올리는
그 열림과 닫힘의 門을 지나, 침묵도 지나
헐렁한 바늘귀를 건너
눈꽃들이 피어난다.
*[시조 당선소감]이 환한 꽃자리가 부끄럽습니다
나는 내 울음소리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언제부터 속으로 우는 법을 깨달았을까요. 크게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너무 일찍 늙은 나에게 오늘도 청각장애 아버지의 편지가 왔습니다. 그 쓸쓸한 마음을 다 따라가지 못하는 글들이 세상을 건너게 했습니다. 징검다리 건너듯 또박또박 걷게 했습니다. 빗나가지 못하게 나를 붙들었습니다. 아니, 나를 겁먹게 했고 자신 안에 갇혀 허약하게 살게 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가고자 했던 길로 한번도 가지 못하고 캄캄해진 몸과 마음을 가지고 일몰로 가고 있을 때 소식이 빛으로 왔습니다. 얼마나 낯설었는지… 빛에 버려진 필름처럼 며칠동안 하얗게 아무 기억이 없었습니다.
이 환한 꽃자리가 부끄럽습니다. 내게 어울리지 않은 자리이며 욕심 내지 않았던 자리입니다. 그저 끝모를 사다리를 오르는 것처럼 초록잎으로 피고 지는 날들이 행복했습니다. 한 잎의 초록잎으로 다시 내려설 수만 있다면 내려서고 싶습니다. 꽃을 떨구고서, 나를 지우고서, 열매를 매달아 키우는 일. 잘 여문 씨앗 한 알 남기는 일을 내가 해낼 수 있을지… 무척 떨리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고, 간절히 매달리고 싶은 일이 있어 가슴 설렙니다.
내 삶의 아픈 뼈마디 사이, 말랑한 연골이 차오르는 활력과 기쁨을 주신 경향신문사와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말없이 곁에서 지켜봐 준 가족들과 문우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시조 심사평]아주 능숙한 솜씨로 일상 그려
거듭된 토의 끝에 최종심에 올린 작품은 김옥희의 ‘실상사에서 만난다’, 임정집의 ‘판화 작업’, 장기숙의 ‘두 여중생의 죽음, 그 뒤’, 손영희의 ‘여름, 동강’, 선안영의 ‘꿈꾸는 문(門)’ 등 다섯 편이었다.
이중 ‘실상사에서 만난다’는 시는 엮어가는 능숙한 솜씨에 비해 적절한 시어의 선택이 따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고, ‘판화 작업’은 새로운 시각과 당찬 목소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갈무리 능력이 못미쳤다. 또 시사문제를 다룬 ‘두 여중생의 죽음, 그 뒤’는 의욕이 너무 앞서서 직설적이고 생경한 표현들이 군데군데 드러난 것이 결정적인 흠으로 지적되었다. 마지막까지 거론되었던 ‘여름, 동강’은 첫 수 종장 결구법을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연시조라 할지라도 한 수 한 수의 결구(結句)는 바로 시조의 기본 보법이란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꿈꾸는 문’은 화자만의 이야기를 시로 엮어가는 데 아주 능숙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 또는 추억이 시로서 다시 태어났을 때 그 아름다움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이미 터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한 믿음을 뒷받침해 준 것은 함께 투고한 작품 ‘SELECTION’ 연작이었다. 연작 여섯 편 중에서 한 편의 단수만을 당선작으로 뽑아도 결코 작품으로서 손색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아주 뛰어났다. 당선작 ‘꿈꾸는 문’으로 2003년 새해의 밝은 문을 연 선안영씨에게 뜨거운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김제현·박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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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부산일보신춘문예 시조당선작]
노을 / 반영호
저
피 토하며 꺼져 가는
운명을 보라.
애절함이 분노처럼 끓어 넘치는
차라리 황홀하고도
아름다운
장엄한 이별
저토록
처절한 아픔을 어이하리
저토록
처절한 사랑을 어이하리
해질 녘
붉은 물결에 꽃 그늘로 지는 바다.
* [시조 당선소감]
불혹의 마루에서 늠름하게
당선 소식을 접하고 아버님과 장인의 산소를 찾았다. 남에게 터놓고 기쁨을 전하기가,오히려 멋쩍고 또한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생전에 자상하시던 두 분을 뵈오니 들뜬 마음이 다소 가라앉는다. 한겨울인데도 묘소 앞 갈대들은 흐드러지게 피어서 다투어 나의 이 벅찬 기쁨을 축하해주고 있다. 한창 꽃피울 때,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다가 다들 시들어 말라비틀어진 뒤,죽어서도 죽지 않고 맞아주는 갈대. 돌아가신 후에도 기꺼이 따뜻이 반겨주시는 두 어른. 난 그 앞에서 울다가 웃다가 소리치다가,이대로 돌이 되어 산이 되어를 연발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황금기가 불혹이라 했다. 내 나이도 어느덧 꽉 찬 불혹의 서산마루에 닿고 있다. 해마다 이맘 때만 되면 좌절의 눈물로 원고지를 불살랐었던 암울한 기억들.
그래도 가슴에서 용솟음치는 뭉클한 그 무엇 때문에 언어와 싸웠던 불멸의 하얀 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었으리라. 시를 쓴답시고 어설픈 객기에 들뜬 마음으로 산과 강을 누볐었다. 정녕코 샘물처럼 맑은 영롱한 사리 같은 한 줄 언어를 줍기 위하여….
그동안 옆에서 용기를 주셨던 반숙자 선생님,증재록 선생님과 문우 여러분과 기쁨을 나누고 싶고,말없이 묵묵하게 지켜보며 뒷바라지를 해준 아내와 아들 국모에게 영광을 돌린다. 또한 졸작을 선해주신 장순하 최승범 두 심사위원님과 부산일보에 감사드린다.
不自屈不自高. 서산대사의 말이다. 스스로 비굴하지도 말고,스스로 교만하지도 말라는 뜻일 게다. 불혹의 마루에 늠름하게 떳떳이 서서 문학의 길을 가고 싶다. 결코 교만하지 않으며….
◇약력:55년 충북 음성 출생. 96년 '문예한국' 시부문 신인상. 도서출판 대광 대표.
* [시조 심사평]
자유시적 수법 시조 영역 넓혀
응모 편수가 예년에 비해 30%쯤 증가했다. 그새 꾸준히 전개해 온 시조 보급 운동이 열매를 맺어 가는 증거로 경사스러운 일이다.
근래에는 시조 정형에 아주 어긋나는 작품,단순한 글자 맞추기에 급급한 작품,고시조 같은 공소한 관념적 작품들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 대신에 생경한 언어들을 그럴싸하게 꿰맞추어 이미지에 통일성과 명징성을 잃어서 결국 무엇을 표현하려 한 것인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작품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일차적으로 이복순의 '겨울 산',정양숙의 '11월의 나무',박홍재의 '새벽 시장',반영호의 '노을' 등 네 편이 뽑혔다. 모두 수준작으로 수년 전만 해도 당선권에 들 만한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거의가 근래 당선작들의 경향에 따라가는 듯한 인상이 깊었다. 다소 아쉬운 구석이 있더라도 자기만의 목소리를 우리는 기대한다.
그 중에서 반영호의 '노을'은 해설적 형상화적 일반적 시조 작법을 완전히 배제하고 순수한 이미지만으로 해변의 저녁노을을 표현했다. 중장의 사설도 퍽 간결하게 처리되어 부담스럽지가 않다.
이런 자유시적 수법이 시조의 표현 영토를 넓히는 데 일조가 되리라고 기대하면서도 시조는 정형만이 아닌 시조 특유의 분위기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맛과 멋이 유지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함께 생각해 볼 대목이기도 하다.
(시조시인 장순하·최승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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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대한매일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산에들다 / 이안빈
세월 밖 먹 울음을
안으로 되 재우며
가슴속 묻어둔 불씨
봄 풀처럼 돋아나와
돌부처 앉은 자리에
꽃들을 피워낸다
일주문 주련글씨
일체가 없는 것이라고
말씀이 귀(耳)로 남아
생각은 되돌아 온다
눈물도 영글다 보면
사리되어 굳는가
한 생을 종이 접듯
세월을 비워두고 살라지만
뜨신 피 무지개 되어
빈 하늘에 부표로 뜬다
마음이 산에 가 닿으면
그리움도 헹궈질 것을
* [당선소감]
세상의 색깔은 빛과 어둠이다.나는 지금 깊은 터널의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한 걸음씩 옮기고 있다.
대학 초년시절 선배와 동료들이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이제는 육군의 신병으로서 겪어 나가는 값진 경험들이 빛을 향해 나가는 징검다리가 되고 있다.
언젠가는 빛과 어둠이 둘이 아닌 하나로 어우러져 이글거리는 태양으로 온 천하를 환히 비추는 그런 날이 있을 터이다.
수없이 많은 고뇌와 삶에 대한 물음들이,거대한 짐승의 껍질 같은 소각로에다 나의 창작노트와 수첩을 연기로 날려버린 이후에도 계속 자라나고 있다.
나에게 가장 큰 스승은 아버지와 어머니셨다.오늘의 이 기쁨과 영광을 두 분께 송두리째 안겨드리고 싶다.
시인이 될 때 등 두드리며 문을 열어주신 설악산의 조오현 은사님과 시조시인으로 이끌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머지않은 날에 해가 되고,달이 되어 환한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약력 81년 서울생
원광대 문창과 2년(휴학중)
육군 현역 복무중
* [심사평]
올해 시조 부문 당선작은 이안빈씨의 ‘산에 들다’로 결정하였다.예년에 비해 작품 응모 편수가 엄청 불어났고,작품 수준 역시 그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키가 훌쩍 커버린 것 같았다.최종심에 오른 작품들은 어느 것을 골라도 예년의 당선작 수준을 웃돌 만큼 남다른 개성과 성취를 보여주고 있었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위철)과 ‘부석사 무량수전’(전진환)은 소재의 신선도가 떨어지는 것이었다.유·불·선(儒·佛·仙)을 숭상하는 우리 정서상 불교사상은 높은 가치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지만,어느 작가의 소설 ‘부석사’이후 근자에 불교 소재가 문학작품 주제로 너무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 두 작품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그러므로 ‘참신한 맛’이 덜했다.
‘쐐기풀 옷 한 벌조차’(노영임)는 작품의 짜임새는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연초에 신문지상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신춘문예의 특성상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보다 밝고 진취적 메시지가 돋보이는 것이다.‘우담화’(정평림)는 이른바 옴니버스시조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옴니버스시조(혼작 연형시조)는 내공을 많이 쌓아야 하는 어려움이 뒤따른다.특히 사설시조의 구성 요건인 서사구조,복선(伏線),걸쭉한 입담,웅장한 스케일,극적 줄거리를 엮어내는 가락,갈등구조,풍자정신,말 엮음,휴지(休止),종장의 대반전 효과 등을 고루 갖추어야 하는데 그만 그것을 놓치고 말았다.당선작 ‘산에 들다’는 범상한 소재를 범상하지 않게 요리한 시조솜씨가 색다른 특색으로 다가왔다.사물에 대한 천착과,사물을 바라보는 진지한 태도가 이 신인의 매력으로 보였다.
심사위원 : 이근배·윤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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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광주매일신춘문예 시조당선작]-가작
사랑니
이경숙
겉으로 솟지 않는 이름까지 알 수 있다면…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보이는 입안 저쪽
무언가 캄캄한 뿌리를 건드리고 다닌다
판독기에 X-ray 환하게 내걸린다
간단히 흑백으로 드러나는 뿌리 끝,
무엇을 잡으려는지 암팡지게 휘어 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들쑤신 게 너였구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라는
밑둥치 아득한 데서 외침이 솟구친다
뺨에 멍들이고 두두룩히 부어오른다
여러 날 애먹인 후 빠져 나간 사랑니
그렇다, 안타까울수록 놓는 순간이 아픈 것
* [시조 입상소감] - 이경숙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것들을 담고 있는 동안은 무거우면서도 행복하다. 쭈뼛쭈뼛하던 그것들이 가끔 글로 내게 올 때는 더 그렇다.
시조를 제대로 알고 읽는 것과 모르고 읽는 것의 차이가 있겠다 싶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시조에 대해 이전에 가지고 있던 편견이나 선입견, 또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창작에 몰두하는 요즘의 몇몇 시조시인의 작품들을 접하는 과정에서였다. 그것은 장르를 떠나 내게 기쁨에 이어 힘으로 왔다. 나도 누군가에게로 가서 힘이 되는 그런 시를 쓰고 싶다.
학교의 선생님은 내가 이르고자 하는 곳의 선명한 지도를 가진 분들이었다. 그분들이 보내는 응원과 무언의 질책까지 늘 감사하다.
이제 옳은 것이나 그른 것이나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볼 수 있게 솔직한 거울 하나를 내게 주신 심사위원과 광주매일에 고맙다.
힘들 때, 너무 멀어서 따뜻한 손으로 등을 두드려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내 착한 가족 모두에게 어떤 자리에서도 최선을 다할 것임을 이 자리 빌어 약속한다.
<약력>
1967년 철원 출생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4년
* [시조심사평] - 송선영(시조시인)
먼저 신춘문예에 시조부문을 마련해 준 광주매일에 시조인의 한 사람으로써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광주에서의 신춘문예 시조가 20여년만에 부활되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앞으로 우리 시조문학의 중흥에 크게 기여하리라 생각한다.
이번이 첫회이니 만큼 응모량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적지 않은 작품량을 보였다. 그것도 광주지역에 편재되지 않고 전국 각 지역에서 고루 응모되었으며, 일부 응모자를 제외하면 수준 편차가 별로 크지 않았다.
응모자 중에 박형민(광주), 고명성(합천), 김옥희(진주), 황성진(태안), 박정호(부천), 배덕임(광주), 서영희(광주), 이경숙(광주) 등의 작품이 관심을 끌었고, 그 중에서 서영희씨와 이경숙씨의 작품이 마지막까지 남아 겨뤘다.
서영희씨는 좋은 시조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엿보였으나 종장처리의 어긋남, 동일시어의 반복이 흠이었다. 이경숙씨의 작품들은 고루 안정감을 보여 주었다. 그 중에서도 '사랑니'가 눈길을 끌었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사랑니라는 특별할 것도 없는 사소한 대상을 붙들고 파고들어 생의 깊이를 보여준 그 역량이 믿음을 주었다. 다만 첫째수와 둘째수 종장 첫구의 막연한 처리가 선자로서는 아쉬움이 남고, 나머지 작품들의 경우 신인에게 요구되는 시도성이나 참신성이 다소 미흡하게 느껴져 섭섭하지만 가작으로 올린다. 입선을 축하하며 계속 정진하기를 바란다.
끝으로 동일 장르로 이미 데뷔한 이는 신문사의 방침에 따라 심사에서 제외되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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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경남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눈길에서 / 이재호
쇠죽연기 서슬 퍼런 우윳빛 커튼 너머
잔설이 누더기 되어 걸어가는 산 마을
동그란
하늘 내려와
자갈밭은 은하 되고
얼면서 크는 나목 노란 햇살 새끼치자
비루먹은 거랑가 얼음 칼만 번득인다
작은 새
서툰 노저어
탱자울 넘나들고
타오르는 불면덩이 이엉으로 엮고 엮어
하얀 밤 눈사람이 끼적이며 부른 이름
오늘은
싸락눈 되어
새가슴 파고든다.
* [시조 당선소감]
눈밭에 발자국 찍어가듯 시 쓸 터 - 이재호(경북 영주시 휴천2동 현대아파트 110동 1206호)
밤을 낮 삼아 기적을 울리며 설원을 달리다 돌아온 아침 나절, 멀리서 꿈
결같이 들려오는 당선소식에 동지의 햇살이 내 좁은 베란다에서 연산홍을
피운다.
신춘문예 당선!! 이런 건 문창출신이나 천부적 소질이 있는 분들의 전유
물로 여겼는데 나같이 살며 즐기는 뜰에도 찾아왔으니...
정말 꿈같은 소식에 너무 기뻐 거실에 들어온 햇살처럼 싱글거리며 설거
지하는 아내를 불러 당선작품을 열어놓고 바보처럼 자랑도 하다가 늦깎이
로 들어서는 길이지만 이젠 졸작의 제목처럼 눈길을 걷고 싶다.
아무도 걷지 않은, 바람만 스쳐간 눈밭에 발자국을 찍어가듯 시를 쓰리
라.
나를 지켜보는, 나를 아는 분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는 그런 걸음으로 걷
다가 눈밭이 너무 아름다워 초라한 내 자국이 부끄러울 땐 그 자리에 서서
쪽빛하늘 찍어 바람의 밀어를 그리리라.
이런 좋은 기회를 마련해주신 경남신문 여러분들과 어눌하고 투박한 글
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하면서, 이 영광과 기쁨을
쓸 수 있는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먼저 돌리며 부족해도 묵묵히 지켜 봐준
사랑하는 아내와 은미, 성호, 인호, 그리고 구곡시문학의 박성철교수님과
동인들, 또 나를 아는 모든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 [시조 심사평] 결 바른 새로운 가락 시적 감수성 살려
말하자면 작품이란 하나의 물건이다. 되어 있는 상태가 곧 물건이라면 사
람도 지구도 우주 전체도 크고 작은 물건이며 심지어는 사계절과 같은 기
의 일도 물건이다.
문제는 그것이 어떠한 물건이냐에 따라 그 값이 매겨지게 돼있다.
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가치성 이어서 그러하다.
경남신문 신문문예에 응모된 모든 시도 또한 물건들이었으므로 두 심사위
원은 두루 신중히 살펴봤다.
참으로 그럴듯 하거나 남다른 상태 하나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거 썩 괜찮은, 그야말로 물건다운 것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그것이 다름 어닌 당선작 「눈길에서」다.
두 심사위원이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된 합의점은 천부적인 시적 감수성을
결 바르게 선명히 처리해 낸, 뛰어난 표현 능력이라는 점에서다.
타고난 시적 재능, 여기에다 솜씨 기르기라는 충분한 과정이 없고서는 이
처럼 괄목할 언어의 물건을 성취하기 어려웠으리라.
따라서 「눈길에서」에 구현된 3수의 율격처리는 단순한 겨울 산 마을의
풍경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서정적 자아의 내면 정황이다.
아니게 아니라 으스스한 냉소성이 깔린 3장 연형이며, 결이 바른 새로운
가락이다.
『소죽 연기 서슬 퍼런』에서 부터 『잔설이 누더기 되어 걸어가는 산 마
을』 이라든가, 『얼면서 크는 나목』이라든가, 『비루먹은 거랑가 얼음 칼
만 번득인다』는 구와 장을 통해서 보다 확연히 감지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정황들이 걸맞는 분위기를 동시에 자아내어 3수 연형이 되
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 현실중에서도 으스스한 겨울 산골마을의 현실을 서정
적 자아의 내면 풍경으로 가시화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겐 가락의 판화로 온다.
놓치기 아까운 두 사람의 물건이 더 있었다.
「연을 날리며」와 「연적을 비우며」였다. 둘다 함께 곁들여 보낸 2편씩
들과 연계시켜 봤을 때 차이가 남으로써 아직은 아니고 좀더 절차탁마해야
한다는 판단이 나와 도로 내려 놓았다.
다른 기회를 위해 분발하기를.
■심사위원=서벌(한국시조시인협회장·시조시인) 김남환(한국문인협회 시
조분과회장·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