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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사자료모음 스크랩 大唐故金氏夫人墓銘과 김씨계보
봄설 추천 0 조회 93 13.09.12 14:4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는 4월 22일 1954년 중국 섬서성 서안시 동쪽 교외 곽가탄이란 마을에서 출토되고, 1980년대 이후 중국에서 간행된 각종 금석문 자료집에 탁본 혹은 활자본 형태로 수록되어 널리 소개되어 온 대당고금씨부인묘명을 연구한 글을 발표하였다. 이 묘의 주인공은 당나라 함통 5년(A.D 864년) 5월29일에 32세로 사망한 신라인 김씨부인이다. 이 묘지명에는 신라 김씨의 시조에 관한 문구가 들어있어 문무왕비문과 함께 주목을 끈다.

 

권덕영 교수가 번역한 묘지명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 지계양감 장사랑 시어사 내공봉 이구의 부인 경조 김씨 묘지명과 그 서문. 향공진사 최희고가 비문을 짓고 한림대조 승봉랑 수건주장사 동함이 지문과 전액을 쓰다.

 

태상천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김)일제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그를 발탁해 시중과 상시에 임명하고 투정후(투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漢)이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에 숨어 살게 되었다. 문선왕(文宣王.공자의 시호)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에는 성실함과 신의가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독실하고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비록 오랑캐 모습을 했으나 그 도(道)를 역시 행하니, 지금 다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번성했다.

 

부인의 증조는 이름이 원득(原得)이시니 황실에서 공부상서에 추증되셨고, 할아버지는 성함이 충의(忠義)시니 한림대조 검교좌산기상시 소부감 내중상사라는 벼슬을 지내셨다. 아버지는 성함이 공량(公亮)이시니 한림대조 장작감승 충내작판관을 역임하셨다. 조부께서는 문무의 예리함에 여유가 있어 평자(平子.유명한 천문학자)를 궁구하여 관상의 규모를 관찰하셨고, 공수자(저명한 기술자)를 궁리하여 신과 같은 기술을 갖추셨다. 이에 기예로 천거받아 그문(황실 혹은 조정)에 들어가 여섯 조정을 섬겨 봉록과 직위를 갖고서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한 삶을 살다 아름답게 마치셨다.

 

(이구의) 전 부인은 농서 이씨로 대대로 벼슬한 든든한 집안 출신이다. 그리고 부인은 판관의 둘째 따님으로 유순하고 곧은 마음은 날 때부터 스스로 그러한 품성이었고, 여성으로서의 일솜씨와 부녀자의 도리는 옛날 일로부터 스스로 힘써 부지런히 배운 바다. 이씨 집안에 시집감에 이르러 중외(中外) 친척들이 모두 현명한 부인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부인에게는 뒤를 이을 자식이 없어 전 부인이 낳은 세 아들을 기르고 훈육하니 친자식보다 더했다. 장차 선행을 쌓아 넉넉한 보답을 받으려고 기약했으나, 어찌 천명(天命)을 일일이 헤아려 길고 짧음의 운명을 정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연이어 병을 앓아 무당과 편작(扁鵲) 같은 의원도 병을 다스리지 못하다가 함통(咸通) 5년(A.D 864년) 5월29일 영표(嶺表.지명)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32세다.

 

단공(端公. 시어사의 별칭으로 여기서는 김씨 부인의 남편)은 지난날의 평생을 추모하여 신체를 그대로 보전하여 산을 넘고 강 건너기를 마치 평평한 땅과 작은 개울 건너듯 하며 어렵고 험함을 피하지 않고 굳은 마음으로 영구(靈柩)를 마주 대하며 마침내 대대로 살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맏아들 경현(敬玄)과 둘째 아들 경모(敬謨), 그리고 다음 아들 경원(敬元)은 모두 슬퍼하며 몸과 얼굴이 바짝 여위고, 멀리서 영구를 모시고 따르며 한없이 슬피 울부짖었다. 경현 등이 남은 수명을 겨우 부지하며 삼가 예문을 갖추어 함통 5년 12월7일에 영구를 만년현(萬年縣) 산천현(산川鄕) 상부촌(上傅村)으로 옮겨 대대의 선영(先塋) 묘역에 안장했다.

 

부인의 숙부는 한림대조로 앞서 소왕부를 지냈고 친형은 수우청도솔부병조참군이니 연이어 나란히 조정에 벼슬하며 가문의 업을 이었다. 나 최희고(崔希古)는 부인의 형과 오랜 친구 사이로 죽은 이의 지난 일을 슬퍼하는 글을 짓고 명문(銘文)을 청하므로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하늘과 땅이 인자하지 못하여 도균(陶鈞.부모)보다 먼저 돌아가시니, 누가 옳고 누가 그르며 소원함도 없고 친함도 없도다. 쌓은 선행 누리지 못하고 대명(大命)은 영원하지 않으니, 어찌 그 훌륭함이 오직 뛰어난 성인만이겠는가? 이 짧은 세월을 만나 태산에 노닐고 진령(秦嶺)을 건너 다녔도다. 대도(大道)는 오로지 만물의 변화를 좇아 함께 할 뿐이로다.]

 

위 문구를 읽어보면, 김씨 성은 소호씨금천에서 시작되어 여러 유파가 갈라졌는데, 김씨 부인이 속한 김씨는 먼조상이 흉노 조정에 몸담고 있다가 전한에 투항한 김일제라고 적혀 있다. 즉 김씨 부인의 먼 조상인 김일제는 원래부터 소호씨금천의 후예인 김씨가 아니고 흉노계였는데, 전한 무제 아래서 벼슬을 하면서 무제로부터 김씨 성을 하사받은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비문에도 김일제가 김씨의 조상이라고 적혀 있다.

 

[아래는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Ⅱ(1992)에서 인용한 것임].

 

[전면]

<1행> … 국 신라 문무왕릉의 비이다. 급찬(及?)인 국학소경(國學少卿) 김▨▨(金▨▨)가 교(敎)를 받들어 찬하다.

<2행> … 하늘을 짝하여 사물을 잘 다스리고, 땅의 경계를 구분하며, 덕을 쌓아 …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하고, 신에 응하여 …

<3행> … 경진씨를 파견하여, 삼산의 궐(闕)을 비추고, 동으로는 개오(開梧)의 지경을 막고, 남으로는 ▨계(▨桂)의 ▨과 이웃하고, (북으로는) 황룡을 맞아 주몽(朱蒙)을 태우고, … 백무(白武)를 이어 받아 …을 우러르며 …

<4행> … 그 능한 바를 다 잘하여 이름과 실제가 다 이루어지고, 덕과 지위가 겸하여 융성해지니, 땅은 8방(八方) 먼 곳까지 걸쳐 있고, 그 훈공은 삼(한)(三(韓))에 뛰어나, 그 높고 넓음을 다 일컬을 수가 없는 분이 우리 신(라) …

<5행> …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지(▨枝)가 영이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투후(?侯)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 하였다.

<6행> … 15대조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 ▨▨을 개창하여 옥란(玉欄)을 대하니, 비로소 조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처럼 많아 석뉴(石紐)를 보고 금여(金輿)에 앉아 … 하는 것 같았다. …

<7행> … 대왕은 생각하심이 깊고 멀었으며, 풍채가 뛰어났고, 도량은 하해와 같았으며 위엄은 우뢰와 같았다. … ▨은 바야흐로 자취를 거두고 봉화는 멎고 척후는 파해지니, 만리의 맑은 기운은 부지런히 … 를 열었다. …

<8행> … 간▨(簡▨)의 덕에 내외가 평화로워지고, 광대한 기풍에 원근이 편안하고 깨끗해지니, ▨공(▨功) 성▨(盛▨)은 장래에 … 하고, 쌓이고 뭉친 순수함과 곧음은 후예들에게 넉넉함을 드리워 주었다. …

<9행> … ▨▨사회(▨▨舍誨)는 곧 성철(聖哲)의 뛰어난 모습이라, 은혜로써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너그러움으로써 사물을 다스리니, … 한 자는 그 시기를 알고, 덕을 이어받은 사람은 모두 그 이웃을 알아보니, 그 명성이 한하(閒河)에까지 넘쳤다. …

<10행> … ▨봉(▨峯)을 ▨하여 ▨간(▨幹)하고, 5백년을 기약하여 큰 명을 내려주니, 거하면 모두 … 함을 얻었고, … 비춤은 단부(丹府)에 거의 가까웠다. 의(義)는 성(性)에 부합하여 일어나고, 깊은 정은 … 을 살펴 …

<11행> … 바탕을 돕고, 정(情)의 근원은 맑디맑아, 삼키어 받아들임은 금▨(襟▨)에 ▨하였다. … 하시는 말씀은 규범을 이루고, 용모와 행동은 가히 볼 만하였으며, 학문은 고(금)을 두루 통하였다. …

<12행> … 시(詩)와 예(禮)의 가르침에 … (하고), 주나라는 교재(橋梓)의 ▨에 경의를 표하였다. … 당나라 태종문무성황제(太宗文武聖皇帝)가 사직의 ▨에 응하여 …

<13행> … 임금이 돌아가시고 풍악은 멎었다. 무진 이후에 …

<14행> … 순(舜)임금은 바다와 같이 덕을 내려도 절현(截懸)이 있었고, 요(堯)임금은 해와 같이 밝게 비추어도 은▨(垠▨)이 없었다. …

<15행> … 빛나고, 구렬(九列)은 천부(天府)를 관장하여 …

<16행> … 천사(天使)도 감통(感通)시켜 그 재앙을 그치게 하니, 편안하고 쉽게 건너 …

<17행> … 이웃나라와의 우호를 어기고자주 이쪽 저쪽으로 붙으려 하면서, 겉으로는 …을 믿는 척하니

<18행> … (소정방을) 웅진도행군대총관(熊津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군왕(君王)을 …

<19행> … 황산(黃山)에 군진을 펼치니, 적들이 고슴도치와 올빼미처럼 모여들어(진군을) 가로막고자 하였다. …

<20행> … 적의 수도(首都)에 이르자그 우두머리가 군문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고, 그 좌리(佐吏)들도 …

<21행> … 삼년이었다. 용삭(龍朔) 원년(元年)에 이르러 …

<22행> … 보배로 여기는 바는 오직 어진 사람이니, 선(善)을 행함을 가장 즐거워하고, 인(仁)을 ▨함을 

<23행> … 조야(朝野)가 모두 즐거워하니, 굳이 애써 행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

<24행> … 진백(秦伯)의 터전를 다시 일으켰다. …

<25행> … 교화가 북으로 읍루(?婁)에까지 접하니, 벌떼처럼 …

<26행> … 군왕에게 조서를 내려, 사지절(使持節) … 으로 봉하였다. …

<27행> … 군(軍)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니, 깃발이 …

<28행> … 꾀는 손을 뒤집는 일처럼 쉽게 나왔는데, 절묘하기가 …

 

[후면]

<1행> … 환산(丸山)에 공(功)을 기(紀)한 장수가 있어 …

<2행> … 곧바로9주를 일광(一匡)하고 동정서벌(東征西伐)하여 …

<3행> … 궁 앞채에서 돌아가시니, 그 때 나이는 56세였다.

<4행> … 땔나무군이나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 부르고, 여우가 그 옆에 굴을 뚫을 것이니 …

<5행> … 화장(火葬)을 하라 하니, 그달 초열흘에 화장하여 …

<6행> … 천황대제(天皇大帝)께서 …

<7행> … 왕례(王禮)에 맞았다. 군왕(君王)은 국량(局量)이 …

<8행> … 나라를 … 하는 방법에 (부합하였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심은 8정(八政)의 ▨과 같았다. …

<9행> … 돌아가시니, 참으로 백대(百代)의 현왕(賢王)이시요, 실로 천(千)(古의 성스러운 임금이셨다.) 

<10행> … 맑고 아름답기선비 같으시고, 삼언(三言)을 빌지 않아도 준▨(駿▨)을 알았다. …

<11행> … 못을 여니 호량(濠梁)을 방불하였고, 비단과 돌을 펼쳐 …

<12행> … 손님이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안개처럼 모여 들니, 이를 말하여 아침에 많고 …

<13행> … 묘(昴)에 들어가서는 돌아감을 잊으시고, 웅(熊)을 맞추시고도 돌아가지 않으셨다. 태자 계(?) …

<14행> … 단청(丹靑)은 기린각(麒麟閣)에 흡족하고, 서책은 운대(芸臺)에서 닳고 헤어졌다.

<15행> … 삼가 절을 드리고, 이만 그치며 명(銘)을 쓴다.

<16행> … 천 갈래의 가지가 되어, 삼산에까지 뻗어 비치네. 아름답고 성한 덕은 멀리 …에 전해져 …

<17행> … 진실로 무용(武勇)하시고 진실로 대덕(大德) 있으시고, 다재다예(多才多藝) 하였네. 아랫사람을 생각하여 거머리마저 삼키시고,

<18행> … 아홉 번 정벌하고, 친히 삼군을 통솔하시어 … 위엄과 은혜는 혁혁히 빛나, 저 아득히 먼 옥저(沃沮)와 예(濊)까지 찾아와 역(役)을 청하였네. 잠동하던 …

<19행> … 풍교를 흠모하여, 단증(丹甑)이 여러 번 나오고, 황▨(黃▨)이 하늘을 진호하였도다. … 적오(赤烏)가 재앙을 나타내고, 황웅(黃熊)이 우러름을 표시하니, 갑자기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홀연히 

<20행> … 참됨으로 응집하게 하시고, 도(道)는 귀하게 몸은 천하게 여기셨네.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하여, 장작을 쌓아 장사를 지내니 … 경진(鯨津)에 뼈가루를 날리셨네. 대를 이은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여, 마음에서 우러난 효성과 우애가 …

<21행> … 크나큰 이름, 하늘과 더불어 길고 땅과 더불어 오래리 …

<22행> … 25일에 대사(大舍) 신(臣) 한눌유(韓訥儒)가 임금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쓰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Ⅱ(1992)]

 

위 문무왕비문에는 신라 김씨의 계보가 [화관지후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투후제천지윤이 7대를 전하여..], [15대조 성한왕은..]으로 적혀 있다.

 

화관지후는 고대에 불(해와 달)에 대한 제사를 주관한 왕이다. 고대에는 천제의 아들을 칭하는 자만이 불(해와 달)에 대한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화관지후는 특정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고 해와 달에게 제사를 지낸 임금이이다. 따라서 화관지후는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므로 화관지후가 김씨 성의 시조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김일제는 흉노에서 전한(前漢)에 귀부하여 무제(武帝)로부터 김씨 성을 하사 받았으므로 원래 조상이 김씨가 아니다. 앞에 나온 김씨부인 묘지명에는 김씨의 시조가 소호씨금천이라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신라인들은 스스로 소호 금천씨의 후예라고 생각하여 성을 김이라 한다고 하였고, 유신의 비문에도 "헌원의 후예이며, 소호의 종손"이라 하였으니, 남가야 시조 수로도 신라와 동성이다.]

 

김일제가 무제(武帝)로부터 김씨 성(姓)을 하사 받을 때 한나라에는 이미 김씨라는 성이 있었고, 대당고김씨부인묘명으로 보아 당시 중국의 김씨들은 자신들의 시조를 소호금천씨로 믿고 있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김일제의 후손이 7대를 한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한나라가 어지러워 졌을 때 요동으로 이주하여 살다 아마도 후한 때 나라가 안정된 후 중국으로 돌아갔지만 일부는 신라나 가야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김씨의 조상으로 김일제가 나오고, 문무왕비문에 김씨의 선조로 김일제가 나오는 것은 후에 삼국을 통일한 후 신라 또는 금관가야의 김씨계가 世系를 미화하기 위하여 중국의 김씨 성을 하사 받은 김일제를 신라나 금관가야 김씨의 먼 선조로 끌어오고, 또 혈연상으로 아무 관계도 없는 소호금천씨를 김씨계의 시조로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선우씨, 기씨, 한씨가 그 선대를 마한, 기자조선, 은나라 순서로 거슬러 올라가 이 3성의 시조를 은나라 개국 시조 탕왕(湯王)을 내세운 것이나, 고구려가 고신씨를 시조로 내세운 것 등과 일맥 상통한다.

 

이런 식의 세계 미화 방법은 모화사상이 강한 시기에 만들어진 사서나 세보에 흔히 보이는 것으로, 이것을 보고 금관가야의 김씨나 신라 김씨는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 가능성이 많다. 어떤 가계의 세보를 가지고 신라 왕통을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다. 따라서 비문을 참고하더라도 먼저 사서 문구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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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3.09.13 15:22

    첫댓글 유익한 자료다. 산동반도에 진출한 대표적인 동이족이 태호족(태호복희씨)과 소호족(소호김천씨후손들)이라고, 중국의 석학 부사년은 <이하동서설>에서 분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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