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월에는 최태성 저자의 『역사의 쓸모』을 같이 읽었습니다.
이 책은 책 제목 처럼 역사의 쓸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삶이라는 문제에 대한 가장 완벽한 해설서는 역사라고 말합니다.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해설에서 도움을 얻듯,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인물들의 선택과 그 결과가 담긴 역사에서 인생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과거의 이야기로부터 오늘의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역사 사용설명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만의 궤적을 그리며 살다간 인물들을 소개하며, 사람들의 고민과 사회의 뜨거운 이슈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역사의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책에서 제시하는 22가지 통찰을 통해 역사로부터 삶의 지혜를 얻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장. 쓸데없어 보이는 것의 쓸모
우리가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때를 돌이켜보면 시험보기 위해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의 많은 부분을 외우고 또 시험만 끝나면 이내 관심에서 멀어져 곧바로 잊어버리곤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역사를 시험과목 중 하나로 치부해 쓸데 없는 것을 배우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쓸데없다’는 말은 아무런 쓸모나 값어치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요즘처럼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는 시대에 ‘쓸데없다’는 말은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합니다. 쓸모 있는 것을 남보다 얼마나 더 많이 가졌는가로 성공을 가늠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돈 버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모두 쓸데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 역사 속에 이 ‘쓸데없다’는 것만 찾아 모은 분이 있습니다. 바로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입니다. ‘유遺’라는 한자는 ‘버리다, 유기하다’라는 뜻입니다. ‘유사遺事’라는 건 말 그대로 ‘버려진 것들을 모은 역사’입니다.
반면에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유학자 김부식이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의 역사서입니다. 어느 연도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어떤 인물이 있었는지를 쭉 정리한 책입니다. 나라가 주도하여 편찬한 정사正史이기 때문에 신비하고 기이한 일을 전하는 야사野史는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확인, 즉 팩트 체크가 된 사건만 담은 겁니다. 그래서 단군신화 같은 것들은 다루지 않습니다. 쓸데없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연 스님은 청년 시절부터 정식 역사로 인정받지 못한 이러한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모아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 덕분에 일제강점기에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가 창시되어 신자들이 독립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원나라 간섭기에 민족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기를 바랐던 일연 스님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이야기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한 것은 물론, 괴로운 시대를 버틸 수 있는 힘과 에너지를 준 것입니다. 김부식은 쓸모없다고 버렸지만, 사실은 가치가 없던 것이 아니라 가치를 못 알아봤던 것입니다.
역사는 아득한 시간 동안 쌓인 무수한 사건과 인물의 기록입니다.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콘텐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의 삶과 그 과정에서 형성된 문화의 흥망성쇠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새로운 대상을 접하든, 어떤 일을 벌이든 역사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없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음식도, 옷도, 우리 삶을 구성하는 주변의 모든 것이 역사 속에서 함께 발전해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공부할 때 눈앞에 보이는 글자만 읽습니다. 대개가 죽어 있는 텍스트로 접합니다. 그러지 말고 역사 속에 들어가서 인물들과 만나며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라면 어땠을까 하고 내 삶에 대입시켜서 답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얻지 못했던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역사는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이다’라고 말합니다. 수천 년 동안의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가슴 뛰는 삶을 살았던 사람을 만나 그들의 고민, 선택, 행동의 의미를 짚다 보면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가 갖는 매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 많은 선택 속에 삶을 살아갑니다. 어떤 갈림길은 당장 그 차이가 눈에 보입니다. 한쪽은 쭉 뻗은 길이고, 다른 쪽은 가시밭길입니다. 탄탄대로로 가면 되지 뭐가 걱정인가 싶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무조건 좋기만 한 선택은 없습니다. 이 길이 편하고 이득을 줄 것 같지만 사실은 옳은 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또 나에게는 좋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해가 되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우선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나만 생각해도 되는 걸까? 이런 갈등이 생길 법도 합니다. 결과를 살짝 엿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미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과거를 알 수 있습니다. 한두 해도 아니고 수천 년의 시간, 한두 사람도 아니고 수억 명이 넘는 사람들의 사례가 역사라는 기록으로 남아 있으니까요. 미래는 몰라도, 지금의 우리처럼 사는 내내 수많은 갈등 속에서 결정을 내렸을 과거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나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를 조금이나마 예측해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품위 있는 선택에 역사적 사고가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현재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부정을 저질러서라도 더 높이 올라가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면서까지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근시안적인 선택을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건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사고란 역사 속에서 나의 선택이 어떻게 해석될지 가늠해보고,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력을 고려해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즈음은 특히 역사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본인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자신의 생각이나 말, 의견이 누군가의 나쁜 선택에 힘을 실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말이 어떻게 해석되고 사용될 수 있을지 점검을 해야 합니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만큼 나의 선택은 많은 타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결국 한 사람의 선택이 사회의 문화를 형성하고,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시 영향을 미칩니다.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지금 닥친 상황과 욕망에 자꾸 눈이 멀게 됩니다. 그래서 과거의 무수한 사례를 까먹고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기 십상입니다. 그 잘못 하나 때문에 그때까지 쌓아온 모든 공이 다 무너지기도 합니다. 내가 내뱉는 말과 지금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살펴볼 수 있다면 보다 나은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2장. 역사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
저자는 누구의 주장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는 일보다 선행되어야 할 일은 상대가 왜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헤아려보는 일이라고 합니다.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서로의 시대를, 상황을, 입장을 알게 된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도 달라질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서 성찰, 창조, 협상, 공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먼저 성찰에 대해서는 ‘고구려는 왜 멸망했는가’라는 주제로 말합니다. 고구려 말기의 연개소문은 정치적, 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장군이자 재상이었습니다. 그가 권력을 휘두르던 당시 고구려는 분명 강대한 나라였습니다. 중국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고구려는 이미 수나라의 대군을 세 차례나 물리친 경험이 있었고, 당나라 역시 당 태종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왔다가 안시성에서 대패하여 물러났습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는 강하며, 지금까지 이겨왔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주변 나라의 정세 변화를 읽는 일에 소홀했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만 힘을 썼습니다. 그 결과 본인은 권력을 유지했지만, 고구려는 그가 죽자마자 분열되기 시작하더니 668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다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게 됩니다. 그리고 겸손을 배웁니다. 역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나라의 흥망성쇠를 들여다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가끔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인물이 쓸쓸하고 비참하게 죽는가 하면, 사방으로 위세를 떨치던 대제국이 한순간에 지도에서 사라져버리기도 하니까요. 역사에서 이런 일은 너무나 비일비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시시때때로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위치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물론이고 순항하고 있을 때도 그렇습니다. 지금 정말 괜찮은가? 그냥 되는 대로 흘러가고 있는 건 아닐까? 무언가 잘못된 건 없을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맞을까? 자꾸 물어봐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을 멈추면 그저 관성에 따라 선택하고 관성에 따라 살게 됩니다.
역사는 그 어느 것도 영원할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그때는 맞았던 것이 지금은 틀릴 수도 있습니다.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 자신의 성공에 도취되어 현재를 점검하지 않으면 연개소문과 같은 실수를 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끊임없는 성찰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다음은 창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할수록 ‘창의융합형’ 인재가 필요합니다. 창의적인 문제 해결에 필요한 전문 지식과 독창적인 사고력을 갖춘 인재 말입니다. 단순히 아는 것만 많아서는 안 되고 남들과 다른 생각으로 다양한 지식을 융합할 줄 아는, 그래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역사에도 창의융합형 인재라고 할 만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에 대한 예로 구텐베르크를 들 수 있습니다.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를 이용해 역사상 최초로 대량 인쇄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대량 인쇄를 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프레스press’입니다. 프레스는 포도주나 올리브유를 만들기 위해 열매의 즙을 짜는 압착기를 말합니다. 구텐베르크는 여기서 영감을 얻습니다. 좀 더 빠르고 편리하게 글자를 찍는 기계에 딱 맞는 기술이었습니다.
그리고 금속활자는 구텐베르크가 조폐국에서 일할 때 금화나 은화에 문양을 새기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가져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인쇄에 필요한 종이는 이미 중국에서 발명되어 있었습니다. 중국의 제지 기술이 세계 각지에 전해지면서 유럽에서도 종이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구텐베르크 인쇄기를 보면 새롭게 발명된 기술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이미 존재하고 있던 기술이었습니다. 금속활자와 프레스기, 종이를 응용한 것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입니다. 알고 보면 창조가 아니라 조합입니다. 하지만, 달리 보면 조합을 통한 창조이기도 합니다.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한 후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양의 책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이 비약적으로 증가했습니다. 누구나 책을 읽으며 공부하고 사고하고 연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철학, 의학, 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뒤처져 있던 유럽이 수많은 학자를 배출해내며 앞서나갈 수 있게 된 것 또한 인쇄술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창조나 창의력을 말하면 사람들은 자꾸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워도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으면, 열광하지 않으면 널리 쓰이지 않습니다. 소수를 위한, 소수의 권익을 대변하는 기술은 역사의 흐름에 맞지 않습니다. 폭발력을 지닌 창조적 발명은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수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창조인가 생각해봐야 할 때입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고 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자유로워지고 편안해질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고민을 바탕으로 한 창조만이 오랜 시간 생명력을 가지고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세상을 바꿔나갑니다.
이번에는 협상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협상의 달인을 꼽는다면 고려의 서희를 들 수 있습니다. 서희가 재상으로 있을 때 고려는 송나라와 국교를 맺고 거란을 멀리했습니다. 그런데 거란의 장군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는 고구려의 옛 땅은 모두 거란의 땅이라고 하며 돌려달라고 협박합니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거란의 요구를 들어주자는 의견이 우세했습니다. 지금의 평양에 해당하는 서경의 북쪽 땅을 거란에 주자는 의견이 나왔고 고려 성종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서희가 벌떡 일어나서는 “만약 우리가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고 적이 원하는 대로 땅을 떼어준다면 만세의 수치로 남을 것이다.”라고 반론을 제기합니다. 지금의 결정이 분명 역사로 기록되고 기억될 것이라고 믿었던 서희의 역사의식,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이런 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일단 서희는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고려를 칠 생각으로 들어왔다면 거침없이 밀고 내려와야 할 텐데 소손녕은 고려 국경을 넘자마자 고구려 땅을 달라고 하면서 강화 요청을 했기 때문입니다.
소손녕을 만나 보니 역시 분위기가 묘했습니다. 서희와 소손녕은 자기 패는 보여주지 않고 상대의 패를 읽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그러던 중 서희는 소손녕의 속내를 정확히 간파합니다. 거란이 정말 싸워야 하는 나라는 송나라입니다. 당을 이어 중원에 들어선 송나라를 정복해야 하는데, 거란 입장에서는 송나라와 고려가 친한 게 문제였습니다. 군사를 모아 송나라에 쳐들어가면 후방이 비어버립니다. 이때 고려가 후방을 칠까 봐 염려되었던 것입니다.
거란의 패를 읽은 서희는 탐색전을 끝내고 먼저 제안합니다. 고려와 거란 사이에는 여진족이 있는데 이들로 인해 거란과 교류가 힘드니 여진족을 몰아내고 그 땅을 고려가 관리하게 해주면 거란과 가까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에 소손녕은 바로 넘어옵니다. 이 회담으로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얻게 됩니다. 거란에 땅을 줘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거란한테서 땅을 받아 온 겁니다.
그럼 거란은 손해를 본 걸까요? 아닙니다. 거란이 목표로 하는 건 송나라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땅에 비하면 고려에 주기로 한 강동 6주는 콩알만 한 땅입니다. 그건 손해가 아니라 투자입니다. 고려에 후방을 공격당할 걱정 없이 송나라를 총공격하기 위한 투자였습니다. 이 회담에서 진 사람은 없습니다. 고려도 거란도 모두 이긴 겁니다.
협상이란 이처럼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조건을 찾는 일입니다. 다짜고짜 들이밀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떼를 써서도 안 되고 협상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겁을 먹고 손 놓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섬세한 감각을 발휘해서 상대의 패를 읽으며 상대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상대의 진짜 속내는 무엇인지를 알아차려 양쪽 모두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제안을 해야 합니다.
협상가는 보통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협상가에게 중요한 건 훌륭한 말솜씨보다 정확한 눈입니다. 여기서 정확한 눈이란 정세를 파악할 줄 아는 통찰력과 상대의 의중을 감지하는 관찰력을 말합니다.
협상이란 상대방도 만족시키고 나도 만족하는 결과를 내기 위한 과정입니다. 내 것만 생각해서도, 상대의 것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배짱을 가지고 섬세하게 상대를 관찰하면서 본인의 패를 놓지 않는다면 결국 원하는 것을 얻게 되리라고 역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공감에 대한 주제는 ‘왜 할머니, 할아버지는 태극기를 들고 광장으로 나왔을까?’를 통해 생각해 봅니다.
2017년 ‘촛불 탄핵’이 일어나고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파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른바 ‘태극기 부대’의 시위도 거세졌습니다.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부터 탄핵 반대 시위를 해왔던 태극기 부대는 이후 탄핵 무효를 외치는 것은 물론, 이후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지 집회를 열었습니다.
태극기 부대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연배가 높은 어르신입니다. 이전에도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보수를 자칭하며 목소리를 낸 집단이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많은 수가 집결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미디어에 비친 그들의 행동은 젊은 세대가 보기에는 너무나 생경했습니다. 어떤 할머니께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될 때 엎드려 절하며 “마마!” 하고 부르짖으며 서럽게 울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이 무슨 왕권국가도 아닌데 저런 모습을 보이니 황당할 법도 합니다.
그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라는 이유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할 때, 혹은 미국 국기를 들고 흔들며 친미 구호를 외칠 때, 일부 젊은 사람들은 경악합니다. 그런데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박정희라는 지도자와 미국이라는 우방은 소위 ‘빨갱이’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주는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이 두 축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세계에 자신도 속해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젊은 세대가 박정희 대통령을 부정하고 우방국 미국도 부정합니다. 그들은 마치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일으킨 나라인데!” 특정 대통령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의 삶이 통째로 부정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분노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온 세월, 내가 쏟아부은 노력, 그리고 그것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나라는 존재가 너무나 억울한 것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내 옆에 있는,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태극기를 들고나오는 걸까? 독재 정권으로 돌아가자는 거야?’라고 단정하기 전에 그들이 살아온 삶의 시간을 상상해보고 이해한다면 세대 갈등이 갈등을 넘어 혐오로 번지는 것만은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는 단절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변에 보면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이다 싶을 만큼 연세가 많은 어르신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광복을 맞이하고, 전쟁을 겪고, 초고속 경제 성장을 지켜보고, 21세기를 맞이한 분들입니다. 우리는 책이나 영상으로 보고 배운 그 시절의 이야기에 그분들을 대입시키지 못합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아온 삶이 실제였다는 것을 잊거나 혹은 관심 자체가 없습니다.
사실 상대의 삶에 관심을 갖지 않는 건 기성세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젊은 애들은 등 따시고 배불러서 패기도 없고 열정도 없다”라고 말하지만 학교에서, 강의실에서 젊은 친구들을 만나 보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기성세대가 당연하게 거쳤던 인생의 과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들 나름의 사정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가히 폭력적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정치 성향뿐만 아니라 일상 곳곳에서 세대 갈등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명절에 만난 친척 어른과 조카 사이에서도, 회사의 부장과 신입 사원 사이에서도, 지하철에서 만난 승객들 사이에서도 서로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아 쉽게 갈등이 생기곤 합니다.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만을 강조한다면 이런 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집니다.
누구의 주장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는 일보다 선행되어야 할 일은 상대가 왜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헤아려보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합니다.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서로의 시대를, 상황을, 입장을 알게 된다면 우리의 관점도 달라질 겁니다. 타인에 대한 공감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합니다.
3장. 한 번의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이번 장에서는 역사에서 롤모델을 찾아보면 어떨까하는 관점에서 정도전, 김육, 박상진 등의 인물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정도전의 삶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정도전은 고려 말기에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신진사대부로 친명 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집권 세력인 친원파의 수장이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들에게 고려에 온 북원 사신을 접대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런데 정도전 등은 단칼에 거부합니다. 이로 인해 명령 불복종 죄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정도전은 나주에서 2년간 유배 생활을 했는데 복직이 안됩니다. 함께 유배 갔던 신진사대부들은 권문세족과 사이가 안 좋더라도 하나둘씩 복직을 하는데, 정도전만큼은 조정에서 부르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무려 10여 년 동안 정도전은 여기저기를 떠돌며 생활합니다.
이 시절 밑바닥에서 보니 백성들의 현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잦은 전쟁으로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의 삶은 정말 비참했습니다. 가난에 한 번 울고, 가진 자들의 수탈에 또 한 번 울어야 했습니다. 먹을 것도 없는 판국에 불합리한 조세 제도까지 더해져 이중으로 세금을 내야 하는 등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습니다.
정도전은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느낍니다. 정의롭지 않은 사회에 분노합니다. 바로잡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고려 조정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권문세족과의 불화, 신분상의 결함 등 벽이 너무 높았습니다. 정도전은 벽 앞에서 멈추는 대신 벽을 깨부수기로 합니다. 고려에서 안 된다면 다른 왕조를 세우자고 결심한 것입니다. 혁명을 꿈꾼 것입니다.
정도전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물색합니다. 그리고는 자기에게 없는 힘을 가진 고려의 영웅으로 불리던 이성계를 찾아갑니다. 이성계는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습니다. 함경도에서는 어마어마한 세력을 자랑했지만, 변방에서 태어났고, 여진족의 문화에 익숙한 탓에 고려 조정의 관리들에게는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으로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뒤이어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웁니다. 조선의 왕이 된 사람은 이성계지만, 조선의 기틀을 닦고 질서를 만든 사람은 정도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정도전은 조선의 설계자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가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유배당하고 유랑하면서 만난 잘못된 세상에 문제의식을 느낀 정도전은 그런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결 방법을 하나하나 치밀하게 고민했습니다. 길고 막막한 인생의 터널에서 주저앉는 대신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정도전에게 고려가 그러했듯이 지금 우리 사회도 행복하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부조리와 불합리를 목도합니다. 이럴 때 ‘내가 못나서’, ‘내가 부족해서’, ‘내가 졸업한 학교가 별로라’, ‘우리 집이 가난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도전처럼 시대와의 불화로 나락에 떨어졌을 때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사회와 자신에 대한 인식과 비판의 불을 항상 환하게 밝혀놓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쉽게 좌절하거나 비현실적인 꿈을 꾸는 대신 지금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 눈에 보일 겁니다. 어쩌면 ‘나’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어려움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인생만큼은 대안 없이 성급하게 비판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물론 자신이 비판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해결책을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나아가 그것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만이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조금이나마 바꿔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늘어날 때 높게만 보이던 벽도 서서히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다음은 삶을 던진다는 것의 의미는 어떤 것인지를 김육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김육이 열두 살 때 임진왜란으로 아버지를 잃고 곧이어 어머니도 돌아가십니다. 10대에 소년 가장이라는 힘든 상황에서도 과거에 합격해 스물네 살에 성균관에 들어갔습니다. 4년이 지나 광해군이 즉위한 후 김육을 비롯한 성균관 유생들이 하나의 상소를 올리게 되고, 그로 인해 성균관 유생들은 처벌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영창대군이 살해되는 등 조정에 혼란이 더해지자 김육은 성균관을 박차고 나와 귀농해버립니다. 가족을 데리고 가평의 잠곡이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집 지을 돈이 없어서 땅을 파고 움막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2년을 고생한 후에야 겨우 집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숯 장사를 합니다. 가평에서 서울까지 거리가 자그마치 왕복 160킬로미터를 걸어 다녔습니다.
그 힘겨운 생활 속에서도 김육의 눈에 들어온 건 자신의 처지가 아니라 비참한 백성들의 삶이었습니다. 매일 한양을 오가면서 굶어 죽은 시신이 거리에 널려 있는 걸 보았습니다. 이때 김육에게는 좌우명이 하나 생깁니다. ‘애물제인愛物濟人’ 만물을 사랑하여 사람을 구제하자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직접 노동하고 세금을 내면서 공납 제도의 모순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10년 후 인조반정으로 세상이 바뀌면서 김육에게 관직 제의가 옵니다. 관직 생활을 하는 내내 김육의 주 관심사는 공납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관직이 낮아서 그럴 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문제 해결에 나서기 위해서는 고위 공무원이 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과거 시험을 다시 봅니다. 결과는 장원이었습니다.
이제 뭔가 좀 되려나 보다 싶은 그때 또다시 병자호란으로 전쟁이 터집니다. 10대에 전쟁, 20대에 투쟁, 30대에 귀농, 40대에 다시 전쟁. 김육이 제대로 정치 생활을 시작한 건 50대가 되어서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정세가 안정되기 시작하자 공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곧바로 대동법 이야기를 꺼냅니다. 제대로 된 땅 한 뙈기 없는 백성들이 자신에게 부과된 특산물을 준비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리고 그 대안으로 대동법을 주장했습니다. 경기도에서만 시행되던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게 김육의 목표가 됩니다.
김육은 대동법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대동법 확대 시행을 끊임없이, 정말 끊임없이 주장했습니다. 반대로 양반들은 대동법이 확산되지 못하도록 열을 올렸습니다. 땅을 가진 사람 입장에서는 전세의 두세 배나 되는 부담을 추가로 지는 거니까 세금 폭탄이라며 난리를 친 것입니다.
매번 논쟁을 해도 대동법 확산의 길은 멀기만 했습니다. 인조가 사망하고 70세의 나이가 된 김육은 새로 즉위한 왕 효종에게 사직 상소를 올립니다. 효종은 업무 능력이 뛰어난 김육을 붙잡았습니다. 그러자 조건을 내겁니다. 대동법을 확대 시행해주면 일을 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나가니까 드디어 충청도에도 대동법이 시행됩니다.
물론 이게 끝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전라도까지 확산시키기 위해 김육은 또 상소를 올리기 시작합니다. 전라도에서 대동법이 시행되면 금방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반들이 완강하게 버티다 보니 또 시간은 흘러만 갔습니다.
70세에 사직 상소를 올렸던 김육은 79세에 유언 상소를 올립니다. 자기가 죽으면 대동법 시행이 취소될까 봐 너무 두렵다는 겁니다. 이제 병들어 곧 죽을 몸이 되었으니 호남에도 빨리 시행해달라고 효종에게 마지막 간청을 합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세상을 떠납니다.
김육은 평소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일, 바로 만물을 사랑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일에 인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애물제인이라는 목표가 있었기에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고 꾸준하게 자신의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인생은 단 한 번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 해답에 목말라 있는지 모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기 위해 책을 읽고 조언을 듣고 때로는 직접 부딪혀 가면서 답을 구합니다.
그런면에서 김육은 ‘한 번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자신의 일생으로 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을 던진다는 것의 의미를 보여주는 분입니다.
이제 자신에게 질문을 해 봅니다. 나에게는 삶을 던져 이루고 싶은 것이 있는가? 이에 대한 답으로 ‘삶이 뭐 다 그렇지’라는 말 대신 ‘삶은 이런 거지’라는 말로 바꿔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아마도 목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하루는 이전보다 더욱 충만하게 채워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한다는 주제로 박상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는 2차 갑오개혁 때 재판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면서 법관들도 양성했는데, 박상진도 법학을 공부하던 학생이었습니다. 머리가 좋았을 뿐만 아니라 부와 권력을 모두 지닌 이름난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1910년에는 판사 시험에 합격합니다. 평양 법원으로 발령까지 받았는데, 사표를 던집니다. 우리나라가 국권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일본은 조선의 엘리트들을 앞세워 식민 통치를 하려고 했습니다. 박상진은 조선 최고의 엘리트였으니 당연히 회유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눈앞에 두 갈래의 길이 있는데 그 차이점이 확연하게 보인다면 누구나 망설일 겁니다. 탄탄대로와 가시밭길 중에서 가시밭길로 발걸음을 옮기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박상진은 그 길로 들어섰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직업을 얻었는데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참 감동적입니다. 일제강점기에 판사로 일한다면 누가 죄인으로 끌려올까요? 아마 일제에 저항하는 사람들 일 것입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죄인이지만, 조선 사람에게는 영웅인 사람들입니다. 판사가 되면 이런 사람들에게 징역과 사형을 선고해야 합니다. 박상진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심합니다. 이제 내가 앉을 자리는 판사의 자리가 아니라 판사의 맞은편, 바로 피고인석이라고 말입니다.
판사를 포기한 박상진은 쌀가게를 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가게였지만, 사실은 독립군이 연락을 주고받는 곳이자 자금을 마련하는 장소였습니다.
1915년 박상진은 조선국권회복단을, 곧이어 대한광복회를 조직했습니다. 박상진은 비밀, 폭동, 암살, 명령 이 네 가지를 일제 타도의 행동 강령으로 삼습니다. 대한광복회 강령을 보면 만주에 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해서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려고 합니다. 국내외에 비밀조직을 만들어서 일제의 통치기관을 폭파하고 일본의 주요 인사와 친일파를 사살하는 것입니다.
대한광복회 총사령으로 의열 투쟁에 앞장섰던 박상진은 결국 체포되었습니다. 그가 결심했던 대로 판사석이 아니라 피고인석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불꽃 같은 인생을 살던 박상진은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박상진은 떠났지만 대한광복회는 의열 투쟁의 본보기로 큰 자극이 되었고, 그 영향을 받은 수많은 청년이 독립을 위해 기꺼이 몸을 던졌습니다.
만약 박상진이 오로지 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면 일제강점기라 할지라도 판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당시 판사의 역할이 ‘나라의 독립’이라는 자신의 삶의 가치에 위배되기 때문에 판사석이 아니라 피고인석을, 가시밭길의 독립운동가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요즈음 학생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대개 “제 꿈은 변호사예요”, “CEO예요”, “공무원이에요” 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이건 대부분 직업입니다. 대한민국 학생들에게 꿈은 곧 직업입니다. 직업 이름을 대지 않는 학생들의 꿈도 출세, 성공 이런 식입니다. 원하는 직업을 얻거나 성공한다고 해서 삶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 딱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니 정작 꿈을 이뤄도 더 이상 뭘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 순간 참 많이 흔들립니다. 달성해야 할 목표가 사라지니 공허하기도 하고, 내가 원했던 삶이 이런 것이었나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이끌어가지 못하고 도리어 망쳐버리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이런 일이 생기는 까닭은 그들의 꿈이 ‘명사’였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했을 뿐,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고민은 없었던 것입니다.
살아가는 데 직업은 무척 중요합니다. 어떤 직업을 가질지 고민하는 만큼 무엇을 위해서 그 직업을 원하는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도전도, 용기도 좋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위한 도전이고, 무엇을 위한 용기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 최종 종착지는 어떻게 살겠다는 동사의 꿈이었으면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삶에서 길을 잃기 십상입니다.
꿈은 더 행복해지기 위해 꾸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그 꿈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자신만의 자리를 발견하였으면 합니다. 그 힘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렇게 동사의 꿈을 꾸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더욱 건강해질 것입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와 있든 동사의 꿈이 없다면 이제 진짜 꿈에 대해 생각해볼 때입니다.
4장 인생의 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우리는 늘 불안해합니다. 이 시대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이들 질문에 역사를 공부한 사람은 과거보다 현재가 나아졌듯이 미래는 더 밝을 거라고 답할 것입니다. 나보다 우리의 힘을 믿으며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면 된다고 말입니다.
순천에 가면 팔마비八馬碑라는 비석이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순천에서 일한 사또 최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만든 비석입니다. 최석은 순천 사또로 부임해 개경에서 순천까지 내려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순천에는 전별금이라는 나쁜 관행이 있었습니다.
당시 순천의 전별금은 ‘말’이었습니다. 사또가 임기를 마치고 떠나면 말 여덟 마리를 줘야 합니다. 그때 말 한 마리의 가격은 지금 자동차 한 대 값과 같습니다. 그러니 엄청난 돈이었습니다. 사또 임기가 3년이니까 순천 사람들은 3년마다 한 번씩 그 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관리가 사또만 있는 건 아닙니다. 사또는 말 여덟 마리, 사또 바로 아래 관리는 몇 마리, 그 아래는 또 몇 마리…… 이런 식으로 서열에 따라 전별금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걸 마련하는 일이 대단히 큰 고역이었습니다.
최석이 임기를 마치자 순천 사람들은 말 여덟 마리를 준비해 바칩니다. 최석은 이 말들에 짐을 싣고 개경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개경에 도착한 뒤 순천으로 말을 돌려보냅니다. 심지어 여덟 마리가 아니라 아홉 마리를 보냈습니다. 자신이 타고 왔던 말이 새끼를 낳았는데 이 말은 순천의 녹을 먹을 때 생겨난 것이므로 순천의 재산이라면서 그 말까지 함께 돌려보낸 것입니다. 순천 사람들은 몹시 당황했습니다. ‘어라? 이런 관리도 있네? 이거 정말 기념비적인 일이다!’ 그래서 최석 공덕비를 세우는데 그것이 바로 팔마비입니다. 팔마비는 기록상 백성들이 세운 최초의 공덕비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존경받아 온 역사 속 인물들을 만나다 보면 자긍심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쫓아가다 보면 그들이 굉장히 단단한 중심을 갖고 삶을 살아냈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그들은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고 떳떳한 삶을 살기 위해 자신만의 길을 걸어나갔습니다. 과거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이 보낸 시간을 들여다보는 것이야말로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는 방법입니다.
조선 18대 왕 『현종실록』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예송’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송은 예절에 관한 논란이라는 뜻으로 궁중 의례를 어떻게 지키느냐에 대한 논쟁을 말합니다. 현종 대에 일어난 논쟁이지만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인조부터 효종, 현종까지 3대에 걸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현종의 할아버지 인조가 중전이 사망한 이후 마흔세 살에 겨우 열네 살의 어린 중전을 새로 맞이하면서 시작됩니다. 아들인 효종보다도 다섯 살이나 어렸습니다. 이 어린 중전이 훗날 자의대비라고 불린 장렬왕후입니다. 그런데 효종이 자의대비보다 먼저 죽으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아들이 죽은 셈이니까 자의대비도 상복을 입고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다름 아닌 상복을 입는 기간이 조정의 논쟁거리가 된 것입니다.
예송을 일이킨 두 세력은 서인과 남인입니다. 서인은 효종이 둘째 아들이니까 당시 예법에 따라 1년 동안 상복을 입으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남인들은 둘째 아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효종은 왕이니까 장남에 준해서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왕한테 사대부 예법을 적용하느냐는 겁니다,
현종은 상중이었기 때문에 이런 논쟁이 부담스러워 그냥 예법에 따르자고 합니다. 서인의 주장대로 상복을 1년만 입기로 한 것입니다. 이게 1차 예송인 기해예송입니다.
그런데 15년 뒤에 효종의 부인인 인선왕후가 사망합니다. 자의대비는 이때도 살아 있었습니다. 며느리보다 어렸으니까요. 이번에도 같은 논쟁이 일어납니다. 며느리가 죽었는데 시어머니인 자의대비는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로 또다시 서인과 남인이 싸우기 시작합니다.
서인은 또 1차 예송처럼 예법에 따르자고 합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맏며느리는 1년, 다른 며느리는 9개월이니까 자의대비는 9개월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남인은 그래도 왕인데 장남 대우를 하는 것이 맞으니 맏며느리에 준하는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로 인해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 시작됩니다.
현종은 이번에는 남인의 손을 들어줍니다. 효종이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를 계속해서 들먹이는 게 싫기도 했거니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위를 가진 우암 송시열과 그가 이끄는 서인들을 압박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예송의 승자는 남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2차 예송 직후 현종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뒤이어 숙종이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즉위한 숙종은 송시열의 제자에게 아버지의 행장을 짓는 일을 맡깁니다. 행장은 죽은 사람의 일대기를 적는 글인데 나중에 실록을 편찬할 때 자료가 되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종 대에 있었던 일의 대부분이 예송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던 중에 송시열이 잘못 인용한 예법이 문제가 됩니다. 송시열의 제자는 송시열이 자신의 스승인지라 이 부분을 적당히 쓰고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숙종은 이를 지적하며 명확하게 다시 써오라고 합니다. 이에 송시열의 제자는 제자 된 도리로 차마 못하겠다며 상소를 올립니다. 그러자 숙종이 불같이 화를 내며 도성에서 쫓아내버립니다. 송시열은 당시 68세였는데 숙종의 할아버지 효종과 아버지 현종의 스승 역할도 했던 거물이었습니다. 그런 송시열을 상대로 숙종은 담판을 벌이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에 다녔을 나이인데도 말입니다.
숙종의 미움을 받은 송시열은 훗날 유배되고 결국 사약을 받아 죽습니다. 상복을 몇 년 입느냐의 문제가 참 오랜 시간 동안 조선의 조정을 시끄럽게 한 셈입니다. 서인과 남인은 당운을 걸고 정말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로부터 약 350년이 흐른 지금, 예송을 바라보면 백성들의 삶은 안중에도 없고 잘난 양반끼리 대단한 기 싸움을 벌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 나름대로는 왕조의 정통성, 왕권과 신권, 양반의 정체성 등 무척이나 중요한 쟁점들이 포함된 문제였을 터지만 전쟁이 끝난 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비참해진 백성들의 삶을 돌보는 방안을 논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었을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러 논쟁거리가 있습니다. 어떤 논쟁은 엄청나게 뜨겁습니다. 입장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이념이 다른 사람 사이에 살벌한 말들이 오갑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게 그만큼의 에너지를 쏟을 정도로 우선순위에 있는 일인지 말입니다. 갈등은 당연한 것이고 뜨거움도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뜨거움이 혹시 빗나간 열정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에서 첨예한 대립과 갈등은 언제나 존재하는 일입니다. 제각기 다른 사람이 공존하기 위해서 꼭 거쳐야 할 과정인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나의 이익, 내 집단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문제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추구하는 방향이 과연 옳은지, 역사나 인류의 발전 방향과 맥을 같이하는지는 반드시 짚어봐야 합니다. 역사를 통해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도 해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무조건 내가 속한 집단의 편에 서는 대신에 말입니다.
도처에 갈등 요인이 널려 있는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에게는 당면한 문제에 나의 온도를 몇 도로 맞출 것인지 조절할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나의 뜨거움이 많은 사람에게 자유와 행복을 선사하는 의미 있는 것이라면, 역사의 수레바퀴가 향하는 곳으로 힘을 더하는 일이라면 더욱 온도를 높여 뛰어야 합니다. 필요에 따라 더 차가워질 수도 반대로 더 뜨거워질 수도 있도록 의지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역사입니다.
긴 호흡으로 역사를 바라보면 결국은 사람과 세상에 대해 낙관적인 시각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건 역사지만 결국은 사람을, 인생을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생각이 사회 전체를 지배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다양한 생각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맞았던 것이 지금은 틀리고, 내게 옳은 것이 누군가에게는 틀린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무엇을 긍정하고, 무엇을 부정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삶의 방향을 정하고 자신만의 가치관을 찾는 일이 중요해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우리 인생의 나침반이 될 수 있습니다. 역사 속 인물들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길을 걸었는지, 또 그들의 선택이 역사에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를 생각해보면 비로소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 수 없기에 그때마다 막막하고 불안합니다. 하지만 우리보다 앞서 살아간 역사 속 인물들은 이미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의 선택을 들여다보면 어떤 길이 나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할 것인지 알게 됩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역사.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그리고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려주는 역사. 그래서 궁극적으로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끊임없이 자문하게 하는 역사. 그래서 저자는 역사는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이라고 강조합니다.
이렇듯 역사는 나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입니다. 이 책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을 다시금 돌아보고 역사로부터 배움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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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해가 뜨고 지는 일이 늘 반복되지만
그래도, 어제보다 좀 더 나은 내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더불어 함께, 새로운 오늘을 충실히 잘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남과의 비교가 아닌,
어제 나와의 비교를 통해 하루하루 성장하는 나를 만나고 싶습니다.
-새날 드림/Dr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