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김대중대통령시대의 정치상황
1997년 12월 18일의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국민회의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김대중총재는 1999년 말까지 의원내각제로 개헌할 것을 약속하고 자민련대통령후보 김종필총재와 이른바 'DJP연합'을 성사시켜 유효투표 40.3%의 득표로3)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우리 헌정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의한 여야정권교체가 실현된 것이다.
김대중대통령으로서는 네 번째 도전해서 대통령이 된 것이다. 김대중대통령은 1998년 2월 25일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함으로써 스스로국민의 정부'(National Government)임을 자처하는 제6공화국 제3기정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김대중대통령은 정권인수 당시의 외환위기(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잘극복했다. 2000년 6월에는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실현시켜 남북정상간에 '6·15남북공동선언'1에 합의했다.
이른바 '햇볕정책'으로 불려지는 대북지원정책을 펴서 한반도의 긴장완화에 기여했다. 그 결과 김대중대통령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200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김대중대통령은 집권초기에 국무총리 내정자 김종필 자민련총재가 야당의반대로 국회의 임명동의를 받지 못하자 그를 국무총리'서리'로 임명해서 몇달간 국무총리의 직무를 수행하게 함으로써 국회의 동의를 받아 국무총리를 임명하도록 정한 헌법정신을 어겼다.
그 후 야당의원을 회유해서 36명을 무더기로여당에 영입하는 방법으로 여소야대의 국회구도를 인위적으로 여대야소로 바꾸어 대의민주정치의 기본정신을 외면했다. 대통령선거 당시 집권의 수단으로 국민에게 약속했던 의원내각제 개헌공약(이른바 'DJP협약)은 1999년 7월 파기된채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재벌·금융개혁의 수단으로 추진된 기업과 금융기관의 “빅딜(사업교환)정책은 부분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실업자의 양산과 엄청난 공적자금의 낭비2) 등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나아가 가신정치로 인해서 권력형 부정부패가 기승을 부리고, 세 아들이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사법처리되는”등 김대중대통령 집권기간 동안 부정부패가 극심했다.2) 권력형 부정부패는 검찰이 제구실을 못하고 정권의 시녀로 역기능하는 바람에 더욱 심화되었다.
3)또 국가의 주요 공직과 공기업을 비롯한 사회 각 분야에 호남지역출신을 우대하는 지역편중인사를 펴는 바람에 동서간의 지역갈등이 오히려심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나아가 철저한 검증과 사전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경솔하게 밀어부친 교육정책(획일적인 평준화정책 및 교원정년단축 등)과 의료정책(의약분업)은 우리의 공교육을 붕괴시키고 사교육비용을 증가시켰으며 국민들이 받는 의료서비스만 악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 무리한 복지예산의 증가로국가채무가 두 배 이상 늘어나4) 국가재정을 악화시켰다. 그에 더하여 언론기관에 대한 국세청의 비정상적인 특별세무조사와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치 등은 특히 정부에 비판적인 주요신문에 대한 언론탄압의 인상을 주어5 우리의 언론자유에 대한 국제적인 평가를 나쁘게 만들었다.
그리고 국가정보원이 중심이 된 정치인과 언론인 상대의 갖가지 도청의혹으로 인하여 일반국민들 사이에서도 도청공포증이 확산되면서 이른바 '도청공화국'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김대중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으뜸으로 사면권을 남용해서 부패와 비리로 사법처리된 사람들을 원칙 없이 특별사면·감형·복권시키고 교통법규위반자들의 벌점을 감면해 줌으로써6 법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국민들 사이에 도덕적해이를 부추겨 법질서확립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김대중정부의 실정과 인사비리 그리고 권력형 부정부패 등 국민을 실망시킨 국정운영은 2000년에 실시된 중간평가적인 총선에 영향을 미쳐 '4·13' 제16 대 국회의원총선거에서 2년여 동안 DJP연립정부를 구성했던 민주당”과 자민련이 패배하고 야당인 한나라당이 국회 다수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특히 자민련은 선거전략으로 총선 직전인 2월에 공동여당포기를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총선거에서 원내교섭단체조차 구성하지 못할 정도로 그 세력이 현저하게 약화되었다.2) 그뿐만 아니라 2002년 6월에 실시된 지방자치선거에서도 여당인 민주당이 전국에서 참패하는 선거결과3를 초래했다.
김대중대통령은 측근 실세들을 표적으로 한 민주당 내의 정풍압력이 커지자 2001년 11월 당 총재직을 사퇴했다. 김대중대통령은 아들들의 사법처리 등으로 임기 말에 그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그가 지명한 두 명의 국무총리서리가 잇달아 국회의 임명동의를 받지 못해 한 달도 못 채우고물러나는 사태가 발생했다.
김대중정부 5년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남북정상회담 실현과 그 후의 남북교류 및 2002년 월드컵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들 수 있다.
그러나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대북정책을 통한 금강산관광 등 남북교류와 대북경제지원을 실천하면서 국민여론과 상호주의원칙을 무시하고 북한에 대한 일방적인 지원에만 치중한 나머지4) 대북정책을 둘러싼 국민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른바 남·남갈등)을 격화시켜 국민통합에 역행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더욱이 임기 말에 불거진 5억달러 대북뒷거래사건에 대한 특검의 수사결과 정상회담의 대가성이 일부 입증됨으로써5) 김대통령이 추진한 '햇볕정책'의 의미가 크게 빛을 잃었다. 그리고 김대통령의 대북정책은 미국 부시(Bush)정권과의 외교적인 긴장관계를 조성하기도 했다.
불편한 한·미관계는 2002년 10월 북한의 공식적인 시인으로 표면화된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한·미간의 시각 및 대응책의 차이로 인해서 김대중대통령의 임기 말에 더욱 악화되었다.
김대중대통령은 김영삼대통령에 이어 또 하나의 실패한 민선대통령으로서 2003년 2월 24일 그의 5년 임기를 마침으로써 이른바 '3김시대'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