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대구의 대표적 유학자 모당 손처눌과 황금동 일직손씨
글·송은석
(대구시청년유도회 사묵구장,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비조 손응, 시조 손세경
보학(譜學·종족의 계보를 연구하는 학문)용어 중에 ‘비조(鼻祖)’와 ‘시조(始祖)’라는 것이 있다. ‘그 종족의 시발점으로 인정되는 조상’이라는 개념으로 흔히들 통용해서 사용한다. 그러나 보학에서는 엄격하게 구별되는 용어이다. 시조는 말 그대로 ‘맨 처음의 조상’을 일컫는 말이다. 비슷한 것으로는 기세시조(起世始祖·1세조를 말함)라는 용어도 있다. 한편 비조는 시조 이전의 선대조상 중에서 가장 높은 조상을 이르는 말이다. 앞서 ‘맨 처음의 조상’을 시조라고 이미 말했다. 그런데 시조이전의 선대조상을 운운하며 다시 비조라고 하니 좀 의아해할 수 있다. 이를 이해하는데 좋은 예가 하나 있다. 바로 대구 황금동의 일직손씨 문중이다.
일직손씨의 유래를 두고는 몇 가지 설1)이 있으나, 종합해보면 일직손씨의 비조는 나말여초의 인물로 본래의 이름은 ‘순응(荀凝)’이었다고 한다. 그는 고려조에 와서 ‘손씨’ 성을 사성(賜姓·왕명으로 받음) 받음으로써 ‘순응’에서 ‘손응(孫凝)’이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비조인 손응 이후 ‘손세경(孫世卿)’이라는 인물까지의 계대(系代·대가 이어져 내려옴)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직손씨는 계대가 명확한 손세경이라는 조상을 ‘일직손씨 1세’로 보고 세대를 이어오고 있다. 이런 연유로 해서 손세경은 일직손씨의 시조가 되고, 손응은 비조로 상정되는 것이다. 일직이라는 본관은 고려조 충목왕 때 정평공(靖平公) 손홍량(孫洪亮)이 복주부원군(福州府院君)에 책봉(冊封)된 것에서 유래가 되었다. 참고로 일직은 안동의 속현이며, 복주는 안동 땅의 옛 이름이다.
득관조 손홍량
득관조(得貫祖)는 최초로 본관을 얻은 선조라는 의미이다. 일직손씨 득관조는 4세 손홍량(孫洪亮·1286-1378)인데 그의 시호는 정평(靖平)이요, 호는 죽석(竹石)이다. 추성보절좌리공신 삼중대광판삼사사(推誠保節佐理功臣 三重大匡判三司事)로 직성군(直城君)과 복주부원군(福州府院君)을 역임한 인물이다. 1361년(공민왕10)에 일어난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고려 공민왕(恭愍王)은 손홍량의 고향인 복주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당시 손홍량은 벼슬을 마치고 귀향한 지 11년이요, 나이는 75세였다. 하지만 그는 노구(老軀)를 이끌고 다시 임금을 모시며 충절을 다했다. 난이 평정되고 난 후 그 공로가 인정되어 공민왕으로부터 ‘정평(靖平)’이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또한 「子誠一直人老而益壯(충정이 하나같이 곧은 사람이 늙을수록 그 마음이 더하도다)」라는 공민왕의 어시(御詩)와 함께 왕이 손수 그린 초상화와 지팡이도 하사받았다. 손홍량은 1378년(우왕4) 92세로 졸하였으니, 고려의 여섯 임금을 모신 고려 최장수 명신으로도 손꼽힌다. 최근 안동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실경 뮤지컬 ‘왕의 나라’에서는 이러한 스토리를 중심으로 손홍량의 활략을 매우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대구 입향조 손세경2),
1세 손세경(孫世卿) 이래로 안동의 일직은 일직손씨의 세장지지(世葬之地·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종족의 마을)가 되었다. 이후 7세 ‘손관(孫寬)’이 일직을 떠나 경남 밀양의 다원(茶院)으로 이거했다. 대구로의 입향은 손관의 현손인 ‘11세 손세경(孫世經)’에 의해 비로소 이루어진다. 손세경은 자신의 외조부인 부사 주계숙(朱繼叔)의 외손봉사를 위해 밀양에서 대구로 이거해 온 것이다. 그가 처음부터 지금의 황금동에 터를 잡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가창→파동→수성에서 우거(寓居·잠시 머무름)를 하다가 손세경의 증손인 손처눌 대에 와서 지금의 황금동에 세거지를 마련한 것이다. 우리는 이쯤에서 조선 중기 대구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큰 스승이었던 ‘모당 손처눌’에 대해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황금동 입향조 손처눌 그리고 손린
손처눌이 일직손씨 ‘황금동 입향조’가 된 내력은 이러하다. 모당의 증조부인 손세경이 가창→파동→수성에 우거하고 있을 즈음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때 모당은 양친상(兩親喪·부모의 상)을 당했지만 난 중이라 상례를 제대로 치룰 수가 없었다. 난이 끝나자 모당은 그때의 통한을 가슴에 품은 채 부모의 묘소가 있는 황금동으로 이거한다. 그리고는 이곳에서 종신토록 여묘살이를 하겠다는 의지로 ‘영모당(永慕堂)’이라는 집을 짓고 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황금동 세거지의 시작이다.
손처눌(孫處訥·1553-1634)의 자는 기도(幾道), 호는 모당(慕堂)이다. 「단종절의신(端宗節義臣)」인 격재 손조서의 6세손이자, 대구입향조 손세경의 증손이다. 일찍 벼슬의 뜻을 접고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등과 사우지교(師友之交)를 맺으며, 영남 성리학의 대가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창의(倡義·八公山倡義)하여 의병대장으로도 맹활약을 하여 대구 수호에 큰 공을 세웠다. 이에 당시 초유사(招諭使·난이 있을 때 백성을 계도하는 임시 벼슬)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은 「孫某는 眞義將」이라며 격찬을 했다. 임난 후에는 향교가 황폐해지자 향인(鄕人)을 독려하여 대구향교를 재건하는데 앞장섰으며, 도유사(都有司)3)로도 12년간을 재임했다. 또한 제생강학지규(諸生講學之規·유생들이 지켜야할 규범)를 정하여 ‘영모당(永慕堂) 강회’를 크게 여니 대구지역에서 모인 자가 무려 200여인이 넘었다. 그래서 당시 지역의 군자(君子)와 명유(名儒)가 다 공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고 한다. 1611년(광해군3년) 래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회퇴변척소(晦退卞斥疏)」 사건에 격분하여, 종숙(從叔)인 문탄(聞灘) 손린(孫遴)과 함께 「부정척사문(扶正斥邪文)」을 지어 사림에 통고한 일도 있다. 또한 그는 명망있는 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제들에게 직접 농사법을 가르치고, 인근에 청호지(靑湖池)를 축조하는 등 농업발전에도 심혈을 기울였던 인물이었다. 현재 황금동 청호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모당선생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종숙이 되는 문탄 ‘손린’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손린(孫遴·1566-1628)의 자는 계진(季進), 호는 문탄(聞灘)이다. 한강과 우복의 문인으로 삼장장원4) 으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박사(博士)·예조정랑(禮曹正郎)을 지냈다. 정묘호란(1627·인조5)이 일어나자 우복의 천거로 의병장이 되어 큰 공을 세웠다. 종질인 모당과 함께 「부정척사문」을 통고한 일로 내암 정인홍에 의해 「유안십재(儒案十載·유생 명부)」를 삭탈 당했으나 인조반정 이후 신원되었다. 황금동과는 지척의 거리인 대구시 상동의 봉산서원(鳳山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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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당의 손자 손홍주 후손들의 세거지 도동문중
대구시 동구 도동 ‘백원서원’ 골짜기 안에는 일직손씨 ‘도동문중(道洞門中)’의 묘소재실인 「추보재(追報齋)」가 있다. 문중의 선영과 재실이 함께 있는 곳이니만큼 이곳 역시 일직손씨 세거지인 것은 당연지사이다. 일직손씨 도동문중은 모당의 손자인 ‘손홍주(孫弘胄)’가 황금동에서 그의 외가인 이곳 도동으로 이거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대구입향조인 11세 손세경으로 부터 도동입향조인 16세 손홍주까지의 세계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세경(11世)→→→◾처눌(14世)→→→◾첨(15世)
【대구입향조】 【황금동입향조】 ◾잠(15世)→◾영주(16世)
◾처약(14세) ◾침(15世) ◾광주(16世)
◾홍주(16世)【도동입향조】
‘모당 스타일’
조선 중기 우리 대구지역에서 살다간 선조들의 문집을 들추어 보면 서두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이 있다. ‘한강, 여헌, 낙재, 모당’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이른바 대구지역의 유풍(儒風·유학의 문화)에 속칭 대박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인물들이다. 이전까지 침체를 거듭하던 대구의 유풍이 이들을 시발점으로 하여 비로소 화려한 꽃을 피워냈기 때문이다. 최근 한류의 바람 속에서 ‘강남스타일’로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싸이’는 이제 만국공통의 ‘keyword’가 됐다. 대구의 일직손씨 모당파 파조인 모당 손처눌은 조선 중기 우리지역의 유풍을 드높인 유류(儒流)스타였다. 또한 그로부터 시작된 대구의 유풍은 450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대구에 세거하고 있는 문중들을 중심으로 지켜지고 있다. 이러한 손모당의 유풍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면 큰 실례가 될까?
우리 대구의 유풍은 ^^모당 스타일^^
※참고로 청호서원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은 다음을 클릭하시면 연결됩니다.
'5. 【청호서원】(일직손씨) 조선중기 대구 동부지역 최고의 사립대학'
☞ http://cafe.daum.net/3169179/Dbvq/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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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첫째, 시조 孫凝의 본래 이름이 筍凝이었는데 고려태조가 孫氏로 賜姓했다는 설.
둘째, 戊午譜東國輿地勝覽에서는 신라 昔氏王 때 筍凝에게 손씨를 사성했다는 설과 고려 顯宗의 諱가 詢이어서 避諱하여 孫으로 고쳐 사성했다는 설.
셋째, 甲子譜와 「靖平公 遺墟碑」에서는 손씨는 본래 순씨인데, 신라 일직사람으로 고려 현종 때 손씨로 사성되었다는 설.
2)참고로 시조와 대구입향조의 이름은 음은 같으나 한자가 서로 다르다.
3)향교, 서원, 종중 등에서 사무를 맡아 보던 우두머리.
4)三場壯元:소과와 대과의 「초시·복시」는 다시 각각 ‘초·중·종장’으로 나누어 시험을 보는데, ‘초·중·종장’의 시험에 연달아 장원을 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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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석(유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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