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에의 첫 출발, 귀일중학교
주경야독으로 제주상고를 졸업한 나로서는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에 야간부 같은반에서 공부하던 고향 선배로 金聖律(무선국 서무과장), 趙昌元(무선국 근무), 高鍾健(관보취급소 근무), 李榮根(경찰서 근무), 나를 합하여 5명이었는데 이 중에서 4명이 제주대학에 처음으로 인가되어 모집하는 상학과에 모두 지원하였다.
상학과 모집 정원이 40명이었는데 응시자는 84명이었다. 다른과는 겨우 정원에 도달하거나 미달되는 과도 있었으나 상학과는 처음으로 생겼기 때문이다.
응시를 하고 나서는 은근히 합격 여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걱정하던 끝에 제주대학 교수이면서 제주상고에 강사로 출강하는 高湛龍(후일 국회의원이 되었음) 선생님 댁을 방문하였다. 인사를 드리고 나서 제주대학 입학시험에 응시를 하였으나 경쟁율이 2:1이어서 자신이 없으므로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선생님께서는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얼굴을 못 들 정도로 꾸지람을 하는 것이다.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러한 약한 의지를 가지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만약 떨어졌으면 새해에 들어가야 하며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남을 찾아 다닐 것이 아니라 좀 더 열심히 공부를 하라"고 꾸지람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얼굴을 못들고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으나 속으로는 집에 찾아온 손님을 이렇게 푸대접할 수가 있는가?' 하고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꾸지람을 들으면서 크게 반성을 하게 되었다. 이런 문제로 선생님 댁을 찾아 다닌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뉘우치게 되었다.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 보니까 떳떳하게 합격을 했는데 응시자의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마음 조인 생각을 해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입학의 등록은 부모님과 형님들이 도와 주신 덕택으로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부모님께서 등록금을 보태 주시면서 이것이 마지막 도움이므로 다음부터는 기대하지 말라는 엄중한 말씀을 하셨다.
대학에 입학하여 1년 동안은 나름대로 열심히 학교에 다닐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주경야독을 하면서 학비는 스스로 해결하고 부모님이나 형님들이 보태주는 돈은 한푼도 쓰지않고 저축을 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년이 지나자 그동안 저축 해둔 돈이 거의 바닥이 났으므로 이제야 말로 큰일이 났다. 휴학을 하고 군에 입대를 할것이냐 아니면 취직을 해서 학비를 보충해 가면서 학업을 계속할 것이냐' 의 두 가지 갈림길에서 고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리저리 궁리 끝에 학교생활을 계속할 것인지의 여부는 제쳐 놓고 취직을 하기로 결심하고는 이력서를 여러 통 쓰고 다니며 일자리를 찾아 다녔다.
북제주군 애월면 하귀리에 高完泉씨가 설립한 사립중학교인 귀일중학교가 있었는데 이 학교의 康始旭 교감선생님의 배려로 우선 시간 강사로 출강하기로 언약을 받았다.
과목 배정에 있어서 영어 과목을 맡아 달라는 것이다. 솔직히 내 영어 실력으로는 학생들 앞에서 자신 있는 수업을 할 수 없으므로 사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면 여러 과목을 합하여 1주일에 24시간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영어를 제외한 다른 과목은 어떠한 과목이라도 좋으니 과목을 조절해 달라고 간청한 끝에 공민, 한문, 농업, 서양사의 4개 과목으로 1주일에 24시간 배당 받고 그 이튿날부터 출강을 하였다. 이것이 교육계로의 첫 출발이었으며 대학 2학년 2학기 때의 일이다.
귀일중학교는 제주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지만 대학에서 강의도 받아야 하는 형편이므로 대학에서 전공과목이 없는 날로 시간표 조절을 부탁드리고 제주시와 하귀 사이를 쉴새 없이 드나 들었다. 이 때 처음으로 받은 강사 수당이 8,000원으로 기억을 하며 학생들 앞에 서려고 하니까 정장을 해야 하므로 월부로 양복 한벌을 18,000원을 주고 맞추어 입었으니 양복 한 벌과 두달 월급이 같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러 과목을 맡고 보니 내일 가르쳐야 할 것을 전날밤에 교재연구를 하는 등 늘 시간에 쫓기며 살게 되었고 과로로 코피를 자주 흘리게 되었다.
한 학기가 지나 새 학년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교과 배당을 받게 되었다. 나는 학생 때부터 수학에 취미가 있었으므로 수학으로 배당을 해 주도록 교무선생님께 부탁을 해 두었다. 그 결과 3학년 수학과 과학을 맡게 되었다. 과학 교과의 물상 부분은 수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교과이므로 교재 연구를 해가며 가르칠 수 있었고 생물 부분은 지난 해에 농업을 가르치면서 관련이 많은 내용들이어서 큰 부담 없이 수업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재단에서 전임강사로 발령을 해 주었고 급여도 인상을 해 주어서 학비 조달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1인 2역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관계로 대학에서 강의를 받는데 지장이 많아 좋은 학점을 얻지 못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고향의 부모님께서는 중학교 선생으로 취직을 했으니까 가족을 데려다가 살림을 하라는 성화도 있었고 나 또한 그동안 가족을 너무 소흘히 하여 돌보지 못한 책임이 있어서 하귀리 붉은질이라는 곳에 새 살림을 차린 것이 결혼한 지 4년만이었다. 군항동(지금의 동귀리)의 바다가 기름져서 집사람은 미역 따기, 소라 캐기, 전복 따기 등 잠녀(해녀) 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노력한 결과 둘이서 객지 생활을 하는데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이 때 한가지 걱정거리가 생겼다. 집사람이 차를 타거나 물을 길러 갔다가 발만 헛디뎌도 유산을 하여 자주 몸져 누워야 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다 보니까 이제는 습관성 유산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하귀에서 고산까지 차를 타지 아니하고 둘이서 보행으로 두번이나 왕복을 하였다. 이런 정성이 헛되지 아니하여 결혼한 지 5년만에 첫 애기를 낳은 것이 큰 딸 玉姬이다.
귀일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주로 외도, 동귀, 하귀, 상귀, 수산, 광령, 금덕, 장전, 고성, 기타 지역의 학생들이었는데 시간만 나면 가정방문을 하면서 학생과 교사 사이를 돈독히 하는데 힘을 썼다. 산간부락에 가정방문을 갔을 때는 탱유자를 선물로 받고 오기도 하였다.
귀일중학교에 재직한 2년 반 사이에 최광식 교장선생님, 홍문중 교장선생님, 강시욱 교장선생님 서리,오승진 교장선생님을 모셨으니 거의 학기마다 교장선생님이 바뀐 셈이다.
이 학교에 재직하면서 틈이 나는대로 대학에 나가 강의를 들으며 학점을 이수한 결과 어렵게나마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