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흑백 영화처럼..
1987년 겨울을 코앞에 둔 늦가을의 어느 새벽, 한 대의 자동차가 한강을 따라 달리고 있다. 도로엔 차가 그리 많지 않고 차 창 옆으로는 따뜻한 색깔의 가로등이 하나, 둘, 기분 좋은 씽 소리를 내며 지나치고 있지만 쌀쌀한 날씨 탓인지 차 안의 남자, 부드럽게 차창을 올려 닫는다. 굳게 앙 다문 입술과 선한 눈빛, 작은 움직임에조차 섬세한 손놀림을 가진 이 남자, 손끝을 까딱거리며 카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박자를 맞춘다. 귀에 익은 발라드 음악이었을까, 아니면 비트가 느껴지는 발랄한 멜로디였을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줄곧 음악에서 주의를 떼지 않는다. 그리고 그 평화로움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영화 속에서나 듣곤 하던 요란한 굉음과 함께 그는 영화 속에서나 보던 사고 장면을 맞닥뜨리게 된다. 영화 <젊은 남자>의 이정재가 보여줬던 마지막 씬이랑 비슷했을까, 아니, <페드라>의 안소니 퍼킨스처럼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주변의 모든 소리들이 멈추고 눈 앞이 흐려지는 그 순간, 이 남자의 머리 속엔 촤르르륵 소리와 함께 주변의 모든 일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돌아간다. 자상한 가족들의 모습, 기쁨과 슬픔을 함께 했던 친구들, 사랑하는 여인의 눈물, 그리고 나의 음악.. 나의 음악.. 나의.. 음악...
세월이 흐른 후 그리고 십 몇 년이 지났다. 그의 기억은 거기서 끝이 나지만 우리의 기억은 거기가 바로 시작이었다. 수줍은 미소를 지닌 미소년 같은 모습. 유재하에 대해 가진 인상이란 것은 이젠 낡아버린 단 한 장의 사진 속 얼굴이 다이지만 지금도 가사 하나 틀리지 않고 모든 곡을 불러낼 수 있을 만큼 친숙한 그의 노래는 마치 절친한 선배와의 대화처럼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잡아 있다. 유재하는 1962년 생이다. 살아있다면 지금은 마흔 두 살의 아저씨가 되어있을 것이다.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좋아했다는 유재하는 1981년 한양대학교 작곡과에 입학해 순수음악을 전공한 정통파 뮤지션이었다. 하지만 입학 당시부터 클래시컬 뮤직보다는 팝송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대학 4학년 때 이미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서 건반을 맡으면서 실력을 인정받았고, 졸업 후 군복무를 마친 1986년에는 김현식이 활동하던 '봄 여름 가을 겨울'에서 키보디스트로의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에 이미 조용필에게 '사랑하기 때문에'를, 김현식에게는 '가리워진 길'을 작곡해 줄만큼 작곡가로서도 수준급 이상의 역량을 보이고 있었던 유재하, '봄 여름 가을 겨울'과 6개월쯤 행보를 같이 한 후 그의 그룹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리고 그 해 겨울, 그는 악보 몇 장을 들고 베이시스트이자 음반 프로듀서인 조원익을 찾아간다. 당시 그가 들고 간 악보들은 작사, 작곡에 편곡까지 완벽하게 마쳐진, 말 그대로 '완벽한 악보'였다고 한다. 평소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기타 등의 악기를 완벽하게 다루기로 유명했던 만큼, 그는 앨범 제작에 있어서 보컬뿐 아니라 피아노와 신서사이저, 기타 연주를 책임졌고 베이스와 드럼 외에도 여러 가지 관현악 악기를 동원해 완벽한 오케스트레이션을 실현해 태어난 그의 앨범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반'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만큼 훌륭하다. '보컬'로서의 유재하는 솔직히 말하자면 100점은 아니다. 터질 것 같은 감정도 없고 기교가 넘치지도 않는 그의 목소리는 오히려 너무 담담하고 애처로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남들은 흉내낼 수 없는 그의 매력이 아니었을까? 유복한 가정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나 밝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지만 그의 목소리 한 켠에는 외로움과 아픔이 배어있다. 그리고 유재하 음악의 기본 정서를 지배하고 있는 그 외로움과 아픔은 언제 어디서나 듣는 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져서, 마음이 휑해질 만큼의 우울과 동시에 뒷목이 뻣뻣해지는 긴장을 만들어낸다. 어린 시절의 나에겐 둘도 없는 우상이었던 유재하, 스물 몇 살의 나에겐 끝없는 방황이었고, 지금의 나에겐 하나의 길과도 같으며 앞으로도 또 다른 의미를 가진 사람일 유재하.. 오늘처럼 그의 목소리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 날이면 정성스레 깎아놓은 연필과 줄이 없는 연습장을 들고 그의 노래 제목들을 하나 하나 적어보고 싶어진다. 우리들의 사랑, 그대 내 품에, 텅빈 오늘 밤,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Minuet, 가리워진 길, 지난 날, 우울한 편지, 사랑하기 때문에... 아, 정말 오늘 밤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음악평론가 강헌은 '죽음'을 '자본주의 최고의 문화 힛트상품'이라 설명했다고 한다. 그 옛날,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그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것도, 유재하, 김현식, 김광석의 자리가 더 크고 허전하게 느껴지는 것도 모두 그들이 지금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 그 영향이 아주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십 몇 년 전, 당시 가요계의 중심에 서 있던 모든 사람들 중 누구도 그가 음악에 있어서 천재였다는 사실을 부인한 적이 없었고, 지금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유재하를 잊지 못하고 있다. 유재하 음악 장학회는 해마다 음악 경연대회를 열어 정말 재능 있는 신인들을 배출하고 있으며 그가 죽은 지 꼭 10년 되던 지난 1997년에는 그의 음악을 듣고 자란 세대인 김현철, 이소라, 신해철, 이적, 베이시스, 전람회, 조규찬 등과 그의 음악적 동지였던 조용필, 조동진, 이문세, 한영애, 봄 여름 가을 겨울 등이 함께한 '유재하 추모앨범'이 나오기도 했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지금쯤 한국 가요계의 판도는 아마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건 단지 그가 이미 여기에 없기 때문에 생긴 아쉬움에 기인하는 인사말은 아니다. 1997년, 추모 앨범을 유재하의 묘지에 묻어주고 돌아서던 후배 뮤지션들이 그로부터 받았을 영향들, 앞으로도 두고두고 후배들의 음악 안에 살아 있을 유재하의 음악적 영감과, 1987년 제작되고 2001년 리마스터링되어 재발매된 그의 앨범이 지금까지 150만 장이나 팔려나갔으며, 그리하여 아직도 누구에게나 각인되어 있을 유재하에 대한 인상들을 생각할 때 그가 단 한 장이라도 앨범을 더 내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지지 않을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아마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노래는 우리의 머리가 아닌 가슴속에 깊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단지 몇 곡의 노래가 아니라 그와 나눈 수없이 많은 교감과 추억으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