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터와 사람을 함께 치유하는 '마을 만들기'
정석(서울시정개발연구원 도시설계연구팀장)
삶터가 몸살을 앓고 있다. 아니, 몸살 정도가 아니라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중병을 앓고 있다. 오존층 파괴와 같은 지구차원의 병에서부터 국토와 도시, 동네, 거리, 개개인의 집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삶터가 몹쓸 병을 앓고 있다.
병을 앓고 있는 것은 삶터뿐만이 아니다. 병든 삶터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도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 더욱 문제인 것은 병든 우리들의 마음을 보지 못하는 데 있다. 병을 알아챌 때 병은 더 이상 무서울 게 없겠지만, 자각하지 못할 때 암세포처럼 커져 우리를 망가트릴는지도 모른다. 우리 삶터의 병과, 그 곳에 살면서 얻게 된 우리들 마음의 병들을 한번 살펴보자.
낡은 집을 새집으로 고치거나, 작은 집을 큰집으로 늘리려면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텐데, 언제부턴지 공짜로 이를 바라는 풍조가 만연해졌다. 1990년대 이후 활발해진 재건축사업이 좋은 예다. 20년도 채 안된 멀쩡한 아파트를 쓸어내고 고층, 고밀, 대형아파트로 새로 짓는 재건축사업이 동네마다 유행처럼 벌어지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주민들과 함께 자란 나무들과, 풀밭, 그리고 그 안에서 제법 안정된 생태계를 구축한 동식물들쯤이야 돈과 이익 앞에선 전혀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다. 고층고밀화로 인해 주거환경이 오히려 나빠진다 해도 문제될 것 없다. 돈 벌고 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단지 경제적 이유 하나만으로 오래된 것, 낡은 것, 작은 것은 모조리 싹 쓸어내고 있는 이런 식의 천박한 재개발, 재건축을 가능케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의 황폐해진 마음 바로 그것이다.
자동차에 대한 과도한 탐닉증세 또한 삶터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죽이고 있다. 차들이 더 빨리, 더 많이 다닐 수 있도록 넓게, 곧게 뻥뻥 뚫고 넓힌 광로와 국도에서 보행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를 찾아보기 힘들다. 멀쩡한 사람들도 운전대만 잡으면 야수처럼 달리려 하고, 마주치는 보행자들은 장애물로밖에 보질 않는 세태 속에서 매년 수천명의 보행자가 차에 치여 죽고 있다. 내집 앞 골목길마저 가로질러 가는 차들에게 몽땅 내주고, 남은 몇 평 땅을 놓고 이웃과 주차싸움에 삿대질이 오가기 다반사며, 멱살잡이와 칼부림에 이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자동차 배기가스가 대기오염의 주범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문을 꼭꼭 닫은 채 공회전을 일삼고, 늘어나는 자동차로 삶터가 숨이 막힐 지경인데도 모두들 너도 차, 나도 차, 다함께 차차차만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우리들이 앓고 있는 병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각자에게 함몰되어 자기 것만을 챙기고 살다보니 공동의 것, 모두의 것을 살피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내 집 인테리어를 개조하는 데에는 이것저것 꼼꼼히 따지고 수백, 수천만원의 비용을 아끼지 않으면서, 동네 골목길이나 통학로의 문제를 살피고 개선하는 데에는 철저히 무관심하거나 인색하다. 통학로에서 아이들이 사고를 겪게되면 차에 태워 보내는 부모는 있어도, 안전한 통학로를 만들기 위해 팔 걷고 나서는 부모는 찾기 힘들다. 집안에는 에어콘, 공기청정기, 고급가구를 아낌없이 들여놓으면서도 아이들의 일상공간이나 시설의 열악함에 대해 고민하고 해결하려 나서는 부모는 많지 않다. 씨랜드나 인천화재 같은 대형참사에 접하면 언제나 들끓듯 분노하며 관계자를 질타하면서도, 공유공간을 살리고 가꿀 줄 모르는 우리들의 무지와 나태를 깨닫지 못한다.
이처럼 삶터와 우리들 마음이 모두 심각한 병을 앓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물론, 삶터 만들기를 주도해온 사람들의 잘못도 있을 것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우리들의 삶터 만들기는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그리고 이들이 시키는 데로 따라 했던 전문가들의 몫이었고, 삶터가 이 지경이 된 데에는 이들의 조급함과 거칠고 투박한 행태 탓도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삶터를 온통 떠맡기고 각자에 함몰되어 개인의 이익과 편의만을 좇아 살아온 우리들의 근시(近視)와 편협함에 대한 뼈저린 반성과 자각 없이는 삶터 치유를 기대할 수 없다.
이제 한달 후면 새로운 천년을 맞는다. 새로운 천년을 시작하면서 새롭게 준비하고 해야 할 일들이 수없이 많겠지만, 지난 세기를 살아오면서 얻게된 우리들의 중증 질환을 치유하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따로 없을 것이다. 삶터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한 몸, 한 생명체와 같다. 따라서 건강한 삶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일이 병행되어야 한다. 삶터와 사람을 함께 치유하는 새로운 길을 찾아 실천하는 일이야말로 새 천년을 맞아 우리 모두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희망의 싹들이 전국 곳곳에서 움트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주민들이 스스로 나서서 일상 생활환경의 문제를 풀거나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른바 '마을 만들기' 활동들이 점차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움직임은 단독주택가, 아파트단지, 상점가, 도심부 할 것 없이 곳곳에서 포착된다. 주민들만이 일을 벌이는 경우, 또는 주민과 행정이 함께 하는 곳도 있고, 시민단체나 전문가들이 주민을 돕는 경우도 있다.
다채롭게 벌어지고 있는 마을 만들기 활동이야말로 삶터와 사람을 함께 치유하는 가장 좋은 명약(名藥)일 수 있다. 그것은 첫째, 마을 만들기를 통해 각자의 삶터가 앓고 있는 병을 치유하고, 우리가 원하는 모습의 삶터를 우리 손으로 가꾸어 갈 수 있기 때문이고 둘째, 개인화된 주민들이 마을 만들기를 통해 이웃과 공동체를 이루며 더불어 살아가는 건강한 삶의 방식을 체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며 셋째, 마을 만들기를 통해 사람들이 건강하고 자격 있는 주민(住民)으로, 민주시민(民主市民)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 만들기는 곧 '삶터 가꾸기'이고, '공동체 이루기'이며, 또한 '사람 만들기'이기도 한 것이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