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길도 물어 가자
그 동안 우리나라와 이웃한 일본을 가보지 못하여 한번 가 보았으면 하고 생각하던 중에 일본에 살고 있는 작은 처남 邊奎奉 형님에 대한 문병과 처조카 邊雲吉의 둘째딸 邊里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다녀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일행은 큰처남 邊奎河 형님의 내외분과 처언니 邊辛生과 처조카 邊雲龍과 우리들 내외를 합하여 6명이었다. 어쩌면 내자의 2남 4녀 중에서 생존해 있는 2남 2녀의 4남매 내외가 일본에서 이산 가족 만나기'를 하러 가는 것이었다.
출국에 앞서서 내가 겪은 에피소드를 소개하면 우리 내외와 언니의 여권에 따른 모든 수속을 내가 맡기로 하고 제주도청 민원실에 직접 출두하여 여권의 교부를 받았다. 민원실에서 내어주는 해외 여행 안내 수첩을 잘 읽어보지 않았으며 그간 유럽 여행과 동남아 여행을 했을 때 모든 수속을 여행사에 의뢰하였었으므로 비자(사증)에 관해서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고 일본도 우리 제주도와 같이 무비자의 나라로 잘못 알고 다른 준비만 갖추면서 대도관광여행사를 통하여 항공권을 구입하였다.
출국 전날인 2월 9일에 환전을 마친 다음에 출국하기에 앞서 내자와 함께 그랜드 관광 호텔에 있는 면세점을 돌아보기 위하여 갔다가 일본에 출국을 하려면 비자를 발급 받아야 출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길로 택시를 타고 대도관광여행사에 들려서 비자 수속에 대하여 의논을 했으나 자기들이 위임을 받고 내일 대사관에 비자 신청을 하면 그 이튿날이 되어야 비자가 나오는데 이튿날이 토요일이므로 대사관이 집무를 보지 않기 때문에 3일 후인 월요일에나 비자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결혼식 날짜가 일요일이었으므로 이것이야 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내외야 장본인이므로 그렇다 치더라도 처언니에 대하여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다시 처언니의 집을 방문하여 사정을 말씀들였더니 안색이 파래지면서도 침착하게 사람이 죽어도 사는 것을 그렇게 너무 당황하지 말라. 고 도리어 우리들을 위로해 주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다시 여행사로 전화를 걸어 비자 신청에 따르는 업무에 대하여 자세하게 물어 본 결과 월요일에 비자가 나오더라도 항공편이 없어서 화요일에나 출국을 할수 있다는 대답에 나의 등에는 식은 땀이 주르르 흐르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 여행사가 위임을 받고 처리하려면 그렇게 밖에 안 되나 긴급 비자 발급 제도가 있으니 내일 아침에 세 사람이 대사관에 직접 출두하여 사정을 이야기 하면 어쩌면 가능할른지도 모른다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었다.
구비서류를 물었더니 상호 보증을 위하여 내 재직증명서 2통과 사업자등록을 하고 있는 사람의 인감증명이 필요하므로 준비하고 가라고 일러주는 것이었다.
나는 출발 예정일인 2월 10일에는 일단 학교에 출근하여 수업을 한 다음에 조퇴를 하여 오후 항공편으로 출국을 하면 연가 기간에 토요일과 일요일이 끼어 있으므로 바쁜 학년말 업무에 다른 선생님들에게 조금이라도 누를 덜 끼칠 생각으로 토요일인 11일부터만 여행허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고 보니 출국예정일에 학교에 가서 수업을 할수가 없게 되었다.
2월 10일 아침이 되었다. 교감선생님께 하루의 연가를 더 주십사고 전화로 부탁을 드리고 洪性銀 서무과장님에게는 출근 시간이 되면 사람을 학교로 보내겠으니 재직증명서를 교부해 달라고 전화를 걸었더니 온라인 민원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조회 때에 공지했는데 왜 잊으셨습니까 면서 학교까지 사람을 보내지 말고 제주도교육청에 가서 재직증명을 교부 받으라고 일러 주는 것이었다.
그때 같은 집에 살고 있는 둘째 아들은 치질을 수술하여 병원에 입원 중에 있었으므로 며느리를 시켜서 제주도교육청으로 재직증명서를 교부받으러 보내고 나는 동사무소로 뛰어 다니며 사업자등록이 되어 있는 둘째아들의 인감증명 등 구비서류를 다 갖추고 보니 이미 시간은 10시가 지나고 있었다.
우리들 세사람이 일본대사관 제주사무소에 들려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그 내용을 문서로 작성하여 제출을 하면 심사하여 오늘 출국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대사관에 근무하는 김영희씨의 친절한 안내와 협조로 여권 보관증을 겸한 접수증을 주면서 오후 3시에 와서 찾아가라는 말에 우리들 세사람은 그제서야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
아는 길도 물어 가라'는 속담을 가마득히 잊어버리고 여권을 받으면서 여행 안내 수첩을 좀 더 자세히 읽어 보았던지, 아니면 해외에 출국하고 있으므로 경험자에게 한번 물어보기라도 했던들 이렇게 당황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오후 3시가 되어서 대사관에 가서 비자가 발급된 여권을 찾아 그길로 공항에 도착하고 보니 고산에서는 큰처남 형님의 내외분과 처조카가 이미 공항에 도착하여 우리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마터면 공항까지 나왔다가 출국을 하지 못하고 큰 망신을 당할뻔 한 좋은 경험을 하였다.
처언니와 내자는 처음으로 일본을 가는 길이었으므로 그동안 고모 도리를 못한 일이 많다고 하면서 재일 교포들이 고향에 왔을때 많이 사고 간다는 카페트 12장을 샀으므로 수화물 꾸러미는 4개나 되었다. 이들 수화물의 탁송 수속과 출국 수속을 모두 마치었다.
예정된 시간인 오후 5시 20분발 KE 754편으로 제주국제공항을 이륙하여 오사까(大阪)행 비행기를 탑승하였다. 비행기의 기종은 A300으로 정원이 250명이나 탈 수 있는 큰 비행기였지만 탑승 인원은 불과 50여명뿐이었다.
비행기는 이륙한지 1시간 30분만인 오후 7시에 오사까(大阪)간사이(關西)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도착 시간이 밤이어서 공항의 시설을 잘 볼수가 없었다. 일본에의 입국 수속은 간단하였으나 여기서 그동안 배운 일본어를 실습해 보는 첫 경험을 하였다.
처남의 문병을 겸하여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오는 길이라고 서투른 일본어로 답하자 여기서부터 주소가 어디냐, 전화번호가 몇번이냐, 신부의 이름이 무엇이냐 등 캐어 묻기 시작하는 바람에 일본어 회화에 미숙한 나로서는 주소를 한자로 써가면서 묻는 말에 더듬 더듬 답할 수가 있었다.
우리 일행이 입국 수속을 다 마쳤을 때 출입국관리소 직원인듯한 사람이 우리말로 수고했습니다. 잘 다녀가십시오 라고 친절하게 인사를 해 주어서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공항에는 2월 12일 결혼식에 신랑이 될 김명호군과 손자 변용석군이 자가용(구루마) 2대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 있었으므로 수화물을 나누어 싣고 고속도로를 질주하여 1시간여를 달린 끝에 東成區 中道에 있는 邊雲吉 조카의 집에 도착하였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서투른 일본어 회화를 손자들과 나누면서 제2의 회화의 연습을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동차는 우측 통행을 하는데 일본에서는 좌측 통행을 하고 있었으며 운전대가 왼쪽에 있지를 아니하고 오른쪽에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와 별다른 점을 느끼지 못하였다.
邊雲吉 조카의 집에 도착하자 우리들 일행은 큰 환대를 받았다. 한국에서 가지고 간 김치며 깻잎이며, 풋고추, 삼치 등에 자기들이 마련한 일본의 주식에 한국의 부식을 곁들인 저녁 식사를 하였고 오랫만에 만난 온 가족의 모임이어서 저녁 식사의 진미는 훨신 더하였다.
조카의 처남되는 한규택씨께서 오늘 밖에 시간이 없으며 일본에 처음으로 오셨으니 나가자고 권하여 사양을 했으나 한국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에 가서 딱 한잔만 하고 오자는 권유에 못이겨 나는 술은 못하지마는 그들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 나섰다.
택시로 한참을 달린 끝에 내린 곳은 生野區'에 있는 美都波'라는 한국사람들이 경영하는 술집이었는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비교적 큰 술집이었다. 마담이나 종업원이 모두 한국 사람들이었으며 옷도 한복을 입었으므로 일본에 온 느낌이 들지를 않았다. 손님들의 대부분도 교포이거나 제2세들이라는 사실을 마담이 알려 주었다.
여기에서 양주 한병을 마셨는데 한규택 사돈님이 카드로 이미 계산을 마치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중간에서 사돈님과는 내일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 끝에 처조카와 함께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조카에게 사돈님에게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의 처남은 동경에서 큰 공장을 경영하고 있으며 그런 정도의 지출은 큰 부담이 없는 분인데 이번에 관서지방의 대지진으로 고배에 있는 업체에 약간의 피해를 보아 오늘도 그곳에 갔다가 오는 길에 자기집에 들렸으며 자기의 딸이 결혼비용에 보태어 쓰라고 칠십만엔이나 부조를 해 줄 정도의 갑부이니 크게 걱정을 말라는 것이었다.
조카는 나에게 일본의 물가를 알려주기 위하여 그 자리에서 양주 한병과 오징어 발 몇개의 값이 78,000엔이라고 귀뜸을 해주었으니 우리돈으로 환산을 한다면 600,000원에 해당하는 큰 대접을 받은 것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11시가 되었으나 다른 식구들도 잠을 자지 않고 우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이런 저런 고향 이야기로 한창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후부터는 결혼식 준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새벽 한시가 지났다.
이튿날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우리 일행은 숙소와 불과 500m지점에 있는 대판성을 산책하였다. 큰처남 형님께서는 연령이 79세라 걸음도 잘 걸을 수 없었으며 이 공원은 여러차례 관람하였으므로 입구에서 쉬고 있겠으니 우리만 천수각까지 관광하고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입구에서 기념촬영을 한 후 형님만을 그곳에서 편히 쉬시게 남겨둔 채 공원을 산책하며 천수각을 향하여 30여분이나 걸어서 가는 동안에 3중으로 쌓인 대판성을 관람하며 천수각에 이르니 시간이 10분전 9시가 되고 있었다.
9시가 되어야 입장이 시작된다고 하므로 입장권만을 구입하고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9시 정각에 입장하여 천수각을 관람하였다.
대판성 천수각은 대판시민의 기부금에 의해 昭和 6년(1931)에 재건된 이래 대판의 거울로써 알려지고 있으며 내부에는 재건 당시부터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입장권의 안내문을 읽고 나서 실제로 관람하다 보니 당시 일본의 역사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정문 입구에서 기다리기로 한 형님께서는 일본을 여러 차례 출입하였으므로 숙소로 돌아갔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내려와 보니 그 때까지도 형님은 우리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아침식사를 마치고서 부인들은 오늘 있을 손님 접대의 준비와 내일에 있을 여러가지 준비에 착수하였으므로 나는 별로 할 일이 없어서 대판 시내를 산책하려는데 작은처남 형님의 아들인 邊雲昇군이 동행하여 안내해 주었다. 제주에서 온 조카와 함께 걸어서 森の宮' 역전까지 걸어서 가는 동안 차도와 인도의 중간에 자전거 전용도로가 있었으며 자전거 도로와 차도 사이에는 자전거가 빈틈없이 세워저 있는 것을 보니 직장에 출근할 때 자전거로 출근을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차도는 편도 3차선이었으며 지상에는 고속도로가 있었으나 길거리를 달리는 자동차가 많지 않아 한가했으며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별로 없어서 이상하게 여겨 물어 보았더니 모두 직장에 나가 일을 하지 않으면 살수가 없다는 답을 해주었다.
邊雲昇조카가 대판의 가장 중심지인 本町通'과 心齊橋'를 가보자고 제안하여 지하철을 이용하고 그곳에 가서 大丸'백화점을 구경하였고 중심상가의 길가에는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노점상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있었는데 모든 물건에 정가표가 붙어 있음이 우리와 색다른 점이었으며 물가는 환율에 관계없이 우리나라 물가와 비슷함을 알 수 있었다.
다음에는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九條'에 있는 극장에 가서 쑈를 관람하며 오후를 보내었다.
집에 돌아온 시간은 오후 6시가 넘었는데 일본에 살고 있는 고향사람들이 많이 와서 있었으며 나의 사촌 누님의 아들인 姜平松군이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를 만나보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워낙 바쁜 생활들이라 결혼식장에 가는 것이 보통인데 오늘 이집에는 고향사람들이 많이 온 것을 보니 그동안 운길 형님이 외국에 있으면서도 고향사람들의 일을 잘 돌아 본 것 같다"고 일러 주었다.
결혼식 날이 되었다. 心齊橋'에 있는 大成閣'이라는 예식장 5층에서 불교 의식에 의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결혼의식을 올리기 전에 기념촬영을 먼저 하였다.
예식장 주인과 서투른 일본어로 결혼식 의식에 대하여 물어보았더니 종교별로 차이가 있으며 오늘 올린 의식은 大阪을 지켜주는 신을 모시고 의식을 올렸다는 답을 해 주었다.
의식이 다 끝난 다음 같은 빌딩의 4층에서 피로연이 시작되었다. 하객이 약 270-280명 정도로 추산이 되었으며 음식은 8코스의 중국 음식이었다.
신랑의 할아버지와 신부의 할아버지가 이웃집에서 같이 살았던 비슷한 연배로서 마치 결혼식 피로연 장소가 아니라 일본에서 고산리 향우회를 하는 기분으로 진행이 되었다.
친족들도 나와서 축하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면서 한국에서 온 나도 소개를 받았다. 나는 그자리에서 일본에 살고 있는 처음으로 뵙는 재일동포들에게 우리말로 인사를 올렸으며 그 자리에 참석한 교포 2세와 일본 사람들을 위해서는 서투른 일본어를 가지고 간단한 인사를 올릴 수 있었다. 나는 이자리에서 60년전에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피로연장에는 옷걸이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처음 들어가면서는 한쪽에는 옷을 진열하여 파는 곳인가 착각하였다. 피로연은 12시부터 시작하여 오후 3시까지 진행되었으므로 장장 3시간이 소요된 셈이다. 피로연은 약간 호화판이라는 생각이 들어 궁금한 나머지 카운터에 가서 조용하게 물어 보았더니 내입금으로 3,000,000엔을 미리 받았다고 답해 주었다.
피로연이 끝나자 곧장 숙소로 돌아와 岐阜'시에 살고 있는 두번째 처남 邊奎奉 형님의 문병을 가야 했다. 岐阜'에 살고 있는 아주머니께서는 병중에 계신 형님 때문에 오늘에야 결혼식장에 참가한 끝에 우리들을 기후까지 안내 해 주었다. 신대판까지는 자가용 두대를 활용하였고 신대판에서는 일부는 자가용으로 일부는 열차편을 이용하였다. 岐阜는 초특급인 히카리(ひかり)호는 정차역이 아니므로 고다마(こたま)호라는 특급을 이용하여 1시간 10분을 달렸다.
기후역에서 내린 우리들은 대판으로 내려갈 때 역전에 세워 둔 자가용과 대판에서 올라온 자가용이 다시 합류하여 30분정도의 아스팔트 길을 달려서 작은 처남이 살고 있는 加納龍興町'에 도착하였다.
작은처남 변규봉형님은 우리가 결혼하기 이전에 이미 일본에 건너가서 살았었으며 들은 바에 의하면 장인어른을 닮아 체구가 큰 편이며 성격도 활달하였는데 일본에 건너가서는 양복점을 경영하며 재산을 증식하여 집도 두 채나 있고 7남매를 낳아 다복하게 살았었으나 체중이 100KG을 넘어 건강에 약간 걱정을 하고 있던 어느날 갑자기 고혈압으로 쓰러지셔서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주머니의 정성어린 간호로 그런대로 회복이 되어 10여년전에는 고향에 다녀간 적이 있는데 이때 처음으로 처남매부가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 후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고향에 못 오게 되자 자주 누이동생들을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5년전부터는 의식은 있으나 말을 제대로 못하는 중병 환자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동안 보고싶어 하던 4남매의 내외가 일본땅에서 상봉을 하였으나 한사람은 침대에 누워 말도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려야 했으니……. 한참동안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대판의 결혼식 집에서 가지고 온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새벽 1시가 넘고 말았다.
무거운 돌이면 힘을 모아 들기나 하지만 그럴수도 없는 우리들로서는 안타까운 마음만을 남긴 채 이튿날 아침 열차편으로 다시 오사까로 돌아와야만 했다.
加納龍興町'에서 岐阜'驛까지 자가용으로 오는 길은 거의가 농촌길이었으며 두군데의 공동묘지를 볼 수 있었는데 모두 부락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무덤은 보이지 않고 비석만 세운 것으로 미루어보아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고 비석만을 세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판에서는 우리들 일행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邊雲吉 조카의 내외는 고모님 두분과 나는 일본에 처음으로 왔으므로 京都'나 奈羅'가운데 한 곳을 관광하고 가라는 권유에 따라 전철을 이용하여 1시간정도 소요되는 奈羅'를 관광하였다. 奈羅'시는 전체가 모두 관광지였으며 東大寺공원'과 東大寺'를 관광하였는데 특히 공원에 사슴이 방목되어 있어서 관광객들에게 먹을것을 달라고 쫓아 다니는 것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숙소에 돌아오고 보니 조카의 처 한명순은 우리들을 내일 한국으로 귀국시키기 위하여 정성어린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일본에 4박하는 동안 육고기라고는 한번도 먹지를 않고 된장국만을 찾은 내자를 위하여 일본된장을 마련해 있었고, 참기름과 쇠꼬리를 사다가 동물방역에 걸릴세라 반숙을 시켜 두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일본을 다녀 오면서 배운 것은 아는 길도 물어 가자', 80이 되어도 다못 배운다' 라는 것이고 서툴지만 틈틈이 공부한 일본어 회화를 실습할 수 있어 가슴뿌듯한 여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에 4박하는 동안 친족집에 기거하였으므로 일본의 식사문화와 숙박영업에 대해서는 체험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귀국하는 날이 되었다. 14일 오후 2시 20분 오사까 간사이국제공항을 출발하여 3시 50분에 부산국제공항에 도착하고 동경에서 부산을 경유하여 제주로 오는 항공편이 도착할 때까지 면세점을 돌아보며 쉬다가 부산국제공항에서 4시 50분에 출발하는 KE 713편으로 5시 35분에 제주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귀국하는 길은 주간이었으므로 오사까(大阪)의 간사이(關西)국제공항을 자세하게 관람할 수 있었는데 이 공항은 바다를 메워 인공섬을 만들고 공항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안내 간판을 보고 확인할 수 있었으며 1994년 9월에 개항한 규모가 큰 공항이었다.
일본의 물가와 우리나라의 물가는 환율에 관계없이 우리나라 물가와 비슷한 것이 많았으며 참고로 이번의 여행중에 내가 겪은 물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하철의 기본요금은 210엔, 천수각의 입장료는 500엔, 택시의 기본요금은 560엔, 이발료는 3,300엔, 쑈의 입장료는 5,000엔, 신대판에서 岐阜까지의 특급열차의 요금은 4,840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